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08.27 슈투트가르트~1831.11.14 베를린)
- 독일의 철학자-
초기생애
헤겔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로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에게 라틴어를 배우고 슈투트가르트 문법학교에 들어가 18세까지 공부했다. 그는 고전 저자들에 대한 주석, 신문기사들, 당시 대표적인 저작들의 도덕과 수학에 관한 논문들을 발췌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1788년 튀빙겐 신학교에서 2년간 철학과 고전을 배우고 1790년 졸업했다. 그뒤 신학과정을 밟았지만 교수들의 따분한 정통파 교리 강의에 싫증을 냈다. 1793년 졸업증서에는 철학공부에 열심이었지만 신학에는 소홀했으며 표현력이 빈약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료 학생들이 그를 '늙은이'라고 불렀지만 친구와 술을 좋아해 '바코스의 제물'이 되기를 즐겨 했다. 그의 주요한 친구는 동년배로 범신론적 시인 J.C.F. 횔덜린과 5세 아래인 자연철학자 셸링이었다. 그들은 서로 어울려 그리스 비극작품을 읽었고 프랑스 혁명에 환호했다.
대학을 마치고 성직자가 되지 않고 철학과 그리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여유를 갖기 위해 사강사가 되길 원했다. 그 뒤 3년간 베른에 있으면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 그리스·로마 고전들을 읽었다. 또 비판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를 연구하면서 종교에 관한 그의 논문에 자극을 받았다. 칸트는 정통파들이 역사적 사실과 교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자의적인 명령들로 이루어진 도덕체계를 강요하는 데 반대했다.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이성적 도덕을 가르쳤다고 보았으며 이 도덕이 자신의 윤리저작들과 화해할 수 있으며 종교가 모든 사람의 이성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헤겔은 이런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보다 더 역사적인 성격의 두 논문을 썼는데, 하나는 칸트의 맥락에서 복음을 재해석한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제로 권위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주의적인 것이었다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교가 권위주의적인 종교가 되었는가에 답하는 것이다. 베른에서 혼자 지내던 헤겔은 1796년말 횔덜린이 강사자리를 얻어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갔다. 그곳에서 더 폭넓은 교제를 바랐으나 횔덜린은 불륜의 애정관계에 휘말려 이성을 잃어버렸다. 헤겔은 감상에 시달렸으나 열심히 공부함으로써 자신을 치유했다. 그리스 철학, 근대사, 정치학을 공부했고 신문을 읽고 스크랩했으며 고향 뷔르템베르크의 정치에 관한 논평을 쓰고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는 칸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해 새로운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초기 신학 저작들은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관한 강한 주장들을 담고 있다. 그는 신학 자체가 아니라 정통파를 공격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성은 주(主)의 촛불이므로 칸트가 부과한 한계에 예속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헤겔의 전 저작에 넘쳐흐른다. 1798년 그는 이전에 쓴 신학적 글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의 하나인 〈그리스도교 정신과 그 운명 Der Geist des Christentums und sein Schicksal〉(1907)을 썼다. 이 논문에서 유대인들이 고대 그리스인과 달리 삶을 사랑하지 않는 모세 율법의 노예들이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물질적 충족에 만족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적 명령(율법)의 노예가 아니며 법(도덕)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신의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신의 의지를 충심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공동체가 신의 왕국이며 바로 그리스도가 가르친 왕국인데, 이 왕국은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일치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지지만 인간이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인간세계에 세워질 수 없다는 내용이다. 이 논문에는 헤겔 체계의 중요한 개념이 들어 있다. 칸트는 인간이 현상의 유한한 세계에 관한 지식만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오성(悟性)이 이 영역을 넘어서서 무한하고 궁극적인 실재를 파악하려 하면 해결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겔은 사랑을 대립물의 통일, 이를테면 무한자와 유한자의 모순이 포괄되고 종합되는 통일체로서 정신의 원형으로 보았다. 그는 이 사랑을 '정신'으로 표현했다. 칸트의 오성은 사고 상의 모순을 피할 수 없지만, '정신'이나 '이성'의 활동으로서 사고는 그 모순을 해소하는 종합을 만들 수 있다.
이무렵 헤겔은 오랫동안 바랐던 대로 학계에 진출했다. 1801년 1월 셸링이 1798년 이래 대학교수로 있던 예나에 도착했다. 예나는 이미 황금기를 맞았고 슐레겔 형제의 신비주의, 칸트주의, 피히테의 윤리적 관념론 등이 성행했다. 헤겔이 도착했을 때 26세였던 셸링은 이미 몇 권의 저서로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혼자 칸트의 우둔한 추종자들에 맞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헤겔은 그의 친구를 돕기 위해 불려온 것이었다. 헤겔의 예나대학교 강사 취직 논문이자 첫 번째 출판물인 〈피히테와 셸링의 철학체계의 차이 Differenz des Fichte'schen und Schelling'schen Systems der Philosophie〉(1801)에는 셸링의 자연철학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물론이고 후속 논문에서도 셸링과 헤겔의 차이는 뚜렷하게 나타난다. 두 사람은 그리스에 관심을 가졌고 칸트의 작업을 밀고 나가려 했고 우상파괴주의자였다. 그러나 셸링은 헤겔에 비해 너무 낭만적이었다. 헤겔은 1801~02년에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강의했는데, 이때 수강생은 11명이었다. 그는 점차 자신의 체계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1803년 셸링이 예나를 떠난 뒤 헤겔은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철학·정치학뿐만 아니라 생리학 강의에 참여했고 다른 분야에도 손을 댔다. 1805년 예나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수강생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여전히 주목받는 교수는 아니었다.
괴테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프로이센의 부패한 관료 제도를 싫어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이 예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환영했다. 그 전투가 있기 얼마 전에 헤겔은 프로이센을 무너뜨리고 있는 '세계정신'(나폴레옹)을 칭송했다. 이무렵 헤겔은 첫 번째 저서 〈 정신현상학 Phanomenologie des Geistes〉(1807)을 출판했다. 이것은 아마 헤겔의 가장 훌륭하고 또 어려운 책으로, 인간 정신이 어떻게 단순한 의식에서 자기의식·이성·정신·종교를 거쳐 절대지(絶對知)로 상승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인간의 소박한 태도는 감각에 의존하지만 반성해보면 외적 세계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실재는 지식에 의해 개념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의식이 외부에 있는 대상을 탐구할 수 없다면 자기의식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 스토아주의·회의주의를 거쳐 자기의식은 세계로부터 고립된다. 이성은 세계에 대립해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태도를 바꿔 대립된 대상과 자신의 동일성을 자각한다. 그러나 '정신'의 단계에서 의식은 더 이상 고립되고 비판적·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거주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구체적 의식의 가장 낮은 단계인 무의식적 도덕성의 시기이다. 그러나 문화가 증진되면서 정신은 점차 관습에서 해방된다. 도덕적 세계의 다음 단계는 종교이다. 신성함의 이념은 자연숭배와 예술을 거쳐 그리스도교에서 충만함에 이른다. 그래서 종교는 절대지, 즉 정신의 단계에 가까이 간다. 헤겔에 따르면 이곳이 진리의 장이다.
〈정신현상학〉을 쓴 뒤에도 헤겔의 경제 사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밤베르거 차이퉁 Bamberger Zeitung〉의 편집을 맡다가 뉘른베르크에 있는 에기디엔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맡았다(1808. 12~1816. 8). 이 직책으로 적기는 하지만 수입이 안정되었다. 그는 1811년 마리 폰 투헤르와 결혼했고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그들 사이에는 2명의 아들, 즉 역사가로 유명해진 카를과 신학에 흥미를 가진 이마누엘이 있었고 예나 시절의 사생아 루트비히도 함께 살았다. 1812년 뉘른베르크에서 〈논리학 Wissenchaft der Logik〉의 제1부인 〈객관논리학〉이 나왔고, 1816년 제2부인 〈주관논리학〉으로 완성되었다. 헤겔의 체계가 처음 본격적·궁극적 형태로 제시된 이 저작으로 에를랑겐·베를린·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직 요청이 들어왔다.
헤겔은 하이델베르크대학교의 교수직을 수락했다. 강의를 위해 〈 철학강요 Encyklopadie der philosophis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17)를 출판했는데 이 책은 그의 체계 전반을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헤겔 철학은 전 우주를 체계적으로 평가하려 한다. 그의 체계는 정신적 일원론이지만 차이를 중시하는 일원론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고는 차이를 경험해야만 사고와 그 대상의 '동일성'(同一性)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진리는 오류가 경험되고 진리가 승리할 때에만 인식된다. 그리고 유한자가 한계를 지닌 것이고 신이 이 한계를 극복하기 때문에 신은 무한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도덕적 선에 이르려면 인간의 타락은 필수적이다. 정신은 자신을 자연과 대비해야만 자기자신을 인식한다. 헤겔이 우주를 파악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우주를 절대정신이 자기자신을 정신으로 인식하게 되는 영원한 원환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파악은 ① 정신 자신의 사고를 통해서, ② 자연을 통해서, ③ 유한한 정신이 역사에서 자기를 표현하고 예술·종교·철학에서 자기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헤겔 체계의 개요인 〈철학강요〉는 논리학·자연철학·정신철학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논리학은 사고의 순수한 범주 또는 형식을 다루는데, 이것은 모든 물리적·지성적 생명의 구조를 이룬다. 헤겔에 따르면 우리는 '순수한 존재'(모든 것의 가장 추상적인 범주)에 관해 생각하려 하면 그것이 단순히 텅빈 것, 즉 무(無)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무는 '존재한다'. 순수존재 개념과 무의 개념은 대립적인 것이지만 상호이행한다. 여기에서 2가지 계기는 부정되면서 동시에 긍정되어 생성된다. 생성하는 것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은 점차 복잡한 범주들을 거치면서 절대이념 또는 자기 자신에게 객관적인 정신에 도달한다.
자연은 정신에 대립된 것이다. 논리학에서 탐구된 범주들은 서로 내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이와 달리 자연은 외적 관계의 영역이다. '공간'의 부분과 '시간'의 순간은 서로를 배제한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은 공간과 시간 안에 있고 그래서 유한하다. 그러나 자연은 정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 창조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범주들은 자연 안에서 그 본질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자연 철학의 과제는 이 구조와 변증법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면성의 영역인 자연은 비록 자연에 잠재되어 있는 이성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철저하게 이성적일 수는 없다. 인간 안에서 자연은 자기의식으로 성장한다. 정신철학에서 헤겔은 무의식, 의식, 이성적 의지를 통해 인간 정신의 발전을 따라간다. 정신은 이 의지의 구현 또는 객관화인 인간의 제도와 역사를 거치며 마지막으로 예술·종교·철학을 거쳐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정신으로, 절대적 진리를 지닌 것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이제 인간에게는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생각하는 길이 열린다. 마지막에 헤겔은 체계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그 출발점에 내포되어 있던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그것은 '정신만이 존재하며, 정신은 순수한 활동성'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헤겔의 체계는 철저한 과학적·역사적·신학적·철학적 탐구 결과에 의지한다.
Hegelianism
G. W. F. 헤겔의 기념비적 사상체계로부터 발전된 다양한 철학운동의 명칭.
독일 관념론의 정점인 헤겔의 철학체계는 철학의 모든 문제를 통일적으로 해결하려는데 있다. 헤겔은 특수한 관점을 뛰어넘는 사변적 관점으로 유일한 진리를 파악해야 하고 논리학·형이상학·자연철학·법철학·역사철학·예술철학·종교철학 등 철학의 모든 문제를 본래의 중심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내용과는 무관한 형식적 방법을 뛰어넘는 것이며 실재의 총체인 절대자, 즉 단순히 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절대자의 실질적 발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절대자는 처음에는 자신의 내적 의식의 직접성 속에서 스스로를 정립하고, 다음에는 이러한 정립 행위를 부정하고, 마지막으로 유한 세계를 구성한 앞의 부정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복귀한다. 이러한 보편적 체계는 역사와 문화의 모든 문제에 대한 고려에 철학을 끌어들인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으나 동시에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는 요소들의 자율성을 박탈해버렸으며 모든 것을 절대정신의 자기 추구 과정이라는 한 과정의 상징적 현현으로 환원해버렸다. 더욱이 종교와 정치 문제 등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이러한 대립물 사이의 사변적 매개는 결국 가장 시급한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와 모호하다든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초기 헤겔주의의 발전은 지배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었냐에 따라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1816~31), 종교 분야에서의 논쟁(1831~ 39), 정치토론(1840~44)의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헤겔이 살아 있을 때의 논쟁(1816~31)
이 시기의 논쟁은 헤겔 학파 내에서의 논쟁이 아니라 주로 사변적 유신론자들, 요한 헤르바르트와 그 추종자들, 셸링의 제자들, 슐라이어마허 등 다양한 진영과 헤겔의 논쟁이었다. 헤르바르트는 헤겔이 합리론자인 스피노자의 일원론과 지식 일반의 가능 조건을 탐구한 칸트의 선험주의를 뒤섞어놓았다고 비난했다. 헤겔은 자신의 제자 헤르만 힌리히스가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쓴 책의 서문에서 신앙과 이성은 내용에서는 같고 형식만 다를 뿐이라고 말했다. 즉 신앙에서는 표상이, 이성에서는 개념이 핵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헤겔 우파의 기관지인 〈과학적 비판 연보 Jahrbucher fur wissenschaftliche Kritik〉(1827 창간)에 실린 8편의 논문이었다. 그중에는 헤겔이 예상과는 달리 철학과 복음적 정통이 양립할 수 있다는 테제에 찬성하는 내용의 비평문과 헤르바르트의 주장에 간접적으로 응답한 비평문이 있다. 라이프치히의 크리스티안 바이세와 이마누엘 피히테와 같은 사변적 유신론자들은 헤겔 철학을 범논리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사고와 경험을 자유로운 신, 즉 창조주의 개념 속에 통합하라고 제안했다. 헤겔의 가장 충실한 제자로는 헤르만 힌리히스와 카를 로젠크란츠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헤겔의 해결을 옹호했다.
반헤겔파의 비판
고전 철학자이자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는 〈논리 연구 Logische Untersuchungen〉(1840)에서 헤겔 논리학에 대해 중요한 비판을 가했다. 헤겔의 견해에서는 존재에서 무, 무에서 생성으로의 이행이 논리학의 '전제 없는' 순수한 출발점으로 정립될 수 있다. 그러나 트렌델렌부르크가 볼 때 이러한 이행은 의심스러운 경험적 전제를 그럴 듯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 그는 헤겔이 A와 부정 A(~A)의 논리적 대립 혹은 모순을 A와 B 사이의 실재적 모순 혹은 반대와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셸링은 신화학과 계시를 바탕으로 한 '적극 철학'을 계속 내세웠다. 따라서 셸링의 후기 철학은 좌파의 모든 비판의 과녁이 된 동시에 사변적 유신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셸링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고 실존주의의 창시자가 된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개인주의는 헤겔주의가 독일 밖으로 확산되면서 나타난 가장 초기의 중요한 사상이다. 그는 헤겔이 모든 대립을 변증법적으로 조화롭게 화해시키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고 삶의 진정한 이율배반에 대한 보편적·범논리주의적 해결을 모색하는 데 전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이율배반이 단독자로서 개인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고 개별적 인간은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구체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이나 인간과 세계의 관계는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없으며 인간의 구원은 사변철학의 합리적 가치들의 역설적인 전도(顚倒)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현존재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을 이루는 문제들은 어떠한 다른 용어로도 환원될 수 없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은 실존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이 시기에 중간파는 논리학과 역사 기술 분야에서 헤겔 체계를 수정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표적 인물인 쿠노 피셔는 변증법에서 존재와 무가 똑같이 정태적이고 상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현실 운동은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 끼어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존재는 사고하는 존재로 이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등장하는 신헤겔주의 운동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응답하려는 시도의 결과였다.
1840년에 이르러 독일의 상황은 다시 보수화되어 자유언론과 반헤겔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운동을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포이어바흐는 주요저서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에서 철학적 인간학을 확립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신적 속성으로 절대화된 인간 속성이 소외된 상징으로 해석했으며 신·삼위일체·성사·신앙 등의 개념에서 발견되는 신학의 모순들을 비판하면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신이다'라는 명제를 최상의 원리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브루노 바우어는 슈트라우스의 범신론적·신비적 실체 개념을 거부하면서 복음은 최초 공동체의 무의식의 산물이 아니라 정신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정신의 자기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1841~43년 독일 정부의 탄압 조치가 더욱 강화되어 브루노 바우어와 포이어바흐는 강의를 할 수 없었고 루게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프로이센에서 〈할레 연보 Hallische〉를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그는 잡지의 이름을 〈독일 연보 Deutsche Jahrbucher〉로 바꾸었음). 그러나 이 시기에도 루게는 주요한 저작 〈헤겔 법철학과 우리 시대의 정치 Die Hegelsche Rechtsphilosophie und die Politik unserer Zeit〉(1842)를 펴냈다. 이 책에서 루게는 헤겔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비난했으며, 헤겔의 사변적 이성은 현존 질서를 인정하고 현실을 개혁하려는 모든 노력을 배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의 전형으로 절대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공격했다. 루게의 잡지는 1843년초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루게는 그해 3월 스위스에서 〈최근 독일 철학과 정치적 저널리즘에 관한 일화집 Anekdota zur neuesten deutschen Philosophie und Publicistik〉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바우어·루게·마르크스·포이어바흐 등의 글이 실려 있다. 다른 한편 포이어바흐는 〈미래 철학의 근본 원리 Grundsatze der Philosophie der Zukunft〉(1843)에서 사변철학의 방법은 주어와 술어를 전도함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실체화하고 구체적인 것을 추상의 '논리적 우연'이나 속성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면서 헤겔 철학의 부정을 통해 인간 본질을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헤겔 좌파는 서서히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엥겔스, 막스 슈티르너, 브루노 형제 등을 중심으로 한 '자유 베를린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사회적·역사적 문제들을 겨냥하면서 자기의식의 철학을 전개했다. 다른 한편에는 루게를 포함해 언론인 모제스 헤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카를 마르크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급진주의를 표방했으며 당시 등장한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헤겔을 끌어들여 당대의 정치적·문화적·철학적 상태를 비판했다. 본래 바우어의 친구였던 마르크스는 좌파의 민주 계열에 속해 있었다. 마르크스는 1843년에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헤겔이 프로이센 국가를 이상국가로 절대화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헤겔 국법론 비판 Kritik der hegelschen Staatsrechts〉(1843 여름, 1929)에서 헤겔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관념적으로 파악하는 잘못을 범했다고 지적했다. 〈1844년의 경제학-철학 초고〉(독어판 1932)에서는 이미 헤겔 변증법이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고 현실과 관련해 전도된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구체적·역사적 현실을 신비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자신의 과거 동료들이던 헤겔 좌파에게로 돌려, 〈신성가족 Die heilige Familie〉(1845)에서는 바우어를, 〈독일 이데올로기 Die deutsche Ideologie〉(1845~46)에서는 슈티르너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만드는 것이 관념이고 관념론으로 혁명운동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본 바우어와 슈티르너를 비판하고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19세기 후반 헤겔주의의 발전과 확산
독일에서는 19세기 후반 들어 헤겔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현실론과 신칸트주의 및 실증주의는 헤겔주의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러나 역사주의의 초기 대표자들의 이론은 여전히 헤겔주의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헤겔주의의 확산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정치적·문화적 문제들과 관련해 헤겔주의의 경험은 동유럽과 러시아에 수용되었는데, 폴란드의 종교사상가 아우구스트 키스초프스키, 유신론적 형이상학자 브로니슬로 트렌로프스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비사리온 베린스키, 혁명적 작가 알렉산드르 헤르첸,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혁명가 마하일 바쿠닌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또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과 같은 헤겔주의적 사회주의자도 등장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헤겔주의의 정치적 측면과 역사철학이 관심을 끌었다. 미국의 헤겔주의도 독일의 경우처럼 보수적 경향과 혁명적 경향으로 갈라져 각각 세인트루이스대학교와 신시내티대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문제와 관련해서 헤겔주의는 이탈리아와 영국에 수용되었다. 이탈리아의 자유주의 철학자 베르트란도 스파벤타와 동료들은 종교적 독단론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헤겔주의를 끌어들였다. 스파벤타는 헤겔 논리학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을 제안했다. 그의 시도는 20세기초의 관념론자 조반니 젠틸레에게 영향을 주어 헤겔주의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을 낳는 바탕이 되었다. 영국 헤겔주의의 선구자는 제임스 허치슨 스털링이었다. 스털링은 〈헤겔의 비밀 The Secret of Hegel〉(1865)에서 쿠노 피셔가 '칸트에서 헤겔까지' 추적한 사상 계열을 재확인했으며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이라는 변증법적·사변적 관계를 변증법의 핵심으로 관철하려 했다. 그밖에도 토머스 힐 그린, 존 케어드, 에드워드 케어드 등이 윤리·종교 문제에 헤겔주의를 끌어들였다.
이 시기에도 헤겔주의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신헤겔주의
영국에서는 헤겔의 논리학에 관한 뛰어난 저작들이 출간되었다. 버나드 보즌켓과 존 엘리스 맥태거트는 헤겔의 저작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현실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1893)의 저자인 F. H. 브래들리였다. 그는 관계들의 범주에 대한 비판을 통해 현상과 실재의 이원론을 주장했으며 사고를 통해 실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브래들리의 이와 같은 회의적 관념론은 미국의 절대적 관념론자 조사이어 로이스에게 영향을 주어 〈세계와 개인 The World and the Individual〉(1900~01)을 쓰게 했다. 영국의 신헤겔주의에서는 헤겔주의가 언제나 경험적 전통에 가까운 실험주의의 방법을 세련되게 하는 데 이용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신헤겔주의가 실증주의의 전파에 대한 유심론적 반동의 형태를 띠고 등장했다. 이러한 반동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한 방향은 베네데토 크로체의 역사주의였고, 다른 한 방향은 조반니 젠틸레의 활동주의(actualism)였다. 크로체는 〈헤겔 철학에서 산 것과 죽은 것 Cio che e vivo e cio che e morto della filosofia di Hegel〉(1907)에서 대립물의 통일의 필요조건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받아들이면서도 변증법의 체계는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헤겔의 체계는 실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인 지식 형태들을 대립시킨다. 각각의 지식 형태는 고유한 영역 내에서 극복해야만 하는 변증법적 대립물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자연철학과 역사철학의 가능성은 부정된다. 젠틸레는 행동의 생생한 변증법적 발전이 모든 객관적 사실보다 우위에 있다고 봄으로써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역설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고정된 견해를 그 대립물로 변형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을 이용하는 절대적 주관주의를 끌어냈다.
1905년 딜타이가 헤겔의 청년기 초고들을 재검토하고 헤르만 놀이 〈청년 헤겔의 신학 논문들 Hegels theologische Jugend schriften〉(1907)을 펴냄으로써 독일에서는 헤겔의 청년기 저작과 성숙기 저작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헤겔 학자들은 헤겔 체계보다는 윤리학·종교·역사 등에서 여러 문제를 다루는 데 매달렸다. 그러나 해석학적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특히 헤겔 철학과 변증법의 출발점 문제에 주목했다. 뒤이어 헤겔의 지적 문화의 역사적 모체인 후기 계몽주의와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의 출발점이 된 것은 헤겔의 청년기 저작의 비합리주의적 측면을 지적한 딜타이의 글이다. 뒤이어 프란츠 로젠츠바이크는 〈헤겔과 국가 Hegel und der Staat〉(1920)에서 청년 헤겔의 정치사상을 발생학적으로 재구성하고 헤겔이 루소의 영향 때문에 '독일의 민족 철학자'가 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프랑스의 형이상학자·철학사가 장 발은 헤겔을 실존적으로 해석했다. 독일의 리하르트 크로너는 낭만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칸트부터 헤겔까지의 발전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가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거듭 접촉하게 되면서 헤겔주의의 정치적·윤리적·종교적 함축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독일의 역사·문화 철학자 카를 뢰비트는 헤겔을 현대 사상이 직면한 '역사주의적' 위기의 진원지로 본다. 프랑스의 알렉상드르 코제브는 헤겔을 하이데거와 결합하려 하면서 〈정신현상학〉을 모든 소외로부터 '노예인 인간'의 해방을 알리는 선언으로 재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정신현상학〉에 대한 뛰어난 주석서를 쓴 장 이폴리트는 예나 시대의 헤겔에 관한 인문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전기 헤겔의 변증법을 되살리고자 했고,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헤겔 좌파의 견해에 가까우며 신낭만주의적 무정부주의라고 비판받는 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헤겔 해석에 관심을 보인 것은 주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엥겔스는 헤겔 철학의 방법과 체계 사이의 모순, 즉 혁명적 '운동원리'인 변증법과 관념론적·보수적이기 때문에 반동적 성격을 띠는 체계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헤겔 해석은 강조점의 차이만 있을 뿐 대개 이 해석을 추종해왔다. 게오르크 루카치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나치즘의 낭만적이고 비합리주의적 전제를 폭로하기 위해 계몽주의와 민주주의를 재평가했다. 루이 알튀세는 마르크스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을 일시적인 포이어바흐적 단계로 보며,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조에 대한 과학적 관찰을 통해 이 단계를 뛰어넘었다고 주장했다.
저서
*법철학 전2권 : G. W. F. 헤겔,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90
*피히테와 셰링철학체계의 차이 : G. W. F. 헤겔, 임석진 역, 지식산업사, 1989
*예술·종교·철학 : G. W. F. 헤겔, 김영숙 외 역, 지양사, 1984
*역사철학 : G. W. F. 헤겔, 김종호 역, 신화사, 1983
*철학입문 : G. W. F. 헤겔, 박전규 역, 삼일당, 1983
*헤겔논리학 : G. W. F. 헤겔, 김계숙 역, 서문문화사, 1983
*대논리학 전2권 : G. W. F. 헤겔, 임석진 역, 지학사, 1982
*역사철학강의 전2권(세계사상전집 17·18) : G. W. F. 헤겔, 김종호 역, 삼성출판사, 1982
*정신현상학 전2권 : G. W. F. 헤겔, 임석진 역, 분도출판사, 1982
*역사에 있어서의 이성 : G. W. F. 헤겔, 임석진 역, 지학사, 1976
개론서
*헤겔 : 정문길·한동원,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0
*헤겔-칸트에서 헤겔까지(청아신서 27) : R. 크로너, 유헌식 역, 청아출판사, 1990
*헤겔 철학의 이해 및 비판 : 전두하, 중앙경제사, 1989
*청년 헤겔 전2권 : G. 루카치, 김재기 외 역, 동녘, 1986-87
*헤겔연구 4 : 한국헤겔학회 편, 지식산업사, 1987
*헤겔의 철학과 사상 : 澤田章, 이종한 역, 문조사, 1986
*헤겔 : W. 카우프만, 김태경 역, 한길사, 1985
*헤겔 철학연구 전2권 : 최재희, 삼지원, 1985
*헤겔 철학사상의 이해 : 한단석, 한길사, 1981
*헤겔 철학 서설 : O. 푀겔러, 황태연 역, 새밭, 1980
*헤겔 : F. 휘트만, 최혁순 역, 행림출판사, 1980
*헤겔의 철학사상 : 최재희, 정음사, 1979
*헤에겔 : F. 비트만, 장일조 역, 한국신학연구소, 1977
*헤겔 철학의 분석적 입문 : M. 리델, 이우석 역, 민중서각, 1966
정신현상
*헤겔 철학 개념과 정신현상학(철학권책 2) : N. 하르트만, 박만준 역, 천지, 1990
*헤겔 정신현상학(오늘의 시민서당 28) : C. 닝크, 이충진 역, 청하, 1987
*헤겔의 정신현상학 : J. 이폴리트, 이종철 외 역, 문예출판사, 1986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 : R. 노먼, 오영진 역, 한마당, 1984
*헤겔의 정신현상학 : W. 마르크스, 장춘익 역, 서광사, 1984*
*헤겔 정신현상학 해설 : 황태연, 이삭, 1983
논리학과 변증법
*헤겔 변증법의 쟁점들 : J. M. 맥타가르트, 이종철 역, 고려원, 1993
*헤겔의 변증법 : N. 하르트만, 박만준 역, 형설출판사, 1992
*헤겔 변증법의 모색과 전망 : 임석진, 종로서적, 1985
*헤겔 변증법 연구 : R. P. 호르스트만 외, 김창호 외 역, 풀빛, 1983
법·정치·사회·역사
*헤겔 법철학 비판 : K. 마르크스, 홍영두 역, 아침, 1989
*헤겔의 정치사상 : 아비네리 슬로모, 김장권 역, 한벗, 1988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이론의 기초 : H. 마르쿠제, 황태연 역, 지학사, 1984
*헤겔의 정치사상 : 이영재, 박영사, 1983
*헤겔과 프랑스혁명(한울총서 6) : 요하임 리터, 김재현 역, 한울, 1983
*헤겔의 사회철학(한울총서 7) : M. 리델, 황태연 역, 한울, 1983
*헤겔의 역사인식 〈부대사학〉 3 : 이승영, 부산대학교 사학회, 1972
미학
*헤겔 미학 입문 : T. 메처·P. 촌디 공저, 여균동 외 역, 종로서적, 1983
기타
*헤겔의 노동의 개념(헤겔학총서 4) : 임석진, 지식산업사, 1990
*칸트·헤겔·마르크스는 이미 낡았는가 : 岩佐茂 외, 김갑수 역, 보성출판사, 1989
*헤겔 철학과 현대의 위기 : C. 테일러, 박찬국 역, 서광사, 1988
*헤겔 사유속의 이론과 실천 : E. 리델, 이병창 역, 이론과 실천, 1987
*헤겔과 현대 : E. 랑게, 신민우 역, 풀빛, 1985
*실천론-헤겔과 마르크스의 실천개념(한마당강좌 6) : R. 번스타인, 김대웅 역, 한마당, 1985
*헤겔과 프랑크프르트학파 : 谷喬夫, 오세진 역, 진흥문화사, 1984
*청년 헤겔 운동 : D. 멕델란, 홍윤기 역, 학민사, 1984
*헤겔과 마르크스(열린사회와 그 적들) : K. R. 포퍼, 이명현 역, 민음사, 1982
*이성과 혁명 : H. 마르쿠제, 정항희 역, 법경출판사, 1991
*헤겔이후의 역사철학 : H. 슈내델바하, 이한우 역, 문예출판사, 1986
*헤겔에서 니체에로 : K. 뢰비트, 강학철 역, 민음사, 1985
*청년헤겔운동 : D. 멕델란, 홍윤기 역, 학민사, 1984
*헤겔과 프랑크프르트학파 : 谷喬夫, 오세진 역, 진흥문화사, 1984
*헤겔에서 하이데거로 : 아르투르 휩셔 역, 삼성미술문화재단 출판사, 1975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철학의 사회철학적 전망, 정의론 (0) | 2018.07.10 |
---|---|
정신현상학 - 헤겔 (0) | 2018.07.08 |
진리인식에 대한 합리주의 접근방식 (0) | 2018.07.04 |
철학사상연구소 -서울대학교 (0) | 2018.07.04 |
성 아우구스티누스 (0) | 2018.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