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현상학 - 헤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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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말하는 ‘절대지(絶對知)’의 주장은 현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존 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전개가 요구되고 있는 오늘날, 이 책은 우리의 사색이 되돌아가야 할 원점이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세계 정신의 발걸음이 독일로 옮겨 오고 있다
헤겔은 서문에서 “우리의 시대가 탄생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기로 들어가는 과도기의 시대라는 점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히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동향을 말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붕괴와 그에 앞서 발족된 라인 동맹각주1) 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 재건의 움직임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 무렵 헤겔이 얼마나 큰 기대를 라인 동맹에 걸고 있었는가는 『정신현상학』에서 “절대적 자유는 나 자신의 자기 파괴적 현실에서 자기의식각주2) 적 정신이 있는 다른 토지로 옮겨 가고 있다”고 말하며, 세계 정신의 발걸음이 혁명의 무대인 프랑스를 떠나 도덕성의 나라인 독일로 옮겨 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실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서문을 쓴 1807년 1월, 헤겔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프랑스 국민은 위대한 힘을 타국의 국민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 힘은 타국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폐쇄적 근성과 무감각 위에 무겁게 눌러앉았다. 마침내 타국의 국민들은 현실에 대한 자신들의 나태를 내팽개치고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도 내면성을 외면성 속에서 확보함으로써 그를 가르쳐 준 교사를 능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국의 국민이란 독일 국민을 가리키고 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정신현상학』은 대상을 절대적으로 파악하는 절대지의 경지를 개척한 철학 내용으로, 헤겔 철학의 체계에서 기초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이는 무엇보다도 그 위에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는 사상을 구축하고자 한 헤겔의 자세, 곧 시대와 대결하고자 하는 단호한 자세를 통해 뒷받침된 것이기도 하다.
[서론] 학문에 이르는 길 그 자체가 이미 학문이며, 그 학문의 내용을 말하자면 그것은 의식의 경험에 대한 학문이다.
학문의 내용은 진리이며, 진리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성립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라고 하고 인식하는 것을 사유라고 한다면, 학문의 경지는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곳에서 열린다. 이는 또한 대상과 의식, 객체와 주체, 실재와 개념이 일치하는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은 주체로서 이편에 있고, 대상은 객체로서 자신의 저편에 있다는 것으로 표상되며, 의식과 대상, 사유와 존재, 주체와 객체의 대립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에 대해 현상하는 것만 알 수 있으며, 대상이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학문이 실재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 같은 자연적 인식에 대해 학문에 이르는 길이 제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길이 독단적이어서는 안 되며, 자연적 의식이 스스로의 지식을 음미하는 운동을 통해서만 개척되어야 한다.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그 때문에 의식에는 항상 대상이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는 계기와 또 대상이 자신에게서 독립된 채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계기가 있게 된다.
전자를 지식의 계기라고 하면, 후자는 진리의 계기이다. 의식이 확신하는 지식이 과연 진리인가 또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바와 합치하는가 등을 검사하는 것이라면, 이때 의식은 척도가 되는 진리의 계기, 존재 자체의 계기를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므로 의식은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을 음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곧, 의식은 내장되어 있는 확신과 진리라는 두 가지 계기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일련의 형태들을 편력하며, 그 과정을 통해 대상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켜 가는 것이다.
헤겔은, 학문은 이 같은 운동을 하는 의식이 스스로에 대해 쌓는 경험이라고 말하며, 학문에 이르는 의식의 이 같은 경험 계열을 서술할 것을 이 책의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서술이 운동에 내재하는 필연성에 준해서 서술되는 한, 그 같은 학문에 이르는 길 자체가 이미 학문이라고 했다. 이 점에서 바로 이 책에 헤겔 철학의 전 체계를 안내하는 기초론이라는 위치가 부여된다.
[의식] 타인 또는 일반적으로 대상에 대한 인식은 필연적으로 자기의식이며, 자기 내부로의 회귀이고, 자신의 타재(他在)에 대한 자기 자신의 의식이다.
대상 의식의 기본 형태는 감각적 확신과 지각 그리고 오성이다. 감각적 확신은 ‘이것’이라는 형태로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함으로써 대상에 대해 가장 구체적 인식을 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의식이다. 여기에서 감각적 확신이 확신하는 면이 사념이며, 진리에서는 감각적 확신이 가장 추상적이고 제일 빈약한 진리를 나타내는 데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 폭로된다. 감각적 확신이 사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감각적 확신이 개념을 통해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대상의 일면을 추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보편성을 매개로 하지 않고 단지 개별적인 것만을 취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을 통해 보편성을 매개로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것이 지각이다. 곧, 지각은 대상을 다수의 성질을 지닌 사물로 파악하려는 의식이다. 사물은 개별적 사물이지만, 그 성질은 여타의 다른 사물과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배타적인 단일한 것으로 보고 다수의 성질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사물의 부정적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된다. 긍정적 통일이라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사물이 다수의 성질을 받아들이는 매개체가 되어 보편적인 것이 되며, 성질은 그 같은 보편적인 것을 받아들여 그를 나누어 갖고 있는 개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사물은 하나의 사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다수의 성질을 제외하고는 사물이 될 수 없으므로 사물의 본질은 다수성에 존재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사물의 성질을 고유한 것으로 간주해 다른 사물과 구별할 때, 사물은 하나의 사물로 다른 사물과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또한 그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물과 관계를 갖는 측면도 생겨나게 된다. 사물은 이처럼 하나와 다수, 개별과 보편, 긍정과 부정, 대자와 대타와 같이 대립하는 계기가 결합한 곳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과 연결되어 있어 자유롭지 않을뿐더러, 감각과 마찬가지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존재하는 사물을 본질로 하는 지각은, 서로 모순되는 이러한 계기를 통일시키지 않고 어느 한 측면만을 사물의 본질로 삼을 때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반성을 거쳐 지각은 오성으로 향상된다.
지각이 대립하는 계기를 결합시키지 못하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은, 보편성을 매개체로 했지만 그 보편성이 개별과의 대립 관계에서 해방되지 않은 채 특수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오성은 무제약적 보편성을 종합해 사물의 배후를 향하고 있는 의식이다. 무제약적 보편성은 더 이상 사물의 성질과 같이 의식과 연결된 것은 아니다. 오성은 초감각적인 것을 서로 이끌어 내 사물을 그 현상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곧, 오성은 힘으로서 사물의 내부에 있는 본질을 생각한다. 우리는 힘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볼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외화되지 않은, 곧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힘이란 없다.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이 가진 통일성과 다수의 성질이란, 오성으로서는 힘의 외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초감각적인 것은 사유되는 데에 그친다. 그렇다면 힘의 진리는 그 사상에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의 독립성은 부정되고 사물의 근거는 사유 속에서 파악되게 된다. 오늘날 물리적 세계가 힘의 외화인 자력과 인력, 양전기와 음전기 등 상호 작용의 대립되는 힘으로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세계에 대한 지식이란, 실제로 이성이 만들어 내 세계 속에 던져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성은 대상 의식에 머무는 한, 사물의 내부에 있는 것은, 그것이 초감각적일지라도 대상적으로 실재하는 힘으로만 발견되지만, 거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는 다름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여기에서 오성의 진리가 나타난다. 이러한 진리를 알게 될 때,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통일이 대립에서 분화하고 대립이 상호 전환되어 통일로 회귀한다는 이론이 등장한다.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삼각형에서 정점이 통일로, 사물의 내부에 있는 초감각적인 힘을 뜻한다. 그리고 밑변의 양끝은 힘이 밖으로 드러난 외화로서 척력과 인력, 양전기와 음전기 등 대립하는 두 가지 힘을 나타낸다. 곧, 현상계는 이를 통해 성립하는 것이다.
헤겔은 여기에서 작동하고 있는 원리를 무한성각주3)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무한성은 자기 자신이며 또한 개념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현상학이 의식과 대상, 주체와 객체, 사유와 존재의 일치에 대해 학문의 성립 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주제로 삼을 때, 사물의 파악 방법은 차츰 붕괴되어 대상 의식이란 다름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대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자신의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의식의 변증법적 전개가 『정신현상학』의 기본적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무한성의 논리가 헤겔 철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자기의식] 노동은 욕망의 억제이며 소실의 연기이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은 형성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부정적 관계는 대상의 형상이 되며, 지속하는 것으로 바뀌어 간다. 왜냐하면 노동하는 것에 대해서만 그 대상은 자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은 대상의 본질이 자기 자신인 점을 확신하고 실천을 통해 이를 진리로 실현시키고자 한다. 먹고 마신다는 욕망은 대상의 자립성을 부정하고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점에서 자기의식의 최초의 형태이다. 그러나 대상을 소비해 버릴 경우, 대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려고 하는 자기의식은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자립해 있으면서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가장 단적인 대상은 또 다른 자기의식이다. 자립해 있는 자기의식이 서로 자립성을 인정해 줄 때, 자기의식은 서로 다른 자기의식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호 승인은 자기의식이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하여 곧바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인정을 둘러싸고 서로 투쟁을 벌이게 된다. 이 투쟁에서 죽음을 걸고 덤벼드는 자는 주인이 되며, 죽음을 겁내는 자는 노예가 된다. 노예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고 주인에게 봉사한다. 주인은 노예를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단으로 간주한다. 노예는 노동을 하며, 주인은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배우며 자기 자신을 형성해 갈 뿐 아니라 그 같은 자기 자신을 자연 속에서 외화시킨다. 노동은 대상의 자립성을 부정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소비와 달리 대상을 없애는 것은 아니다. 노동은 대상을 가공하는 것이며, 그것은 노동하는 자에게 자기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인은 소비에만 몰두하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주인의 생활은 노예의 노동에 의존한다. 주인의 소비는 잠시 동안뿐이다. 곧, 노예는 스스로의 자유와 자립을 획득하고 있는 데 비해 주인은 스스로의 자유와 자립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주인은 자기 자신을 자립적인 것으로 의식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비자립적인 것이 되며, 노예는 자기 자신을 비자립적인 것으로서 의식하지만 실제로는 자립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상호 역전된다.
상호 승인에 의해 비로소 자기의식이 실존하게 된다는 헤겔의 인식은, 최고의 공동체에서만 최고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헤겔 식 사회 윤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다. 또 그 같은 설명을 위해 투쟁과 함께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거론하고 있는 것 역시 역사 발전의 논리에 대한 헤겔의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같은 헤겔의 사상이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신] 모든 것이 실재해 있다고 하는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이성이 자기 자신을 세계로 삼아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인식하게 될 때 이성은 정신이 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말해 주는 것처럼, 대립적 자기의식이 상호 전환되는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이며, 아울러 자신과 타자를 하나로 묶어 주는 공동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또 모든 것(일체)의 실재를 자기 자신이라고 확신하는 이성각주4) 이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로소 개별성과 보편성의 대립과 통일이 세계 속에서 개인과 사회를 둘러싼 문제로 전개되는 것이다.
헤겔은 개인과 사회가 직접 통일되어 있는 단계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생활을 꼽으며 이를 인륜적 세계라고 불렀다. 로마 제국부터 절대주의를 거쳐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시기는 개인과 사회가 대립하고 있는 단계로, 정신의 자기 소외 형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에게 그가 자유로운 주체로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자각적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태도를 몸에 익힌다는 교양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절대 자유에 대한 자각에 기초해 정신의 분열을 극복할 것을 목표로 한 것이 프랑스혁명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공포 정치에 빠졌다. 이는 보편과 개별, 객체와 주체와의 대립을 아무런 매개 없이 극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곧,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데 대한 내면적 자각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개인과 사회, 개별과 보편, 주체와 객체를 참되게 통일시키는 것으로서 도덕성을 거론하고 있다. 도덕성의 나라는 칸트의 윤리학에서 출발하며 낭만주의를 거쳐 헤겔 자신의 철학에 이르는 철학 운동을 전개한 독일이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이 공포 정치로 흐르게 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했지만,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고자 한 프랑스혁명의 세계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헤겔은 프랑스혁명을 지켜보고 있던 독일이 근대화 속에서 그와 같은 사상을 구축하는 것을 스스로의 철학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자신의 철학 속에서 세계 정신이 현대에서 이룩한 높은 경지에 올라서 있음을 세계사의 발전을 더듬어 증명해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은 단순히 의식의 경험에 관한 학문의 영역을 넘어 이른바 세계 정신의 경험에 관한 학문이 된 것이다.
[종교] 신은 자기의식이다.
이제까지 서술을 통해 의식은 자연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사회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아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의식은 종교에 대해 절대 실재 그 자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종교는 처음에는 페르시아 종교와 인도의 종교처럼 태양이나 식물 그리고 동물을 숭배하는 자연 종교였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의 종교처럼 신전과 조각 등 예술품을 통해 신을 파악한 예술 종교였다. 마지막으로 기독교에서 신은 인간에 대해 그리스도로 나타났다. 이러한 종교의 발전은 다름 아니라 정신의 절대 실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파악하게 되는 과정이다. 태양보다는 동식물 쪽이 생명이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 더 가깝다. 그리고 자연 종교 역시 이집트 종교의 스핑크스에 잘 나타나 있듯이 동물의 모습 속에서도 어렴풋이 인간의 형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나아가 그리스 종교에 이르면 신은 분명히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된다.
그러나 다만 그리스 종교에서는 신은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데 그칠 뿐이다. 기독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이며 동시에 인간의 자식이다. 이 점에서 더 이상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분열은 없게 된다. 신은 세계 속에 현현하고 있다. 다만, 기독교 역시 종교라는 점에서 아직 표상의 입장에 그치고 있어 개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신의 내부에서 인간이 의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절대 실재는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계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계시된 정신적 진리는 무시되며, 예수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 외면적이며 인격적인 특징에 대한 지식만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정신의 발전은 이미 진리 자체를 스스로의 것으로 간주하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 프랑스혁명은 인권 선언각주5) 이 말해 주고 있듯이 인간이 각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을 높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진리를 개념적으로 분명히 자각할 때, 거기에서 절대지와 학문의 경지가 탄생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종교는 철학 속에서 고양된다.
이 부분에는 헤겔 철학과 기독교의 깊은 연관성이 시사되어 있다. 헤겔 철학의 특징인 통일이 대립으로 분화하며 동시에 상호 전환을 통해 대립이 통일로 귀환한다는 변증법의 논리는 아버지인 신으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아 인간의 아들로 땅 위에 나타남과 동시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해 성령으로 소생한다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의를 헤겔 식으로 되살려 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서문] 절대자는 주체이다.
의식은 스스로의 경험을 심화시킴으로써 대상과의 대립을 극복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자연과 인간, 개인과 사회, 신과 인간은 대립하지 않고 통일된다. 대립을 초월해 있는 것을 절대라고 부른다고 하면, 대립을 통일로 이끄는 의식도 절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은 절대적으로 아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자연이든, 사회이든, 신이든 이들은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이 생활의 근거로 삼는 실체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체에 그치는 한 의식 속에서는 아직도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사유하는 자로서 자기 자신의 내용을 반성할 수 있는 자를 주체라고 부른다면, 바로 그때야말로 인간은 주체로서의 실체를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이는 또 실체가 개인의 의식을 이루는 내용이 됨으로써 자기의식을 획득해 주체가 될 수 있게 만든다고 할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 같은 주체는 더 이상 객체와 대립해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다. 절대 주체인 것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각을 주장한 사람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각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인간의 사유에 있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지’의 주장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근대 철학의 주체성에 관한 주장을 최고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시에 이는 현대 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체성을 실천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 곳에서 마르크스 사상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주체성의 입장에 대해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자각하며 예리하게 반대한 곳에 키르케고르부터 시작되는 실존 철학이 있는 것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헤겔(1770~1831)은 1770년 8월 독일 남부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튀빙겐 신학원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시인 횔덜린과 함께 수업을 받았다. 베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정 교사 생활을 거쳤으며, 1801년 예나로 자리를 옮겨 예나대학교에서 교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가정 교사 생활을 통해 사색을 성숙시킨 헤겔은 예나에서 저작 활동을 하며 자신의 사색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사색의 발전과 함께 변하기도 했다.
이 책 『정신현상학』(1807)의 집필 시기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미 1805년 봄에는 집필에 착수해 있었으며, 그해 겨울에는 서점과 출판 계약을 끝마쳤다. 1806년 2월에는 그 일부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고는 좀처럼 완성되지 않다가 최종적으로 1806년 10월에 마감되었다. 그때는 바야흐로 나폴레옹군이 프로이센군을 쳐부순 유명한 예나 대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때였다.
『정신현상학』은 처음에는 ‘의식의 경험학’이라는 표제로 집필되기 시작했으나, 집필 도중에 애초의 구상을 훨씬 넘어서며 마지막에는 오늘날과 같은 제목으로 고쳐졌다.
그 같은 곡절을 반영하듯 이 책의 구성은 매우 복잡하다. 목차를 보면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A) 의식
-Ⅰ 감각적 확신, 이것과 사념
-Ⅱ 지각, 사물과 착각
-Ⅲ 힘과 오성, 현상과 초감각계
(B) 자기의식
-Ⅳ 자기 확신의 진리
(C) 이성
-Ⅴ 이성의 확신과 진리 | (AA) 이성
-Ⅵ 정신 | (BB) 정신
-Ⅶ 종교 | (CC) 종교
-Ⅷ 절대지 | (DD) 절대지
그 밖에 서문과 서론이 있으며, 초판의 페이지 수는 서문 91페이지, 서론과 본문을 합해 765페이지나 되는 대작이다.
한편, 초판에는 ‘학문의 체계 제1부’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만년의 헤겔은 이 부제를 삭제할 뜻을 비쳤으나, 이 개정판이 착수되기 직전인 1831년 11월에 죽었다.
헤겔은 1818년 이후 계속해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이 책이 발간될 무렵인 19세기 초에 이 책은 일부에게서만 주목을 끄는 데 그쳤으나, 20세기에 들어 폭넓은 분야로부터 새삼 관심을 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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