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역사철학

Thucydides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

by 이덕휴-dhleepaul 2023. 3. 8.

책소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고대 그리스 세계의 흐름을 뒤바꾼 기원전 5세기경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고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원전을 단국대학교 인문학부 명예 교수 천병희가 번역한 것이다. 역사방법론과 정치철학의 초석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리스의 황금기를 극적으로 끝내버린 아테나이와 스파르테 사이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진실을 종교와 도덕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간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밝혀나간다.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의, 사건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평이하지만 생동감 넘치는 기술, 그리고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연설이 적절히 엮어져 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변치 않는 지혜와 교훈을 찾아내게 된다.

 

서평

인류사를 뒤바꾼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500년경 오리엔트를 제패하고 그리스를 호시탐탐 노리던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후 50년간 그리스의 과학 문학 예술의 번성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 문명이 로마 문화에, 훗날 유럽 문화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일도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448)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문명의 소멸을 막았기 때문이다(헤로도토스는 이 전쟁이 망각되지 않도록 『역사』를 썼다).

연합 대응으로 페르시아 전쟁에서 공동의 승리를 쟁취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 후 그리스 세계의 두 강자로 떠오르는데, 맹수끼리는 서로 싸우지 않는다는 법칙을 깨고 이들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또다시 길고긴 전쟁을 치른다. 내전이면서도 그리스인들에게는 세계대전이나 다름없었던 그리스 사상 최대의 재앙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 문명의 붕괴를 불렀기 때문이다(투퀴디데스는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다).
역설적이게도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는 외세의 침략보다 내부의 갈등으로 저물었다.

정치와 전쟁에서 인간 행동을 분석해내다
그리스를 주름잡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격돌은 그리스의 황금기를 극적으로 끝내버렸다. 이 전쟁은 통찰력 있는 역사가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투퀴디데스(기원전 460~400) 스스로 밝힌 것처럼 인간 본성이 변하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이 기록을 남겼다. 과거의 일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은 현재와 미래의 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나 도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고 전쟁의 모든 것을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며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겪은 운명과 참상을 가장 엄격하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증언해두었고, 모든 시대 독자들은 이 특별한 비극 속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았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어 원전 번역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고전번역가 천병희 교수에 의해 번역 출간(도서출판 숲)되었다.
아테네의 번성과 스파르타의 질투가 부른 비극

 

아테네는 이와 필적하는 시대가 인류사에 다시없을 만큼 정치 문화 예술 분야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유산을 쏟아내던 때였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이 세워지고 소크라테스, 히포크라테스, 헤로도토스 등이 각 분야의 학문을 탄생시키던 때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도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의 극작가들은 비극과 희극을 결코 넘어서지 못할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대페르시아 전쟁을 치루기 위해 결성된 ‘델로스 동맹’을 발판으로 아테네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고, 200여 개의 도시국가 중 절반이 아테네의 영향권에 들어가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스파르타와 주요국들은 아테네의 번영과 과도한 팽창정책을 견제할 목적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는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 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메가라 등도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코린토스ㆍ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만든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자유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그리스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아테네가 델로스 동맹국들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점점 동맹국의 자치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발전과 스파르타의 질투는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불렀다.
이 두 동맹에는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거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육지에 기반을 둔 세력권과 아테네가 주도하는 바다에 기반을 둔 세력권으로 양분해 27년 동안 전쟁을 벌인다. 전투는 그리스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벌어졌고 유례없이 잔인했던 긴 학살에 전염병까지 겹쳐 아테네는 쇠진상태에 이른다.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를 무장해제시킨다.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게 인도하고 긴 성벽들을 헐었으며, 델로스 동맹을 해산했다. 이 전쟁의 체험은 아테네인들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내면에서부터 붕괴시켰다.

정상에서 바닥까지 단숨에 내려오다
한때 동맹국이었던 아테네는 적국이 되고 적국이었던 페르시아는 승리를 위한 동맹국이 되어 아테네로부터 제해권을 빼앗았지만, 스파르타 또한 그리스 세계의 힘을 분열시키려는 페르시아의 의도에 농락당한 꼴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그 잿더미 위에 상처뿐인 영광으로 서 있다가 다시 페르시아에게, 그 후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된다. 이 전쟁은 한 세대나 그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전반적인 평화를 낳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대를 초월한 무서운 진리를 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출판되자마자 고전이 되었다. 투퀴디데스는 함축적인 문체와 날카로운 분석으로 고대 그리스ㆍ로마 시대부터 가장 심오한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진리를 탐구하려는 그의 열정과, 사건을 합리적으로 보는 그의 통찰력과, 평이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기술과, 인간 본성을 파고드는 연설을 적절히 한데 엮는 능력은 시공을 초월해 여전히 경탄의 대상이며 인류에게 불멸의 재산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저술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00여 편이 넘는 연설문이다(이 전쟁은 민주정 국가와 과두정 국가의 싸움이기도 했는데 아테네는 일련의 전투를 민회에서 연설과 의결을 통해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라 할 ‘멜로스인과의 대담’은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힘의 정치 논리를 여실히 묘사하고 있어 이 대담만으로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불후의 명작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대담은 2500년 전 아테네인들과 멜로스인들 사이에서만 오갔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자리 잡고 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역사방법론과 정치철학의 초석으로, 현실주의 역사서이자 외교정책의 텍스트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접어보기

목차


028_ 1~23장

서론. 초기 헬라스의 상황. 이 책의 주제, 방법, 목표
046_ 24~65장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아테나이와 코린토스의 충돌
074_ 66~88장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라케다이몬에서 회동하다; 모두 아테나이의 공격을 비난하며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다
093_ 89~117장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나이의 국력 신장
114_ 118~125장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라케다이몬에서 재차 회동하다; 전쟁 준비
120_ 126~146장
라케다이몬과 아테나이가 서로 불만을 토로하다; 퀼론, 파우사니아스, 테미스토클레스 이야기. 라케다이몬의 최후통첩을 아테나이가 거부하다


142_ 1~9장

테바이의 플라타이아이 공격과 전쟁의 시작(기원전 431년); 헬라스인들은 대부분 라케다이몬에 동정적이다
149_ 10~33장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앗티케 지방에 침입하자 아테나이인들이 다른 곳에서 대규모 반격을 가하다
166_ 34~46장
아테나이인 전몰자들을 위한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176_ 47~70장
전쟁 2년차가 시작되다. 아테나이의 역병. 페리클레스와 그의 정책에 대한 개관. 전쟁 2년차가 끝나다
195_ 71~94장
플라타이아이가 펠로폰네소스인들과 보이오티아인들에게 포위 공격당하다. 코린토스 만 해전에서 아테나이인들이 승리하다
218_ 95~102장
아테나이의 트라케 동맹군이 마케도니아에 침입하다. 전쟁 3년차가 끝나다


228_ 1~35장

레스보스가 뮈틸레네의 주도 아래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다. 포위 공격당하던 플라타이아이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탈출하다. 전쟁 4년차가 끝나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 뮈틸레네인들을 지원하려다 실패하다. 뮈틸레네의 항복
250_ 36~50장
뮈틸레네인들의 처벌을 두고 클레온과 디오도토스가 아테나이에서 논쟁을 벌이다; 아테나이인들이 뮈틸레네 주민들을 대부분 살려주기로 결의하다
264_ 51~68장
플라타이아이의 항복; 플라타이아이인들이 재판받고 처형되다.
279_ 69~90장
케르퀴라 섬의 내전. 정치 변혁에 대한 심리 분석. 시켈리아에서의 아테나이인들의 활동. 전쟁 5년차가 끝나다
293_ 91~104장
데모스테네스 휘하의 아테나이군이 아이톨리아 지방에서 패하다. 아테나이인들이 델로스 섬을 정화(淨化)하다
304_ 105~116장
데모스테네스 휘하의 아테나이군이 암프라키아에서 승리하다. 전쟁 6년차가 끝나다


316_ 1~51장

아테나이인들이 퓔로스에서 승리하다. 라케다이몬인들이 평화조약과 동맹조약을 맺자고 제의하지만 거절당하다. 라케다이몬 군사들이 항복하고 아테나이로 끌려가서 구금되다. 케르퀴라의 과두정파가 학살되고 내전이 끝나다. 전쟁 7년차가 끝나다
351_ 52~74장
아테나이인들이 라케다이몬에 몇 차례 성공을 거두다. 시켈리아의 헬라스인 이주민들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다. 메가라의 내전이 아테나이인들의 실패로 끝나다. 메가라에 항구적인 과두정부가 들어서다
367_ 75~116장
브라시다스 휘하의 라케다이몬군이 트라케 지방으로 원정길에 오르다; 그곳에 있는 몇몇 동맹국이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다. 아테나이군이 델리온에서 보이오티아군에게 패하다.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를 함락하다. 전쟁 8년차가 끝나다
397_ 117~135장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의 휴전협정. 트라케 지방의 헬라스인들이 계속 아테나이 동맹을 이탈하다. 전쟁 9년차가 끝나다


414_ 1~12장

아테나이인들이 암피폴리스를 탈환하려다 실패하다; 브라시다스와 클레온이 전사하다
424_ 13~39장
아테나이와 라케다이몬의 50년간 평화조약과 동맹조약. 전쟁 10년차가 끝나다. 불만을 품은 일부 라케다이몬의 동맹국들이 음모를 꾸미다. 전쟁 11년차가 끝나다
446_ 40~83장
아테나이와 아르고스와 일부 펠로폰네소스 국가들이 동맹을 체결하다. 전쟁 12년차가 끝나다. 아테나이의 지원을 받는 아르고스와 에피다우로스의 전쟁. 전쟁 13년차가 끝나다. 아테나이군과 아르고스군과 그들의 동맹군들이 만티네이아에서 라케다이몬군에게 패하다; 아르고스와 라케다이몬의 50년간 평화조약과 동맹조약. 전쟁 14년차가 끝나다. 아르고스가 다시 라케다이몬 쪽에서 아테나이 쪽으로 기울다. 전쟁 15년차가 끝나다
480_ 84~116장
아테나이의 멜로스 섬 원정. 아테나이 대표단과 멜로스 대표단의 대화. 멜로스의 저항. 멜로스의 항복. 멜로스 주민들이 처형되거나 노예가 되다


492_ 1~7장

아테나이가 시켈리아 침공 계획을 세우다. 시켈리아 주민들에 관한 개관. 전쟁 16년차가 끝나다
499_ 8~32장
아테나이가 시켈리아 원정에 착수하다.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가 장군으로 임명되다. 니키아스가 공개적으로 원정에 반대하다. 알키비아데스가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하다
518_ 33~61장
아테나이 원정대가 출발했다는 보고를 접한 쉬라쿠사이인들 사이에 그 개연성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다. 아테나이인들이 시켈리아에 도착하여 현지 지원을 받고 군자금을 구하려고 노력하다. 본국에서 소환하자 알키비아데스가 도주하고 망명하다
541_ 62~88장
쉬라쿠사이군이 아테나이군에 패하다. 헤르모크라테스가 쉬라쿠사이의 방어체계를 재정비하다. 카마리나 시에서 헤르모크라테스와 아테나이 사절 에우페모스가 서로 우군이 되어달라며 논쟁을 벌이다; 카마리나인들은 중립 노선을 택한다
563_ 89~105장
알키비아데스가 라케다이몬으로 망명해, 시켈리아와 앗티케에서 동시에 아테나이를 공격하도록 라케다이몬인들을 설득하다. 전쟁 17년차가 끝나다. 아테나이군이 쉬라쿠사이군에게 이기고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하다. 귈립포스 휘하의 펠로폰네소스 구원병들이 도착하다


580_ 1~30장

쉬라쿠사이인들이 다시 전쟁 준비에 전념하다. 니키아스가 아테나이에 증원부대를 파견해주든지 아니면 군대를 철수시켜달라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다. 그의 요청에 따라 아테나이인들이 증원부대를 파견하다. 전쟁 18년차가 끝나다. 라케다이몬군이 앗티케에 침입하다. 라케다이몬인들이 데켈레이아를 요새화하다. 아테나이를 지원하러 왔다가 귀국하던 트라케인들이 도중에 뮈칼렛소스 마을을 약탈하다
603_ 31~49장
아테나이 해군이 쉬라쿠사이 항에서 쉬라쿠사이인들과 그들의 동맹군들에게 패하다. 데모스테네스 휘하의 아테나이 증원부대가 도착하다. 아테나이군이 쉬라쿠사이 요새를 함락하려고 야습을 감행했으나 함락 직전에 참패하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나이로 철군하자고 주장했지만 니키아스가 이를 뒤로 미루다
619_ 50~71장
아테나이군이 바닷길로 탈출하려고 절망적인 시도를 해보지만 쉬라쿠사이군이 그들을 결연히 저지하다. 쉬라쿠사이군이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다
637_ 72~87장
아테나이군이 육로로 철수하며 계속 적군에게 공격당하다. 수많은 군사들이 도륙된 뒤 아테나이군이 항복하다. 데모스테네스와 니키아스가 죽임을 당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채석장에 감금되다


654_ 1~6장

아테나이인들이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다. 펠로폰네소스인들이 곧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다. 이오니아 지방 도시들이 아테나이에 반기를 들려 하다. 펠로폰네소스군에게 페르시아 왕이 군대 유지비의 일부를 대주겠다고 제의하다. 전쟁 19년차가 끝나다
659_ 7~18장
전투 재개; 라케다이몬인들이 해전에서 패하자 사기가 꺾이다. 알키비아데스의 공작으로 키오스가 아테나이 동맹을 이탈하고 밀레토스와 다른 도시들이 그 뒤를 따르다. 페르시아 왕과 그의 태수 팃사페르네스와 라케다이몬인들과 그들의 동맹국들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다.
667_ 19~44장
주로 이오니아 지방에서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지만 승패가 가려지지 않다. 라케다이몬인들과 그들의 동맹군이 전에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영토의 일부를 양보하는 대가로 페르시아 쪽에서 그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하다. 라케다이몬과 페르시아 간의 협정이 수정되다
685_ 45~60장
라케다이몬과 알키비아데스 사이의 불화. 팃사페르네스에게 망명한 알키비아데스가 어느 한쪽 편만 들지 말고 헬라스 양대 세력의 군세가 호각을 이루어 서로 지치게 만들도록 하라고 페르시아인들에게 조언하다. 아테나이군 내의 과두제 지지 세력이 알키비아데스의 주선으로 페르시아의 보조금을 타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아테나이 민중이 마지못해 동의하다. 전쟁 20년차가 끝나다
698_ 61~88장
아테나이의 민주정부가 편협하고 과격한 과두정부로 대치되다. 아테나이 병사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여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펠로폰네소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 사이에 긴장이 높아지다
721_ 89~109장
아테나이 과두정부의 붕괴. 라케다이몬인들의 해군이 에우보이아 섬 서쪽 에리포스 해협의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모험정신의 결여로 아테나이에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다. 아테나이가 헬레스폰토스 해협 퀴노스세마 곶 앞바다의 해전에서 모처럼 크게 이기다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 work by Thucydides

Other articles where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is discussed: Antiphon: …but Thucydides’ judgment in his History, when describing the revolution of the Four Hundred, is that it was Antiphon “who conceived the whole matter and the means by which

www.britannica.com

 
투키디데스
태어나다: 기원전 460년?사망 후: 기원전 404년?주목할만한 작품: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연구 주제: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  스파르타
 
Thucydides (기원전 460  또는 그 이전?-기원전 404  이후 사망 ),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인물역사가 이자 저자BC 5세기 아테네  스파르타 사이의 투쟁을 다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 . 그의 작업은 국가의 전쟁 정책에 대한최초의 기록된 정치적, 도덕적 분석이었습니다.

Thucydides의 삶에 대해 확실히 알려진 모든 것(아마도 고대 학자들이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은 그가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자신에 대해 밝힌 것입니다. 그는 아테네인이었고 전쟁이 그 중요성을 평가하기 시작했을 때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그것이 긴 전쟁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것에 대한 설명을 작성하고 처음부터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460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아마도 전쟁을 촉발시킨 사건들과 함께 그의 상세한 이야기가 시작된 431년 직전보다 몇 년 전일 것입니다 . 그는 당선되었을 때 확실히 30세 이상이었다.스트라테고스 , 424년에 매우 중요한 군사 장관. 따라서 그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보다 젊은 세대에 속합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아테네 이름으로 알려지지 않은 Olorus였습니다. Olorus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 쪽에서 Thracian 후손이었을 것입니다. Thucydides는 아테네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장군 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트라키아 왕자의 딸과 결혼한 Miltiades . 그 자신은 Thasos 섬 맞은편에 있는 금광 채굴권을 포함하여 Thrace 에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는 안으로 있었다430-429년의 대역 병이 창궐했을 때 아테네 ; 그는 자신이 질병에 걸렸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424년에 그는 그 해의 10명의 스트라테고이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 그의 인맥 덕분에 Thasos에 기반을 둔 Thraceward 지역의 함대를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요한 도시의 점령을 막지 못했습니다.한겨울에 급습을 시작한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 다스의 암피폴리스 . 이 실수 때문에 투키디데스는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것이 그의 역사 와 여행, 특히 Peloponnesian 쪽인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에 대한 더 넓은 접촉을 위해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더 큰 기회를 주었다고 말합니다.

브리태니커 퀴즈
역사: 사실인가 허구인가?

그는 전쟁을 겪었고 20년간의 유배는 아테네의 함락과 BC 404년의 평화로 끝났다. 평화 가 뒤따르는 어려운 시기에 폭력은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 그의 무덤과 그의 기억에 대한 기념물은 AD 2세기에 아테네에서 여전히 볼 수 있었습니다 .

범위 및 계획역사

아마도 Thucydides의 설계가 아닌 여덟 권으로 나누어진 역사  전쟁이 끝나기 6년 반 이상 전인 기원전 411  가을 사건의 한가운데서 멈춥니다 . 최소한 이 정도는 알려져 있습니다.Cratippus (젊은 동시대),크세노폰 (한 세대 후에 살았던 사람)과Theopompus (4세기의 마지막 3분의 1에 살았던)는 모두 Thucydides가 중단한 그리스에서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Xenophon은 다음 단락을 Thucydides가 끝맺는 것처럼 거의 갑작스럽게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브리태니커 프리미엄 구독을 하고 독점 콘텐츠에 액세스하십시오.지금 구독

따라서 Thucydides의 저작이 출판 직후 잘 알려졌고 살아남은 여덟 권의 책 외에는 더 이상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의 생애 동안 작업의 별도 섹션이 출판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용 가능한 출처의 침묵에서 합리적으로 추론 할 수 있습니다 . 또한 역사의 일부, 특히 마지막 책이 결함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가 더 많이 알았더라면 더 오래 썼을 것이고 여전히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다는 점 에서 말입니다 . "불안한 휴전" 기간의 아테네 정치. 그의 기존 내러티브는 상상의 추측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작업에는 상당히 정의할 수 있는 세 단계가 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둘째, 이 노트를 "연대기"와 같은 연속적인 내러티브로 배열하고 다시 작성했지만 결코 Thucydides가 의도한 최종 형식이 아닙니다. 셋째, 전쟁(제1권), "10년 전쟁", 시칠리아 정복을 위한 아테네 원정의 예비 과정에 대한 최종 적이고 정교한 이야기입니다. Thucydides는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자신의 음표 단계를 보완했습니다. 역사 의 가장 정교한 부분조차도 그가 죽을 때까지 추가되었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전쟁이 끝난 후에 많은 추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투키디데스가 거의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은 것, 즉 그가 겪었고 거의 성인이 되는 동안 서로를 계승한 사건의 엄밀히 동시대 역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관객이었습니다. 그는 후대를 위해 마지막 역사를 쓰려고 시도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그리고 성공했습니다.

그가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완전한 이야기의 마지막(위의 3단계)은 그를 전쟁이 끝나기 8년 반 전인 413년 가을로, 2단계의 마지막에서 6년 반 전으로 데려갔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관찰하고, 질문하고 , 메모를 작성하고, 이미 작성한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기 전 27년 동안 그는 그 끝이 무엇인지, 따라서 자신의 역사의 길이와 최종 형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2단계에서도 관련 계정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전쟁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살아서 완성한 것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사를 썼습니다.

 

Thucydides Facts

 

www.britannica.com

 

Thucydides (Greek historian)

Images for Thucydides (Greek historian)

www.britannica.com

 

투키디데스의 성격 연구

전쟁의 정치적 원인 외에도 Thucydides는 두 가지 유형의 성격에 관심을 갖고 강조했습니다."성공에 흥분하지도 않고 불행에 절망하지도 않는" 스파르타 인들. Thucydides는 실제로 개인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 고통, 국가(“아테네인”, “시라쿠사인” 등)의 특성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격의 중요성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사건에 영향을 준 일부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것 외에도Cleon , 아테네의 가혹한 선동가 ; Syracuse의 온건파 지도자가 될 Hermocrates; 용감한 Nicostratus; 그리고 무능한 Alcidas는 네 사람의 성격과 영향력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Themistocles ( 여담 에서 2 차 페르시아 전쟁의 아테네 영웅)페리클레스 _브라시다스 ,알키비아데스 . 네 명 모두 능동적이고 혁명적인 유형이었다. 아테네 의 페리클레스는 대담한 상상력과 지성과 행동의 신중함과 절제, 성격의 큰 안정성을 결합했다는 점에서 투키디데스에게 참으로 독특했습니다. 그는 새 시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전쟁 중에 아테네의 페리클레스와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자국 내에서 보수적이고 조용한 야당과 충돌했습니다.

혁명과 보수 사이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대담한 아테네 국가와 일반적으로 신중한 Peloponnesian 국가 사이에서도 확장되었습니다. Thucydides가 전쟁의 마지막 해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까지 살지 못한 것은 큰 손실입니다.스파르타의 또 다른 위대한 혁명가인 리산드로 스(Lysander)는 아테네의 패배에서 다른 어떤 독신자보다 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패배는 한 측면에서 지적 총명함과 대담함 의 "완고함"과 성격의 안정성의 패배였습니다 (이 마지막 특성은 전쟁 후반기의 가장 뛰어난 아테네인 알키비아데스에게서 가장 결여된 자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담함과 지성에서 아테네인들과 경쟁했던 두 스파르타인 브라시다스와 리산드로스에 의해 크게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 대한 연구

Thucydides는 또한 전쟁의 기술적 측면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상전 중 식량 공급을 보호하는 것 외에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능한 지상군(스파르타와 그 동맹국)과 전능한 해군(아테네) 사이의 전쟁의 어려움과 가능성에 집중 되었습니다 . Thucydides는 또한 공성전 의 세부 사항을 연구했습니다 . 산악 지대에서 중무장한 전투의 어려움과 사납지만 통제하기 힘든 북쪽의 야만인들과의 싸움; 해안에 있는 군대에 맞서 배에서 강제로 상륙하려는 군대; 위대한 밤의 전투,시러큐스; 아테네 선원들의 기술과 대담한 기동, 그리고 이러한 기동이 시라쿠사인에 의해 극복된 방식; 시칠리아 재난 이후 아테네 함대의 예상치 못한 회복 - 전쟁의 이러한 모든 측면에서 그는 예리한 전문적인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스의 초기 역사 에 대한 투키디데스의 소개 페이지에서 그는 해상 무역과 해군력의 발전과 자본 자원 의 축적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합니다 .

스타일 과 역사적 목표

Thucydides는 그 자신이 아테네 종류의 지식인이었습니다. 현저하게 개인주의적인 그의 문체는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 극작가,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 소크라테스 , 동시대 소피스트와 함께 자란 사람을 보여준다 . 그의 글은 축약되고 직접적이며 군데군데 거의 엄격하며 구두로 전달되기보다는 읽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관찰한 사건의 복잡함과 복잡함을 과학적이고 공정한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연설에서만 그는 때때로 내러티브 산문의 명료성에 미치지 못합니다. 추상적인 표현에 대한 그의 애착과 그의 수사적 대립 의 모호함종종 구절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역사 의 시작 부분에 있는 서문에서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임무와 목표의 본질에 대해 약간 언급합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들은 것이든 다른 사람의 보고를 받은 것이든 간에, 그리고 전쟁의 행동에 대한 연설의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후자의 경우, 비록 그 자신이 특정 전투를 목격했을지라도 가능한 한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잘못된 기억이나 편견 때문에 목격자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제로 말한 내용의 일반적인 의미 에 가능한 한 가깝게 유지하면서 상황에 맞게 자신의 말로 연설문을 썼습니다 . 그는 그것들을 결코 생략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연설을 통해서 지도자들과 국가들의 동기와 야망을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전시의 인간 정신에 대한 연구는 그의 주요 목표 중 하나입니다. (마지막 책에서 연설문을 생략한 것은 큰 손실이며 의심의 여지없이 이 시기에 아테네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스토리텔링"을 피했다고 말합니다 . of Herodotus), 그의 작업은 결과적으로 덜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즉각적인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손을 위해 글을 썼으며, 이러한 사건이나 후대에 인간의 본성 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사한 사건에 대한 미래의 학생이 그들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만족할 것입니다 .

이것이 그가 자신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하는 전부입니다. 더욱이 그의 서술 과정에서(430년의 역병과 424년의 그의 명령을 제외하고) 그는 진술에 대한 그의 권위를 결코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실제로 들은 연설이 무엇인지, 그가 참여한 다른 캠페인이 무엇인지, 그가 방문한 장소가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상담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Thucydides는 모든 작업을 직접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성한 부분에 대해 계획이나 협의가 아닌 완성된 구조만을 제공 합니다 .

그의 작품의 권위

그는 엄격한 연대기 체계를 유지했으며, 그가 언급한 일식으로 정확하게 테스트할 수 있는 곳에서 그것은 밀접하게 맞습니다. 또한 돌에 기록된 상당한 수의 동시대 문서가 있으며, 대부분은 그의 설명을 일반적이고 자세하게 확인합니다. 세 명의 역사가는 자신이 중단한 부분부터 시작했으며, 많은 의견의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미 완료한 내용을 수정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그가 분명히 완료하지 않은 마지막 책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역사가,아테네가 그의 도시를 포위하는 동안 소년이었던 Syracusan Philistus는 자신  History of Sicily에서 Thucydides의 설명을 변경하거나 추가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현대 정치 코미디가 있습니다.아리스토파네스 - 투키디데스보다 15세 정도 어린 성격과 가능한 한 다른 글쓰기 목적을 가진 사람 - 이는 전쟁 중인 아테네에 대한 역사가의 어두운 그림의 신뢰성을 현저하게 강화합니다. 이 전쟁의 현대 역사가는 고대 역사가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투키디데스에 대해 번역, 요약 또는 확대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습니다.

Thucydides는 자신의 주제인 전쟁의 역사 , 즉 전투와 포위 공격, 급히 맺었다가 곧 무너지는 동맹,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쟁이 계속될 때 사람들의 행동에 관한 이야기라는 주제를 엄격하게 고수했습니다. 불가피한 "인간 정신의 부식"에 대해. 그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서술하고 육지와 바다에서의 전술을 세심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연설에서 직접적으로, 내러티브에서 간접적으로 아테네의 야심찬 제국주의 ( 페리클레스 의 통제된 야망 , 알키비아데스 의 무모함, 클레온의 타락)를 그림 으로 보여줍니다 . 그는 또한 스파르타 의 느린 꾸준함에 대한 상반되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다른 때는 적에게 매우 순응했습니다.

 

전쟁 첫 해에 죽은 사람들에 대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에 대한 그의 기록은 아테네와 아테네 민주주의 에 대한 가장 찬란한 설명으로 모든 주요 시민이 듣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역병의 증상에 대한 세밀하고 정확한 설명(“재발 시 의사가 알아볼 수 있도록”)과 의기소침한 절망감에 대한 감동적인 묘사가 뒤따릅니다(물론 적절한 연대순으로). 그토록 많은 고통과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람들—아마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그 도시의 성벽 안에 붐볐던 사람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똑같이 감동적인 것은 시러큐스 의 큰 항구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 와 아테네의 후퇴 에 대한 설명입니다 .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구절 중 하나에서 그는 가장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여 거의 그가 쓰는 언어를 만들어 내면서 전쟁 시 한 국가 내에서 일어나는 내전의 도덕적 , 정치적 영향을 분석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그는 연설에서 마을의 힘든 운명을 묘사합니다.플라타이 아는 테베 의 오랜 시기심과 잔인함 , 스파르타의 불신, 그리고 에게 해 섬 도시 미틸레네의 모든 남자를 처형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클레온 의 가혹한 잔인성으로 인한 것입니다. 때때로 그는 고결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테네인의 한심한 운명에 대해 개인적인 논평을 하도록 강요받습니다.니시아스 .

브리태니커 퀴즈
역사 버프 퀴즈

그는 남자로서 그리고 아테네 시민으로서 강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그를 적에 대한 저속한 편파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정확한 서술에서 역사가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중요성.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지휘한 캠페인의 중요성을 과장하지도 않고 자신의 실패에 대해 자기 방어를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특징적으로 그는 자신의 망명을 전쟁의 사건이 아니라 421년 평화 이후의 "두 번째 서문"에서 언급하여 더 넓은 접촉의 기회를 설명합니다.

후속 명성

그의 후기 명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 많은 것입니다. 그가 죽은 후 두 세대 동안 세 명의 역사가가 그가 중단한 곳에서 작업을 시작했다고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언의 찬사와 웅변가 데모스테네스 에 대한 그의 큰 영향에 대한 후기 이야기를 제외하면 , 투키디데스는 살아남은 4세기 문학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 는 그의아테네 헌법은 411년 아테네의 혁명을 설명하며 투키디데스의 설명과 여러 면에서 다릅니다 .

4세기 말까지 철학자는Theophrastus는 Thucydides와 Herodotus를 역사 기록의 창시자로 연결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버가모 의 학자들이 그의 책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사본은 이집트에서 상당한 수로 만들어졌고 의심할 바 없이 다른 곳에서도 1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만들어 졌다 . 기원전 1세기에 키케로와 디오니시우스(자신의 탁월함을 헛되이 논박한)의 저서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투키디데스는 위대한 역사가로 자리 잡았고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습니다.

아놀드 위컴 고메
 

Herodotus | Biography, Histories, & Facts

Herodotus, (born 484 bce?, Halicarnassus, Asia Minor [now Bodrum, Turkey]?—died c. 430–420), Greek author of the first great narrative history produced in the ancient world, the History of the Greco-Persian Wars. Scholars believe that Herodotus was bor

www.britannica.com

 

'철학 > 역사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Historische Texte & Wörterbücher-역사적 텍스트 및 사전  (0) 2023.08.27
Introduction to Germania. Tacitus  (0) 2023.06.11
조선왕조500년  (0) 2021.10.11
Histories (Herodotus)  (0) 2021.02.18
히스토리 -Herodotus  (0) 2021.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