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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역사철학

조선왕조500년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11.

조선왕조500년

제1대 왕 태조 이성계 (1932~1398년)(1)

by 황누렁 황누렁 2021.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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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이전 고려 말 시대적 배경

고려 후기 원 나라의 간섭으로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수탈이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습니다. 원 간섭기에는 몽골 귀족과 혼인을 하거나 몽골어에 능숙한 사람들이 출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친원 세력으로 권문세족으로 성장했습니다. 왕권이 원나라에 의지하여 움직이고 통치 질서가 무너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공민왕 때 반원 정책 및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불법 수단에 의해 대토지를 소유하고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권문세족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말에 이르러 신흥 무인 세력과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국가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으로 홍산 대첩과 황산 대첩에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기울고 1368년 명나라가 세워진 이후 고려의 철령(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기 때문에 원나라를 정복한 명나라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철영위를 설치하여 병참 군영으로 만들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철령 이북의 땅이 본래 고려의 속령이었음을 밝히고 철령위의 설치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고려는 이에 대응하고자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에 친원 세력이었던 최영은 명나라의 요구에 불같이 화를 내며 출병을 찬성했으나 이성계는 4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4불가론입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동안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최영의 주장에 따라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으나 끝까지 요동 정벌을 원하지 않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개혁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성계는 최영, 우왕, 창왕을 차례로 제거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습니다. 개혁의 과정에서 신진사대부는 고려 왕조의 폐단을 점진적으로 개역하려는 온건파와 왕조를 바꾸자는 급진파로 분화되고 군사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급진파와 결탁하였습니다. 이성계와 급진파의 정도전은 온건파 사대부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조선 최고령 나이 57세에 즉위한 임금 태조 이성계

태조 이성계는 1335년 태어나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합니다. 계산해보면 57세의 고령으로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지금의 57세도 적은 나이가 아니지만, 그 당시에 왕의 평균 수명은 고작 40대였습니다. 신진사대부 온건파인 정몽주를 제거하고 곧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에게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나라를 세우고 다음 해에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이성계에게 개경은 긴 시간 고려왕조의 터전이었고 조선을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습니다.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은 풍부한 농업 생산력과 편리한 교통, 한강이 가까이 있어 수로를 통해 세금 거두기가 좋았으며 배산임수로 최고의 명당이었습니다. 한양에 숭례문,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 종묘, 토지신과 곡식 신 제사를 지내는 사직, 시장 도로 등 한양도성을 정비했습니다. 태조의 3대 기본 정책으로 숭유억불, 중농억상, 사대교린이 있었습니다. 고려 시대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신봉하는 신진 사대부의 가치관이 반영된 숭유억불, 농업을 국가의 중심 산업으로 하는 중농억상, 분수를 알고 큰 나라를 섬기며 주변과 교린 하는 성리학적 사대주의가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재상 중심의 정치를 꿈꾸었던 조선 설계자 재상 정도전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하고 이성계가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정도전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이 갑자기 죽고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권문세족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성향이 달랐던 이인임과 정도전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유배 생활을 하면서 백성들의 삶 특히 지방 세력가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며 중앙의 통제가 지방까지 미치는 사회를 꿈꾸게 됩니다. 정도전은 똑똑한 왕 그렇지 못한 왕들을 모시면서 왕을 바꿀 수 없다면 재상이 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정도전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는 과정, 한양 도성 정비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며 성리학 통치 이념으로 한양도성의 건축물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선의 최고 법전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성리학 이념의 조선경국전 외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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