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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Walter Rauschenbusch

by 이덕휴-dhleepaul 2023. 6. 24.

‘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월터 라우션부시 (Walter Rauschenbusch, 1861 ~ 1918)

10/04Updated: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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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음주의 운동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월터 라우션부시 (Walter Rauschenbusch, 1861 ~ 1918)

월터 라우션부시 (Walter Rauschenbusch, 1861년 10월 4일 ~ 1918년 7월 25일)는 미국의 개신교 신학자, 침례교 목사, 사회복음주의 운동가이다. 뉴욕에서 독일계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로체스터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현재 로체스트 신학교에서는 기념관을 만들어 월터 라우셴부시를 기념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성공회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 그의 손자인 리처드 로티에게 영향을 주었다.

라우쉔부쉬는 목사, 연설가, 저술가로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는 ‘사회복음’ (social gospel)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활약했는데 이운동은 당시이 미국 개신교에서 대단한 세력을 가졌었다. 그래서 헨리 반 듀젠 (Henry Van Dusen)은 라우쉔부쉬를 미국 교회 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세 사람 중 하나로 보았다. 그 세 사람이란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와 호레이스 부쉬넬 (Horace Bushnell), 그리고 라우센부쉬이다.

 월터 라우션부시 (Walter Rauschenbusch)

.출생: 1861년 10월 4일, 미국 뉴욕 로체스터

.사망: 1918년 7월 25일, 미국 뉴욕 로체스터

.학력: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 로체스터 대학교

.영향을 받은 인물: 프레더릭 M. 허드슨,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루시 랜돌프 메이슨

.영향을 준 인물: 윌리엄 드와이트 포터 블리스, 호레이스 부쉬넬, 리처드 T. 일리, 헨리 조지

월터 라우션부시 (Walter Rauschenbusch, 1861년 10월 4일 ~ 1918년 7월 25일)는 20세기 초 사회복음주의 운동 (Social Gospel Movement)의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1907년에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를 발표했고, ‘사회복음’ (social gospel)의 신학적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응답으로 1917년에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을 출간했다. 그의 논문 ‘예수의 사회 원리’ (Social Principles of Jesus, 1918)에는 사회복음의 성서적 근거가 잘 제시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사회체제의 기독교화’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1912)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가 있다.

1886년부터 뉴욕의 맨해튼의 우범 지구 (Hell’s Kitchen)에서 제2독일침례교회 (the Second German Baptist Church)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라우셴부시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가난과 질병과 폭력을 수반하는 산업주의의 위기를 깊이 인식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에서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에서 제도적 죄의 본질을 다루면서 인간 사회의 영속적인 제도들을 통한 억압과 착취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으며, 1892년에 ‘하나님 나라 협회’ (Brotherhood of the Kingdom)를 조직하여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생애

워커 라우쉔부쉬는 1861년 뉴우요오크에 있는 로체스터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출생으로 19세기 중엽에 선교사로 미국에 건너갔고 그 후 얼마 되지 아니해서 루터파 교회를 떠나서 침례교인이 되었다. 젊은 월터는 독일과 미국 두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1886년에 로체스터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설교하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희망했으며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교훈과 정신대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옥의 부엌’ (Hell’s Kitchen)이라고 널리 알려진 난폭한 지역에서 얼마 덜어지지 아니한 뉴우요오크의 서쪽 변두리에 있는 독일 제2 침례교회에서 목회하기로 수락한 것은 이러한 결심에서이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노동자들이어서 곤궁한 가운데서 가난과 질병과 싸우는 그들의 어려움을 이 열렬한 젊은 목사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또 그는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 그들을 보고서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가진 사회적인 견해는 그의 말대로 ‘교회 안에서 얻은 것이 아니고 회부에서 얻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가난한 자와의 개인적인 접촉에서 얻은 것으로, 사람들이 일생을 두고 어렵고 고생스러운 생활을 참고 견디나 끝끝내 이렇다 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며, 건전한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나 곤궁함으로 얻을 수가 없고, 또 어린 아이들이 죽는 것과 특히 아이들의 장례식을 볼 대에 이런 것이 나의 마음을 조이게 했다. 왜 아이들이 죽게 되는가 하는 것은 내가 늘 생각하고 있던 것 중의 하나였다.“(1913년에 행한 연설에서). 그는 실로 그들과 함께 고통을 견디어 냈으며 인플루엔자가 유행할 때에도 환자와 가난한 신자를 돕기 위해서 침식을 잊었으며, 나중에는 병이 나서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러니 이것이 사회 조건을 개선하려는 그의 의욕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20세기 초 사회복음주의 운동 (Social Gospel Movement)에 신학적 기초를 마련한 미국의 대표적인 신학자 라우쉔부쉬는, 1886년부터 뉴욕의 맨해튼의 우범 지구 (Hell’s Kitchen)에서 제2독일침례교회 (the Second German Baptist Church)의 목사로 사역하면서 라우셴부시는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가난과 질병과 폭력을 수반하는 산업주의의 위기를 깊이 인식했다. 그는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에서 종교생활과 사회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예수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에서 제도적 죄의 본질을 다루면서 인간 사회의 영속적인 제도들을 통한 억압과 착취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으며, 1892년에 ‘하나님 나라 협회’ (Brotherhood of the Kingdom)를 조직하여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907년에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를 발표했고, ‘사회복음’ (social gospel)의 신학적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응답으로 1917년에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을 출간했다. 그의 논문 ‘예수의 사회 원리’ (Social Principles of Jesus, 1918)에는 사회복음의 성서적 근거가 잘 제시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사회체제의 기독교화’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1912)를 비롯한 다수의 저서가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다 1918년 7월 25일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사상

라우센부쉬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자기의 ‘종교 사상’과 동떨어진 ‘사회 사상’을 고집할 수 없었으므로 이 둘을 서로 관련시켜 연구했다. 그는 사회와 경제 부민이 책을 광범위하게 읽었다. 또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견해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취하는 사람들의 저서도 많이 읽었다. 복음적인 신앙과 사회적인 개조, 이 둘을 다 강조하려는 노력은 특수한 것으로서 이것은 그 당시에는 진귀한 결합이었다.

윈드롭 허드슨 (Winthrop S. Hudson)은 최근에 라우쉔부쉬를 깊이 연구하고서 그에게 ‘고독한 예언자’라는 적절한 칭호를 붙여 주었다. 그의 고독은 그가 귀머거리라는 이유로 자기의 주변에서 어느 정도 격리된 까닭에서였지만,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종교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을 결함시키려는 그의 근본적인 목적이 종종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라우쉔부쉬의 사회적인 열정을 보고서 종교적인 열정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종교적인 면만을 보고 사회적인 열정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잘 이해하려면, 그의 일생 사업은 항상 첫째 것(종교)에 우선권을 두면서 이 두 가지를 다 강조하려고 했다는 점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

1897년에 라우쉔부쉬는 그의 모교 로체스터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서 결국은 교회사를 담당하게 되엇다. 그러나 이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 역사가가 되게 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예언자가 되게 하였으며, 이로써 라우쉔부쉬는 유명하게 되었다. 라우쉔부쉬는 그가 같이 생활하던 교구민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고난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저술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와 사회적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라는 책이 경제 공황 중인 1907년에 출판되었다.

라우쉔부쉬의 주제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목표 곧 모든 인간관계를 하나님이 뜻에 부합되도록 재조성하고 재생시킴으로써 인간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에 희미해지고 말았는데 지금 이것을 회복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사회 문제가 가장 보편적인 문제 중이 하나가 된 오늘에 이르러 이 책은 순식간에 대환영을 받게 되고 그리스도교적인 견지에서 사회관계를 다루어 보려고 하는, 점점 늘어가는 교직자와 평신도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이리하여 라우쉔부쉬는 사회 복음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가 암으로 죽게 된 1918년에 이 운동의 발전이 중단되었다.

특히 라우쉔부쉬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의미를 구체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고, 그의 말과 글은 전 생애를 통해서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 대단히 분주했다. ‘사회적 각성을 위한 기도문’ (Prayers of the Social Awakening, 1910), ‘사회 질서의 그리스도교화’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1912), ‘예수의 사회적 원칙‘(The Social Principle of Jesus, 1916), ‘사회 복음의 신학’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1917) 등의 책을 써 냈다.

그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의미 심방한 종교적인 개념으로서 예수의 교훈에 그 중심을 두고 있으며 인간의 전 생활과 사회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 경제 문제를 주로 취급한 책의 결론에서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교 서적이며, 본서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경제생활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사상과 정신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점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그는 사회적인 활동을 종교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종교 곧 정당한 종교는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라우쉔부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속세적인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 근원, 발전, 완성이 거룩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곧 권능과 의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가운데 현존하는 실재이고 때가 찰 때에는 완연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미래적인 소망, 이 두 가지로 보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적으로 실현된 것을 믿었는데, “정치적인 의의 나라는 우리들 자신의 성별 (聖別)에서와 마찬가지로 몇 번에 나누어 이루어진다. 우리의 인생행로는 적당한 때가 되면 끝나게 될 것이며, 천문학적인 시계는 마지막 종을 치려고 벌써 똑딱똑딱 소리를 내면서 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행군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로 더욱 갈망케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단편적인 실현으로 우리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라우센부쉬는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에 이바지하라고 권유한다. “각자의 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창조를 분담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고 지연시키는 것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각 사람의 최고의 과제이며 또 하나님의 최고 은사 (恩賜)이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의 과제로 받아들일 때에 그것이 은사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힘씀으로써 우리의 거룩한 고향과 안식처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맛볼 수가 있게 된다.”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모든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은 하나님 나라의 과업에 이바지하라는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되어 있다.

 사회복음의 선창자

“사회복음은 구원의 오래된 메시지이지만, 널리알려지거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개인주의적 복음은 우리에게 죄로 가득찬 인간의 마음을 깨닫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넘쳐나는 사회구조의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왈터 라우센부쉬 (Walter Rauschenbusch, 1861 ~ 1918)는 북미 사회 복음의 가장 선도적인 신학적 주창자였다. 이 세기적인 운동은 사회정의의 문제와 개인 신앙의 내용을 서로 관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861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독실한 독일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라우센부쉬는 성직자가 되는 것외에는 다른 야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1886년에 그는 첫 번째 담당교구를 배정받아 뉴욕시티의 헬스키친 지역에 있는 제2독일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곳은 비좁고 비참한 주변환경으로 악명이 높은 지역이었다. 그가 직면한 가난과 질병 그리고 절망의 광경과 냄새는 그의 마음에 전형적인 그리스도교 경건주의 메시지에 대한 불만을 남겼다. 이런 비참한 삶을 살고있는 사람들에게 개인의 구원, 개종 또는 예수님 안에서의 단순한 믿음등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점점 자신의 목회활동을, 사회적 문제들을 다루고 세상에 대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책임의식을 깨우는 일로 확장해갔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라우센부쉬는 전통적인 형태의 자선조직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오늘날 복음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만연한 가난과 불의를 책임지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만 그는 이러한 접근을 위한 신학적 근거를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891년 그는 돌연 신학적 돌파구를 경험했다. 예수님이 선포한 주요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의 성경적 상징을 재발견한 것이 열쇠가 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신앙과 사회적 변혁을 포함해서 모든것을 포괄하는 주제였다. 교회와 세상을 결부시키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했다.

하나님 나라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곳으로 변화시키려는 도전에 관한, 진실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교리’였다. 이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태어났다.

“예수님이 가르친 모든 것의 요지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이것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누구든 복음을 통하여 한번 이것을 알게되면 다시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을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요지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잊혀지고 또한 가려져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 개인의 구원 또는 교회와 동일시 되어왔다. 비록 이 모든 것들과 실제로 관련이 있다하더라도, 그 나라는 더 광대하고 더 앞서 있으며 급진적인 궁극의 무엇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더 나아가, 이 모든 것들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세상과 하느님이 계획한 세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끊임없는 대립을 나타낸다고 했다.

예수님에 대한 가르침을 줄이려는 사람들에게 라우센부쉬는 반대로, 예수님의 진짜 메시지의 반환을 촉구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몰락은 예수님의 몰락입니다.” 그는 썼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충분히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라우센부쉬의 생각은 ‘사회질서의 기독교화’와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를 포함한 몇 권의 책에 담겼다. 그는 널리다니며 강의를했고, 1897년에는 로체스터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은 개신교 교단에 깊고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인의 사회의식의 발전과 수많은 진보적 조직들을 위한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사회복음을 믿는 사람들과 다른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혹한 시련이 되었다. 현대문명의 진보에 대한 그들의 일반적인 낙관론은 죄의 실재와 인간의 부조리에 부딪혀 좌초한듯 보였다. 그러나 라우쉔부쉬는 사실 그런 환멸에 대해서 그의 수많은 동조자들처럼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진보의 행진과 절대로 동일시 하지 않았다.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의 논쟁처럼 그가 죄의 실재를 망각한것도 아니었다. 그의 위대한 공로는 최근에 교회의 언어로 다시 표면에 떠오른 “사회적 죄”라는 용어를 깨닫고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우센부쉬의 메시지에 대한 공감은 군국주의적 애국심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사그라져갔다. 1918년, 그는 이렇게 썼다. “1914년부터 세상은 증오로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나는 살아 생전에 다시는 행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대로, 그는 같은해 7월 25일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라우센부쉬가, 자신이 전했던 이상들에 대한 환상이 처참하게 깨진 세상에서 죽은 것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암시한다. 근거는 없지만 대신에, 그는 그 과업의 거대한 규모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 목표의 본질에 대해서, 아주 사실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절대로 완전한 삶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그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 아무리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그것은 늘 완전한 사회질서로의 접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향한 모든 접근은 가치가 있습니다.”

 라우쉔부쉬의 공헌

월터 라우쉔부쉬는 사회복음의 가장 뚜렷한 대표자로서 미국 그리스도교 사상에 중대하고도 영구적인 공헌을 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방법으로 생의 사회적인 면과 그리스도 복음의 사회적인 면을 지적하고 있다.

과연 그는 그 시대의 사람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주장 가운데 어떤 것에 동감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사상을 설명할 때에 라우쉔부쉬는 자기 자신의 진보적이고 진화적인 견해로써 해석하였으며 종말론적인 면은 과히 중요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한 끝에 교회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인성 (人性)과 밀접하게 일치시켜 하나님의 내재성 (內在性)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초월성 (超越性)과 위업과 통치를 경시하였다. 죄를 본질적인 이기심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는 자만심을 죄라고 이해하던 전통적인 견해를 약화시켰다. 또 그의 사회관은 그의 종교 사상에 대한 참다운 직관과 건전한 바탕을 감소시키고 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성행하던 형태의 온화하고 진보적인 급진주의를 초래하였고, 비록 그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사회 질서에 대한 그의 해석은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와지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국가와 국가의 제도가 그리스도교화하였다고 너무 지나치게 생각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공헌은 지나간 세대의 현저한 특징을 보여준 데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가 후대의 사회 복음이 빠져 버린 함정을 피했는가를 관찰하는 것은 인상적인 것이다. 그는 비록 자기가 살고 있던 당시의 낙관주의의 여향을 받기는 하였지만 생의 비극적인 요소도 잘 알고 있었고, 또 인간과 국가가 그릇된 길을 취하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이 사회적인 열정 때문에 개인적인 종교를 등한히 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우쉔부쉬 자신은 결코 그렇지 않았고 후계자들에게 자기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어 이 두 가지 면을 무시하지 않도록 권유하였다. 또 그가 믿고 있던 필수적인 사회 개조를 결코 구원의 경험과 혼동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구원의 경험을 하나님의 나라와 정당한 관계를 맺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밝히고 확대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 저서들

기독교와 사회의 위기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1907.

사회체제의 기독교화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1912.

사회복음을 위한 신학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1917.

논문 : 예수의 사회 원리 (Social Principles of Jesus), 1918.

“Das Leben Jesu”. Cleveland, 1895.

Evangeliums-Lieder 1 & 2 (Gospel Hymns) mit Deutschen Kernliedern. Edited with Ira Sankey. Chicago: Bigelow and Main Co., 1904.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New York: Macmillan, 1907.

For God and the People: Prayers of the Social Awakening. Boston: The Pilgrim Press, 1910.

“Unto Me.” Boston: The Pilgrim Press, 1912.

Christianizing the Social Order. New York: Macmillan, 1912.

“Some Moral Aspects of the ‘Woman Movement,'” The Biblical World, vol. 42 (Oct. 1, 1913), pp. 195–199.

Dare We Be Christians. Boston: The Pilgrim Press, 1914.

A Theology for the Social Gospel. New York: Abingdon Press, 1917.

The Social Principles of Jesus.” New York: The Association Press, 1918.

– Contributions

Freedom and the Churches (chapter one: The Baptist Contribution), 1913.

The Path of Labor (chapter six: Justice and Brotherhood), 1918.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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