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공부

[에스라 1장 강해]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들

by 이덕휴-dhleepaul 2023. 12. 2.

[에스라 1장 강해] 하나님이 감동시킨 사람들
[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킨 하나님]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 해입니다. 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았지만 본절 초두(初頭)에는 `그리고'라는 뜻의 `우'(*)가 있습니다. 이는 본서가 역대기를 쓴 동일 저자에 의하여 기록되었음을 암시해줍니다(W. Rudolph). 그래서 역대기 저자를 에스라라고 합니다. `바사'는 B.C. 3000년 경까지는 셈족 계통의 엘람 사람들이 국민의 주종을 이루었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B.C. 2000년경 이후로는, 남부 러시아의 스탭 지역과 인더스강 서쪽에서 이동해 온 아리안족에 의하여 지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이 나라의 명칭은 이란이며 이 같은 국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레자 샤 팔레비'(1925-1941)에 의해서였습니다. `고레스'는 동부 엘람의 소국(小國)인 안산(Anshan)의 왕이었던 캄비세스 1세(B.C. 600-539)의 아들로서 부친이 죽자 그 나라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는 왕에 오른 즉시 바사의 제국(諸國)들을 통합하였고, 얼마 후인 B.C. 539년에는 대국 바벨론까지 정복하였습니다. 원년은 분명히 B.C. 538년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벨론을 정복한 것은 B.C. 539년이지만 바벨론의 즉위 년도 계산 방식은 즉위 후 처음 맞이하는 니산월(1월)이 속한 년도를 원년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사의 왕이 된 것은 훨씬 이전인 B.C. 559년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저자는 여기서 그가 바벨론을 정복한때로부터의 즉위 첫 해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가 이같이 한 까닭은, 그 해가 명실공히 당대의 최강국이었던 바벨론을 멸망시킨 때였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란 유대인들이 바벨론 땅에서 70년 동안 포수(捕手) 생활을 하게되며(렘 25:11), 그런 다음 반드시 팔레스틴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렘 29:10) 예언을 말합니다.(대하 36:22). 물론 이 예언속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온갖 시련과 고초를 안겨줬던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멸망될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습니다(렘 25:12)).


그 당시 예레미야가 이러한 예언을 한 것은, 바벨론의 무자비한 압박으로 인하여 고통 당하던 유대인들을 위로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결코 낙망치 말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응하게 하시려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는 원래 `마치다'(대하29:34), `진멸하다'(시 37:20; 겔 13:14)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된 내용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뜻합니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하나님이심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대상 5:26; 대하 21:16; 36:22; 렘 51:11;학 1:14). 결국 이는 여호와께서 고레스가 정책 입안 과정에서 관용적 태도를 취하도록 성령의 감동을 통해 개입하셨음을 말합니다(Fensham). 그때 고레스는 이미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Leon Wood). 우리가 이같은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단 9:1-11) 다니엘이 고레스의 막료로 일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됩니다(단 6:28). 그때 다니엘은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유화 정책을 취하도록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그의 영향력이 고레스에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가 고레스를 하나님의 `목자'라고 한 것은, 그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선한 도구로 사용될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사 41:25; 43:14; 44:28; 45:1, 13). 한편, `마음'(*, 루아호)은 원래 `바람',`영', `숨', `호흡' 등의 의미로서, 사람과 관련해서는 인간의 가장 내면적 요소인 `영혼' 혹은 `심령'을 의미합니다(사 30:1, 2). 그리고 `감동시키시매'(*, 헤이르)는 `깨다', `분발하다' 등의 의미를 갖는 `우르'(*)의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당신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이방인까지도 강권적으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잘 보여줍니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습니다. 여기의 `공포도 하고'는 문자적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말로써 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것입니다. 한편 `조서도 내려'는 왕의 구두 명령이 진짜임을 확증해 줄 수 있는 명령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와 조서가 별도의 절차로서 백성들에게 하달되었다고 봐서는 안됩니다. 한 사자(使者)에 의해서 왕의 명령이 구두로 전달되고 아울러 그것을 문서화 시킨 명령문도 근거로서 제시되었을 것입니다(Willianson, 왕하 19:9-14; 대하 17:9).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하늘의 주 하나님이 그레스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고 하여 고레스가 여호와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소유했었음을 시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이원론적 종교관을 갖고 있던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는 매우 통상적이며 익숙한 호칭입니다.

 

추측컨대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하늘의 신'은

 

흑암을 다스리는신 아리만(Ahr-iman)과 대조되는 광명의 신 오르무즈드(Ormuzd)를 말합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오르무즈드 대신 여호와라고 함으로써, 피정복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다고 말한 것은 분명치는 않으나 고레스는 다니엘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게 엄청난 승리가 주어진 것을 이사야 45:1 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여호와의 섭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Rawlinson). 이 같은 고레스의 생각은, 그 당시의 페르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신관(神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신' 오르무즈드는 세상의 왕들에게 권세를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고레스는 여호와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자신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따라 여호와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고 말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 왼문에는 나를 명하사 앞에 대명사 `그가'에 해당되는 `후'(*)가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입니다(요 10:1) 한편 `명하사'(*, 파카드)는 `위임하다' 혹은 `임명하다'의 의미로 이해됩니다(창 39:4; 41:34; 레 6:4; 렘 40:11).

 

따라서 본 구절은 고레스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대리자로 임명받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다니엘의 영향이 일조(日照)를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강권적으로 감동시키신 결과였습니다(1절 주석 참조).

 

`유다'는 고레스 당시에 페르시아의 여러 `도'(Province) 중의 하나로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유다'는 옛적에 일개 국가로 존립했던 지역으로서의 유다로 이해함이 무난합니다(Williamson). 그렇다고 본다면 고레스가 굳이 `유다' 라는 호칭을 여기서 사용한 것은 그 지역이 대적에게 멸망되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그 당시에는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레스에게 있어서 다른 민족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는 일은 주된 통치 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Kidner). 그의 다신론 사상은 근래에 발견된 한 비문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의 주신(主神)이 그 백성들에 의하여 섬겨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둑(Marduk) 이외의 다른 신들, 즉 `벨'과 `느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Kidner). 그러나 우리는 고레스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할 필요성을 가졌던 사실을 다만 그의 일관된 통치 정책의 결과로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개재되어 있었고 고레스는 적어도 이사야 44:28의 예언이 자신에 대한 것으로 알고 그것에 대해 순종했을 수 있습니다(Schultz).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입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신 그 하나님이다'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 입장에서, 고레스가 여호와를 다른 지방신(local god)들과 구분되는 `참신'으로 인식했음을 부각시키기 위해 흠정역은 `he is the God'라 옮겼습니다. 고레스가 진정 여호와를 유일하고 참된 신으로 깨닫고 섬겼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당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켰으리라는 점입니다 고레스는 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합니다. `너희'는 고레스의 영토 안에 살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 백성 된 자' 는 반드시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에 끌려온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 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B.C. 722년에 앗수르로 끌려간 북국의 열 지파 사람들도 포함되었음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북쪽 지파 사람들이 끌려갔던 옛 앗수르의 고토(故土)도 역시 고레스의 정복지(征服地)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귀환시에 타국인인 노비들도 함께 팔레스틴에 왔음을 감안한다면, 북국의 열지파 사람들의 일부도 귀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라가서'(*, 야알)는 `알라'(*)의 재귀적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하여 올라가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한편 고레스가 여기서 `알라'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바벨론보다 예루살렘이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830m 높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에는 여호와의 전이 성공적으로 건축되기를 바라는 고레스의 염원이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염원 뿐 아니라 성전 건축에 필요한 지원까지도 아끼지 않겠다는 격려로서 받아들여 질 수 있습니다. 고레스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빌어줍니다.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었습니다. 그후에도 미련이 남아 홍해바다까지 쫓아왔습니다. 그러나 고레스가 자발적으로 유다 백성을 보내주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잡혀 온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귀국할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도움을 받게 합니다 무릇 그 남아있는 백성은 전체의 목적어로 보고 떠나도록 배려된 유대인들로 보아야합니다. 여기서 고레스가 유대인들을 `남아 있는 백성'이라고 한 까닭은, 그때 바벨론 땅에서 살고있던 유대인들이 모진 환란과 고초를 견디고 살아남게 되었음을 시사하기 위함인 듯합니다(Fen-sham, 대하 36:20). `남아 있는'(*, 니쉐아르)은 `남다' 및 `잔류하다'의 의미를 갖는 `솨아르'의 수동형으로서,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에 따라 그분의 백성으로서, 또 그 백성답게 보존된 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Kidner,사 4:3; 10:20-22; 37:31; 겔 9:8; 17:21; 학 2:3). 그 당시 유대인 포로들은 주로 유프라테스 강 하류 쪽의 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Aharoni).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 외에도 페르시아 제국 내의 각처로 흩어져 살았던 것도 사실입니다(Bickermann).


이러한 사실은 에스더와 모르드개 등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도 분명해집니다(에 2:5)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은 귀숙하는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은과 금과 세간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자원예물도 들려서 보내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유대인을 도와주는 그곳 사람들은 팔레스틴으로 떠나려는 유대인과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본토 사람들로 보아야합니다. 은과 금과...짐승으로 도와 주는 것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때의 상황(창 13:1,2)과 유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때의 상황(출 12:35,36)과도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땅에서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 8)과 유사합니다. 이 같은 여러 상황에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재물을 준 것은 고대 중근동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상대의 물건 혹은 사람을 잘못 취한 것에 대한 사죄의 표시로서 속건 예물(삼상 6:4)을 피해자에게 주었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려던 유대인들에게 재물을 준것은 본토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들은 타국의 백성 이스라엘인들을 불법으로 그들의 땅에 억류하고 있었던데 대한 보상의 의미에서, 본토로 돌아가려던 유대인들에게 재물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간과치 말아야 할것은 비록 그런 관습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친히 바벨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관습을 지키도톡 주관하셨다는 사실입니다(출 12:36). 이 예물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성전을 짓는 데 필요한 소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처럼 열가지 재앙을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레스는 이스라엘을 내보냈습니다. 돌아간 숫자가 어른 남자만 사만이천명이나 됩니다. 전체로 하면 십만은 족히 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내는 것은 막대한 노동력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고레스는 유다 사람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감동된 유다 사람들]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그 때에 유다와 베냐민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 유다와 베냐민은 바벨론에 함께 포로로 끌려간 지파들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지리적으로 유다 지파와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관계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되었을 때 유다 지파와 함께 남쪽 유다에 속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2:21), 그 결과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족장(*, 로쉬). `머리'(창 3:15), `꼭대기'(창 11:4; 28:12; 민 23:28),`두령'(신 29:10; 33:5)등의 의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지파 단위와 가족 단위 사이의 중간 단위의 우두머리를 말합니다.(Williamson). 제사장들은 특별히 구별된 신분에 속했다는 점 때문에 다른 지파, 심지어는 레위 지파와도 분리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둘이 구별되어 언급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팔레스틴으로 유대인들이 귀환하는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제사장의 직분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성전의 건축이기 때문이었습니다(2, 3절).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의 봉사가 주된 임무이므로 성전 건축을 위해 팔래스틴으로의 귀환 대열에 끼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습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자는 문맥상 이는 유다, 베냐민, 레위 지파 사람들과 제사장들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은 아니라 같은 사람들입니다. `감동을 받고'(*, 헤이르)는 `일어나다', `일깨우다'의 의미를 갖는 `우르'(*)의 사역형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 전적으로 성령의 강권적인 감화의 결과임을 잘 보여줍니다. 일어나니(*, 쿰)라는 말은 성경의 여러 문맥에서 특별한 일을 실행하기로 결단하고 그를 위하여 적극적인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삼상 16:2; 왕하 3:24; 대하 22:10) 유다 사람들은 70년 동안 사는 동안 땅을 사고 집을 지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세대는 가나안 땅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는 세대들입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면 부동산을 정리해야합니다. 정든 땅을 떠나야합니다. 더구나 지금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땅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감동하자 사람들이 돌아갔습니다.


“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이웃 사람들은, 자원예물 외에도 은그릇과 금과 세간과 가축과 여러 가지 진귀한 보물을 주어서,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은 말할 나위없이 팔래스틴으로 귀환하려던 유대인들 주위의 바벨론 사람들을 말합니다. 은 그릇과 황금은 칠십인역처럼 `은 그릇 과 금그룻'으로 번역함이 더 나을 듯하며(Grosheide, Brockington), `그릇'(*, 켈리)은 `패물' 로 번역함이 무난합니다(출 3:22; 11:2). 기타 물건은 (레코쉬)은 일반적 의미의 `재산' 혹은 `재물'을 뜻합니다(창 12: 5; 14:11; 대하 20:25). 짐승(*, 베헤마)은 대개 물건을 운반키 위한 짐승과 희생 제사시의 제물로 쓸 짐승등 이었을 것입니다.


보물은 금.은 외의 귀금속을 통틀어 말합니다(창 24:53; 대하 21:3; 32:23). 돕고(*, 하자크)는 원래 `강하게 하다', `격려하다'의 의미로서, 특별한 일을 앞둔 사람들로 하여금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는 행위를 말합니다(겔 34:4;단 10:19; 호 7:15). 즐거이 드렸더라(*, 히트나데브)는 말은 `자원하다'의 의미인 동사 `나다브'(*)의 재귀적 사역형로서 아무런 마음의 걸림이 없이 기꺼이 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특히 이 형태의 동사는 하나님께 자원하는 심령으로 예물을 드리는 행동을 표현할때 사용되었습니다(출 35:21; 삿 5:2; 대상 29:9).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위해서 은금 짐승 보물을 기쁘게 드렸습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처럼 재앙이 무서워서 억지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그들이 이들을 위해서 기쁨으로 재물을 드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감동하자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더욱이 고레스 왕은 주의 성전에 속하여 있던 여러 가지 그릇까지 꺼내어 오게 하였습니다. 또'(*, 웨)는 일반적으로 `그리고'의 의미입니다. 원문에는 이 단어가 본절의 맨 앞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이같이 번역함으로써, 고레스 왕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행(善行)을 부각시킵니다. `여호와의 전 기명'은 성전 제사시에 활용되던 각종 그릇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금으로 도금(鍍金)된 놋그릇들이었으나, 그중의 상당수는 바벨론 왕들에 의해서 도금된 금이 벗기워짐에 따라서 보통의 놋그릇이 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4:13). `꺼내니'(*, 호치이)는 `나오다', `빼내다'의 뜻인 `야차'(*)의 사역형입니다. 따라서 이는 깊숙이 보관 되었던 것을 명령을 통하여 끄집어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사항은, 이 단어가 구속 등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나 물건이 자유롭게 됨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Fensham, 출 3:10). 그것들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가지고 가서 자기의 신전에 둔 것입니다. 개역개정의 옛적에는 히브리 본문에는 없습니다. 문맥적 의미를 보강키 위해 번역자가 삽입한 것으로 봄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격한 것은 세 차례였는데, 그 중 두 번째(B.C. 597)와 세 번째(B.C. 586) 때에 포로와 함께 성전의 기명들을 가져갔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그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의 제2차 함락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왕하 24:10-12). 그러나 그는 제3차 예루살렘 함락 때에는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성전의 기명을 앗아간 사람은 느부갓네살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었습니다(왕하 25: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의 명령에 따라서 그 같은 일을 했으므로 성전 기명을 가져간 것은 느부갓네살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한편, 느부갓네살이 성전의 기명을 가져다가 신당에 둔 이유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그 물건들에 대한 욕심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느부갓네살은 그것들을 신당에 보관해 두지 않고, 그것들을 녹여서 다른 물건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성전 기명들을 자신의 신당에 보관한 것은, 상당한 상징적 의미를 갖습니다. 느부갓네살은 타민족이 섬기는 신들의 무력함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명을 자신의 신당에 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할 때, 고대 중근동 민족에 의해서 흔히 통용되던 관습이었습니다(Williamson, 삼상 5:2).


“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재무관 미드르닷을 시켜, 그 그릇들을 꺼내어 낱낱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 주게 하였습니다 창고지기'는 창고 및 재정 관리를 총괄하던 고위직이었습니다(Fensh-am).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 중 여기서 단 1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미드르닷'은 문자적으로 `미드라에계 주어진 바 된'의 의미로서, 고대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매우 흔했던 이름이었습니다. `미드라'는 초기의 인도 아리안족들에 의해서 숭배되던 신의 이름입니다(Fensham). 유다 총독(나시이)은 팔레스틴으로 옮겨질 유대인의 새로운 공동체를 다스리도록 고레스에 의해서 임명된 총독과 같은 직분입니다(Williams-on, Keil, 5:14). 이는 `오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나사'(*)에서 파생되었으므로 문자적으로는 `올려진 자'의 의미입니다. `세스바살'(*)은 바벨론식 이름으로서 `샤마쉬(태양신)가 그 아들을 보호하신다' 혹은 `신(월신)이 그 아버지를 보호하신다'의 의미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스룹바벨(3:2)과 동일 인물이라는 견해(Keil, Rawlinson, Schultz, Kidner)가 있습니다.


“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왕이 유대인에게. 넘겨 준 물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자루입니다. 금대접이 서른 개요, 다른 것으로 대신 보충한 은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에 다른 그릇이 천 개입니니, `금반'의 `반', 즉 `접시'(*, 아가르텔레이) 는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안 나온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어의 음역임이 분명합니다. 칠십인역은 그 단어를 `프쉬크테레스'(*), 즉 `술 식히는 기구들'로 번역하였습니다(Rawlinson). 벌게이트역에서는 `피알라이'(Phialae), 즉 `항아리들'로 번역했습니다. KJV 는 우리말 성경처럼 `칼'로 번역하였으나, 차라리 NIV 처럼 `냄비'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듯합니다. 금대접(*, 케포레이)은 덮개가 있는 잔을 뜻합니다(Keil,민 9:15). 그보다 못한 은대접 - '차한'(*, 미쉐님)은 `되풀이하다', `바꾸다'의 의미인 `솨나'(*)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2 등급'의 뜻입니다. `기명'(*, 켈림)은 일반적 의미의 각종 '그릇' 혹은 `기구'를 의미합니다(민 4:14; 왕상 19:21; 왕하 4:3). 금그릇과 은그릇은 모두 오천사백 개입니다.


9, 10절에 나열된 것들의 실제 합계는 2,499에 불과합니다. 본서 저자가 보다 중요하고 가치있는 기명들만을 특별히 계수해 넣은 것이 2,499개이고 총 기명수는 약 5,400 정도였습니다(Edwin Yamauchi). 외경 에스드라서는 그 합계를 5,469로 제시합니다. 세스바살은, 포로로 잡혀 간 이들을 바빌로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 때에, 이 그릇을 모두 가지고 왔습니다 데리고 올'(*, 헤알로트)은 `올라가다'의 의미인 `알라'(*)의 수동형입니다. 이것의 주어는 `사로잡힌 자'로서 이는 유다 백성들이 세스바살에 의하여 팔레스틴을 향해 인도되어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한편, 위의 `알라'는 모세의 영도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출 33:1). 여기서 본서의 저자가 바로 이 같은 단어를 특별히 사용한 까닭은, 저자가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려는 신학적 의도 때문이었음이 분명합니다(Williamson).


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 글쓴이 : 말씀 선생

'성경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가랴 서론, 1부(스가랴 1:1)  (2) 2023.12.01
하나님의 지혜-눅11:49  (2) 2023.11.25
소 야고보 | James the Minor  (1) 2023.11.22
성경의 사랑 장 - 고전13장/로마서13장  (1) 2023.11.22
하나님의 이름  (0) 2023.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