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년 경 알라의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박해를 피해 622년 메카에서 메디나로 갔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메디나에서 신도들을 모아 630년 메카 함락에 성공한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세우고, 이를 확장했으며, 이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전역에 퍼졌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보통 '예언자 무함마드' 혹은 '라술 알라(Rasul Allah: 신의 사도)'라고 부른다. 마흔 살이 되던 해에 신의 계시를 받아 예언자가 되었으며, 이슬람을 창시했다.
그는 한 종교의 창시자인 동시에 이슬람 이전 시대의 고대 아랍 유목민 사회에 만연되어 있던 악습과 부도덕한 관습을 타파한 사회개혁 운동가였으며, 또한 모든 인간이 신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 하에 일생동안 박애정신과 인도주의를 실천한 행동가이다
출생과 성장과정 무함마드는 570년 4월 22일, 메카의 지배부족이자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일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쿠라이시족(꾸라이쉬족)의 하심(하쉼 Hashim) 가문에서 유복자로 출생했다. 하심 가문은 명문의 일족이었으나, 후일 우마이야조를 이루게 되는 아브두 샴스(압두 샴스) 가문 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둘라(압달라 Abdallah)는 시리아 쪽으로 나가던 카라반의 상인으로 그의 탄생 직전에 사망했으며, 어머니 아미나(Amina bint Wahb)도 그가 여섯 살 때 사망하여 어려서 고아가 되었다. 그 후 무함마드는 할아버지 압둘 무탈리브(압둘 무딸립 Abdul Muttalib)에게 맡겨졌으나, 2년 뒤 할아버지가 사망하자 하심 가문의 새로운 가장이 된 숙부 아브 탈리브(아부 딸립 Abu Talib)의 보호 하에 양육되었다.
결 혼 어린 시절 양치기를 하며 평범하게 성장한 무함마드는 청년이 된 뒤 시리아를 왕래하는 무역상이 되어, 부유하고 고결한 성품의 미망인 카디자(Khadijah)의 대상에 고용되었다. 무함마드의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에 감동한 카디자가 구혼하여, 무함마드는 595년에 25세의 나이로 40세의 미망인 카디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2남 4녀가 태어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카디자의 실제 나이는 그보다 적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함마드의 두 아들은 유년기에 사망했으며, 딸들 중에서도 파티마(파띠마 Fatima)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함마드보다 먼저 사망했다.
알라의 계시 생활에 여유를 얻게 된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는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고, 신으로부터의 메세지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되었다.
부인 카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유일신(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며, 처음에는 메카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하층민들과 중소상인 계층만 그의 가르침을 추종했다. 그의 지지자는 극소수였으므로 대(大)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지도층은 그의 선교활동에 무관심했으나, 점차 추종자 수가 증가하여 메카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위협하기 시작하자,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메디나 시절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무함마드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무함마드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룬(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무함마드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무함마드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族) 등이 무함마드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메카 함락과 사망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무함마드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무함마드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무함마드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예배를 지내고, 무함마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평가 무함마드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採錄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무함마드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무함마드상(像)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호전(好戰)적인 무함마드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무함마드가 호색(好色)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현대적 평가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동시에 전통 사회의 악습과 부도덕한 관행을 폐지하고자 노력했던 사회개혁운동가였으며, 평등주의를 주창한 박애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인품은 인자, 중용, 인내, 용맹 등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신의 사도로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교우들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가, 행정가, 군인으로서 모든 무슬림들이 본받아야할 인생의 표본이 되고 있다.
특히 그는 메카 정복 이후 신의 사도라는 지위를 빌려 인간위에 군림하는 초월적 존재나 절대군주가 될 수 있었으나, 오히려 평범한 지도자이기를 자처했다. 그는 왕관을 쓰지 않았으며, 옥좌 대신 마룻바닥에 앉아 통치했고, 스스로 옷과 신발을 고쳐 입었으며, 대추야자와 보리빵을 즐겨먹는 소박하고 겸손한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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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실과 검은 실이 구별되는 새벽이 되면 예배시간을 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달콤한 새벽잠을 자는 것보다 알라 를 경배하고, 그분의 사자 무함마드를 위해 기도하는 예배가 더욱 복이 된다고 믿는 무슬림들이 깨어난다. 예배를 인도하는 아진의 인도로 인종과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선 무슬림들이 알라 의 자비와 은혜에 감사하는 새벽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정오, 오후, 석양, 밤중 예배가 이루어진다. 매 예배시간을 알리는 음성인 아잔(Azzan)이 들려올 때 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5번 예배를 드린다.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이 만들어진 후 지난 14세기 동안 변함이 없다. 일주일에 5번도 아니고, 하루에 5번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닐까? 바쁜 이방인의 질문에 어느 느긋한 무슬림은 이렇게 대답했다. “알라의 은총에 비하면 너무 적은 것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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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는 당대 새로운 종교운동의 지도자로서, 정치인으로서, 용감한 군대의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는 오늘날까지 민족과 인종을 초월한 이슬람 생활 규범의 원리를 만들었다. 그는 인류의 정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다.
무함마드는 570년 메카에서 쿠라이시 부족 중 하심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카’라는 지명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이미 이슬람 성지의 차원을 넘어서 당대 유행의 본산지로서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전자상가의 메카는 서울 어느 지역이고, 자동차 생산의 메카는 독일의 어느 지역이라는 식이다. 중심지와 본산지를 의미하는 단어로 상징되는 메카는 이슬람의 성지이고, 무슬림이라면 반드시 성지 순례를 해야 하는 곳이다.
당시에 메카는 다신교의 성지이기도 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는 고대 종교도시이자, 교역·상업도시였다. 페르시아·바빌론·시리아·이집트·인도 등과의 교역이 성행하여 국제무역의 허브 지역이기도 했다. 또한 인도양과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통상의 요지였다.
메카라는 도시를 움직이는 부족이 바로 무함마드의 부족인 쿠라이시 부족이었다. 이들은 아랍인들 중에도 명문이고, 부자이고, 뛰어난 장사꾼들이었다.
메카 중심에 있는 카바 신전은 이슬람 이전 시대에는 다신교도의 총본산으로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카바 신전은 무함마드가 메카를 정벌한 후, 전 세계 이슬람교도들의 중심이 되었다.
이전에는 카바 신전에서 숭배되는 신의 수가 수백이 넘었다고 한다. 모든 부족이 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있었고, 알라도 이중 중요한 신의 하나였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이 모든 신들을 우상으로 보았다. 그에게는 유일신인 알라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신이었다.
무함마드는 아버지 압뚤라와 어머니 아미나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인 압둘 무딸립이 갓 태어난 손자를 카바 신전으로 데리고 가 무함마드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막에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무함마드가 6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자애롭고 인정심이 많은 할아버지인 압둘 무딸림의 보호를 받고 자라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숙부인 아부 딸립 밑에서 자랐다.
유아 시절(6살 이전)에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유모인 할리마의 손에서 자랐다. 할리마의 젖을 먹으면서 사막에서 유아 시절을 보낸 무함마드에게 신비한 일이 벌어졌다.
무함마드가 3살 때 예언자로서 알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사막의 천막에서 유모의 아들과 함께 놀고 있던 세 살 박이 무함마드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유모가 무함마드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와서 나를 눕힌 다음 내 배를 가르고 내가 모르는 것을 꺼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무함마드가 천사로부터 계시를 받앗다는 히라 동굴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로서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무슬림에게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무함마드는 자신이 고아였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 외로운 영혼에 대한, 가난하고 길을 잃은 영혼에 대한 꾸란(코란)의 한 구절을 읽어 본다.
알라께서는 고아인 그대를 찾고 돌봐 주지 않았느냐. 알라께서는 길 잃은 그대를 찾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지 않았느냐. 알라께서는 가난한 그대를 찾고 부자로 해주지 않았느냐.
청년이 된 무함마드는 목동이 되었다. 외로운 사막에서 양치기 목동이 되기 전부터 청년 무함마드는 메카 사람들로부터 ‘믿음직스러운 자, 성실한 자, 충실한 자’라고 불리면서 진리에 대한 생각을 키워 나간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배우지는 못했지만, 목동을 하면서 사막의 신비로운 고요함에 빠져 명상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 “알라께서는 양치기 목동이 아닌 자를 예언자로 보내신 적이 없다. 모세도 목동이었고, 다윗도 그랬으며, 나 또한 야즈야드에서 내 가족의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면서 예언자 직을 맡게 되었다.”
하칼스는 목동 시절의 무함마드를 이렇게 묘사했다.
“영리하고 예민한 목동은 낮에는 광활한 하늘을 보면서, 그리고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깊은 사색에 빠졌을 것이다. 그는 높은 창공 너머를 꿰뚫어보며 주변의 자연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의 깊은 통찰력으로 보아 주변 세계가 자신의 내면 세계와 거의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을 것이다. 날숨과 들숨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생각했을 것이고, 태양이 햇살을 비추며, 달이 빛을 반사하여 길을 안내한다는 것과 높고 광활한 창공에 널려 있는 천체가 모두 엄정한 궤도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태양이 달을 따라 잡을 수 없고 밤이 낮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신경을 쓰고, 모래 언덕 뒤에서 늑대가 나타나 잡아가지나 않을까 경계를 하며 잘 지켜야 하는데, 이 우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큰 주의와 인내가 필요하겠는가?”
목동생활은 무함마드에게 수도자들의 덕목인 청빈과 사색의 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무함마드는 배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배불리 먹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이후 호메이니와 같은 이슬람 지도자들이 소중하게 여긴 덕목이기도 하다. 무함마드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보다는 영혼과 진리의 빛을 찾아 사막의 낙타처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고민하는 삼촌의 청으로 무함마드는 당시 부유한 상인이면서 미망인이었던 카디자의 일꾼으로 고용된다. 마흔 살의 미망인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인품에 반해 다른 명문 부자들의 청혼을 물리치고 가난한 목동 출신인 무함마드와 결혼을 한다. 무함마드는 낙타 새끼 20마리를 선물로 주고 카디자와 25세에 결혼했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받기 전인 15년간 자식들을 낳고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무함마드가 분쟁의 진원지인 흑석을 옮기다.' 1315년 경에 그려진 페르시아 세밀화다. 긴 수염을 기른 무함마드(가운데)가 천 위에 흑석을 올려놓고 있다.
이 시절에 부족 간에 벌어질 뻔한 전쟁을 미연에 방지한 무함마드의 지혜가 발휘되기도 했다. 메카에 있던 카바 신전의 재건축 문제 때 발생한 일이었다. 너무 낡은 신전을 헐고 재건축을 하고 있던 중에 신성한 흑석을 동쪽으로 옮겨 놓을 때가 되었다. 공사에 참여한 부족간에 그 흑석을 누가 옮겨 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견이 생겼고, 서로 자기들이 놓겠다고 해서 분쟁이 생겼다. 그들은 신전의 문을 제일 처음 지나가는 자를 중재자로 삼기로 하고 기다렸는데, 그 문을 무함마드가 지나가게 되었다. 이미 믿음이 가는 자로 소문난 무함마드에게 그들은 중재를 부탁했다.
무함마드는 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한 뒤 긴 옷을 가져와 땅에 펼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흑석을 들어 그 옷에 올려놓고, 부족 대표가 옷의 귀퉁이를 잡고 같이 옮기게 했다. 결국 그 신성한 흑석을 옮긴 사람은 무함마드가 되었다. 왜냐하면 옷의 귀퉁이를 잡고 그 자리까지 간 후 다시 옷에서 흑석을 들어 그 자리에 놓은 것도 무함마드였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랍비나 수도승이 믿고 있는 경전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없음을 알았다. 무함마드는 당시 아라비아의 현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정 기간을 은거하면서 금욕과 기도로 보냈다.
40세가 된 무함마드는 그 동안의 풍족한 생활 속에서 만족을 찾을 수 없었고, 절대 고독의 상태에서 열병을 앓게 되었다. 벼락처럼 떨어지는 진리에 대한 갈증으로 영혼이 목말랐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히라 동굴이었다. 그곳에서의 고행이 무함마드에게 진리의 빛을 내려 주었다. 무함마드가 예언자로서 계시를 받은 히라 동굴은 메카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히라 산 정상에 있는 동굴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오른쪽)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내리고 있다.
수 년 동안 매해마다 수행하던 무함마드에게 목소리가 들렸다.
610년, 신의 첫 계시가 내려온 것이다. 수 개월간의 수행생활에 지친 무함마드가 동굴에서 선잠에 들었을 때, 천사가 그의 손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무함마드에게 “읽어라” 라고 말했다. (이슬람 경전 ‘꾸란’은 아랍어로 ‘읽어라’라는 뜻이다.) 무함마드는 깜짝 놀라 “무엇을 읽으란 말입니까”라고 되물었고, 그때 천사는 무함마드를 포옹하면서 다시 “읽어라” 하고 말했다. 포옹에서 풀려난 무함마드는 다시 되물었고, 천사는 다시 뜨겁게 포옹하면서 “읽어라”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리고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읽어라. 그분은 한 방울의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노라. 읽어라. 주님은 가장 은혜로운 분으로 연필로쓰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도 가르쳐 주셨노라.”
(꾸란 96장.1-5절)
유일신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코란)은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들려온 알라의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다. 꾸란은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610년에서부터 632년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동안 무함마드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한 것이다.
예언자의 확신을 준 무함마드의 아내 카디자
천사의 음성을 들은 무함마드는 한동안 자신이 귀신 들린 것인지 불안해 하다가, 드디어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알게 되었다. 예언자의 확신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무함마드의 아내 카디자였다. 그녀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알아보고 당신이 이 민족의 예언자가 될 것을 믿으며, 또 그렇게 기도한다고 했다. 계시를 받고 힘들어하던 무함마드는 아내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자면서 쉴 수 있었다. 그녀는 이슬람의 첫 성도가 되었다.
하지만 예언자로서 메카의 삶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다신교의 관습에 젖어 있는 메카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새로운 종교를 일으킨 무함마드는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614년(44세)부터 대중 전도를 시작했다. 조금씩 메카 사람들이 이슬람교도가 되기 시작했다. 619년(49세)에는 하심가의 가장이자 숙부인 아부 딸림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무함마드의 가문인 하심가는 더 이상 무함마드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도 이미 그의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다.
같은 피를 나눈 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무함마드는 사막을 홀로 걸어가는 낙타가 되었다. 그렇다. 무함마드는 지상에서 제일 느린 낙타가 되어 이슬람 세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메카에서의 종교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전도를 할 수 없게 되자, 메카 동쪽에 있는 다이프에서 이슬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다이프 시민들은 무함마드에게 돌을 던지면서 쫓아 버렸다. 깊은 밤 돌팔매질을 피해 홀로 포도밭에 엎드린 무함마드는 알라에게 기도를 올렸다.
“주님, 저는 당신께 제 힘의 약함, 능력의 결핍,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제 지위의 낮음을 호소합니다. 당신께서는 약한 자의 주이시며 또 저의 주이십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누구에게 맡기시려고 하십니까? 저를 곁눈으로 보는 먼 곳 사람들입니까? 그러면 저를 맡고 있던 적에게 말입니까? …… 저는 당신의 영광에서 위안을 구합니다. 당신 이외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게 뿌리를 내리고, 620년 순례의 달에 6명의 순례자들이 무함마드의 제자가 되어 돌아갔고, 다음 해 순례의 달에 6명 중에서 5명이 7명의 제자를 데려와 모두 12명이 무함마드의 제자가 되었다.
한편,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은 무함마드가 언젠가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을 짐작하였다. 무함마드는 이러한 쿠라이시 부족의 감시에서 벗어나 메디나로 이주할 것을 결심하였다.
무함마드는 622년(52세) 7월 16일 메카를 떠났다. 이 일은 무함마드의 ‘헤지라’ 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 해가 이슬람력의 원년이 된다.
무함마드와 그의 수행자들이 메카로 향하고 있다.
무함마드 주변에 천사 가브리엘, 미카엘, 이스라필, 아즈라일이 나타나 메카 입성을 수호하고 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역경을 극복하고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이슬람 공동체를 만들고 교단국가의 기초를 세웠다. 이것은 고대 아랍사회의 전통적 기반으로 존중 되어온 피의 연결인 부족 공동체가 아니라, 민족과 혈연을 뛰어넘어 알라를 믿는 모든 이들이 공동의 예배와 공동의 생활을 하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킬 기초를 말한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전도를 하기 위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전투를 벌였다. 전투 중에서 바드르 전투와 우흐드 전투가 있다.
624년(54세) 바르트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두 배가 넘는 쿠라이시 부족의 대군을 격파해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로 많은 아랍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우흐드 전투에서는 이슬람군이 대패 했다. 이슬람교 전파는 가시밭길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메카의 입성은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무함마드는 쿠라이시 부족을 멸망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명문 쿠라이시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었고, 이들을 이슬람 전파자로 만들어야 했다.
630년(60세) 메카로 무혈 입성한 무함마드는 카바 신전에 있는 수많은 우상들을 때려 부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한 행위와 같다. 그리고 카바 신전에서 다신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고 다시 메카를 떠났다.
그리고 2년 후에 마지막 메카 순례를 한 후 무함마드는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사랑하는 아내인 아이샤의 품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아이샤는 예언자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예언자의 머리가 내 무릎 위에서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눈이 고정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그분이 ‘오히려, 지고하신 알라와 천국’이라고 중얼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리를 가르치라고 당신을 예언자로 보내신 분께 맹세코, 당신은 선택을 받았으며, 당신은 잘 선택하셨습니다.’ 예언자는 내 폐와 가슴 사이에 머리를 두고 숨을 거두셨다. 나는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그분을 내 무릎 위에서 돌아가시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머리를 베개 위에 올려놓고 일어나 통곡하였으며, 다른 부인들이 슬픔과 애도를 함께 나누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였다. 그는 많은 부인을 거느린 이슬람 사람이었다. 부활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모든 무슬림들의 몸 속에서 부활해 지금까지 깃들어 있다.
무함마드에 관한 책은 최영길 교수가 사명감을 가지고 출판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최명길 교수는 무함마드와 이슬람에 대한 많은 저서를 출판 했는데, 그 중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생애 저자 H.하이칼 >를 읽었다. 무함마드의 생애를 평전 형식으로 기술한 이 책은 무함마드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 경전인 <코란(꾸란)>은 무함마드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경전이다.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될 경전일 것이다.
하르트무트 보브친의 <무함마드는 이렇게 말했다>는 코란과 이슬람의 고전에 묻혀 있던 무함마드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무함마드에 관한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들을 체계적이면서도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이 책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한 종교라는 맥락에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이슬람 형성과 무함마드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슬람 고전들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무함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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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미국의 권투 선수에 대해서는 무하마드 알리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베소 공의회와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몰린 경교같은 그리스도교의 마이너리티 교회들이 로마교회의 탄압을 피해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 계급은 5세기 말쯤 부근 황야에서 온 쿠라이시 부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 씨족 출신이다. 하심 씨족에는 아브드 알 무탈리브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아브드 알라였다. 아브드 알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상인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무함마드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고아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아브드 알 무탈리브에 의해 자라다가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브 탈리브에 의해 키워지게 된다.
삼촌 아브 탈리브는 가난했고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브 탈리브의 무역 활동을 따라다니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갔다. 그곳에서 바히라라는 이름의 경교 곧 그리스도교의 수도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대상에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후 무함마드는 목동일을 하며 자라나게 된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바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종교적인 영향을 주고 받았다. 신성한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바인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중 가장 강한 신을 알라라고 불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후에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목동이었던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탈리브를 생각하여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탈리브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하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샴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하디자는 무함마드에게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세, 하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하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조카 알리를 입양하였다.
네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사회는 건장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아들이 곧 인생의 전부인 상황에서 아들들의 죽음은 무함마드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큰 수치였기에 무함마드의 고민은 점점 더 해졌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 산(山) 동굴에서 명상에 잠기던 중, "무함마드여, 그대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계시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인 하디자가 무함마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사촌이자 이비아니교의 사제였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카 이븐 나우팔은 무함마드가 만난 것이 천사 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예언자라고 말하였고, 하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모두 말한 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하늘의 계시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전지 전능함, 만물의 창조, 최후의 심판 및 천국과 지옥 등을 주장하고, 자신이 '알라의 사자'라고 믿고 설교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하자, 메카의 카바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는 잡신을 배격하고, 알라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설교함으로써 부유한 상인들의 미움을 받았다. 이에 신도들을 메디나로 피난시키고, 자기 혼자 메카에 남아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8년에 발매된 인도 출신의 영국 문학가인 살만 루시디의 소설, 《악마의 시》에는 무함마드를 비롯한 이슬람에 대한 비하 내용이 주를 이루어 이란에서 궐석 재판이 진행되어 사형이 언도되었다.(그러나 궐석 재판으로 진행되었고 살만 루시디는 이란 밖에 체류하였기 때문에 집행되지도 않고 체포되지도 않고 있다.) 또한, 이 소설을 번역한 각 언어의 번역자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에 덴마크 일간지 윌란스 포스텐지에서 무함마드를 테러리스트로 비하하는 만화가 출시되자마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는 우상 숭배 반대 시위가 잇따랐으며, 유럽 대사관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은 종교적 맹신이 얼마만큼 사회에 치명적인가를 보여주며 종교의 신성과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을 불렀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50세 되던해 9세가된 아이샤와 결혼을 하였다. 이것은 중동사회의 모델이 되어 현재에도 미성년 여아가 40~50되는 어른과 결혼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무함마드는 9세 되었던 아이샤와 성교를 가졌다고 한다.[2]
무함마드가 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말 중에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꾸란'이 있다. 이는 이슬람교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측면에서 왜곡한 말이라는 주장이 많다. 무함마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 터키 이스탄불. 성 소피아 사원에 대적하기 위해 1616년 술탄아흐메트가 건축였으며, 거대한 돔 주위에 7개의 첨탑과 4개의 부속 돔에 기둥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스도교·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알라의 가르침이 대천사(大天使) 가브리엘을 통하여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그리스도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유럽에서는 창시자의 이름을 따서 무함마드교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위구르족[回紇族]을 통하여 전래되었으므로 회회교(回回敎) 또는 청진교(淸眞敎)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⑴ 알라와 《코란(쿠란)》:알라는 다신교 시대부터 메카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되어 왔는데, 무함마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고 오직 알라만을 유일신으로 내세웠다. 알라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이와 동등하거나 비교될 존재는 없다. 모든 피창조물과는 엄격한 거리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경동맥(頸動脈)보다도 더욱 가까이 있다. 알라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주지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까지나 관대하고 자애에 넘쳐 잘 용서하고, 잘 들어 주고, 잘 보아 준다. 알라는 진리이며 빛이며 “동도 서도 알라의 것, 어느 쪽을 향해도 알라의 얼굴은 거기에 계신다. 골고루 존재하며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코란 2:11)고 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함마드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정리한 것이다. 현재의 《코란》은 650년경, 제3대 칼리프인 오스만의 명을 받들어 만들어진 표준본이다. 이 경전은 이슬람의 교의(敎義)·제도, 무함마드의 생애와 사상을 알 수 있는 근본 문헌이며, 무슬림들은 이것을 독송할 때마다 법열(法悅)의 경지에 빠져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힘과 미를 갖춘 것이지만 그 진가는 아랍어로 된 원전에 따르지 않고는 좀체로 이해하기 힘들다.
《코란》은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바를 해설이 없이 모은 것이므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후세 학자들이 쓴 많은 주석서(注釋書)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슬람의 법학(法學)·신학(神學)의 최고 근원은 역시 《코란》에 있다.
⑵ 이슬람의 근본신조:이 가르침의 정식 명칭은 ‘알 알이슬람’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유일 절대의 알라의 가르침에 몸을 맡긴다”는 말로서 즉 ‘귀의(歸依)’를 뜻한다. 그 가르침은 모두 명확한 아랍어로 계시되었고 무함마드도 이것을 아랍어로 전달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는 것이 이슬람교의 신조이며, 후에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라수르)이니라”가 추가되었다. 이 성구(聖句:카리마)를 외는 일은 신도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알라의 가르침을 모은 《코란》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관하여 “믿음이란, 그대들의 얼굴을 동으로 또는 서로 돌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란, 알라와, 최후의 날(최후 심판의 날)과, 천사들과, 여러 경전(經典)과, 예언자들을 믿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모든 사항을 믿는 것을 ‘이만’이라고 한다.
또 오로지 알라만을 믿고 그 외에 아무것도 숭배하지 않으며, 예배·희사(喜捨)·재계(齋戒) 등의 근행(勤行)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이 알라에 귀의하는 길인데, 이것을 ‘이슬람’이라고 칭한다. ‘이만’을 지닌 사람을 ‘무민’, 이슬람에 입교한 사람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므로, 이것들 모두가 이슬람교 신자의 호칭이다.
⑶ 이슬람 신앙의 요소:이슬람 신앙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음의 셋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지(知)’인데, 이것은 알라의 계시를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언(言)’인데, 마음으로 알고 또한 믿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일이다. 셋째는 ‘행(行)’인데, 이슬람교도로서의 의무(즉 5주 등)를 열심히 실행하는 일이다.
⑷ 오주(五柱):무슬림에게는 실행해야 할 중요한 의무 다섯 가지가 있다. 이것을 오주(아르칸 알이슬람:Pillars of Islam)라 하며, 이들 의무를 다함으로써 알라에게 봉사하는 일을 ‘이바다트(奉化 또는 勤行)’라고 한다. 《코란》에서는 희사와 단식(斷食)을 중요한 봉사로 들고 있으나, 후세에 이르러 다음의 다섯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① 증언 또는 고백(샤하다):“나는 알라 이외에 신이 없음을 증언합니다. 또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명합니다”를 입으로 왼다. 신도는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증언을 고백하게 되어 있다.
② 예배(살라트):일정한 시각에 규정된 형식에 따라 행하는 예배를 말하며, 개인적으로 수시로 행하는 기도는 ‘두아’라고 부른다. 예배는 하루에 다섯 번을 일출·정오·하오·일몰·심야에 하며, 특히 금요일 정오에는 모스크에서 집단예배를 행한다.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메카가 있는 쪽을 향하고 행한다.
③ 희사(자카트) 또는 천과(天課):국가재정의 근간을 이루며, 비이슬람 국가에서는 선교기반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불가결한 무슬림의 의무중의 하나이다.
④ 단식(샤움):성년인 무슬림은 매년 라마단 월간(月間:제9월) 주간(晝間)에 음식·흡연·향료·성교를 금하고, 과격한 말을 삼가며 가능한 한 《코란》을 독송한다. 단 음식은 흰실과 검은실의 구별이 안 될 만큼 어두워진 야간에는 허용된다. 라마단 월이 끝난 다음 새 달이 하늘에 떠오르면 단식완료의 축제가 시작되는데, 화려한 의상을 입은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서로 축하하는 풍습이 있다.
⑤ 순례(하주):모든 무슬림은 매년 하주의 달(이슬람력 제12월)에 카바 신전 부근 또는 메카 북동쪽 교외에서 열리는 대제(大祭)에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참가할 의무가 있다. 능력이 없는 자는 하주를 못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해에 따라 일정하지는 않으나 현재도 매년 약 20만 명에 달하는 신도가 하주에 참가하고 있다. 메카 다음가는 성지는 메디나에 있는 무함마드 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예루살렘의 여러 성적(聖蹟) 등이 있으며, 또 시아파(派)의 무슬림은 알리의 묘(墓)가 있는 나자프, 알리의 아들 후세인의 묘가 있는 카르발라, 이란 동부의 마슈하드 등을 순례하는 사람이 많다.
⑸ 교도의 일상생활:이슬람 세계는 많은 이민족을 포함하고 있어 그들은 각각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요소는 지극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많은 무슬림은 하나의 형으로 통일되어 공통의 생활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샤리아(이슬람법)로써 통제되어 있기 때문이며, 샤리아는 《코란》과 《하디스 Hadith》(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의 전설에 관한 서적에 사용되는 명칭)에 입각하여 제정된 이슬람법이다. 무릇, 무슬림된 자는 출생에서 사망까지 이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도록 요구된다.
인간의 행위는 5가지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① 반드시 행해야 하며 이것을 하면 보상을 받고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 ② 가상(可賞)할 행위로, 이것을 행하면 보상받으나 행하지 않아도 벌을 받지 않는 것, ③ 허용된 행위로, 이것은 행하여도 보상도 없고 벌도 받지 않는 것, ④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이것은 행하여도 벌을 받지 않지만 그래도 행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⑤ 금지된 것으로 이것을 행하면 알라의 벌을 받는 것이다(하람, Haram:이슬람법 용어).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거나 음주하거나 하는 일은 하람 ⑤에 해당한다. 그러나 하람에 대하여는 시대와 지방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어 약간은 허용되는 경우도 있다.
중세 이래 모스크는 교도의 생활중심이 되어 왔으나 11세기 투르크가 각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오로지 예배장소로만 되고, 그 밖의 기능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를 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샤리아에 따라 규정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의 성립
본문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반도 중부, 홍해(紅海)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인 동시에 카바 신전과 북동쪽 구릉지대는 옛날부터 유대교 ·그리스도교의 신성한 영장(靈場)으로 되어 있어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巡禮者)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코레이시족(族)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무함마드는 아버지가 죽은 후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얼마 후에 죽었으므로 어린 무함마드는 할아버지에게 맡겨졌고, 그 후 숙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전해져 그 신도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는데, 메카에도 그 영향이 미쳐 신은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나타났는데, 그들을 ‘하니프(Hanif)’라고 불렀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여전히 다신교(多神敎) 신당에 빠져, 돌 ·천체 ·샘 ·수목 등을 숭배하였다. 하니프들은 이에 반대하여 세계의 종말은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때는 선한 자는 복을 받고 악한 자는 벌을 받게 되고, 유일신은 곧 창조주이며 인간에 대하여 선의를 갖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무함마드가 자신은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을 모든 아라비아 백성에게 전도할 사명을 띤 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은 40대에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다분히 하니프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무함마드가 메카 근교의 힐라산(山) 동굴에서 최초로 하늘의 계시를 받은 후 맨 처음 그의 아내 하디자가 입신(入信)하였는데, 그 후 그녀는 메카의 박해시대에는 자주 남편의 힘이 되어 주었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40명, 10년 만에 겨우 100명의 신도밖에 얻지 못하였고 게다가 메카의 집권자인 코레이시족의 박해가 날로 심해졌으므로, 이를 피하여 622년 9월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행(行)을 이슬람에서는 ‘헤지라[聖遷]’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아라비아에서는 어떤 명문 인사가 다른 유럽 부족의 보호를 요청하여 그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헤지라라고 하는데, 지금도 가끔 볼 수 있는 풍습이다. 무함마드의 운명과 이슬람의 장래는 이 헤지라를 통하여 일변하였다. 메카에서 이주한 교도(무하지룬)와 메디나의 협력자들은 힘을 합쳐 교단(敎團:움마)을 조직하였다. 이것이 이슬람교의 시초인데, 후에 점차 강화되어 이슬람교단은 국가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무함마드는 교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메카군과 싸워 630년 1월에는 마침내 메카를 정복하고, 카바 신전(神殿)을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어놓았다. 얼마 후 아라비아인의 태반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그 광대한 아라비아 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된 것은 실로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의 이상은 종래의 부족단위의 사회를 하나의 이슬람 교단으로 바꾸어, 알라의 가르침에 따라 전체 교도를 한 형제로 삼는 평화스런 사회를 만드는 데 있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632년 6월 메디나의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이슬람교의 이단파와 수피즘
본문
↑ 수피 댄스 / 이집트 전통 춤.
이슬람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이지만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는 그것만으로는 교의상 판단이 곤란한 경우가 많아, 그러한 때에는 ‘수나(무함마드의 언행)’로써 보완되었다. 그리고 이 수나를 중요시하여 이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수니파(派)라고 하여 이것이 이슬람교의 정통파로 지목되는데, 이슬람교도의 대부분이 수니파에 속한다. 아라비아의 원시 이슬람은 다른 여러 민족을 정복함에 따라 많은 종교와 사상에 부딪쳐, 이들을 받아들이거나 동화시키는 과정에서 몇 개의 이단적 유파(流派)가 생겨났다. 페르시아만 연안의 뱃사람이나 장사꾼을 그 주축으로 하는 하리지파(派)가 그 최초의 것인데, 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으나 현재는 오만 ·동아프리카 ·북아프리카 등지에 약간 잔존할 뿐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혈통은 딸 파티마와 제4대 칼리프인 그의 조카 알리와의 사이에 태어난 하산과 후세인의 두 아들 계통으로 전해졌는데, 이 중에서 특히 후세인의 계열을 교주로 추대하는 시아파(派)는 후에 이란의 종교사상을 받아들여 최초의 이단적 종파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교리는 70개로 분열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는데, 확실히 시아파는 많은 지파(支派)로 분열되어 극단파를 낳았는데, 개중에는 이미 이슬람교로 간주할 수 없게 된 것까지도 있다. 이같이 이단 종파는 상당수가 있으나, 신도수는 전체의 10 %에도 못 미친다. 이슬람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수피즘(또는 수피파)은 원래 원시 이슬람 사회 안에서 금욕 ·고행을 주의로 삼는 일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리스 사상과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 등의 신비주의까지 받아들여 사상계의 일대조류로 발전하였다. 이 수피즘은 이슬람 신앙의 형식주의, 행위의 표면만을 보고 사람을 심판하는 이슬람법에 대한 반동에서 발전한 것으로, 이슬람교가 세계적 대종교로 발전한 것은 실은 이 수피즘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반면 이슬람 사상 속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배격하려는 자도 있다.
이슬람교의 발전
본문
↑ 오마르회교사원 / 이스라엘 예루살렘.
⑴ 이슬람권의 확대:마호메트의 사후, 교단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에스파냐)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 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강(江)의 싸움에서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天山南北路]의 투르크족(族)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人)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西)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그리스도교도의 역정복(逆征服)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人)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왕조는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공략, 비잔틴 제국(帝國)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한국의 이슬람교
본문
불교와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생소한 이슬람교가 그 두꺼운 벽을 뚫고 한국에 전래된 것은 1955년이다. 이슬람교의 전파는 1955년 9월, 6 ·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던 터키 부대의 압둘 라흐만 종군 이맘(성직자를 가리킴)과 주베르코취 종군 이맘의 지도와 협조 아래 김진규(金振圭)와 윤두영(尹斗榮)이 선교를 시작하였다. 한국 이슬람교 협회를 발족하고 초대 회장 김진규, 부회장 겸 사무국장 윤두영과 신도 70여 명으로 서울 동대문구이문동에서 시작되었다. 초창기 10여 년 간에 선교 ·운영의 난관을 극복하고 65년 한국 이슬람교 중앙연합회로 재발족, 67년 3월 재단법인 한국이슬람교로 인가되어 신도 7,500명의 교세를 갖게 되었다.
76년 5월 현재의 용산구한남동에 중앙성원(中央聖院)을 건립하고(사우디아라비아 기타 6개국의 원조로), 80년 항도 부산에 제2성원, 81년 경기 광주에 제3성원, 86년에는 안양시에 제4성원과 전주시에 제5성원을 건립하였다. 또한 해외교포를 위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인도네시아에 지회가 설립되고 국내의 신도수 약 3만 4000명의 교세를 가지게 되었다. 80년 5월 대통령 최규하는 사우디아라비아 방문 당시 칼리드 국왕과의 공동성명을 통하여 한국 이슬람대학 설립 공사비 일체의 제공을 확약받았으며, 경기 용인에 13만 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기공식을 가졌다. 한국의 이슬람교는 70년대의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두드러지게 교세 확장을 보였는데, 매년 중동 각지에서 무슬림이 되어 귀국한 1,700여 명의 기능근로자 신도들을 핵으로 삼아 신도 배가운동을 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이슬람교는 한국인의 유교적 전통이나, 현대의 남녀동등 사상까지의 차이점 일부일처주의의 헌법조항에 배치되는 일부다처주의 등을 비롯하여 예배의식의 용어 및 교리의 토착화 등 여러 가지로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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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아랍어:الإسلام al-islām듣기(도움말·정보))는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는 단일신 종교로, 기독교, 불교와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이슬람”이란 뜻은 “복종, 순종”이란 뜻이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는 남성일 경우 무슬림이라고 하고 여성일 경우,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교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지브릴(아랍어:جبريل)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1]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순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으나, 시아파를 따르는 무슬림은 전체 무슬림 인구의 약 10%를 차지하는 소수이며,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순니 이슬람 안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2]
이슬람 : 흔히 “이슬람교”라고 불리는 종교의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중국에서 이슬람을 회회교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3] 이슬람은 복종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단어 자체에는 평화란 뜻은 없다. 간혹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이슬람은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영어이름)를 믿는 종교라기 보다는 <제도>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알라(하나님)를 단일신으로 믿고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믿어야 무슬림이 된다.
무슬림 : 이슬람에 복종한 자, 곧 이슬람을 믿는 이슬람 신자를 가리킨다. 여자는 무슬리마이다.
이슬람의 성지(聖地)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중부, 홍해 연안에서 약 80 km 지점의 불모지 골짜기에 위치하는 도시로, 인도양에서 지중해안에 이르는 대상로(隊商路)의 요지였다. 옛날부터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았으며 에비온파, 마르얌파, 네스토리우스교등 기독교 이단이 로마의 이단정죄를 피해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다. 메카는 카바 신전을 중심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종교적 중심지였기에 매년 많은 대상과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메카의 지배계급은 5세기 말경, 부근 황야에서 온 꾸라이쉬족이었으며 무함마드는 그 중의 하심가(Hashim 家) 출신이다. 하심가에는 압둘 무딸립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열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의 이름이 압둘라였다. 압둘라는 아미나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난다. 무함마드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 아미나도 메디나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중 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는 하녀의 손을 잡고 메카로 돌아와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에 의해 자라다 할아버지가 죽자 삼촌 아부 딸립에 의해 양육된다. 삼촌 아부 딸립은 가난했는데다 딸린 식구들이 많아 무함마드는 어린 나이부터 삼촌 아부 딸립을 따라 시리아 지방으로 무역 대상을 떠나게 된다.
12세에 무함마드는 삼촌을 따라 시리아로 간다. 그곳에서 네스토리아(경교) 수도사를 만나게 된다. 바히라라는 캬라반을 타고 가는 무함마드에게 예언자의 징표가 있다고 말하였다.
당시 아라비아 각지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 이단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비 인들도 아라비아에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서로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주었다. 신성한달이라 불리던 9월에 금식을 행하던 것은 사비 인의 종교적 영향이다. 유대인들과 기독교 이단들의 영향으로 일신론 사상이 아라비아 반도에 전해지긴 했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다신교 신앙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카바 신전에는 360개의 우상들이 존재했는데 그 우상들은 '알라'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알라'라는 호칭은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한데 아랍어로서 '하나님'을 뜻한다. '알라'는 이슬람에서 유일한 숭배의 대상이다.
무함마드는 가난했던 삼촌 아부 딸립을 생각하며 수익성이 좋은 직업을 구했고 삼촌 아부 딸립의 소개로 부자였던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녀를 대신해 시리아 지방으로 대상 무역을 떠나게 된다. 무함마드의 이 무역은 큰 성공을 거두고 현재의 시리아 지방의 특산품을 구해 메카로 돌아왔다.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정직성과 신실함에 깊은 감명을 받고 15살이나 어린 무함마드에게 청혼을 하였다. 무함마드 25세 카디자 40세에 둘은 결혼을 하였다. 부자였던 카디자와의 결혼은 무함마드에게 부와 명예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삼촌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알리를 입양하였다.
무함마드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으나 무함마드에게 불행이 닥치기 시작했다. 네명의 딸은 잘 성장하였으나 그의 아들들이 유아때 계속 사망한 것이다. 당시 사회는 건장한 남자가 대상무역을 떠나 성공하는 것이 영웅시 되던 때였기에 건장한 사내아이를 선호하였다. 아들이 곧 인생의 전부인 상황에서 아들들의 죽음은 무함마드에게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독자연구?]. 무함마드의 부와 명예로 인해 사람들은 그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이 없다는 것은 그 당시 큰 수치였기에 무함마드의 고민은 점점 더 해졌다.
경제적인 부는 그에게 여유를 주었고 무함마드는 금식하며 사색하며 진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무함마드는 히라산 동굴에서 첫 계시가 임하게 된다. 무함마드는 겁에 질려 집으로 돌아와 죽은듯 했는데 부인이었던 카디자가 무함드를 진정시키고 자신의 삼촌이자 에비온 파이었던 와라까 븐 나우팔에게 가 사정을 설명하였다. 와라까는 무함마드가 만난것이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이었다며 무함마드가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말하였다. 카디자는 집으로 돌아와 무함마드에게 삼촌이 말한 것을 모두 알려주었고 그의 예언자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무함마드)는 이슬람에서의 최초의 무슬림이 된다.
첫 계시를 받은 후 점차 무함마드의 양자들과 노예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하였고 3년째 되던해 무함마드는 자신의 친구와 친족을 모아놓고 단일신 알라(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와 친족들은 그를 비난하고 모욕하여 무함마드를 무시했다. 그러자 무함마드는 메카로 오는 순례객들에게 단일신 사상을 전하기 시작했고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지키며 순례객들로 수입을 얻었던 부족원들이 무함마드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무함마드는 AD619년에 큰 슬픔을 얻게 된다. 첫 무슬림 신자이자 자신의 큰 후원자였던 부인 카디자가 죽은것이다. 또한 자신의 방패가 되어주던 삼촌 아부 딸립도 그 해에 세상을 떠난다. 무함마드는 고통속에서도 줄어들지 않는 박해와 핍박에 대항하기위해 무슬림 공동체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로 결정, 자신의 친구였던 아부 바크르의 딸 아이샤와 결혼을 추진한다. 이때 무함마드의 나이가 50이었고 아이샤의 나이가 9살이었다.
핍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를 피하여 622년 메카 북방 약 400 km 떨어져 있는 메디나로 갔다. 신도들도 이때를 전후하여 메디나로 피난, 그곳 협력자들(안사르)의 집에 수용되었다. 이 메디나 행을 이슬람에서는 ‘히즈라<이주>’라고 하는데, 이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메디나에 도착한 무함마드는 자신의 말이 멈춘 수하일의 과수원 땅을 사서 최초의 사원과 자신의 집을 지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다섯번씩 알라(하나님)는 위대하다고 암송하며 절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선지자의 권위를 확립하고 아라비아 부족의 통일을 꿈꾸기위해 종교적인 일과 세속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는 형태의 이슬람교 조직 체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즉 제정일치의 사회를 무함마드는 추구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선지자됨을 증명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자신도 이브라힘의 도를 믿는다고 하며 접근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무함마드를 거짓 선지자로 부르며, 예수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았듯이 유대인은 그의 예언자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무함마드는 무슬림 공동체의 민생 문제와 자신의 권위를 위해 메카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대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탈취한 노획물은 무슬림들의 식량이 되었고 군자금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경제 정책과 보상규정을 정해 그의 군대는 점점 강력해지고 증가하였다. 무함마드와 메디나에 거주하던 유대인 부족간에는 결국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유대인들은 모든 재산을 남겨놓은채 추방당하거나 목이 잘려 죽었다. 이리하여 이슬람교에서는 지금도 금요일에 쉰다.
메디나를 정복한 무함마드는 종교적 중심지이며 자신의 고향이었던 메카를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AD 628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신전을 순례하러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3월은 아랍에는 신성한 달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메카의 사람들은 무함마드가 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그에게 2년에서 10년까지의 평화조약을 요구하고 무함마드는 요구에 응한다. 그리고 2년 후 AD630년 1만명의 무슬림은 무기를 지니지 않은 채 메카로 향하였고 결국 메카로의 무혈 입성을 이루어낸다. 메카로 입성한 무함마드는 알라후 아크바르(하나님은 가장 위대하시다)를 외쳤고 무슬림들이 따라 외쳤다.
무함마드는 카바신전의 우상들을 다 부숴버렸고 유일신 알라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포를 했다. 그때 메카의 모든 집에 있던 우상들이 다 부숴졌다.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보름을 지내고 메디나로 돌아와 이듬해 아라비아 북서쪽 타북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AD632년 무함마드는 메카의 카바신전을 참배하고 메디나로 돌아오던 중 심각한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은 신도의 장로 중에서 교통(敎統)의 후계자인 칼리프를 선출하였다. 그 후 아라비아 반도 밖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633~664년 시리아 ·이라크 ·북부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여러 곳에 기지도시(基地都市)를 건설하였다. 그 후에도 정복사업은 계속되어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는 서쪽은 북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까지, 다시 711년부터는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였고, 동쪽은 중앙아시아와 인도 북서부까지 그 지배력이 미쳤다.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의 중추부까지 진출한 군은 732년푸아티에 북방의 싸움에서 패퇴하였으나, 동방에서는 751년 여름 탈라스 강의 싸움에서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가 이끈 당군(唐軍)을 대파하고 중앙아시아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아바스 왕조 초기 100년간은 칼리프 정권의 전성기였는데, 그 후 이베리아는 우마이야가(家) 일파에 의하여 독립하고, 이어서 모로코 ·튀니스 ·중앙아시아 ·이란 동부 ·이집트 등에도 독립정권이 출현하여 칼리프의 직할지는 점차 축소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자 921년 이후 볼가강 중류의 불가르족(族)이, 이어서 960년 이래 톈산남북로의 투르크족이 다같이 대량으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아랍족, 이어서 이란인이 중심이었던 이슬람 세계는 이 무렵부터 투르크의 패권 밑으로 옮겨지는 경향이 생겨, 10세기 말부터는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의 마호무드왕은 자주 인도에 침입하여 이 지방의 이슬람화가 확고한 기반에 놓였다. 한편 동아프리카에는 740년 무렵부터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하여 1010년경에는 사하라 사막을 넘어 나이저 강변의 서 수단 지방에 있는 흑인 왕국에까지 이슬람의 세력이 미쳤다. 1071년 아르메니아의 만지케르트 싸움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은 비잔틴군을 격파하였다. 이 때부터 서아시아의 이슬람화 ·투르크화가 시작되었고,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 11세기 말~13세기 말의 거의 2세기에 걸친 십자군 운동이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도의 역정복이 진행되어 1493년에는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가 함락되고 마침내 이슬람은 북아프리카로 후퇴하였다.
이와는 달리 셀주크왕조와 교체된 오스만 왕조는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1453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 인도에 세력을 부식한 이슬람 교도는 이곳을 기지로 하여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면에 선교를 하여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는 15~16세기에 광범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슬람 교리는 매우 단순하게 여겨질 만큼 명료하게 정립되어 있다. 이슬람 교리는 이만(6가지 종교적 신앙)과 이바다(5가지 종교적 의무)를 기본으로 하며, 6신(信) 5행(行)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5행을 무슬림의 신앙생활을 받치는 다섯 기둥으로 보아 아르칸(기둥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순니파 무슬림에게 다섯 기둥(Arkan-al-Islam)은 샤리아(이슬람법)에 근거하며 무슬림에게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시아에는 ‘종교의 뿌리’(Usul-ad-Deen)로 알려진 다섯 가지 믿음과 ‘종교의 가지’(Furoo-ad-Deen)로 알려진 열 가지 의례가 있는데, 이 열 가지는 순니의 이슬람의 기둥과 유사한 것이다.
신앙고백 (샤하다) - 알라(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선언
기도 (쌀라) - 매일 5회의 기도
단식 (사움) - 이슬람력 9월(라마단) 한달 동안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음식 및 음료의 섭취와 성행위를 금한다.
자선 (자카) - 일반적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부자들의 재산의 2.5%나 농민들의 연 생산의 10-20%정도이며, 이 돈이나 생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진다.
메카 순례(핫즈) - 이슬람력 12월(둘 힛자)에 이루어지며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있는 모든 무슬림이 일생에 한 번 행해야 한다.
순니파는 교리로 인정하지 않으나 시아파및 몇몇 종파는 지하드를 교리로 삼는다. 지하드는 고투, 노력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신체 건장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다. 지하드는 소지하드와 대지하드로 구분을 하는데 하나는 내적인 자기수행과 절제, 금욕을 다른 하나는 이슬람 공동체를 비이슬람 공동체로부터 지키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의미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 브라질에 이슬람교가 극소수로 존재하며, 오세아니아에서는 파푸아뉴기니가 극소수로 존재한다. 실례로 유명한 흑인운동가인 말콤 X는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개종한 무슬림이다. 또한 다른 미국의 흑인들도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이들은 "블랙모즐렘"이란 단체를 만들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중에는 무하마드 알리(개종 전 이름은 카시우스 클레이)와 마이크 타이슨같은 권투 선수들도 포함되어있다. 대한민국에는 약 10만 명의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한국전쟁당시 터키군의 선교 활동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통교회로 자리잡고 있는 필리핀공화국을 제외한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에 의한 것이다. 한국인 신도는 약 2만 명 정도이다.
⑵ 분포 현황:현재의 이슬람 교도수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세계 인구의 약 25 %인 12억 내외로 알려져 있다. 지역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와 이란에 이르는 이른바 중동지역과, 동부 러시아, 투르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서부 ·중국 ·인도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주로 분포되어 있으며, 기타 한국 ·일본 등 세계 곳곳으로 선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예를 들면, 남 ·북미 지역과 유럽 지역에도 오랜 이슬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수백 만의 무슬림들이 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 지역에서의 이슬람 문화 ·역사 ·종교학에 관한 연구는 그 역사도 오래되었고 수준도 높다.
무함마드 사망 25년 뒤, 칼리파우스만 이븐 아판이 살해를 당하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그 뒤를 이었다. 우스만의 6촌인 다마스쿠스 총독 무아위야 1세는 알리가 우스만의 복수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내란 속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주전파와 협상파로 갈라졌다. 그중 주전파는 절대신 알라만이 중재를 할 수 있고 인간은 현 상황에서 계속 싸워야 한다면서 알리 진영을 떠난다. 이들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의 종파 카와리즈(탈퇴자)이다.
카와리즈파는 전투적인 행동주의자여서, 지하드(jihad 주로 ‘성전’으로 번역한다)를 여섯 번째 ‘신앙의 기둥’으로 삼았다. 661년 이들은 알리를 살해했다. 카와리즈파는 메카의 부족 꾸라이쉬의 자손만이 칼리파가 될 수 있다는 순니파의 전통적 견해를 비난하고, 독실한 무슬림이면 누구나 칼리파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민 평등주의적 입장과 아랍 귀족층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베드윈과 비아랍계 무슬림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지만 내분으로 뒷날 저절로 약화됐다. 현재는 알제리와 튀니지의 베르베르 지역,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오만에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청교도적인 정신은 18세기 사우디아라비아 건국의 기반이 된 와하브(Wahhab) 운동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빼앗긴 칼리파 자리를 살해당한 알리 가문에 되돌려주려는 운동으로써 시작된 것이 시아 이슬람이다. 시아는 '쉬아 알리(Shia Ali)' 즉 '알리를 따르는 사람들'에서 나온 명칭. 초기 칼리파들의 뒤를 이은 우마위야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1258)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중시한 쉬아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시아파는 우마위야 왕조 창시자 무아위야 1세가 알리와 파띠마의 장남인 하싼(Hasan)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ayn)은 680년 이라크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됐다. 카르발라와 인접한 나자프에는 이맘 알리, 이맘 후세인 사원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시아파들의 최대 순례지가 되고 있다.
후세인의 제삿날인 이슬람력 정월(Muharram) 10일, '모하라 아슈람'은 시아파들의 최대 추모제 날이자 명절이기도 하다. 신자들은 이날 길거리에 나와 행렬을 지어 후세인의 고통을 체험한다. 시아파는 초기의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떠받드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훗날 유대 유일신교의 한 분파인 그노시즘(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순니의 이슬람 주류와 신학적으로도 갈라섰다.
시아파와 순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이맘'이라는 인도자의 존재. 순니가 말하는 이맘은, 꾸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쉬아의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꾸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아야툴라 루흘라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종교지도자 알라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희생과 순교를 중시하는 시아파들은, 이 지점에서 구세주 신앙과 만난다. 특히 알리 이후 열두 이맘의 시기가 지나고 마지막 12대 이맘이 873년 사라졌다고 믿는 '열두이맘파'에게서는 메시아사상의 전형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사라진 12대 이맘이 오랜 은둔에서 벗어나 언젠가 지상에 구세주(마흐디)로서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다. 훗날 많은 이들이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등장하기도 했다.
시아파의 85%를 이루고 있는 열두 이맘파는 이란과 이라크 인구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에는 드물게 분포하고 있고, 레바논과 파키스탄, 인도 등지에 소수파로 존재한다.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경우 왕가는 알리의 자손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순니 말리키파다. 자이디야(Zayydiyah)파는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yd)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열두 이맘 중 후세인의 아들인 4대 이맘까지만 인정하는데, 여기에 자이드를 포함시켜 다섯 이맘파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자이디야파는 알리 이후 순니파 칼리프들을 인정치 않는다는 점을 빼면 교리상 순니와 같다. 예멘 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시아파 중 가장 논쟁의 여지가 많고 매력적인 것, 그런 이유로 옛 문헌이나 소설에 가장 자주 소재로 다뤄졌던 것이 이스마일파 즉 일곱 이맘파다. 그들은 열두 이맘파의 7대 이맘 무사 대신 6대 이맘 자아르 알 싸디끄(765년 사망)의 장남 이스마일을 추종하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빈민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압바스 왕조칼리프에 맞서 인기를 모았다. 10세기 한때 메카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스마일파의 또 다른 분파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족과 베르베르족 사이의 긴장을 이용해 권력을 잡고 파티마 왕조(909-1171)를 세운 우바이둘라 알 마흐디(909-934) 세력이다. 이들은 969년 이집트를 정복하고 옛 수도 푸스타트 근처에 까히라(al-Qahirah 승리자; 오늘날의 카이로)라는 도시를 세웠다. 칼리프조는 까히라에 거대한 도서관을 짓고 이슬람 교리의 본산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는 알 아즈하르(al-Azhar)성원(聖院)을 만들었다. 이 칼리파조는 11세기 초 국력을 키워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등지를 세력권에 넣었으며, 바그다드의 칼리프도 한때는 카이로의 세력에 맥을 못 췄다. 그러나 1171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흐 앗 딘(1138-1193; 살라딘)에 멸망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는 다시 순니파의 손으로 들어갔다.
암살단파는 '산상의 노인'이라 불렸던 이란계 지도자가 11세기 말 파티마조와 결별하고 이란과 시리아를 잇는 산악지대에 요새를 만들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에 중독돼 암살을 저지른다는 점에서 아사신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이는 영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중세 십자군 전쟁을 다룬 기록들이나 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서술(동방견문록)' 등 옛 문헌들에는 '산상의 노인'에 대한 전설이 많이 나와 있다. 암살단파는 자객을 이용, 주로 순니파 칼리프들을 살해했다. 현대의 학자은 암살단파가 예루살렘을 놓고 전쟁을 벌였던 기독교 세력보다는 오히려 순니 기득권층에 더 큰 위협이 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에 살해된 최초의 희생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말리크 샤 1세(1072-1092)의 재상으로 유명한 니잠 알 물크(1091년 사망)였다.
암살단파는 순니 지도층을 살해, '숨은 이맘'의 통치체제를 전 이슬람권에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13세기 내분이 일어나면서 약화됐고, 이란을 점령한 몽고군에 의해 섬멸됐다. 시리아의 분파도 이집트, 시리아에서 득세한 맘루크조에 의해 제거됐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추종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암살이 아닌 사업에 종사해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무슬림 부유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마일파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종파들로, 오늘날 레바논과 시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슬람 주요 교리에서 워낙 벗어나 있어, 쉬아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순니-쉬아 이외의 제3의 종파로 분류되곤 하며 심지어 이슬람이 아닌 다른 종교로까지 분류되기도 한다.
알라위파(Alawi)는 시아파의 알리 숭배를 극단화시켜 신격화했는데,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누사이르(Muhammad ibn Nusayr)의 이름을 따 '누사이리파'라 불리기도 한다. 레바논, 시리아에 많은 성스런 나무숲을 숭배할 뿐 아니라 기독교 의례까지 받아들여 부활절까지 축하하곤 한다. 시리아에서도 인구의 1%만이 알라위파이지만 장기집권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전대통령과 그 아들로 세습정권을 이어가고 있는 바샤르 알 아사드 현대통령이 이 종파인 덕에 권력층이 되어 있다.
드루즈파는 11세기 이스마일파에서 나온 다라지(Darazi)라는 인물이 숨은 이맘 '마흐디'를 자처하면서 창시했다. 비밀주의가 강하며, 레바논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신의 예언자 무함마드를 따르는 이슬람과 달리 하킴이라는 칼리파가 신의 현신이라 주장하며 일신론을 믿는다. 일부다처제는 금지돼 있고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며 영혼은 윤회한다고 믿는다. 이슬람의 하지(순례) 기간 축제를 열긴 하지만 순례 자체는 하지 않으며 라마단 금식도 하지 않는다.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찬양한다. 교리와 관행으로 보아, 이슬람이라기보다는 별도의 종교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19세기 중반 이란에서 나타난 바비파는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밥'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진리의 문을 뜻한다. 바비파는 구약성서와 조로아스터, 중국에서 전해져온 유교 사상과 불교 등의 예언자들을 모두 인정했다. 이들은 이란의 부패한 왕정에 반대하다가 잔혹한 탄압을 당했다. 대량학살에서 살아남은 추종자들은 바하울라라는 예언자를 추종하는 바하이파로 계승됐다. 바하이의 가장 큰 관용과 사회의식이다. 이들은 이맘 알리가 남긴 메시지는 사회를 개혁하고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여기에는 여성 평등, 교육과 국제평화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바하이는 대부분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적 병역거부와 금주 금연, 채식 등을 선호한다. 이들도 이란 정부의 박해를 받았으며, 왕정이 끝나고 1979년 이슬람혁명 세력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계속 탄압을 받고 있다.
아이유브왕조의 창시자(재위 1169~1193).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제국을 형성하고 국가 공인 종교를 수니파로 바꾸어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했다.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했다.
재위
1169년~1193년
별칭
살라딘
활동분야
정치
↑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 무덤 /
본문
살라딘이라고도 한다. 쿠르드족 출신으로 처음에는 누레딘왕조를 섬겼고, 1169년경 파티마왕조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1171년 파티마왕조를 넘어뜨린 뒤 시리아 정복에 나서고,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집트에 군사적 봉건제를 도입하여 강력한 군대를 편성하는 한편, 국가가 공인한 종교를 시아파(派)로부터 수니파[正統派]로 바꾸어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또한 십자군전쟁을 수행하여 제3회 십자군의 리처드 1세와 휴전협정을 맺어,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티나에서 권력을 확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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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은 1137년, 오늘날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 족의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쿠르드 족이라면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터키 국경 지역의 산악 및 평야에서 살아가는 민족으로, 아직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한동안 이슬람 세계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부족에서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해방자이며 구원자로 추앙되는 인물이 나왔던 것이다.
살라딘의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이고, 해석하자면 “욥의 아들이며 정의로운 신앙인 요셉”이라는 뜻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십자군 운동 당시에 그에게 톡톡히 쓴맛을 보았던 기독교인들의 발음을 따른 것이다.(이 글에서는 편의상 ‘살라딘’으로 통칭했다).
살라딘 이전의 아랍 세계와 십자군 운동의 시작
11세기 후반 근동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세력을 넓히면서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점령했다. 이로써 그곳을 방문하는 기독교 성지 순례자에 대한 위협이 증가하자 1095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자고 촉구함으로써 유명한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다(물론 십자군 운동의 ‘진짜’ 원인에 관해서는 유럽의 정치 경제적 이익 추구라는 설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제1차(1096-1099) 십자군은 성도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등의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말리크샤(1055-1092)의 사후에 이슬람 세계가 사분 오열되면서 십자군의 공세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슬람 세계의 주요 세력으로는 오늘날의 이란과 터키 지역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한 아바스 왕조,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등이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바그다드에 있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절대적 권위를 누렸지만, 현실적으로는 허울뿐인 칼리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각국의 술탄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셀주크 투르크의 통치가 150년 만에 막을 내리면서 그 영토 내의 여러 지역에서는 군웅할거의 양상이 펼쳐졌다. 그 중 시리아 지역의 이슬람 세력은 이마드 아딘 장기(1127-1146)와 누레딘(누르 알 딘, 1118-1174), 그리고 살라딘(1138-1193)이라는 세 명의 강력한 지도자를 거치면서, 분열을 극복하고 점차 세력을 규합하여 팔레스타인 연안의 기독교 국가와 맞서게 되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개막과 예루살렘 탈환
살라딘은 1137년, 오늘날의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 족의 귀족인 나즘 앗 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즘 앗 딘은 아들 살라딘을 얻은 직후에 오늘날의 이라크 모술로 가서 한창 세력을 키워 나가던 장기의 휘하로 들어간다. 1146년에 장기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은 누레딘의 휘하에서도 나즘 앗 딘은 계속해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살라딘은 당시 이슬람 세계의 정치 및 문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다마스쿠스에서 성장하면서, 굳건한 이슬람 신앙과 금욕주의적 생활 방식을 체득한다.
1163년[26세]에 살라딘은 숙부인 시르쿠를 수행하여 이집트 원정에 나선다. 원정 6년째인 1169년에 시르쿠는 카이로에 입성하고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불과 두 달 만에 갑작스레 사망한다.
곧 이어 32세의 청년 살라딘이 총독 자리를 이어받음으로써,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1169-1252)의 막이 오른다.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기 드 뤼지냥을 포로로 잡았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한 후대의 기록화(작자 미상)
1174년[37세, 재위 5년]에 누레딘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살라딘은 신속하게 반대파를 제거하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나란히 지배하는 술탄이 된다. 이로써 살라딘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국가를 동쪽과 남쪽에서 압박하게 되었고, 향후 10여 년에 걸쳐 기독교인 군대와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였지만,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1185년[48세]에 보두앵 4세가 사망한 직후,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그의 매제이며 기회주의자인 기 드 뤼지냥(1159/60-1194)이 약삭빠르게 왕위를 차지함으로써, 지도자들 간의 내부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때를 틈타 살라딘은 성전(지하드)을 선포하고,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국가를 향한 총공세를 펼친다.
1187년 6월 3일, 살라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은 하틴 전투에서 더위와 갈증으로 무력해진 기독교인 군대를 대파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 기세를 몰아 살라딘은 아크레, 베이루트, 시돈 등 기독교 국가의 주요 도시를 차례로 점령했고, 4개월후인 1187년 10월 2일에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루살렘 하면 보통은 기독교의 성지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한 뿌리를 지닌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특히 이슬람교의 입장에서는 메카와 메디나 다음 가는 성지였으니, 아브라함과 여러 예언자(이슬람교에서는 예수 역시 예언자로 존중하지만,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기독교와 다르다)의 활동 무대였으며,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천상에 다녀왔다고 전하기 때문이었다.
1099년에 제1차 십자군이 무자비한 대량 학살 끝에 예루살렘을 장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1187년에 살라딘은 그곳을 방어하던 기독교인과 협상을 벌인 끝에, 무혈 입성했다(물론 입성 후에는 적잖은 피바람이 불긴 했지만). 무슬림 측에서 보자면 무려 88년 만의 감격적인 탈환이었다.
살라딘과 리처드 1세의 대결:제3차(1187-92) 십자군
무슬림의 예루살렘 탈환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은 경악해 마지않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와 그 후임자인 클레멘스 3세의 새로운 십자군 파병을 호소에 여러 군주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 결과물인 제3차(1187-92) 십자군은 중세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이동이었다는 점뿐만 아니라, 살라딘과 리처드 1세(1157-1199)라는 중세 이슬람과 유럽의 두 영웅이 격돌했다는 점 때문에라도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아들로 당대 최고의 명성과 무훈을 자랑했으며, 훗날 로빈 후드 전설이라든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 등을 통해서 중세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리처드 1세(왼쪽)와 살라딘(오른쪽)의 대결은 훗날 유럽에서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그린 19세기의 동판화
제3차 십자군이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는 기독교 국가의 잔존 세력이 다시 한 번 결집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로 전투를 재개했다. 기 드 뤼지냥이 지휘하는 기독교인 군대는 무슬림이 장악한 항구 도시 아크레[Acre:악고(Akko)]를 탈환하려 육지에서 포위 공격을 가했고, 그런 기독교인 군대의 배후를 살라딘의 군대가 또다시 포위 공격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막강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적을 쉽사리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런 와중에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도착함으로써, 전세는 기독교인 군대 쪽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규 병력에 리처드 1세라는 탁월한 지휘관까지 보유한 기독교인 군대 앞에서는 살라딘의 대군조차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마침내 기독교인 군대는 1191년 7월 12일에 아크레를 함락했으며, 이후 느리지만 착실한 진군 끝에 이듬해 7월에는 예루살렘의 코앞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기독교인 군대가 무력으로 성도를 탈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순간에 군대를 되돌린다. 때마침 잉글랜드에서는 국왕의 부재를 틈타 그 동생(훗날의 존 왕. 폭정 끝에 귀족과 시민의 압력으로 마그나카르타를 승인하는 수모를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왕위 찬탈 음모를 꾸몄고,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도 일찌감치 십자군에서 발을 빼고 고국으로 돌아가, 휴전 서약을 깨트리고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영토를 잠식하는 중이었다.
1192년 10월 9일, 마침내 살라딘과 평화조약을 맺은 리처드 1세가 팔레스타인을 떠나 고국으로 향함으로써 제3차 십자군 전쟁은 일단 막을 내린다.
전쟁 내내 살라딘과 리처드 1세는 피차 칼끝을 겨누는 와중에도, 서로를 향해 비상한 관심과 호의를 드러냈다. 가령 술탄은 병상에 누운 잉글랜드 국왕에게 과일과 얼음을 선물했고, 전투 도중에 땅에 서서 싸우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고는 “체통에 어울리게 말에 올라 싸우시라”며 명마 두 필을 선물했다. 리처드 1세 역시 살라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췄으며, 심지어 (물론 어디까지나 말뿐이었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남동생을 결혼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을 떠나며 리처드 1세는 조만간 다시 돌아올 테니, 그때 가서 승부를 짓자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에 살라딘은 만약 내가 이 땅을 결국 누군가에게 잃어야 한다면, 차라리 당신 같은 훌륭한 적에게 잃고 싶다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대결은 결코 성사되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붙들려 1년 넘게 억류당했으며, 살라딘은 그 와중인 1193년 3월 4일[56세]에 갑작스레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살라딘의 사후에도 반세기 넘게 지속되었으며, 이후로도 지속된 제5차(1217-21), 제6차(1228-9), 제7차(1248-54) 십자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덕분에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 의해 점령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의 영토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이슬람 세계의 구원자로 다시 부각된 살라딘
살라딘은 탁월한 군사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로 수백 명을 처형하거나 노예로 팔아 넘기는 등, 그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시되던 전제군주 노릇까지 굳이 마다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의 면에서 살라딘은 상당히 관대하고 합리적인 면모를 종종 보여주었다.
전투에 임해서는 종종 단호하면서도 교활한 작전을 구사했지만, 때에 따라서는 타협과 외교라는 대안을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평소에도 살라딘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했고, 종교적 의무를 항상 앞세웠으며, 결코 정무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사유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 장례 준비를 할 돈조차 없었다는 후일담은 그의 검소함과 청렴함을 보여주는 증거로 언급된다.
살라딘은 사상 최초의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평가되는 아사신(암살단)과의 대결로도 유명하다. 원래 이슬람교 시아파의 신비주의 종파였던 아사신은 시리아 북부 산악 지대의 요새를 근거지로 삼고, ‘산 위의 노인’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지휘 하에 반대파 요인을 종종 암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아사신 단원은 잠든 사이에 인공의 낙원으로 옮겨져 극치의 환락을 맛보고 깨어난 경험을 토대로 사후세계의 존재와 보상을 확신하고, 이후 상부의 지시라면 제 목숨을 버려서라도 반드시 이행하곤 했다.
일찍이 시리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살라딘은 두 차례나 암살을 모면하고 분노한 나머지 아사신을 소탕하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자기 베개에 꽂혀 있는 아사신의 단검과 경고장을 보고 소스라친 나머지, 결국 패배를 시인하고 더 이상 아사신의 뒤를 쫓지 않았다고 전한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살라딘은 이슬람 세계보다 오히려 유럽에서 더욱 인기를 얻고 오래 기억되었다. 십자군을 소재로 한 여러 낭만적 문학작품에서 살라딘은 종종 리처드 1세의 숙적이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독일의 저명한 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은 살라딘을 지혜와 관용을 겸비한 전제군주의 모범으로 여긴 서양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작품에서 살라딘은 부유한 유대인 나탄을 함정에 빠트려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기독교 가운데 어떤 것이 진정한 종교냐?” 하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나탄은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세 개의 반지”라는 유명한 비유를 들어서, 세 종교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똑같다고 답변하고, 이에 감탄한 살라딘은 나탄을 신하가 아니라 친구로 삼고 영원한 우정을 맹세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살라딘을 성전(지하드)의 영웅, 즉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드높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슬람 여러 국가의 독재 정권이나 테러를 정당화하려는 얄팍한 선전술이라는 비판도 일리는 있지만, 한편으로 살라딘 붐은 20세기 들어서 독립과 근대화를 이룬 다음까지도 툭하면 서양 강대국의 입김에 휘둘리는 신세인 이슬람 세계가 느끼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거부와 저항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란과 이라크 등지에서는 서양과 근동, 또는 유대-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두 문명 간의 충돌이 거듭되고 있으며, 이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대두와 아울러 9/11에서 정점에 달한 테러리즘의 활개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라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우상화는 사뭇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1881-1938)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터키의 독립과 민주화를 이룩했다.
글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아랍어:صلاح الدين الأيوبي, 쿠르드어:سهلاحه دينێ ئه يووبى, 페르시아어:صلاح الدین ایوبی, 터키어:Selahaddin Eyyubi) 또는 살라딘 (1138년? ~ 1193년3월 4일)은 12세기경 티크리트(현재 이라크 북부) 출신의 쿠르드족 무슬림 장군이자 전사였으며 이집트, 시리아의 술탄이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 맞서서 이슬람을 이끌었다. 전성기에 그는 이집트, 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카, 헤자즈 등지를 아우르는 아이유브 왕조를 세웠다.
서양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본명은 유수프(Yousuf) 였다. 그는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역량으로 무슬림과 기독교계 모두에게 알려졌으며, 십자군과 맞서 전쟁을 치를 당시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십자군의 군주들에 비해 온건하고 약속을 잘 지키는 자비로운 군주로 덕망이 높았으며 그가 보인 기사도 정신과 자비심은 서방세계에 널리 전해져 수많은 전설과 기록으로 남았다. 살라흐 앗딘이라는 그의 이름은 아랍어로 "정의와 신념"을 의미한다.
1138년티크리트의 쿠르드 가문에서 태어난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학업을 마쳤다. 그의 아버지 나짐 앗딘 아이유브(Najm ad-Din Ayyub, ? - 1173년)는 1139년에 티크리트에서 쫓겨나 삼촌 아사드 알딘 시르쿠(Asad al-Din Shirkuh)와 함께 모술로 갔다. 나짐 앗딘 아이유브는 나중에 이마드 앗딘 장기(Imad ad-Din Zengi)의 부하가 되었으며 이마드 앗딘 장기는 나짐 앗딘을 발베크(Baalbek) 요새 수비대장으로 임명했다. 다마스쿠스에 머무는 10년 동안 누르 앗딘의 법원에서 수니파의 교리를 배운 살라흐 앗딘은 그의 삼촌인 시르쿠에게서 기초 군사 교육을 마쳤으며, 1160년대 이집트파티마 왕조의 분파와의 전투끝에 승리하여 1169년 삼촌 시르쿠가 장관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시작하였다. 예루살렘의 아모리 1세가 통치하는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이집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 왕가의 혼란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다.
시리아의 외인부대 지휘관이었던 살라흐 앗딘은 이름뿐인 칼리프알 아디드가 죽자, 1171년 9월 이집트에 대한 실제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경제를 재건하고 군대를 양성하는 한편, 그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살라흐 앗딘의 명목상 주인이었던 누르 앗딘과의 마찰을 피했다. 누르 앗딘이 죽기 전까지 살라흐 앗딘은 가급적 군사행동을 피했지만 이내 십자군과의 대대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1174년 누르 앗딘이 사망하자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의 술탄이 되었다. 그는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 수니파 교단을 회복하였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고 파티마 왕조 지지세력을 소탕하였으며 홍해를 건너 예멘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수니파 신도들은 그에게 '신의 친구'(Waliullah)라는 호칭을 붙였다.
1170년과 1172년 살라흐 앗딘은 누르 앗딘의 예루살렘 왕국 침공으로부터 퇴각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게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 왕국이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의 완충지대로 남아있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누르 앗딘 사후 그의 직위는 아직 소년이었던 살리흐 이스마엘 알 말리크에게 계승되었지만 이 소년 역시 1181년 사망하였다. 누르 앗딘 사후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로 행군하였으며 대중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선왕을 존중하는 의미로 누르 앗딘의 미망인과 결혼하였다. 누르 앗딘이 통치한 다른 두 대도시 알레포와 모술은 그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라흐 앗딘은 이 도시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1176년과 1186년 이들 도시에 대한 공성에 나섰지만 1176년 5월 22일 알레포 공성 당시 해시시를 먹는 자들(Hashshashins)이라는 정예 암살자 조직 아사신의 공격을 받고 공격을 철수하기도 하였다.
1178년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살라흐 앗딘은 패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며 군대를 재건하였고, 1179년 벌어진 십자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십자군의 거듭된 반격은 살라흐 앗딘을 자극하였고, 특히 사티용의 레날드는 홍해 함대를 동원하여 무슬림의 교역과 순례길을 습격해댔다. 이어서 레날드는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위협하였고, 살라흐 앗딘은 1183년과 1184년 응징 차원에서 케라크의 레날드 요새를 공격하였으며, 레이널드 또한 1185년 하지의 순례자들을 공격해 보복하였다.
1187년 7월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 왕국을 함락시켰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뤼지냥의 기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몽 3세 연합군과 대치한 살라흐 앗딘은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으며, 십자군의 재앙으로 끝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샤티용의 레날드는 살라흐 앗딘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는데, 유럽측의 기록에 따르면 이는 레날드가 상단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살라흐 앗딘의 누이를 살해한데 대한 보복이었다고 하지만 무슬림측의 기록에는 없는 부분이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누이가 없었으며, 그를 따르는 여자 무슬림이 있었다고 전할 뿐이다. 뤼지냥의 기 역시 사로잡혔지만 살라흐 앗딘은 그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하틴 전투가 있은 지 이틀 후 살라흐 앗딘은 모든 군인 포로들을 끌어내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고, 이 처형은 살라흐 앗딘의 비서인 이마드 앗 딘의 기록에 남았다.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감옥에 있느니 죽는게 낫다며 그들의 목을 베라고 지시하였고, 그의 주위엔 많은 학자들과 수피(Sufi) 교도들, 독실한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여들어 칼을 뽑고 소매를 걷으며 자신들의 손으로 포로들을 처형하고 싶다고 애걸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은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며 기독교인들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서렸다고 전해진다. 이는 살라흐 앗딘의 첫 처형이 아니었다. 1179년 8월 29일 살라흐 앗딘은 바이트 알 아존의 성을 함락시켰을때 700 명의 포로들을 처형한 전례가 있다.
바하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살라흐 앗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전 바하 앗딘에게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무슬림에게 속하지 않은 모든 땅을 비신도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고 한다. 이어서 살라흐 앗딘은 모든 십자군 도시에 대한 정복을 시작하였다.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접수한 살라흐 앗딘은 본래 협상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지만, 예루살렘을 사수하던 이벨린의 발리앙은 3천에서 5천에 이르는 예루살렘의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겠다는 협박으로 살라흐 앗딘을 협상에 끌어낼 수 있었다. 도시 안의 프랑크족들은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실상 살라흐 앗딘은 몸값 일부만을 지불한 사람들도 무사히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이마드 앗딘의 기록에 따르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7천에서 8천 가량의 남녀가 노예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티레(Tyre)였다. 티레의 십자군을 지휘하던 몬페라토의 코라도는 티레의 수비를 강화하고 살라흐 앗딘의 두 차례에 걸친 공성을 막아냈다. 1188년 살라흐 앗딘은 뤼지냥의 기를 석방하여 그를 그의 아내인 예루살렘의 시빌라에게 돌려보냈다. 기와 시빌라는 티레로 입성하여 피난민들을 찾고자 하였지만 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코라도는 이들을 돌려보냈고, 기는 아크레에 대하여 공성을 단행하였다.
하틴에서의 패배와 예루살렘의 함락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의 발단이 되었다. 영국이 재정을 부담한 3차 십자군은 아크레를 점거하였으며, 영국의 국왕 리처드 1세는 아크레의 무슬림들을 처형하였다. 살라흐 앗딘은 8월 28일부터 10월 10일 사이에 포로로 잡은 모든 프랑크인들을 처형함으로써 이에 보복하였다. 무슬림의 기록에 따르면 전위부대가 잡아온 프랑크인 포로를 살라흐 앗딘이 목을 베어 처형하자 병사들이 남은 몸통을 난자해 복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1191년 9월 7일 살라흐 앗딘의 군대는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맞닥뜨려 아르수프 전투를 벌였다. 비록 살라흐 앗딘은 리처드와 싸워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리처드 역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두 왕은 내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련의 기품있는 일화들을 낳았다. 리처드 1세가 부상을 당하자 살라흐 앗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그의 개인 의사를 보내 상처를 돌보게 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전투중에 말을 잃자 살라흐 앗딘은 두 필의 말을 보내 그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살라흐 앗딘은 눈으로 채운 신선한 과일을 선물로 보내기도 하였고, 호의에 감복한 리처드 1세는 자신의 누이와 살라흐 앗딘의 동생을 결혼시키자는 제안을 하였다. 예루살렘은 결혼 선물로 하자는 것이다. 결국 두 왕은 1192년 평화 협정을 맺었고, 예루살렘은 무슬림의 지배하에 두되 기독교인 순례자들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이탈한 지 오래 지나지 않은 1193년 3월 4일, 살라흐 앗딘은 다마스쿠스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사후 살라흐 앗딘의 금고를 열어본 사람들은 그의 재산이 장례식을 치르기에도 부족한 정도의 수준임을 보고 놀랐다. 그는 대부분의 재산을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복서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대리석으로 만든 석관을 기증하였지만 살라흐 앗딘의 시신은 아직도 석관 옆 목재로 만든 관 안에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에도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독교도들과의 많은 전투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유럽에 관대하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14세기경 그를 칭송하는 많은 시들이 나타났다. 단테 또한 그를 미덕을 갖춘 이교도로 묘사한 바 있으며, 월터 스코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저작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살라흐 앗딘은 특히 리처드 1세의 존경을 샀는데, 리처드 1세는 살라흐 앗딘을 위대한 왕으로 평하며 의심할 여지 없이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살라흐 앗딘과 리처드 1세는 많은 선물을 교환하며 지냈지만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다.
살라흐 앗딘의 자비심을 보여주는 일화가 1191년 4월에 발생한 바 있다. 프랑크족 여인의 3달 된 아기가 유괴되어 노예시장에 팔리자 프랑크인들은 이 여인에게 살라흐 앗딘에게 자비를 구할 것을 권하였고, 사연을 전해들은 살라흐 앗딘은 사재를 모아 아기를 사서 여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에 따르면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크게 감사하였다고 한다.
살라흐 앗딘에 의하여 건축된 구조물들이 일부 현재까지 남아있다. 1175년부터 1183년까지 카이로에 쌓은 성채가 그러하며, 시리아와 이집트 전역에 걸쳐 크고 작은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특히 그가 산 정상에 구축한 콸랏 알 긴디(Qalaat Al-Gindi) 요새는 상단의 통행로를 잘 관측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로 만들어진 큰 방들과 상점, 수도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름은 살라흐 알-딘(Sahah al-Din Yusef b. Ayyub : 1169-1193 재위)의 출신 가문인 아이유브 가문에서 유래되었다. 살리흐 알-딘의 부친 이븐 샤디와 그 선조들은 투르크계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쿠르드의 하즈바니(Hadhbani)족 출신이다. 모술과 알레포의 투르크계 사령관 잔기이 빈 아끄 손꾸르(Zangi b. Aq Sonqur)는 1138년 아이유브를 포함한 용감하고 호전적인 쿠르드인들을 그의 군에 보충시켰다. 그런 후 잔기이는 죽고 아이유브의 형제인 쉬르쿠흐(Shirkuh)가 잔기이의 아들인 누르 알-딘에게 중용되었으며, 1163년에 파티마조의 원조 요청이 오자 누르 알-딘은 쉬르쿠흐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이 때 살라흐 알-딘은 지원군의 한 막료로서 숙부와 동행했다. 쉬르쿠흐는 1169년 초 파티마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재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했으나 두달 뒤 사망했으며, 그자리를 조카 살리흐 알-딘이 계승했다. 정통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살라흐 알-딘은 이집트 지역에 수니 이슬람 신앙을 부활시키고 이집트와 시리아에 독립 주권국가를 확고히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171년, 그는 파티마조의 종말과 동시에 아이유브조의 탄생을 선언했다. 이후 1174년 자신의 군주인 누르 알-딘이 사망하고 어린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자 살라흐 알-딘은 다마스쿠스로 진출하여 주종관계를 청산하고 시리아를 접수한 뒤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1175년 살리흐 알-딘은 아바스조의 칼리프 알-무스타디에게 서한을 보내 북아프리카, 예멘 등지를 평정한 자신의 승전보를 알리고, 이집트, 북아프리카, 예멘, 시리아의 통치권에 대한 서임장을 요구했다. 칼리프 알-무스타디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으며, 영예의 예복과 전 영토에 대한 서임 증서를 술탄의 칭호와 함께 보냈다. 살라흐 알-딘은 카이로를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예멘 등을 지배하였다. 이크타제(制)를 시행하여 군사체제를 정비하고 1174년 알렉산드리아에 내습한 십자군을 격퇴한 다음 시리아의 십자군 도시를 차례로 빼앗고 1187년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살라딘이 죽자 그 영토는 일족들에 의해 이집트 ·다마스쿠스 ·알레포 ·하마단 등으로 분할되었고 가장 중요한 이집트 ·다마스쿠스는 얼마 후 살라흐 알-딘의 아우 아딜의 계통으로 귀속되었다. 1250년 왕권은 술탄 샤리프가 고용한 맘루크 군대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삼촌 시르쿠가 죽은 후 살라흐 앗 딘은 재빨리 이집트를 장악하고 1169년다미에타를 침공한 십자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1171년파티마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알 아디드가 죽자 파티마 왕조를 폐위시켰다. 1174년 장기 왕조의 자신의 주군 누르 앗 딘이 죽은 후에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복속하여 이슬람의 최대 강자가 되었다.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과의 전쟁을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의 영토로 회복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침공한 제3차 십자군에 맞서 싸웠다. 살라흐 앗 딘의 치세에 아이유브 왕조는 이슬람을 하나의 기치 아래 통일하고 오랜 분열을 끝냈다.
그러나 1193년 살리흐 앗딘이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살리흐 앗 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각각 상속되었는데 이후 분열되고 그 힘이 점차 약해졌다. 살라흐 앗 딘의 사후에 친척과 가신들에게 영토가 분배되자, 통일 왕조로 유지되지 못하고 각자의 영지에서 자치적 성격의 분권화가 진행되었고 봉건적인 가문연합체로 왕조의 성격이 바뀌었다.
살라흐 앗 딘의 형제인 알 아딜과 그의 아들 알 카밀 시대에는 아이유브 왕조는 힘이 약해 잠시 예루살렘을 십자군에게 내주기도 하였다. 알 카밀의 아들 살리흐가 죽은 이후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힘을 잃고 노예 출신의 맘루크 왕조로 대체된다.
오구즈 또는 구즈 투르크멘이라고 불리는 유목 종족의 대집단에서 파생한 셀주크족(族)이 세운 왕조이다. 그 명칭은 족장(族長) 셀주크에서 연유한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시르다리야강(江)의 하류 지역에서 발흥하여 투르크계의 이슬람 국가 가즈니왕조의 세력을 몰아내고 호라산을 점유하여 지배권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아제르바이잔·이라크·시리아·소아시아에까지 확대되었다.
본가(本家)는 대(大)셀주크왕조(1037∼1157)이고, 분가(分家)는 각 소령(所領)에 따라 케르만 셀주크왕조(1041?∼1187), 아나돌 셀주크왕조(1077∼1307), 시리아 셀주크왕조(1094∼1117), 이라크 셀주크왕조(1117?∼1194) 등으로 불린다.
대(大)셀주크왕조의 건설자 토그릴베그(재위 1037∼1063)는 족장 셀주크의 손자이다. 이란을 중심 지역으로 하여 테헤란 근처의 레이를 수도로 하였으며,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요청으로 1055년 바그다드에 들어가, 시아파(派)의 부와이왕조 세력을 일소하여 아바스왕조 칼리프의 보호자로서 "동서(東西)의 왕" 이란 칭호와 함께 술탄의 칭호를 얻었다.
제2대 알프 아르슬란과 제3대 말리크샤의 치세가 황금시대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가장 번영하였다. 그 번영은 이란인(人) 재상 니잠알물크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는 정치상의 공적뿐만 아니라, 내정·군사면의 정비에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융흥이 빨랐듯이 쇠퇴와 멸망도 빨라서 수니파에 반항하는 광신적인 암살교단의 공세와 왕족 사이의 격렬한 정쟁(政爭), 그리고 악역(惡疫)의 유행 등으로 국력이 크게 약화된 결과, 제8대 산자르시대에 멸망하였다.
분가된 셀주크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영속성을 띤 것은 아나돌 셀주크왕조로서 유럽 십자군(十字軍)과 대결하면서도 소아시아의 투르크화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이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에도 유명무실한 존재로 있다가 14세기 초기에 멸망하였다.
셀주크 문화는 이란의 옛 전통을 살리면서 그것을 이슬람적으로 꽃피운 수니 문화라 할 수 있다. 니잠 알물크가 문화의 융흥에 노력한 결과 학술·예술면에서 볼 만한 것이 많으며, 천문학자·수학자·의학자이며 시인인 우마르하이얌과 이슬람의 대신학자 알가잘리 등은 유명하다.
특히 학예진흥을 위한 메데레세(Mederese:學林)·종교희사재단(宗敎喜捨財團)·도서관 등이 개설되었고, 이슬람 세계의 저명한 학자가 초청되었다. 또한 구빈시설(救貧施設)·병원·대상(隊商)숙박소 등도 설치되었고, 공예면에서는 아름다운 견직물, 융단, 정교한 금속세공, 모자이크용 착색 타일이 있었으며, 도기류는 아름답고 기술적으로도 우수한 것들이 많다.
중세 때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통제권을 장악했던 노예 군단의 병사를 일컫는다(→ 노예제).
아이유브 술탄국 때 맘루크 장군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1250~1517년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한 왕조를 세웠다. 맘루크라는 이름은 노예를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
9세기초에는 군사의 대부분을 맘루크로 충당하는 것이 이슬람 문화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아바스 왕조 칼리프 알 무타심(833~842)이 바그다드에서 처음 시행한 이후, 곧 이슬람 세계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외없이 거의 동일한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노예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군사력을 이용하여 기존의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는데, 이것은 대개 단기간에 끝났지만 몇몇 경우는 놀라울 정도로 오랜 기간 계속되었다.
따라서 알 무타심이 죽자 곧바로 칼리프 제도 자체가 투르크 출신의 맘루크 장군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들은 거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으면서 칼리프를 쫓아내거나 살해했다. 칼리프 제도는 합법적 권위의 상징으로 계속 존속했지만, 실권은 맘루크 장군들이 쥐고 있었다.
13세기가 되자 맘루크는 이집트와 인도에 자신들의 왕조를 세웠다. 이들 왕조의 술탄은 모두가 노예 출신이거나 노예의 자손들이었다.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AD 1250-1517 약 250년 간 이집트·시리아 지역의 왕조]
이집트와 인도에서 시작한 노예 후손들이 만든 맘루크 왕조(1250~1517)는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들의 후예는 오스만 제국 점령(1517~1798) 시기에도 이집트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1169년 이집트의 통치권을 장악한 쿠르드족 출신 장군 살라딘은 그당시 이슬람군 전통을 그대로 답습해서 자신의 군대에 쿠르드·아랍·투르크족 들과 그밖의 다른 자유민을 기용하고 여기에 노예 군단을 더 추가시켰다. 후계자들도 이러한 방법을 따랐고 알 말리크 앗 살리흐 아이유브(1240~49 재위)는 왕조 내의 적대세력과 십자군에 대항하여 자신의 술탄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투르크인 등의 노예를 가장 많이 사들인 사람으로 유명하다.
1249년 그가 죽자 술탄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나 맘루크 장군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후계자를 죽이고 자신들 중 1명을 술탄으로 추대했다. 이로부터 250여 년 간 이집트와 시리아는 맘루크와 그 자손들의 지배를 받았다.
역사가들은 맘루크 통치기간을 두 시기, 즉 1250~1382년과 1382~1517년으로 나누어왔다. 전기에는 '바흐리'(Baḥri) 계열의 맘루크가, 후기에는 '부르지'(Burjῑ) 계열의 맘루크가 정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서구 학자들은 각각 '바흐리 시대', '부르지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의 이슬람 역사가들도 이와 비슷한 시기로 나누어 투르크족 시기와 체르케스족 시기라 불렀는데, 이것은 맘루크의 다수파 종족이 바뀐 것에 주목한 것이다. 이 변화는 1382년 체르케스족 출신의 바르쿠크가 즉위하면서 일어나 그이후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나라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맘루크 왕조는 투르크족 술탄 때 최고전성기를 맞았고, 체르케스족 술탄 시기부터는 장기간에 걸친 쇠락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투르크족 맘루크의 주요 업적은 레반트에 남아 있던 십자군을 축출한 일과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 몽골족을 참패시킨 일이다. 그때문에 투르크족 맘루크는 아랍-이슬람 문화의 파괴를 막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맘루크가 의도한 목표였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보다 그들은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이집트 제국의 재건을 추구했다. 맘루크는 또한 아라비아 반도, 아나톨리아와 소(小)아르메니아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고, 이집트 후방을 지키기 위해 누비아에서 입지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맘루크는 이슬람 세계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1258년 몽골족에 의해 폐지된 칼리프 제도를 부활시키고, 자신들의 감독을 받는 칼리프를 카이로에 임명했다. 아라비아의 성도(聖都) 메카와 메디나의 군주를 후원해준 것도 같은 목적에서였다.
맘루크는 산업과 수공업을 장려하고, 이집트를 중근동과 지중해를 잇는 중요한 운송·무역 거점으로 재건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의 뒷받침으로 맘루크는 전쟁과 외교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가장 뛰어난 맘루크 술탄은 5대바이바르스 1세(1260~77, 17년간)와 10대·13대·15대 알 말리크 안 나시르(1293~1341, 48년간)였다. 나시르 사후 능력있는 후계자가 뒤를 잇지 못한 것이 맘루크 왕조의 역량과 안정을 흔들리게 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왕조 쇠락 기점을 체르케스족 최초의 술탄(바르쿠크)이 즉위한 1382년으로 잡고 있다. 이때부터 관리와 군인의 승진은 투르크족 시기에 주된 승진 기준이었던 전술의 기술향상보다는 출신 종족 배경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나 종족관계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사실은 왕조가 쇠퇴한 이유의 하나일 뿐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경제적인 측면을 비롯한 다른 요소였다. 맘루크가 상호 적대적인 여러 분파로 분열되어, 무역과 농업이 평화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베두인족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 것도 부분적인 이유였다. 이집트와 동부의 모든 지역에 퍼진 전염병에 의한 인구의 감소 또한 경제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맘루크는 1400년 투르크의 정복자 티무르(티무르 랜크)에 대항해 시리아를 지켜낼 수 없었다. 술탄 바르스바이(1422~38) 시기에 잠시 동안 국내의 안정을 되찾았고, 1426년 키프로스를 정복함으로써 맘루크의 명예를 다시 한번 드높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정의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야 했기 때문에 재정상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결정적인 경제 타격은 홍해 무역에 대한 포르투갈인의 공격(1500경)이었고, 이와 동시에 시리아의 맘루크 영토를 오스만 제국이 정복했다. 맘루크는 포위공격 때를 제외하고는 대포를 무기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오스만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다. 1517년 이후부터 맘루크는 이집트 정치구조의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문화적 측면에서 맘루크 시대는 주로 역사 서술 및 건축에서의 업적과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사회·종교적인 개혁의 노력으로 유명하다. 맘루크 역사가들은 그리 독창적이지는 못했으나 많은 연대기와 전기, 백과사전을 남겼다. 이븐 할둔만은 예외적으로 독창적인 저서를 남긴 역사가로서, 그는 의식형성 시기와 저작시기를 맘루크 영토 밖인 마그레브(북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모스크·학교·수도원, 특히 영묘(靈墓) 등의 많은 종교 건물을 세운 맘루크는 카이로에 매우 인상깊은 기념물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맘루크의 영묘 모스크는 석조 돔 형식으로 기하학적 조각이 그 육중함을 상쇄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종교적 인물은 이븐 타이미야인데 맘루크 당국은 미신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투옥했다.
오스만 제국에서의 맘루크
1516~17년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후, 이집트와 시리아는 대제국 내 일개 속주의 지위로 되돌아갔다. 맘루크 술탄 체제는 붕괴되었지만, 맘루크는 이집트에서 하나의 계층으로 고스란히 남아 계속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맘루크 왕조 때처럼 맘루크 정예군은 노예시장을 통해 계속 충원되었다. 일정한 훈련기간을 거친 노예는 여전히 군대의 핵심에 기용되었고, 곧 오스만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맘루크는 차츰 오스만의 지배계급 속에 침투해 들어갔고, 결국에는 그들을 지배할 수 있었다.
하나의 중요한 혁신이 맘루크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일찍이 맘루크 술탄 시대에는 맘루크 집단이 여러 가문으로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맘루크의 자손들은 비(非)노예 부대가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복무할 수 없었고, 정부가 맘루크에게 할당한 관직에는 취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스만이 통치하게 되자, 맘루크의 자손들은 더이상 이러한 제약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맘루크의 충성심과 연대성의 원칙이 혈연관계에 의해 잠식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의 맘루크는 개인의 수명 이상은 지속되지 않는 군사적 집단으로 결속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손에까지 지속되는 '가문'을 이루었다.
이와같이 가문을 중시하는 경향은 각 가문이 상대 가문을 지배하려고 한 데서 생겨났다. 이렇게 하여 맘루크 제도 속에는 대대로 이어져 계속되는 불안정한 요소가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통치자가 맘루크의 불화를 이용하는 정도에 따라, 맘루크가 이집트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말엽 오스만 세력이 제국의 전 영역에서 쇠퇴하자, 맘루크는 다시 한번 군대·세입·행정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결국 이스탄불의 오스만 당국은 일정한 금액의 연공(年貢)을 바칠 것을 약속하는 맘루크 일파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이 맘루크 정부·맘루크 군대와 마주친 것은 그가 1798년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이다.
맘루크의 권력은 1811년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 무하마드 알리 파샤의 맘루크 세력 대학살로 결국 무너졌다.
맘루크 왕조[Mamluk dynasty:AD 1250-1517 약 250년 간 이집트·시리아 지역의 왕조]
요약
13~16세기에 걸친 약 250년 간 이집트 지역에 성립되었던 왕조이다. 군사를 담당했던 노예, 맘루크가 세운 왕조로 무슬림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오스만투르크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본문
맘루크 왕조(AD 1250-1517)는 노예가 세운 이슬람 왕조를 뜻한다. 아랍어의 맘루크(Mamluk; مملوك)는 사전적 의미로는 남자 노예를 뜻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터키·시르케시·비잔틴·쿠르드·슬라브 등 출신의 백인 노예를 의미한다. 특히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맘루크 왕조 초기의 주요 인물들은 터키계가 대부분이었다.
맘루크는 대부분 어린시절부터 노예가 되어 군인으로 길러지며, 성장하면서 거의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지만, 자신을 양육한 주인에 대하여 절대적 충성을 다했다. 이슬람 사회는 노예의 일에 명확한 제한을 두지 않고 그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게 했다. 따라서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기회를 얻으면 높은 교양을 쌓을 수도 있었고 국가와 사회의 요직에도 등용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인정하면 어머니가 노예일 지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므로, 여자 노예의 아들이 이슬람 제국의 왕위를 잇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에는 노예가 세운 왕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9세기 중엽 이후 압바스 제국(A.D.749-1258)이 서서히 약화되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자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의 역할도 커지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몽골 침입 등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필수 불가결한 군사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한 살라흐 알-딘(Salah Al-Din)이 세운 아이유브조(Ayyubid dynasty , A.D.1169-1252) 말기에는 술탄 알-말리크 알-살리흐아이유브(Al-Malik al-Salih Ayyub, 1245-1249 재위)가, 터키계 맘룩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용하여 기독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그후 술탄 알-살리흐가 병사하자 그의 후궁 샤자르 알-두르(Shajar ad-Durr)가 술탄의 아들 투란샤(Turanshah)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투란샤는 십자군 전쟁에서 활약한 맘룩 군대와 샤자르 알-두르를 경계하며 이들을 탄압했다.
바이바르스(Baybars al-Bunduqdari)를 비롯한 맘루크들은 투란샤의 탄압에 대항해 그를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뒤, 샤자르 알-두르를 술탄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압바스조 칼리파가 여자를 술탄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맘루크 군 사령관 알-무이즈 아이벡(Al-Muizz Aybak)이 그녀와 결혼한 뒤 술탄 위에 올랐으며, 이것이 맘루크 왕조의 시작이다. 맘루크 왕조 초기에는 노예가 이집트 지역의 술탄이 된 데에 저항이 있었으나, 몽골군에 대한 아인 잘루트 전투(the Battle of Ain Jalut, A.D. 1260년 9월)의 승리, 압바스조 칼리파 옹립이라는 공적에 의해 차츰 이슬람 사회에 수용되어 갔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무슬림이면 누구나 신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융통성 있는 이슬람 사회의 특성이 존재했다.
맘루크 왕조의 권력 쟁탈을 통한 독특한 권력 계승 제도 맘루크 왕조는 독특한 권력 계승 제도를 발전시켰다. 술탄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술탄으로 등극한 사례가 일부 있으나, 일반적으로 주요 정파들이 권력 쟁탈을 벌이고 그 중 승리한 정파의 지도자가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매우 불안정한 제도처럼 보였으나 280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권을 잡은 자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동시에 뛰어난 통치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맘루크 왕조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알-바흐리조(Al-Bahri, AD 1250-1382)로서, 터키계가 주를 이루었다. 후반부는 알 부르지조(Al-Burj, 1382-1516)로서 시르케시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 계열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맘루크 왕조의 멸망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존재한다.
첫째, 1492년 치명적인 페스트가 이집트에 창궐했고, 카이로에서만 하루 1만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특히 외래인인 맘루크들은 토착민보다 체내 항체 형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전염병에 취약했다.
둘째, 맘루크 왕조 말기에 이를수록 과도한 세금 징수, 토지 징발, 왕실의 사치 등이 반복되었다.
마지막으로 1497년부터 신흥 해양국으로 부상한 포르투갈이 아프리카희망봉을 경유하는 신항로 개척으로 인도양의 해상권을 장악했으며, 1509년에는 기존에 맘루크 왕조가 갖고 있던 중계무역의 이권을 빼앗아, 이로 인해 막대한 관세 손실을 보았다.
결국 맘루크 왕조는 1516년 오스만 터키의 술탄 셀림 1세의 공격을 받았다. 페스트, 경제 악화 등으로 황폐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십년간 대규모 전투 경험이 없었던 맘루크 군은 오스만 터키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또한 내부의 반란, 반역 등도 맘루크 군의 패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맘루크 조의 마지막 술탄 투만 베이(Tuman Bey, 1517년 4월 13일 사망)가 오스만투르크제국에게 용감하게 저항하였으나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고, 그가 죽기 전 1517년 1월 22일 맘루크 왕조는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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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브 왕조 술탄 살리흐가 죽자 그의 아내 쌰자즈 알 두르가 통치하였다. 그는 아랍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통치자로, 당시 맘루크 총사령관 아이박과 재혼하여 이집트 일대를 함께 통치하여 맘루크 왕조 시기를 시작하였다.
5대 술탄 바이바르스는 실질적인 맘루크 국가를 건설하였다. 그는 압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의 친척을 카이로에서 보호하며 칼리프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해 "카이로의 압바스 왕조" 시대가 시작되어 1517년 맘루크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함께 명맥을 이어갔다. 이로써 "허수아비 칼리프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맘루크는 노예였고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권리는 칼리프에게만 부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칼리프는 술탄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자로 전락하였다.
영어로 Mamluk(맘루크) 또는 Mameluk(마멜룩), 아랍어로는 마말릭(복수형). 이른바 노예병으로 알려진 군대. '소유된 자'를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로 굴람(Ghulam)이라는 말이 있다. 맘루크는 주로 이집트를 비롯한 근동에서 쓰이고, 굴람은 이란 너머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쪽에서 쓰이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둘 다 주로 기병으로 활약했다.
중앙아시아나 기타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시켜 맘루크로 육성했다. 9세기 경 압바스 왕조의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튀르크인 용병들을 대거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 맘루크의 시초이며, 그 이후로도 맘루크 중 상당수가 튀르크인이었다. 이 튀르크인들은 자신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킨 고용주 외에는 아랍-이슬람 제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원하던 아랍 군주들에게 각광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슬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패, 권력집단화되거나 지방에 할거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다가 아예 나라를 세우고 지배층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는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와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맘루크 왕조가 유명하다.
이후 몽골이 시나이 반도까지 쳐들어 온 아인잘루트 전투 당시에는 몽골군을 쳐부수는 활약을 하기도 했다. 본래 몽골은 러시아로 쳐들어가면서 벌이가 시원치 않아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먹었는데, 이때 팔려간 노예들이 맘루크가 되어 몽골군과의 전투경험을 살려서 후일 쳐들어온 몽골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복수는 마말리크. 사전적 의미로는 남자 노예를 뜻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투르크, 시르케시, 비잔틴, 쿠르드, 슬라브 등 출신의 백인 노예를 의미한다.
맘루크는 대부분 어린 시절부터 노예가 되어 군인으로 길러지며, 성장하면서 거의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성장 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지만 자신을 양육한 주인에 대하여 절대적 충성을 다했다.
맘루크 제도의 도입은 아바스의 8대 알 무으타심(재위 833~842, 9년간)이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은 투르크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면 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지연적·혈연적 관계가 없었으므로 오직 칼리프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리프는 중앙정부에서 고조되던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에서 자신을 보호할 친위대로 이들을 고용하는 한편,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고급 군사집단으로 이들을 훈련·성장시켰다.
10세기 중엽 이후 아바스 제국이 서서히 약화되며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자,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맘루크의 역할도 커지게 되었다. 또한 십자군 전쟁, 몽골 침입 등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면서 필수불가결한 군사집단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슬람 사회는 노예의 일에 명확한 제한을 두지 않고 그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게 했다. 따라서 비록 노예라 할지라도 기회를 얻으면 높은 교양을 쌓을 수도 있었고 국가와 사회의 요직에도 등용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인정하면 어머니가 노예일 지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므로 여자 노예의 아들이 이슬람 제국의 왕위를 잇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슬람 사회에서는 노예 출신의 맘루크 군사 집단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자각하게 되자 스스로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맘루크 군단의 창설은 아이유브조(1169~1250) 말기 술탄 알-살리흐(1245~1249 재위)가 왕자 시절부터 동족 쿠르드족을 멀리하고 투르크계 맘루크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 투르크계(系)의 군인이 늘어나면서 술탄을 능가하는 세력이 되었다.
세력이 점차 커지자 맘루크 출신의 장군들은 이집트 ·시리아에 맘루크왕조를 건립하였는데, 특히 이집트에서는 독립왕조를 일으켜 그 지배체제가 오스만투르크 치하의 시대부터 콰자르왕조의 무하마드 알리 시대까지 존속하였다.
맘루크(Mamluk)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노예 부대 이름으로서, 아랍어로 소유된 자, 즉 피소유자라는 뜻이다. 무슬림의 칼리파와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을 위한 근위병 부대로 활용되었다.
9세기압바시아 왕조 8대 칼리파 무타씸(Mu'tasim, 833년-842년 재위, 8년간)이 맘루크 제도를 도입하였다. 특수 훈련을 받은 중앙 아시아 출신의 투르크 노예로 근위대를 구성하였다(몽골리안 루트라는 어느 방송사의 다큐에 의하면 보통 연령은 10~13세 정도가 노예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들 맘루크 집단은 중국당나라 후기의 절도사 세력이 정권을 휘둘렀던 것처럼, 서서히 칼리파의 선출과 폐위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소요, 암살, 매관 , 매직 등 다양한 부정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서히 칼리파의 권위는 추락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군 사령관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앙 집권 체제가 약화되어 압바시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군소 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초, 킵차크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킵차크의 많은 젊은이들이 인근 국가에 용병으로 팔려나갔다. 아이유브 왕조를 세운 쿠르드 출신의 살라딘은 당시 십자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많은 용병을 활용하였다. 특히 킵차크, 오우즈, 체르케스족 투르크 용병들은 대거로 모집되어 강력한 군대가 되었다.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의 아인잘루트 전투(1260년9월 3일)의 승리를 통해 몽고 제국의 서쪽으로의 팽창을 저지하였다.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는 킵차크의 후예로 알려져 있으며, 실질적으로 맘루크 왕조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무력화하기도 하였다. 킵차크 출신의 맘루크는 체르케스 맘루크가 등장할 때까지 이집트에 투르크 문화를 전파하였다.
아랍어로는 마카(Makkah: مكة) 혹은 마카 알-무카르라마(Makkah al-Mukarramah: مكة المكرمة: 고결한 도시)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으며, 이 나라의 종교·행정·상업의 중심지이다. 히자즈(Hejaz)지방의 홍해 연안에서 약 80km 떨어진, 민둥산이 두 줄로 늘어선 계곡에 있다. 고대부터 성지로서 순례자가 많이 모이는 종교 도시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만년에 살았던 곳이라 하며, 아브라함이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을 살게 한 곳이라고도 한다. 메카 계곡의 가장 낮은 곳에는 잠잠 우물과 아브라함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는 카바 신전이 있으며, 카바 신전에는 신성한 검은 돌을 비롯해 아랍 부족민들이 숭배하는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한편 메카는 고대부터 인도양과 지중해 연안 및 메소포타미아와 홍해 연안으로 통하는 통상로로 발달하였으며, 2세기 때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책에도 마코라바(Macoraba)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6세기 무렵부터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사산조 간의 오랜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던 대상들은 다른 지역보다 안전한 아라비아 반도를 통해로로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메카는 무역 중계지로 번창했다. 당시 아랍 부족 중 쿠라이쉬족(族)이 5세기 후반부터 메카의 상권을 장악하였으며, 570년경에 그 지파(支派)인 하쉼가(家)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아 이슬람을 창시하였다. 여러 우상들이 모셔져 있던 카바 신전은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무슬림군을 이끌고 메카를 정복한 뒤 유일신 알라의 신전으로 바꾸었으며, 그때부터 메카는 이슬람 세계의 으뜸가는 성지가 되었다.
메카를 중심으로 지름 약 100km의 지역이 하람(성역)이며, 13억이 넘는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북위 21도 25분 24초, 동위 49도 24분에 위치한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 예배를 드리며, 이 기도의 방향을 '끼블라(qiblah)'라고 한다. 메카를 비롯하여 이슬람의 성지를 방문하는 순례 '핫지(Hajj)'는 무슬림으로서 지켜야 할 5가지 의무 중 하나이며, 해마다 순례의 달인 '두 알 힛자(Dhu al-Hijja, 이슬람력 12월)에는 약 250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든다. 순례자들은 메카의 중심인 카바 신전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7번 도는 의식을 치르며, 가능하다면 신전의 중앙에 위치한 높이 12m의 흑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성묘에 입을 맞추거나 손으로 만지곤 한다.
그러나 메카는 이슬람 제국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A.D. 683년 우마이야조의 칼리프 야지드(Yazid)가 칼리프조의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겼으며, 그 뒤를 이은 아바스조의 수도는 바그다드였다.
1517년 이후 메카를 비롯한 아라비아 반도 전역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지만, 메카는 제 4대 정통칼리프 알리(Ali)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하쉼가(家)의 수장에 의해서 지켜져왔다.
1926년 하쉼가는 사우드가(家)에 의해 메카의 통치권을 빼앗겼으며, 이후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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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 [Medina]
요약
사우디아라비아 헤자즈 지방에 있는 내륙도시.
원어명
المنورة المدينة
위치
메카 북쪽 약 340km 지점
경위도
동경39°36′ 북위24°28′
면적
173000㎢
시간대
UTC+3
인구
1,300,000 명(2006년 기준)
인구밀도
8 명/㎢(2006년 기준)
본문
아랍어로는 알마디나(al-Madinah)라고 한다. 이슬람교 성지이며, 메카 북쪽 약 340km 지점, 와디함두강 상류의 오아시스 지역에 있다. 원래 야스리브(Yathrib)라 불리는 유대인(人) 촌락이었으나, 5세기 말에 아랍인이 정착하였고, 622년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이 곳으로 이주(헤지라)한 후 이슬람의 정치 ·교단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본래 ‘예언자의 도시’라는 말의 준말이다.
무함마드 사후에도 4대째 칼리프인 알리가 이라크의 쿠파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이슬람 국가의 수도였다. 농업지역을 배후에 두어 대추야자를 비롯한 과일·곡류의 집산·거래가 활발하다. 남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홍해안의 옘보를 외항으로 거느리며, 메카와의 사이에 고속도로가 뻗어 있다.
북동쪽의 성벽을 두른 구시(舊市)는 교조 무함마드와 그 후계자인 아부바크르 및 우마르의 묘가 있는 성역이어서, 메카 참배 후 찾아드는 순례자들로 붐빈다. 1962년 이슬람 대학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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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 헌장 [Constitution of Medina]
요약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헤지라)한 때, 메디나의 주민들과 맺은 맹약.
본문
원명은 ‘문서(kitāb)’로 되어 있으나 현대 학자들이 이렇게 부른다. ‘야스리브 성약(聖約)’이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븐 히샴의 《예언자의 전기(傳記)》와 아브 우바이다의 《금(金)의 서(書)》에 그 전문(全文)이 전해지고 있으나, 후세 전승(傳承)학자의 수정이 가해졌을 가능성도 많다. 내용은 다음의 셋으로 나뉘어 있다.
① 메카로부터의 이주자(무하질른)와 메디나의 신자(안살) 및 그들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는 자는 종래의 내전(內戰)에서의 피의 채권 ·채무 관계를 청산하고 앞으로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자. ② 메디나에 사는 유대교도는 무함마드지지자와 서로 돕는다. ③ 무함마드 지지자와 유대교도는 메디나를 신성한 고장으로 여겨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고, 내부에서 조정되지 않는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재결을 신의 사도(使徒)인 무함마드에게 맡긴다. 이 문서의 성립과정(成立過程)과 해석의 방법에는 이론(異論)이 많아 정설(定說)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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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반도 [Arabian Pen.]
요약
아시아대륙 남서부에 있는 큰 반도로 면적은 약 300만㎢에 이른다. 동쪽은 페르시아만, 오만만, 서쪽은 홍해, 남쪽은 아라비아해, 아덴만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서쪽에는 사해가 존재하며 북쪽은 대사막지대의 중앙부를 차지한다.
본문
↑ 사해 위성사진 /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있는 염호.
북서단~남동단 약 2,200km. 동서 너비 약 1,200km. 면적 약 300만㎢. 동쪽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灣), 서쪽은 홍해(紅海), 남쪽은 아라비아해(海)와 아덴만(灣)에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은 사막지대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리카의 사하라로 이어지는 대(大)사막지대의 중앙부를 차지한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의 사우디아라비아, 북동쪽의 쿠웨이트, 남쪽의 예멘, 남동쪽의 오만, 동쪽의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의 7개국으로 나누어져 있다.
아라비아반도의 역사
본문
아라비아반도의 역사는 적어도 BC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남서부지역, 현재 예멘의 오지에 미나 ·사바 등의 왕국이 일어나 거대한 돌을 쌓아올려 댐을 만들고 관개를 해서 농경을 영위하였고, 독특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훌륭한 신전이나 왕궁 등을 세웠던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양 방면과 지중해 및 비옥한 초승달지대 방면과의 통상로(通商路)를 차지하여 번영을 이루었다. 아라비아의 북부, 특히 지금의 시리아 사막이나 요르단 방면에 걸쳐서 페트라의 나바타이 왕국(BC 4세기∼AD 1세기)이라는 아랍 국가가 번영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팔미라 왕국도 발흥하였다. 가산 왕국이나 라흠 왕국 등은 그보다 후에 아라비아 북변에서 일어난 아랍 국가인데 모두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였고 그리스나 페르시아 문화를 아라비아에 도입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에는 상당히 일찍부터 유대교나 그리스도교가 퍼져 있었으나 중부 네지드나 서부 헤자즈 지역 주민의 대부분은 다신교도로 메카에 있는 카바 신전은 신들을 모시는 곳이었다. 메카에서 태어난 무함마드(570~632)에 의하여 유일신 알라의 가르침인 이슬람교(敎)가 확립되자 카바는 알라 신전이 되었고(630), 아라비아 전역은 처음으로 종교적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아라비아인에 의하여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정복이 이루어지고 이슬람제국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처음 약 30년 간 그 수도는 무함마드의 묘지가 있는 메디나였다.
그러나 우마이야왕조 때(661∼750) 수도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겨지자 메카와 메디나 2성시(聖市)와 그곳으로 향하는 순례로(巡禮路)를 제외하고는 점차 역사의 진전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900년 무렵부터 이슬람의 별파(別派)인 카르마트파(派)가 동부를 중심으로 일종의 공산제도(共産制度) 국가를 세웠으나 12세기 이래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으며, 16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8세기 중엽 중부 네지드에 와하브파(派)의 종교운동이 일어나 새로운 시대에 들어갔다. 이븐 사우드가(家)가 와하브파의 옹호자가 된 뒤 거의 모든 반도를 통일하려는 듯 강세를 보였으나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충돌하여, 이집트의 번왕(藩王) 무하마드 알리가 파견한 군대에 의하여 수도 다르이야는 파괴되었다(1818). 그러나 와하브 왕국은 부흥하였고 몇 차례의 변천을 거쳐 제1차 세계대전 후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었다.
예멘 지방도 오랫동안 이집트나 터키 등의 지배를 받아왔으나, 이 지방에는 예로부터 이슬람교 시아파의 지파(支派)인 자이드파를 믿는 사람이 많았고, 야파 하미드 딘이 1904년부터 그 교주(이맘)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 세력을 물리치고 전 영토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62년 9월 야파의 아들 아하마드의 죽음과 함께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부가 수립되었다.
아라비아반도의 문화
본문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일찍 고도의 문화가 발달한 곳은 예멘을 중심으로 하는 남서부지방이다. 이 지역은 BC 수백 년 무렵 이미 상당히 진보된 고층건축을 비롯,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석조댐 등을 축조할 정도였다. 이에 반하여 중 ·북부는 유목민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원시적인 생활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오아시스에는 도시와 촌락이 발달하였고, 그 중 하나인 메카에서는 이슬람교가 일어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가 되어 세계 문화사상 매우 큰 역할을 해왔다.
또 이들 유목민 사이에서 발달한 아랍어(語)는 이슬람 시대에 들어온 뒤 페르시아만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졌고 이는 토착 제민족(諸民族)을 서서히 아랍화하여 아랍 민족을 형성하는 주요소가 되었다. 또한 메카와 메디나는 이슬람교도의 성지가 되어 해마다 열리는 메카제(祭)에는 전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신도들이 모이고 있다. 반도 동부의 유전개발로 인한 부의 축적과 생활양식의 변화로, 고유의 생활관습 등도 점차 소멸되어가고 있다. 사막을 관개하여 유목민을 농경민으로 정착시키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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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도시 [宗敎都市, religeous town]
요약
유서 있는 사찰 ·교회 ·영지(靈地) 등이 있는 종교상의 중심에 인위적 ·자연적으로 발생, 발달한 도시.
본문
↑ 바티칸시국의 정부 청사 / 전세계 가톨릭을 총괄하는 교황청이 이 곳 바티칸시국에 있다.
대표적인 곳은 그리스도교의 예루살렘 ·바티칸 ·캔터베리, 이슬람교의 메카 ·메디나, 힌두교의 바라나시 등을 들 수 있다. 초기에는 참배객을 대상으로 한 여관 ·음식점 ·토산품점 등의 서비스업이 도로를 따라 선상으로 발달하며, 참배객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도시로 발달하게 된다. 그로부터 상업기능이 더해져 주변 농촌지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게 되고, 여기에 관광적 성격이 가미되어 그 기능이 다면화된다. 성지순례가 의무화된 이슬람교의 메카와 같은 도시는 참배객의 수가 많아 홍해(紅海) 연안에 지다항(港)이 건설되고 특별열차도 운행하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주요한 경제중심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유명 사찰들이 깊은 산 속에 위치하여 도시형성의 요인은 되지 못하였다. 관광업의 발달로 명승지에 있는 사찰은 관광의 중심이 되어 사하(寺下)취락이 형성되며, 여관 ·음식점 ·토산품점 ·기타 오락시설이 모여서 도시적 취락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기능에 의한 도시 형성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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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조의 뒤를 이어 750∼1258년(약510년간)에 동방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칼리프조.
원어명
Abbāsid dynasty
본문
우마이야 왕조를 이어 이슬람 칼리프제를 계승한 아바스조는 13세기 중엽까지 명맥을 유지했으나, 아바스가(家)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 양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권력자로서 군림한 것은 건국후 약200년후인 945년까지이고, 그 이후는 정치상의 실권이 거의 없었다. 아바스 왕조는 아바스가(家) 혁명으로 성립되었다.
우마이야조 말기에 이르러 통치집단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1년 동안 칼리프가 4번이나 바뀌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에 더해 부족 간의 분쟁이 더욱 격심해졌고, 마침내 중앙정부의 권위가 도전받게 되었다.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칼리프 마르완 2세(Marwan b. Muhammad: 744~749 재위)때에 이르러 우마이야조는 자칭 하쉬미야(Hashimiyya)당파에서 시작한 반란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하쉬미야 당파는 진정한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하쉬미야 가문의 일원인 아바스 가문 출신의 이브라힘(Ibrahim)은 745년부터 후라산을 중심으로 반란을 시작했다.
이브라힘은 747년 마침내 후라산에서 무장봉기하였고, 반란 세력은 분쟁 중이던 우마이야 지지 아랍 부족을 제압하고 이 지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후 이들은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잡(Zab) 강에서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친 뒤, 749년에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 이듬해 우마이야조 최후의 칼리프를 살해함으로써 아바스조를 정식으로 성립했다. 우마이야조 체제의 본질은 소수의 지배자인 아랍인이 피정복자인 이민족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었으나, 아바스조 하에서는 종래 아랍의 특권적인 지위가 상실되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이슬람 제국으로 발전했다. 정복민으로서의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하고, 지배층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무슬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히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다. 또한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므로서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되었으며, 페르시아의 왕정제, 관료제 및 행정제도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새로 건설된 바그다드는 세계 동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상업활동에 종사함으로서,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아들 알 마아문(재위 813~817) 시대는 아바스조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다음의 칼리프 알 무으타심(재위 833~842)이,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받은 '맘루크'라 부르던 터키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면서 쇠락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들은 지연적·혈연적 관계가 없었으므로 오직 칼리프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수 있었다. 따라서 칼리프는 중앙정부에서의 고조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파괴시킬 자신의 친위대로 이들을 고용하는 한편,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고급 군사집단으로 이들을 훈련·성장시켰다. 그러나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자각하게 되자, 이들은 스스로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바스조의 칼리프제는 861년부터 945년까지 맘루크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동시에 제국 전역에서 정치세력화된 지방 토호나, 지방으로 파견되었다가 세력을 확장한 맘루크 정권 등이 반(半) 독립화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 왕조는 파티마조(909~1171)였으며, 파타마조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세력권 안에 넣었으며 시칠리아, 이집트, 시리아 등을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동은 서부의 파티마조와 동부의 아바스조 치하로 양분된 상황이었다. 당시 아바스조는 945년부터 페르시아계 시아파인 부와이흐조(945~1055)에 의해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당했으며, 칼리프는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칼리파제가 맘루크나 부와이흐 같은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면서도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것은 무슬림 수장으로서의 칼리파의 전통적 존엄성이 유지되어야만 아미르나 술탄들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세기 전반에 이르자 파티마조, 부와이흐조는 모두 쇠퇴했으며, 셀주크투르크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로부터 아바스조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셀주크투르크(1038~1194)는 칼리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대신 세속통치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실질적으로 칼리프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이후 셀주크투르크조가 붕괴하고 몽골의 침입이 있기 전인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1258년 바그다드가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 1256-1265 재위)에게 점령당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아바스조는 행정면에서는 칼리프를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취하여 그 대리로서의 재상(와지르)이 전(全)행정기관을 통괄하고, 때로는 각 주의 총독(아미르)이나 세무장관(아밀)·재판관(카디)의 임명권도 장악하였다. 중앙정부에는 세무청(稅務廳)·군무청·지출청·문서청·역체청(驛遞廳)·최고감사청 등의 여러 관청이 있었고, 지방에는 총독·세무장관·재판관이 칼리프 또는 재상에 의해 파견되었는데, 이 지방관들은 칼리프가 파견하는 역체관의 감시를 받았다.
세제에 있어서는 토지가 세금을 지불한다는 법적 의제(法的擬制)를 이슬람법으로 합법화하여 하라지 지역으로 규정된 토지에서는 지주(地主)가 이슬람교도인가의 여부에 관계없이 무거운 지조(地租:하라지)를 부과하고 비(非)이슬람 교도에 대해서는 따로 인두세(人頭稅:지즈야)를 부과하였다.
아바스조는 경제적으로도 번영한 시대였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농업이 크게 개발되는 한편, 섬유산업이 발달하여 그 제품은 세계 각지로 수출되었다. 문화면에서는 이슬람과 아랍어를 기조로 하고 헬레니즘문화를 섭취·융합하여 다채로운 이슬람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코란》연구와 법학·철학·수학 등의 여러 학문을 발달시켰고, 또 아라베스크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식무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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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엽, 무함마드의 일족인 아바스 가문이 시아파 이란인 이슬람교도들과 협력하여 옴미아드 왕조(우마이야 왕조)를 를 타도하고 아바스 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를 탄압하고, 이라크 남부의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여 중앙집권 확립을 두었다. 아바스 왕조는 재상을 중심으로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는데, 아랍인의 특권이 부정되어 주요 요직에는 이란인이 등용되었고, 궁정의 친위대도 이란인과 투르크인 노예병사(맘루크) 위주로 구성하였다.
세금제도에서도 아랍인과 비아랍인의 차이가 없어져, 이슬람교도라면 비아랍인 역시 인두세가 면제되고, 아랍인이라도 정복지에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 세금이 부과되었다.
아바스 왕조는 아랍어를 공용어로 하고, 민족차별을 폐지하여 이슬람법에 기초하여 통치하였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는 각 지방에서 정치,군사의 실권을 가진 총독들이 점차 독립하면서 칼리프의 권력이 서서히 약화 되었다.
10세기 초에는 북부 아프리카에 파티마 왕조가 일어나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부정하자, 후 옴미아드 왕조의 군주도 칼리프라 칭하며 이슬람 세계는 3인의 칼리프 체제가 이어졌다.
10세기 중반에는 이란계 시아파의 부와이 왕조가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군사,행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권위에 불과한 빈껍데기 존재로 전락한다.
우마이야(Umayyah)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세운 이슬람 칼리프조(661∼750).
본문
↑ 다마스쿠스의 대모스크 / 시리아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알 와리드가 건립한 사원이다.
우마이야조는 정통칼리프 시대에 이어 아랍-이슬람 제국의 2번째 칼리프 왕조로서, 우마이야 가문의 우마이야에 의해 세워졌다.
우마이야 가문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같은 쿠라이쉬 부족에 속해있으며, 전승에 따르면 같은 조상인 압두 무나프(Abu Munaf)의 후손들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압두 무나프의 아들 중 하쉼(Hashim)의 혈통을 이은 하쉼 가문에 속했으며, 우마이야 가문은 압두 샴스(Abd Shans)의 혈통을 이은 가문이었다. 하쉼 가문과 우마이야 가문은 메카의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두고 경쟁관계에 있었으며, 특히 우마이야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Mu'awiyah)의 부친 아부 소피얀(Abu Sufyan)은 무함마드의 이슬람 포교 초기에 가장 대표적인 반대인물이었다. 아부 소피얀을 비롯한 우마이야 가문은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친 끝에 이슬람을 받아들였으며, 빠르게 팽창하는 이슬람 제국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외교적 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 공동체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정통 칼리프조 말기,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잇따른 음모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제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군과의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번째 전투인 십핀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군은 협상을 요구했으며, 협상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다. A.D. 661년,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가 카와리지파에 의해 암살당하자 힘의 균형은 우마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조를 세웠다. 후에 안달루스 지방에 성립한 ‘후기 우마이야조(757-1031)’와 구별하여 이것을 ‘전기 우마이야조’라고도 한다.
우마이야조의 제 1대 칼리프 무아위야(A.D.661-680년 재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다. 이로서 칼리프제는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던 전통적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그는 또 군사조직도 비잔틴 양식에 따른 새 편제로 바꾸었다. 이것은 강력한 중앙정권의 수립과 제국이 계속 영토확장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무아위야는 668년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섰다가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아랍-이슬람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무슬림의 단결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마이야조의 전성기는 제 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인 왈리드 1세 때이다. 특히 칼리프 왈리드 1세(705-715 재위) 때에는 아랍의 정복사업이 매우 활발하게 펼쳐졌다.
첫째, 이라크 동북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꾸타이바 빈 무슬림 장군의 주도 하에 진행된 정복활동으로서, 705년에서 712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메르브, 발크, 부카라,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과 옥수스 강 건너편까지 제국이 확장되었고, 이 지역이 이슬람화되었다.
둘째, 이라크 동남쪽 인도 방향으로의 원정으로, 무함마드 빈 알 까심이 맡아 하였다. 710년에서 712년 사이에 진행되었으며, 발루치스탄과 펀자브 지방까지 제국이 확장되었다.
셋째는 북아프리카 서쪽과 유럽 지역으로의 정복활동으로, 무사 빈 누사이르와 그의 부하 따리크 빈 지야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710년에는 북아프리카 전역이 아랍-이슬람화 되었으며, 71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아랍군에 의해 서 고트 왕국이 멸망하고 스페인 전역이 우마이야조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그동안 완비된 역체제도(驛遞制度) ·밀정사찰(密偵査察)제도는 칼리프의 독재군주권을 강화하였고, 종래의 잡다한 통화(通貨)는 중앙정부가 발행한 순수한 아라비아풍의 디나르 금화(金貨)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하였다. 무거운 지조(地租)의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다수의 비(非)아라비아계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마왈리[被護民]가 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세수입(稅收入)이 대폭 감소하였다. 때문에 이라크 총독 하자지는 그들을 농지로 되돌려 보내고, 당초 부담한 지조와 인두세(人頭稅:Jizyah)에 해당하는 고액의 공조(貢租)를 부과하였으므로 마왈리의 불만이 증대하였다. 특히 우마르 때 지조의무를 지닌 토지소유자가 개종할 때 그 토지는 이슬람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원래 소유주는 차지인(借地人)의 입장에서 경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뒤에 수정된 하자지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결국 징세(徵稅) 때문에 궁핍화한 피정복민의 울분과 호라산의 반란을 이용한 압바스가(家)의 흥기(興起)로 마침내 멸망하였다.
<김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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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세운 이슬람 왕조(661∼750로서, 우마이야왕조 (Umayyad dynasty)왕조라고도 한다.
호메트의 후계자인 정통 칼리프왕조 말기는, 이슬람 신앙의 동요와 잇따른 음모로 혼란이 거듭되었다. 마호메트의 대항세력인 크라이슈족(族)의 명문 우마이야가(家)는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아 칼리프권(權) 탈취를 기도하였다.
661년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재위 661~680년)는 마지막 정통 칼리프 알리를 암살하고, 세습제 칼리프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는 이슬람 사상 제일의 정치가·군략가로서, 시리아인의 군대를 수족으로 삼고 해군을 양성해 비잔틴제국과 대항하였다. 전후 2회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고, 키프로스·로도스 제도를 공략하였다. 또한 그전까지 선거제였던 칼리프를 자신의 아들 야지드에게 세습시킴으로서 세습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옴미아드 왕조는 뒤에 에스파냐에 성립한 ‘후(後)우마이야왕조(756∼1031년)’와 구별하여 이것을 ‘전(前)우마이야왕조’라고 한다. 정치형태는 차츰 전제주의(專制主義) 색채가 짙어지고, 종교적인 경건이 희박해졌다.
680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즉위한다. 이에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패권에 도전했다가, 정월 10일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 전투에서 살해 되었다. 쉬아파는 오늘날까지 그의 기일을 추모하고 있고, 이 전투에 대한 추모에서 마르티야(悲歌)가 생겨났다. 쉬아파는 자기 몸을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추모행렬, 수난극 공연을 하고 있다.
713년 중아아시아를 제압하고, 거의 동시에 북(北)인도에 침입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지방(파키스탄 남부)과 인더스 계곡 하구 신드 지방을 정복하였으며, 또한 해륙(海陸)으로 지중해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711년 에스파냐에 상륙하여 서(西)고트왕국을 멸하고, 732년 8월 프랑크의 궁재(宮宰) 카를 마르텔가 이끄는 프랑크군에게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에스파냐 제패에는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판도는 중아아시아, 북인도에서 서아시아 전토를 휩쓸고 에스파냐까지 이르렀으며, 제5대 칼리프 아브드 알말리크의 전후(前後) 수대에 걸쳐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그 동안 완비된 역체제도(驛遞制度)·밀정사찰(密偵査察)제도는 칼리프의 독재군주권을 강화하였고, 종래의 잡다한 통화(通貨)는 중앙정부가 발행한 순수한 아라비아풍의 디나르 금화(金貨)와 디르함 은화로 통일하였다. 무거운 지조(地租:Khar嚆j)의 부담을 면하기 위하여, 다수의 비(非)아라비아계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마왈리[被護民]가 됨으로써 국가에 대한 세수입(稅收入)이 대폭 감소하였다. 때문에 이라크 총독 하자지는 그들을 농지로 되돌려 보내고, 당초 부담한 지조와 인두세(人頭稅:Jizyah)에 해당하는 고액의 공조(貢租)를 부과하였으므로 마왈리의 불만이 증대하였다. 특히 우마르 때 지조의무를 지닌 토지소유자가 개종할 때 그 토지는 이슬람공동체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원래 소유주는 차지인(借地人)의 입장에서 경영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정책은 성공하지 못하였고 뒤에 수정된 하자지의 제도로 복귀하였다.
결국 징세(徵稅) 때문에 궁핍화한 피정복민의 울분과 호라산의 반란을 이용한 아바스가(家;Abbassids)의 흥기(興起)로 마침내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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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프 [caliph]
요약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의 칭호.
원어명
khalfa
본문
아랍어로는 칼리파(Khalīfah)라고 하며, 본래는 '칼리파트 라술 알라 (Khalīfat rasul Allah)'로 그 사전적 의미는 '신의 사도의 대리인'이다.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이슬람 교리의 순수성과 간결성을 유지하고, 종교를 수호하며, 동시에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가리킨다.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할 당시 이슬람 공동체는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하여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치하는 지배 세력으로 성장해있었다. 그러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 '움마(Ummah)'를 이끌어갈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사망했으며 그로 인해 공동체 내부에 혼란이 발생하였다. 무함마드의 동료들인 움마의 원로들은 공동체를 형성하던 부족간 회의인 '사끼파(Saqqifa) 회의'를 통해 칼리프를 선출하게 된다.
제1대 칼리프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오랜 동료이자 이슬람 공동체 건설에 공헌한 아부 바크르(Abu Bakr, 632-634년 재위)가 선출되었으며, 사끼파 회의의 원로들은 아부 바크르에게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보였던 것과 똑같은 충성을 약속하는 '충성 서약'인 '바이아(Bay'a)'의 예를 행했다. 이튿날 아부 바크르는 모든 무슬림들에게 공개적인 바이아를 받았으며, 이로서 이슬람 칼리파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칼리프는 이슬람 공동체의 통치를 위해 예언자 무함마드가 행사하던 정치, 종교 양면의 권한과 그 권위를 계승한 후계자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함마드의 예언자적 성격의 대리인이 아니라 그의 정치, 군사 지도자 성격으로서의 대리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
칼리프 칭호는 정통(正統) 칼리프 시대(632~661)·우마이야왕조(661~750)·아바스왕조(750~1258)로 인계되었으나, 실제 정치 권력을 지방 총독이나 소군주들이 장악했으므로 아바스왕조 후기에 이르러 칼리프의 존재는 단지 이슬람 움마의 종교적 수장이라는 형식적 지위로 전락했다.
또한 10세기에는 에스파냐의 후기 우마이야왕조 군주와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군주도 칼리프라고 칭하였으며, 한때 바그다드의 아바스왕조의 칼리프와 함께 이슬람 세계에 3명의 칼리프가 병존하였다. 이와 같은 칼리프제는 아바스왕조가 멸망하는 1258년까지 지속된다. 그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술탄들이 칼리프제를 카이로에 다시 세웠지만 이때의 칼리프 역시 명목상 존재한 꼭두각시 칼리프 였을 뿐이다.
1517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정복한 뒤 이슬람 칼리프의 권좌는 이스탄불로 옮겨지지만, 그후 200년 가까이 칼리프 칭호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칼리프의 종교성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일어난 것은 18세기 말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가 범이슬람주의와 함께 칼리프제 부흥론을 주창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Ⅱ: 1876~1909재위)는 서구 열강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칼리프제를 이용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이슬람 칼리프제의 보유국으로서 무슬림 세계의 종주국이라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고자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오스만 칼리프 제국은 터키 공화국으로 탈바꿈했으며, 1924년 3월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가 이슬람 칼리프제를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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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프 시대 (正統caliph時代)
이슬람 역사의 한 시대(632∼661)로,
마호메트가 죽은 뒤,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의 장로들이 교도(敎徒)의 총의에 의하여 잇따라 칼리프(후계자)로서 이슬람 교단을 통솔하던 시대를 말한다. 칼리프는 대행자라는 뜻의 아라비아어 하리파가 와전된 말이다.
알리가 쿠파로 옮길 때까지 모두 메디나에 있었으며,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634년)는 마호메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로서 이전에 이슬람교로부터 이반(離反)하였던 아라비아 제부족을 재통일하였다.
제2대 우마르(재위 634∼644년)는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통치의 대방침을 정하였다. 우마르는 참 이슬람의 건설자라는 뜻이다. 재위 중 그의 강력한 지도에 승복하였던 아랍 이슬람 교도들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 등지를 정복하였다. 그가 정복한 지역에서는 종래의 중앙 지배층과 군대를 몰아내고, 도시와 농촌 사람들에게 자치를 허용하는 한편,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또 아랍 군인들에게는 군사 캠프에 모여 살게 하고 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였다. 이 밖에도 이슬람력(曆)을 확립하고, 아미르 아르무미닌(신자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라는 칼리프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슬람의 ‘바울로’(그리스도교에 비유하여)라고 불릴 만큼 이슬람교 확립에 공헌한 바 크나, 원한 관계로 644년 페르시아인 노예에 의해 암살당했다.
제3대 B.A.오스만(재위 644∼656년)은 코란의 통일을 기하였다.
그러나 제4대 알리(재위 656∼661년)는 마호메트의 종제(從弟)로 마호메트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하였다. 제 3대 오스만이 암살되자 메디나에서 칼리프로 추대되었으나, 우마이야가(家; 마호메트의 숙부)와 대립 끝에 그를 배반한 하리지트파(派)의 자객에게 암살되고, 결국 무아위야에 의한 세습왕조 시대로 옮겨 갔다.
칼리프 [caliph]는아랍어로는 ‘뒤따르는 자’라는 뜻의 칼리파(Khalīfah)라고 하며,무함마드가 죽은 후 움마(이슬람 공동체)·이슬람 국가의 지도자·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이다.
역 사
칼리프의 역사는 서기 632년에 무함마드가 죽은 후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제1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선출되어 "알라의 사도의 대리인"을 칭했던 것에서 시작되며, 제2대 칼리프가 된 우마르 1세는 "신도들의 우두머리(Amīr al-Mu'minīn)"라고 하는 칭호를 채용하여, 칼리프의 칭호와 함께 이용되게 되었다.
그 후, 우마위야 왕조·압바스 왕조에 세습되어 가는 과정에서 시아파가 칼리프의 권위를 부정하고 분파하여, 수니파만이 칼리프를 따르게 되었다.
칼리프는 어디까지나 예언자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슬람의 교의를 좌우하는 종교적 권한이나 꾸란을 독단적으로 해석해 입법하는 권한을 갖고 있지 않고, 대신에 이것들은 울라마들의 합의에 의해서 보충되어 단지 움마의 행정을 통괄하여 신도들에게 이슬람의 의무를 준수시키는 역할 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또 10세기에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대(大)아미르에 정권을 맡기게 되면서, 칼리프는 실권을 잃고 아미르나 술탄의 지배권을 승인하는 대신에 그들의 비호를 받았다. 그 후 안달루스 왕조도 칼리프를 칭하게 되고, 수니파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마지막 바그다드 칼리프인 알 무스타심은 1258년에 일칸국의 건국자인 훌라구에 의해 살해되어 아부 바크르 이래 계속된 칼리프 제도는 여기서 한 번 끊어졌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에 맘루크의 바이바르스는 살아남은 압바스 왕조의 일원 가운데 한 사람을 카이로로 초대하여 새로운 칼리프로 옹립해, 맘루크(노예 군인) 출신의 술탄에게 지배의 정당성을 주는 존재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1517년,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 왕조에 의해 멸망하게 되면서, 카이로의 칼리프는 오스만 왕조의 수도 이스탄불로 끌려가 버렸다.
당초 오스만 왕조는 칼리프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실력으로서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서 행동할 수 있었지만, 18세기 말에서부터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제국 등 주변 국가들에 비해 군사적 열세가 벌어지면서, 오스만 제국 내외의 무슬림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칼리프의 권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16세기 초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로부터 칼리프권을 선양받아 술탄과 칼리프를 겸비하는 군주제가 생겨났다(술탄-칼리프제).
칼리파의 권위
우마위야 왕조 이후 칼리프는 왕과 총독의 중간 성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칼리프는 총독과 같이 술탄이 언제든지 위임하고 해임시킬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