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 박원순 근현대사 2009. 6. 25. 10:44 |
'깨끗한 손'만이 훌륭한 국가를 만든다
---2차대전 후의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연구---
변호사 박원순
1.서론
2.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가.비쉬정권의 성립
(1)프랑스의 패배와 비쉬정권의 수립
(2)휴전협정하의 비쉬정권 주권의 실제
나. 비쉬정권의 성격과 그 합법성
다. 비쉬정권의 역사적 평가
(1) 프랑스를 지키는 '방패'
(2)방패이론의 허구와 프랑스의 참상
라.비쉬정권의 역사성과 국민의 인식
3.점령하의 부역자와 부역행위
가.비쉬정부에 의한 협력
나.민간의 부역행위
(1) 개관
(2) 저널리스트의 부역행위
(3) 문인들의 부역행위
(4) 정당.정치인의 부역행위
다. 비쉬정권의 유태인 정책
라.해방에의 길
(1) 드골의 자유프랑스 성립과 그 활동
(2) 레지스탕스의 활약과 공헌
4.해방과 나치부역자 처리과정
가.개관
나.형사적 처벌
(1) 부역자에 대한 처단의 경고
(2) 전투중의 나치부역자 처단
(3)해방 과정과 직후의 나치부역자 약식처형
(4)드골정권 수립후의 나치부역자 처단
다.숙청과 공민권박탈
(1) 개관
(2)각계의 숙청 작업
(4) 공민권박탈제도
라.부역자 처리의 한계와 그 후의 부역자
(1) 정의를 피한 사람들
(2) 처단과 숙청에 대한 공격
(3) 정치지형의 변화와 부역자의 복원
(4) 부역자의 법률적 사면
(5) 영원히 살아있는 비쉬,점령,부역의 이야기
5.페탕과 라발의 재판
가.페탕의 부역죄 재판
(1) 개관
(2) 구속과 재판의 마련
(3) 재판절차의 진행과 공방
(4) 재판의 종료와 집행, 그리고 사망
(5) 페탕재판과 국민여론, 그리고 그 긴 그림자
나.라발의 부역죄 재판
(1) 개관
(2)라발의 부역행위
(3)전후 라발의 부역 재판
6.결 론
1.서론
적에 대한 부역(collaboration)은 전쟁의 패배와 적에 의한 영토점령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적군이 다른 나라를 침략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침략군과 피침국 국민 사이에 일정한 협력이 있게 마련이다. 1351년의 영국 에드워드3세 때의 한 법령은 반역행위를 적에 대한 부역의 형태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에서의 부역행위는 바로 나치에 협력한 비시정권의 페탕 원수의 1940년 10월 24일자 선언에 의해 규정되었다. 페탕은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담을 마친 후 같은날 프랑스 라디오를 통하여 나치독일과 프랑스사이의 협력관계의 원칙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부역이라는 말은 바로 이 역사적 선언과 특수한 사건의 배경하에 쓰이기 시작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부역이라는 말에 대한 상이한 의견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의 부역이란 점령자 나치와 피점령지의 파시스트 사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협력을 의미하였다. 패전 프랑스에서 "1940년 당시 소수에 의해 자랑스런 깃발, 다수에 의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 졌던 이 말이 나중에는 반역으로 낙인찍혔고 그 자랑스러운 깃발은 수의(壽衣)가 되고 말았다".
독일군에 대한 드골의 '자유프랑스'와 레지스탕스운동은 곧바로 비쉬정부와 이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던 부역자들과의 전쟁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내전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전쟁과 점령이 끝난 후 '내전'으로 말미암은 심각한 분열이 초래되었다. 먼저 프랑스 사회에는 처벌과 공직추방, 재판과 항변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바로 독일에 협력한 부역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숙청의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그 협력이 과연 프랑스를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과 수탈로부터 방어한 차선책이었던가 아니면 프랑스의 불이익과 그 국민의 고통을 초래한 이적행위였던가의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이 논쟁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오늘에까지 식지 않은 채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 여전히 열띈 논쟁의 주제였음이 명백한 비쉬정권의 역사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무식하게도 나는 내가 메스를 들어도 될만큼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체'는 아직도 따스하였다. 해부학자가 부검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을 다루는데 적합한 의사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식지 않는 논쟁에도 불구하고 2차세계대전 중 독일의 점령을 경험한 프랑스에서의 부역자 처리는 그 단호한 점에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주) 그러나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등에서의 부역자 처리는 프랑스보다 더 치열하였으며 처벌된 사람드르이 비율도 더 높아ㅏㅆ다고 한다(Robert O. Paxton, 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Harcourt Brace Jovanovich Publishers, San Diego, 1975, p.475).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부역행위로 구속된 사람의 숫자가 매 10만명당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프랑스 (94), 벨기에 (596), 네덜란드 (419), 노르웨이(633)
나치점령을 경험한 서유럽은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부역자처리에 적절한 반역죄등에 관하여 전쟁전 입법을 통하여 갖추고 있는 나라는 없었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는 소급입법과 금지된 사형을 재도입하였다.(Herbert R.Lottman, The Purge, P.275)
사실 프랑스의 독일 점령하에서 대표적 부역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비쉬정부는 한국의 친일부역집단과는 달리 나름대로 존립과 정당화의 여지가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자신의 어두운 역사와 부끄러운 과거를 과감하게 도려내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적 정통성을 곧추세웠다.
"프랑스 사람들이 나치독일의 점령이라는 민족적 수치와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전 반세기를 계기로 참된 민주주의를 위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흔히들 '나치협력자'로 불리는 민족반역자들을 엄정하게 처단하여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웠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는 4년여동안의 나치점령시기, 역사로부터 떼어내고만 싶은 암울했던 점령기를 과거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처단을 통하여 극복했으며, 그 당연한 결과로 가장 선진적인 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나치협력자에 대한 처단을 통해 프랑스가 보여준 과거청산의 본보기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그리고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고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비쉬정부에 대한 처벌이나 추방의 단호함 보다 우리를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인, 프랑스 사회의 관심의 집요함과 지속성이다. 단 4년간의 피점령기간이 40년이 넘게 프랑스 현대사에 기나긴 너울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 인용한 글에서 보듯이 이 문제는 언제나 프랑스의 '활화산'이 되어 때로는 그들을 괴롭히는 '망령'이기도 하고 때로는 민족의식과 사회이데올로기를 재점검하는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클라우스 바르비 외에도 프랑스 국민의 뜨거운 열기와 관심, 논쟁을 모은 폴 뚜비에르, 모리스 파퐁, 르네 부스케등에 대한 재판이 최근까지 이어졌다. 또한 1964년 이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레지스탕스와 추방'에 관한 가장 잘 된 글에 대하여 매년 상이 수여될 정도로 이 문제에 대한 교육적 관심이 뒤따랐다. 또한 레지스탕스는 영화와 소설, 역사 논문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였고 비쉬와 부역자는 거의 건드려 지지 않은 금기가 되었다.
제대로 역사의 청산을 경험하지 못한 한국은 그 후유증을 호되게 맛보아야 했다. 일제의 미청산은 한국 현대사의 권위주의적 정치행태와 군사적 문화유산의 업보를 남겼다. 만약 프랑스에서와 같이 우리가 일제 지배하에서의 친일부역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단행하고 이들에 대한 공직의 추방, 정신적 자주성의 확립을 이루었다면 독립된 조국은 민주주의의 만발, 자유와 인권의 철저한 보장등 보다 건강한 발전을 기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한탄과 자괴를 금할 수가 없게 된다. 더구나 그들의 부역자 청산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와의 대조를 통하여 역사적 청산의 비뚤어진 과정과 원인을 되짚어볼 중요한 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2.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가.비쉬정권의 성립
(1)프랑스의 패배와 비쉬정권의 수립
1938년 루드비히 벡크 독일 합참의장은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프랑스 군대가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이래 6주만에 맥없이 무너졌다. 독일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지노선을 통과하여 단 몇주만에 피레네 산맥까지 닿을 수가 있게 되었다. 벨기에와 네들란드를 석권한 독일은 5월 15일 이미 전선을 돌파하였고 이어 한걸음에 파리를 향하여 남서쪽을 진격하였다. 영불해협의 북서쪽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함께 패퇴시키고 있었다.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연합군 34만명이 덩커크에서 철수함으로써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대프랑스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 정부는 르와르 강 하류로 철퇴하였다.
마침내 6월 14일 밀물처럼 밀려든 히틀러의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자유,평등,박애의 위대한 프랑스 정신을 담고 있는 이 상징적인 장소를 히틀러가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세계의 큰 충격이고 실망이었다. 다시 전세는 밀려 보르도까지 쫓겨온 프랑스 내각은 항복과 항전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하기도, 실효성을 가질 수도 없었다. 혼란이 극도로 고조되고 주요전력과 북부의 공업중심지가 상실된 마당에서 국내에서의 전의를 상실한 레이노 수상은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겨 항전할 것을 제안하였다.페탕원수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땅을 떠나는 것에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영국정부로부터는 '불영연합국'(Franco-British Union)의 창설 제의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운명을 강조하고 전쟁의 공동수행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 제안은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가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영국의 전쟁 지원이 주목적인 '불영연합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회의감이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휴전파와 항전파의 논쟁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1940년 6월 16일 당시의 레이노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페탕원수가 취임하였다. 페탕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1차세계대전 당시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면서 당시 스페인 대사로 나가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고 있던 페탕은 프랑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한 몰락에 이르기 보다는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도 꼭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정부가 휴전에 이르지 못하면 프랑스 군대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공포에 빠질 것이다.프랑스 본토의 포기는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프랑스의 영혼은 프랑스에 남음으로써 유지될 수 있고 연합국의 대포와 함께 재정복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페탕에게는 "일단 우리가 프랑스를 떠나면 다시는 프랑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결론이었다.
휴전파들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한 페탕은 수상으로 지명받은지 몇시간 이내에 독일에 대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독일로서는 앞으로 남은 영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영국의 고립을 가져오고 프랑스의 함대와 식민지를 중립화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항복조건 보다는 프랑스 정부의 주권 존속을 인정하고 부분적으로 점령을 실시하는 안을 받아들였다. 6월 22일 독일대표단과 프랑스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성립되었다. 페탕은 6월 25일자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휴전협정은 체결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 - - 우리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조건은 엄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명예는 구조되었다. 누구도 우리의 비행기와 함대를 사용할 수 없다. 우리들은 본국과 식민지에 있어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육해군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는 의연히 자유롭다. 프랑스는 프랑스인에 의해 통치될 것이다."
"프랑스인을 통치할 프랑스인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바로 비쉬정권이 그것이다. 프랑스 남부의 한 휴양도시인 비쉬를 전시수도로 정한 비쉬정권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의원과 내각의 각료들은 혼비백산하였지만 3분의 2정도는 비쉬에 모일 수 있었다. 이들은 페탕과 라발의 제안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1875년의 헌법을 전시동안 정지하는 한편 페탕으로 하여금 포고령(Decree)에 의해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결의안이 Joseph Paul-Boncour에 의해 제안되었다.그러나 라발은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는 "의회민주주의는 나치즘과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이제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정부는 단호하고 권의적이며 사회적이고 국가적이어야 한다"면서 프랑스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완전한 권력을 공화국 정부에 부여하는 수정안을 제의하였다. 라발의 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고 새로운 헌법의 공포권이 페탕에게 주어졌다. 이에 따라 제정된 헌법은 국가주석의 권한을 "루이 16세보다 더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1940년 7월 10일 페탕은 국가주석으로 취임하였고 이로써 비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직후 12명의 각료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였고 큰 지방의 지사를 임명하였다. 라발은 부주석이 되었다.
(2)휴전협정하의 비쉬정권 주권의 실제
프랑스의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보면 프랑스 정부의 자주성이 얼마나 유린되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휴전협정은 일방적으로 프랑스정부가 그 국민들로 하여금 전투재개를 금지시킬 것을 약속한 것일뿐 독일이 무력행위를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휴전협정 가운데 군사조항으로서 프랑스 포로를 강화시까지 억류해 둘 수 있다는 것, 병력수를 10만명으로 제한할 것, 군수품을 인계할 것, 공군의 무장해제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함대의 경우 프랑스가 보유할 수 있도록 하되 전승국의 감시하에 무장해제하도록 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해외 자산은 그대로 유보되었다. 경제조항은 재개되는 해상무역 및 점령지대와 자유지대 사이의 교역을 독일 관리하에 두는 것과 막대한 독일 점령군 유지비를 프랑스 정부가 부담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휴전협정에 의해 프랑스 북부는 독일의 직접적인 점령, 남부 프랑스는 비쉬정권의 통치지역으로 분리되었다. 북부 점령지대는 파리와 프랑스의 가장 풍요로운 지방을 포함하였다. 이 지역의 점령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독일은 파리의 마지에스티 호텔을 본부로 하여 카이텔 원수를 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군총사령관은 군대의 안전뿐만아니라 치안.경제활동의 관리.선전.언론의 통제까지 장악하였다. 행정분야에서 프랑스 정부의 주권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휴전협정 제3조에 의해 독일당국에 정보제공등 협력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남부의 자유지대에는 비쉬정부에 완전한 통치권이 위임되었다. 그와 동시에 휴전협정은 독일측의 감시위원회가 설치되어 자유지대의 지방관청에서의 관보 발행의 검열, 중요 공무원 임명의 허가등을 가능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2년 11월 이후에는 자유지대조차 사실상 점령하고 말았기 때문에 직접 점령지역과 자유지역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 프랑스정부가 휴전협정에 따른 의무를 위반하면 독일은 언제라도 휴전협정의 파기를 통고할 수가 있었다. 알사스 로렌 지방은 독일에 병합되었다. 이 지역의 주민에 대한 강제퇴거, 독일화, 프랑스어 사용의 금지가 실시되었다. 점령군 유지비 부담은 합법적인 약탈에 다름아니었다. 항복보다는 이 휴전협정의 결과가 보다 프랑스에 이익을 안겨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휴전은 분명 항복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적인 독일의 점령의 목적에도 부합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더구나 비쉬정권은 형식적으로 보면 일정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페탕원수의 명성을 이용한 실질적 점령의 한 형태에 불과하였다.
나. 비쉬정권의 성격과 그 합법성
비쉬정권의 합법성에 대해서는 당초에는 별다른 의문이 없었다.프랑스 국민들은 비쉬정권이 비록 독일에 사실상 항복한 후 등장한 정부이긴 하였지만 그 자체가 무효인 정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형식논리적으로만 보면 비쉬정권은 당시의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구성된 합법적인 정권이었다.
전후 드골은 이 비쉬정권을 처음부터 당연무효이고 제3공화국 자체는 존속하는 것으로 언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언은 1940년 6월 19일의 페탕 원수의 독일과의 휴전협정 직후에 런던으로부터의 '라디오 런던'에서도 이미 밝힌 바 있다. 드골의 선언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페탕정부는 나치독일과 휴전협정을 목표로 삼아 수립되었기 때문에 정통성을 상실했다.왜냐하면 프랑스대혁명 때의 헌법(1793년)에 의하면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영토를 점령한 적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둘째, 페탕정부는 휴전에 동의하여 무조건 항복했을 뿐만아니라 프랑스 국민을 나치독일의 노예상태로 전락시켰으므로 불법적인 정부라는 것이다. 페탕정부가 휴전협정에 서명한 것은 민족이익을 배반한 것이며 '자유프랑스'만이 민족이익에 성실한 공복으로 남아 자동적으로 정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획득했다는 것이 드골의 법률해석이다. 셋째, 드골은 나치독일과의 휴전협정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이 협정 제10호는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독일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드골은 휴전협정의 무효화 논리를 근거로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으며 점령지역 내 저항운동을 조직했고, 프랑스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기 전에 저항운동세력이 정권의 각료들을 포함한 나치협력자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적인 차원 이전에 비쉬정부는 프랑스 국민의 정부임을 인정할 수 없었다. 드골이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France is not France without grandeur)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법률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철학적 차원에서 비쉬정권을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쉬정권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 정권이었다. 헌법이 통과된지 얼마되지 않아 일련의 탄압적 법률을 통해 프랑스 혁명 이후 확립된 '인간의 권리'를 효과적으로 폐지하였다. 어떠한 공무원 또는 군인도 단순한 장관의 포고령으로 해직될 수 있었다. 권한을 남용한 제3공화국하의 각료들을 처벌할 특별고등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국적 재심사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1940년 8월에는 결사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모든 공무원은 어떠한 비밀결사에도 소속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하게 하였다.또한 노동조합연맹도 해체되었다.
비쉬정권은 외형적으로는 제3공화국을 계승했지만 실제로는 그 단절을 꾀했다. 제3공화국의 요인들이었던 페탕의 전임 수상 레이노, 가멜린 장군, 달라디에, 만델, 레온 블럼등이 체포되었다. 이른바 리옴(Riom)재판에서 이들은 전쟁의 준비에 소홀하였다는 혐의에 대하여 실제 최고군사위원회의 책임을 오랫동안 맡아온 것은 바로 페탕이었다며 비쉬정권과 독일을 공격하는 데에 이 재판을 활용하였다. 이를 골치 아파한 독일의 지시에 따라 이 재판은 추가보완조사를 위해 연기된 채 그 이후 열리지 않았다. 이 외에도 제3공화국시의 49명의 지사를 포함한 고급관료등 2,282명의 공무원들이 비쉬정부에 의해 숙청되었다. 1940년 7월 23일자 법률은 전쟁기간동안 아무런 공무상의 허가없이 프랑스를 떠난 사람들을 직무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여 처벌하였다.
다. 비쉬정권의 역사적 평가
---- 비쉬정권은 차선책(Lesser Evil)이었는가
(1) 프랑스를 지키는 '방패'
"나는 4년 이상이나 매일같이 프랑스의 영원한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 하였다. 충성스럽게 그러나 한점의 타협도 없이 나는 단지 하나의 목표만을 가졌다.바로 프랑스를 최악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 - - - 만약 내가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나는 바로 방패라도 되려고 하였다"
나치독일의 전면적인 점령으로부터 비쉬정권은 프랑스인의 고통을 경감시켰는가 비쉬정권은 프랑스의 '폴란드화'를 막았던 것인가 전후 페탕 원수와 그의 각료들은 대단히 실증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을 변명하려 하였다. 페탕은 위 '방패'이론을 전후 자신의 재판에서 발전시켰다.
"나는 나의 권력을 프랑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로 사용하였다. 매일같이 나는 적군의 요구에 대항하여 싸웠다. 나의 적은 단지 나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역사는 내가 국민을 위해 했던 모든 것을 말할 것이다. - - - 드골 장군이 우리의 국경 밖에서 투쟁하였다면 나는 프랑스 즉, 고통당하였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프랑스를 보존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
즉 드골이 나라밖에서 프랑스의 칼을 높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프랑스 국민의 방패를 들었다는 주장이었다. 라발 역시 고등법원에서 그의 정부가 정복자와 프랑스 국민 사이의 '스크린'으로서 기능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결국 비쉬정권이 비록 정복자인 나치독일의 보호하에 있었지만 '스크린' 또는 '방패'가 되어 프랑스 국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물질적 이익의 이론'(Material Advantage Theory)은 상당히 광범하게 받아들여졌다. 유명한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은 통계적으로 보건대, 프랑스인들의 당시 삶이 다른 유럽 정복민들보다는 나았다고 하면서 위 이론에 동조하였다. 비쉬정권에 대한 공격은 물질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도덕적인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2)방패이론의 허구와 프랑스의 참상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제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독일과의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그 점령목적에 협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과연 다른 직접 점령국 보다 덕을 보았는가에 대한 부정적인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먼저 휴전협정은 점점 '휴지'로 변해갔다. 히틀러의 정책은 "잡을 것이 있는 모든 것을 잡아라"라는 것이었다. 즉 독일점령군은 징발의 권한을 남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선박의 압류, 철도 재고의 3분의 1 장악, 모든 개솔린 재고와 군용을 위한 식품의 징발을 단행하였다. 이들에 의해 약탈된 것은 실로 계산할 수가 없는 정도였다. 프랑스 산업이 필요로 하는 원료는 단지 독일로부터 공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베를린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생산가동율은 50%에서 점차 더 떨어졌다. 프랑스는 이제 거의 완전한 농업국가로 전락할 형편이었다.
전쟁전 프랑스는 가장 앞선 농업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점령중 그 국민의 1일 칼로리 섭취량은 서유럽 뿐만아니라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이탈리아를 제외하고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프랑스의 독일점령군과 독일 본토로의 식품 공급은 그 절대적인 양에 있어서나 상대적인 비율로 보나 폴란드 보다 더 많았다. 독일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프랑스 노동자의 임금이나 생활수준이 독일보다는 나아서는 안된다고 언명하였다. 영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쉬정권이 나치와의 협력관계로 특별히 이득을 본 것이 없었다. 알자스 로렌 지방은 제3제국의 행정 아래로 들어갔고 두개의 북서 해협 해안도시가 브뤼셀에 있는 독일군정의 관할하에 있었다.
또한 강제노동자나 유태인문제에 있어서도 비쉬정권은 별반 방패가 되지 못하였던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다. 라발은 전후 80%의 벨기에 노동자가 강제노동에 종사하였지만 프랑스는 단지 16%뿐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유럽국가의 유태인들 92%가 사라졌지만 프랑스의 유태인은 95%가량이나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비쉬정권의 Commisaire였던 Xavier Vallat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비쉬정권은 프랑스에게 할당된 강제노동자의 숫자를 채우기에 광분하였고 실제 1943년 11월 현재 러시아나 폴란드보다 더 많은 약 1백30만가량의 프랑스 남자가 독일공장에서 노동하고 있었다. 유태인들의 강제수용소행의 경우에는 다른 완전 점령국하에서 독일군이 직접 했지만 프랑스의 경우에는 비쉬정권이 대신하여 하였다는 것 자체에서 더 큰 비난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비쉬정권하에서 13만5천명의 구속, 7만명의 강제수용(중앙 유럽으로부터의 정치적 피난민포함), 3만5천명의 공무원의 해직이 이루어졌다. 여러 종류의 배타적 입법으로 6만여명의 조직원들이 조사받았고 6천여명이 고문당했으며 549명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비쉬정권과 그 부역자들은 이 모든 대량의 인권침해가 프랑스 정부의 이름과 그 권위, 조직아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나아가 비쉬정권은 프랑스와 그 국민의 방패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향한 '흉기'가 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프랑스 애국자들을 처형과 탄압의 공포로 몰아넣은 민병대의 존재는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1941년 봄에 다르낭에 의해 창설된 프랑스전사단보안대(SOL)가 1943년 민병대로 정식 전환된다. 이 조직은 준군사조직으로 공식적인 경찰과 별도로 공산당원들과 레지스탕스를 학살하고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나치의 SS, SD에 의해 무장되고 훈련받은 이들이 종국적으로 나치의 점령목적으로 사용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렇게 본다면 비쉬정권의 '방패이론'은 설 땅이 없어진다.전쟁이 질질 끌면서 독일당국은 완전 점령국과 전혀 다름없는 요구를 프랑스에게 해 왔고 비쉬정권은 그 요구를 결국 들어 주고 말았다. 독일이 인질로 잡았다가 총살한 프랑스인이 수천명을 넘어섰다.강제노동을 위해 징용된 프랑스인이 다른 나라보다 많은 숫자였음은 위에서 본대로이다. 비쉬정권은 독일의 요구를 차단하여 프랑스와 그 국민의 이익을 수호한 것 보다는 결과적으로 독일의 정책을 프랑스 정부의 이름으로 합법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말았다. 독일의 완전 점령국 또는 프랑스 영토내의 독일 직접 통치하에 있는 지역의 통치방식, 법률등은 모두 비쉬정권의 권위를 통하여 그대로 반복되었다.
라.비쉬정권의 역사성과 국민의 인식
비쉬정권의 성립은 이미 전전(戰前)의 인민전선(Popular Front)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제3공화국에 대한 심각한 불신등에서 비롯되었다. 비쉬정권은 그 창설에서부터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적 성격을 띄고 있었다. 양 대전 사이에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페탕을 비롯한 보수파 지도자들은 독일군에 의한 북부 프랑스의 강점상태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부흥'을 꾀하면서 히틀러와의 평화유지와 더불어 '신유럽'질서의 한 기둥을 차지하겠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비쉬정권이야말로 그토록 자신들이 붕괴시키려 했던 때로 부터 6년이 지난 시점에서 프랑스를 파시스트 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라고 믿었다. 독일 나치의 프랑스에 대한 승리는 그들이 주창해 온 파시즘의 우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의회와 노동조합을 폐지하고 반유태인 입법을 강행하였으며 카톨릭을 선호하였다. 프랑스 극우 파시스트에게는 제3공화국의 독일에 대한 패배는 지난 50년동안의 '퇴영적 민주주의'(democratic decadence)를 번복시키는 선택의 기회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이 비쉬정부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정부는 패전에 의해 불신임된 공화국을 대신한 정부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페탕에 대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신뢰하였고 전지전능한 사람으로 맹목적 믿음을 가졌다. 히틀러를 현실적으로 잘 다루어 프랑스의 국가이익을 지키고 한편 이 수치스런 패배를 자초한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드골장군의 자유프랑스는 영국의 이익을 위한, 그리고 1941년 이후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스탈린과 프랑스 국내 공산당의 투쟁에 두려움을 가졌다. 1942년까지는 프랑스의 정상적인 코스는 단순히 '평상의 유지'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도 변하고 있었다. 독일점령의 엄혹한 현실과 전쟁에 대한 지겨움은 페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특히 라발에 대한 경멸, 독일인들의 목적에 대한 불신을 키워갔다.
3.점령하의 부역자와 부역행위
가.비쉬정부에 의한 협력
휴전협정이 참담한 것이었음이 분명해 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국토는 분할되고 독일군의 물자와 인력 징용, 점령경비의 부담은 가혹스러웠다. 경제활동조차도 독일군에 의해 지배되었고 북아프리카의 식민지와 프랑스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되었다. 영국과의 관계 악화에 따른 해상봉쇄, 드골의 '자유 프랑스'의 영향력 확대와 적도 아프리카의 이반등은 비쉬정부를 더욱 압박하는 요인이었다.
라발은 독일과 프랑스의 동맹 결연을 제안하였으나 페탕은 이에 반대하였다. 독일이 북아프리카에서의 군사기지를 요구하였으나 페탕은 휴전협정을 들어 이것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이후 비쉬정부는 드골의 손에 떨어진 아프리카 영토의 반환, 식민지 생산물의 제공, 자유지대의 공장에 군수품의 주문생산 용의등을 밝힘으로써 독일측의 요구라기 보다는 비쉬정부 스스로의 자진 부역을 행하고 있었다.
스페인 프랑코와의 회담 직후인 10월 24일 히틀러는 몬토와르(Montoire)에서 페탕과 회담을 가졌다. 영국과의 전쟁에 공동으로 참여하자는 히틀러의 위협과 권유를 페탕은 물리쳤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가에 관계없이 독일과의 협력은 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회담 직후 페탕은 "나는 대독협력의 길에 발을 담그는 것은 명예로운 것이고 또한 유럽의 신질서를 건설하는 활동이며 프랑스의 통일성, 10세기에 걸친 그 통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지금까지 애매한 독일과의 관계가 이제 한층 더 분명하게 부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히틀러와의 회담과 그 결과에 대해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의 노예화의 새로운 단계'라고 비난하였다.휴전협정으로부터 겨우 3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였다. 부역은 항복한 프랑스에게 있어서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부역을 해야 하느냐 여부가 아니라 부역의 방향과 정도였다.
이제 프랑스는 독일과의 전면적인 협력의 동반자관계로 들어섰다. 파시스트들의 극성과 레지스탕스의 증대는 비쉬정부로 하여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만들었고 점차 전자의 편으로 기울어지게 하였다. 대독협력에 우유부단하다는 파시스트로부터의 공격과 독일로부터의 압력에 따라 파시스트 지도자들의 일부를 비쉬정권의 행정부 안에 포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이 이루어진 후 독일은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튜니지의 공항사용 허가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1942년 11월 11일 프랑스의 자유지역을 독일군은 유린하였다. 휴전협정의 명백한 위반이었으나 아무도 저항하지 못하였다. 곧이어 해군함대가 있는 툴롱이 점령되었다. 비쉬정부가 나치독일과 협상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가 침몰하는 순간이었다. 이 이전에는 비쉬가 통치할 영토가 있었고, 아무리 적더라도 군대가 있었으며 연합국과 추축국, 그리고 중립국간의 외교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이후 이 무의미한 비쉬에서 스위스와 바티칸 대표만이 남았을 뿐 모두 떠났다. 주권독립국으로서의 비쉬정부는 허울만 남은 셈이었다.
나.민간의 부역행위
(1) 개관
부역의 개념을 규정하기에 따라 당시의 프랑스인 모두가 부역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적극적인 부역이 있었는가 하면 소극적인 부역이 있었다. 나치의 이념에 집착한 나머지 1944년 프랑스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망명한 충성스런 부역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독일에게 패배를 안겨준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역자 대열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불화해와 나치의 유럽신질서를 위한 협력주의자(collaborationists)'라고 생각하면서 단지 물질적 이익과 개인적 발전을 위해 독일인과 거래하는 부역자(collaborators)들과는 구별하려 하였다. 전자는 이미 독일의 패전이 예상되는 시기에도 독일과 다른 추축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에도 부역의 동기는 재산적 이익의 추구, 신분의 상승, 개인적 원한의 앙갚음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심지어 부역자만큼이나 부역의 유형도 많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이다.
부역자들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에는 부역을 열심히 선동한 언론이 있는가 하면 나치독일에 적극적인 파시스트 정당들의 본부가 있었다. 이들은 독일의 최종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과 부역에 대한 열성을 지니고 미온적인 비쉬정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한편 독일에 의해 직접 점령을 당하지 않은 지역에서의 부역자들은 비쉬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프랑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만을 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군사적 영광이며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킬 국가혁명의 지도자로서의 페탕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독일의 요구에 대해, 특히 군사적인 행동에 관한 한 덜 양보하려 하였다. 후자의 입장이 보통의 프랑스 국민들의 가진 입장이었다.
히틀러와의 몬트와르 회담 이후의 페탕의 성명은 파리의 적극적 부역자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지만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환상으로부터의 깨어남이었다.페탕은 단순한 생존을 위한 부역이라기 보다는 더욱 분명한 독일과의 협력관계를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전쟁이 진행되고 독일군대의 불패의 신화가 깨어지기 시작하면서 두 그룹의 부역자들간의 차이도 사라졌다. 런던과 파리에서의 레지스탕스에게도 그 차이는 없었다.한편 부역자와 레지스탕스는 파시스트와 반파시즘연합 사이의 내전의 두 극을 대표한다. 파시스트가 모두 부역자라고 할 수 없었지만 1944년 종전시에는 모든 부역자는 파시스트가 되었다고 말해질 정도로 독일과의 부역은 파시스트들이 이끌었다.
정치적 영역에서의 부역은 독일 점령하의 유럽에서 보다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한다고 여긴 프랑스 기업가들의 경제적 부역을 불러 왔다.이어서 정치.경제적 부역은 다수의 유명한 프랑스 문인, 영화.연극인, 언론인들의 문화적 부역으로 연결되었다. 부역은 이와같이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부역자들의 부역사실과 죄상은 처단의 과정에서도 언급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몇 분야에서의 부역 행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2) 저널리스트의 부역행위
나치독일은 2차세계대전 중 유럽의 8개 수도를 무력에 의해 점령하였다. 점령당국에 협조하도록 만들기 위해 무력과 설득, 매수등 온갖 가능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심리전에 있어서 가장 주된 무기였다. 브뤼셀, 바르샤바, 오슬로, 아테네등에서 괴벨스의 유능한 대원들이 적정한 프로파겐더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책을 "별다른 저항없이 환자의 몸 속에 주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파리의 경우 그와는 달리 보다 유연하고 미묘한 방법이 동원되어야 함을 그들은 알았다. 즉 파리지엔과 그들의 신문들과의 오랜 그리고 친밀한 관계을 이용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새로운 신문보다는 종래의 신문을 계속 발간케 하여 일정 부분을 점령당국의 요구에 할애하면 나머지 지면은 종전대로의 잡다한 문화비평, 스포츠, 행사등에 얼마든지 할애하도록 허용하였다.
저널리스트의 경우 '피가로', '쥬르날'등의 일간신문사가 남부지구로 퇴각하였으나 파리에 남거나 독일의 후원하에 새로이 탄생한 신문도 적지 않았다. 점령하의 최초의 신문은 '빅토로'로서 주간은 쿠스타베 에루베였다. 부나우-바릴라 소유였던 '르 마뗑'도 점령당국의 권유에 의해 같은 시기에 복간되었다. 독일군에 의해 운영되는 프랑스통신사를 설립하였고 독일군의 지시에 순종하는 프랑스인 저널리스트에게 허가증을 발행하고 용지를 배급하였다. 1939년에 2백만 독자를 자랑하였던 '파리 소와르'지가 복간되었고 좌익지였던 '휴마니테'가 일시 복간 허가를 받았다가 비쉬정부에 강력한 요구에 의해 허가가 취소되었다. 특히 독일점령당국이 후자의 복간을 허용한 것은 대독협력에 노동자들의 설득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 대신 '프랑스 오 트라바이에'지가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노동을 통한 구원'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었는데 실상 뒤에서 보는 프레스 클럽이 그 뒤에 있었다. 상당한 대중에게 읽혔던 '쁘티 빠리지엔'도 재간되었다. 반유태인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점령당국은 '오 필로리'를 창간하였다.
이러한 신문들이 독일의 검열을 받고 절대권력을 가졌던 Herman Eich박사가 주도하는 프레스 클럽으로부터 직간접의 조종과 지시를 받고 있었다. Eich는 '언론회의'를 조직하여 이를 통하여 기사의 내용을 조정하였다. 심지어 초기에는 일부 신문들은 어떻게 기사를 써야 하는지 자발적으로 문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언론회의'는 일주일에 두번씩 열려 독일신문들에서 실린 기사의 내용과 다루어져야 할 기사의 대강을 통고받곤 하였다. 두달에 한번은 프레스 클럽에서 '티 파티'가 열려 파리의 언론인들을 길들이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이 언론인들이 쏟아낸 부역의 필봉은 참으로 섬뜩한 것이기조차 하였다. 마르셀 데아가 편집하는 '뢰부르'(L'Ouvre)는 연일 비쉬정부의 우유부단함을 공격하면서 독일과의 더 적극적인 협력을 강조하였다. 페탕에게조차 이 신문은 독일보다 더 심한 적이었다. 1941년 나치 점령군에 저항하여 무장한 청년공산당원들이 바르베 지하철역에서 독일군을 공격하여 살해한 사건이 터지자 같은해 8월 28일자 'La Gerbe'지는 "모스크바에서 사주한 살인자들을 향해 대중여론을 일으키라는 지시"를 받고 이 애국자들을 죽이라는 다음과 같은 사설을 썼다.
"그들을 당장 체포하라. 선택은 이루어져야 한다. 내일이 아닌 바로 이 순간에. - - -그러므로 행동하라! 이러한 범죄에 대항하여 열성적으로 편들어라. 이 범죄자들을 쫓는 사람들을 도우라. 그것은 바로 당신의 도시, 당신의 집, 그리고 당신의 목숨을 보호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피를 흘리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들은 독일군의 총탄에 의해 군인과 같이 총살당할 것이 아니라 바로 프랑스 총살부대에 의해 반역자 처럼 죽어야 한다"
이들 언론들은 영국의 BBC나 '자유프랑스라디오'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전선의 동향이나 독일군의 행태, 레지스탕스의 활동등을 왜곡 보도하였다.지하언론들이 레지스탕스나 파리 시민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한 보도 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빠리 해방의 순간이 닥아오던 1944년 8월 19일부터 이 모든 부역 언론들은 일제히 사라졌고 그대신 21일부터는 완전히 레지스탕스 언론들이 이들을 대체하였다.
(3) 문인들의 부역행위
독일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프랑스의 저명한 문인들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어리석음과 그들의 이름이 계속 살아있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그 이름을 빌려준 작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 대가로 그들의 책이 계속 배포되도록 허용되었을 뿐만아니라 특별한 특권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독일로 초청되어 강연할 기회가 주어지거나 독일의 연회에 초청되기도 하였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협력관계의 증거와 새로운 유럽 창조의 선구자로서 제시되었다. 귀국한 다음 히틀러 독일에 대한 인상을 부역언론에 제출하도록 요청되었다. 이러한 유명인사들의 '스타 여행'의 한 예는 프랑스 아카데미 소속의 3명의 작가들의 경우였는데 이들은 매일아침 특별한 담배와 용돈까지도 지급받는등의 환대를 받았다. 가장 유명한 작가 중의 한사람이었던 지로두는 1944년 사망하고 말았는데 생전에 그가 점령중에도 계속했던 문필 활동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그는 노예화된 국민들을 호도하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책을 써 부역을 선동하였다.이 외에도 유명작가들이 그들의 필봉을 휘드르다가 전후 처형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와같이 부역작가들에 의해서 야기된 해악을 제거하기 위해 레지스탕스 작가들이 나섰다. 1943년 봄 Les Editions de Minuit가 출판한 책들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바다의 침묵'이라는 제목의 첫권은 독일에 대하여 취해야 할 적절한 태도에 관해 독자들을 계몽하는 내용이었다. 그 저자는 베르코르라는 필명의 작가였으나 본명은 쟝 브륄러였다. 그에 이어 모두 25권이 연달아 출판되었다.
(4) 정당.정치인의 부역행위
정당들은 1940년의 패배 책임을 졌다. 라발은 1940년 7월 1일 비쉬에 도착한 직후 모든 정당은 소멸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면서 단일정당을 주창하고 이를 추진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페탕원수의 지지단체에 지나지 않는 '프랑스 전사단'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파리에는 공화국에 대하여 공격을 일삼았던 극우 지도자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쟌 보우셀은 '프론 프란'(프랑스 전선), 피엘 크레만디는 '프랑스집산주의국민당', 아루셀 비카르는 '프란시즘'을 재건하였다. 마르크 오지에의 '청년전선', 로베르 에르센의 '젊은 전선'등의 새로운 정치단체도 허다히 생겨났다.
1941년 초반에 창설된 마르셀 데아의 국가인민연합(RNP)은 노동조합과 극우 요소를 결합한 전체주의 정당을 건설하려 하였다.이 시도가 실패하면서 1942년 탄생한 프랑스인민당(PPF)는 25만명의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다. 반공을 가장 핵심적인 이데올로기로 차용한 이 단체는 가장 극우적이며 부역행위에 적극적이었다. 국가인민연합에는 공무원들이, 프랑스인민당에는 노동자들이 비교적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나치의 승리가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쟈크 도리오는 PPF의 지도자였다. 독일의 소련침공을 들은 그는 "이 대륙의 운명을 결정할 이 결정적인 전투에 프랑스가 방관자일 수만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파시스트 지도자들인 마르셀 데아, 유겐 델롱클등도 볼쉐비키 위협에 대항한 독일의 생사를 건 투쟁에 동조할 것을 주장하였다.곧 이들 프랑스 파시스트 정당들은 '볼쉐비즘에 대항하는 프랑스의용군단'(Legion des Volontaires Francais contre le Bolchevisme, L.V.F) 창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를 위해 러시아 전선에서 죽기로 서명한 사람은 겨우 3천명을 넘어서지 않았다. '대동아성전'을 위해 조선의 청년들을 내몰던 일제하 부역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다. 비쉬정권의 유태인 정책
프랑스 내에 살고 있던 유태인에 대한 법률적 제재는 1940년 10월의 "유태인에 관한 법률"(Statut des juifs)이 근거가 되었다. 비쉬정부는 이 법률에 의하여 유태인들이 고위공직자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프랑스 국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법은 유태인들을 특별 캠프에 수용하거나 경찰감시를 가능하도록 하였다. 이 법에 따라 프랑스에서 독일로 추방된 7만6천명의 유태인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으며 '죽음의 기차'로 보내지기 전 프랑스내의 수용소에서 질병과 기아로 수천명이 사망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게쉬타포가 아니라 바로 프랑스 경찰과 위 법을 피하여 피신하였다.
이 법의 제정은 나치독일의 간접적 압력과 영향에 기인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히틀러의 반유태인정책은 이미 공공연한 것이었고 독일의 프랑스점령지역에서 위 명령이 공식화되기 이전에도 혹독한 반유태인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음을 비쉬정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에게 있어서 반유태인 정책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근 10년간이나 에스칼레이트 되어가던 반유태인 감정의 표현이었고 폴란드 점령시에 약탈과 정착의 기회가 주어짐으로써 더욱 확대되었다. 점령이 장기화되어가던 1941년부터 프랑스에서도 독일행정사무소들이 자리잡았고 그 정책을 보다 활력있게 추진해갈 태세를 갖추었다. 독일군과 비밀경찰, SS등의 파리지부등이 유태인정책에 대한 정책추진과 책임을 함께 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반유태인정책은 프랑스인 자신의 것이었다. 이는 독일점령에 의해 야기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위 반유태인법률의 제정자였던 라파엘 알리베르가 1947년 3월 법정에 섰을 때 검찰총장은 이 문제에 관한 독일당국과의 접촉 흔적을 아내지 못해 '적과의 내통'에 대한 죄목을 철회하여야 했다. 독일이 프랑스점령지역에 대해 유태인에 관한 명령을 처음 내린 것이 1940년 9월 27일이었다. 이때는 이미 비쉬정부 스스로 인종차별금지법안을 철폐하고 새로운 반유태인법안을 심사하고 있을 때였다. 프랑스는 비록 1791년 입법을 통하여 유태인을 해방시킨 최초의 유럽국가였지만 이데올로기적인 반유태인주의는 비쉬정권이 수립되기 70년전부터 이미 우익 정치철학의 한 부분이 되어 왔던 것이다. 페탕은 이와같은 이론을 실행에 옮긴 법률에 서명하였던 셈이다. 반유태인 성전(crusade)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어 있었고 전쟁발발 직전까지 히스테릭한 논쟁이 이어졌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로부터의 유태인의 유입과 1936년 좌파 유태인 출신의 레온 블럼의 수상 선출에 의해 반유태인감정은 폭발 직전에 있었다.이리하여 나치로부터의 별다른 압력도 없이 비쉬지도자들은 스스로 반유태인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비쉬정부 관할의 프랑스 영토안에서 유태인의 체포와 독일로의 이송은 프랑스 경찰이 직접 수행하였다. 페탕의 '붕괴된 국가의 보호자'로서의 이미지를 손상시켰던 유태인의 추방에 대한 비난이 가중되면서 비쉬정부는 1942년 잠시 그 정책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반유태인법과 행정적인 지시는 1942년 11월 프랑스 전역을 독일군이 사실상 점령하면서 계속되거나 오히려 강화되었다. 수천명이 게쉬타포를 위해 일하는등 프랑스 경찰의 협력도 해방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유태인의 송출과 관련된 비쉬정부와 경찰의 역할은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하려는 집요한 노력이 있어 왔다. 1983년까지 공식적인 학교 교과서는 유태인의 대량학살이 공식적인 프랑스 정부의 협력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사실을 게재하지 않았다. 유태인의 체포와 반유태인 법안은 모두 독일인의 책임으로 전가되었고 비쉬는 인종적 학대에 저항한 인상을 주었다. 역대 정부는 이러한 검열내용을 승계하였고 이에 따라 프랑스 국민은 몇세대 동안 프랑스의 반유태인 법령이 페탕에 의해 승인된 것이며 프랑스 경찰과 공무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행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성장하였다. 1981년 사회당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역사학자들은 프랑스의 책임에 관한 재평가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60만명에 달하는 프랑스내 유태인들의 압력도 작용하였다. 이리하여 1983년 비로소 진실과 그것을 밝히는 여러 문서들이 공개되고 그에 따른 재평가와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태인들의 송출,학살등과 관련한 행위등은 전후 모두 비인도적 범죄로 취급되어 공소시효가 없는 상태로 끝없이 처벌받았다.
라.해방에의 길
--'자유프랑스'와 레지스탕스활동
(1) 드골의 자유프랑스 성립과 그 활동
전쟁초기 몇 군데에서 독일군의 진군을 저지하였던 드골도 결국 전체 패전의 기운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국방차관보로 마지막 전투를 지휘하던 드골은 독일협상을 주장하던 페탕 원수의 수상 취임 그 다음날 사실상 영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프랑스를 대표할 아무런 권위도 없는 '외로운 모험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는 패배주의에 빠진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큰 실망을 느끼고 있던 영국의 처칠 수상으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보로도 정부'가 항복을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드골은 처칠의 동의를 얻어 BBC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독일에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영광스런 군인의 이 불쌍한 그림자가 노령의 허영을 위해 자신의 명예와 조국을 팔았다"고 페탕을 비난하였다. 이미 프랑스는 연합국의 명단에서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드골의 존재와 그의 항쟁 선무방송은 의미가 컸다. 무기를 들고 독일군에 저항하라는 이 방송은 동시에 대독항복협상을 추진하고 있던 프랑스 지도자들에게 반항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정부가 마침내 독일과의 협상에 조인하였을 때 드골에게는 개인적 고난이 예정되어 있었다. 1940년 7월 5일 프랑스 군법회의에서 드골에 소환장을 보낸 사실이 알려졌다. 적전항명죄와 항명선동죄 혐의로 그는 비시정권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페탕은 그를 '내 가슴속에 키운 독사'라고 비난하였다. 드골의 고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아무런 자금도, 군대도 없이 영국정부의 호의로 작은 사무실 한칸을 얻어쓰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의 외무성 역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드골의 지지가 그나마도 페탕원수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에 대한 우려때문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유명인사들에 대한 드골의 접근을 막아 이들이 '자유프랑스'에 가담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다. 그러나 중진 정치인의 부재는 드골이 휴전체제에 저항하는 유일한 지도자로 남게 하였고 따라서 '정복되지 않은 프랑스'의 유일한 대표가 되었던 것이다. 드골은 단순히 군사적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해 7월말에는 이미 7천명의 해외 거주 프랑스인들이 모여들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의 진영을 강화하였다. 드골만이 유일한 대안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영국은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성원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비쉬정권을 나치독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게 하고 프랑스령 아프리카와 프랑스 보유의 군대와 자원을 독일에게 넘겨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에서 영국정부가 벌인 비쉬정권과의 접촉은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럴수록 '자유프랑스'의 도덕적, 실질적 가치는 높아갔다. 드디어 1943년 6월 3일 알지에에서 수립된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CFLN)는 도골이 주재한 '자유프랑스'의 정부기구로서 유일한 합법적인 권력으로 규정되었다. 이 위원회는 영.미.소등 연합국의 공식승인을 받았으며 해외영토와 나치점령하의 프랑스 영토도 당연히 그 주권이 미치는 영토로 규정되었다. 프랑스가 해방된 후 CFLN은 임시정부로 자동적으로 전환되는 법적 권위로 기능하였다.
한편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에서 '자유프랑스' 소속 군대의 활동이 증대되고 그 과정에서 작전권과 휴전권등을 둘러싸고 드골과 영국정부와의 갈등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Saint Jean D'Acre'휴전을 둘러싼 '자유프랑스'와 현지 영국군과의 관계 악화는 최악의 갈등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은 드골을 통제할 체제로서 그 허가없이는 어떠한 정책도 입안,결정할 수 없는 위원회의 설치 논의로 이어졌다. 드골의 태도는 영국에게는 오만함으로, 각종 결정과 국제회의등에서의 소외는 프랑스의 무시로 상호 오해되어 끝없는 갈등으로 이어졌으나 적어도 대독전선의 협력관계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 불안한 동거는 전쟁이 끝나고 드골의 프랑스 복귀와 함께 비로서 얼마나마 해소되었다. 1944년 마침내 그 지리한 망명의 계절이 끝나고 드골은 영웅이 되어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단지 패배한 국가의 초라한 망명군인이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드골의 신화가 과장될 수는 없다. 드골과 그의 '자유 프랑스'만이 프랑스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었다.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 대독무장전투에 전면적으로 나섰고 그 대열에 기독교민주당, 신부,군인, 중소기업인등이 합류하였다. 이들 모두가 드골을 지도자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당수는 안전한 런던에서 싸우는 드골을 비난하기 조차 하였다. 드골과 함께 또는 그와는 별도로 국내에서 싸웠던 수많은 전사들이 있었다. 이른바 레지스탕스였다.
(2) 레지스탕스의 활약과 공헌
처음부터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손쉽고 상식적인 것은 막강한 권력 그 자체를 묵인하는 길이었다.더구나 레지스탕스 활동은 위험했고, 당시까지만 해도 나치의 악행이 한꺼번에 드러난 것이 아니었으며, 나치의 패망 이후에도 별다른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보다 더 높은 도덕의 이름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정당화될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도덕적 회의도 적지 않았다. 또한 유럽의 가장 강력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나치-소련 평화협정(Nazi-Soviet Pact)이 유지되고 있는 한에는 저항 보다는 평화를 택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비롯한 나치 점령하의 전 유럽에서 레지스탕스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담벼락에 비난 낙서와 슬로간 쓰기에서부터 사보타지와 암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특히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에 따라 유럽 공산주의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활동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가장 헌신적이고 조직적인 이들의 활동은 다른 어떤 그룹보다도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가 보다 본격적으로 조직되고 활약하게 된 것은 두가지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였다. 즉 개별적 저항 활동이 보다 조직적 형태를 띄고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첫째 계기는 1942년에 시작된 비쉬정권의 강제동원체제(Service du Travail Obligatoire)였다. 처음에는 자원에 의해 시작된 이 제도가 점차 강제적으로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독일의 공장노동자를 비롯한 전쟁수요에 응하는 시설로 징용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자 이를 피해 레지스탕스에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부터는 독일 공장에서 일하도록 모든 연배의 프랑스 청년들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젊은이들은 독일 공장행 기차를 타거나 또는 레지스탕스가 되기 위해 산으로 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가련다 . 둘째 계기는 민병대(Milice)의 설치였다. 나치에 의해 고무되고 비쉬정권에 의해 창설된 이 민병대는 결국 자신의 동족인 레지스탕스를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오히려 레지스탕스 강화의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와 무고한 민간인들을 아무런 사법절차없이 마구 처형하면서 그 잔학성을 보였다. 1942년 여름 유태인의 강제수용이 시작되면서 카톨릭이 비쉬에 대한 반대입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43년 초가 되면서 나치의 패배가 보다 명확해 지면서 나치는 서유럽의 점령지역에서의 공출과 징집을 강화하였고 이것이 레지스탕스의 대중적 활동의 물적, 인적, 심리적 기초가 되었다.
레지스탕스가 벌인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성급한 폭력'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드골은 1941년 당장의 성과도 없이 젊은 생명들의 소모를 개탄하기도 하였다. 최종의 결전을 준비하여야 한다는 준비론과 당장의 행동을 중시하는 결행론 사이의 분열이 언제나 있었다. 또한 독일군의 축출에만 관심을 둔 측과 프랑스 사회의 근간을 청소하려는 측과의 갈등도 심각하였다. 정규군 출신의 무장병력과 빨치산 활동세력 사이의 '보이지 않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전자는 독일군에 저항하지만 사회의 기득권을 보존하려 하였고 후자는 사회의 변혁을 갈구하였기 때문이다 . 대체로 프랑스의 일반 국민들은 독일군으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은 혁명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레지스탕스의 규모는 한계가 있었다. 이 가운데 10만명이 그 활동 가운에 목숨을 잃었다. 또한 비쉬정권 당국자들과 나치 게쉬타포는 이러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볼쉐비키와 연결시키려 하였다. 레지스탕스를 공산주의자들과 동일시함으로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을 조장하려 하였던 것이다. 나치독일에 못지않게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있던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이러한 선전에 쉽게 현혹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비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정통성을 주장하는 두 정권 아래에서 프랑스 국민은 많은 혼란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운동을 벌인 프랑스인은 엄청난 숫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30만명이 공식적으로 레지스탕스 경력자로 인정받았다.이 숫자는 당시 성년 남자의 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은 군사적으로도 독일점령군과 비쉬정권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사회 문화적 영향은 더욱 큰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카톨릭에서부터 공산주의자에 이르는 다양성을 보이고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적어도 전후의 질서를 그대로 복원하기 위하여 그들이 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새로운 정치,경제,사회질서의 형성을 그들의 머리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의회민주정치의 복귀를 원했지만 그러나 전전의 부패구조는 배제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레지스탕스의 공헌과 헌신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보상과 응답을 받았다. 1944년으로부터 194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레지스탕스 세력은 정계의 다수를 이루었다. 상대적으로 전통적 우익을 포함하여 우익 정치세력은 비쉬정권의 몰락과 함께 거의 회복불능의 상황을 맞이하였다. 비쉬정권에 손을 들어주었거나 직접 비쉬정권에 참여하였던 302명의 하원 및 상원의원들이 피선거권을 잃었다. 이 가운데 반이 넘는 163명이 1936년에 중도 또는 우익에 속하는 의원들이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레지스탕스 신문들이 전체 일간신문 구독율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주의계열의 신문 구독자수는 전전보다 네배를 넘어섰다. 레지스탕스라는 이름은 일종의 성스러운 상징이 되어 "모든 문을 여는 열쇄'로 간주되었다.
4.해방과 나치부역자 처리과정
가.개관
"보복을 당한 것은 독일병들만이 아니었다. 독일 장교의 정부(情婦)였던 프랑스 여성들도 끌려나왔다. 그녀들은 머리를 빡빡 깎이우고 드러낸 가슴에는 갈고리 십자가가 그려졌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나는 독일병과 잤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달고 파리 시내를 조리돌림을 당했다."
해방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순간이었다. 전시중에 프랑스를 형식적으로나마 지배하였던 비쉬정권의 지도자들과 협력자들에게는 '부역자'라는 이름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병과 잠자리를 같이한 여성들에게조차 프랑스 국민의 반감은 조롱과 모독을 준비하여 두었다.
해방과 더불어 부역자에 대한 검거와 처단의 선풍이 불었다. 제대로 사법절차가 갖추어지지 않은 채 즉결처형이 실시되곤 하였다. 적지 않은 무고한 시민의 희생과 보복적 처단도 적지 않았다.복수의 열정이 이성과 합법성을 제쳐놓았다. 다음의 한 묘사는 당시의 보복의 상황이 얼마나 살벌하였던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에 따른 숙청은 프랑스혁명기의 공포정치에 비유되고 당시의 잔혹성은 전시의 적에 의한 것만큼이나 과도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한 사례로서 부역자인 남편이 살해되고 이어 부인이 강간당한 채 자신의 11살된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묶인 사람이 자신의 딸이 12번이나 윤간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또다른 경우 아이는 내팽개쳐진 채 그 어머니가 강간당했다. 고문이 처단 직전에 따랐다. 부역 혐의자의 눈을 찌르고, 생식기가 짤리고, 불타는 침대 위에 눕혀졌다. 한 신부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고 생식기를 총격한 뒤 생매장 되었다. - - -여성들의 경우 가슴이 도려내 졌다. 부역자들은 맨발로 깨진 유리 위를 걸어야 했고, 여성 부역자는 체포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나체가 되었으며 동물과 같이 교미하여야 했다.- - -"
그러나 아무도 실제로 얼마나 많은 프랑스인이 부역죄로 처형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것은 전쟁의 마지막 순간과 해방의 초기에 자의적인 복수와 임의적인 처형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권위있는 기관이 정확성을 가진 통계 숫자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그 처벌의 숫자를 알기는 어렵다.
전후 프랑스를 지배하게 된 드골은 '자유프랑스'를 이끌고 나치독일과 싸운 지도자로서 부역자의 처벌과 숙청, 비쉬시대의 청산에 의욕과 관심을 보인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그 처단과 숙청은 자못 극단적이고 지나친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부역자처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해방의 시기에 드골은 역사상 비쉬의 말소 및 레지스탕스의 상대적 평가절하라는 양면의 정책을 취했다. 그것은 국외에서 싸웠던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쩌면 국내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 지도자들과 드골의 알력과 분열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다 근본적인 부역자 처단과 사회개혁을 열망하던 레지스탕스 세력과 페탕주의자 조차 끌어안으며 정치적 안정을 기해 보려던 드골은 다함께 쓴 경험을 맛보아야 했다. 레지스탕스의 원래의 목표는 좌절되었고 국민적 지지는 옅어져 갔다. 사분오열된 국민여론을 끝내 통합시키지 못한 드골 역시 1946년 1월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정치권력의 풍향에 따라 부역자의 역사적 평가와 그들에 대한 처단의 경험과 사면문제등이 각양각색으로 나타났다. 퐁피두 대통령은 과거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표방하였다. 1974년 지스카르 데스텡의 대통령 당선은 그러한 드골 우파의 지배에 종언을 고하게 하였다. 당초 전쟁 중에 자신이 레지스탕스 그룹에 속했다고 주장까지 한 데스텡은 점차 모호한 자세를 보이면서 레지스탕스 기념일을 국경일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하거나 페탕의 무덤에 화환을 바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그는 '자유주의 얼굴을 한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1974년 이후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전선이 이루어졌고 1981년 미테랑 대통령의 당선으로까지 이어졌다.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부역자에 대한 확고히 비판적 입장을 취한 미테랑을 공공연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권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나치점령과 비쉬정권, 부역자와 그 처단의 문제가 원칙을 잃고 표류하거나 민족 의식이 지향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다.
나.형사적 처벌
(1) 부역자에 대한 처단의 경고
이미 1940년 7월 13일, 비쉬정권이 수립되던 바로 그 시기에 런던에 있던 드골은 해방된 프랑스는 기필코 부역행위에 책임있는 자들을 처벌할 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치독일과 비쉬정부에 몸담고 있거나 이들을 지원하는 부역자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1941년에 들어서서 그 경고는 보다 구체성을 띄기 시작하였다. 자유프랑스가 운영하던 런던라디오 방송은 우리는 애국자의 죽음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을 구형한 밀고자, 불쌍한 판사, 불명예스러운 군인들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 - - 이 경고가 아직도 자신의 양심과 머리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억되도록 하자는 선동을 내보냈다. 프랑스 본토의 레지스탕스 언론 역시 반역자들에 대한 처단을 수없이 다짐하였다. 남부지역에서 발간되던 리베라시옹은 정기적으로 부역자들의 명단을 담은 블랙 리스트를 실었다. 이 신문은 또한 당신의 조사를 늦춰라. 너무 심하게 조사하지 말라. 당신의 보고서 내용을 줄여라. 그렇지 않으면 경찰 내부에 있는 소수의 정보원에 의해 당신들은 우리의 리스트에 새겨질 것이고 해방된 프랑스가 처벌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독일의 러시아 침공이 있은 직후 공산주의자들은 장래의 처단에 관하여 확고한 경고를 보냈다. 이 경고의 첫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설치된 비쉬특별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이 경고를 통하여 "독일인들이 영원히 파리에 있을 수는 없다"면서 독자들에게 판사들의 이름을 기록해 둘 것을 요구하였다. 1941년 가을 공산주의자들은 해방이 되면 처형되거가 구속해야 할 부역자들의 명단 작성을 시작하였다. 1941년 10월 리용에서는 독일의 첩자, 부역 경찰관, 판사, 언론인에 대한 보복 리스트 작성을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포스터가 나붙었다. 심지어 이 포스터는 이들 부역자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농민과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부역자의 집에 부역자임을 표시하고 처단을 경고하는 스티커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디에프에서는 '민족전선' 이름으로 부역자 명단을 점검하고 부역자의 집에 확인표시를 할 비밀재판소의 설치를 발표하였다. 블랙리스트의 발상은 비공산계 지하신문들에도 손쉽게 채용되었다. 1943-1944년 사이에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준비와 발행은 프랑스 전역에 보편화되었다. 심지어 런던의 BBC 방송과 알지에서의 방송도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였다. 이러한 블랙리스트의 공개는 부역자들에 대한 경고와 혼란을 주었고 그대신 레지스탕스에게는 승리의 도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2) 전투중의 나치부역자 처단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말에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다. 실제 비쉬정권의 장관들은 모두 암살 대상이 되었고 때로는 암살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라발 역시 1941년 9월 베르사이유에서 암살자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달랑은 실제로 194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지에에서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1942년 이후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은 "민병대의 어떠한 범죄도 처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부역자 처단에 나선 것은 공산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보수적이라고 분류된 레지스탕스 신문 '데팡스 드 라 프랑스'지의 편집인도 인명에 대한 신성함에 대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었다.
"우리의 국토를 정화하기 위해 독일인을 살해하라, 그가 우리를 살해하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라, 자유롭기 위해 그를 살해하라.// 반역자를 살해하라, 우리를 비난하고 적을 돕는 자들을 살해하라, 애국자를 체포하는데 공헌한 경찰관을 살해하라.// 민병대를 살해하라, 반역의 길을 선택한 그들을 살해하라. 미친 개처럼 타살하라, 해충을 죽이듯 박멸하라"
이와같이 나치부역자 처단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인내심을 갖지 못하였다. 이미 수많은 전투지역에서 레지스탕스 전투원들은 독일 장병,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에 협조한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응징을 하려 들었다. 이들 부역자들은 그들의 복장, 나치점령당국에의 근무사실에 의해 명백하게 부역사실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레지스탕스 활동이나 자유 프랑스이념에 위해가 될만한 개인적 부역자들도 이들의 타겟이 되었다.
레지스탕스의 가장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독일 점령군과 이에 협조하는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이었다. 당시 비쉬정권의 지방조직에 의해 상부에 보고된 레지스탕스의 처단활동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예컨대, 1943년 9월 리용지역에서만 해도 23명이 레지스탕스의 공격에 의해 사망하고 31명이 부상했는데 이들 가운데 8명이 프랑스인들의 원성을 사던 민병대원, 11명이 일반 경찰관, 4명이 친나치 정당원등이었다. 1943년말 그해의 마지막 4개월동안 레지스탕스 공격에 의해 희생된 비쉬정권 요원들은 709명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230명이 헌병(gendarmes), 147명이 경찰(Gardes Mobiles), 30명이 민병대, 150명의 민간인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아니라 9천회의 공장 또는 시설물에 대한 공격, 150회의 시청 공격이 이루어 졌으며 686개의 농장, 3,714개의 창고, 600개의 기차가 파괴,방화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특히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에게 분노와 원한의 적이 되었다. 1943년 4월 24일 마르세이유의 민병대 조직자인 폴 드 가쏘브스키가 살해되었다. 그 해 내내 민병대원들에 대한 살해와 보복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였다.9월에는 에비앙 지역 비서인 쟌 다비드가 살해되었다.많은 사무실이 폭파되고 간부들이 사상하였다.
치열한 전투의 한가운데에서 부역자들이 일시적으로 설치된 법정에서 재판을 통하여 처단되기도 하였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전투지역에서는 부역자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비쉬정권하의 장관이었던 푸체우는 북아프리카 알지에에서 1943년 9월 3일 '프랑스전국해방위원회'(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의 포고령에 의해 재판받았다. 그 이듬해 3월 20일 총살당하였다. 비쉬정권의 각료가 재판받기는 처음이었다. 또다른 비쉬정부의 각료였던 쟌 베르제레 역시 '자유 프랑스'에 의해 체포되어 '적과의 부역, 반역, 국가안전의 위해'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로써 적극적인 부역자들은 그 전쟁에 이기지 않으면 죽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와같이 '자유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런던에서 알지에로 그 본부를 옮기면서 부역자 처단에도 새로은 전기를 마련한다. 한 때 비쉬정부 각료를 지내다가 라발의 복귀에 반대하여 사임한 마르셀 페이루통의 경우는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의 고위 관리였던 앙리 지로드 장군에 의해 알제리아 총독으로 임명까지 되었으며 드골의 감사까지 받은 상태에서 1943년 11월 알지에에 설치되어 있던 '숙청위원회'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역시 비쉬의 각료였던 플란뎅, 부와송 장군이 체포되었다. '자유프랑스'는 12월 11일 당시 북아프리카에 거주한 비쉬정부의 각료와 고위 공무원들에 대한 체포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라디오 런던 방송을 통하여 모리스 슈만은 반역의 추진자들을 벌하지 않고 어떻게 하위 관리들의 범죄를 벌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그러한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였다. 해방시까지 이들의 재판과 처형을 미루어야 한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았으나 '동정없이' 처단이 이루어졌다. 그 후에도 알지에 군사재판소에서는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함께 싸우거나 독일을 위해 군사시설과 편의를 제공한 상당수의 프랑스 군인이 처형되거나 장기형을 선고받았다. 본국에서의 부역자 재판을 위한 하나의 서막이며 '리허설'이었다.
(3)해방 과정과 직후의 나치부역자 약식처형
(가) 보복의 바람과 약식처형
"지금부터 프랑스인들 사이에 평화가 있어야 한다.범죄가 처벌되는 것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절차에 의해서이다. 나는 프랑스를 이 땅에서 벌어졌던 점령과 전투의 결과로서의 내전의 학살로부터 구하고 싶다.보복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벌어지지 않도록 내 책무를 다할 것이다. 복수는 단지 신에게 속하고 처벌은 건전한 사법 행정이 이루어진다는 보장과 함께 정규적인 재판소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페탕이 비쉬에서 독일군에 의해 억류되어 Sigmaringen으로 떠나기 직전에 프랑스국민에게 발표할 성명의 일부였으나 실제는 발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설사 발표되었더라도 그의 요청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이미 쫓겨가는 독일군과 그 뒤에 남겨진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레지스탕스와 민중의 분노는 '정규적인 재판소'를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군이 아직 프랑스를 채 떠나기 전에 부역행위의 선봉대 역할을 수행한 민병대측에서 군법회의를 설치하여 '프랑스의 애국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1월 무렵의 일이었다. 군법회의는 희생자들이 있는 감옥등에서 설치되어 아무런 적법절차나, 변호인의 도움없이 재판이 진행되었다. 군법회의의 구성원은 모두 정복 민병대원들이었고 피고인들은 심지어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판결이 선고되기도 하였다.
독일군이 떠나면서 이제 레지스탕스들이 세운 비정규 재판소들이 민병대의 그것을 대체하였다.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한 부대 또는 교외지역에 설치된 '민중 재판소'는 성급하고도 회복하기 어려운 선고를 하곤 하였다.치안판사나 변호사는 없었다. 바로 며칠전 자신들의 운명을 처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운명을 이제 레지스탕스 요원들이 직접 요리하고 있었다.예컨대, Part-Dieu 주둔지에도 이러한 재판소가 열렸다. 부역자들이 끌려와 간단히 신문을 받은 후 곧 처형되었다. 재판의 심리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심지어 피고인들의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이 임시 재판소에서 처형된 사람도 20-30명으로 헤아려졌다. 나치군이나 민병대가 약식처형을 실시하던 감옥도 이러한 임시재판소로 사용되었다. 이리하여 복수의 회오리바람이 권력의 교체기에 거세게 일었다. 독일 점령군이 후퇴하면서 아직 프랑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수하지 못한 곳곳에서 레지스탕스등이 그 공백을 차지하고 복수의 처형을 실시했던 것이다. 리용에서만 그당시 14,311명이 체포되고 4,342명이 살해되고 290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 범죄는 다시 범죄로, 학살은 다시 학살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 가운데 흑백이 가려지지 못한 채 억울한 처형을 당한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리용의 경우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1944년 9월 9일 부역자를 재판하기 위한 군법회의가 공식적으로 설치되었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선별하고 사형선고자는 재고를 가능하게 하는등 보다 세련된 사법체제가 가동되었다. 혐의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두는 것은 그 자체로서 혐의자들의 도주를 방지하는 것 뿐만아니라 혐의자들을 민중의 분노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완전한 사법적 질서가 섰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정상적인 사법체제로 가는 과도기였다. 그 며칠 사이에 리용지역에서 1,800건의 기소가 이루어졌다.이제 변호사의 조력도 가능해 졌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변호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예컨대, 어떤 사건을 변론하기로 한 변호사에게 "8시에 사건 개요에 대한 설명이 있을 것이고 9시에 재판이 열린 다음 4시에 처형이 실시될 것"이라는 일정이 고지되던 상황이었다. 프랑스가 해방된지 10개월이 지난 1945년 6월에 이르기까지 드골정부의 내무장관인 아드리엥 틱시에는 당시 경찰이 이러한 약식처형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지 못함을 시인하였다.
이러한 약식처형이 이루어졌던 근본적 이유는 이것을 통제할 아무런 권위가 없었다는 사실에 있다. 연합군이 진격하여 해방한 도시 외에도 현지 레지스탕스에 의해 해방된 지역이 많았고 각 지역마다 정식의 재판소가 설치되기 이전에 일종의 인민재판이 성행했다. 비쉬정권의 지도자들이나 저명한 언론인등 지식인들은 나중에 정식 재판절차에 따라 처형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각 지방의 악질적 부역자들은 현지의 레지스탕스 세력에 의한 약식처형으로 응징당했던 것이다.
(나) 약식처형의 숫자
이와같이 사실상 재판없이 이루어진 약식처형에 관하여는 아무런 공식 기록이 없을 뿐만아니라 그 숫자에 관하여 여러가지 이론이 있다. 해방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틱시에는 정보책임자였던 파씨 대령에게 1944년 말과 1945년 초에 이르기까지 약식처형된 자가 약 105,000명에 이른다고 보고하였다. 어떤 학자는 레지스탕스에 의해 1백만명이 체포되고 그 가운데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은 12만명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전후 이 숫자는 여러 저작 또는 보고에서 정설로 되었다. 1953년 당시 수상이자 내무장관이었던 Henri Queuille는 의회 위원회에 약식처형자가 9,675명이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가장 조심스러운 사실과 증거의 검증은 해방의 역사를 관련서류와 지역별 자료를 일일이 분석하여 세권짜리로 써 발간한 역사학자 로베르 아롱에 의해 수행되었다. 아롱은 틱시에는 매우 즉흥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좀 과장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105,000명이라는 숫자는 프랑스 각 부처별 1천명을 의미한다고 평가하였다. 어떤 개인적인 증인도 아무리 감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이정도의 숫자를 제시하지는 않았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동시에 Queuille가 제시한 낮은 숫자도 그는 전적으로 무시한다. 1955년 이 부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자 한 레지스탕스의 '사법행동위원회'(Judicial Action Committee)의 경우도 별다를 것이 없다고 그는 보았다. 그리하여 아롱은 마을마다의 엄청난 규모의 경찰자료에 초점을 두었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부인들이 자신들의 남편의 정부를 부역자로 몰거나 해방의 기회에 약탈 또는 살해등으로 날뛴 범죄자들 또는 법정에서 괴롭힌 변호사들을 보복적으로 부역자로 몰아 처단한 경찰관들의 이야기까지 나온다. 또한 독일 점령자들을 위해 매춘부로 일한 여성들이 부역자로 처단당한 이야기가 끝없이 있었다. 정치적 동기에 의한 살인도 있었다. 리비에라의 셍-막심이라는 마을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레지스탕스가 비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16명이나 죽인 사례도 발견되었다. 아롱은 1944년 6월부터 1945년 5월까지 프랑스에서 아무런 법적 절차없이 총살되거나 학살된 남녀는 3만에서 4만명에 이른다고 결론내렸다. 부역행위로 인해 재판과 선고를 거쳐 처형된 사람은 779명으로 집계되었다. 아롱은 1939년 8월부터 1945년 5월까지 전쟁중에 사망한 프랑스인은 총 62만8천명으로서 그 가운데 20만명은 정치적, 인종적, 또는 독일에 강제노동자로 징용된 경우였다고 분석했다. 또한 13만3천명의 민간인이 군사작전의 결과로 희생되었다고 보았다. 나머지 숫자는 1940년 전장에서 사망한 자, 레지스탕스 활동, 독일에 의한 처형, 포로수용소에서의 죽음등에 따른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 수상실 부속의 '제2차세계대전사위원회'의 주도로 53개 행정지구에 걸쳐 조사를 수행한 결과 이 조사 책임자인 '마르셀 보도'는 점령기간과 해방초기에 5,009명의 양식처형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이 숫자를 전국에 유추하여 적용하면 약 8천5백 내지 9천명의 약식처형 희생자에 이른다고 보았다. 1959년 드골이 출판한 약식처형의 숫자는 약 1만명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상당한 차이가 있는 이 약식처형의 숫자는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제대로 알길 이 없는 실정이다.
(4)드골정권 수립후의 나치부역자 처단
(가) 처단의 원칙과 근거
드골장군의 비쉬 부역자와 프랑스의 반역자에 대한 처리의 태도는 처벌이 엄정하고도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명백한 사건들에 한정되어야 하며 전체적인 숫자의 확대 보다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태도는 관대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국가의 권위와 통합성에 기초해 있었다. 약식처형,개인적 원한에 의한 처벌은 국가권위에 맞서는 것이었다. 드골은 어떤 개인도 죄인을 처벌할 권리는 없으며 그것은 국가의 관심사일 뿐임을 언명하였다.따라서 국가는 지체없이 법원이 사건을 조사하고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개인이나 조직의 분노에 의해 압도당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개인과 조직의 분노로 말미암아 재판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드골의 신속한 부역자 처리의 원칙은 분명하였다.
그가 파리로 귀환한 그날 저녁 파리시청을 방문하였을 때, 그가 방금 임명한 파리 시장 Flouret에게 한 첫번째 말은 "공직추방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일이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절차는 몇주 이내에 완료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프랑스 사법절차의 지연 때문에 스피드도 공정함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원래의 시한은 1945년 11월까지였으나 계속 지연되었고 1949년 2월 취임한 새로운 법무장관 로베르 르쿠르는 새로이 3개월의 시한을 주었다. 파리재판소의 경우 그 시한은 다시 그해 말로 연장되었고 그때까지 기소된 사건들은 계속 재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 기소되지 않은 다른 모든 사건은 군사법원에서 다루게 되었다. 리용재판소의 경우 1950년 초에 검사는 아직 70건 가량을 수사중이고 27명이 기소되어 구금중이라고 밝혔다.
드골은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의 근거로서 1944년 6월 26일 훈령을 내려 나치부역자처리를 위한 전담재판소(Court of Justice)를 전국적으로 개설하였으며 8월 26일에는 시민법정(Civic Chamber)과 함께 공민권박탈제도를 창설하는 훈령을 내렸다. 또한 1945년 11월 18일에는 비쉬정권의 국가원수였던 페탕원수를 비롯한 3부요인을 특별히 심리하는 고등재판소 설치를 위한 훈령을 공포하였다. 이 네가지 훈령은 나치부역자 처단을 위한 절차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훈령은 모두 드골의 임시정부가 제정한 것으로서 "국내 질서나 프랑스의 대외적 지위" 때문에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나 새로운 의회의 구성을 기다릴 수가 없던 상황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독일의 나치전범 처리를 위한 뉴른베르크 헌장의 제정과 이에 따른 재판의 진행을 목격한 프랑스는 1964년 12월 상하원의 합동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전쟁범죄에 관한 시효 제거를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이 법률에 의하여 그 이후에도 많은 부역자들이 법정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역행위 가운데 악질적인 것은 대체로 전쟁범죄 또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바르비를 비롯한 악질적인 독일인 또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사냥이 계속되었다. 1984년 바르비 재판에서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1964년의 위 법이 규정하는 시효배제법의 유효성을 재확인하였다.
(나)처단의 실행과 숫자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였을 때 약 3만명의 비쉬 부역자들이 독일내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있었다.페탕과 같이 결국 대부분은 송환되거나 자의에 의해 귀국하였다. 비쉬정부의 주요 공무원들은 전후 부역자 재판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비쉬정권의 관리들에 대한 재판에서 프랑스 법원이 선고한 사형자수는 2,071명에 달하였고 약 4만명에 대해 자유형이 선고되었다.이 가운데 드골은 오랜 그리고 신중한 검토끝에 모든 여성에 대한 사형을 면제하고 768명에 대해서만 사형의 집행을 허락했다.
비쉬정권의 상징적 존재들이었던 페탕과 라발에 대한 재판과 그 집행은 뒤에서 자세히 보기로 한다. 악명을 떨쳤던 프랑스 민병대장 죠셉 다르낭 역시 라발의 처형 닷새 전에 처형되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한 명의 증인이 출두하였다. 그의 제1,2차세계대전 중의 전공에도 불구하고 민병대가 끼친 프랑스인에 대한 살상행위로 재판 시작 7시간만에 사형선고를 받고 말았다. 독일점령당국에 대한 비쉬정부의 대표로 있었던 드 브리농 역시 사형을 면할 수 없었다. 그는 1947년 4월 15일 처형되었다. 그러나 비쉬의 각료였던 아벨 보나르, 다르퀴에 드 펠르프와, 브리도 장군, 라파엘 아리베르등은 마침 해외로 도피중이어서 사형의 집행을 면하였다. 이브 부틸리에는 3년, 폴 마리옹은 10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에도 14만 6천명 가량이 나치를 도운 혐의로 기소되었다.
군사법원 또는 민간법원에서 조사받은 것을 사건수로 따져본 통계자료가 있다. 사건은 총 160,827건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약 45%가 기각 또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25%는 불명예조치 및 공민권 박탈 처분을 하였다. 나머지 24%가량이 자유형을 선고받았고 그 중의 3분의 1 가량은 일정기간 또는 무기의 강제노역형체 처해졌다. 최종적으로 7,03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1,500명이 실제로 집행되었다.혐의자의 불출석 하의 사형선고자도 약 3,910명이었으며 3천명 가량이 중노동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이 숫자는 위에서 본 비쉬정부의 관리들 외에 부역한 민간인들까지도 포함한 숫자이다.
(다)처단의 빛과 그림자
선고결과의 경중은 법원마다 상당히 달랐다. 군사법원이 차라리 민간법원 보다 관대한 편이었다. 군사법원은 개인이 민병대에 가입한 당시의 순진한 신념을 고려하였다. 또한 기업가 또는 엔지니어들은 언론인 보다 관대하게 대우받았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보다 대중 앞에 덜 나타났으며 또한 전후 복구에 이들의 역할이 필수불가결했기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초기에 원칙적이고 강경하던 엄벌의 태도는 뒤에서 자세히 보는 것처럼 점차 완화되고 경감되었다.
이러한 재판결과가 레지스탕스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하였다.다음은 초기 레지스탕스 운동부터 참여하였으며 1954년 레지스탕스상(Prix de Resistance)을 수상한 쟌 까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법원의 판결들은 기본적으로 간단한 본질을 건드리지 못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도 페탕이나 Maurras의 재판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려하지도 않았다. Maurras는 그의 마지막 글 가운데 이웃을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가 수없이 많은 사람을 비방한 다른 글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극우정치조직 Action Francaise는 또 어떠한가"
그러나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영원히 동족과 사회에 대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야 했다. 이들에 대한 낙인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부역자 처단의 과정에서나 그 이후에나 이들은 깊은 모멸감과 수치심을 맛보아야 했다. 심지어 그것은 가혹하리만큼 지나쳤다. 감옥에 가서도 이들이 당한 대우를 보라.
"그의 머리는 깎이우고 발길질을 당했다. 심지어 잠을 재우지도 않았다. 일부 죄수들은 그들의 발이 부러터서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하루종일 감옥안을 행진하여야 했다. - - - 끊임없는 모욕과 불필요한 과업이 이어졌다. 국에 침을 뱉고 키로 머리를 때리고 배를 차곤 하였다".
부역자 처단은 그 절차의 불공정 때문에도 비판받았다. 실제로 부역자 재판은 중도파들이 요구하는 전통적 사법절차와 파시즘을 박멸하라는 두가지 요구에 대한 만족스런 타협을 하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딜레마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일 뿐만아니라 법률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합법적인 복수와 실정법 사이, 계속적인 가혹한 처벌과 단기간에 사라지는 기억 사이의 긴장관계가 엄존하였다.
라.숙청과 공민권박탈
(1) 개관
(가)숙청의 준비와 계획
점령지의 해방에 따른 주요 공직자들의 추방과 교체는 이미 일찌감치 계획되고 있었다. 비쉬정부의 각 부처, 경찰 책임자, 시장, 교사등 주요한 직책을 교체할 프랑스 국내의 충실한 드골주의자들의 비밀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리스트는 프랑스 국무원에서 비쉬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으며 사실상 비밀요원으로서 드골주의자였던 미셀 데브르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는 비쉬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성향을 대체로 파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누가 드골에게 충성할 수 있는지, 신임받을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꿀레는 1943년 10월 해방된 코르시카에서 앞으로 해방시킬 프랑스 본토에서 부역자들을 추방하고 식품공급을 조직화하는등의 행정기술을 익히는데 몇달을 보내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미 1943년 알지에에서 내무부는 두 종류의 숙청 대상자 리스트의 작성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명칭은 '해방과 함께 체포되어야 할 공무원', '즉시 공직에서 제거되어야 할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이러한 공직추방에 관한 포괄적인 포고령이 선포된 것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직후였다. 부역자들에 대한 공직추방은 여러가지 형태를 띄고 있었다. 연금 없는 해임, 연금은 지급하는 해임, 전근, 강등, 직위해제, 파면등의 종류가 있었다.이 포고령에서 위임된 권한을 남용하였다는 근거로 이 공직추방 결정에 대하여 국무원에 항소할 수 있을 뿐 나머지 불복방법은 없었다.
(나) 해방 초기 숙청의 실시
---- 경찰과 사법부 숙청의 선행
1944년 6월 프랑스 본토를 되밟은 드골은 차례차례 마을과 읍을 해방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종래의 고위 공무원들을 데브레가 준비한 명단대로 교체해 나갔다. 예컨대, 초기 해방지역인 Bayeux 지방의 책임자로 비쉬정부에 의해 임명되어 4년동안 일했던 피엘 로샤가 레이몽 트리불레로 교체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일이 차레로 벌어졌다. 접수된 지역의 자치위원회를 해소하고 새로운 시장을 고 나아가 지역 공무원들을 심사하여 추방하고 판사들을 교체하며 부역자를 체포하는등의 일이 전투에 못지 않은 중요한 일로 추진되었다.
이리하여 1944년 말 현재 5천건의 해임, 직위해제, 또는 경찰관의 체포, 시장과 시의회 의원의 교체에 관한 결정이 이루어졌다.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 경찰과 검사, 판사등 사법업무 종사자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이들이 결국 앞으로 있게 될 모든 부역자 처단과 숙청 절차를 담당할 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도덕성이 먼저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더구나 경찰은 안보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고 행정부의 '쇼 윈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부역자 숙청의 실패는 레지스탕스와 국민들로부터 정부의 불신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모든 경찰서장은 해임되었고 그 가운데 5명에 대해서는 사형선고가 이루어졌다. 고위층을 포함하여 700명의 파리경찰관이 해방된지 2주일 이내에 체포되었다. 1944년말 현재 프랑스 전역에서 5천명의 경찰관의 직무집행이 정지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특히 사법부의 정화를 추진하는 과업은 레지스탕스 출신 법률가 모리스 롤랑에게 부과되었다. 판사들의 숙청없이 앞으로 진행될 부역자 처단업무는 완전히 실패할 것임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이 과업은 특별히 중요성을 띄었다. 그는 몇가지 가이드라인을 정했다.
1.장은 자신들이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책임을 지고 교체되어야 한다.
2.그 부하직원은 부역의 혐의가 증명되지 않으면 직무로 부터 제거되지 않는다.
3.사법부의 장이란 각 지역에서 항소법원의 수석판사 및 검찰총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역심사 기준은 사실상 애매하고 미묘한 것이었다. 개별적으로 판결의 내용이나 사법적 행동을 분석하는 길 밖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분석의 기준도 명확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 단체들은 비쉬정부의 '반 테러리스트' 특별법원에 근무한 모든 판사는 제재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전국사법위원회'에서는 그에 반대하였다. 결국 미묘한 기준 보다는 '국가적 수치'(national indignity)라는 광범하고 애매한 기준이 채용될 수밖에 없었다.
전체 판사들에 대한 부역심사 결과 1945년 5월 24일 현재 법무부장관 프랑스와 드 맨손은 자문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즉 법무부는 전체 사법부 직원의 17%에 해당하는 403건을 심사하여 237건의 직위해제를 단행하고 97명의 치안판사가 법무부숙청위원회로 회부되었다. 파리항소법원과 시법원의 경우 32명의 치안판사가 부역죄로 기소되었고, 9명이 해임, 13명이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사법부 숙청의 과정과 결과는 대단한 딜렘머였다. 엄정한 숙청은 숙청재판의 인력의 부족을 야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숙청대상 판사의 온존은 숙청재판의 미온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대안으로 판사들의 부역자 재판 집중 배치와 사법부 요원들의 신규 충원 조치가 이루어졌다.
(2)각계의 숙청 작업
부역자에 대한 숙청작업은 실로 프랑스의 모든 영역에서 추진되었다. 부쉬의 흔적을 털어내기 위한 해방 프랑스 사회의 노력은 집요하고도 엄중하였다. 예컨대 공직사회에서의 숙청작업은 우리에게 가장 인상적이다. 공무원들에 대한 청산이야말로 다른 시민 영역에서의 숙청을 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마다 숙청위원회가 설치되었다.그 부처의 공직자 외에도 레지스탕스 출신자들이 반드시 포함되게 되어 있었다. 이들은 어느 곳으로부터의 진정도 접수하였다. 조사결과는 해당 부처의 장관에게 권고로 전달되었으며 장관이 최종적인 숙청의 결정권을 가졌다. 공무원들에 대한 숙청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에 관하여 12만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으나 정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공사,철도등을 합쳐 16,113명, 국가공무원만 따지면 11,34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국가공무원에 대한 숙청의 유형과 숫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금없는 해임 (4,052 ), 연금있는 해임 (521), 강제퇴직 (841), 임시.영구연금정지 (215 ), 임시업무정지 (1,024 ), 계급강등 (367 ), 직급강등 (608 ), 자동전근 (1.516 ), 경고 (347 ), 견책 (965 ), 승진지연 (36 ), 재취업금지 (822 ), 훈장박탈 (29 )
이 글에서 프랑스 사회의 각 분야에서 벌어진 숙청의 작업을 모두 짚어볼 수는 없다. 다만 몇 개 분야에서의 숙청의 과정과 정도를 살펴봄으로써 그 전체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가) 정계
과거 비쉬정권하에서 몸담거나 협력했던 정계 인사들을 어떤 기준에서든 새로운 해방 조국에서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할 수 없도록 배제한다는 것은 프랑스 국민들이나 드골정권에 있어서나 합의된 내용이라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의회에서 1940년 7월 페탕을 위해 손을 들었던 의회 의원들을 제외한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 - -자유 프랑스가 어떠한 비쉬의 각료도, 비쉬정권하에서 부역을 옹호하여 행동하고, 쓰고, 말했던 어떤 사람도, 또한 어떤 직책과 자문의 위치에 있었던 사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준에 있어서는 차이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해방 후 처음으로 기준을 제시한 것은 프랑스 전국해방위원회의 앙드레 필립 위원이었다. 그는 제헌의원 입후보자의 자격 결격사유로 1940년 6월 17일 이래 페탕정권의 전 각료들, 비쉬정권의 주요공직자들, 지방정부의 주요공직자들, 1940년 비쉬정권에게 합법성을 부여한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던 569명의 의회 의원들을 포함시켰다. 1945년 초 드골 임시정부는 그 기준을 수정하여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면 비쉬정권의 각료들, 임시정부의 숙청작업에 의하여 나치협력 혐의를 받아 파면 또는 해임된 의회 의원과 공직자들, 나치점령기간에 개인의 부당이득을 취했다가 벌금형 이상의 처벌을 받은 자, 비쉬정권에 의해 중앙 및 지방정부의 자문직에 임명된 자, 1940년 7월 10일의 비쉬정권 수립시에 찬성표를 던전 의회 의원, 1942년 4월 라발이 총리가 된 후 비쉬정권에 기여하는 행정직에 봉사한 자등에게 피선거권을 박탈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형사처벌이나 공민권박탈판정을 받은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경우이므로 이 심사는 그러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주로 이루어졌다. 드골의 임시정부와 레지스탕스 단체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가 분류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내무부가 작성한 자료, 지방정부가 제출한 신상자료, 레지스탕스단체드로가 전국프랑스해방위원회가 제출한 문서들과 개인의 진술서등을 토대로 판정을 내렸다. 이 판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불복이 불가능하여 사실상 단심제로 운영되었다. 이 심사결과 416명의 상하의원 가운데 27%에 해당하는 114명에 대해서만 피선거권박탈 중지결정이 내려졌고 비쉬정권의 자문위원 233명 중 35%인 79명만이 참정권 회복판정을 받았다.나머지 대부분의 의원들은 정치활동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한편 심사과정에서 애매한 결정이 내려졌거나 번복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알베르 리비에르 위원은 1940년 6월 17일부터 7월 11일까지 페탕정부 회의에 참석한 것 때문에 부역자로 낙인찍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후 레지스탕스운동을 돕거나 격추된 미공군조종사의 구조등 반나치운동이 인정되어 피선거권을 되았다. 앙트완느 피네의 경우에도 페탕 정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것 때문에 피선거권이 박탈되었다가 레지스탕스운동에 참가한 사실이 밝혀져 역시 피선거권을 아 제4공화국의 총리까지 지냈다. 심사위원회는 점령기간 동안 사회지도층으로서 단순히 수치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하여 나치독일과 비쉬정권에 반대투쟁을 벌인 증거가 있어야만 피선거권 자격이 부여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레지스탕스활동을 지원하다가 자신의 딸이 나치에게 피살당한 가브리엘 도브레 의원의 경우 나치독일에 대한 무장투쟁이 아니라 단순한 인도적 견지에서 행한 지원만으로는 피선거권을 가질 권리가 없다고 판정되었다. 1942년부터 드골의 '자유프랑스'운동에 헌신하였던 샤를 바렝 의원도 페탕정부에 찬성표를 던졌고 나아가 초기 2년동안 "민족적 정기와 도덕성을 약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므로 그후의 반나치 운동이 상쇄될 수 없다"는 이유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장 까스니에 위원은 비쉬정권의 수립에 찬성표를 던진 사실에 관하여 참회하는 글을 언론에 발표하였으나 여전히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10월 국민투표에 의하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고 이어서 실시된 제헌의원 선거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 사회당은 25%, 공산당은 26%를 차지하여 좌파가 51%에 이르렀고 우파는 16%, 우파동맹세력인 급진파는 9%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적 물갈이가 이루어졌을 뿐만아니라 부역자들의 정치적 거세가 완결되었음을 의미한다.
(나) 외교관, 교육계, 군부
외교관들의 숙청 역시 이미 북아프리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본토 해방 전에 임시정부는 11명의 대사, 16명의 공사. 14명의 총영사, 25명의 서기관들을 해임하였다. 1944년 9월 해방된 파리에서 드골은 레지스탕스전국위원회 위원장 비도를 외무장관에 임명하였다. 비도는 곧바로 나지아르를 위원자으로 하는 숙청위원회를 외무부 안에 설치하였다. 먼저 비쉬에 의해 이루어진 전직 외교관의 신분에 관한 결정을 무효화함으로써 비쉬정권에 대항 또는 거부하다가 해임된 많은 애국 외교관들을 복직시켰다. 비쉬가 채용한 직원들은 모두 해직되어 새로운 시험을 보아야 했다. 외무부 숙청위원회가 506건에 대하여 심사한 결과 6명 중 1명 꼴로 제재를 결정하였다. 에 회부된 대사의 3분의 2가 제재를 받았을 정도로 엄중한 심사 행되었다.
드골정부는 프랑스인 외교관을 숙청하는데 그치지 않고 비쉬와 연관된 외국인 외교관들에 대해서도 신임장을 거부하였다. 해방될 당시 비쉬에 남았던 외교관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였다. 그들이 다시 파리로 옮겨 계속 대사로 활동하려 하였으나 외무장관 비도는 거절했다.
페탕이 중시했던 교육계의 정화 역시 해방 프랑스의 큰 과제 중의 하나였다. 1943년 8월 알지에에서 이미 문교부 내에 숙청위원회를 설치하였고 그해 12월 조사위원회가 구체적 사건에 대한 조사업무의 책임을 맡았다. 대학,고등학교등 교육제도의 각 분야에서 자체 숙청부서가 만들어졌다. 1945년 6월 현재 2,362명이 조사에 회부되어 370명이 견책, 359명이 전근, 110명이 강등,, 90명이 퇴직, 59명이 연금있는 해임, 259명이 연금없는 해임처분을 받았다. 357명의 고급문교관리가 처벌되었고 그 가운데 18명은 교육관리로부터 재취업이 금지되었다.
프랑스의 1940년 패전은 군부를 갈갈이 찢어 놓았다. 비쉬정부의 군인이 되거나 드골의 군대로 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레지스탕스, 극우 준군사조직원, 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지냈다. 해방 직후인 1944년 6월 비쉬정부에 의하여 이루어진 모든 임명과 승진은 무효라는 결정이 있었다. 이어서 1944년 9월 군사요원의 숙청과 재편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1946년 말까지 10,270명의 장교가 조사를 받았고 그 가운데 6,630명은 원대복귀, 650명 퇴직, 2,570명 해임의 조치를 취했다.
(다) 언론인.문인
연합군과 드골군이 완전히 파리에 진입하기도 전부터 레지스탕스단체들이 운영한던 지하신문들은 지상으로 올라와 부역행위를 서슴지 않던 신문들을 장악했다.'콩바'지와 '데팡스 드 프랑스'지는 전형적인 민족반역신문인 '랭트랑시냥'지를 접수하였고 좌파계인 '르 포퓌레르'지는 역시 부역지였던 '마텡'지를, 공산당기관지인 '류마니티'지는 "프티 파리지엥'지를 각각 접수하였다. 수많은 부역 언론인들을 도주하거나 잠적하여 버리고 말았다. 프랑스 전역을 해방시킨 임시정부는 곧바로 언론정화를 위한 훈령을 발표하였다. 1944년 9월 30일 발표한 훈령에 따르면 독일군이 직접 점령한 북부 프랑스의 언론은 1940년 6월 25일부터 15일간 계속 발간했던 언론, 남부지역의 언론은 독일의 전면적인 점령이 시작된 후인 1942년 11월 11일부터 15일간 이상 발행했던 언론사는 모두 나치에 협력한 것으로 간주되어 폐간등의 조치를 당했다. 폐간조치를 해제하는 조건으로 사주와 경영자가 민족반역죄 재판에서 무죄석방된 경우, 임시정부가 사주나 경영자를 나치협력자로 수배하지 않은 경우, 훈령공포 후 6개월간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경우가 열거되었다. 그러나 이 조건이 충족되어 폐간을 면한 점령하의 언론은 거의 없었다. 이어 1945년 5월 5일자 훈령은 심지어 독일점령하에서 발행된 신문의 제호마저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훈령들은 1946년 정식의 법률에 의해 수용된다.'드페르'법이라고 불리우는 이 법은 임시정부의 훈령들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승계하면서 부역 언론사의 재산을 국유화조치하였다. 이리하여 전쟁전 신문사중 살아남은 것은 '르 피가로', '라 크로와', '르 탕'지 3개뿐이었다. 이 신문들은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파리에서 지방으로 피난하였으며 점령기간 중에 정간함으로써 민족의 양심을 지켰던 것이다.
언론은 비쉬정권과 나치독일의 점령정책을 뒷받침하고 대중의 여론을 오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전후 이들에 대한 청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필지의 사실이었다. 이러한 언론의 부역행위를 주도적으로 수행한 언론인들에게는 사형등 가혹한 형사적 처벌이 부과되었을 뿐만아니라 가벼운 형사처벌을 받거나 형사처벌의 회초리를 면한 사람들조차 새로운 공화국의 언론에 종사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자유 프랑스'나 레지스탕스 운동을 테러집단쯤으로 매도하면서 비쉬정부와 독일군 점령당국에 협조하였던 많은 언론인들이 체포당해 처형당했다.독일의 전쟁승리를 기원했던 쉬아레즈, 비쉬정권 찬양에 열을 올렸던 브라지야쉬와 뤼세르등이 그러한 대열에 섰던 사람들이었다. 몇가지 사례를 본다.
① 쉬아레즈는 전후 설치된 파리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최초의 부역자였다. 일간 '오주르디'의 편집인으로서 그가 쓴 103건의 기사가 프랑스 형법 제75조의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그 글 가운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우리의 땅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독일인"이라고 주장하였는가 하면 히틀러의 관대함을 찬양한 것도 있었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것에 대하여 그의 변호인은 쉬아레즈가 범한 것은 범죄가 아니라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고 변론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형선고와 재산몰수, 수치국민 판정이 내려졌다. 항소는 기각되었고 총살되었다.
② 쉬아레즈에 이어 스테판 로잔느가 법정에 섰다. 그는 '르 마땡'지의 사설을 통하여 친독일 주장을 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에 대하여 그는 독일로부터 돈을 받거나 공모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반역죄가 될 수 없다고 변론하였다. 그러나 20년의 독거 구금, 재산몰수, 수치국민 판정이 내려졌다.
③ 앙리 베로드의 재판은 1944년 12월말 열렸다. 당시 59세의 그는 자신이 쓴 주간지 '그린구와르'에서의 사설 때문이었다. 그는 양차대전 사이에 등장한 가장 명망있는 작가 겸 언론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재판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베로드는 1940년부터 1943년까지 각종 글을 썼는데 그 가운데는 "영국은 허구의 동맹국"이며 "드골은 후대의 역사가 구토할 이름"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부분이 있었다. 그에게도 사형, 재산몰수, 수치국민판정이 있었으나 드골에 의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④ 언론인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재판은 브라질라쉬의 경우였다. 검사는 기소요지 낭독에서 그를 상당한 권위를 가진 수필가이며 문학비평가로 평가하였다. 나중에 페탕의 변론에 나선 이소로니 변호사가 그의 변론을 맡았다. 그는 작품활동과 독일여행, 그리고 독일 조직과의 접촉등을 통하여 독일에 봉사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사설을 통하여 프랑스 노동자의 독일 파견을 주장하였고 유태인과 프랑스의 동맹국을 비난하였으며 드골과 레지스탕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검사는 그가 1942년 독일이 프랑스의 자유지역을 침공하는 것을 연합국의 침략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찬양한 사실을 예거하면서 사형을 구형하였고 그대로 선고되었다. 모리악, 폴 발레리, 카뮈등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사형은 집행되었다.
⑤ 폴 착크는 해군 장교이면서 역사에 관한 대중적인 작가였다. 그는 대중집회의 연설과 1면 논설을 통하여 적에게 부역한 며의로 1944년 12월 18일 법정에 섰다. 그도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형을 집행당했다.
⑥ 쟌 뤼세르는 일간 '누보 땅'의 발행인으로서 언론인 부역자의 상징이었다. 언론부역자들의 이데올로기적인 가이드 역할을 했던 신문협회의 회장을 지내면서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의 친한 친구로서 점령하의 파리에서 가장 막강하고 유명 인사였다. 1946년 1월에 열린 그의 재판에서 검사는 '펜에 의한 반역 범죄'를 저질렀다고 결론내렸다. 그역시 사형,재산몰수,수치국민판정을 받았다.
이 외에도 베를린에서 독일방송을 위해 선전문의 작성을 담당했던 폴 페르도네, 독일 점령기간 동안 라디오 파리의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쟌 헤롤드-파퀴가 모두 사형대를 지나갔다. 1946년 11월에는 피에르-앙트완 쿠스토, 클로드 쟌테, 루시엔 레바테등이 파리 재판소에 기소되어 쿠스토와 레바테는 사형과 재산몰수, 쟌테는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이러한 외부적 처벌 외에도 각 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독자적인 숙청의 몸부림의 계속했다. 예컨대, '재향군인문인협회'는 자체내에 숙청위원회를 만들어 피엘 베누와, 앙리 마씨스, 프랑스와 피에트리, 죠로제 스카피니등을 제명하였다.
(라) 경제계
경제계의 숙청작업에 관한 근거는 1944년 10월 16일의 포고령에 있다. 이 포고령은 서문에서 "나라의 경제적 회복은 소유자,경영자,노동자등의 존재와 타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법정 재판절차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재계의 숙청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가 불가피하다. 부역자들은 다른 직업으로 전환되거나 업무집행을 정지하거나 해고될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부역의 범죄에 대한 형사처벌과는 상관없이 진행된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에 따라 각 지역은 법원 판사, 노동자 조직, 중간관리자등으로 구성된 숙청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 안에서도 철강, 화학, 운수, 금융등의 분과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처벌의 권고를 할 수 있었지만 직접적인 처벌의 권한은 없었다.
이어서 부역으로 인하여 얻은 경제적 이익을 몰수하는 방법이 강구되었다. 1944년 10월 18일 정부는 적과의 교역으로 인한 이익을 계산하는 지침을 내렸다. 이 지침은 서문에서 "나쁜 시민에 대한 형사처벌과는 별도로 가장 기본적인 재정적 정의는 재무부가 지난 4년동안의 전쟁과 점령으로 인해 벌어들인 돈을 몰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조치는 몰수할 두가지 이익을 정하고 있었는데 적과의 교역에 의한 이익과 가격지침의 위반이나 적의 법령을 이용한 투기 소득 두가지였다. 1945년 1월 유태인의 재산과 관련하여 얻은 이득도 몰수 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이 지침에 의해 취급된 사건은 무려 12,906건에 이르렀다.오트-사부와라는 읍에서 628건이 취급되었는데 1946년 3월까지 그 가운데 313건이 조사되어 총 7천만프랑의 몰수와 1천8백9십만프랑의 벌금이 부과되었다. 툴루즈 지역에서는 1945년 7월 현재 2,232건이 다루어져 348건이 조사 완료되어 총 5억2천7백만프랑의 몰수와 5억9천2백만프랑의 벌금이 과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경제계에서 150여명의 중요한 경영인들이 추방되었다. 숙청과 몰수의 선풍 외에도 경제인드에 대한 형사처벌의 선풍이 몰아쳤다. 이리하여 파리재판소에서만 1,110명의 경제계 부역자가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가장 극적인 사건은 이른바 '르노'사건이었다.
"거대기업의 숙청을 극적으로 만든 것은 로노사건이었다. (그 회사의 사주인) 루이 르노는 그러한 무대나 소설에 어울리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르노는 괴퍅한 노인이었다. 그는 언제나 일만 아는 사람이었다. - - - 1944년 8월 20일 그 공장의 문을 열기 위해 이 67세의 노인은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공산당 기관지 '류마니테'는 1939년 프랑스의 전쟁에 탱크와 비행기를 공급하지 않았으며 반대로 1년후 독일에는 공급했다고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 증대하는 공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공장으로 출근했다. - - - '숙청! 숙청!'하면서 '류마니테'는 아직도 그가 구속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그가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것은 1944년 9월 4일이었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르노회사는 결국 1945년 1월의 드골의 포고령에 의해 국유화되었다. 이 회사의 국가경제에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점령중의 독일에 대한 부역행위가 그 국유화의 배경이 되었다. 루이 르노 개인의 주식은 모두 국유화되고 다른 주식 보유자들은 보상을 받았다. 루이 르노는 마침내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기업의 대표가 구속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체로 재산몰수형에 처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자동차부품을 생산하여 전량 독일로 보낸 어느 기업의 회장이 기소되었다. 그는 전쟁물자의 제조를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생산량을 제한했으므로 자신의 잘못은 없다고 주장하였다.마침내 그는 무죄를 선고받았다.대기업과 기업 경영자에 대한 재판은 통상의 경우와 달리 부역행위로 어느 정도 이익을 얻을 수 있었는지 포괄적인 조사가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좀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에 비하여 정치적 부역행위는 그들의 반역의 증거에 서명하거나 그러한 증거문서를 작성하기 때문에 기소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산업과 상업적 부역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경리장부와 통신문서를 면밀히 조사하여야 하고 전문가를 통해 금융 및 계좌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파리법원이 1945년 초 레이몽 린돈을 책임자로 하는 재정부분의 부역자 수사를 맡도록 조치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4) 공민권박탈제도
한편 공민권박탈(indignite nationale)제도는 나치독일에 조금만 협력한 일이 있는 사람도 공민권 박탈을 선고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1944년 8월 26일자로 도입되어 12월 26일자 포고령에 의해 수정, 강화되었다. 이 제도에 의해 민족적 악을 제거하고 부역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데 유효한 기능을 하였다. '수치국민' 판정은 형사적 처벌이라는 근본적 처방 외에 민족반역행위를 한 부역자들을 정치적 또는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해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에 의해 고안되었다. 부역자의 행동은 반드시 기존 형법에 위반되는 구체적이고 특정한 행동을 띄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비록 그 행동이 형법에 위반되는 행동이 아니더라도 명백히 반애국적인 행동이거나 스스로 불명예스런 행동을 한 경우 그가 무시한 국민적 의무의 정도만큼 시민권이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제도는 정하고 있다.
법원에서 판결을 선고받은 자에게는 최저 5년부터 종신에 이르기까지 공민권박탈이 병과되기도 하고 선고유예자나 조사 후 석방된 자에게도 독립적으로 공민권박탈을 통하여 불이익을 가하였다. 이 판정을 할 수 있는 대상자는 비쉬정부의 종사자, 비쉬정권의 선전에 봉사한 자, 유태인 탄압기관에 종사한 자, 민병대와 같은 부역 단체의 구성원, 나치협력을 위해 집회나 시위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준 자, 나치에 유리한 글을 발표한 자등이었다. 실제로 이 제도는 대단히 사소한 행위에 조차도 가혹하게 적용되었다. 좀 극단적인 경우의 예를 들어 보면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의 부인에게 꽃을 보낸 사람, 장의사 직원으로서 암살된 부역자의 관 앞에 나치식 인사를 한 사람, 라발의 운전기사로서 일했던 사람들이 모두 이 판정을 받았다. 이 판정을 받은 피고인의 목록 속에는 세일즈맨, 조각가, 정부기구의 비서, 전기기술자, 농민, 도로수선공, 영화 디렉터, 간호원, 청소부, 경찰관, 정원사, 속기사, 보험 서기, 요리사, 의사등 거의 모든 직업이 망라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사회가 얼마나 사소한 부역행위까지 모조리 이 제도에 의해 제재를 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 판정을 받으면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정부와 국영기업체등의 공직 진출 자격 박탈, 군에서의 계급 박탈, 민간기업,은행,신문 및 방송등의 간부직에서의 제외, 노동조합과 변호사등 사법관련직업, 교육기관 및 언론관련 공공기관 진출 금지, 무기소지 금지조치를 받아 사실상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박탈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자신들의 직업을 잃고 새로운 직업을 아 나서거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새로이 시작하여야 했다.
이 제도에 따라 공민권박탈 판정을 받은 사람은 9만5천명에 이르렀다.비쉬정부의 각료등을 재판하기 위해 설치된 고등법원, 포고령에 의해 부역자 재판을 전담하는 재판소 및 시민법정에서 이러한 판정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시민법정은 공민권박탈판정을 위해 특별히 창설된 법원이었다.이 결정에 대해서는 꼭같이 항소할 권리를 가진다. 법원은 프랑스 영토에서의 거주 금지,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의 몰수, 퇴직연금 지급 정지등의 불이익한 조치를 추가할 수 있었다. 뿐만아니라 이렇나 재판소 외에 각 직업별로 구성된 숙청위원회에서 부역자가 원래의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제한하는 조치도 있었기 때문에 숙청자는 공민권 박탈과 함께 사실상 직업의 선택과 자유도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공민권박탈판정 제도는 합법성 여부에 관하여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변호사협회 회장 쟈크 샤펜티에는 고의의 증거없이 범죄를 처벌할 수 있게 된다는 우려를 표한 바 있었다. 더구나 사회적 접촉이나 독일군인들과의 단순한 사교관계는 그 자체가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닌한 불가벌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이러한 점은 이 제도를 고안한 측인 레지스탕스의 변호사들도 걱정한 바였다. 한편 알베르 카뮈는 "자신의 국가를 위해 무관심했던 사람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는 논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하다"며 이 제도를 변호하였다.
마.부역자 처리의 한계와 그 후의 부역자
(1) 정의를 피한 사람들
그러나 해방후 프랑스의 부역자 처리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공직자, 화이트 칼라 부역자들은 처벌의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이들은 잠적, 허위사망처리, 해외도피, 허구의 공적(레지스탕스지원) 조작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심도 식고 처벌의 강도도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러는 사이 이들은 원직에 복직하거나 사회로 복귀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몇몇 최악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이 재개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나 이것은 소수였다.
또하나의 미진했던 분야가 유태인 송출에 가담했던 사람들에 대한 불처벌이었다. 1987년의 여름, 온 세계의 관심을 끈 Klaus Barbie 재판이 열렸다. 그는 저항과 부역의 중심지 리용의 게쉬타포 책임자로서 유태인의 송출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재판은 독일이 프랑스 전역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 1943년 이후의 행적만을 다루었다. 그럼으로써 그 이전의 프랑스인들의 부역행위가 재판과 관심에서 제거되었던 것이다. 주요한 프랑스 부역자들의 비인도적 범죄 재판에서 비슷한 일들이 계속되었다. 많은 경찰 책임자, 공무원, 정치인들이 전혀 재판을 받지 않았거나 전후 명목적인 선고를 받는데 그쳤다. 유태인 학살에 관한 프랑스측의 책임에 대해서 결코 공식적인 차원에서 논의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특히 이러한 범죄의 은폐는 그 폭로와 공개가 가져올 수치와 피해때문에 비쉬정부의 후원자 노릇을 했던 집단과 조직에 의해 더욱 집요하게 이루어졌다. 오랜 요청을 거부해오던 카톨릭의 리용 대주교인 Albert Decourtray 추기경이 비쉬정부를 지지하였던 카톨릭의 부끄러운 과거를 담고 있는 비밀문서창고를 공개하였다. 이 결정은 리용의 민병대(Milice)장이었던 Paul Touvier의 체포 직후에 이루어졌다. 거의 40년동안이나 Touvier는 궐석재판을 통하여 유태인 살해와 관련하여 두차레나 사형을 선고받았음에도 카톨릭 사제들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아왔다. 그의 체포와 재판은 곧바로 카톨릭에게는 수치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2) 처단과 숙청에 대한 공격
더구나 세월이 흐를수록 부역자처벌에 관한 비난이 거세어지고 부역자들에게 호의적인 세력들이 조직적으로 이미 낙인찍힌 부역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 시작하였다. 예컨대, 신부이며 하원의원이었던 Desranges는 팜플렛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테러'(부역자 처벌과 숙청을 의미함)의 희생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Desranges는 숙청에 대해 원칙의 부족, 불형평등을 이유로 비난하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프랑스의 엘리트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또한 1946년 'Associaion des Representants du Peuple de la IIIe Republique'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는데 1948년에는 약 1천명이 운집한 연회를 열 정도로 세를 과시하였다. 이 모임의 대변인은 부역자들에 대한 사면과 '영국과의 비밀협정을 체결한 비쉬각료'들에 대한 찬양의 언사를 바쳤다.1947년 '공무원의 복직과 보호를 위한 연맹'이 창설되어 숙청된 공무원들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이 조직은 숙청을 결정한 법원의 결정이 인권의 침해라고 비난하는 진정서를 유엔에 제출하였다.이 진정서에서 프랑스 정부가 자유언론을 기소하고 정치적 잘못을 처벌하며 사상과 집회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탄압기구를 만들었고 소급입법을 용인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한편 레지스탕스에 대한 공격도 거세어졌다. Guingouin 사건은 그 한 예이다. Georges Guingouin은 비밀공산당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는데 1954년 체포되었다. 그는 1944년 리모쥬에서 군사법정을 세워 무고한 40여명의 농민 살해를 선동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1959년 그 혐의는 벗겨졌지만 이 사건은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공산당을 공격하는 데 주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상황은 반전되어 종전의 부역자들은 '국가적 화해'의 이름으로 사면되고 반대로 과거의 레지스탕스 전사들은 기소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중에서 '레미사건'(Remy Affair)은 큰 논쟁을 야기하였다. Remy 대령은 드골에 충성하면서 1940년 이래 드골 휘하의 정보기구에 몸을 담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지도하다가 해방 후 1947년에는 드골의 정당인 RPF의 창설자의 한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1950년 어느 주간지에 실은 글이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이 글에서 " 1940년 6월의 프랑스는 드골과 함께 페탕을 필요로 하였다", "드골주의자들도 페탕과 함께 프랑스를 자주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페탕의 지지자들을 포용하여야 한다"는등의 주장을 하였다. 페탕을 옹호하는 이같은 발언은 그의 경력에 비추어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이미 반전되어가는 부역자 처단과 숙청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건이었다.
부역자 처리를 둘러싼 논쟁은 전후 프랑스의 사회를 끝없이 갈등과 혼돈의 늪으로 몰아 넣는 주제의 하나였다. 나치점령기의 유산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격렬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은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은 또한 주로 이미 처벌받은 부역자의 사면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역사학자들은 독일을 위하여 자신의 펜을 빌려준 작가들의 운명을 두고 지식인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에 대해 조심스러워 했다. 알베르 카뮈와 프랑스와 모리악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특히 유명하다.'콩바'지에 기고하던 카뮈는 '인간적 정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고 '르 피가로'지에서 모리악은 '일탈'한 작가들에 대한 용서를 주창하였다.
(3) 정치지형의 변화와 부역자의 복원
그러나 프랑스 국민들은 수년에 걸친 반역과 내전에서 복수심과 흥미를 상실하였다. 레지스탕스활동으로 당초 국민의 신임을 얻었던 공산당이나 사회당은 내부의 분열과 암투에 몰두하였고 1951년의 선거에서 파국을 맞았다. 의회는 다시 우익 출신 의원들에게 장악되었고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부역했거나 페탕을 지지하였던 사람들이었다. 비쉬시대에 오염되었던 극우 그룹에서 대통령과 수상이 선출되었다. 우익의 등장은 공직사회와 다른 직업에도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더구나 1945년 이전에 재판을 받은 사람은 그 이후보다 훨씬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그것은 대중의 분노가 보다 생생했을 때 재판받는 것이 불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법원 판결의 형량이 낮아지거나 선고된 형량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1945년 4월 이후에는 사면되는 사례도 늘었다. 툴루즈 지역의 재판소의 경우 405명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었는데 그가운데 단지 28명만이 실제 처형되었다. 반면에 무죄율도 33.72%로 늘었다.1947년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라발의 비서 쟈크 게라드는 공민권박탈의 집행유예의 관대한 형을 선고받았다. 이 상징적인 사건을 지켜본 많은 해외에 도피중이었던 비쉬 관리들이 망명생활을 청산할 용기를 주었다.
1946년초 이미 공산주의 언론인 Pierre Herve는 'La Liberation trahie'라는 책에서 페탕정부하에서 복무했던 정부관리, 경찰책임자, 실업가, 작가, 그리고 연예인들이 재빨리 중요 직위에 복귀했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부터 냉전의 강화와 프랑스 공산당이 반란을 시작할 것이라는 끝없는 신념은 반공 부역자들의 복귀를 촉진시켰다. 과거 비쉬정부하에서 형사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다시 등장하여 도시게릴라 그룹을 체포하는데 실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의 부역행위로 말미암아 공직에서 해임되거나 업무정지된 1만1천명의 공무원들이 이윽고 복직되었다.
(4) 부역자의 법률적 사면
그러나 사면을 위한 사회적 논의와 압력은 계속 강화되었다. 1946년 프랑스와 모리악은 일정한 카테고리의 부역범죄에 대한 사면법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처벌은 그 범죄에 상응하여야 하며 있을지도 모르는 드레퓌스같은 희생자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47년 8월 16일 사면법이 통과되었다. 이 법은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의 경미한 부역행위 및 공무원들에 대한 행정벌등에 대한 사면을 규정하였다. 이 경미한 사면에도 불구하고 감옥은 점점 붐벼가고 대포적인 사면의 요구는 증대되었다. 그러나 1948년 초 현재 여론조사는 아직도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이 부역자들을 용서하거나 망각하려 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과거를 흘려보내자는 설문에 대해 안된다고 응답한 것이 63%, 동의한 것이24%였다. 그러나 1년후에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거의 동등하게 나왔다.
그 이후에도 이러한 포괄적인 사면법의 필요성을 놓고 프랑스 사회는 거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1950년 10월에는 죠르제 비도, 에드몽 미셸레등이 제출한 법안에 대하여 의회에서 갑론을박하였다.사면의 당위성으로서 관대함, 숙청과정의 부정의에 대한 배상, 국가적 화해, 점령기간 동안에 범해진 범죄의 일정한 정치적 성격,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화해정책의 선례등을 꼽았다.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사면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이들은 신파시즘의 등장, 우익의 정치적 책략, 그리고 독일의 재무장과 부역자를 흡수하고자 하는 의도의 연관등을 공격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용서의 원칙은 승인하였으나 부역자들의 원상회복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소수가 되어 있던 좌익들은 1951년 1월 5일의 최초의 사면법 통과를 막지는 못했다. 327:263으로 통과된 이 법은 공민권박탈판정을 받았거나 1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사면하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이 법은 강제로 징용되었거나 21세 이하의 청소년이었거나 대부분의 형기를 채운 사람들에 대한 구제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도 중대한 범죄나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승리에 힘입은 우익은 더욱 용감하게 사면을 추진하였다. 1952년 7월 드디어 총체적 사면을 약속하는 제안이 나왔다. 우익 의원들은 '국가적 일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들은 "제4공화국은 이해와 인간성을 보여줄만큼 충분히 강력하다. 가중되는 위기속에서 모든 프랑스 국민의 단합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조국이 내일 위험에 처한다면 그 방위를 위하여 프랑스의 모든 자녀로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거의 1년동안의 논쟁과 수정 끝에 1953년 7월 두번째의 사면법도 통과되었다. 가장 심각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당시까지도 복역하고 있던 부역자들이 석방되었다.이 법에 의해서 이제 프랑스의 부역자에 대한 처단은 끝이 났다. 1954년과 1960년에도 아벨 보나르등과 같이 형벌을 피한 사람들을 재판하기 위하여 고등법원에서의 재판이 열렸지만 상징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1945년 감옥으로 보내진 4만여명이 그 후 얼마나 석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표가 있다.
시기 1945 1948. 12 1949.10 1950.4 1951.1 1952.10 1956 1958 1960
숫자 40,000 13,000 8,000 5,587 4,000 1,570 62 19 0
이리하여 해방의 날로부터 시작된 숙청의 역사는 10년이 지나지 않아 종말을 고했다. 우익에게는 정치적 승리를, 그러나 프랑스 국가로서는 과거를 기억할 기회의 상실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단 한명의 유죄판결과 실형선고도 없었던 우리나라의 친일부역자 처리에 비하면 여전히 부러운, 그리고 강경한 처벌이었다.
(5) 영원히 살아있는 비쉬,점령,부역의 이야기
더구나 이것은 법률적 영역에서의 사면에 불과하였다. 비쉬와 점령시대에 대한 회고와 기억들은 여전히 1950년대를 통털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1953년의 이른바 'Finaly사건'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사건이었다. 부모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은 열두살과 열세살의 유태인 어린이들이 그들을 돌보는 여인에 의해 납치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이들의 이야기는 감정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분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프랑스 유태인들의 운명과 카톨릭의 역할이 새삼스럽게 재조명되었다. 이 외에도 나치부역자 또는 점령중의 비인도적 범죄등이 계속 기소되었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Oradour-sur-Glane 사건
Oradour-sur-Glane 마을에서 이러안 642명의 주민을 학살한 혐의로 전 SS대원이었던 프랑스 병사 21명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이들 병사들은 알사스 지방 출신이었고 더구나 그 가운데 12명은 완전히 강제로 징용되었다. 이들은 당초 SS를 탈주하여 레지스탕스등에도 가담하였다가 해방을 맞아 기소되었으나 기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있던 중 1948년 9월 15일의 소급법에 의해 다시 기소된 것이었다. 당연히 희생된 주민들의 가족들은 엄벌을 요구하였고 그 병사들의 고향사람들은 병사들 자신이 강제징용된 희생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으나 강제징용자에 대한 사면법안이 제출되는 계기가 되었다.
Oberg-Knochen 재판
1954년에 시작된 이 재판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에서의 SS사령관 Karl Oberg와 그의 부관 Helmut Knochen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레지스탕스와 프랑스에서의 유태인 학살에 관한 최종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에 그 재판은 매우 상징적인 중요성을 띌 수밖에 없었다. Oberg의 변호인은 반유태인법의 시행에 관한 비쉬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1962년 8년만에 드골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Robert Hersant 사건
점차 전쟁 중의 기억이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가끔은 불분명한 과거를 지닌 사람들의 묵은 상처가 드러나곤 하였다. 1956년 4월경 하원의원 Jean Legendre가 Robert Hersant의 당선이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Hersant은 1941년 브레반느에 있는 '페탕청년센타'의 책임자가 되고 이어 Jeunnes Forces라는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부역신문에 몇차레 기고하였다. 그는 1945년 구속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1947년에는 10년동안 공민권이 정지되었다. 1952년 사면되었던 것인데 과거의 부역사실이 드러나 125:11의 결의로 그의 의석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1956년 그는 다시 선출되었으며 다시는 그의 과거에 대해 항의가 없었다.
Morrand 사건
1958년 '프랑스학술원'(Academie Francaise)에서 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작가 Paul Morand의 선출이 레지스탕스 출신들로부터 분노의 바람을 몰고 왔다. Monrand은 프랑스의 항복 이전부터 나치독일과 일정한 관계를 가져왔고 항복 이후에도 점령당국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그는 직업외교관으로서 비쉬정부하에서 루마니아, 스위스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악질적인 민병대의 기관지인 'Combats'등 부역지에 꼴레트, 피에르 막 올란등과 함께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해방 직후 그는 해직되었으나 1955년 다시 외교관으로 복직하였다.
Morrand이 진출하고자 한 프랑스학술원은 사실상 페탕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1944-1945 사이에 드골은 이 곳을 해산해 버리겠다는 위협을 한 사실도 있었다. 페탕의 '국가혁명'을 신봉하던 가장 유명한 네사람, 즉 페탕자신을 포함하여 샤를 마우라, 아벨 보나드, 아벨 헤르망은 축출되었다. 1958년 현재 40개의 의석 가운데 13개만이 1940년 이전에 임명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4년부터 1946년 사이에 주로 레지스탕스와 연결된 작가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페탕주의자 그룹이 여전히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3년 전임대사였던 안드레 프랑수와-퐁체가 페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는 취임연설은 드골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도 동시에 페탕을 '프랑스를 위한 방패'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학술원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비쉬정부의 Morrand의 선출은 또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모리악과 로멩 시그프리드등은 이러한 논쟁의 야기가 우려된다면서 그의 선출을 재고할 것을 학술원장에게 진정하였고 실제로 여론의 악화로 그의 선출은 저지되었다. 그러나 1959년 다시 그는 후보로 올랐으나 "이 작가가 아카데미 내에서 야기할지도 모르는 저항운동에 대한 적대감"때문에 그의 후보 자격을 드골이 부정함으로써 자진 철회하였다. 하지만 1968년 다시 도전한 그는 결국 뽑히고 말았다.
다르퀴에 사건
1978년 '렉스프레스'지의 기자가 1942년에서 1944년까지 비쉬정권의 유태인 책임자로 일했던 다르퀴에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 그해 10월 28부터 실리기 시작했다. 다르퀴에는 1947년 12월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페인으로 망명하여 프랑코 스페인의 친구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이 인터뷰를 통하여 여전히 인종주의 시각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다만 자신의 책임은 부인하면서 프랑스 경찰 책임자 르네 부스케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이 보도가 프랑스 국내의 '비쉬 신드롬'을 또한번 뒤흔들어 놓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많은 단체들이 다르퀴에의 송환을 요구하였고 마침내 법무장관이 조사를 지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1980년 8월 사망할 때까지 아무런 기소가 행해지지는 않았다.
쿠르트 리쉬카 사건
크루트 리쉬카는 SS 대령으로서 게쉬타포의 유태인문제를 책임지고 있다가 나중에는 크노첸의 책임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후 서독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으나 1975년 프랑스에서의 나치 전쟁범죄에 관한 불독협약이 체결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1978년 그가 기소되어 콜로뉴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수천명의 프랑스 유태인의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2월 10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악명이 높던 프랑스의 SS 책임자 오베르크의 보좌관 허버트 하겐과 반유태인 부서의 책임자 다넥커의 보좌관 에른스트 하인리히존이 각각 12년과 6년형을 선고받았다.
진 레구아이 사건
1979년 4월 12일 수사를 담당한 치안판사 마르틴 안자니가 조용히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던 69세의 이 사람을 기소한다고 발표하였을 때에도 프랑스인들은 그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진 레구아이라는 이 사람은 1942년부터 1943년 사이에 르네 부스케 휘하의 비쉬경찰의 독일점령지역 대표로 근무한던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스 영토에서의 유태인 추방에 책임을 지고 있었다. 1945년 내무성의 숙청위원회에서 그에게 공직추방을 명했지만 그것은 형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지 행정적인 문제였다. 더구나 이 결정도 1955년의 국무원에 의해 번복되어 그는 다시 기업가로서의 변신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어떤 유명한 향수회사의 미국지점장으로 10년이 넘게 근무하다가 화장품회사의 사장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던 그가 '추방된 유태인의 자손 협회'의 이름으로 나치부역자 헌터 세르게 플라스펠드 변호사에 의해 고발된 그는 1979년 기소되어 법정에 다시 서게 되었다. 실제 재판은 1989년 여름에서야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 2일 사망함으로써 그의 재판은 곧 끝이 나고 말았다.
클라우스 바르비 재판
1983년 2월 5일 프랑스 오랑제 공군기지에 70세의 노인이 기니아로부터 도착하는 DC-8기에서 내렸다. 그는 곧바로 몽트룩 교도소로 이송되어 비인도적 범죄로 기소되었음을 통고받았다. 범죄로부터 40년만의 기소였다. 그가 바로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리용의 비밀경찰 부대장으로 있었던 클라우스 바르비 대위였다. 이제 그가 학살한 사람들의 자식들의 손에 놓여 있었다.
1945년 이후 경찰의 수배를 받은 도망자 바르비는 1952년과 1954년 각각 전범으로 선고받았다. 그는 미국정보기관의 보호를 받기도 하였고 프랑스 정보기관조차 1963년 이후 그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바르비는 볼리비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압력을 받은 프랑스 정부는 1972년 이후 10여년동안 계속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여의치 않다가 볼리비아에서 좌파정권이 들어서면서 송환은 현실화되었다.
바르비는 1936년까지 경찰에서 근무하다가 전쟁의 발발과 함께 SS로 자리를 옮겼다. 벨기에와 네들란드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인정받아 이제 1942년 11월 프랑스로 차출되었다. 리용에 주둔한 SS특별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르비가 프랑스인들에게 큰 관심을 끈 이유는 바로 프랑스국민의 영웅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쟌 물랭의 학살에 그가 책임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무기를 선고받고 감옥에서 여생을 마쳤다.
모리스 파퐁 재판
파퐁은 1958년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고 지스카르 데스텡 대통령하에서 예산장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점령기간동안 보로도 주의 사무총장으로 근무하였지만 지방 레지스탕스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유로 드골의 집권 후에도 그는 현직에 그대로 머물렀으며 오히려 랑드 주지사로 승진까지 했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 과거 파일이 보다 세밀히 검토되면서 그의 과거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퐁의 이름이 독일의 요청에 의해 유태인을 추방하는 일에 등장하였다.추방명령의 문서에 그의 서명이 계속 발견됨으로써 그의 혐의는 의문의 여지없이 밝혀졌다. 당시 프랑시 국적을 취득하고 있던 유태인들을 사지에 몰아 넣은 행위는 물론 시효가 배제되는 비인도적 범죄에 해당되었다. 이리하여 1983년 그는 기소되었다. 1984년 3월 나치수용소에서 사망한 37명의 유족들에 의한 17건의 진정에 관한 조사를 받아 추가 혐의가 더해졌다.
폴 뚜비에르 재판
폴 뚜비에르는 1915년 전통적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카톨릭 청년협회'에 가담하였다. 징병에 의해 그는 1940년 노르웨이로 파병되었고 휴전과 더불어 다시 비쉬정권의 선전을 담당한 Legion Francaise des Combattants에 가담하였다.1943년 1월부터 민병대에 몸을 담아 처음에는 사보이 지역, 이어 론 지역의 민병대 정보 및 작전 책임자가 되었다. 이 시절 빅터 바쉬 부부의 살해사건에 개입되었다. 종전 후 그는 망명의 길 대신에 지하생활을 택했다.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많다.
아무튼 그는 1946년 리용법정과 1947년 샹베리 법정에서 각각 궐석재판을 통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1967년 공소시효가 만료하는 1967년까지 그는 체포될 수 있었다. 사형은 실효되었지만 뚜비에르는 남동 프랑스의 12개 주에서 거주하거나 재산 소유가 불가능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카톨릭의 조직적이고 집요한 지원을 받았다. 그는 여러 수도원에서 피난처를 구했고 1989년 체포될 때에도 근본주의 카톨릭의 한 수도원에서였다. 그를 도운 것은 제수이트, 도미니크, 베네딕트 교단등 수많은 수사들과 이름있는 신부들이었다.이들은 뚜비에르의 사면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기조차 하였다. 이러한 진정서에 따라 1970년 1월 국가보안법원의 검사는 레지스탕스로서 부역자 수사에 많이 관여한 바 있던 쟈크 델라뤼에게 뚜비에르에 관한 보고서를 내도록 부탁하였다. 델라뤼는 점령 중의 부역행위는 변명할 길이 없을 정도로 명확하며 1945년의 사형 선고는 일련의 범죄행위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라고 단정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퐁피두 대통령은 은밀히 그를 사면하였다. 그로써 거주금지, 재산소유와 같은 2차적 형벌을 제거하였고 그는 고향마을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러한 대통령의 조치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레지스탕스 단체는 거의 전국에 걸쳐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1972년 6월의 파리 시위에는 1천5백명이 참석하였다. 언론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렉스프레스'지는 1972년 한 해동안 약 2천건의 기사를 게재하였고 1976년까지 다룬 기사건수는 5천건을 넘어 섰다. 이미 두툼한 서류 뭉치에 독점 보도, 폭로, 새로운 문서등이 부가하면서 이 잡지는 압력을 계속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사면은 클라우스 바르비의 경우와도 모순되는 것이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퐁피두 대통령은 자신이 사면한 것은 2차적 형벌에 불과한 것이고 공민권의 정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면은 오히려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되어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세르게 클라스펠드 변호사는 뚜비에르를 상대로 비인도적 범죄 혐의로 1973년과 1974년에 걸쳐 몇차레의 고소를 제기하였다. 공소시효가 경과하였다는 하급심판결이 1976년 6월 30일 프랑스 대법원에 의해 번복되었다. 뿐만아니라 런던협약과 뉴른베르크 헌장에 참가한 프랑스로서는 그 협약과 헌장이 정하는 취지에 따라 공소시효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프랑스 외무성은 1979년 6월 그런 취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드디어 1989년 뚜비에르는 비인도적 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그러나 그의 재판은 그의 체포에 걸린 시간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소요하고 있다. 1심에서 사형, 항소심에서 무죄, 다시 대법원의 파기등 엎치락 뒤치락하며 아직도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다.
르네 부스케 재판
1930년 르네 부스케는 20세의 나이로 홍수 속에서 빠져 죽어가던 수십명의 사람을 구함으로써 전국전인 영웅이 되었다. 갑작스런 그의 유명세에 힘입어 이 미남의 야욕에 불타는 젊은이는 이미 31세에 지방장관이 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항복도 그의 관운과 승진을 막을 수 없었다. 1940년 부스케는 비쉬정부의 경찰책임자가 되었다. 1942년 4월 친구이자 비쉬정부의 수상인 라발에 의하여 경찰총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독일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큰 열성을 보였다. 유태인을 체포하는 데 보여준 그의 열정은 게쉬타포 책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 다음이라고 할 정도의 부역자로서의 이름을 얻었다. 1942년 7월 2일 부스케는 SS장교인 Karl Oberg를 만나 그 유명한 'Velodrome d'Hiver'체포 작전을 계획했다. 프랑스 경찰의 도움으로 자전거 경주장으로 몰아넣은 1만3천명의 유태인들이 프랑스 유태인들이 체포되어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2년 8월에는 보호해 줄 유태인 어린이의 나이를 내렸다. 부스케가 20개월간의 집무기간 동안 독일에 넘겨준 유태인의 숫자는 5만7천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49년 반역죄로 기소되어 경미한 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 재판에서는 'Velodrome d'Hiver'사건등의 진실이 드러나거나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 재판에서 5년의 공민권만을 선고받았다. 이 재판에는 레시스탕스에 대한 조그만한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같은 경미한 선고를 받았다. 다시 내무 공무원으로 잠시 복직하여 근무하다가 그는 은행가와 실업가로 성공적인 제2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1978년 언론이 그의 과거를 폭로한 이래 부스케는 은퇴하였다. 프랑스의 10년이라는 공소시효가 그를 지켜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9년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비인도적 범죄행위로 고발당하였고 마침내 1991년에는 비인도적 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법제도는 드디기 짝이 없어 새로운 재판의 시작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3년 6월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 침투한 사람으로부터 4발의 총탄을 맞고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암살은 프랑스사회가 '비쉬정부의 망령'을 추방해 버릴 마지막 기회를 앗아갔다. 파퐁이나 뚜비에르와 달리 부스케의 재판은 비쉬 관리와 독일 점령자 사이의 고차원의 부역관계를 드러내 줄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나치 헌팅 변호사 Serge Klarsfeld는 "부스케야 말로 비쉬의 진정한 대표이다. 따라서 비쉬의 진정한 재판은 이제 다시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고 애통해 했다.
5.페탕과 라발의 재판
가.페탕의 부역죄 재판
(1) 개관
비쉬정권의 종말이 닥아오면서 이제 그 정부를 이끌었던 페탕의 운명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페탕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해방된 프랑스에서의 자신의 재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미군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에 대표단을 보내어 페탕이 프랑스의 제일가는 레지스탕스 전사였으며, 연합국이 인정할만한 사람들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고 연합국에 군대와 경찰력을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는 정통성을 염두에 두고 설사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드골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단순히 미군에 의해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기우였다. 드골측은 페탕은 구금되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페탕과 그의 각료들을 재판에 회부하여야 한다는 결정은 이미 해방 1년전 알지에에서 내려져 있었다. 다만 재판회부의 방법에 대해서는 드골과 당시의 프랑소와 드 맨손 법무장관 사이에 심각한 이견이 있었다. 즉 드골은 페탕과 그의 각료 전부를 재판소에 함께 회부하는 것을 원했고, 맨손은 개별적으로 회부할 것을 고집하였다. 맨손의 견해는 그들 각료들이 각각 책임이 달랐고 1940년의 휴전협정은 중대한 잘못이긴 하였지만 범죄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결국 드골이 양보하고 말았지만 그들이 공직자가 질 수 있는 최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철회하지 않았다.
1944년 8월 24일 파리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는 날, 페탕은 사실상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 영토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그는 독일의Sigmaringen에 위치한 한 성에 유폐되었다. 페탕은 내전의 발생을 우려하면서 합법적인 권력을 드골에게 이양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내전을 발생하지 않았고 권력은 저절로 드골의 것이 되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브리농'을 비롯한 부역자들은 페탕을 이용하여 독일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 국민을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페탕은 이미 자신의 권한을 더 이상 행사하기를 포기하였고 더이상의 협력을 거부하였다. 물론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2) 구속과 재판의 마련
독일의 완전한 패퇴에 따라 그의 신병은 자신의 소원에 따라 스위스 당국의 손으로 넘어가 프랑스 당국의 인계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곳에서 1995년 4월 26일 페탕은 정식으로 국가안보 위협 모의죄로 구속된다는 영장을 제시받았다. 드골의 입장에서는 페탕에 대한 재판을 진행함으로써 받게 될 부담은 귀챦은 일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남은 여생을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기를 바랬고 실제로 스위스 정부에게 비밀스럽게 그러한 프랑스 정부의 의사를 전달한 바 조차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페탕의 신병은 자신의 강력한 요구로 프랑스 당국에 넘겨졌고 기차를 통하여 파리로 옮겨지는 동안 곳곳에서 "페탕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와 페탕이 탄 기찻간에 침을 뱉는 소동들이 있었다.
파리남쪽의 'Fort of Montrouge'에 수감된 페탕은 특별한 호의가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4월 30일부터 고등법원 수사책임자인 삐에르 '부샤르동'의 신문을 받았다. 영장에 기재된 국가안보위협모의죄와 이적죄를 모두 부인했다. 5월 8일 독일의 항복과 더불어 그의 신문은 본격화되었다. 1940년의 의회해산과 구 공화국의 해체에 관하여 자신 혼자만이 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비쉬정권의 유태인 정책에 관하여 자신은 언제나 유태인을 보호하려 하였으며 유태인 박해정책은 자신의 부재하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독일을 위한 노동자들의 징용을 라발의 책임이라고 했다. 영국군과 드골의 군대에 저항하도록 프랑스군에게 내린 명령을 정당화하려 하였으나 1941년 5월 15일 '신질서', 즉 독일군과의 협력을 시리아 주둔 덴츠 장군에게 내린 명령이나 1942년 11월 27일자 히틀러에 보낸 편지등은 기억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페탕의 요구에 따라 비쉬정부하의 Riom 법원에서 판사 및 파리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73세의 페이엥과 그가 지명한 34살의 젊은 변호사 쟈크 이소로니가 페탕의 변론을 맡았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금방 이견이 노출되었다. 페이엥은 페탕의 화려한 과거를 조명하면서 동시에 비쉬정권에서의 소극적 역할을 변론하려 하였다.동시에 그의 노환으로 인하여 판단력이 흐려졌음도 덧붙이려 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소로니는 자랑스럽게 페탕의 정책을 변론하자는 것이었다. 이소로니는 역시 부역행위로 기소된 파리의 언론인 로베르 브라질라쉬를 변론한 적이 있으나 그의 처형을 막지는 못하였다. 위대한 인물은 가끔 그들의 진정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국민들에 의해 오판받기도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페이엥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레지스탕스 출신의 변호사를 추가선임하여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이리하여 쟌 라메르가 선임되었다.
페탕은 페이엥의 동정적 호소에 의존하는 변론에 실망과 더불어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실수를 한 것은 자인할 용의가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자신에 남겨진 무기로 적과 싸웠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소로니가 보다 적극적인 방어를 해 주기를 바랬다. 이소로니는 페탕이 아직은 절대적 주권의 보유자이며 그를 위한 변론은 쟌 다르크 또는 루이 16세의 변론과 같이 의도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온 세계의 사람들의 눈에 의해서 그의 행동은 정당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페탕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한편 신문기간 동안 페탕의 정신상태는 오락가락 하였다. 최근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랜 일은 또렷이 기억하기도 하였다. 체중이 빠지고 신경이 날카로워 져 있다는 의사의 검진결과도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태로도 그 재판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3) 재판절차의 진행과 공방
페탕의 재판은 드골의 '해방정부'가 비쉬정부의 지도자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창설한 특별 고등법원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1944년 9월에만 해도 파리군사재판소가 페탕과 그의 각료들에 대한 기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일부 각료들의 신병이 군사재판소에 인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11월 특별고등법원을 창설하는 포고령이 발효되면서 그 계획은 변경되었다. 비쉬정권에 충성을 서약한 사법부의 최고위급 법관들과 검찰관이 이 특별 고등법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였다.이들은 심지어 제3공화국의 지도자들을 재판한 악명높은 1942년의 Riom재판에도 관여하였으며 모네 검사는 1917년의 그 유명한 마타하리를 기소한 사람이었다. 한편 이 재판을 위하여 24명의 배심원이 선출되었다. 종이난으로 일간신문들이 몇페이지짜리 신문을 만들고 있는 그당시 이 재판은 언제나 톱기사로 실렸다. 내외신기자를 막론하고 5백여명의 기자들이 이 재판의 방청권을 얻었다.
1945년 7월 23일 항소심법원의 중앙법정에서 재판장 Paul Mongibeaux의 선언으로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 재판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판의 하나라고 말문을 열었다. 곧이어 페이엥변호사의 관할 이의가 있었다. 제3공화국의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단지 상원만이 재판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재판부는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페탕이 합법적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 없다고 반박하였다. 재판부는 한시간의 휴정 끝에 1944년 11월 고등법원은 1940년 6월 이후 프랑스를 통치한 정부 또는 유사정부의 국가원수를 재판하도록 적법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변호사의 이의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배심원들이 공정하게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 있었으나 역시 기각당하였다.
법원 서기가 기소장을 낭독하였다. 그 요지는 그의 이름을 전쟁 전에 반 공화국 세력에 빌려주었다는 사실, 정부형태를 바꿀거나 파괴할 목적으로 공직에 취임한 사실(프랑스 형법 제87조), 공모자들과 나아가 나치와 협력하여 마침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공모를 수행했다는 사실, 프랑스에 적대적인 국가를 지원할 목적으로 적국 또는 그 요원과 접촉하거나 정보를 제공한 사실( 프랑스 형법 제75조)등이었다. 페탕은 꼿꼿이 앉아 자신을 변론하는 모두진술을 하였다.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로서 소집된 대표들을 통하여 나에게 권력을 준 것은 프랑스 국민이었다. 내가 진실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해서이다.- - -나는 전 생애를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으며 권력을 합법적으로 승계했다.미래를 향한 기초를 놓으면서 4년동안 프랑스를 지켰다.- - -프랑스는 가장 비극적인 시기에 나에게 의지하여 왔다. 나는 결코 그것을 추구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 자리로 오도록 간청당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로 왔다. 그리하여 내가 책임자가 아닌 재난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 - -당신들은 그러한 조건하에서 통치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매일 목구멍에 비수가 겨누인 상태에서 적의 요구와 씨름해야 했다. 역사는 모두에게 내가 여러분을 구했음을 말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한 죄로 구속되거나 선고를 받아서는 안된다. - - -그리고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다."
페탕은 그 법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술의 상대를 아예 국민에게로 향하였다. 이소로니 변호사는 여러가지 일련의 이의를 제기하였다. 페탕의 케이스는 그가 독일의 포로로 있을 때 시작되었다는 점, 중요한 증인들이 조사되기 전에 재판이 시작된 점, 방어에 필수적인 서류들이 공개되지 않은 점, 특정한 자료와 신문내용이 변호인들에게 제공되지 않는 점, 일부 증거가 사라진 점, 검사와 재판관들이 사전에 유죄라는 심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언급을 했던 점등에 관한 이의였다. 그러나 정작 페탕은 모두 진술 외에는 일체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진술을 거부하였고 스스로도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이 재판의 대상은 비쉬정권의 전체상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구체적 사실 하나 하나를 심리하거나 입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쉬 또는 페탕의 방에서 압수된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신문할 길이 없었다. 충분한 심리에는 수년이 소요될 일이었다. 이에 따라 신문 스크랩이나 예비심리의 내용에 의존하였다. 전쟁전과 전쟁중의 주요인사들이 거의 대부분 법정에 섰다. 레이노, 달라디에, 레온 브룸,헤리오, 웨이간장군과 같은 제3공화국의 주요인사들, 또다른 비쉬정권의 지도자들이 증인으로 나섰다. 이들은 각자 자신을 변호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재판이 끝날 즈음에는 전직 수상들, 의회 지도자들, 부르봉 황태자, 노조지도자등을 포함하여 총 63명의 증인을 신문하였다. 이 가운데 페탕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라발도 증인으로 뒤늦게 끌려나왔다. 페이엥 변호사는 라발의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페탕에게 유리한 신문을 하려 하였으나 페탕은 라발도 자신의 각료였으며 또한 그의 프랑스에 대한 사랑을 의심해 본적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8월 1일에는 Leahy제독으로부터의 회신이 변호인측에 의해 법정에 제출되었다. 페탕과 친밀하게 교감을 나누었던 Leahy는 이 회신에서 페탕의 주된 관심은 언제나 프랑스의 국민들의 복지와 보호였으며 추축국 국가들의 요구에 대한 거절로 일관하였다고 진술하였다.
8월 11일에는 검사의 구형이 있었다. 모네 검사는 페탕의 동기는 순전히 권력을 위한 허영, 권위주의적 본능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방송연설, 공적 성명, 히틀러에 대한 축하 전문 또는 영국왕에 대한 항의서한등이 모두 반역의 증거가 되었다. 독일에 대한 우호가 쇼였으며 연합국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를 되물은 모네는 페탕이 준 도움이란 것이 도대체 드물었고 설사 있었더라도 효과가 없었다면서 그 '이중의 게임'은 허구라고 자답하였다. 페탕의 주된 욕망은 나치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같은 모델을 따라 프랑스의 권위주의적 국가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공박하였다. 그는 이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을 이용하였고, 그것도 독일군이었기 때문에 바로 반역이었다고 결론내리면서 사형을 구형하였다.
페이엥 변호사는 그의 변론을 동정에 호소함으로써 시작하였다. "죽음이 지켜보는 90이 넘은 이 늙은 노인을 끌어내 사형을 선고하려 하고 있다"면서 말문을 꺼낸 이 변호사는 '늙은 영웅'의 묘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변호사는 페탕이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었던 시간은 매일 오전 몇시간 뿐이었고 따라서 비쉬관리들이 오후나 저녁에 결재를 받기 위해 안달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페탕 자신과 많은 방청객이 관심을 갖고 기다린 것은 이소로니 변호사의 변론이었다. 이소로니의 변론은 페탕이 도덕적 양보를 감수하고라도 프랑스를 위한 물질적 이익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는 것에 집중되었다.적은 모든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양보는 불가피하였다는 것을 그는 자인하였다. 그러나 페탕 스스로 많은 모욕을 참으면서도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았으며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군사적 점령하에 있었던 어떤 나라보다도 덜 고생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소로니는 마지막으로 평화와 안정이 전 세계에 내리고 전쟁의 소란이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프랑스의 성스러운 땅을 더 이상 상채기 내지 말라고 주문하였다.
(4) 재판의 종료와 집행, 그리고 사망
드디어 배심원들의 장장 7시간에 걸친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14:13으로 사형의 결론을 내렸고 이어서 재판장 Mongibeaux가 판결을 선고하였다. 1944년 8월 15일의 일이었다. 재판장은 페탕이 그의 집권을 가져온 정치적 위기를 조장하였으며 프랑스 정부가 북아프피카에서의 전쟁의 계속을 방해하였고 추축국을 닮은 정권을 세우기 위해 자유로운 헌법기관을 제거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나아가 페탕이 비쉬의 끊임없는 항복을 주재하였고 프랑스의 동맹국과 '자유프랑스'에 독일이 싸우는 것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의 연합국의 상륙에 대한 무장 저항을 명령하였음을 인정하였다. 페탕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그 직후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 사형의 집행은 정지되도록 재판부가 권고하였다.그 다음날 '루마니테'는 사형선고가 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사회당의 'Le Populaire'지도 "프랑스가 베드덩의 영광을 몽뚜와르의 수치로 전화시켰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 없다. 반역은 바로 그에 의해서 그와 함께 가능하였다"고 언명하였다.
8월 17일 드골은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였다. 선고직후 곧바로 페탕은 빠리를 떠나 피레네산맥에 가까운 Fort du Pertalet로 이송되었다. 다시 3개월 후 그는 브레따뉴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Ile d'Yeu라는 자그마한 섬으로 옮겨졌다. 3층의 독립가옥에서 자신과 감옥 관리들이 거주하게 되어 훨씬 조건이 좋아졌다. 이 섬에서도 페탕은 자신의 사건에 대한 재심을 요구하도록 변호인측에 요청하였다. 고등법원은 그 결정의 항소를 전혀 허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프랑스 형법은 재심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새로운 증거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증거를 는데는 몇년이 걸릴 일이었다. 그후 Isorni변호사가 재심을 신청했을 때 법무부는 그 사건에 대한 어떠한 재심도, 역사에 의한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기각하였다.
사회당의 빙셍 오리올이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을 때 페탕의 변호사들이 방문하여 선처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냉정하게 거부하면서 일반 여론이 페탕의 호의적인 대우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았다.이미 야당이 되어 있던 드골은 페탕이 항복을 상징하기 때문에 기소되어야 했지만 이제 노인으로서 나무나 잔디를 보지 못한 채 죽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된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소로니변호사는 교황 파이우스 12세에게도 탄원하였지만 전쟁 중 침묵으로 말미암아 공격을 받고 있던 교항청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얻기는 어려웠다. 1950년 5월 다시 변호인들은 정부문서보관소, 회고록, 증언등에 기초하여 공식적인 고등법원의 재심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페탕의 육체적인 조건이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건강의 악화로 그 섬의 조건이 보다 좋은 저택으로 옮겨져 의료진이 보강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1951년 7월 23일 마침내 프랑스의 영욕을 함께한 페탕은 9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육지와의 전화가 차단되고 경찰이 그 저택앞에 포진한 채로 베르덩의 재향군인들조차 참배가 불허되었다. 그러나 그 이틀후 열린 장례식에서 웨이간장군과 페르네제독, 그리고 비쉬정부의 각료들이 참석하였고, 베르덩의 장교와 2차대전의 포로들이 관을 운구하였다. 이 섬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 루손의 주교 루이 카조는 사자가 논쟁속의 인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당시는 휴전을 해야할 자리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 휴전이 쉽지 않았음은 그후의 역사, 프랑스 국민 내부에 파인 분열의 상처가 보여주었다.지금도 이 섬을 방문하는 사람은 그 한가운데 있는 묘지에는 흰 대리석 가운데 십자가와 '필립 페탕 프랑스의 원수(元帥)'라고 쓴 묘비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 페탕재판과 국민여론, 그리고 그 긴 그림자
1944년 10월 프랑스여론조사소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32%만이 페탕의 처벌을 지지하였고, 58%는 반대, 10%는 모르겠다고 응답하고 있었다. 또한 이 가운데 22%는 페탕의 정신적 무능을 이유로 용서받아야 한다, 18%는 그의 나이를 고려하여야 한다, 5%는 1940년과 점령기간중의 그의 헌신을 고려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대체로 페탕에게 호의적인 반응이었다.1945년 5월 페탕이 체포된 후 드골에게로 쏟아진 편지들은 페탕을 지지하는 것 보다는 반대한 것이 더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드골은 실토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여러 신문들은 서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공산당 기관지였던 '류마니테'(L'Humanite)는 " 이 늙은 반역자를 총살함으로써 프랑스에 정의가 아든다"고 주장하였다. 'Le Figaro'에서 프랑스와 모리악은 보다 온화한 논조를 폈다.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 목소리를 보태려면 우리는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그 뮌헨(회담)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뭐라고 썼던가 휴전에 대하여 무엇을 느꼈던가 우리는 이 불쌍한 노인에 얼마간은 우리 모두가 공범자의 한 사람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레지스탕스 계열의 'Combat'은 아마도 알베르 까뮈에 의해 씌어진 사설에서 가장 심한 독설을 퍼부었다."페탕이 뭔가 재능이 있었다면 그것은 창녀와 같은 것이었다. 다시는 프랑스 사람들이 나이와 허황함의 트릭에 의해 유약해 지지 않도록 하자".
재판의 진행과 더불어 페탕의 유죄를 확신하는 프랑스인들이 늘어나 75%를 상회하고 있었다.기소를 철회해야 한다는 견해는 1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페탕이 과연 의도적으로 독일에 부역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주장대로 오직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차선책으로 비쉬정권의 수립과 독일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이후에도 끊임없는 논쟁이 일었다. 특히 재판이 끝난 뒤 1948년 이후 그를 변론하는 내용의 책들이 간행되었다. 1948년 변호인이었던 Isorni와 Jean Lemaire의 책이 간행되었다. 물론 재심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함께 페탕의 석방을 희망하는 프랑스 사람들의 비율도 높아졌다. 1948년 5월의 한 여론조사는 그 전해의 석방지지율이 13%였던 것이 37%로 상승
하였음을 보여주었다. 페탕이 사망한 1951년에는 페탕주의에 대한 지지가 훨씬 높아졌다. 페탕의 변호사였던 Isorni등에 의해 창당된 느슨한 정치적 조직인 Union des Independants Republiques(UNIR)은 1951년 6월에 실시된 의회선거에서 무려 28만8천여표를 얻었던 것이다.
페탕의 사후에도 그는 끝없는 논쟁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의 사후 페탕주의의 부활이 시도되었다. 1951년 11월 6일 '페탕원수를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조직'(ADMP)이 결성되어 오늘날까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조직은 과거 비쉬정권하에서 일했거나 지지했던 모든 프랑스 시민을 포괄하려는 켐페인을 벌였다.그러나 1950년대의 유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의 회원은 가족회원을 포함하여 7천여명에 불과하였고 1983년에도 2만명 정도를 헤아리고 있었다.이 조직의 의미는 그 숫자에 있다기 보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페탕의 시신을 베르덩의 순국용사들이 묻힌 Douaumont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되었다. 1954년에는 거의 7만명의 서명과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재향군인회 조직들과 함께 시신 이전을 요구하는 진정서가 '국민적 화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 제출되었으나 긍정적인 답을 얻지 못했다. 드골은 "국가적 통일의 기념물이 논쟁에 의해서 괴롭혀 져서는 안되며 우리들의 군인묘지의 오랜 전통은 단지 우리의 영토에서 죽은 전사들을 위한 것"라고 단언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일축하였다. 페탕주의자들은 그 이후에도 끝없이 이전을, 레지스탕스들은 그 제안에 반대하곤 하였다. 1973년 극우적인 그룹이 페탕의 시신을 파 베르덩으로 옮기는 도중에 경찰에 잡혀 구속된 사례도 있다. 이와같은 집요한 노력은 페탕을 1940년의 기억으로부터 1919년의 기억으로 옮기는 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페탕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좌우간의 폭력이 분출되곤 하였다 . 그의 시신과 그의 이름과 그의 일생은 이미 공화파와 극우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페탕에 대한 오랜 재판의 끝에 내려진 선고가 영원한 역사속에 그대로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으라는 보장은 없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페탕은 프랑스 현대사의 명암과 영욕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나.라발의 부역죄 재판
(1) 개관
라발은 어려서부터 파리에서 생존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1909년 변호사가 되어 처음부터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길로 나섰다. 그는 사회당에 입당하였고 노동조합을 위한 변호사가 되었다. 여기서 명성을 쌓은 그는 세느 사회주의자연합에 의해 지명을 받아 1914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0년 사회당이 분열되어 공산당이 분당되어 나가자 그는 아무 당에도 소속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변호사업에 몰두한 그는 결국 다시 1925년 하원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고 각료직까지 역임하게 된다. 1930년에는 노동장관이 되어 처음으로 사회보험을 도입하기도 하였던 그는 그 다음해 드디어 프랑스의 수상이 되었다. 몇차레 자신이 내각을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히 각료로 일하면서 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정객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라발은 히틀러나 스탈린 만큼이나 비천한 출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승리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해 좋다"고 생각한 그가 독일과의 협력적 관계로 나아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영국을 싫어하였고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더욱 좋아하였다. 로비과정에서 그가 성공적으로 보여준 재능과 수완등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의회주의적 방법에 대한 그의 조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자기 나라 사람들과 절충하고 타협하고 자리다툼을 벌이는 것이 마침내 지겨워진 것이었다.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가 독소불가침조약의 체결을 가져왔듯이 라발은 자신이 독일과 프랑스를 우호적 관계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히틀러와 뭇쏠리니, 그리고 스탈린의 '독재자 연맹'에 프랑스도 가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라발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고 타협주의자였다.
물론 라발로서는 자신이 독일을 위해 부역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실제로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페탕과는 달리 라발은 스스로 자발적인 부역을 하였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라발은 자신이 비쉬정권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이미 엄혹한 휴전의 조건이 정해진 상태였고 자신은 그 조건 안에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였다. 실제로 비쉬내각에서의 그의 위치에 비추어볼 때 독일 당국과 접촉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가 '독일편' '부역의 사도'로서 비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페탕에 대해서는 많은 프랑스 국민이 '베르덩'의 영웅으로서의 존경심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가 없었지만 라발은 일방적으로 부역자의 더러운 오명을 한몸에 짊어지고 프랑스 국민들의 야유와 저주속에 죽어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가 패배한 나라의, 전승국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의 수상이 되어 전쟁수행을 위한 온갖 요구를 담당하였을 때 이미 그의 길은 부역자의 운명일 수밖에 달리 있었을까.
(2)라발의 부역행위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과 프랑스의 결정적인 패퇴에 따라 페탕이 수상으로 취임하였을 때에도 라발은 각료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휴전조약이 체결된 직후에서야 페탕은 라발이 국무장관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를 수락하였고 경험과 능력을 발휘하여 비쉬정부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라발은 실제 '킹 메이커' 이상이었다. 1940년 7월 10일 그는 능숙하게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를 요리함으로써 페탕을 국가주석으로, 그리고 자신은 부주석 및 행정부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페탕을 수상의 직위로부터 밀쳐낸 셈이었다. 라발은 제3공화국하에서도 수상이었지만 의회와 언론의 반대와 비판없이 권력을 행사해 본 적은 없었다. 페탕에게 국가주석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하면서 자신은 실질적 권력을 누리면서 독일과의 부역의 길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라발은 아베츠를 포함하여 독일측 대표들과 가장 긴밀히 접촉하고 협상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파리에 주재한 이들과의 접촉과 협상내용은 제대로 페탕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라발은 독일 요구의 창구였던 셈이다. 이러한 요구는 대체로 모두 수용되었다. 라발은 자신이 없었더라면 사태는 훨씬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당초 내려진 무거운 점령조건은 그대로 개선되지 못하였고 새로운 양보가 줄을 이었다. 프랑스인의 소유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동광 광산을 독일에게 팔도록 강제하는가 하면 전쟁 막바지에 벨기에 정부가 프랑스정부에게 안전하게 보관해 줄 것을 위탁한 다량의 금괴를 북아프리카로부터 파리로 옮기게 하여 나치독일이 압수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양보와 우호적인 조치로 프랑스가 최종의 평화협정에서 안전하게 남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히틀러와 독일은 언제나 애매한 약속만을 할 뿐이었다.
페탕에게도 라발은 불만스런 존재였다. 이 노원수(老元帥)를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남겨놓고 라발이 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중시켰다. 더구나 직업군인 페탕과 직업 의회주의자 라발 사이에는 개인적 차이와 반목도 심각하였다. 비쉬정권의 다른 각료들 가운데 라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비엔나에 잠들고 있던 나폴레옹의 아들 시신을 파리의 아버지의 무덤으로 옮기는 행사에 모든 각료들을 제외하고 페탕만을 초청한 사실을 두고 라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해임을 위한 공모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각료들의 건의에 설득당한 페탕에 의해 1940년 12월 13일 라발은 갑자기 해임된다. 이것은 라발이 지나치게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추진하였고 페탕이 이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런 결과로 이해되어 왔다. 그 이전인 10월 24일의 Montoire에서의 히틀러와의 회담은 라발의 부역혐의를 강화시킨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던 나치는 1942년 4월 17일 다시 라발을 부수상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다. 라발은 보다 확신을 가진 각료들을 심었다. 러시아 전선에서의 곤경은 나치로 하여금 보다 많은 무기공장 노동자들을 요구하였다.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노동자의 강제징용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3명의 숙련노동자에 대하여 1명씩의 프랑스군 포로 귀환이라는 교환조건이 제시되어 24만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독일로 향했다.
(3)전후 라발의 부역 재판
라발은 독일의 Sigmaringen에서 스위스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대신 스페인에 3개월간 체류할 허가를 받았다. 나치의 도움으로 연합군의 체포를 면하고 독일 비행기로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프랑코의 환대를 기대하였으나 스페인은 1994년 7월, 그를 독일로 축출하였고 거기서 미군에게 체포되어 다시 프랑스군에게 인계되었다. 라발이 도망자 신세로 있을 때 프랑스 사법당국은 그를 궐석으로 재판할 계획도 세웠으나 그의 체포로 또하나의 국가적 이벤트가 가능하게 되었다.
페탕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타 증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재판은 1994년 10월 초순이 되어 시작하였다. 예비심문 과정에서 그 심문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다는 항의서한에서 라발은 "다른 사람이 용감하게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나는 4년동안 불행했던 조국의 생존을 위해 공헌했다" "진실이 모두 공개되면 나의 애국심과 용기는 결코 의심할 바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재판장과 검사는 페탕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Mongibeaux와 Mornet였다. 36명의 배심원이 선출되었는데 18명이 레지스탕스 출신이었고 나머지 18명은 의회 의원들이었다.
Naud와 Baraduc 두사람이 변호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변호사이자 경험많은 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판사, 배심원, 검사등을 자극하면서 자신을 능숙하게 방어하였다. 이러한 능숙한 자기 방어는 오히려 재판관계자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래도 권위와 엄숙함을 지켰던 페탕 재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재판관계자와 배심원, 방청객 모두가 가장 악질적 부역자로 라발을 낙인찍고 있었다. 따라서 라발의 재판은 페탕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보복적인 악의에 기초해 있었다. 모네 검사는 라발의 범죄는 1940년 이래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반발하여 라발은 '사법적 범죄의 희생자'를 만들 것이라는 이유로 출정을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대로 재판은 진행되어 10월 9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드골은 재심 신청을 거절하였고 사형을 그대로 추인하였다.
교도소 관리가 그를 총살시키기 위하여 데리러 왔을 때 코트 안에 숨기고 있던 시아나이드를 삼켜 병원으로 실려가는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총탄'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위 세척을 받은 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사형집행절차가 강행되었다. 이윽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닥아와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6.결 론
이미 본 것처럼 프랑스의 부역자 처리가 완벽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 과정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진행되어 무고한 희생자를 내기도 하였고 철저하지 못한 채로 끝나 버리거나 때로는 이들의 복귀가 쉽게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뿐만아니라 부역자 처리는 결국 프랑스 국내의 내부적 분열과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부역자의 손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죽음과 고통을 당하였고 가해자로서의 부역자를 처단하는 일은 바로 보복적인 양상을 띄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7월 7일 폴 레이노, 레온 블럼, 에두아르 달라디에를 포함하여 수천명의 참배객과 정부의 대표 알렉산드르 바렌느가 참석한 자리에서 퐁텐블르 숲속에는 민병대에 의해 살해당한 죠르제 만델에 바치는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그 돌의 표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여기 1944년 7년 7일 프랑스의 적에 의해 살해된 죠르제 만델이 잠들다'. 그러나 적은 이름이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기서 적이란 두말할 나위없이 비쉬정권하의 극우폭력조직이었던 민병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로 프랑스인들 자신이었다. 내부의 적에 의해 살해당한 애국자를 기리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이 될 수 없었다.부역자 문제를 둘러싼 논쟁과 갈등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고통스럽고도 수치스러운 과거를 끝없이 들춰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의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과 숙청의 노력은 끈질긴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고 일부 극우세력의 요란한 켐페인에도 불구하고 페탕은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87년의 바르비 재판, 1989년의 Touvier 체포, 1993년의 Rene Bousquet의 재판등은 유태인의 학살등 부역행위와 비인도적 범죄에 관한 한 시효없이 이들을 재판하고자 하는 프랑스 국민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뿐만아니라 그 이후 프랑스의 우경화 현상이 초래되고 사면이 이루어 졌지만 그것은 국민적 화해의 대의명분 아래 이루어졌던 것으로서 부역자처단의 원칙 자체가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부역자들에 대한 처단의 필연성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비판의식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해방 초기에 부역자에 대한 처단과 청산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흐름과 작업을 뒤바꾸어 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프랑스 비쉬정권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를 되돌아보는 것은 바로 남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부역문제의 상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그 시대에 대한 진실의 탐구, 반성과 사죄, 가해자 처단, 공직추방의 목소리가 해방을 맞는 날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미약했다는 점에 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우리는 오늘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함께 지니고 프랑스의 최근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더 이상 그러한 감정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노력이 오늘 이땅에서 시도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1944년 독일점령으로부터의 해방 직후 프랑스의 '작가 및 극작가 협회'가 그 회원들에게 답변을 요구한 다음과 같은 질문서의 일부를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봄으로써 민족의 수난기에 지식인이 해야 할 바를, 그리고 마땅히 그 할 바를 다하지 못한 지식인들에게 준엄하게 물어야 할 때이다.
"당신이 실제로 적의 선전에 봉사하지 않고 또한 당신의 글이나 연설, 행동이나 제스추어를 통하여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수치스런 패배 뒤에 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고약한 점령기간 중에, 협력을 가장하여 우리나라를 타락시키고 우리 국민들을 굶기고 우리의 생각과 문화, 자유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동족을 고문하고 인질을 총살하고 우리의 천재들과 문명의 지독한 적에 대항하여,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당신은 우리 국민들이 준 신뢰에 기초한 프랑스의 지성으로서 당신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거나, 진실로 가슴속 깊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애국적 위엄에 부합하는 언동을 하였다고 느끼는가"
[출처] [펌] 프랑스의 부역자 처벌 |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