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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

J. 몰트만, 희망의 신학

by 이덕휴-dhleepaul 2017. 10. 2.

J. 몰트만, 희망의 신학

-기독교 종말론의 기초와 결과에 대한 연구-

 

차례

I. 머리말 - 몰트만 신학의 위치와 개관

II. 희망에 관한 명상 - 희망의 신학 방법론

III. 종말론과 계시 - 종말론의 재발견

IV.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미래 -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V. 새 출발의 교회 - 희망의 공동체

참고문헌



I. 머리말 - 몰트만 신학의 위치와 개관


J. 몰트만1)의 <희망의 신학>의 배경은 폰 라트(G. von Rad)의 구약신학과 베버(O. Weber)의 개혁교회신학, 이반트(H.J. Iwand)의 헤겔철학이다. 블로흐(E. Bloch)의 희망의 철학과는 무관하다.2) 그의 신학은 종말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독론으로 발전했으며, 교회론을 거쳐 신론에 이르며, 해방신학과 환경문제를 다루었다. 기독교 종말론의 배경은 구약성서로부터 유래하는 묵시문학이다. 종말은 예수 안에서 이미(schön) 시작되었으나. 아직 (noch nicht)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희망의 신학의 주제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는 것 곧 희망(Hoffnung)을 뜻한다. 그래서 희망은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동반자이다. 그는 안셀무스의 명제를 종말론적 사고에 따라 변형시켜 spes quarens intellectum-spero ut intelligam (이해를 추구하는 희망 - 이해하기 위해 나는 희망한다.)라고 말한다.3)

     본서가 출판된지 2년만에 6판이 거듭되는 사실에 대해 몰트만 자신도 아직 시도에 불과한데 이처럼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1967년 몰트만은 말하기를 “희망의 신학은 구약신학의 인식, 종말론의 제목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철학적 진술들, 오늘날 세상에 있어서 기독교의 새로운 역사적 과정들의 신학적 정리의 시도였다”고 했다. 독일학계에서 본서에 대한 수많은 찬반 비판들을 간추려서 마르쉬(Wolf-Dieter Marsch)는 <희망의 신학논쟁> (Diskussion über die Theologie der Hoffnung von J. Moltmann, 1968)을 발표했다.4)

     본서의 신학사적 위치는 대체로 말해서 세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신학을 성격지었던 실존신학, 초기의 바르트의 신학을 포함하는 말씀의 신학, 특히 불트만의 케류그마 신학과 그의 새로운 해석학파로부터의 떠남이었고, 신학적 관심의 초점을 개인의 실존과 역사의 해석으로부터 역사의 미래와 역사의 변혁으로 옮기는 새로운 신학이 일어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종말론적인 면에서 본서는 두 개의 종말론의 형태를 거부하고 있다. 하나는 불트만의 케류그마의 개인주의적-실존주의적 해석(현재적 종말론) 즉 ‘복음의 종말론적 교훈의 비신화화’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과 이 땅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미래적 종말론(futuristic apocalyptic)에 대해서이다. 본서는 경건주의적-개인주의적 기독교 해석에 대해서 역사와 사회, 정치적 책임성에도 주의를 돌린다. 이는 오늘의 맑스주의의 유토피아원(사상)에 대해서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를 둔 희망과 미래’를 제시하려는 것인데, 이는 몰트만의 메시야적-종말론적 그리스도론을 의미하고, 우주적인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며, 희망의 신학을 보여준다.5)


II. 희망에 관한 명상 - <희망의 신학> 방법론


1. 기독교의 종말론은 어떠한 합리적 근거(logos)를 가지고 있는가 ?

    종말론이란 최후의 사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마지막 날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 세계의 심판, 하나님 나라의 완성, 죽은 자의 일반적 부활, 만물의 새로운 창조가 l기독교 종말론의 내용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그 자체를 지탱시키는 장래의 희망을 자기의 삶에서 제거하고, 그 장래를 피안이나 영원에로 추방했기에 희망은 항상 교회에 거슬러 왜곡된 형태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종말론은 기됵교 희망론을 의미한다. 종말론은 기대된 것과 그것에 의해서 움직여진 희망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다만 하나의 부록이 아니라, 전적으로 종말론이며, 희망이고, 앞을 향한 전망이며 성취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미래의 약속을 얻으려고 애쓰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종말론은 메시야에 의해서 일어나는 고통이요 수난이다. 모든 기독교의 선교, 실존, 성격이 종말론적으로 지배되어 있다(롬 15:13, 희망의 하나님). 기독교의 종말론은 미래 일반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일정한 역사적 현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의 부활의 현실을 인식하고 부활자의 미래를 선포한다. 예수의 역사와 부활에 기독교 종말론이 기초를 두는 점은 유토피아적 희망과 구별지어주는 시금석이다. “그는 우리의 희망” (골 1:27)이란 신앙은 아직 실현되지 않는 그의 미래를 향한 약속을 지칭하기에 종말'론'(Lehre, Logos)이란 표현은 맞지 않을 수 있다. 로고스가 뜻하는 반복적이며 경험적인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약속의 희망에 대한 진술은 그것이 오고 있는 현실을 해명하고 있기에 항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현재적인 것과 미래적인 것, 경험과 희망은 상호 모순이다(롬 8:24-25). 기독교 종말론은 부활의 희망이며 여기서 보증된 의의 미래가 죄에, 생명이 죽음에, 영광이 고난에, 평화가 전쟁에 거슬러 있는 모순에서 그 진리를 증명한다. 이러한 모순에서 희망은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종말론은 먼 곳에서만이 아니라 고난, 악, 죽음이 경험되는 현실에서의 투쟁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2.  신앙의 희망

     신앙은 세상의 출애굽에 가담하여 고난과 죽음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름으로써 억압이 없는 열린 영역, 자유와 기쁨의 전망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전개되는 자유의 미래의 시작을 인식하며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매어준다. 희망은 이 신앙을 그리스도의 포괄적인 미래로 열어준다. 그러기에 희망은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이다. 신앙의 그리스도 인식이 없으면 희망은 허공에 떠 있는 유토피아가 되며, 희망이 없으면 신앙은 무너지고 죽은 신앙이 된다. 신앙은 기대적인 희망 속에서 십자가에 죽은 자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진 그 한계를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신앙은 부활에서 하늘의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서 있는 땅의 미래를 본다. 그래서 신앙이 희망으로 발전되는 곳에서는 인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 있으며, 인내가 아니라 초조함이 따른다. 신앙 자체가 인간 속에 있는 ‘불안한 마음’(cor inquietum)이다.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는 자는 현실과 타협할 수 없고 이와 대립하며 고난을 당한다. 희망은 인간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불안하게 한다. 희망은 인간을 나그네로 만들고 영원한 도성을 찾아가는 충돌과 힘을 준다.


      3. 절망의 죄

     신앙이 살아 있으려면 희망에 의존하듯이 불신앙의 죄는 희망의 상실에서 온다. 죄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보면 실망, 체념, 게으름, 비애도 이에 속한다. 하나님을 인간을 높이고 인간에게 넓은 세계를 향한 전망을 주셨지만, 인간은 뒤에 처지고 실망한다. 그가 게으르기에 희망을 결핍한다. 중세기에는 게으름(acedia) 또는 비애(tristitia)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성령을 거스리는 죄가 된다고 가르쳤다. 희망 상실은 불손(=오만)과 절망의 형태를 취한다. 불손은 하나님이 바라는 성취를 미리 제맘대로 선취하는 것이요, 절망은 바라는 불성취를 미리 제맘대로 선취하는 것이다. 19세기 초에 우리는 독일 관념론에서 불손의 인간상을 괴테, 실러, 맑스 등에서 보는데 이들은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와 신의 종의 형태를 반항한 Prometheus 를 현대의 성자로 삼았다. 여기서 철학적, 혁명적 천년왕국설이 나왔고 그리스도는 이의 혁명가로 변모시켰다. 20세기 중엽 실존주의적 문학에서는 Prometheus가 Sisyphus(헛되이 돌을 언덕위로 굴러 올림)로 변모한다. 그는 정녕 길, 싸움, 결단, 인내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다만 성취의 희망은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도 희망이 없는 성실한 친구로 된다. 삶을 새롭게 하는 힘은 오만, 절망 가운데에는 없다. 그것은 다만 지속하는 확실한 희망 가운데 있다. 종말론의 희망의 여러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모든 가능적인 것, 즉 희망의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으로 충만해 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 22:5)고 말씀하시는 분의 손 안에서 현실과 인간을 본다. 이 약속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제 여기서, 생이 새로워지는 자유와 이 세상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4. 희망은 사람을 속이고 현재의 행복을 빼앗는가 ?

     희망의 신학에 대한 격심한 반대는 오만과 절망에서가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겸손한 묵인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희망은 사람을 아직은 없는 미래에 던져 버린다. 추억과 희망은 분리되지 아니한 현재에 관해서 그를 속이는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참된 현재는 시간에 내재하는 영원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희망이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현재의 행복만이 아니고 그 이상의 것, 곧 현재의 하나님 영원히 현존하시는 하나님이다. 희망은 이러한 영원한 현재에 속한다.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운동과 변화(파르메니데스적과 반대개념), 역사와 미래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이 존재의 이성은 역사의 힘으로부터 영원한 현재로 우리들을 해방하고 높여 준다. 완전한 현재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신약성서의 ‘지금’이나 ‘오늘’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인, 영원한 현재의 ‘지금’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약속된 장래의 새로운 것이 빛나는 ‘지금’이며, ‘돌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만 ‘종말론적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루시아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다만 대망의 범주로 파악되고 이는 곧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할 뿐이다. 신앙자는 삶의 밤낮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날의 서광속에 놓인 것인바, 거기서는 밤과 낮, 지나가는 것과 오고 있는 것이 서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신앙자들은 주어진 대로의 날들을 넘어서 창조자와 부활자의 약속에 따라서 오고 있는 것들의 대망 속에 사는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사람을 속일까 ? 그럴 수가 없다. 그와는 반대로 바로 그것이 현재의 행복이다. 희망은 행복도 불행도 꿰뚫고 자나가는 것, 죽어가는 것, 죽은 것까지라도 장래의 하나님의 약속속에서 본다. 그러기에 희망없는 삶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란 실로 희망상실이다.


       5. 희망과 사고

      기독교의 종말론은 희망을 세상적 사고 속으로 가져오고 사고를 희망 속으로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안셀름은 fides quaerens intellectum - credo, ut intelligam (지식을 찾는 신앙 -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라는 근본 명제를 확립했는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spes quaerens intellectum - spero, ut intelligam (지식을 찾는 희망 - 나는 알기 위해서 희망한다.)라는 근본 원리를 따르는 것이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은 스스로 믿는 바를 알기 위해서 희망한다. 그러기에 모든 인식은 하나의 선취적 단편적인 인식이며, 약속된 장래의 서곡으로서 희망에로 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 개시하는 희망은 사유속에 있는 추진력, 불안, 탄식이다. Spes quaerens intellectum 은 종말론의 출발이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는 한 종말론은 ‘학문적 희망’(docta spes)이 된다.


               III.  종말론과 계시 - 종말론의 재발견


    19세기 말 바이스(Johannes Weiss)6)와 쉬바이처(Albert Schweitzer)7)를 통해 시작된 예수의 메시지와 실존 그리고 윈시 기독교에 대한 종말론의 중심적인 의미의 발견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세계 1차 대전 뒤 ‘변증법적 신학’의 창시자들에 의해서 비현실성으로 선고된 종말론이 주석적 연구 분야 뿐 만이 아니라 교의학 연구의 중심주제가 되었다(K. Barth, R. Bultmann, Althaus).  하지만 이런 연구동향이 원시 기독교적 종말론의 발견을 더 이상 전개시키지 못함은 종말론의 초월적인 이해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진리를 발견하기에 희랍적인 로고스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열린 방식에서 역사가 경험되었다. 진리의 나타남(Epiphanie)이 아니라 진리의 계시(Apokalypsis)이다. 종말론적 메시지의 참된 이해를 위해 신구약 성서에서 보여주는 약속을 알아야 한다.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약속의 방식으로 약속의 역사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스라엘 주변세계의 종교는 그들 나름대로 계시의 종교인 신들의 에피파니 종교 (Epiphanienreligionen)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계시는 약속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개념과 불트만의 인간의 ‘참된 자기 존재의 드러냄’으로서의 계시 이해 속에는 어떠한 종말론의 이해가 깔려 있는가 ? 자기 계시의 사상이 칸트가 사용한 의미인 ‘초월적 종말론’의 영역안에 표현되어 있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 (1921년) 은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이 그 기초를 이룬다. “영원한 순간은 모든 순간을 초월하는 의미이기에 그것은 모든 순간들과 비교될 수 없다” (참고 롬 13:12, 고전 15장). ‘자기 계시’의 사상은 19세기의 헤겔학파의 신학자들이 먼저 시작했다. 바르트와 불트만은 같이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에서 그들의 스승인 헤르만에게서 배워 계시와의 관련에서 ‘자아’를 강조했다. 헤르만은 그의 저서 <Gottes Offenbarung an uns>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동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다르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행동과 인식을 결합하는 현실주의에 바르트와 불트만은 일치한다. 이후 바르트는 자기계시의 사상을 신학적 인격주의로 향하지 않고 삼위일체론의 관련에서 발전시켰고 그것을 하나님의 주권의 선포와 결부시킨다. (내재적 삼위일체론)

     불트만은 헤르만에게 보다 충실했다. 그의 신학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행동에 대한 모든 진술의 배타적인 실존관계, 즉 자기 관계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나타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자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는 관계에 있다. 인간은 창조에 의해 자신이 될 수 있도록 지향되어 있다. 그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의 구조이다. 인간의 실존의 문제 안에서 하나님의 문제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만 하나님 안에서만 자기 자신을 얻고, 자기 자신을 얻는 곳에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얻는다. 성서의 증언이 실존으로부터 실존을 향하여 말함으로써 실존적 해석과 비신화화의 프로그램이 규정된 것이다. 이리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Deus dixit) 행동 속에 있는 객관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간의 주체성으로부터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기’를 인간의 ‘자기’에서 분리함으로써 헤르만에게서 떠났지만, 불트만은 하나님과 자아의 숨은 상관관계의 마력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불트만에게는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척도와 해명이 되지 않고, 거기에 인간의 본래성 또는 자아의 해명이 대신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점진적인 계시’로 이해하려고 함은 계시를 역사적으로 보려고 한데에서 기원한다. 이 개념은 근래의 계약신학(Föderaltheologie), 17세기, 18세기의 예언적 신학과 경륜적 신학에서 유래한다. 구원사적 신학을 가능케 한 조건은 신학적으로나 세속적으로 현대의 탄생과 연결되어 있는 묵시문학적 희망과 사고의 부활에 있다. 그러나 이 신학은 현대의 정신 속에 들어오지는 못하고 심오한 교회의 가르침의 진부한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신학적 고려를 초월적 주관성의 반성철학에서 대답해 보려는 시도는 W. Pannenberg, R. Rendtorff, U. Wilckens, T. Rendtorff 등이 했다. ‘역사로서의 계시’ 논의는 우주로부터의 하나님의 증명에서 오는 하나님에의 물음에서 시작된다. 여기에서 “그의 역사의 행동의 거울속에 있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자기계시‘의 인식이 나타난다. ”전체로서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이는 종말에서 비로소 계시로서 인식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는 시작이 아니라 계시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난다“  후기 유대교의 묵시문학의 대망과 기독교 종말론 사이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모든 부활의 신학에는 십자가의 종말론 (eschatologia crucis)의 성격이 들어있다.

     성서에 증언된 하나님의 계시가 ‘영원한 현재의 나타남’ (Epiphanie)으로 이해되는 때, 결국 그것은 항상 희랍적 사고와 탐구의 영향이다. 이는 출애굽과 부활의 하나님 보다는 파르메니데스적 하나님을 가리킨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계시는 이 영원한 현재의 에피파니의 형태가 아니고, 진리의 약속된 미래의 묵시로서의 이해에 필요하다. 기독교 계시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인간 예수에게서 표현된 것’ (Ebeling)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의 운명’ (Pannenberg)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양자가 서로 결합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의 질적인 차이 속에서 예수의 동일성에 있다. 끝없는 모순 속에 있는 이 동일성은 신학적으로 동일화의 사건, 하나님의 진실의 행동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은 자로서 자기를 계시하고 확인한다. 그 점에서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서 계시하고 동일화한다. 그는 장차 올 그의 영광의 길에 있는 주로서 자기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그의 미래의 계시는 그의 나타남들에 있어서는 ‘감취어 있는 것’이다. 희망을 통해서 신앙자의 삶은 그와 같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다. 신앙은 희망과 기대 속에서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감춰진 것으로서 발견한 것의 계시를 향해 있다. 그의 계시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며 아직 끝나지도 일어나지도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부활에서 약속되고 보증되었다. 부활하신 주의 계시는 싫든 좋든 (nolens volens) 전진하는 역사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최초의 동력’ (primum movens)과 같이 역사적 과정의 꼭대기에 있다. 인간과 그의 세계의 현실은 이 계시와의 관계에서 역사적이 되고, 이 계시 위에 둔 희망은 불안한 약속 (promission inquieta)이다.

     약속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만나는 사람은 그의 존재 그대로서 인정되고 앞으로 될 존재로서 구별된다. 그는 희망 속에서 자기자신이 된다. 그래서 신앙자는 본질적으로 희망하는 자가 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미래이다. 그는 자신에게 약속되어 있다. 그의 미래는 전적으로 부활하신 주의 과정의 결과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의 미래를 그리스도의 미래 위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는 희망에 있어서 (in spe)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고 사물에 있어서 (in re)는 자기 자신과 일치하게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homo absconditus 가 된다. 약속된 진리의 미래로부터 세계는 역사로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의 종말론적 의미는 회상과 기대에서 역사를 위해서 의미를 연다.

     기독교 신학은 인간 실존의 문제성과 현실의 문제성을 전체로서 받아들이고 약속의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 존재와 세계의 종말론적 문제성으로 처리하는 방식에서 인간 현실과 인간에 관한 세계의 현실에 관해서 그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 ‘죽음에 위협을 받는,’ ‘허무한 것에 속하는,’것은 일반적 실존의 경험과 세계 경험이다. ‘희망을 향하여’는 분명히 기독교 신학이 이 문제들을 과제로 삼고 그것들을 약속된 하나님의 미래로 지시하는 방식이다.


           IV.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미래 -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1. 복음과 약속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사람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했고 또 의, 생명, 자유를 함께 포함한 그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에 관한 복음 선포 가운데 이 미래가 그리스도의 약속에서 이미 현재가 되어 있다. 복음은 이 미래가 현재적으로 동텄다는 것을 선포하며 그것으로써 이 미래가 복음의 약속에서 통고 되는 것이다.

      예수의 신비에 접근해 가는 길은 그의 인격과 그의 역사의 구체성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독론에 이르는 두 길은 다 구약성서를 거쳐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에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이신 야훼이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다. 이 두 명제는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첫 명제가 뜻하는 것은 예수에게 계시된 분은 출애굽과 약속의 하나님으로서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미래’를 가진 하나님으로서 생각해야 하며, 헬라적 하나님 이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영원한 미래,’ 플라톤의 최고의 이념, 아리스토텔레스의 처음 원인 등과 동일시 될 수 있으나, 그의 속성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약속의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의 부활에 의해 모든 인간의 하나님이 되셨다. 두 번째 명제인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다룬다면 예수는 구약성서의 약속사와 연관을 맺고 또 갈등을 지으면서만 이해되는 것이다. 율법과 약속의 갈등이라는 관계에서만 이해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인류의 구원이 된다(갈 3:28).


       2. 약속의 하나님 (히 10:23, 11:11 등)

      약속하신 이는 믿음직하다. 그의 신성은 심판과 은총의 모순 가운데 믿음직하게 되는 그의 신실성을 지속하는데 성립한다. 하나님을 계시하는 말씀은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랍비전승과 묵시문학 전승에서 하나님은 약속하는 하나님이고 그의 신실성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확증되고 이싿. 구약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율법, 의에 대한 관심을 초점에 맞추듯, 바울도 아브라함의 인격을 그의 복음과 약속을 석의하는 중심점에 세웠다. 바울이 율법을 대립시켜 모세와 아브라함을 ‘약속의 아바지’로서 파악하는 근거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불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이나 약속의 종결이 아니고 갱생과 해방과 효력 발휘에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며 그 근거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능력이 없던 것을 있게 하도록 할 수 있는데 있다. 그의 약속 성취는 순종하는 사람의 힘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율법에 대립하고 약속에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데서만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 완성으로 입증된다.


       3. 원시 기독교에서의 실현의 감격과 십자가의 종말론

      기독교가 묵시문학적, 메시야 대망적 유대교의 영역에 머무르는 한, 그리스도의 사건과 복음을 종말론으로 이해함은 바울에게는 자명한 일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교회는 벌써 ‘갱신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해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비종교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안에서 논쟁의 대상으로 삼은 헬라주의적 열광주의 가운데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기독교의 열광주의 명백히 그 전제를 원시기독교의 묵시문학적 열광주의 곧 성령체험에서 오래 기다렸던 약속이 성취된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은 것에 두고 있었다. 영원의 현재에 집중하는 현재적 종말론의 이해로부터 예수의 말씀과 행위, 죽으심과 부활을 약속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약속의 사건으로부터 이제 구속의 사건이 생겨났다. 성례전의 사건은 신성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게 한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높이 추대되고 즉위하는 식으로 이해되고 그의 성육신에 연관시켜졌다.

     역사가 종말론을 삼키는 것이 아니고 (쉬바이처), 종말론이 역사를 삼켜버리는 것도 아니다 (불트만). 종말에 관한 논리(Logos)는 아직 없는 것의 약속이며 그것이 역사를 지어간다. 종말을 통고하는 약속 또 그 안에서 종말이 스스로 통고하는 약속이 역사의 동력이요 동기요 용수철이요 진통이다.


       5. 하나님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부활

      “만일 그대가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롬 10:9)  원시 기독교의 선교설교의 핵심은  (1)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행 2:24, 3:15, 5:31, 고전 15:3 등)  (2) “우리가 그것에 대한 증인이다”  (3) 그 이 안에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는 미래와 죽음에 내던져진 자에게 생명을 주는 미래가 근거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제일되는 질문은 언제나 부활절 증인들의 보도와 선포의 중심사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기사에 대한 양식사적 방법 때문에 부활의 사건을 제자들의 신앙의 사건으로 실존화시킨 부활해석은 타당치 않다. 예수의 부활은 결절적으로 십자가에 죽은 자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 부활사건이 새로운 서곡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미래에 대해 말한다면 그의 재림을 생각한다. 재림이라는 것은 현실로는 떠나가신 이의 다시 오심이 아니고 임박한 내림이다. 재림(임재)는 내일이면 지나가 버릴 현재가 아니고 오늘과 내일, 사람이 기다려야 할 현재이다. 우리에게 내림하는 현재 곧 ‘다가오는 미래’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대립해서 어떤 새 건을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종말은 종말론적 약속에 의해 그때 그때 체험되는 현재를 과거의 파괴와 미래에로의 출발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계시이다.


      7.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와 인간의 자유

      종말론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지배로 약속되고 기대된 것 가운데 있다. 이스라엘 초기에 이미 희망은 하나님의 지배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세워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 약속과 신실과 완성에서의 지배를 의미했다. 따라서 그의 지배아래서의 생은 새로운 지평이 전개되며 순종하여 미래를 맞을 준비를 갖출 역사적인 유랑을 의미한다. 약속으로 시작되고 약속을 향하여 열려진 생을 말한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메시지와 행동, 기적과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 표현된다. 예수는 메시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직접 자기 자신의 현재의 비밀과 연결되어 있다. 십자가에 죽으신 이의 부활 해석은 하나님 나라 약속의 이해에 대해 규범적이 된다.

  1)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나타남에 관한 체험은 하나님 나라 메시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가 열어 놓은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와 도래를 ‘변형시켰다’ (verstellen).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서 형태를 나타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랑에 의하여 그의 고난이 뒤따르도록 되어 있다.

  2)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기독론적으로 이해될 뿐 아니라 새로운 방도로 종말론적으로 이해된다. 의를 위한 주림, 고난, 약함, 무법성, 무분별속에서 모든 것이 의와 생명과 평화와 자유와 진리에 이르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배타적이 아니고 포섭적이다. 그래서 그의 사랑, 그의 이웃됨, 그와 함께 고생함이 포괄적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될 것을 희망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promissio)은 세상을 향한 사람의 선교(missio)의 근거를 이룬다. 이는 육체적 순종 가운데 성령의 밖으로의 행진을 근건해 준다 (롬 8:23, 고전 15:42 참고).


(요약: 미래가 가져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이의 부활인 그리스도 사건에 의하여 단한번 신뢰할 만하게 기대될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은 희망의 종국이 아니고 희망안에서의 확신이다 (히 11:1).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첫째’(prius)이지만 희망은 이 신앙가운데서의 ‘우위성’(primat)을 가진다. 시간적으로는 뒤지나 논리상 앞선다.)


           V.  새출발의 교회 - 희망의 공동체

    (현대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종말론적 이해를 위한 고찰)


1.  절대자 숭배와 현대사회

    우리는 현대사회 안에서 종말론적 희망으로 사는 구체적 형태를 취급할려고 한다. 여기 ‘출애굽의 교회’(Exodusgemeinde)라는 말은 ‘나그네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의 실존을 가리키는 것이다 (히 13:13-14 참고). 1537년에 제정된 슈말칼덴 신조에 의하면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순수한 말씀과 성례전의 바른 집행으로 여러 가지 입장과 바른 행위를 (cognitione. vocationum et verorum operum) 비추고 거기에 영양을 공급받는다”. 이는 신자가 매일의 복종에서, 세상직업에서, 사회적 역할에서, 자기를 신자로 나타냄을 의미한다. 그런데 16세기 개혁운동의 제3의 통찰은 현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혁운동에서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사회학적 근거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국가나 가정을 의미하지 않고 근대적 산업조직으로 구성된 사회이다. 인간관계가 물질과 상품으로 매개되는 공공생활을 의미한다. 이 문명의 현대성은 그 사회를 가치와 종교로부터 중립화시키고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이리하여 현대사회는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아니한다. 콘스탄틴대제 이래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회는 많은 사회변동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윤관을 가진 공공적 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해감에 따라 교회는 한세기동안 익숙했던 공적예배(cultus publicus) 성격을 상실했다. 이제 사사로운 예배(cultus privatus)가 되었다. 절대자의 예배 (the cult of the absolute)는 사회의 통합원리로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절대자는 오직 해방되고 사회적 책임을 벗은 주체성 안에 찾아지고 체험될 것이다. 종교는 이제 공적이고 사회적인 의무에서 벗어나 사사롭고 자유로운 활동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를 부여 받는다.


2.  새로운 주체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산업사회가 종교에 바라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해방된 새로운 ‘주체성의 초월’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신들은 죽고 말았다. 세계는 이미 인간에게 어떠한 고향도 어떤 숨을 곳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등장한 것이 ‘주체성의 형이상학’이며, 여기서 객관적 세계는 인간의 주체에 의해 계획 되는대로 맡겨졌다. 합리화 작업은 세계에서 ‘마술적인 것을 빼버렸다’ (Max Weber).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오직 주체성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해야 했다.

    이러한 주체성의 철학에 상응한 신학이 실존주의적 신학(신앙론)이다. 이 신학은 만남, 결단의 윤리적 현실 안에 거주한다. 이 신학은 그래서 정치적, 사회적 생활을 위한 윤리적 지시는 주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주의적 정열도 기독교 신앙이 사회적으로 버림받게 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


   3.  공동사회의 제의로서의 종교

현대사회가 종교에 바라는 기대 중 두 번째는 공동체(Gemeinschaft)에로 동료인간(Mitmenschlichkeit)을 끌어 올려 인도할 일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을 그 인간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여겼던 모든 제약에 대한 낭만주의적 반동은 결국 ‘공동체’라고 하는 이념에 고착되었다, ‘공동체’는 이익사회(Gesellschaft)와는 달리 분명코 근대 이전의 목가적인 촌락의 인간관계이다. 이 개념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유래한다. 공산당 선언, 민족공동체 개념, 소집단 등이 이의 결과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인정미, 친근미, 이웃, 고향을 느낄 수 있기에 ‘진정한’ 공동체를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사회에서는 행동의 기술적 규제가 있는데 대해서 여기서는 인간의 자발성이 모든 문제를 새롭게 해결한다. 그래서 기독교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인간을 위한 일종의 노아의 방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비세계적이 될 수 있다. 이렇다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말할 수 있어도 ‘세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교회는 사회적 모든 제도에 대한 현실적인 반려가 되기 어렵다.


   4.  제도의 예배의식으로서의 종교

  현대사회가 기독교적 종교 활동에 기대하는 제3의 역할은 놀랍게도 다시 공적 요구를 채우는 사회제도가 되는 것이다. 18세기 산업사회 이전의 시대보다도 현대의 계몽주의 이후의 문화는 다시 종교제도와 결탁한다. 이런 새로운 제도는 다시 이전의 불안정한 시대에 개인을 덮어 씌웠던 항구적인 결단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이상에서 살핀 ‘주체성의 예배로서의 종교’ ‘공돛에의 예배로서의 종교’ ‘제도의 예배로서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역할을 개개인간의 의욕이나 기피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자기 이해에 속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서 생겨났다. 이는 언제나 사회의 ‘자기 이해에 속한 것’에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 ‘자기 이해’가 관계 맺게 된 것이다. 이 연관이 비판적으로 의식되어진 곳에서만 이 '공동 생존'(symbiose)이 해결될 수 있으며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것이 사회적 자기 이해에 배치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생명 속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현대 산업사회가 그들에게서 기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기대해야 한다면, 기독교는 새로운 출발(Exodus)을 해야 하고, 그들의 현재의 사회적 역할을 새로운 형태의 ‘바벨론 포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5. 하나님 나라 기대에 있는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의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고, 종말론적 기대의 지평에서 교회의 회집과 사명수행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나 교회가 기다리는 분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설교하고 통고하고 파견하는 말씀에 의해 산다. 선교, 세례, 성만찬이 모두 종말론적 긴장 가운데 서 있다. 교회는 파루시아와 그리스도의 부활 사이에 서 있다. ‘세상을 위한 교회’란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대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에 일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기대는 그리스도의 파견과 사도직에 있어서 밝히 드러난다. 여기서 ‘세상을 위한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교회’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활기 있는 희망을 북돋우는 것이 선교이다. 이는 모든 기독교인의 임무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선교행위로 선포하는 것의 의미는 구약성서에 있다. 예언자적 종말론의 배경에서 본다면 선교는 분명히 하나님과의 화해, 죄의 용서, 하나님 상실의 폐기를 목표로 하며 살롬의 완성이다.

 

  6.  사회에 있어서의 기독교의 소명

    부활한 그리스도의 장차 이뤄질 지배는 단순히 희망, 기대 될 뿐 아니라 이 희망은 역사 가운데서 생과 행동과 고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래서 선교의 사명은 생을 역사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의미한다. 믿고 희망하는 모든 자는 부름을 받은 자(vocatus)이며 자기의 생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는데, 믿음의 자유를 얻는데 헌신해야 한다. 이 소명과 위탁은 개인의 구체적 봉사와 사회의 인간화를 통해서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을 강요한다. 이같은 희망의 삶은 이 세상에 대해서 변혁의 성격을 띠게 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게 미래의 세계를 희망으로 열어 주는 것이 교회의 과제이다.




참고문헌

원서: Moltman, J.,  Theologie der Hoffnung - Untersuchungen zur Begründung 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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