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ssolalia 는 그리스어 단어 γλωσσολαλία에서 유래 한 것으로, "혀"또는 "언어" 및 λαλέω ( laleō )를 의미하는 "γλῶσσα ( glossa )"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며 "말하기, 말하기, 채팅, 소리". [7] 그리스어 표현은 (다양한 형태로) 사도 행전 과 고린도 전서에 신약에 등장합니다. 사도 행전 2 장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을받으며 적어도 15 개 국가 또는 민족 그룹의 언어로 말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정확한 구절은 적어도 14 세기에 위클리프 성경 에서 신약 성서가 중세 영어 로 번역 된 이후 사용되었습니다. [8] Frederic Farrar 는 1879 년에 처음으로 glossolalia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9]
언어학 [ 편집 ]
토론토 대학의 언어학자인 William J. Samarin은 1972 년 오순절의 glossolalia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발표했다. 이것은 언어 적 특징에 대한 고전적인 연구가되었다. 그의 평가는 5 년 동안 이탈리아, 네덜란드, 자메이카, 캐나다 및 미국에서 개최 된 공개 및 사적 기독교 회의에서 기록 된 거대한 표본을 바탕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광범위한 주제에는 브롱스의 푸에르토 리코, 애팔 래 치아 사람의 뱀 핸들러 , 로스 앤젤레스의 러시아 영적 기독교인 ( 프리 기니, 듀크 - 지즈 니키 )이 포함됩니다.
Samarin은 glossolalic 연설이 어떤면에서 인간 언어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화자는 악센트, 리듬, 억양 및 일시 중지를 사용하여 말하기를 별개의 단위로 나눕니다. 각 단위 자체는 음절로 구성되며, 음절은 화자가 알고있는 언어에서 가져온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일정한 수의 자음과 모음을 사용하여 구성되는 언어 적 행동입니다. 음절의 제한된 수의 음절에서 더 큰 단위로 구성되어 의사 적으로 재구성되고 피치, 음량, 속도의 변화가 있습니다 및 강도. [11]
[Glossolalia]는 화자가 알고있는 모든 것에서 나온 소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소 어처구니 없게 섞여 있지만 현실적인 언어와 같은 리듬과 멜로디 때문에 단어와 문장과 같은 단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 [12]
발표자에게 이미 알려진 소리 집합에서 소리가 나왔음을 다른 사람이 확인합니다. 심리학 적 인류 학자이자 언어 학자 인 Felicitas Goodman 은 또한 glossolalists의 연설이 연사의 모국어 연설 패턴을 반영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3] 이 발견은 Kavan (2004)에 의해 확인되었다. [14]
Samarin은 인간 언어와의 유사성이 표면적 일 뿐이며 glossolalia는 "언어의 외양"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는 음절이 단어를 형성하지 않았고, 연설의 흐름이 내부적으로 조직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연설 단위와 개념 사이에 체계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이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 소통을하지만 글로시 랄레 아는 의사 소통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glossolalia가 "인간의 언어 표본"이 아니라는 것을 결론 지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적인 인간의 인식과 내부적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5] 사 마린은 그의 언어 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오순절의 glossolalia를 "무의미하지만 음운 학적으로 구조화 된 인간의 발언 으로 정의했다. 화자는 실제 언어이지만 살아 있거나 죽은 자연어와 체계적으로 닮은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16]
glossolalia의 실무자는 언어학 연구자와 의견이 다를 수 있으며 인간 언어 ( xenoglossia )를 사용한다고 주장 할 수 있습니다. 펠리 티아스 굿맨 (Felicitas Goodman)은 미국, 카리브해, 멕시코에서 오순절 공동체를 연구했다. 여기에는 영어, 스페인어, 마얀 어를 사용하는 그룹이 포함됩니다. 그녀는 그녀가 아프리카,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일본의 비 그리스도교 의식에 대한 기록과 비교했다. 그녀는 분절 구조 (예 : 소리, 음절, 문구)와 초 분절 요소 (리듬, 강세, 억양)를 모두 고려했으며 오순절 개신교 인들과 다른 사람들의 추종자들 간에는 구별이 없다고 결론 지었다 종교. [17]
1. 방언에 대한 성령님의 은사에 관한 내용으로 사도행전 2장 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Korean 한글개역 (사도행전 - 2) | Modern Greek Bible (Acts - 2) |
1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2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3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 4 |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5 |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6 |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7 |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8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9 |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10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11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12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13 |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 1 | [] Και οτε ηλθεν η ημερα της Πεντηκοστης, ησαν απαντες ομοθυμαδον εν τω αυτω τοπω. | 2 | Και εξαιφνης εγεινεν ηχος εκ του ουρανου ως ανεμου βιαιως φερομενου, και εγεμισεν ολον τον οικον οπου ησαν καθημενοι· | 3 | και εφανησαν εις αυτους διαμεριζομεναι γλωσσαι ως πυρος, και εκαθησεν επι ενα εκαστον αυτων, | 4 | και επλησθησαν απαντες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και ηρχισαν να λαλωσι ξενας γλωσσας, καθως το Πνευμα εδιδεν εις αυτους να λαλωσιν. γλωσσολαλία에서 유래함 | 5 | [] Ησαν δε κατοικουντες εν Ιερουσαλημ Ιουδαιοι, ανδρες ευλαβεις απο παντος εθνους των υπο τον ουρανον· | 6 | και καθως εγεινεν η φωνη αυτη, συνηλθε το πληθος και συνεταραχθη, διοτι ηκουον αυτους εις εκαστος λαλουντας με την ιδιαν αυτου διαλεκτον. | 7 | Εξεπληττοντο δε παντες και εθαυμαζον, λεγοντες προς αλληλους· Ιδου, παντες ουτοι οι λαλουντες δεν ειναι Γαλιλαιοι; | 8 | Και πως ημεις ακουομεν εκαστος εν τη ιδια ημων διαλεκτω, εν η εγεννηθημεν; | 9 | Παρθοι και Μηδοι και Ελαμιται και οι κατοικουντες την Μεσοποταμιαν, την Ιουδαιαν τε και Καππαδοκιαν, τον Ποντον και την Ασιαν, | 10 | την Φρυγιαν τε και την Παμφυλιαν, την Αιγυπτον και τα μερη της Λιβυης της κατα την Κυρηνην και οι παρεπιδημουντες Ρωμαιοι, Ιουδαιοι τε και προσηλυτοι, | 11 | Κρητες και Αραβες, ακουομεν αυτους λαλουντας εν ταις γλωσσαις ημων τα μεγαλεια του Θεου. | 12 | Εθαυμαζον δε παντες και ηπορουν, αλλος προς αλλον λεγοντες· Τι σημαινει τουτο; | 13 | Αλλοι δε χλευαζοντες ελεγον οτι ειναι μεστοι απο γλυκυν οινο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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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 에서는 방언은사의 절제에 대한 사도바울의 주의사항이 있다.
Korean 한글개역 (고린도전서 - 14) | Greek NT Byzantine/Majority(2000) (1 Corinthians - 14) |
1 |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 2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 3 |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4 |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5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 6 |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7 |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 8 |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 9 |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 10 |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 11 |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 12 |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13 |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 14 |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 15 |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 16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17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18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19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20 |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 21 |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 22 |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 23 |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
| 1 | διωκετε την αγαπην ζηλουτε δε τα πνευματικα μαλλον δε ινα προφητευητε | 2 | ο γαρ λαλων γλωσση ουκ ανθρωποις λαλει αλλα τω θεω ουδεις γαρ ακουει πνευματι δε λαλει μυστηρια | 3 | ο δε προφητευων ανθρωποις λαλει οικοδομην και παρακλησιν και παραμυθιαν | 4 | ο λαλων γλωσση εαυτον οικοδομει ο δε προφητευων εκκλησιαν οικοδομει | 5 | θελω δε παντας υμας λαλειν γλωσσαις μαλλον δε ινα προφητευητε μειζων γαρ ο προφητευων η ο λαλων γλωσσαις εκτος ει μη διερμηνευει ινα η εκκλησια οικοδομην λαβη | 6 | νυνι δε αδελφοι εαν ελθω προς υμας γλωσσαις λαλων τι υμας ωφελησω εαν μη υμιν λαλησω η εν αποκαλυψει η εν γνωσει η εν προφητεια η εν διδαχη | 7 | ομως τα αψυχα φωνην διδοντα ειτε αυλος ειτε κιθαρα εαν διαστολην τοις φθογγοις μη διδω πως γνωσθησεται το αυλουμενον η το κιθαριζομενον | 8 | και γαρ εαν αδηλον φωνην σαλπιγξ δω τις παρασκευασεται εις πολεμον | 9 | ουτως και υμεις δια της γλωσσης εαν μη ευσημον λογον δωτε πως γνωσθησεται το λαλουμενον εσεσθε γαρ εις αερα λαλουντες | 10 | τοσαυτα ει τυχοι γενη φωνων εστιν εν κοσμω και ουδεν αυτων αφωνον | 11 | εαν ουν μη ειδω την δυναμιν της φωνης εσομαι τω λαλουντι βαρβαρος και ο λαλων εν εμοι βαρβαρος | 12 | ουτως και υμεις επει ζηλωται εστε πνευματων προς την οικοδομην της εκκλησιας ζητειτε ινα περισσευητε | 13 | διοπερ ο λαλων γλωσση προσευχεσθω ινα διερμηνευη | 14 | εαν γαρ προσευχωμαι γλωσση το πνευμα μου προσευχεται ο δε νους μου ακαρπος εστιν | 15 | τι ουν εστιν προσευξομαι τω πνευματι προσευξομαι δε και τω νοι ψαλω τω πνευματι ψαλω δε και τω νοι | 16 | επει εαν ευλογησης τω πνευματι ο αναπληρων τον τοπον του ιδιωτου πως ερει το αμην επι τη ση ευχαριστια επειδη τι λεγεις ουκ οιδεν | 17 | συ μεν γαρ καλως ευχαριστεις αλλ ο ετερος ουκ οικοδομειται | 18 | ευχαριστω τω θεω μου παντων υμων μαλλον γλωσσαις λαλων | 19 | αλλ εν εκκλησια θελω πεντε λογους δια του νοος μου λαλησαι ινα και αλλους κατηχησω η μυριους λογους εν γλωσση | 20 | αδελφοι μη παιδια γινεσθε ταις φρεσιν αλλα τη κακια νηπιαζετε ταις δε φρεσιν τελειοι γινεσθε | 21 | εν τω νομω γεγραπται οτι εν ετερογλωσσοις και εν χειλεσιν ετεροις λαλησω τω λαω τουτω και ουδ ουτως εισακουσονται μου λεγει κυριος | 22 | ωστε αι γλωσσαι εις σημειον εισιν ου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αλλα τοις απιστοις η δε προφητεια ου τοις απιστοις αλλα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 23 | εαν ουν συνελθη η εκκλησια ολη επι το αυτο και παντες γλωσσαις λαλωσιν εισελθωσιν δε ιδιωται η απιστοι ουκ ερουσιν οτι μαινεσθ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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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言 glossolalia, gift of tongues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로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 2:1~14에서 예수 승천 후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면서 성령의 힘으로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방언의 사전적의미는 '여러 지방의 언어'이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저들이 술이 취해서 저러는 거다'라는 걸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린도 전서 14장에서 방언은 현재의 형태처럼 '알 수 없는 말'로 나타나며 이를 알아듣는 자가 없다고 표현한다. 또한 방언을 해석할 필요가 있어 방언 해석의 은사에 대해 언급한다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보는 것은 모든 기독교 신학에서 동일하다. 다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차이가 있다.
은사주의 기독교 신학에서 방언의 의미는 성령이 임하신 표적이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를 중요시하는 교단에서는 방언이 필수인가 하면, 상대적으로 성령의 은사를 덜 중요시하는 교단에서는 즉 방언이 성령이 임한 증거인 것은 확실히 인정하나, 구원을 받아 성령이 임했다고 해서 무조건 방언의 은사가 생긴다고 보진 않는다. 그 외에 고린도 전서 14장 2절을 근거로 방언이 천사의 언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이지, 정설은 아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장 2절 (공동번역)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마테오 복음서 6장 5~6절
우선 가짜 방언을 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는데, 많은 경우 신앙심과 관련이 되었다. 물론 방언과 신앙심은 관계가 없지만, 다들 방언하는 분위기라서 방언을 못하면 신앙심이 부족하다고 보일까 봐 방언을 하지 못하는데도 방언을 하는 양 따라 하는 사람도 있고, 그저 '난 방언을 받을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하고 자랑하기 위하여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문제는 초기 기독교에도 있었던 심각한 문제였으며, 특히 고린도 지방에 있던 교회가 이러한 폐단이 심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하여 몇가지 방언 사용의 원리와 원칙을 정해주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사람들을 키워주고 격려해 주고 위로해 주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도울 뿐이지만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 도움을 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이상한 언어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만일 이상한 언어를 해석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이 교회의 이익이 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이 더 위대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5(공동번역)
그러면, 형제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함께 모일 때에는 찬송하는 사람도 있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상한 언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지만 모든 것은 교회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상한 언어를 말할 때에는 둘이나 많아야 셋이 차례로 말해야 하고 한 사람은 그것을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해석할 사람이 없을 때에는 교회 안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느님하고만 말하십시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26~28(공동번역)'''
이러한 바울의 편지에서 드러난 사도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
2. 공중 예배시 초신자들을 포함한 예배자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함으로써 방언의 은사를 소유하지 못한 신자들을 배려해야 한다.
3.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방언의 은사를 남용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유치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
또한 바울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있는 곳에서는 되도록이면 방언을 사용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이상한 언어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계시나 지식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나 가르침을 전해 드리지 못한다면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도 소리는 납니다. 그러나 악보대로 분명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무슨 곡이 연주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또 나팔부는 사람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않으면 누가 전투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이상한 언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누가 알겠습니까? 결국 여러분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셈입니다. 세상에는 갖가지 말이 있지만 뜻 없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나는 서로 외국인이 됩니다. 성령의 선물은 여러분이 갈망하는 것이니 되도록 풍성하게 받으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교회를 돕는 것이어야 합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4:6~12(공동번역)
즉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하는 것이 더 이롭다고 본 것이다. 이 또한 어디까지나 '방언 은사를 가진 자들은 방언 해석의 은사를 겸하여 가짐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삶에 적용시킴으로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한다.'의 원칙에서 방언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권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언이 성령이 임재하셨다는 증표인 만큼 바울은 방언 그 자체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다.
방언과 방언의 통역.
신약
성경에서 방언과 그에 수반되는 은사인 통역 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은사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란 다른 나라 말을
모국어로 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은사라고 주장한다. 이런 종류의 이적이 오순절날에 일어난 적이 있다(사도행전 2:1-11).
그러나 그 은사는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났던 은사와는 같지 않은 듯하다.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났던 방언의 은사는 통역자가
필요하였는데, 그 이유는 듣는 자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방언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전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천상의 방언"을 말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방언은 자기
암시에 의한 심리적 현상이거나 마귀의 사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 말씀에
의지하는 길 뿐이다.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성경 말씀인 고린도 전서 12장과 14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 방언의 은사는 모방될 수 있다. 즉 진짜 방언의 은사가 있고 다른 영들 즉 사단의 영이나 혹은 개인의 영에 의한 유사품이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회심 이전에는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대로 끌려갔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방언을 말하는 자들의 신앙고백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고백을 토대로 하여 영들을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기 이전에 그들은 이교의 사제들의 황홀한 말솜씨에 속아 오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입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그런 능력을 부여받지 못한 자들에 의하여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방언이 세계 여러 곳에서 비 기독교계에도 잘 알려져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단일신론주의자(unitarian)들도
때때로 방언을 한다. 불교나 일본의 신도의 사제들도 황홀경에 이르면 방언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남아메리카, 인도, 호주등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 그 자체만으로는 성령 임재의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두번째 원리는 성령의 은사는 매우 다양하면서도 귀중한 은사가 많은데 방언의 은사는 그 많은 은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2:4-11에 다루고 있다. 그는 거기에서 교회에는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이 있는데, 그
필요한 일들을 위하여 성령께서 부르신 사람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나누어 주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특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에서 오직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여러 가지 은사들이 분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8-11절). 성령께서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그것을 성령의 목적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특별한 은사를 가졌다고 해서 교만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후에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작게 여긴 것은 방언의 은사를 가진 고린도 교인들이 교만하게 될 특별한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세번째 요지는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오직 교회의 덕을 세우고 연합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고전 12:12-27).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두 가지 다른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 두 가지 목적을 몸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면서 몸의 각 지체는 서로 도움이 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다음의 사항을 강조한다. (1)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다(12절). (2) 모든 지체는 "필수 불가결하다"(22절). (3) 분쟁이 없어야 한다(25절). 만약
방언이라고 하는 특별한 은사가 성장을 촉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파를 조장한다면 그 은사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주신 목적과는 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로, 만일 여러 가지 은사들이 그 중요성의 순서대로 기록되어져야 한다면 방언의 은사는 그 목록에서 언제나 상대적으로 낮은 서열에 있어야 함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12:28-14:12)
(이 경우 아마도 방언의 은사를 뽐내는 자들의 콧대를 꺽기 위함인 듯하다). 우리는 몇 가지 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바울이 은사들을 기록할 때면 언제나 방언과 방언 통역의 은사는 맨 나중에 나온다. 고린도전서 12:28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예인데, 거기에서 바울은 실제로 서열을 헤아리고 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라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또
다른 방법으로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에 강조를 둠으로써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관심이 너무도 컷기에 바울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고 은사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2장). 끝으로 그는 만일 어떤 은사를 추구하고자
한다면 예언의 은사는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고 가르치는 능력을 가리킨다(14:1). 바울은 역시 방언을 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방언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14:19).
바울이 말하는 다섯번째 원리는, 이 방언의 은사는 특별한 위험이 따르는 것임으로 반드시 안전 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4:13-38).
첫번째 위험은 무질서이다. 바울은 무질서를 수치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분열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지침을 내리고 있다. 첫째로,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은 말해서는 안된다. 즉 한 번에 한 사람만 말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사람이 다 말해서는 안되고 많아야 두 사람 혹은 세 사람만 하여야 한다. 셋째로 두세 사람만 말하게 된다 할찌라도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말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의 음성을 소멸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라고 권하고 있는데 바로 그 이유로 회중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음을 보장하고 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받은 것을 동시에 소리치고 부르짖는다면 회중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두번째 위험은 내용이 없는 기독교가 될 위험이다.
그래서 바울은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그때도 기독교는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사고방식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내용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감정적 "고조"가 최고 가치가 되어 버렸다. 바울은 이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온당한 감정적 반응을 억압한 것은 아니다(우리도 그래서는 안된다). 기독교에서는 감정이 있고 또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기초는 될 수 없다. 역사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만일
체험이 계시보다 더 신뢰할만한 것이 된다면 그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거나 초월하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오늘날 방언 운동에서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이러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체험이 최우선이 되고 있는 곳에서는 감정적이고 내용이 없는 기독교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바울의 모범을 따라 내용을 강조해야만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믿음의 기초로써 우리는 체험이나 감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에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신 진리를 강조해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우리 이성으로 파악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우리의 전인(全人)이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존 스토트도 이것에 대해 "지각없는 기독교"라는 말을 사용하여 논박하면서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끝으로, 방언 문제에 대해 제시한 바울의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은사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언을 금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거든 그 은사를 사모하지 말라. 최소한 다른 은사들보다 더 사모할 필요는 없다(우리는 예언의 은사를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이 그 은사를 부여 받았거든 그것을 행하기를 금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금한다는 것은 교회를
메마르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제임스 보이스의 '기독교 강요 교리설교'에서 발췌(829-83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