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장 1; 2장 1-10, 신학적 관점
욥기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가장 어려운 신학적인 주제가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주제는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는데, 무고한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악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선하다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욥기는 하나님이 어떻게 무고한 피해자의 원한을 풀어주시는지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다음의 3가지는 욥기를 읽는데 중요한 사항이다: 첫째, 어떤 고난은 우리의 죄나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하지만, 우리의 잘못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고난도 있다(많다). 둘째, 이 사실을 무시할 때 억울하게 고난 당하는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오해를 하게 된다. 셋째, 무고한 자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이 선하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의 제한적인 이해력을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로 소개된다(2:3; 1:1). 이 표현은 사탄과의 대화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 속에 들어있다. 사탄은 천상의 법정에서 일종의 검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사탄은 아직은 유대 묵시문학이나 신약성서가 묘사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목적에 대항하는 악마적 존재>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 욥기에 의하면 사탄은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 악의 신비한 관계를 이해하는 단서를 얻게 된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사탄의 꼬임에 영향을 받는 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2:3)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한 존재가 아닌가?
사탄은 신학적인 논쟁에 매우 능한 빈틈없는 정신력을 소유했다. 그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 의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잠 1:7).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 칼뱅은 종교적 두려움에는 노예적 두려움과 합당한 두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리는 벌을 무서워하지만 참된 신자는 벌보다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노예적 두려움은 자신을 위한 두려움이다. 합당한 두려움은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이다. James M. Gustafson은 “공리주의적 종교(utilitarian religion)”와 “신본주의적 경건 (theocentric piety)”을 구분했다. 전자의 경우에는 인간에게 어떤 유익을 주느냐에 따라 종교를 평가한다. 후자는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같은 취지로 욥은 그의 아내가 그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했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2:10) 이 모든 견해가 공통으로 던지는 질문은 종교라는 형식에 왜 집착하는가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떠나서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없나?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종교였다. 기독교는 질병, 억압, 자연재해 등을 제거하여 인간의 복지를 증진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우주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한 다른 생명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길 것인가? 하나님이 세계를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나? 하나님은 인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성취하도록 세상을 지으셨나?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지은 목적은 인간의 행복은 아니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구원에 관한 관심은 창조된 세계 속에서 인간의 자리에 관한 적절한 고찰과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욥은 <하나님 중심적인 경건과 신앙>의 모범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가 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욥은 그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다”(2:3). 그는 보상을 바라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불행에 대해 불평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에게 닥친 극도의 불행 때문에 욥도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탄식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도 정당한 것이다. 더 상황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의 “친구”들이 <욥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이런 불행이 그에게 닥쳤을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난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하나님은 욥의 의를 인정하셨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고난이 항상 죄의 결과가 아니고, 선한 삶이 항상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난다: “하나님은 나에게 진 빚이 없다.” 욥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은 자신을 위한 보상과 상관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것이 욥이 보여주는 믿음의 모범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지혜이다.
Paul E. Capetz, Associate Professor of Historical Theology
United Theological Seminary of the Twin Cities, New Brighton, Minnesota
'홈지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No opportunity is useless (0) | 2019.02.13 |
---|---|
이용도목사의 생애 요약 (0) | 2019.02.03 |
존 스토트의 성령론 (0) | 2019.01.24 |
행동하는 신학 (0) | 2019.01.24 |
하나님의 의 -공정 (0) | 2019.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