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宗敎哲學과 基督敎의 理解
A Study of Kant's Philosophy of Religion and Christianity
宋炅昊
(Soung, Kyoung Ho)
서원대학교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부교수
2-024-9701-16
pp.361-389
칸트의 宗敎哲學과 基督敎의 理解A Study of Kant's Philosophy of Religion and Christianity
宋炅昊 (인문과학연구, Vol.6 No.-, [1997])
1.들어가는 말
일반적으로 칸트의 종교철학을 논할 때 이성신학, 도덕신학, 이성신앙, 이성종교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있다. 칸트가 성장했던 과정이나 철학자로서 생활했던 배경을 보면 기독교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의 始終이 종교적인 물음을 떠날 수 없었고, 그 종교철학의 내용들이 신학적인 내용, 특히 기독교를 중심으로 하여 이를 이해하고 반성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칸트의 종교철학 자체를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철학적인 변호로서의 신학이나 종교로 파악할 수 있는 소지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칸트의 종교철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그의 종교철학을 확대 해석하거나 아니면 계몽주의 시대 안에서의 비판철학과 그의 대상으로서의 종교와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은 결과가 아닌가 한다. 과학에대한 철학적 사고가 과학철학이고 예술에 관한 철학적인 사고가 예술철학이듯이 종교철학은 종교에 대한 철학적인 사고로 한정되어 인식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칸트의 종교철학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가질 때 있을 수 있는 비판적 요구가 불필요하게 되겠고, 또 기독교적인 정신과 생활의 영향을 떠날 수 없었던 칸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이성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이성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중세의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아누스는 208년에 『De Carne Christi』라는 글의 제3장에서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는 철학이나 이성에 대해서 종교나 계시의 초월성에 관한 구분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러나 불합리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믿을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 많은 종교들이 저마다 절대적임을 주장해 왔고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 독특성을 가지고 유지되어 왔다. 따라서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듯이, 하나의 종교가 다른 종교 보다도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교들이 가진 독특성이 곧 절대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칸트철학에서 자기비판의 성찰이 근간을 이루는 이성적 반성은 바람직한 종교, 보편적인 종교의 모습을 정립하기 위하여 종교의 영역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다.
철학은 철학 자체의 한계를 반성한다. 철학이 그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을 때 건전해질 수 있으며, 한계를 망각한 철학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종교는 종교에 대한 철학적 지식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쉽게 잊을 수 있는 종교의 망상은 무슨 방법으로 반성될 수 있을까. 칸트는 이성적 비판을 통하여 보편적 종교의 구상을 가진다. 그러나 한계를 가진 철학이 그 以上의 外延을 가지는 종교의 모든 내용을 반성할 수는 없겠다. 다만 이성적 존재이면서 종교적 존재인 인간이 이성의 한계 내에서 그들의 종교가 현세의 도덕적인 삶을 무시한 광신적 종교이거나 사이비 종교의 망상에 빠지지 않도록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일을 촉구하는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그 극복의 길을 종교에서 구할 수 밖에 없을 때, 그리고 그러한 종교가 인간에게 불가피한 것일 때, 이성의 비판영역도 유한하고 제한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이성의 유한성을 면할 도리가 없게 된다. 이것이 칸트의 비판철학, 이성철학이 종교의 문제를 다룰 때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칸트의 종교에 관한 논의는 신학이나 신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형적인 종교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 까. 전형적인 철학자로서 이렇다할 신앙을 가지지 않았고, 종교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던 칸트에게서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을 기대하는 일은 근본에 맞지 않다고 하겠다. 칸트는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이성의 유한성을 비판적으로 자각하고 그러한 유한성의 한계 안에서 最善을 추구하는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유의해야 될 것은 이러한 의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칸트는 순수이성의 근원으로부터 유래되는 도덕적 이성신앙의 가능성을 기독교의 역사적 교회신앙을 매개로 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프로테스탄트의 철학자로 해석되기도 한다. 1)
본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철학자 칸트의 종교철학을 정리하고 칸트의 이러한 철학이 기독교와 그의 신앙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칸트철학에서 종교철학의 意義
칸트철학 전체의 構圖내에서 그의 종교철학이 차지하는 위치나 의의가 어떠한가. 이에 대한 칸트연구가들의 의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칸트의 저작들 가운데 종교철학의 내용이 적극적으로 전개되는 저작은 잘 알려져있는 바와 같이 1793년에 발간된 『오직 이성만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βen Vernunft, 이하에서는 『종교철학』으로 표기함)이다. 그러나 이 저작에 나타난 종교철학적 내용들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칸트의 주저로 알려진 三大비판서의 정초작업이 선행되어져서 가능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진 일이다. 따라서 칸트철학 전반에 걸쳐 어떠한 형식으로든 종교의 근원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는데, 과연 칸트는 어떠한 뜻과 의도를 가지고 종교철학을 정립시켰는지, 그리고 그의 全哲學에서 종교철학의 위치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일은 칸트의 의식 속에서 종교 즉 기독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칸트철학 전체에서 『종교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 노악(H. Noack)은 三大 비판서와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까닭은 먼저 그것이 형식상으로나 방법적으로 三大 비판서만큼 엄밀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내용상에 있어서도 그의 종교철학의 기본사상이 완전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아울러 三大 비판서에 나타난 超越論的 철학에서의 종교관의 기초를 전제함으로서, 특히 『판단력비판』에서 도덕신학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고려함으로서만, 비로소 『종교철학』에서 전개된 내용들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고 있다. 2) 그러나 하이덱거(M. Heidegger)는 그의 한 논문에서 「신이 존재한다」(Gott ist)라는 명제가 칸트의 全哲學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바늘(Stachel)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3) 같은 입장에서 피이트(G. Picht)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정말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의 가능성, 의미, 한계에의 물음이 칸트에 있어 그 사유의 내적인 動因이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해설되고 있는 것 처럼, 칸트의 종교철학은 ……그의 전철학의 부록이 아니라 三大 비판서의 종합으로서의 종교철학이라고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오히려, 칸트철학은 전체로서든 또 모든 개개의 부분에서든 종교철학 이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것이다.” 4)
칸트철학 전체에서 종교철학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칸트는 항상 동일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해석하는 주체의 입장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 뿐이다. 이것은 곧 해석의 주체가 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칸트에게 기대하는 바가 다른데 기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철학의 眞意를 파악하고자 하는자들의 노력들은 저마다의 논리를 가지고 지속되고 있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위의 대립된 해석의 논의를 유보하고 칸트의 입장을 먼저 정리하고자 한다.
종교철학의 핵심문제는 神의 문제이다. 칸트가 신에 관하여 언급하고 문제삼는 것은 그의 전 철학에 걸쳐서이다. 3비판서 가운데 제1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는 제1권 초월론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의 제2편 초월론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의 제3장 순수이성의 이상 (Das Ideal der reinen Vernunft)에서, 그리고 제2권 초월론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odenlehre)의 제2장 제2절의 순수이성의 최후목적의 규정근거인 최고선의 이상에 관하여(Von dem Ideal des hoesten Guts, als einem Bestimmungsgrunde des letzten Zwecks der reinen Vernunft) 5) 에서 논의된다. 그리고 제2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1788)의 제2권 순수실천이성의 변증론(Dialektik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의 제2장 5절 순수 실천이성의 要請으로서의 신존재(Das Dasein Gottes, als ein Postluat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에서, 6) 제3비판((Kritik der Urteilskraft, 1790)의 부록: 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Anhang : Methodenlehre der teleologischen Urteilskraft) 7) 에서 각기 다루어지고 있다. 이는 인간지성의 각 영역에서 그것을 빼고서는 전체를 마무리할 수 없는최후의 문제, 즉 神의 문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있겠다.
그리고 칸트가 그의 철학체계와 종교와의 관게에 대하여 논의한 것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제1비판의 最高善의 理想을 논하는 곳에서 “내 이성의 모든 관심은 (사변적 관심도 실천적 관심도) 다음의 세 물음으로 집약된다.
1.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3. 내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첫 번째 물음은 전혀 사변적이다. … 둘째 물음은 실천적이다.… 셋째 물음, 즉 내가 해야할 것을 내가 할 때에, 내가 무엇을 소망해서 좋은가 하는 물음은 실천적인 동시에 이론적이다. … 무릇 모든 소망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소망이 실천적인 것과 도덕법에 대하는 관계는, 앎과 자연법칙이 사물의 이론적 인식에 대하는 관계와 같다. 전자는 드디어 ' 그 무엇이 생겨야 하기 때문에 그 무엇(가능적 최후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 있다' 고 하는 추리에 귀착한다. 후자는, 그 무엇이 생기고 있기 때문에 그 무엇(최상의 원인으로서 작용하고 있는것)이 있다고 하는 추리에 귀착한다. 8) 라고 하여 종교론이 궁극적인 목적을 규정하는 영역으로 도덕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짐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칸트가 슈토이드린에게 보낸書間에서도 “일찌기 순수철학의 영역에서 나에게 부과된연구의 계획은 다음의 세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형이상학) 2). 나는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도덕) 3)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종교) 라는 물음으로 그 세가지 과제의 해결을 시도해 왔으며, 그것을 해결한 후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인간학; 이는 내가 20년동안 계속 강의해 왔다.)라는 최종적 과제가 이어져야할 것이다. …나는 이 서신과 함께 전하는; '한계 내에서의 종교' 에서 나의 계획의 셋째 과제를 완성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내가 著作하는데 나를 이끌어 준 것은 良心의 충성과 基督敎에 대한 참다운 존경이었는데, 그 때 나를 이끌어준 이들은 무엇이든 비밀로 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해서 기독교와 가장 순수한 실천이성과의 가능적 일치를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솔직히 말하려는데 합당한 공명정대한 원칙이었다.” 9) 고 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논리학』의 서론인 “철학 일반의 개념”에서 세계시민의 의미에서 철학의 영역은 위의 세가지 물음에 4) 인간이란 무엇인가? 가 추가 되어 네가지로 정리되며 각 물음에 형이상학, 도덕철학, 종교철학, 인간학이 해답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것은 앞서 슈토이드린에게 보낸 서간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러나 앞의 세가지 물음은 마지막 물음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 모든 물음은 인간학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10) 고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의 結論인 철학 일반에 관하여 정리한 내용 중에도 앞의 『논리학』에서 제시했던 내용과 똑 같은 주장을 한다. 네가지 문제와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을 구하는 영역, 그리고 앞의 세 문제와 네번째 문제와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11)
이상의 『순수이성비판』과 「슈토이드린에게 보낸 書簡」 그리고 『논리학』, 『형이상학에 관한 강의』 등에서 살펴본 내용은 칸트가 그의 철학에서 제기하고 있는 물음 가운데 종교의 문제와 직결되는 물음은 세 번째 물음으로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이며, 이 물음에 해답을 구하는 일이 그의 종교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번째 물음은 칸트가 근본적인 물음으로 제기한 세가지 물음 가운데 하나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마지막 물음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부분적인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칸트가 생각했던 것 가운데 중요한 점은 기독교의 신앙내용과 순수한 실천이성에 따르는 도덕성이 과연 일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칸트는 인간의 근원적인 이해를 위해서 세가지 물음을 제기하고 그 각각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의 주요한 저작들을 통해서 철학의 방대한 체계를 세우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은 궁극적으로 마지막 물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서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상적인 도덕적 인격을 목표로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면 세 번째 문제와 나머지 다른 두 문제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우선 첫 번째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종교의 근본적인 전제인 神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또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칸트는 여기서 이론이성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 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증명할수 없다고 한다. 다만 “신앙에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지식을 제한해야만 했다.” 12) 고 말한다. 이 말은 비록 인식의 세계에서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존재에 있어서 神에 대한 신앙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자리는 결코 현상의 세계에 마련될 수 없고, 이를 위해서는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叡智의 세계를 별도로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상계에는 사실만이 존재하고 사실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물음인 실천적 과제에 있어서, 칸트는 인간의 도덕성의 실현에 있어 최고의 목적인 “最高善(das h?chste Gut)” 13) 을 위한 필연적 제약으로서 “영혼의 불명성”, “신의 현존재”를 “순수한 실천이성의 요청으로서(Als ein Postulat der reinen praktischen Vernunft)”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도덕법칙은 순수실천이성의 대상으로서, 또 궁극목적으로서 최고선의 개념을 매개로 종교의 영역으로 이끌어 가는데, 이는 우리에게 일체의 도덕적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하여 실천적인 물음에서 네 번째 종교의 물음으로 이행하여 나는 무엇을 소망할 수 있는가의 해답을 추구해 간다. 이의 내용은 『종교철학』에 전개되는데 총 4권의 연관되는 논문으로 정리된다.
제1권은 “善의 원리와 함께 내재하는 惡의 원리에 관하여 ; 또는 인간의 본성안에 있는 根本惡에 관하여” 14) 라는 표제가 있는데, 여기서 칸트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도덕률을 실천하고자 하는 동기 이외에 이에 역행하는 악에의 성향이 뿌리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깊이 통찰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의 교리가운데 原罪論에 해당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제 2권은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서 싸우는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 사이의 투쟁에 관하여”라는 표제가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의 내부에 악의 원리를 제압하려는 선의 원리의 싸움의 과정을 논한다. 여기서 선의 원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인간에게 확신시켜주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선의 원리가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인격으로 변화 되어진 이념으로서 예수그리스도에 관해 설명한다. 즉 基督論의 내용이다. 제3권은 “악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의 승리와 地上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표제로 되어있다. 여기서는 도덕률을 준수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들의 공동체 형성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선의 원리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과제가 되는데 이는 기독교의 敎會論의 내용이 된다. 끝으로 제 4권의 표제는 “선의 원리의 지배 아래서 봉사와 거짓 봉사에 대하여, 또는 종교와 승직제도에 관하여”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함에 있어서 마땅히 갖추어야할 방식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그 내용은 기독교의 禮拜論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겠으나, 교회 공동체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상을 드러냄으로서 당시 교회를 비판하며 보편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지향할 도덕적 방향을 제시한다.
칸트는 그의 『종교철학』에서 자신의 도덕적 이성신앙의 본질을 기독교의 계시신앙을 통하여 밝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의 전통적 신앙내용들이 소재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철학적 의도가 바르게 이해되지 못하고 신학적이고 護敎論적인 저작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종교철학』은 신학이 아니라 내용적으로 종교철학 그 자체로서 그의 도덕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의 의도는 기독교의 신앙내용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기독교의 계시신앙과는 다른 근거를 가지는 도덕적 이성신앙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기독교의 역사적 교회신앙을 매개로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하려는데 있었다고 하겠다. 칸트의 『종교철학』에서 철학적인 그의 노력을 신학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서로 구별되어야할 두 영역이 혼동되어지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제1판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聖書神學의 전문수업이 끝난 뒤에는 항상 이 책과 같을 것을 (………)을 지침서로 하는 순수한 종교철학에 관한 특별강좌를 하나 더 졸업시험의 지원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준비로서 최후에 부가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5) 라고.
여기서 칸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종교와 신학과는 별도의 영역에서 그들에 유익한 일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저 작의 네 논문을 전개하기에 앞서 각 편의 공통적인 제목으로 “철학적 종교론( Der philosophischen Religionslehre)” 16) 이라는 표시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칸트의 종교론이 전통적인 신학의 성질을 가진 내용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철학적 고찰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의도한 종교론은 종교에 관한 역사적 경험적 고찰이 아니라, 종교 일반의 본질과 그 가능성에 대한 순수이성의 고찰이며, 철학적 종교론 즉 종교철학인 것이다. 인간 이성의 한계 안에서 칸트는 도덕과 종교, 철학과 신학의 경계선에 서서 두 영역의 상호 고유한 경계를 혼동하지 않고 두 영역간의 밀접한 관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知的 모험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면 칸트가 제시하는 철학적 종교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3.종교철학의 내용과 특성
『종교철학』은 네 개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악한 소질과 선한 소질에 근거해서 인간과 종교와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논문은 1792년 4월 『베를린 월간』에(in der Berlinischen Monatschrift) 이미 발표된 것이었으나 다음의 세 논문들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에 뺄 수 없었다고 말한다. 17) 칸트는 여기서 그의 3비판서 가운데, 특히 『제2비판』에서 인간성에 관하여 논할 때, 긍정적인 인간 이해의 입장에서 인간의 자연적 성향을 傾向性으로 표현하던 것과는 달리 『종교철학』에서는 이것을 根本惡으로 표현하고 그 영향을 떠날 수 없는 인간의 부정적 이해의 방향으로 그 입장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표현과 입장의 변화는 여러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성향이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일면이라고 할 때, 그의 극복을 위한 면밀한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칸트철학의 이해에 상당히 큰 의미를 가진다. 그의 『제2비판』에서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성적인 존재로 파악된다. 그리고 도덕적 이상으로서 最高善의 이념이 제시되며 이의 실현 가능성을 위하여 자유, 영혼불멸, 신의 존재가 요청되었다. 즉, “도덕법칙은 순수실천이성의 대상 및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최고선을 통해 종교에 도달한다. 종교는 모든 의무를 신의 명령으로서 인식한다. ………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전(신성하고 인자한)한 것과 동시에 전능한 의지에 의해서만 …최고선의 달성을 희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8)
그리고 그의 『제1비판』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도덕법을 戒名(Gebote)이라고 보거니와, 그러나 이 계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만일 선천적으로 적합한 결과를 그 규칙과 결부시키지 못한다면, 따라서 확약과 위협(당근과 채찍; Verheissungen und Drohungen)을 동반하지 않으면 결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법은, 그것이 만일 이러한 합목적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최고선으로서의 필연적 존재자(einem notwendigen Wesen )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확약하거나 위협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19) 라고 한다. 이것은 칸트가 도덕법칙을 정언명령으로 파악했을 때 그것은 확약과 위협을 동반하고 있으며,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언명령 즉 실재적인 의미의 확약과 위협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필연적 존재자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법칙이 필연적 존재자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 존재자 즉 신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종교의 문제는 최고선의 구현을 위한 도덕법칙을 신의 명령으로 인정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칸트는 실재로 도덕법칙을 인격성을 소유한 神의 명령으로 인정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도덕적 이상을 위한 한갖 理念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1)선과 악의 두 원리
『종교철학』의 제 1권은 善과 惡의 두 원리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선에 관한 논의는 소 부분이며, 악의 논의가 내용에 있어서나 분량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진다. 우선 칸트는 선의 근원적 素質( die Anlage zum Guten )에 대하여 말하는데, 생물로서 인간의 동물성,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성,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격성을 들고 있다. 20) 이러한 소질들 가운데 선에의 적극적인 소질은 책임질 수 있는 존재( der Zurechnung f?higen Wesens )로서의 인격성( Pers?nlichkeit )의 소질이라고 하겠다. 칸트는 이를 정의하여 “그 자체에 있어서 선택의지의 충분한 동기가 되는 도덕법칙을 존경하는 感應力( Empf?nglichkeit)” 21) 이라고 한다. 이러한 선의 원리가 기초가 되어 실천이성의 최고 이상인 최고선을 생각하며 그의 실현 기반을 구상할 때는, 善意志가 근간이 되어질 수 있고 선의지가 바탕이 되어 그 적극적 실현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또 다른 부정적 소질의 가능성이 드러날 때 이러한 이상의 완전한 실현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칸트는 악의 원리에 대해 “인간 본성안에 있는 악의 성향에 대하여(Von dem Hange zum B?sen in der menschlichen Natur)” 22) 라는 장에서 ' 악의 성향' 이라는 표현을 하여 앞에서의 '선의 소질'과 구별하고 있다. 이 양자는 생득적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지만, ' 악의 성향'은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의지에 따라 자기에게 초래한 악한 결과를 야기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인간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며 선의 소질에 敵對的이며 그것을 타락하도록 하는 힘을 가진 악한 인간성인 것이다. 이러한 악한 성향에 지배되어 도덕률을 격률로 채택할 수 없게 된 인간의 마음을 악한 마음(ein b?ses Herz)이라고 하고 칸트는 여기에 근거가 되는 세가지 단계를 구분한다. 첫째는 인간적 심정의 연약함 또는 본성의 허약성(die Gebrechlichkeit, fragilitas ), 둘째는 비도덕적 동기들과 도덕적 동기들을 혼합시키려는 경향의 불순성( die Unlauterkeit, impuritas, improbitas), 셋째는 악한 격률을 채택하려는 사악성(die B?sartigkeit, vitiositas, pravtas)이 그것이다. 23)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허약성' 은 도덕률에 따른 격률을 구성하려는 뜻이 있어도 의지가 강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동기에 지배당함을 의미한다. '불순성' 은 도덕률의 동기작용 만으로 격률을 구성하지 못하고 감각적 이고 경험적인 동기를 혼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 사악성' 은 동기 작용에서 도덕적 질서를 顚倒하고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동기의 측면을 도덕률보다 존중하여 격률을 구성한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처음 두 단계는 감성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에 불가피한 제한으로서 인간을 자연법칙적 인과성의 구속에 빠지도록 하는 경향성에 가까운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덕적 자유를 확립하는 방법을 배우고 반성적 기회를 갖게 하는데 도덕철학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인 ' 邪惡性' 은 보다 적극적인 악의 성향을 가진다. 여기에 초험적 자유가 아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의지 즉 恣意(Willk?r)가 행위의 동기작용을 역전 시켜서 감성적 동기를 적극적으로 취하는 성질이 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칸트는 이를 고의적인 죄악( vors?tzlich Schuld, dolus ) 24) 이라고 까지 부른다.
이러한 사악성은 인간의 본성과 깊이 얽혀 있는 것으로, 전 인류적인 보편성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악에의 성향은 본성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그 지배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한다. 칸트는 근본악의 여러 특성들을 제시한다. 그 하나가 根本惡은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성향으로 생득적이며 전 인류에 타당한 것이다. 25) 그리고 또 근본악이란 인간의 선과 악의 차이가 인간이 자기의 격률 속에 채용하는 격률의 實質로서의 동기에 차이가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도덕법칙과 감성적 自愛의 원리 가운데 어느 것을 다른 것의 조건으로 종속시키는 종속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26) 이것이 근본악에 의한 도덕적 질서의 전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근본악은 그것이 모든 격률의 근거를 부패시키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根絶하는 일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근절은 선한 격률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는데, 모든 격률의 주관적 근거가 부패해 있다면 다시 도덕률을 채택하는 逆轉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에의 성향이 자유롭게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므로 그의 극복은 가능한 것이다(zu ?berwiegen m?glich sein.)” 27) 고 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속에 어떻게 선에의 소질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일까. 선으로 역전의 가능성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不可思議한 것일 뿐이다. 『종교철학』에 있어서 칸트의 신존재의 증명은 선에로의 역전가능성이 근본악의 사실 때문에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 즉 “우리의 영혼속에 울려퍼지는” 명령, 즉 “우리는 보다 더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28) 고 명령하는 도덕법칙의 의식속에 내포된 역설적인 이율배반을 해결해야 하는 시도와 필연적인 관련을 가지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도덕법칙의 무제약적인 정언명령은 불가해한 초월적 근거에서 나오는 것으로 밖에는 이해할 도리가 없다. 칸트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이고 도덕적인 소질 일반” 29) 은 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밖에 생각할 도리가 없는 불가해한 숭고한 소질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신의 존재는 근본악의 극복 불가능한 한계상황에서도 정언명령의 불가해한 초월적 근거로 도덕적 인격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의 실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근본악의 현실 안에서 도덕법의 정언적 명령은 그것이 불가해한 방식으로 인간 안에 주어진 신의 명령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무제약성을 최종적인 기반으로 삼고 있는 칸트의 도덕은 근본악 사상의 맥락에서도 역시 불가피하게 신의 존재를 요청해야 하는 종교의 차원과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칸트는 근본악의 극복 가능성을 논하기 앞서 인간의 본성에 있는 악의 근원이라는 과제를 통해 그 본질이 무엇이며, 또 이러한 입장에서 기독교의 원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논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에 있어 악의 근원을 문제 삼을 때 그것은 시간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행위의 결과가 도덕적으로 악인 경우에는 그 원인이 자유의 법칙과 결부되어 있고, 그래서 그 규정 근거는 이성표상(Vernunftvorsterung)에서 구해야 하며 시간적인 선행상태에서는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30)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의 조상으로서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부터 인간의 타락사실에 있어서, 악의 근원을 역사로서 기술하고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를 악의 근원으로 제시한다. 이 죄는 “신의 명령으로서 도덕법칙의 위반을 의미한다(worunter die ?bertretung des moralischen Gesetzes als g?ttlichen Gevots verstanden wird)” 31) 죄를 짓기 이전에 인간은 무죄의 상태였는데 아담의 이 명령위반이 곧 인간의 타락(S?ndenfall)의 시초가 되며, 이 타락은 인간의 죄악의 시간적 근원이 된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와야 하는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는 그 어떤 시간적 근원의 추구도 합당한 것일 수 없다. 이성적 근원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악의 원천을 칸트는 구명할수 없다고 말한다. 근본악의 규정근거는 분명히 自由意志 이지만 자유의지의 어떠한 규정근거도 우리는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칸트는 인간의 능력 즉, 이성의 한계를 의식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따라서 구약성경에서의 원죄설은, 도덕적 이성신앙의 입장에서는 근본악의 궁극적인 구명이 불가능하다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상징화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근본악의 구명과 근절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근본악이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유래하는 도덕적 질서의 動機顚倒라고 한다면 “아직도 선한 의지를 소유한 인간에게는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또 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Hoffung einer Wiederkeher zu dem Guten) 남겨져 있는 것이다.” 32) 이러한 희망이 현실화 될 가능성은 “악한 나무가 어떻게 하여 선한 과실을 을수 있는가” 33) 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속에 우리가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울림이 지속하는 한 우리는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노력을 시도함으로서 보다 고차적인 도움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 즉 신의 뜻에 적합한 인간이 되는 것은 점진적인 개혁으로는 불가능하며 “심정에서의 혁명(Revolution in der Gesinnung)” 34) 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러한 심정의 근원적 변화에 의해서 악한 인간이 선한 인간으로 거듭남(Wiedergeburt)이 가능한 것이다.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의 거듭남이 인간의 힘으로 어디까지 가능할까. 칸트는 이와 관련하여 종교를 두 유형으로 나눈다. 자연적 무능력을 구실로 도덕적 무위 밑에서 제사 등의 외적인 일만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 은총(der Gunstbewerbung)을 구하는 종교' 와, 자기의 힘을 다 하고 선의 근원적 소질을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이용하는 경우에만 자기능력 속에 없는 것이 고차적인 협력에 의해서 보충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도덕적(die moralische)종교'가 그것이다. 35) 칸트는 모든 종교들 가운데서 기독교 만이 이러한 도덕적 종교라고 하고, 여기서는 은총을 받기 위해서 무엇을 행하여서는 안되고, 신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하여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가를 알아야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은총 즉, 초자연적인 도덕적 영향에 관하여, 그것은 인식 되지는 않지만 자기의 도덕적 무능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일종의 신앙에 의하여 예상할 수 있는 것 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을 지식으로서의 “독단적 신앙”에 대하여 “반성적 신앙” 36) 이라고 부른다.
『제2비판』에서 칸트는 순수실천이성의 필연적 대상으로 상정된 최고선의 실현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의 존재를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철학』에서 제기되는 근본악의 극복을 위한 신의 요청은 최고선을 매개로 하는 요청에서 결여된 실존적인 의미와 신앙주체의 力動的 존재구조의 심층을 파악하게 해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칸트의 신존재 요청은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인간본질의 도덕적 규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칸트의 신존재 증명은 도덕성의 추구에서만 종교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로 절대화 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관점은 도덕적 존재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결단한 능력있는 사람들에게만 타당하며 주관적 필연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인격화된 이념에 대한 이성신앙
이상에서 칸트는 근본악을 통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격존재의 도덕적 한계상황을 심층적으로 분석해주었다. 이어 두번째 논문에서 근본악의 생래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인격이 어떻게 하여 그의 선한 본성을 순수하고 완전한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도덕적 자기실현의 문제와 관련해서 도덕적 인격과 신 사이에 불가피한 관계를 정립한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지 인간 안에 내재하는 선의 종자가 장애 없이 잘 발전하도록 하느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선과 대립하여 작용하는 악의 원인을 정복하지 않으면 않된다.” 37) 고 칸트는 말한다. 근본악이란 도덕법칙에 위반되는 격률을 채택하려는 인간 본성에 생득적인, 그러면서도 우리 자신이 스스로 초래한 악의 성향이다. 그러면 이러한 근본악을 정복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도덕법칙에 내재하는 신의 아들의 이념에 의해서 조력을 받아 가능한 “심정의 혁명(eine Revolution in der Gesinnung im Menschen)” 38) 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신의 아들이란 도덕적 완전성 즉, 성스러움을 몸으로 내보인 자다. 성스러움이란 도덕법칙과 완전한 일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신의 아들에 있어서 도덕법칙은 이미 당위법칙(Sollensgesetz)이 아니고 존재법칙(Seinsgesetz)인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 안에서 (Im praktischen Glauben an diesen Sohn Gottes)(그가 인간의 본성을 취하였다고 생각되는 한에서) 인간은 신의 뜻에 합당하게 되기를(그를 통해서 또한 축복 받기를) 소망할 수 있다.” 39) 고.
칸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성 안에 있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성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구현한 실재요, 그는 곧 신의 아들이요, 이성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완전한 인간성의 原形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중심이되는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이성 안에 있는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성의 이념을 향하여 노력하는 이성신앙과 내용적으로 일치한다고 칸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구현된 도덕적 인격이 곧 선의 실현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유한하고 墮落한 인간의 모습에서 드러나는 극복 불가능한 한계 상황에 부 힐 때, 불가피하게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신의 존재를 요청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 칸트는 세 가지 측면을 설명한다.
우선 “법칙은 '너의 아버지가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너의 행실에 있어서)' 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모범으로 제시된 신의 아들의 理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에게 작용시켜야 할 선과 , 우리가 거기서 부터 빠져나와야 한는 악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며, 행위에 관한 한 즉, 법칙의 거룩함에 대한 행위의 합당함에 관한 한 그 이상은 언제 까지나 도달 불가능한 것이다.” 40) 인간의 한계상황은 완전한 도덕적 인격의 이념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절망에 빠지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이념의 실현은 의무이기 때문에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도덕적 인격의 역설적인 곤경은 초인간적 해결의 길을 모색하게 한다. “즉 결함을 가지고 있는 선에서 보다 더 나은 선에로 무한히 전진하는 행위는……그 지속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존재가 어느 순간에 단절되어 버린다 하더라도 신의 마음에 드는 인간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 41) 는 것이다.
다음으로, 칸트는 도덕적인 행복에 관하여 말하는데, 도덕적인 행복( die moralische Gl?ckseligkeit) 42) 이란 선을 향하여 항상 전진하는 태도의 현실성과 지속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과연 어느정도 까지 선을 향한 지속적인 태도를 보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며, 또한 자기 내면의 태도가 과연 순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기 어려운 존재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생활을 반성하여 그것으로 부터의 간접적인 추측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선한 동기의 확고함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선을 향한 지속적인 전진이 가능함을 “이성적인 방법으로 희망할 수 있다(kann doch auch vernunftweise hoffen)” 43) 고 칸트는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선한 심성의 채택으로 인하여 그에게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 간에, 그리고 더욱이 그가 아무리 지속적으로 선한 심성 안에서 그 심성에 합치하는 행위를 계속 하였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악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44) 인간이면 누구나 아무리 도덕적 선행을 추구해왔다고 하더라도 완전자 즉 신의 義로움 앞에서는 그 행실 전체가 판정을 받을 때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장에서 살폈듯이 근본악에 유래한 것인데, 그것으로부터 인간은 가장 개인적인 책임, 즉 벌받을 그 사람 만이 질머질 수 있는 죄의 책임(eine S?ndenschuld)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적인 선의 추구에 고뇌와 희생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칸트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선의 주체가 탄생하는데 수반되는 고통과 희생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代贖은 도덕적인 수행에 수반하는 고통과 희생을 도덕적인 선의 실현을 위한 십자가로 알고 받아들일 때, 죄의 책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상징인 것이다.
여기서 칸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죄인은 그의 죄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義人으로 인정될 수있다고 하는 기독교 신앙의 義認의 이념(der Idee einer Rechtfertigung) 45) 에 근거를 두고 심성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 분이 스스로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또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대리자(Stellvertreter)로서는 죄의 책임을 짊어지고, 구속자(Erl?ser)로서는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최고의 의를 충분히 실현하는 것이며, 또한 변호자(Sachverwalter)로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인정받은 자로서 그들의 재판관 앞에 설 것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하여 주는 것이다.” 46) 그러나 도덕적 인격이 선의 이념에 의지하는 그의 믿음을 통해서 자기의 죄의 책임 의식을 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순전히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은혜로운 심판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칸트는 말한다. 인간은 신을 직접 인식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의무이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이성의 정언명령 앞에서 그의 투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도덕적 인간은 이성적인 방식으로 신의 慈悲와 義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철학에서의 도덕적 인격은 자기 자신의 역사적 唯一回的인 고유한 운명에 관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존재 일반에 공통된 보편적인 인간의 본성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법칙성을 넘어서는 개체 실존의 보편화가 불가능한 구체적 사실의 세계를 의식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도덕적 인격은 도덕적인 한계상황과 대결하는 본래적 자기확신 속에서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의 현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뿐이지 그 신비속에 스스로 참여하고 침잠하는 단계에 까지는 도달할 수 없다. 도덕적 인격은 어디 까지나 이성의 한계 안에서만 신과 관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함 점들을 고려할 때, 칸트의 종교철학 즉, 이성종교가 계시종교 즉 역사종교에서 이성의 한계를 넘는 비 이성적 신비의 차원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의 신의 존재는 다만 인간과 그의 도덕적 이념과의 관계를 보다 효과적이게 하는 補佐役에 불과하다. 이러한 종교철학의 신관은 기독교의 기독론과 속죄론의 해석에 있어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방식 그대로 반영하여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단지 우리 안에 있는 선의 이념 또는 도덕적 인격의 이념의 현상적 도식으로서 모방을 위한 원형(Urbilde)으로서만 타당한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결국 인간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인도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 안에 내재하는 완전한 “선의 원리의 인격화된 이념(personifizierte Idee des guten Prinzips)” 47) 에게로 인도할 뿐이다.
3)윤리적 공동체와 교회
칸트는 그의 『종교철학』의 세 번째 논문에서 “악의 원리에 대한 선의 원리의 승리 및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Der Sieg des gutten Prinzips ?ber das B?se, und die Grundung eins Reichs G?ttes)” 48) 이라는 주제로 윤리적 공동체의 이념에 관한 논의를 한다.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 최고선을 실행해야 하는 의무 이외에도, 개개의 도덕적 인격이 동일한 목적 밑에서 상호협동하는 윤리적 공동체의 건설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도덕법의 지배 밑에서 모든 인류를 결합시키는 보편적 윤리적 공동체 안에서만 개개인의 도덕적 인격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윤리적 공동체가 윤리적 법칙 밑에 있는 '신의 백성이라는 개념'(der Begriff von einem Volke Gottes) 49) 이다.
칸트는 개인 각자들의 내면적인 자각성과 성실성을 강조 하면서도 개인의 도덕적 자기실현의 가능성의 기본조건으로서, 윤리적 인륜공동체의 건설을 요구하는데 그 이유는 “법률적 자연상태 (der juridische Naturzustande) 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인 것 처럼, 윤리적 자연상태( der etische Naturzustande ) 는 모든 인간에 내재하는 악에 의해 끊임 없이 도전받는 상태( ein Zustande der unaufh?rliche Befehdung )인 것이다.……자연적 인간은 가능한 한 속히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 50)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은 일종의 독특한 의무, 즉 인간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아니라, 인류 그 자체에 대한 인류의 의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이성적 존재는 객관적으로는 이성의 이념 안에서 어떤 공동체적 목적을 향하여, 즉 공동체적 선으로서의 최고선을 촉진하도록 규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에서 칸트의 윤리적 입장은 단순히 개인적인 윤리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인 선의 촉진을 위해 도덕법의 지배 밑에서 전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보편적 공화국으로서의 윤리적 공동체는 신의 왕국으로 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외적인 행위의 適法性 만을 목표로 하는 법률적 공동체와는 달리 윤리적 공동체는 내적인 행위의 도덕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특성을 가지는 윤리적 공동체에 합당한 “그러한 입법자는 각 개인의 마음의 가장 깊은 내부를 통찰하고 모든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바와 같이, 그의 행위에 합당한 대가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통찰자( ein Herzensk?ndiger) 가 아니면 안된다. 그런데 이같은 존재는 도덕적 세계통치자로서 신의 개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공동체는 신의 명령( g?ttlichen Geboten ) 밑에 있는 백성, 즉 신의 백성이면서 그와 동시에 또한 덕의 법칙에 따르는 백성으로만 생각될 수 있다” 51) 고 칸트는 말한다. 윤리적 공동체 안에서 최고선이라는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개인들의 활동을 도덕적 의무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최고선을 지향하는 도덕적 의무가 신의 명령이라고 표상될 수밖에 없는 지배자요 입법자인 신의 존재가 요청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신의 명령을 따르는 윤리적 공동체의 이념을 통하여 도덕법칙과 신의 존재는 어느 곳에서 보다도 더 자유스럽게 연결이 된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윤리적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원리요, 명령자로서 신의 이념이 이성적으로 확인되고, 이에 의하여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당위성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어 진다. 그리고 칸트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념이 이미 지상에서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교회의 형식 안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다고 믿는다. “신적인 도덕법칙 밑에 있는 윤리적 공동체(Ein ethisches gemeines Wesen)는 교회다. 교회는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 존재할 때 불가시적 교회 ( die unsichtbare Kirche ) ( 신의 직접적 도덕적 세계 통치 밑에 있는 모든 의로운 인간들의 연합체의 단순한 이념으로서, 이것은 인간에 의하여 설립되어야 할 것의 원형(Urbilde)으로서 봉사한다) 라고 불리운다. 가시적 교회는(Die sichtbare Kirche) 같은 이상과 합치하는 전체를 지향하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결합이다..” 52) 따라서 역사적 교회의 신앙은 신국의 이념에 일치하는 순수한 종교신앙의 본질인 내면적 도덕성의 강화와 완성을 돕기 위한 것으로 칸트는 생각하고, 시간과 공간에 제약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는 역사적 종교의 계시신앙을 도덕종교 즉 이성종교로서의 본래적인 본질에로 변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칸트의 『종교철학』은 전체적으로 奇蹟이나 신비, 예배의식이 魔術的 효과에 강조점을 두는 비본질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신에게 봉사하는 신앙으로 타락해 버린 기독교 신앙을 참된 종교신앙으로서의 본래적인 모습의 이념을 제공하기 위한 철학적 작업이라고 하겠다.
기독교의 역사적 계시신앙을 이성적 도덕신앙의 빛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칸트의 종교철학적 과제는 신과 인간 사이의 도덕적인 도덕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기독교의 신관에서 오해되기 쉬운 擬人論을 제거하고 참으로 도덕성에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칸트는 “종교와 관련된 모든 신앙양태의 내적 특징에 관한 연구는 불가피하게 하나의 비밀(ein Geheimnis)로 알려질 수 있을 뿐 공적으로는 인식될 수 없는 즉 보편적으로 전달될 수 없는 거룩한 어떤 것( etwas Heiliges )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은 거룩한 어떤 것으로 도덕적이 아니면 안된다. 즉 이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실천적 사용을 위하여 내면적으로 충분히 인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53) 고 하여 기독교의 역사적 신앙은 순수 이성신앙에 있어서 설명 불가능한 거룩한 神秘들을 그의 신화와 상징들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주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어 칸트의 “순수한 이성적 종교신앙”에서는 불가해한 신비에 속하는 자유의 근거에의 신비, 즉 무조건적으로 도덕법칙에 의해 선택의지가 규정되는 인간의 특성에 있어서 탐구 불가능한 근거는 하나의 비밀이 되는 것이다. 54) 최고선의 실현을 도와 주는 도덕적 세계 지배자의 이념(Diese Idee eines moralischen Weltherschers)이라는 신비, 그리고 도덕적 세계 지배자라는 것 이 외에 또한 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상정할 수 있는 신의 性品의 신비 등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기독교의 의인적 신관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자비롭고 의로운 하나님,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으로 표상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은 모두가 이성신앙의 비밀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상징들로서 적절한 의미를 가진다. 칸트에 따르면 계시종교의 의인적·삼위일체적 신관은 이성신앙이 불가피하게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신의 세가지 도덕적인 성품, 즉 신성한 입법자(heiligen Gesetzgeber), 자비로은 도덕의 부양자(moralischen Versorge), 정의의 재판관(gerechten Richter) 55) 으로서의 신의 삼중의 특성들을 구체화하여 생생하게 제시하여 주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 신앙의 교리와 상징들이 이성신앙의 근본 원리들에 의하여 해석될 때, 비로소 역사적 신앙 으로서의 기독교는 그의 역사적 특수성의 한계를 뛰어 넘어 인류 전체에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는 “순수한 종교신앙(einen reinen Religionsglauben) ” 56) 신앙으로 고양됨으로서 지상에서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신국의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에 있어서 기독교의 많은 상징들을 이성신앙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그리고 해석학적 원리에 의해서 규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종교철학적 과제인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칸트의 이성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히 명제적이고 이론적인 교회의 신앙고백(das theoretische Bekenntnis des Glauben)은 교회신앙의 고전적 儀禮에 불과한 것이며, 그의 의미를 보편적인 이성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구에 집착하는 “단순한 문자적 신앙(der bloβe Buchstabenglauben)은 참된 종교적 심성(die wahre Religionsgesinnung)을 개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부패하게 하는 것이 된다.” 57)
4.기독교의 이해
칸트는 종교란 궁극적으로 도덕적 최고선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도덕적 종교이어야 한다고 보고 이를 정의하여 “이것은 敎理나 儀式(Satzungen und Observanzen)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적 의무를 신의 명령(g?ttlicher Gebote)으로서 준수하려는 심성안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58) 고 말한다. 그리고 “신앙(der Glaube; fides sacra)이란 특히 종교의 근본명제를 채택하는 것(Die Annehmung der Grunds?zte einer Religion )이라고 부른다.” 59) 이러한 입장에 근거한 이성종교가 지니는 특성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이를 계시종교와 비교하여 기독교가 지니는 의미에 대하여도 고찰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칸트는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이해는 기독교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자.
칸트는 “기독교 신앙을 한편 순수한 이성신앙(reinen Vernunftglauben)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계시신앙(Offenbarungsglauben; fides statutaria)으로서 보아야 된다. 그런데 이성신앙은 각자에 의해서 자유롭게 채용된 신앙(fides elicita)이다. 그러나 후자 즉 계시신앙은 명령된 신앙(fides impereta)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60) 고 한다. 그러나 이 양자 중 어느 것도 기독교 교회에서 그 자체 별개의 것으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두 요소 중에서 보편적 인간 이성이 기독교 신앙교리에 있어서 최고의 명령 원리로서 승인되고 존경되지 않으면 않된다. 계시된 교리(Offenbarungslehre)는 無知한 자들에게 조차도 기독교 신앙을 이해시키며, 그것을 전파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단순한 그러나 대단히 값진 수단(h?chste sch?tzbares Mittel)으로 사랑받고 배양되어야 한다. 61)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계시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성신앙에 있음이 밝혀진다. 그리고 성경이 중심적으로 敎示하는 내용도 도덕신앙이요, 따라서 모든 교회신앙은 이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칸트는 『종교철학』의 제1판 서문에서 “聖書神學의 전문수업이 끝난 뒤에는 항상 이 책과 같은 것을 지침서로 하는 순수한 종교철학에 관한 특별강좌를 하나 더 졸업시험의 지원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준비로서 최후에 부과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을까.” 62) 그리고 제2판의 서문에서는 “그러므로 啓示는 보다 좁은 신앙영역으로서의 理性宗敎를 자신 속에 포섭하는 보다 넓은 신앙영역이라고(두 개의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원으로서가 아니라 同心圓; konzentrische Kreise, 으로서)생각할 수 있다.” 63) 고 하므로서 성서와 이성은 동심원이며, 전자는 그 큰 원이며 후자는 그 작은 원이라고 비유한다. 기독교의 역사와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성경을 통하여 예수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곧 기독교가 이성종교로서의 도덕종교라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보았다. 그 하나는 “그가 가르치고자 한 것은 단지 순수한 도덕적 심성 만이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일 수 있다는 것(마태복음,5:20-48)” 64) 이며, 또 하나는 “이 같은 순수한 심정에 관하여 그 분은 그것이 또 한 행위 안에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마태복음,5:16)” 65) 이며, 마지막으로 “최후로 그 분은 모든 의무를 1) 일반적 규칙, 즉 너의 의무를 의무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 존경이라는 동기에서만 수행하라 즉 무엇 보다도 신을 사랑하라고 하는 규칙과, 2) 특수한 규칙, 즉 보편적 의무로서 타인에 대한 외적 관계로서의 규칙 즉 모든 사람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타인의 행복을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 직접적인 好意로부터 촉진하라는 규칙안에 총괄하였다.”는 것이다. 66)
이상의 내용이 칸트가 이해한 기독교의 의미,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적 원리라고 하겠다. 이러한 이해가 정당한 것인가. 성서 자체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기독교의 교리와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과연 칸트의 파악과 일치하는 것인가. 그러나 성경의 내용 중에 본 논의에 주로 해당하는 것은 신약성경이요, 그 가운데서도 오래된 바울의 서간의 내용 가운데 “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와 …”(고린도 전서, 15:3-5)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곧 信仰告白의 정형으로 이를 믿고 따름으로 救援을 얻게되는 핵심의 내용이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첫째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贖罪의 죽음의 사실, 둘째는 유한한 인간에게 永生의 소망을 갖게 하는 예수의 3일 만의 부활의 사실, 셋째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게 되는 예수의 再臨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代贖物로 주려 함이라.”(마가복음,10:45)고 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律法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로마서,3:28) 라고 한다. 성경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十字架로 상징되는 속죄의 죽음, 부활, 재림은 일체 불가분의 것으로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칸트는 이 중요한 내용에 관해서도 “이 죽음과 함께 그의 公的인 역사(die ?ffentlich Geschichte)는 끝이 났다. 여기에 부가된 것으로서, 이 보다 더 비밀의, 즉 단지 그의 측근의 눈 앞에서만 일어난 부활과 승천의(Aufestehung und Himmelfahrt)역사는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 없이 단순한 이성의 한계 안의 종교에는 적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인 설화이기 때문이 아니라……이성의 미래 신앙에 대해서는 매우 문제가 많은 하나의 개념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67) 고 한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의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 20)고 한 말씀에 대하여 칸트 자신의 해석이 보다 더 有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도들의 기록으로 전해지는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으로 그 전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根本惡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죄의식,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수의 속죄의 죽음, 즉 구속의 역사인 것이다. 부활은 속죄의 죽음의 증거이며, 재림은 속죄의 죽음을 마치고 재생한 자의 재림이다. 救贖의 죽음과 復活 그리고 再臨은 신약성경의 중심 사건이요,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다. 신약성경의 사도들의 기록이 福音이라고 일컬어 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누구든지 그 죽음을 통하여 무조건적으로 죄에서 해방될 수 있는 賠償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 구속의 사실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 사실을 외면하고 도덕적 내용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일은 기독교의 經典으로서 성경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라는 한 인간으로부터 도덕적 모범을 찾고자 하는 한 철학자의 파악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칸트가 『종교철학』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예수가 도덕적 교훈으로 그 제자들에게 설교한 山上垂訓의 내용들이 많다. 특히 제4권의 제1편 “자연종교로서의 기독교”에서 칸트는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은 이성을 기초로 하는 도덕적인 실행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순수한 도덕적인 심성을 가지고, 그로부터 파악한 도덕률은 행위 안에서 증명되어야 하며, 도덕적 의무의 입법자를 사랑해야 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도덕적 교훈은 마태복음 제5장의 중요한 내용의 요약인 것이다. 68) 특별히 칸트가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라는 구절을 강조하며, 누구라도 그를 보내신 신의 뜻을 알고 선한 행위를 통해서 신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는 자들 만이 신이 요구하는 참된 존경을 신에게 바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69) 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의도인 것이다.
칸트는 기독교가 恩寵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고 도덕종교, 즉 선한 태도의 종교, 이성종교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분은 최고 입법자를 그가 보내신 인격 안에서, 불러대거나 찬양하는 것에 의해서 행위의 결함을 보상하거나 甘言利說로 호감을 얻으려고 하는 자들로 부터 그들의 교활한 소망을 박탈한다.” 70) 고 말하고, “제사(Cultus)라고 하는 종교적 행위에 의해서 신 앞에서 義認(Rechtfertigung)에 관해서 무엇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미신(Wahn)이다.” 71) 고 함으로서 도덕적인 행위의 공덕이 없이 은혜를 구하는 자들의 태도에 강한 비판을 한다.
마태복음의 5장에 있는 예수의 설교 산상수훈은 이를 이해하는 태도나 입장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기독교를 파악하는 視覺이 결정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예수의 설교내용에 분명히 도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의 실천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칸트의 방식처럼 기독교를 도덕종교로 또는 휴머니즘으로 파악한다면 그것은 피상적이고 제한된 이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 설교의 言語的 해석을 넘어서 그것을 논하는 자의 人格性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근본을 이해하는데 미치지 못하게 된다. 예수는 신약성경 가운데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福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태복음 16:15-17) 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예수는 메시아요 그리스도이며, 실존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또 예수 자신도 그렇게 자각했던 사실을 말해 준다. 이러한 내용들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근본악이란 마치 금전상의 債務처럼(……)타인에게 위임할 수 있는 양도가 가능한 그러한 책임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개인적인 책임(die allerpers?nlichste), 즉 벌 받을 그 사람 만이 짊어질 수 있는 죄의 책임(S?ndenschuld)인 것이다. 72) 라고 하여 근본악의 본성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 있어 타자가 대신하여 죄의 책임을 지고 용서를 구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그 분이 인간을 위하여, 그를 믿는자들을 위하여 대리자로서 죄의 책임을 지고, 구속자로서 의를 실현하고, 변호자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움을 인정받은 자로서 재판관 앞에 설 것을 기대할 수 있도록 할 뿐이라는 것이다. 73) 그리고 “단지 완전한 마음의 변화(Herzens?nderung)를 전제함으로서만 죄를 짊어지고 있는 인간은 천상의 義(himmlischen Gerechitigkeit) 앞에서 용서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74) 칸트는 인간이 스스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고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전제될 때에만 속죄의 가능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聖靈이 인간에게 예수의 구속의 죽음을 인정하게 함으로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回心(Konversion), 즉거듭남(重生)이 가능하게 된다고 한다.
성경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 3) 고 말한다. 인간은 근본악의 소질 때문에 범죄하지 않을 수 없고, 이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영적 생명을 잃고, 타락한 인간 심령은 하나님의 지혜 곧 영적 세계의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잃었던 神의 세계의 분별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중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重生은 성령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구속의 죽음을 인정케함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생을 통하여 얻어진 영적인 세계의 분별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基督敎의 神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중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5.맺음말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내적인 理性의 무한성을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神적인 것이며 모든 진리의 기준이었다. 따라서 이성에 의하여 이성 이외의 모든 것을 비판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계몽주의 가운데 태어났지만 그의 비판철학은 계몽주의를 극복하여 간다. 이러한 극복은 이성의 자기 비판을 의미하며, 이러한 비판을 통하여 분명하게 된 것이 이성의 有限性의 사상이며. 이것은 곧 인간의 유한성 즉 한계의 자각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종교철학』도 자기비판의 반성과 정을 거친 이성이 그 자신의 限界內에서 종교의 문제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칸트는 제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성의 자기비판을 통하여 그의 철학의 근본 문제인 인간학의 물음을 해결해 간다. 이러한 근본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과연 종교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떠한가. 칸트의 모든 철학은 인간에 관한 근원적 물음이고, 그 물음의 해결을 위해서 다시 세가지 물음으로 나누어 그 해답을 인식론, 도덕철학, 종교철학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칸트철학의 全體構圖의 파악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우선 형식적으로도 그의 종교철학이 전체철학에서 주변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2장 '칸트철학에서 종교철학의 의의' 에서 보았던 것 처럼, 내용에 있어서도 神의 문제는 다른 두 문제에 있어서 항상 그 思惟와 문제해결의 중요한 要因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全 哲學에서도 결정적인 의미를 제공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비판철학자인 칸트가 그의 종교철학을 통하여 말하고자한 것이 무엇인가. 칸트에 있어서 종교의 문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인 最高善의 구현이라는 도덕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최고선의 실현을 촉구하기 위하여 도덕법칙을 神의 명령으로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칸트는 실재로 도덕법칙을 인격성을 소유한 신의 명령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도덕적 理想의 실현을 위한 한갖 理念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자연적 傾向性을 극복하고 도덕률을 격률로 채용하기 위하여 신의 존재를 이념으로서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철학』에 넘어 와서는 보다 더 적극적인 죄의 원천인 생득적이고 보편적인 악의 성향으로서 根本惡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같은 신의 이념을 요청한다.
칸트는 근본악의 극복은 '神의 아들'의 이념에 의한 마음의 혁명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본다. “이 신의 아들에 대한 실천적 신앙에서 인간은 신에게 아름다울 수 있도록 되기를 바라 수 있는 것이다.” 75) 우리가 신의 아들을 모범으로하여 스스로 노력하며 살아갈 때, 그 때신의 아들 자신이 우리의 부족한 것은 보완하여 준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아들이란 구체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고 이념에 불과한 존재이며, 인간이성에서 비롯된 理想인 것이다. 이 이상을 목표로 인간은 스스로 부단한 노력을 하지않으면 안된다.
인간에게는 개인적 최고선을 추구해야할 의무가 있지만 이와 함께 최고의 공동체적인 선을 실현해야할 의무도 있다고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 인류적인 차원에서의 윤리적 공동체가 건설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윤리적 공동체가 곧 신의 명령 아래 있는 '神의 百姓'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 공동체의 주권자는 백성이 아니라 입법자인 신 자신이다. 따라서 공동체의 건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사업이다. 그렇다면 주권자가 신이며 그의 사업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동체 건설의 노력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칸트는 다시 “인간은 오히려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것처럼 처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그리고 오직 이러한 조건 아래서만 그는 보다 높은 지혜가 그의 善意의 수고를 완성시켜 줄 것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76) 고 하여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전제한다.
칸트에 있어서 참다운 유일한 종교란 도덕적 종교, 이성종교를 의미한다.신의 명령, 신의 의지의 계시로서의 도덕법칙을 준수하고, 선한 태도를 가지고 도덕적 최고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만이 신의 자비에 대한 보답이고,참다운 奉仕라고 한다. “이 같은 법규적인 신앙을……신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것을 인간이 신의 호감을 얻도록하는 최고의 조건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니의 종교적 망상이며, 이것에 따르는 것은 거짓 봉사인 것이다.” 77)
그러나 칸트는 성장과정에서 특히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존경의 태도를 가지게 되고, 이러한 태도는 그의 철학 全般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구체적으로 끊임 없이 나타난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대표적인 비판 철학자로서 칸트는 기독교의 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성의 한계내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모색을 하게 되고, 그러한 의도가 그의 全哲學과 『종교철학』에 간접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제1비판』에서는 비록 假想的이기는 하지만 神의 개념이 정립되고, 『제2비판』에서는 최고선의 실현을 위해서 神의 存在가 소극적으로 요청되고, 『종교철학』에서는 기독교의 敎理와 대응하는 理性信仰의 체계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성신앙의 체계에 있어서 근본악의 사상은 기독교의 원죄론에, 신의 아들의 이념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기독론에, 그리고 신의 백성의 이념은 교회론에 대응하는 내용인 것이다. 마지막 종교와 승직제에 대한 내용은 기독교의 예배론에 대응하는 내용과 함께 당시 敎會共同體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칸트는 기독교 신앙을 이성신앙과 계시신앙이 분리될 수 없는 두 요소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 두 요소 가운데 이성이 기독교 신앙교리에 최고의 명령원리로서 승인되고 존경되어야 하며, 啓示된 교리는 기독교의 전파와 지속을 위한 귀중한 수단으로서 배양되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계시신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성신앙에 있으며, 성경이 중심적으로 敎示하는 내용도 도덕신앙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의 신앙은 이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과 이성은 同心圓이며 전자는 그 큰 원이며, 후자는 본질과 원리를 포함하는 작은 원이라는 것이다.
칸트의 이러한 기독교의 이해는 정당한 것인가. 그러나 기독교는 실제로 칸트의 이해와는 달리 존재한다. 기독교의 신앙은 성경이 그 원리가 되며, 성경의 중심을 이루는 내용은 예수의 贖罪의 죽음과 그의 復活과 또 그의 再臨이다. 물론 예수의 사랑과 자비와 궁휼과 같은 도덕적인 실천의 모범도 중요한 내용이 되지만, 이것들이 계시신앙으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을 이루지는 못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를 그의 원죄로부터 해방시키는 무조건의 배상을 의미하는 속죄의 죽음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도덕적인 이상을 보여주는, 항상 도덕법칙의 배후에 숨어서 간접적으로만 인간과 관계하는 숨어있는 신, 메마른 이념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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