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읽기
"무지의 지, 자신이 무지의 상태임을 자각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의 위험에 처하는 것, '나 이것 모릅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인지 작용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내는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며, 이 상태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앎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첫시간
"우리가 <신들의 계보>를 읽으면서 그것의 내용도 따져봐야 하지만, 종래의 철학이라는 것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들의 계보>를 읽는 이유는 이러한 우주론 안에 철학적 사색의 맹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화(뮈토스)에서 이성(로고스)로의 전환,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일단 배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강 : 우주론, 철학적 사유의 시작"구약성서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비교해보면 <신들의 계보>가 가진 특징이 드러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됩니다. 신이 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동시에 창조된 것들은 신의 뜻의 지배를 받습니다. 신이 피조물의 원리인 것입니다. 묶어서 말하면, 신은 세계의 원인이자 원리입니다. 이 신은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반면 <신들의 계보>에서 카오스는 빈 공간일 뿐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카오스가 처음에 생겨난 시초이면서 동시에 그 뒤에 이 우주에 형성되는 모든 것들이 카오스에게 일정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카오스로부터 힘을 받는다면, '카오스는 시초이면서 동시에 원리', 즉 시원(Anfand)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아닌 것 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강 : 희랍 사유에서 우주의 구조와 생성 과정
"따라서 <서양 과학 사상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교과서처럼 읽힐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냐에 따라 이 책의 내용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이 그냥 형이상학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 삼아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서술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강 : 존재의 근본 개념, 파르메니데스
"있음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운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운동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참된 누스에 의해 사유하고 분별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 주장을 플라톤이 받아들였다고 해봅시다. 플라톤의 이데아(형상)는 불변의 초월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초월적 일자를 염두에 두고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플라톤의 형상론의 이론적인 선행 모형인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누스로만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일자의 세계와 감각기관에 알려지는 거짓 세계, 두 개의 세계가 분명히 대립됩니다. 이것은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이 파르메니데스부터 시작되는 셈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4강 : 일자와 두 세계 이론,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전통적' 해석
"인간은 많은 싸움을 담은 논박 속에서 누스를 이용하여 잘 배열되어 있는 전체인 세계로부터 그럴듯한 것, 진리 닮은 것을 얻어낼 수 있고, 신은 인간에게 그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진리 닮은 것은 자연에 대한 법칙입니다. 그러나 법칙은 진리가 아닙니다. 법칙은 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틀린 거짓은 아닙니다. 법칙은 거짓도 진리도 아닌, 진리를 닯은 것입니다. 법칙은 자연을 누스로써 파악하는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렇게 보면 파르메니데스는 초월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을 누스로써 파악하여 그것이 움직이는 법칙을 탐구할 것을 촉구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5강 : 대상 세계에 관한 탐구,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현상-법칙 해석
"그 어느 것에도 관여하지 않은 철저한 관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학의 근원적 입장입니다. 학을 하고 있는 자는, 학을 하려는 자는 이러한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학의 출발에서만이 아니라 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방향과 방법이 옳은지를 따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단편 2는 학의 시원에 관한 논의, 의심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파르메니데스는 그릇된 길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길, 있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있음의 길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릇된 길, 잘못된 길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한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모순입니다. 하나가 성립하면 다른 하나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갈 것인지를 반성하는 최초의 사유는 모순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현실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사유 속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견디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있음도 생각하고 동시에 없음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근원에 놓여 있는 사유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6강 : 학문 탐구의 방법,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학의 시원' 해석
"또한 여러 해 동안 꽃이 피는 것을 봐왔던 두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한 사람은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이맘때면 꽃이 핀다'는 법칙에 이르렀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이것은 '많음'에서 '하나'로 귀결된 것입니다. 이 '하나'는 반드시 숫자 하나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례들에서 이끌어진 보이지 않는 법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법칙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로고스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여러 해 동안 꽃이 피는 것을 보았어도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여러 해의 많은 경험뿐인 것입니다. 그는 많음에 머물러 있는 '힘없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꽃이 피는 현상이 여전히 낯설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7강 :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우리는 지금까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을 읽었습니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인 전체가 있고, 그것의 계기들은 서로 대립되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전체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만물은 변한다'라는 주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의 비유'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물의 운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강이 강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일종의 일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가 전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하나가 유지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8강 :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과 궁극적인 '하나'(헤라클레이토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겪어서 얻어낸 지혜와 객관적 세계에 관한 명석판명한 지식을 겹합해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지혜와 지식의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겪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혜도 확실한 방법을 통해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사에 대한 학적 체계적 정초를 내려놓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크라테스가 시도했던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초를 위한 궁극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내놓을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그것을 '좋음'이라 보았습니다. '좋음'은 '착함', '아름다움', '올바름' 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불변의 좋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잠정적으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양립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둘을 놓고 우리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에는 이처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따져보는 것이 우리가 플라톤을 읽는 까닭입니다.
(...)
<파이돈>의 표면적인 주제는 '혼의 불멸'이고,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형상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론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파이돈> 읽기의 첫째 과제입니다. 둘째 과제는 변증법이라는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논박술과 산파술로 되어 있습니다.
(...)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대답을 하면 그것은 '무지의 무지' 상태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하여 자신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 그것은 '무지의 지' 상태입니다. 이 무지의 지 상태가 바로 정화가 일어난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비워내고 무지의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참된 진리를 채워넣을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채워넣는 것은 산파술을 통해서입니다. 부정적 과정으로서의 논박술과 긍정적 과정으로서의 산파술이 결합된 것이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인데,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었는지는 V.3.소크라테스의 탐구 방법에 관한 논의:'차선의 방법'(두번째 항해)에 나와 있습니다. 이 과정은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인간의 영혼과 형상이라는 목적 <파이돈> , 제9강 : 잘산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본격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탐구를 위한 방법론을 찾기 위해 아낙사고라스를 읽었습니다. 그 방법으로는 좋음을 규정할 수가 없었는데, 좋음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분석하고 종합해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세계'였습니다. 좋음은 고정된 것일 수 없고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좋음이 고정 불변의 실재로 있으려면 인간에 대한 규정도 불변의 실재로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음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좋음의 존재론은 좋음의 논리학과 같은 의미가 될 것 입니다. 불변의 좋음이 저기에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불변의 논리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좋음의 존재론(좋음의 논리학)이 성립할 수 있으려면 인간에게 우연적인 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타협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유형론일 것입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상정하여 유형을 만들어놓고 그때그때 꿰어맞춰 보는 것입니다. 불변의 좋음이 있다면 그것의 법칙을 파악하여 좋음의 논리학을 만들고 그것을 예외없이 적용하면 될 것이지만, 좋음의 유형론에서는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좋음의 유형론은 파라데이그마paradeigma, 즉 잠정적 모형을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형을 만들어두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적용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춰' 적절함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은 일종의 본을 가지고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힘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는 힘은 본을 모방(mimēsis)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가질 수 없고 진리 닯은 것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모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0강 :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추론의 시작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로고스들입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둘째 항해를 달리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시작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단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논의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차선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의미 규정이 된 말들(logoi)을 매개로 이성(logos)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를 고찰을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dialektiē)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
이 고찰은 어떤 절차를 따르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가장 견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내가 판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정하고서, 이와 합치하는 것으로 내게 생각되는 것들은 참된 것들로 간주합니다. 그다음에는 앞서 세운 원칙과 어긋나는 것들을 식별합니다. 이렇게 식별하는 것이 '앎'입니다. 이것을 불변의 실재인 형상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 능력을 가지는 것일 뿐입니다. 분별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무지는 불변의 실재인 형상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출발점을 합의하는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1강 :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파이돈>의 형상 논변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이 확실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면서부터 확실한 것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해야 합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이 영혼을 잘 단련해야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이돈>에서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논의에 부수적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2강 :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
"태양의 비유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보려면, 즉 보는 힘을 가지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디서 옵니까. 태양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은 보는 힘을 제공합니다. 태양은 가시계에 힘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힘(dynamis)인 태양 빛이 강할 때는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낮의 빛에서 보는 것이고, 빛이 약할 때는 밤처럼 어스름하게 보입니다.대상은 같은데, 즉 같은 대상을 태양 빛으로 보는데, 그 강도가 다릅니다. 가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정치 공동체, 넓은 의미의 인간학 <국가>, 제13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태양의 비유)
"진리를 아는 것은 고난을 겪어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라 하여 인식된 것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
태양의 비유는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선분의 비유는 그 참된 진리가 어떠한 단계를 거쳐가는 것인지를 논증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렇게 알아낸 진리를 무지한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실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 첫머리는 교육이라는 실천을 암시하면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4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과 그것의 실천(동굴의 비유)
"이론은 본질 존재인 상재를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악한 상재를 전거로 삼아서, 또는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해도 그것을 닯은 하나의 본이라도 만들어서, 그 본을 바라보면서 정재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실천입니다. 실천은 겪음의 과정입니다. 아무리 겪는다 해도 좋음이라는 상재가 없으면 그 겪음은 경험의 축적일 뿐입니다. 악한 것도 쌓이면 탁월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쌓여도 탁월함이 됩니다. 참된 탁월함은 좋은 것이 쌓이는 것입니다.
(...)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5강 : 아는 것과 하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이론학에 속하는 것 중에서 신학에 관하여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초월적인 인격 신에 대한 탐구'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theos)은 제 1의 원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은 존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 해도 모든 존재들(ta onta)을 다루는 존재론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신을 논의하는 저작이 <형이상학>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아리스토텔레스: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제16강 : <형이상학>의 구성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학문의 출발점은 '놀라움'(thaumazein)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된 학문의 영역에는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인 앎부터 시작해서 기억, 경험, 그다음에 기술이 있고, 논증적 지식(입증 가능한 지식)과 제일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적 지식이 있으며, 그 둘을 합한 지혜에 이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감각지부터 시작하여 지혜에 이르는 과정은 누적적인 앎의 과정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가 감각지의 단계이고, 그 다음이 경험과 기술의 단계이며, 마지막이 논증적 지식, 직관적 지식, 지혜의 단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7강 : 앎의 종류와 단계들
"특수한 것들만 있다면 학문적인 인식은 불가능합니다. (...) 우리 눈앞에 수다하게 있는 특수한 것들을 보편적 술어로써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 안에 내재해 있는 본질을 찾아서 그 본질 연관을 살펴서 묶으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그것들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인식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적 인식이 성립하려면 각각의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체를 찾아야 하고,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체적인 것은 불변해야 합니다. (...)
그런데 이 실체적인 것이 특수자들 안에만 들어 있다면, 특수자들이 생성 소멸함에 따라 그것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실체는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형상이 특수자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고 하면, 특수자와 형상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형상은 특수자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특수자 밖에 있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학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8강 : 형상의 분리와 내재
"앞서 우리는 형상의 분리와 내재에 대해서 논의하였습니다. 형상이 있어야 그 형상으로 인해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수다한 특수자들이 우연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실체적인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눈앞에 있는 수많은 존재자들, 있는 것들을 탐구할 때 하나의 일관된 학문 체계를 가지고 꿜 수 있는지를 물었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가는 것을 탐구하는 첫째 철학이 첫째가는 것과 존재들, 있는 것들을 관계시켜야만 학문의 체계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의 영역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에다 '갑자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처럼 탐구하면 학이 성립하지 않고 신비주의가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 보편적 존재론을 끝까지 밀고가면 첫째 철학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을 '하나와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
첫째로 있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첫째 학문(첫째 철학,prote philosophia)이고 이것은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편적 존재론 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보편적 존재론이 신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적 존재론이 없다면, 신학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은 상호포섭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9강 :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이것'이 '무엇'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것'이 '무엇'으로써 규정됨으로써 '이것'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이것'의 본질, 이것의 진리를 드러내는 힘은 무엇입니까? 사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유가 정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면 세계의 모든 정재의 본질을 사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재에 대한 사유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에게나 가능한 사유일 것입니다. 신은 세계의 모든 정재를 사유할 것입니다. 신의 앎은 본질의 앎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신학(theologike)은 바로 이러한 신적인 앎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무엇(ti esti)은 신이며 신적 사유입니다.
'이것'은 규정적 존재입니다. 자기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안에 머물러 있으니까 즉자 존재(Ansich -Sein입니다. '무엇'은 규정적 존재가 자기 바깥으로 나온 것이므로 대자 존재(Fürsich-Sein)입니다. '무엇'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은 '이것'에 대한 반성적 사유입니다. 그런데 '무엇'과 '이것'은 같은 것들입니다. 개별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이고, 에이도스의 차원에서 볼 때는 '무엇'입니다.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가 사실은 똑같은 것인데 <범주론>과 <형이상학>에서 그 위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이것'이고, 본성상 먼저인 것은 '무엇'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0강 : 실체론, '이것'(tode ti)과 '무엇(ti esti)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 즉 질료, 형상, 작용, 목적, 이 네가지를 질료와 형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형상이 목적이기도 하고 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실체의 차원에서 말하면 그 네 개를 구별해서 말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호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공부를 하지 않는 이는 공부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지점, 목적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해야 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즉 목적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1강 :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헤겔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이며, 데카르트는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등장하는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철학에 관한 헤겔의 규정이기도 합니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Vernunft)은 인간의 이성이고, 그것은 자연의 빛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이러한 이성으로부터 잘비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알고 있는 자기의식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라는 것입니다. 이 자기의식은 신과의 존재론적 의존관계를 끊어낸 자립적 자기의식입니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이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기'입니다. "나는 생각한다"의 그 '자기'입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적 계기임을 알고 있는 철학은 자립적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신학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고, 그 자립적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 철학의 근대성은 바로 이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성립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근본구도 <철학의 원리>, 제22강 :자기의식, 데카르트 철학의 근대성
"여기에 데카르트 형이상학 전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명백하고 명석한 것들"을 알아내는 방법이 논의되고 있는데, 그것의 출발점은 "의심"입니다. 그다음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자는 그가 "의심을 하고 있는 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의심한다'와 '내가 존재한다'는 인과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은 생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신을 생각할 때에만 신의 존재가 확인될 것입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자각할 때에만 무한자로서의 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무한자라는 기준이 따라나옵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무한자라는 기준이 따라나올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무한자를 인식하는 데 있어 유한성은 필연적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철학자의 신'에 관한 기본적인 테제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3강, 진리의 원천과 진리 인식의 원천
"다시 말해서 나의 정신을 뚜렷하게 아는 힘을 가지는 자만이 신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제3성찰의 핵심 테제이자 <성찰> 전체의 핵심 테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이라고 하는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불완전한 존재인 나의 자기의식이 성립한다고 말하는 듯하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의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마다, 바로 그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의식을 정립한 사람만이 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자각적 자기 의식에 의한 자립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자기의식의 형이상학 <성찰>, 제24강, <성찰>의 구성과 목적
"데카르트는 제1성찰의 둘째 부분에서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 앎을 부정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것입니다. 예전의 '나'는 감각에 의존하였고 감각은 신체에서 생겨납니다. 이 감각의 속박을 끊는 것이 데카르트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신체에서 오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끊은 다음에는 정신에만 의존하여야 합니다.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각에서 얻은 것을 의심하는 나'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는 나'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내면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자아들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꿈을 꾸고 있는 나'와 '현실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의 대화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대화는 결국 의심의 극한에 이르게 되어 악령이 등장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악령은, 내가 사실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러한 것처럼 만드는 힘입니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방법론적으로 신을 배제합니다. 그렇게 되면 의심하는 나는 철저하게 "난국의 암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1성찰의 성과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5강, 감각적 앎의 부정, 철저한 의심(제1성찰)
"내가 아무리 사유를 한다 해도 그 사유는 "극히 유능한 기만자", "악의에 찬 기만자"가 시켜서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유하는 동안"에는 내가 참으로 현존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사유하는 동안 있다'(Nempe quandiu cogito)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내가 사유하는 동안 있다'는 것은 제 2성찰에서 우리가 간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입니다. 이 논법이 그대로 제3성찰의 신존재 증명으로 전개됩니다. '내가 유한자임을 자각 하는 순간, 그 유한자라는 것의 의식을 갖게 해주는 신이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나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곧 무한한 신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
지금 데카르트가 도달한 지점은 초월론적 사유입니다.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가 자기 자신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초월론적 사유입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초월론적 사유를 깊이 하면 할수록 초월적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가 사유하는 만큼 현존하며, 사유하지 않으면 현존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에 대해서 사유한다는 것은 초월론적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초월자의 입장에 이론적으로 올라서서 나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말하는 '사유하는 것, 즉 정신은 육체와 대립 구도 속에 놓여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동안 나왔던 '나'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나'는 새로운 입장에 올라섰고, 그 입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데카르트가 사용하는 술어입니다. 예전에는 이 정신을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이라 불렀지만 이제는 '정신'이라는 말을 규정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제 '나'는 '의심하는 나'도 아니고 '확신하는 나'도 아닌, 정신입니다. 이 정신은 제3성찰에서 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6강, 자립적 자기의식의 현존, 정신의 우선성(제2성찰)
"제3성찰에서 도달한 귀결은 '나는 나의 유한함 때문에 신의 무한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내가 의심한다는 것, 즉 내가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자라는 것을 매번 주목할 때마다" 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자각이 들 때마다 신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인데도 나는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관념은 나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기원합니다. 그러니 신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의심하고 불완전하고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신에 대한 극히 명석판명한 관념이 나에게 나타나게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유한자의 유한성을 자각하는 것이 신의 무한성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
내가 자기의식을 가질 때에만, 즉 초월론적으로 나를 자각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근대인의 숙명일 것입니다. 인간은 초월론적인 만큼만, 꼭 그만큼만 초월적일 수 있습니다.
(...)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자기는 신이 매개하여 성립한다는 점에서는 미완의 자기인데, 그 미완의 형이상학을 완성시키려면 신을 폐기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철저하게 자기로서 세계와 대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는 신을 매개로 삼지 않으면 타자와 자기가 세계 지평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 이후의 형이상학 기획들은 인간 세계에서 타자와의 만남과 통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을 폐기하는 기획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근대 형이상학은 무신론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7강, 인간의 유한성에 의거하는 신의 무한성 증명(제3성찰)
"그런데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인간이 신의 모상입니다. 인간은 신의 모상이므로 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으므로 인간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경험(Erfahrung)입니다. 인간이 겪어 가는 경험의 전 과정, 모든 계기가 다 모여서 총체성(Totalitat)이 됩니다 이것이 근대인이 살아가게 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데카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립적 자기의식의 현존입니다. 자립적 자기의식이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신의 현존인데, 신과 자립적 자기의식이 서로 연결됨으로써 자립적 자기의식은 확실성을 갖습니다. 이 확실성으로부터 진리의 규칙과 물질적 대상의 확실성을 확보합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인식론적 전개 과정이지만, 이 과정에서 자립적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한자로서의 인간과 무한자로서의 신,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가 논의되므로 형이상학적 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8강,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정신,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의 인간(제4성찰, 제6성찰)
"오늘날은 자연과학이 고도로 발전한 시대입니다. 그에 따라 칸트가 이미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 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상황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그저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단념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형이상학을 탐구해야 한다면, 우리의 형이상학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그러한 요구 충족의 방법을 찾을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유사한 상황 속에서 형이상학적 탐구를 수행했던 칸트가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칸트를 읽고자 하는 근본 이유입니다.
(...)
<판단력비판>은 미감적 판단력 외에도 목적론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칸트는 생물 종으로서의 인간과 자연 세계의 다른 종인 동물들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자연 세계와 우주 전체를 하나의 목적개념 아래에서 이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함으로써 인간과 우주를 하나의 체계적인 전체로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판단력비판>에서 밝혀 보이는 미감적 이성은 예술철학과 정치철학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요청하는 도덕적 이성은 윤리학의 근거가 될 것이며, <판단력비판>의 목적론적 이성은 우주론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칸트는 인간이 관여하는 네 영역에 관한 근본적인 근거를 마련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칸트: 인간의 한계 자각과 '장래의 형이상학', 초월론적 이념들에 대한 일반적 주해 <형이상학 서설>, 제29강, '장래의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
"한계를 알지 못하는 이성은 통일적 체계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은 '이성의 사변적(spekulativ) 사용'입니다. 이성의 사변적 사용을 한마디로 하면 '구성'입니다. 이성은 통일적 체계를 구성하려 합니다. 오성은 인간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규제적(regulativ)입니다. 그런데 이성은 통일적 체계를 구성하려 합니다. 그것은 구성적(konstitutiv)입니다.
(...)
그것을 방금 등장한 술어들로써 이해해보면 <순수이성비판>이 의도는 '인간 이성이 초월론적 이념으로써 통일적 체계를 사변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형이상학적 요구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을 시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이상학 서설>은 이러한 요구의 충족을 위해서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면 형이상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순수이성비판>의 적극적인 목표 또는 숨은 목표는 형이상학의 올바른 정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0강, 이성의 사변적 사용
"플라톤에서 인간과 유한한 사물, 즉 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한자로 상승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한자로 올라가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에로스입니다.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욕구가 있어야 하고, <향연> 첫머리에 나오듯이 연습(melete)을 해야합니다. 에로스를 가진 자가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플라톤이 일종의 믿음처럼 보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전하고 상식적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론적인 앎의 영역이 완결된 체계 속에 있습니다. 이론적인 앎의 영역은 부동의 원동자를 정점으로 하는 전일론적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플라톤보다 훨씬 더 전일적입니다. 플라톤에서는 의견의 영역과 진리의 영역이 구별됩니다. 그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비약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자연학부터 형이상학에 이르는 전 과정이 정합적인 체계로 꿰어 있습니다.
(...)
데카르트, 칸트, 헤겔, 이 세사람은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자기의식'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의식, 이것이 근대적 사유의 출발점임에 틀림없습니다. (...) 데카르트는 '의심하는 나'에서 시작하여 자기의식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 자기의식은 불안합니다. 뭔가를 알고 싶다면 신으로부터 확증을 빌려와야 합니다. 데카르트는 그것이 신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수 없지만 자신의 유한함을 철저하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신으로부터의 확증은 강하게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데카르트 철학에서 유한자인 인간과 무한자인 신의 관계입니다.
(...)
칸트에서는 무한자인 신과 유한자인 인간 사이의 통로가 완전히 닫혀 있습니다. 신으로부터 뭔가가 올 수도 있겠으나 그것이 신의 본질인지 아닌지를 인간은 알 수 없습니다. (...) 무한자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없으니 이성의 사변적인 요구는 계속되고, 이론적인 세계에서도 절반만 확실한 앎이 있습니다. 칸트는 의심과 확신의 경계선에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
헤겔 철학에서는, 외부 세계에서 뭔가 데이터가 주어진다 해도, 인간이 데이터를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스스로의 힘으로 대상 세계까지 나아갑니다. 우리 인간 정신의 활동이 대상세계와 접촉하고 그 대상의 본성을 자신에게 가지고 옵니다. 정신은 무한자의 입장으로까지 뻗어나갑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통일된 총체성(Totalitat)을 이룹니다. 헤겔의 체계 안에서는 이러한 총체성이 유기적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체계를 벗어나면 그것은 거대한 사기처럼 보입니다.
(...)
그렇다면 이렇게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목적에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자연을 탐구하여 인간의 앎의 한계를 설정하는 오성(Verstand)은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무한자나 목적을 요청하는 사변적 이성(Vernunft)도 아닙니다. 그것들 각각은 각각이 관여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오성이 하는 일에도 관여하고 이성이 하는 일에도 관여하는 제3의 것입니다. 이 제3의 것이 판단력입니다. 칸트가 하는 말로 해보면 "우리들의 인식능력의 순서에 있어서 오성과 이성 사이의 중간항을 이루고 있는 판단력(<판단력비판>, 서언)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1강,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칸트-헤겔 형이상학의 핵심문제
"판단력(Urteilskraf)은 '특수들을 비교하여 그것들을 포섭하는 보편을 상정하고 연결시키는 힘'입니다. 언뜻 보기에도 복잡해 보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형성된 연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은 샤프츠베리의 '세련' (refinement)이라는 개념입니다. 샤프츠베리는 잉글랜드의 미학자입니다. 그가 제시한 이 '세련'이라는 개념은 딱 떨어지는 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 세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감각입니다. 감각은 감각인데 혼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일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나누어 가지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홀로 독방에서 수도하여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함으로써 체득되는 것입니다.
(...)
아담 스미스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는 '공통감'이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라는 말로 되살아났습니다. 이것은 미적 감각과 역사적 사회적 감각으로 구성되는데, 아름다음과 좋음에 관한 공감을 가리킵니다. 달리 말할 때는 '취향', '취미'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그저 개인의 취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적절함이라고 해야 그 의미에 부합할 것입니다. 이 말을 독일어로 옮기면 공통감각(Gemeinsinn)이나 건전한 인간오성(gesunder Menschenverstand)입니다. 이러한 공통감각(또는 건전한 인간오성)에 의한 판단을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는 '취미판단'이라고 합니다.
(...)
그런데 칸트 이후의 독일에서는 그것과는 다르게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교양 또는 도야(Bildung)라는 개념이 등장하였습니다. 이는 미적 감각과 역사적 사회적 감각으로 이루어진 공통감이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칸트는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어떤 선행하는 목적을 놓고, 인간은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하나의 구성적 인간 도야론을 제시한 사람은 아닙니다. 칸트는 그런 독단적 목적론에 빠지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습니다.(...) 프로이센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훔볼트에서 시작된 이 개념은 헤겔에 이르러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헤겔은 이 개념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교감을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나서는 인간의 정신을 설명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자연과 자유의 통일적 체계 <판단력비판> 제32강, 판단력의 연원
"미나 숭고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기준이다'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기준이다'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있으면, 그것은 고전 미학입니다. 미의 기준이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에 따라 나뉘는 것입니다. 미의 기준은 주관적 합목적성의 원리에 따라 형성됩니다. 이것은 '미감적 공통감'이라 불리기도 하고, '규범적 타당성(exemplaische Gültigkeit)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여기서 "규범적"은 '사례가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 규범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숭고를 만들어내는 이념은 통제적 성격을 띤 이상적 규범입니다.
(...)
칸트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철학적 사색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는 이 자연과학으로써 탐구하는 자연의 세계에서 설명되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에, 목적을 설정합니다. 사실 살짝 집어넣는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는 자연이라는, 실제로 있는 객체에 관여하는 목적론이므로 객관적입니다. 실제로 있는 자연물에 관여하므로 실질적 합목적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주관적 합목적성인 미감과 구별됩니다. 또한 칸트는 기계적인 인과의 원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유기적 존재자에 자연(목적) 개념을 도입합니다.
(...)
사실상 수단과 목적이라고 하는 이 관계는 자연 외부에서 자연에 투사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 바깥에 있는 외적인 합목적성입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도 결국에 지적인 세계원인으로서의 신을 상정합니다. 신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정되는 신은 인격적 신이 아닙니다. 그저 지적인 세계원인으로서의 신입니다.
(...)
이 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윤리 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지만 최고의 학문이 됩니다. 그리고 도덕법칙 아래에 있는 인간만이 창조의 궁극목적이 됩니다. 인간만이 도덕법칙을 가지고 있으므로 인간만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려면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애는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공통감을 통해서 압니다. 인간은 단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된 자유의 원리입니다. 이 자유의 원리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면 우애가 있어야 합니다. 이 우애를 정초하는 원리가 판단력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3강, 미감적 판단력, 목적론적 판단력
"그렇다면 이제 판단력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그것은 '선험적으로 입법적인 능력', "특수를 보편 아래에 포함된 것으로서 사유하는 능력"입니다. 특수, 자잘한 것들, 사방에 흩어져 있는 개별적인 사태들을 하나의 보편 아래에 포함된 것으로 모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편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수들을 보면서 상황에 따라 결정하는 것입니다. 보편이 주어져 있는 경우, 즉 "규칙, 원리, 법칙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 우리는 그 보편을 기준으로 개별들을 분류하면 됩니다. 특수 또는 개별적인 사태를 나누는 것입니다. 기준이 주어져 있으면 나눌 수 있습니다. 기준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으면 흩어진 것들을 이러저러한 상황에 따라 모아야 합니다. 기준이 "주어져 있는 경우에는, 특수를 이 보편 아래에 포섭하는 판단력은 규정적"입니다. 이것은 '규정적 판단력'입니다. 판단력은 두 종류입니다. 그런데 "특수만이 주어져 있고, 판단력이 특수에 대하여 보편을 찾아내야 할 경우에는", 즉 모음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반성적"입니다. 즉 이리저리 맞추어본다는 것입니다. 판단력은 반성적 힘으로써 오성과 이성을 연결시킵니다.
(...)
"이제 오성, 판단력, 이성, 이 세가지 능력의 역할과 관계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오성은 자연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현상으로서만 성립합니다. 우리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초감성적 기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초감성적 기체가 있으리라는 것을 "지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기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전혀 규정하지 않은 채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이 기체는 물자체이니까 "규정하지 않은 채"가 아니라 사실은 '규정하지 못한 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은 그의 선험적인 실천적 법칙에 의하여 바로 이 초감성적 기체에 규정을 부여"합니다. 이성은 물자체, 즉 영혼불멸, 신, 자유의지 등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초감성적 기체인 그것을 규정합니다. 이것은 이성이 실천적 법칙에 의해 요청하는 것입니다. 판단력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성적 판단력이나 규정적 판단력일 것입니다. 판단력은 이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자연개념의 영역으로부터 자유개념의 영역에로의 이행을 가능케"합니다.
(...)
칸트는 대상에 관한 진리는 오성으로써 구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좋음은 이성으로써 요청하였습니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판단력으로써 오성과 이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판단력비판>은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을 매개하고 통일적 체계를 시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는 확고한 학적 규정으로써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가 합목적성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신 속에 상정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정되는 한 형이상학은 여전히 난망한 작업이 되고 맙니다. 칸트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근거 위에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 불가능함을 밝혀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에 이른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요구이기는 하나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뚜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4강, 판단력을 통한 오성과 이성의 결합
"일반적으로 철학사는 각각의 시대를 살아간 철학자들이 자신의 시대에서 이끌어낸 문제의식을 추상적 사유를 통하여 규정하고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철학사를 공부하고자 할 때에는 철학자가 살았던 시대와 그에 상응하는 학설을 함께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성사 공부와 철학이론 공부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겔은 철학사를 달리 파악합니다. 그에 따르면 철학사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철학이어서 각각의 철학자들이 같은 문제를 놓고 사유한 것을 살펴보는 영역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철학은 시대적인 규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또한 철학이 사유하는 주제들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 사유방식은 다릅니다. 철학을 이렇게 규정한다면 철학자들이 사유하는 동일한 주제들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온 형이상학과 존재론의 주제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겔에서는 이러한 주제들이 집약됩니다. 따라서 헤겔의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지금까지의 탐구를 되짚어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헤겔의 <철학백과> 서론과 <정신현상학> 서문 일부를 읽을 것이지만, 불가피하게 선행하는 철학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논의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인간이 자연적 신체와 영혼의 혼용태인 것처럼, 이 세계는 넓은 의미에서의 물질적 세계인 자연과 궁극목적이 서로 혼융되어 있다고 봅니다. 질료인 자연 안에 이 세계의 궁극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부동의 원동자 같은 것이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은 이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정신을 가진 존재여서 자연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법도 만들고,역사도 만듭니다. 종교도 만들고, 예술도 만듭니다. 그렇다면 세계의 궁극목적은 자연에도 관철되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활동을 매개로 하여 객관적인 세계도 구축합니다. 인간의 노고를 통해 뭔가를 계속해 나아가는 이 목적을 헤겔은 '정신'이라 부릅니다. 정신은 좁은 의미에서 이 세계의 궁극목적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이 좁은 의미에서의 '세계의 궁극목적'이 실현된 세계 전체도 사실상 정신의 실현물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헤겔: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 절대적인 것의 자기전개 <철학백과>, 제35강, 헤겔 철학 체계의 구성
"무한자의 입장에 서서 모든 사태를 인식하는 것을 헤겔은 '개념파악적 사유'(Begreifen)라 합니다. <철학백과> 서론 2절에 이 술어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술어는 일반적으로 헤겔의 사유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변증법'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이 술어를 이해하려면 무한판단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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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생성은 지향점 없이 무한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향해 갑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철학은 이 역사적 과정에 대한 관상이 되고, 신을 향해 가는 사태의 변전에 대한 통찰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철학, 역사 형이상학이 철학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사유가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입니다. 전체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전체의 진리를 서술한 것이 논리학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6강, 헤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
"헤겔의 이 시도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좋음'은 선재하는 본(paradeigma)이며, 현재의 과정에 임해있는 작용인이며 이 과정이 도달해야 할 목적(telos)이다.
이것은 전혀 낯선 명제가 아닙니다. "현재의 과정에 임해 있는 작용인"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이기는 하지만, "이 과정이 도달해야 할 목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공유하고 있는 목적론입니다. "좋음"은 미리 있는 것입니다. 아니,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동굴 속의 몇몇 사람들은 동굴 밖에 좋음이 실체로서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향해서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동굴을 기어올라가는 까닭은 동굴 밖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동굴을 올라갈 때, 동굴을 올라가게 하는 힘, 즉 그들에게 작용하는 힘은 저 바깥에 있는 빛입니다. 이념, 형상입니다. 인간이 그것을 본으로 삼는 순간부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동굴을 기어올라가 그 본에 이르면 목적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이것을 누가 보는지에 대한 논의는 전개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올라감, 상승을 수행하는 이의 관점 또는 '시좌'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걸 하는 건지, 아니면 사회구성원 모두가 해야 하는 건지는 논의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 '자기'는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한 논의도 상세하지 않습니다.
(...)
헤겔은 이들과 다른 시좌를 하나 정립합니다. 그것은 자각적으로 그러한 목적, 실체를 받아들여 그것을 향하여 스스로를 도야하는 주체(Subjekt)의 시좌입니다. 이로써 진리에 관한 시좌는 세 가지가 제시된 셈입니다. 하나는 신앙인의 시좌입니다. (...) 다른 하나는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되는 것과 같은 철학(적 통치)자의 태도입니다. 이는 '의견'을 가진 대중을 이끄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각각의 개인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결단하고 스스로의 도야를 통해 그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는 진리주체론적 시좌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7강, 사변적 사유와 정신철학에 대한 일반적 논의
"신적 입장에 올라선 주체적 인간이 가진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의 진리성은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리가 타당하다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 올라서는 과정의 역사성에 근거합니다. 즉 신적 입장에 올라서서 진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역사성과 보편적 타당성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성과 이 타당성을 결합한 것을 헤겔은 넓은 의미에서의 '이성성'(Vernünftigkeit)이라고 부릅니다. 이성성은 철저하게 몰역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성성은 철저하게 역사적 겪음에 근거합니다. 절대적 지는 신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편력을 총체적으로 지양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서사적 편력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성에는 선과 악이 해소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과 악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최후의 귀결에 해소되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현존의 타당성을 역사로부터 길어올리는 근거가 됩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수많은 겪음을 통하여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타당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학적 인식으로 올라서는 사다리, <정신현상학>, 제38강, <정신현상학>의 구성, 의식-자기의식-이성
"인간이 가진 자율성을 계속해서 밀고 나가면 인간은 진리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주장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주제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 그 진리의 타당성은 어디에 근거할 것인가,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겪은 것에 근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역사에 정초하는 것, 즉 진리의 역사성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기준을 삶의 과정 이외의 것에 두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겪은 것이 진리라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진리의 규준이 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파성(Parteilichkeit)입니다.
(...)
헤겔은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진리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인간은 그 기준을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의 인식 과정 전체에 세웁니다. 진리의 타당성과 역사성을 묶어서 이성성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근대적 주체성의 형이상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Selbst)가 진리의 최종 심급입니다. 헤겔과 같은 시대의 실존철학자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러한 '자기의 역사성에 근거한 진리'를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는 역사를 진리의 규준으로 삼는 것이 하찮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겪은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로 돌리는 결단을 내리고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 그것이 참다운 진리의 순간인 것입니다. 모든 역사적인 것이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9강, 진리의 역사성, 진리주체론
"고대와 중세에 인간은 진리의 규준이 천상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하늘에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현세를 잊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대에 들어 현세에 탐닉하기 시작한 인간은 천상을 잊었습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에 대한 성급한 갈망이 열광적인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습니다. 이제 철학이 해야할 일은 천상의 초월적인 것을 탐색하되 개념적인 방식으로 탐색하는 것입니다.
(...)
헤겔 시대에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무분별한 낭만주의적 열정으로 표출되었고, 헤겔은 이를 눈앞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칸트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적 열정이 가진 무분별함도 보았습니다. 헤겔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섣부른 열광에 빠지지 않는 사다리를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양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긴 도정"과 "풍부하고도 심오한 운동"이 요구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적당한 "상식"이 철학적 사색으로 간주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섣부른 "천재성"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그것마저도 철학적 사색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념"이 무엇인지, "착란적 언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생선도 고기도 아닌, 시도 철학도 아닌 조형물"정도는 식별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헤겔의 형이상학은 거대한 체계 속에서 역사와 이념을 통일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시도는 철학의 역사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그의 형이상학을 읽는 것은 각별한 의의를 가짐과 동시에 약간의 아쉬운 소회를 남깁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40강, 헤겔 철학의 목적, 역사와 이념의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