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발췌(이시형역, 청아출판사, 2005. pp.66~123).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로워진다)
1.
..... 수용소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막사에 남아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 너무나 빈약한 한 끼의 식사 -
마지막 남아있는 皮下脂肪層(피하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놓은 것 같이 되었을 떄,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키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 것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어떤 징후가 보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있었던 것이다.
매일저녁 몸에 있는 蝨(슬)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는 정말로 송장이 되었구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살덩이를 모아 놓은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철조망 너머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막사에 갇혀 있는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 그 구성원의 일부가 죽어서 몸뚱이가 썩어 가기 시작하는 바로 그 거대한 무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만 집중시키는 현상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원인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남자들만 있는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군대와는 대조적으로 수용소에서는 성도착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꿈에서도 섹스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수용소생활에서 종교적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주 진심으로 그 속에 빠져들었다. 그 믿음의 깊이와 활력이 종종 새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경탄과 감동을 불러 일으킬 정도였다. 종교와 관련된 의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막사 귀퉁이나 자물쇠가 채워진 컴컴한 가축운반용 트럭 안에서 행해지는 임시기도나 예배였다. 넝마같은 옷을 입은 채 멀리 떨어진 작업장에서 피곤하고 굶주리고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가는 바로 그 트럭 안에서 즉석예배와 기도회가 이루어지곤 했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 지적으로는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은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것이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 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 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
여전히 더 말할 나위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게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서야 내가 깨달은 것인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와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죽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식사하는 모습의 조각상
다음 영상을 참고하기 바란다.
Освенцим Путешествие в Ад / Auschwitz Journey Into Hell (2013) : 지옥으로 가는 아우슈비츠 여행
https://www.youtube.com/watch?v=LUVagXyFxKk:
2.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Et lux in tenebris lus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 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蝨(슬)를 잡는 시간을 준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를 잡는 일이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잡는 동안에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기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것에도 감사해야 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잡지 못하면 하룻밤의 절반은 꼬박 날을 새워야 하기 때문이었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 -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 라고 했던- 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얻어지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거의 없었다.
병동에 누워 있는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야근 당번에 편성되었다. 그 때, 주치의가 달려와 발진티푸스 환자 수용소에서 자원봉사자로 근무할 것을 제의했다. 친구의 만류에도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내 동료의사들 중에 이런 일에 자원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그 작업반에 들어가며 분명히 짧은 시간 안에 죽게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자원했다.
- 그러나 내가 만일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행각했다.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그때 위생사관이 발진티푸스 병동에 가는 환자들을 잘 간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용소에서는 자기 목슴이나 친한 친구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와 관련이 없는 그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었다.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는 희생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게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수용소에서 내 의지는 오직 두 가지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개들을 피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거기는 감시병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행렬 한가운데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익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군중 속에 나를 묻어버리는 것이다. 수용소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든지 우리는 나치대원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멀리보이는 바바리아 푸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는 꿈.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옆에 있는 시체, 이가 득실거리는 그 시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감시병이 지나가는 발자욱 소리만이 나를 꿈에서 깨울 수 있었다. 약을 받은 나는 환자들을 회진하였다. 그래봐야 죽어가는 환자에게 아스피린 반 알을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망이 있는 환자의 몫을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증세가 가벼운 환자에게는 격려의 말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도 발진티푸스에 걸려 비봉사몽하기도 했다.
- 죽어가는 사람을 총살하여 시체를 묻어버리는 장면 -
수용소에서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는 이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상을 못한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두 바퀴 수레에 실어 다른 수용소로 나른다. 설령 죽은 사람일지라도 그냥 실어서 보낸다. 그것은 숫자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죄수번호이다. 오직 그가 인간인 이유는 수용소 죄수번호가 증명할 뿐이다. 또한 죽어가는 환자의 호송을 맡는 사람의 관심은 해골에 덧씌워진 넝마같은 옷조각이었다.
"잘 듣게, 오토. 내가 만약 내가 집에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내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얼게 전해주게 내가 매일닽이 마신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우었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게. 두번째로 내가 어는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 앴던 그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것 보다 더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이것이 내 친구에게 전하는 나의 유언이었다. 나는 내 친구에게 이 말을 외우게 했다.
이튼날 아침 나는 아우슈비치에서 다른 호송자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났다.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보다 더 나은 요양소로 가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운명이었다. 여기에 남기를 원하는 자는 살고 떠나기를 원하는 자는 죽었다. 하룻사이에 모든 운명은 또 다른 운명을 낳게 된 것이다. 먼저 떠나기를 원하는 자는 가스실로 보내졌던 것이다.
- 운명의 자기결정권 p.107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이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에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예를 들어 수용소를 탈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인가를 오직 운명에 맡기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과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을 내려주기를 원했다. 이렇게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 -이런 문제는 단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자주 머리 속에 떠올렸다.
3. 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독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행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찬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빠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영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 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p.121 에서
4. 맺음
일단 나는 플랭클의 의미에 대한 탐구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인용하면서 맺고자 한다.
삶이 무너져 내릴 때 고통을 대하는 3가지 태도
아는 분이 병으로 휴직했다. 그 사이 회사가 폐업했다. 수술 후 복직할 곳이 없는 상태에서 몇 개월 쉬다 새로 일자리를 찾았는데 병이 재발했는지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게다가 최근 주식시장이 급락하며 적지 않은 투자손실을 입었다. 그 분은 “모든 길이 막혀 버린 것 같다”며 “즐겁게 잘 살고 있던 내게 왜 이런 나쁜 일이 연달아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삶의 어느 순간 닥쳐오는 고통 또는 시련의 문제는 사람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든다. 특히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 다들 잘 살고 있는데 유독 나만 실패한 인생이 된 것 같은 좌절감과 그로 인한 수치심이 사람을 더욱 힘들게 한다. 고통의 문제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첫째, 고통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은 누군가의 계획이나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이유 없는 우주’(션 캐롤 캘리포니아공과대학 물리학 교수) 속에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사는 존재일 뿐이다. 이런 진화론적 관점에서 고통을 바라보면 고통은 그저 실패의 증상일 뿐 아무 의미도 없다. 이는 고통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듯 의미 없는 고통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나치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경험이 있는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에게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내고 우울증에 걸린 의사가 찾아왔다. 프랭클은 그에게 만약 그가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아내에게 아주 끔찍한 일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랭클은 아내가 혼자 남아 겪을 고통을 그가 면하게 해준 것이라고 해석했고 그 의사는 위안을 얻고 병실을 떠났다. 프랭클은 “시련은 그것의 의미-희생의 의미 같은-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지적했다. 둘째,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저서 ‘굿 라이프’에서 의미란 △개인적으로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체성과 연관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통 속에서 중요성이나 유용성, 정체성을 찾기는 힘들다. 따라서 고통의 의미는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해석하는 것이다. 최 교수는 ‘굿 라이프’에서 “과거의 즐거움이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후회하고, 과거의 고통이 지금 생각하니 축복이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고통 역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의미가 덧입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에겐 지금 순간을 ‘경험하는 자기’와 훗날 그 경험을 기억하며 재해석하는 ‘기억하는 자기’가 있다고 봤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을 이해하기 힘들 땐 훗날 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할지, 혹은 기억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프랭클은 임종의 순간에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해보면 고통까지 포함된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셋째, 고통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거나 극복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미래를 낙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긍정 심리학은 고통 앞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예컨대 프랭클에 따르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1944년 크리스마스부터 이듬해 새해까지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낙관했던 사람들이 기대가 깨지자 삶의 의지가 꺾인 탓이다. 김양재 우리들교회 목사에 따르면 성경에는 고통을 극복한다는 말이 없다고 한다. 고통은 그저 통과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한다.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고통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을 것이다.” 치료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고통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힘든 일이 닥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시련이 언제 끝날 것인가를 가장 궁금해 한다. 고통은 의미를 모를 때만큼이나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다. 사람들이 고난 속에 역학자나 점쟁이를 찾는 이유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고통이 언제 끝날지 혹은 해결될지 알지 못한다. 우린 그저 “곧 해결된다”는 말을 듣고 싶어 그들을 찾을 뿐이다. 그들에게 지불하는 돈은 얄팍한 위로의 대가다. 프랭클은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의미가 뭐냐고 던지는 질문이 실은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며 우리는 삶에 ‘책임을 짊으로써’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이 고통이 언제 끝나느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고통은 삶이 내게 던진 질문이고 나는 삶을 책임감 있게 살아냄으로써 그 질문에 답할 뿐이다. 그렇게 고통을 지나다 보면 치과 치료가 끝나듯 고통이 가라앉을 때가 오고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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