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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Chronos)와 크로노스(Kronos) - 그리스 창세 신화의 쌍두마차
크로노스의 이미지. 양손에 시간의 신을 상징하는 모래시계와 티탄의 왕을 상징하는 스퀴테(Schythe)를 들고 있다.
흔히들 크로노스 하면 어떤 신을 떠올리나요? '시간의 신', '제우스의 아버지', '티탄의 왕'이 떠오르겠지요? 맞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크로노스의 이미지입니다. 위 그림의 이미지가 보통 사람들이 떠올리는 크로노스의 이미지일 것입니다. 위를 보시면 알겠지만, 시간의 신을 상징하는 모래시계와 함께 우라노스의 거세를 상징하는 낫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립니다. 어째서?
크로노스는 발음이 같은 두 가지 표기법이 있습니다. Chronos(Χρονοσ)와 Kronos(Κρονοσ)가 그것이지요. 둘 다 영어로는 [kroun∧s]로 읽힙니다. 그렇다면 과연 두 표기법이 동일 신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왜냐하면,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영어에서는 두 단어가 발음이 같은데다가, Kronos의 라틴어 표기는 Cronus로 Chronus와 비슷하기까지 하지만, 원어인 그리스어에서는 두 단어의 발음이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틴어에서는 두 단어의 발음이 완전히 같기 때문에 서유럽인들의 미술품에는 두 신을 혼동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위 조각이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크로노스의 시간과 낫이라는 이미지가 결합하여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나왔는데, 이것은 크로노스가 가지고 있던 본질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이미지입니다. 두 신이 같은 신이 아니라면, 그 차이점을 알아보도록 할까요?
크로노스(Chronos)는 시간을 뜻하지만, 그의 모습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우선, 크로노스(Chronos)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Chronos는 그 자체로는 별로 어려운 단어는 아닙니다. 이 단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Chronos는 시간의 신입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비슷한 말로는 카이로스(Kairos : Καιροσ)가 있지요. 그러나,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크로노스는 절대적인 시간, 즉 양으로서의, 계량되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세는 1시간, 1분, 1초라는 것은 모두 '크로노스'의 단위입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 질로서의, 실제로 느껴지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잠깐', '찰나', '순식간', '영겁'은 '카이로스'의 영역에 속하는 단어들이지요.
크로노스(Chronos)는, 그리스의 창세 설화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는 창세 설화의 종류가 다양한 것이 특징인데, 대표적인 것은 4가지 버전입니다. 우선, 카오스와 가이아가 태초에 존재하였고, 그들의 자식들이 세상을 창조되었다는 것은 헤시오도스의 버전입니다. 또, 오케아노스와 테티스의 자식들인 우라노스와 가이아가 결합하여 티탄들을 낳았다는 것은 호메로스 버전입니다. 프로토고노스(Protogonos)의 존재를 상정하고, 밤의 여신 뉙스와 프로토고노스가 결합하여 우라노스가 태어나고, 프로토고노스의 딸인 가이아와 결합하여 티탄을 낳았다는 것은 오르페우스 신앙 버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음유시인 버전이 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논하는 크로노스(Chronos)는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오르페우스 신앙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는 크로노스(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음유시인 버전을 자세히 알아볼까요. 태초에는 '시간'밖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매우 지혜롭고 불로불사의 힘이었습니다. 이 '시간(즉, 신이자 에너지 자체로서의 Chronos)'은 스스로 창공인 아이테르(Aither)와 카스마(Kasma)를 낳았습니다. 아이테르는 투명한 창공, 카스마는 어두운 심연을 가리킵니다. 그 둘과 함께 크로노스는 우주 알을 낳았는데, 이 알에서 빛의 신 '파네스(Phanes)'가 태어납니다. 파네스는 오르페우스 신앙의 프로토고노스로 간주됩니다. 파네스는 신들 중 최초로 왕홀을 잡습니다. 그 뒤를 이어 밤 뉙스가 신들의 왕이 되고, 뉙스의 뒤를 이어 우라노스가 신들의 3대 왕이 됩니다. 우라노스는 4대 왕이 되는 크로노스(Kronos)에게 쫓겨나게 되고, 이어 크로노스(Kronos)를 쫓아내고 왕이 되는 것은 제우스입니다. 제우스는 신들의 제 5대 왕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Dionysos Zagreus)를 간택하지만, 디오니소스 자그레우스는 헤라의 계략에 빠저 티탄들에게 찢겨 죽이게 됩니다. 분노한 제우스는 티탄들을 번개로 내려쳐 모두 죽이고 그 재로 인간을 만든다는 것이 음유시인 버전의 창세 설화입니다.
크로노스(Chronos)는 신으로서 본체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는 그 자신이 '시간'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신'이라기 보다는 '힘'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할 듯 싶습니다. 그렇지만 만물의 아버지로 간주되고(핀다로스), 세상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눈을 지니고 있으며, 만물의 변화를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오르페우스 신앙에서는 매우 중요한 신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크로노스에게 제우스 대신 돌을 주는 라이아.
그렇다면 크로노스(Kronos)는 어떤 신일까요? 크로노스의 어원은 '자르다'라는 의미의 어간 'ker'에 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살펴본 '카이로스(Kairos)' 역시 크로노스(Kronos)의 어원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찰나의 기회', '적절한 기회'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크로노스(Kronos)가 가진 힘이란, '기회를 자르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회를 자르는 힘'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고대 세계에서 가장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 것, 바로 농경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는 달리 티탄의 왕 크로노스는 농경을 담당했습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선주민들에게 주신의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트라키아 방면에서 그리스인이 남하하면서 제우스를 숭앙하는 그들은 선주민들의 신화와 자신들의 신화를 합치게 되었고, 그것이 티탄의 왕으로서의 크로노스의 이미지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스인들에게 크로노스의 이미지는 페니키아의 바알 신앙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가 자신의 아이를 삼키는 모습이 바알에게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모습이 매우 닮았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데, 그것은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사이를 결정적으로 '가름'으로써 하늘과 땅이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크로노스의 중요성은 아티카의 축제였던 '크로니아 축제'에서 잘 드러납니다. 크로니아는 크로노스를 기리는 축제였는데, 풍작을 감사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내는 크로노스와 그를 지켜보는 가이아. 그의 쿠데타는 그리스 신화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위에서 우리는 대표적인 4가지 창세 설화를 살펴보았는데, 대체로 크로노스에 의한 쿠데타 이후로는 이야기가 완전히 같아지는 형편이라, 크로노스(Kronos)는 4가지 창세 설화 모두에 등장하고 또 그만큼 중요한 신입니다. 우라노스의 뒤를 이어 신들의 왕이 된 그는 자신이 아버지를 쫓아내고 왕위에 앉은 것 같이 자신도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을 신탁으로 듣고, 항상 주의를 기울이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식들을 낳는 족족 삼켜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인 레아가 막내 제우스만은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어 크로노스로 하여금 제우스 대신 돌을 삼키게 했습니다. 후에 장성한 제우스는 크로노스에게 약을 먹여 삼킨 자식들을 토해내게 하고 6명의 형제들이 모두 연합하여 전쟁을 치릅니다. 이것을 '티타노마키아(Titanomachia)'라고 합니다. 이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가 승리함으로써 크로노스는 옥좌를 잃고 올림포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귀양보내지게 됩니다. 로마인들은 크로노스가 자신들의 나라로 왔다고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따르면 그는 타르타로스로 귀양가거나, 아니면 황금시대의 왕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티탄의 왕 크로노스는 자신의 상징물로 낫(스퀴테:Schythe, Σχυθε)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퀴테는 오늘날 낫(Scythe)의 어원이 되는 무기인데, 크로노스의 어머니 가이아가 남편 우라노스에게 자신의 자식들을 가두어 자신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한 앙갚음으로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원한의 샘'에서 원한의 결정들을 뽑아 크로노스에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낫은 본래가 농기구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상징물은 농경의 신이라는 타이틀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겠습니다. 서양에서 낫은 농기구로도 중요했겠지만, 가난한 자들의 무기로도 애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스퀴테는 본래 상징이었던 농경의 신의 이미지와는 달리 로마 이후 사람들에게 시간의 신 이미지와 혼동됨으로써 나중에 저승사자의 이미지로 자리잡았고 따라서 자루가 긴 낫은 그 후에 저승사자의 상징물로 즐겨 묘사되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있던 크로노스가 저승사자로 묘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저승 사자는 하데스의 아들인 '타나토스(Θανατοσ;죽음)'가 담당합니다. 시간의 신으로서의 크로노스가 스퀴테를 휘둘러 그의 목숨을 가져간다는 생각은 두 크로노스를 혼동한 데에서 오는 약간의 억지성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는 쫓겨나 타르타로스로 가버렸기 때문에(혹은 황금 세상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저승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크로노스 부조. 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농경용 낫임을 유의해야 한다. 왼손의 아이도 주목하라.
로마인들은 그리스 창세 설화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살짝 덧붙였습니다. 그들은 왕위에서 쫓겨난 크로노스(Kronos)가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와 제우스의 추적을 피해 '사투르누스(Saturnus)'로 이름을 바꾸고 그들에게 농작을 가르쳐주고 문명을 전파시켰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크로노스와 사투르누스는 동일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식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행방불명되었다는 점에서 크로노스와 사투르누스가 유사성을 보이기 때문에, 두 신은 어렵지 않게 동일신으로 굳어졌습니다. 사투르누스가 숨은 곳이 라틴어로 은신을 뜻하는 'Latere'에서 유래된 라티움(Latium) 지역입니다. 또, 그리스의 '크로니아 축제'와 같이 로마에도 그를 기념하는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있었습니다. 사투르날리아가 내년의 풍년을 기원하고, 크로니아가 당년의 풍년을 기념한다는 것만 약간 다를 뿐, 농사의 풍작을 기원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애초에, 로마 신화는 그리스 신화를 많이 베껴왔고, 12신 구조 등이 매우 유사했기 때문에, 플로라, 콘코르디아 등 몇몇 로마 고유의 신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리스 신화에 통합되어 버립니다. 크로노스는 로마 문화가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는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체가 없었던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는 달리 티탄의 왕 크로노스는 로마 사람들에 의해 사투르누스로 변신하여 계속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 토요일을 뜻하는 Saturday는 Saturnus에서 유래하는 단어입니다. 또, 사투르날리아 축제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거나 특별히 은혜를 베풀던 풍습은 크리스트 교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흔적을 보이며 살아남은 것은 바로 과학 분야에서입니다. 우선, 백악기 수장룡 중 '크로노사우루스(Kronosaurus)'가 그의 이름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생물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면, 황토색으로 빛나는 토성(Saturn) 역시 그의 이름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태양계의 행성 중 가장 아름다운 토성은 티탄의 왕 크로노스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두 크로노스를 혼동한 것은 사람들의 예술적 영감을 자극하였고 서양 전설에 저승 사자의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서양 판타지 문화에 한 가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두 신을 혼동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둘을 딱히 '부정적인 신' 혹은, '긍정적인 신'으로 딱 잘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리스 창세 신화에서 그들이 끼치는 영향이 매우 컸듯이 그들의 흔적은 거의 3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면면히 살아남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에서 두 신에 대해 정확히 알아둘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타나토스와 소녀. 저승사자인 타나토스의 낫은 크로노스의 스퀴테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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