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新約聖書 자체에 前 基督敎的인 영지주의가 있어서 널리 전파되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신약성서 문헌들의
기원 시기가 대부분이 1세기 후반부터이며, 몇 개의 문헌만이 2세기초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중요한 宗敎史的 年代( kairos)가
주어진다. 그래서 이렇게 정확하게 연대를 잡을 수 있는 문헌들 안에서 영지주의 사상과 특정한 관계나 영지주의의 견해와 대결이
있다면, 初代敎會의 터전에서 형성된 기원 후 2세기의 영지주의적 사회 속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 영지주의의 동기에 대한 시대적인
규정을 하기 위한 분명한 근거를 얻게 된다. 사도행전(8: 9-24)에는 기독교 복음이 原始敎會(Urgemeimde)를 시작으로 하여 사마리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거기에서 原使徒(Urapostel)들이 魔術에 붙잡혀 스스로 큰 자라 일컬으며 사마리아 민중들을 유혹하고 있는 시몬과 충돌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에는 영지주의 이론과 기독교 선포 사이에 일어났던 초기의 충돌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왜냐하면 큰 능력을 지닌다는 것은 마술사의 의사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神의 啓示를 지닌 자라는 주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원 후 2세기의 敎父들 즉, Justin, Iren us, Tertullian 등이 시몬적인 영지주의에 反駁하였던 논쟁적 기사들은 이미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도 추종자들이 생겼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몬적인 영지주의의 이러한 예는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형성된 사상들의 중요한 요소가 영지주의 이론의 기원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지주의의 여러 갈래의 운동이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유일한 근원으로 소급되어서는 언 된다. 영지주의의 형태란 그 기원이 어떤 한 장소에서 특정한 창시자에 의해서 소급되기는 너무나 여러 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시몬에게서 나타나는 성경의 가장 오래된 기사에서 기독교적인 영지주의의 초기 형태의 모습을 얻을 수는 있다. 2. 영지주의 사상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세례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나란히 활동하였으며, 이 두 집단 사이에 어떤 경쟁이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그 스스로는 빛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온 빛의 증인으로서 왔다(요 1:6-8, 15)는 것을 강조한다면, 이런 확신은 분명히 세례자 자신에게서 종말적인 구원자를 보려고 하였던 특정한 무리에 반대하는 것이다. 많은 초대 기독교 안에서는 영지주의적 자기이해가 곧 기독교적 자유의식과 결합되었으며 靈(Geist)에 사로잡히고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자랑스러운 느낌 속에 언급되었다. 이러한 熱狂主義는 먼저 바울이 세운 교린도 교회 안에서 보게 되는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영을 통하여 완전함을 벌써 체험했기 때문에 구원의 때는 이미 현재적이며(고전 4:8), 세례와 성찬예식으로부터 소멸되지 않는 능력이 나오며(고전 10:1-13)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과 함께 와야하는 미래적인 완성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전 15:12)는 견해를 가진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기독교적 자유에는 어떤 한계도 있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고전 6:12, 10:23)는 생각을 주장하게 된다. 우리가 몸으로 행하고 체득하게 된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고전 6:12-20 etc).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미래적인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자유는 오직 복종 안에서만 살 수 있는 것이며, 몸은 주(Kyrios)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전 6:13). 고린도의 광신자들과 빌립보 교회에 나타났던 그런 무리들도 기독교적 영지주의의 초기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이 거만하게 그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고전 8:1) 인식을 강조한다면 다른 삶들은 거침없이 방탕한 행동에 그들 자신을 맡기면서 모든 지상적인 것을 멸시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은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럼 속에 있으며 세상일에만 마음을 쓰기 때문입니다"(빌 3:19). 소아시아에서도 영지주의적 세계관과 생활기준의 다소 강한 영향이 기독교회들 속에 벌써 나타나 있었다. 골로새서에서는 적대적인 세상 요소들로부터 보호하여 줄 것을 약속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세상 요소들은 세상의 질서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간의 운명까지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천사 같은 존재들로 생각되었다(골 2:16, 21). 이러한 잘못된 교리는 영지주의의 宇宙論的인 思辨들이유대교적인 규칙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율법적 특징들과 독특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서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에서도 영지주의적 세계 이해의 초기형태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유대적 공헌이 함께 하였음을 증거 하여 주는 것이다. 3. 요한啓示錄의 使書에서도 사탄의 깊음을 알고 있다고(계 2:24) 확신하면서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거리낌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고 음행을 행할 수도 있다(계 2:14-15)고 자유를 오도하던 니콜라 무리들이 언급되어 있다(계 2:6, 16). 이렇게 영지주의적 통찰은 육체를 더럽히며 모든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며 그들의 무신론적 욕망에 따라 처신하는 그런 무리들을 반대하는 유다 서신의 논쟁 속에서도(유 8, 10, 18)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영지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서의 자유주의적 윤리를 볼 수 있다. 요한 복음과 요한의 서신들도 복음에 대한 영지주의적인 언설에 명백히 반대하고 있다. 창조와 육체에 대한 영지주의적 멸시에 반대하여 모든 것은 로고스, 즉 히브리어의 "다바르"( , Word 또는 event)를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요 1:1-3:14)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신약성서의 문헌상에 나타나는 영지주의가 1세기의 후 반세기에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의 선포와 충돌하였다는 성경상의 근거를 전제하여, 이하에서는 본고의 주제가 되는 영지주의와 초대교회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진술하고자 한다. 더욱 자세히는 "이덕휴목사의 신학포럼"(검색하시면 됩니다)의 '신학일반'에 보면 주석과 함께 논문으로 게재하였습니다. http://godislove.net/misupart <=이덕휴목사의 홈페이지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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