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대하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종교 개혁 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와 비난이 일자, 그에 대응해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한 저술이다. 복음주의 신앙을 살펴보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저이다.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와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스도교도의 자유란 먼저 영혼의 자유를 말한다. 사제나 승려와 같이 몸에 성의를 두르고 있는 것만으로는 영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혼은 그리스도에 의해 설교된 신의 말씀, 곧 복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살아 있거나 의롭게 되지 않으며 또한 그리스도교도가 될 수 없다. 영혼은 신의 말씀 없이 지낼 수는 있지만, 신의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 역시 신의 말씀을 전하려는 사명 때문이다. 모든 성직자 역시 오로지 신의 말씀을 위해 소명을 받았고 임명된 것이다.
신의 말씀이란, 다름 아니라 복음서각주1) 에 포함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설교이다. 이 같은 신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신앙각주2) 으로 인해 죄의 사함을 받으며 의롭게 되고 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신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자신 속에 완전히 받아들이며 그 신앙을 굳건히 하는 일은 당연히 그리스도교도가 행할 오직 하나의 ‘행함’이 된다. 신앙만이 사람을 의롭게 하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실제 계율은 우리에게 선행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으나, 그 자체로 선행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곧, 이는 실행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훈계에 의해 사람은 선에 대해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이는 ‘구약’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훈계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신과의 약속, 곧 계약이 필요하다. 그 약속은 계율이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며, 명령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신만이 명령하고 신만이 실현한다. 이런 신의 계약은 ‘신약’의 가르침이다.
신의 말씀은 성스럽고 참되고 의로움에 가득 차 있으며, 마음을 평화롭게 해 주는 자유이다.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영혼은 말씀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선행은 영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쇠가 불과 하나가 되어 불꽃 속에서 타올라 빨갛게 되는 것처럼 영혼 역시 신의 말씀에 의해 말씀 그대로가 된다. 그리스도교도는 신앙으로 충분하다. 의로워지기 위해 아무런 ‘행함’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계율과 규율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곧, 자유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이며 유일한 신앙이다.
신앙은 영혼을 신의 말씀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며, 모든 은혜로 충만되게 하고, 자유롭게 하며, 그것을 그리스도와 이어 준다. 신만이 인간의 의로움이며 모든 규율의 실현이다. 이 같은 제일 중요한 규율을 만족시키는 자는 확실히 훨씬 쉽게 다른 모든 규율도 만족시킬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남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을 받들어 ‘행함’을 하는 행위자이자 자유로운 자이다. 모든 ‘행함’에 앞서 먼저 신앙에 의해 충만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뒤에 ‘행함’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이란, 인간들 사이에 보이는 겉으로 드러난 동작이나 의복 같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속에 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모두가 반드시 왕이 되며 사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사제이다. 이는 왕보다 더 나은 것이다. 사제가 된 사람은 신 앞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도는 왕자이므로 만물을 지배하고 또 사제이므로 신을 움직인다. 그리스도교도가 이와 같은 영광을 받는 것은 신앙에 의해서이며, 결코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사제인 이상, 사제와 평신도들 사이에 종래와 같은 구별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이제까지 사제 · 승려 · 성직자라는 말은 부당하게 사용되어 왔다. 만인이 사제라고 해도 모두가 봉사하거나 관리하거나 설교할 수는 없다. 이른바 성직자들은 봉사자 · 하인 ·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관리직으로부터 저 공포스러운 지배와 권력이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평신도는 그리스도교도가 아닌 것처럼 다루어져 왔다.
인간은 신앙에 의해 그 영혼이 충분히 의롭게 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아직 육신의 생활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자신의 육신을 억제하고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행함’이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게을러서는 안 된다. 수행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는 그 내부에 육신이 있는 사람과 함께 신앙에 따르거나 그와 동화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행함’으로 자신이 신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신 앞에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것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함’이 육신의 순종과 나쁜 욕망을 정화시켜 준다는 생각이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신의 마음에 흡족하도록 행하거나 신을 즐겁게 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구해서는 안 된다. ‘행함’을 의로운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대부분은 대개가 ‘행함’이라도 하고 있으면 의롭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몸과 마음을 망치게 되고 만다. 신앙 없이 ‘행함’에 의해 의로워진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관계없는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교도는 자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의 이웃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는 신앙을 통해, 이웃에게는 사랑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곧, 신앙을 통해 신에게 다가가며, 사랑을 통해 신에게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그리스도교도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그리스도교의 개선에 대해 독일 국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빌론 포로』와 함께 루터(1483~1546)의 3대 종교 개혁 문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근본 원리는,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것으로, 그 근본 원리는 바로 이 책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 저술은 1520년 독일어와 라틴어로 동시에 쓰였으며, 루터의 저술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유명한 책이다. 이 글의 끝 부분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교도는 자기 자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자신의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 곧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신앙을 통해, 이웃에 대해서는 사랑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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