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극장에도 나왔던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주먹대결에서 져본적이 없다고 한다.
양은이파 서방파 OB파가 연장으로 성공한 조직이라면
안토니파는 철저하게 주먹으로 전국구반열에오른 조직이다.
16살때 서산일대를 평정하고 서울로 상경해서
종로에 꼭지다방에서 잡일을하며 10대를 보냈는고
20살부터 본격적인 조직생활을했고 24살때 종로일대를 관리하던
이쁜이파를 주먹으로 밀어내고 종로에 강자가 되었다.
안토니파에 시작이였던 것이다.
화가난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서방파 행동대장 5명과 조직원
40명과 안토니파 행동대장 3명과 조직원 30명을 데리고 무교동
엠파이어호텔로 들어갔다. 그당시 가장 서울에서 유명한 호텔이라
하면 주저없이 무교동에 있는 엠파이어호텔을 말할것이다.
엠파이어 호텔지하에는 엠파이어 나이트가 있었고 평일에도
줄을서서 들어가야할만큼 엄청나게 성업중인 곳이였다.
그곳에 주류납품권과 관리권을 양은이파가 가지고 있었고
그호텔 5층에 양은이파가 직접운영하는 일정건설 사무실이 있었다.
대략 100명정도가 봉고차 20대에서 내렸고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엠파이어호텔 로비로 쳐들어갔다. 쇠파이프와 야구망방이로
보이는 물건은 모조리 박살내었다.
로비를 지키고 있던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당황한 나머지 뒷문으로 도망갔다.
나이트 클럽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 손님들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과 값비싼 스테레오 오디오
DJ박스들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20분이라는 시간에 엠파이어호텔 로비와
나이트클럽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러고선 일사분란하게 차에타 도망을 갔다.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에 자서전 거물에서 그때 당시를이렇게 집필하였다.
" 내가 선봉에서 100명정도가 로비며 나이트며 유리며 조각상이며
아무튼 눈에 보이는 모든 물건은 다 부셔버렸어..그렇게 20분정도
정신없이 휘둘르고 그만 나갈려고 하는데 완전히 전쟁터가 따로 없더라고"
안상민은 김태촌에게 전화를 걸어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니
형님조직도 그렇고 우리조직도 대비를 해놔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하필 엠파이어 호텔 지하 나이트클럽에 부장 검사가 술을 마시고 있어서
사건은 엄청 복잡해졌다. 본의아니게 검사는 쇠파이프로 팔을 맞아
팔에 금이가는 중상을 입었다.
그당시에 부장검사에 파워는 지금 부장검사
와는 하늘과 땅차이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즉각 사건에 배후를 조사해보니 사건에 배후가 안상민씨로 밝혀졌고
안상민씨에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그시절에 대통령전용차로 타고다니던 차량은 벤츠 500모델이였다.
하지만 안상민씨는 벤츠 550모델에 방탄차를 주차량으로 타고다녔다.
그러던중 외국 방탄자를 타고다니는 전국구 보스라는 내용이
뉴스며 신문에 도배가 되었다.
형사들만 안상민씨를 잡으려던게 아니였다.
양은이파도 추종세력과 전조직원에게 안상민을 보는즉시
난자해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렇게 한달정도 시간이 지났을때 안상민씨 사건을 담당했던 부장검사가 양은이파 자금책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사실이 뉴스에 알려졌다.
내막을 보면 양은이파가 부장검사에게 금품을 주었고 안토니파 조직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당시 안토니파는
노른자중에서도 최고 노른자만 관리하던 조직이였기때문이다.
규모면으로는 양은이파보다는 한참아래지만 실속면에서보면
양은이파와 동급위치였다. 부장검사는 체포되어 직위해제와 더불어
1년6개월형을 받았고 금품을 건넨 양은이파 자금책은 2년형을 받았다.
제법 운좋게 부장검사사건에 묻혀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는 도피 3달만에
다시 종로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명수배는 풀린 상태였다.
안토니파가 엠파이어호텔을 공격할당시 선봉은 안상민씨가 맡았고
조직원을 소집 주도적으로 공격한건 행동대장 조영철이라는 조직원이
맡았는데 조영철이 경찰에 자수를 한것이다. 조영철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당시에는 형님대신 동생들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가는 동생들은 출소후에
제법 조직에서 높은 위치에 오를수가 있었다. 또한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밞고
올라간다고 표현하기도했다. 동생들만 200명이 넘는 안상민씨가 조영철을 지
목한건 안상민에 자선전에서도 엿볼수가 있다.
"지금도 줄을 잘타야 된다고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엄청 심했어...동생들은 몇백명이지만 다 보스하고
다 행동대장하면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키워주고 싶은 놈만 교도소에
보내는거야...선택받은 놈이지...윗급에서 인정해주었다는 얘기자나..."
그렇게 교도소에 수감후 출소하면 최소 룸싸롱 관리권을 선물로 주었다.
조양은씨나 김태촌씨 이동재씨 모두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가
수감생활을 3년넘게 한적도 있었다. 그만큼 형님대신 교도소에 들어간다는건
나름 인정을 받았다는 이야기라고도 할수있다.
그렇게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던 서울지역도 양은이파와 서방파가
신생호텔 이권에 개입하면서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때 당시에 양은이파 조직원 5명이 중상을 입었고
조직원 5명이 사형을 5명이 무기징역
나머지 10명이 15년형을 선고받았고 서방파도 8명이 숨지고
2명이 사형을 5명이 무기징역을 12명이 각각 5년형과 20년형을
선고받았을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였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사건으로 인해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고 전국구 보스들은
줄줄이 교도소로 잡혀들어갔고 조직은 와해되었다.
얼마전에 검찰에서 발표한 역대 최악에 사건에서 당당히 1위를한
참고로 2위는 서진룸싸롱 사건이였다.
그시절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세대들에 입에서 오르내리는
그당시 뉴시며 신문사며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그사건이
이른바 강남피바다 사건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우연찮게
들었던 단어일것이다.
슬슬 발전이 되가고 있는 강남 압구정동에
뉴탑호텔이라는 그당시 대한민국에서 제일큰 호텔이 생긴것이다.
그호텔 공사초기부터 양은이파와 서방파는 사력을 다해 그호텔을
손에넣고 싶어했다. 양은이파와 서방파가 개입되기 전까지만해도
많은 조직들이 넘봤으나
3대패밀리가 개입됐다는 소식으로 모두
손을 놓았다. 그호텔에 주류권과 영엽권만 손에 넣는다면
제법 괜찮은 호텔 5개와 맞먹는 수치였기 때문였다.
공사가 다 끝나고 오픈 준비가 한창이였다. 그때 뉴탑호텔 건설사는
현대중공업이였다.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곳도 당연 현대 건설사
였고 2번째가 지금은 부도나 없어졌지만 아시아나 자동차였다.
보안과 치안유지를 이유로 그당시 많은 호텔 사장들이 건달들과 많은 커넥션이
있었다. 물론 그만큼 막강한 힘도 생겼지만 말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현대는 양은이파를 아시아나는 서방파를 보안 담당팀으로
뽑아넣고 있던 것이다. 물론 주주총회에서 결정된 일이지만 최대 주주라는
힘으로 먼저 선발해 놓고 잇었던것이다.
2부~~~
그때 당시에 건달세계는 춘추정국시대였다. 한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깡패소탕작전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였다.
지금시대에는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시절에는 법보다 주먹이였고
주먹보다 깡패가 우선시 되는 시대였다.
상대편 조직에게 습격을 받고 난자가되도 경찰에 일절 신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잔혹하게 보복을 했을뿐... 그시절에는 신고자체를 하는것만으로
양아치 3류건달 족보없는 건달로 불려지었다.
업주 사장들도 금전적으로는 피해를 봤지만 그만큼 막강한 힘을
행사해왔고 조직에 보스와 거의 동급으로 동생들에게 형님소리를
들었다. 흔히 말하는 빽이 생긴 것이다.
그때 당시에 전쟁이라고 해봤자 패싸움 개념이 아닌 상대편 구역에서
잠복해있다가 표적이 되는 조직원을 골라서 칼침을 넣고 게릴라 작전처럼
치고 빠지는 전쟁이였다.
습격을 받은 OB파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먼저 칠성파가 습격을 해올지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양은이파와 칠성파가 공조한 습격을
알아차린 OB파 보스 이동재씨는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OB파 보스 이동재씨도 서울로 진출을 여러번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걸림돌은 양은이파였다. 전쟁을 해서라도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쉽사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세월을 보냈다.
부하 4명이 칼침을 맞고 광주에 병원에 입원을 했다.
소식을 들은 담당구역 형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부하들은 산에서 놀다가 멧돼지에게 당했다는 거짓말을 했다.
눈치를 챈 형사들은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조양은 김태촌씨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동재씨도
경찰서에 가는 날이면 경찰서장실에서 조사를 받는다.
그만큼 막강한 파워가 있었다. 지금은 참 웃긴 얘기지만
군사정권시절에는 주먹이 곧 힘이되는 시대였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서에 들어가는 날이면 교도소 한동을 통째를 주었다.
거물급 보스가 교도소에 온다는 소식은 보통 3~5일전에 미리 연락을 받는다.
교도소도 바짝 긴장하고 그안에 수감된 조폭들도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뉴스에서 황제 교도소 수감자 라고 보도되었던 조양은씨와 김태촌씨는
교도소에 수감될 당시 핸드폰이며 담배며 술이며 마음대로 누리고 다녔다.
지금 인터넷을 뒤져봐도 그사건이 나올것이다. 이건 한치에 거짓없는
실화이다.
OB파는 전면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무조건 5인1조로 다니기, 연장은 화장실에
갈때도 차고 다니기 수상한 냄새가 나는 놈들은 무조건 박살내기
나름 지침을 내렸다.
그렇게 기회를 엿보고 있던중 조양은이 이동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내용은 이제 슬슬 여기서 끝내자라는 내용이였다.
하지만 이동재는 우리가 당한만큼 복수하기 전에는 절대 이싸움은
끝나지 않을거라고 엄포를 했다. 조양은은 자서전 어둠속에서.....에서
그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동재가 많이 유명해졌지만 그건 나와 태촌이가
교도소에 수감될때 그렇게 된거야..내가 광주에 일있어서 내려가면
형님하고 달려오던 놈이 너무 건방져 진거야...교도서에 있다가 출소해보니
완전히 동재천하더라고...그리고 내가 2년 선배고...나를 형님으로 불르던 놈이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져서........이번참에 혼한번 내줄라고 한거지"
천하를 호령할것 같던 이동재도 이시절에 지금도 80년대 조폭사에서
빠지지않고 나오는 사건중 하나가 이동재 은퇴사건이다.
조양은은 특공대 5명을 광주로 보내 자고 있던 이동재를 난자했다.
그 일로 이동재는 은퇴아닌 은퇴를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동재가 없어진 OB파는 그야말로 고삐풀린 망아지였다.
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두툼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결국 OB파는 구OB파 신OB파 광주 무등산파로 나누어졌다.
3대패밀리에 한축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일이 지나고 몇년후 이른바 3년전쟁이라는 큰사건이 터졌다.
조양은이 형님으로 모시고 있던 번개 오종철을 김태촌이 불구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숙명처럼 3년간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다.
야인시대에도 나왔던 천안불곰 조일환씨가 여러번 중재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양은이파와 서방파는 3년동안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어느 호텔에 서방파 조직원들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양은이파
조직원들이 달려가 칼침을 놓았고 반대로 양은이파가 어느 호텔에 있다는
첩보를 들으면 서방파가 칼침을 놓았다.
조양은이나 김태촌이나 전국구 보스이지만 교도소 생활도 오랜기간 했다.
청송교도소에 있을때에는 같이 수감 생활을 했다.
그때 조양은과 김태촌은 화해를 했고 먼저출소하는 사람이 뒷바라지를
해주기로 약속을 했었다. 먼저 출소한 조양은은 약속을 어기고
서방파 본거지를 여러번 습격을했다. 조양은 자서전에서 "아무리
용서를 할려고 해도 내가 어릴적 부터 형님으로 모시던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용서가 안돼지"라고 심경을 말했다.
뒤늦게 출소한 김태촌도 약속을 어긴 조양은에 양은이파를 습격하고
3년동안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그당시에 조일환은 자서전 불의아들에서
한참 동생들이지만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고 말했다.
용팔이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용팔이 김용남씨는
김태촌씨와 고교시절 화신 8인조라는 써클활동을 했었다.
다방을 본거지로 두고 매일 싸움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당시에 김태촌은 깡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은 같이 시작했지만 김태촌은 서울로 상경을 하고 용팔이 김용남씨는
전주파를 결성 전주파 보스가 된다.
영등포를 지배하던 대호파가 있다. 뉴스에도 나왔던 유명한 이상훈씨가 보스로
있던 영등포 사창가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명한 조직이였다.
이조직만큼은 서방파와 양은이파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조직이였다.
하지만 대호파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건이 있었다
.
조양은과 김태촌보다도 족보로 따지면 선배인 이상훈은 두명을
자기보다 윗급으로 인정해주지않았었다.
조직원 20명과 이태원 캐피탈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먹고 있던중
반대편 룸에서 술을먹던 양은이파 조직원들과 시비가 붙게 된것이다.
그호텔을 관리하던 곳은 양은이파가 봐주고 있던 정남이파가 관리하던
곳이였다. 조직원들과 조직원들에 사소한 말다툼이 생겼고
그 현장을 본 이상훈은 양은이파 조직원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양은이파 조직원들도 대호파 보스 이상훈에 얼굴을 안것이다.
족보로 따지면 대선배인 사람에게 대들수도 없던 것이다.
몇일후 그이야기를 들은 조양은은 이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그때 때린 동생들에게 사과를 하라고 말했고
이를 거절한 이상훈에게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했다.
조양은은 부하들을 시켜 이상훈을 혼내주라고 말했다
이상훈은 이동을 할때나 어디를 갈때 부하들 10명을 대동하고 다녔다.
종로호텔에서 고향후배인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과 만나고 있을때였다
.
종로에 이상훈이 있다는 첩보를 들은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종로호텔로
달려갔다. 안상민과 얘기를 끝내고 이상훈은 먼저 자리를 일어섰고
안상민은 동생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얼굴을 햇갈려했고 안토니파 보스 안상민씨를 공격한것이다.
하지만 종로호텔은 안토니파 본거지 였고 로비를 지키고 있던
안토니파 조직원들에게 제압을 당했다.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안상민씨를 제압당한순간까지도 이상훈씨로
착각을 햇다. 안토니파 조직원들이 배후를 묻자 양은이파라 말했고
분노한 안토니파는 양은이파와 전쟁을 선포했다.
제압당한 양은이파 조직원들은 순순히 풀어주었다.
안상민은 조양은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당장 종로호텔에서 사과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건에 내용을 모르던 조양은은 한참후배뻘인 안상민에게 오히려
역성냈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안토니파는 서방파와 연계해
양은이파 본거지인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로 쳐들어갔다.
이 사건이 그당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외제차를 타고 도피하는 전국구 보스 사건에 시작이였다.
3부
70~8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3대패밀리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이 있을것이다.
양은이파, 서방파, OB파
왜 이들 조직을 3대패밀리라 불렸냐면 전국을 3등분으로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3대패밀리에서도 양은이파가 조금더 많은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조양은에 자서전을 보면 추종세력만 봐도
순천시민파,전주월드컵파,국제PJ파 수원 남문파 북문파 군산 백악관파
안양타이거파 등등 전국구 조직들이 모두 양은이파 추종세력이었다.
추종세력이라 하면 양은이파 조직을 형님조직으로 인정하느 것이였다.
한창 잘나갔을때 조양은씨는 부하들만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조양은씨에 개인 보디가드만 4명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양은이파보다는 세력이 조금 뒤떨어졌지만 서방파도 3대패밀리로서
그어떤 조직도 함부로 할수 없는 조직이였다.
TV에도 많이 나왔던
경찰수배중에 외제방탄차를 타고 도피했던 안토니파 안상민씨는
서방파 추종세력있였다. 안토니파는 3대패밀리를 제외한 조직중에
단연 최고였다. 종로,무교동,강남일부분이 안토니파 세력이였다.
안토니파 안상민씨는 200명이 넘는 조직원들에 오야봉이였다고 한다.
이둘조직이 서울과 경기도에 반을 나누어가졌다고 하면 OB파는 전라도 광주에서
부터 시작해 대구 동성로파,이리배차장파,전주 번개파 등등
OB파에 추종세력이였다.
OB파는 서울과 경기권에 세력이 없었지만
전라남도와 북도 충청남도와 북도에 최고조직이였다.
이당시에 가장 발전이 된곳은 서울이였고 그다음이 경기도였다.
전라도와 충청도는 발전이 미미하였지만 그래도 그 엄청나게 넒은
도시를 단하나에 조직이 관리했다고하니 놀랄수가 없다.
영화친구에서도 나온 칠성파는 이당시에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이당시 칠성파는 부산에서는 독보적이였지만 칠성파를
따르는 추종세력도 없었고 부산에서만 유명한 조직이였다.
칠성파 보스 이강환씨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굳이 서울로 진출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만했어...이당시에 부산도 서울과 비교해도 발전이
덜된게 아니거든...항구도 끼고 있어서 제법 괜찮았지...전국에서 양은이파나
서방파가 유명하긴했지만 우린 그런거 신경안썻어"
하지만 OB파와 칠성파가 전쟁을 했을때 칠성파는 엄청긴장을 하게되었죠.
전쟁을 시작한건 OB파가 먼저였습니다.
그이유는 상대적으로 전라도보다
발전이 잘된 부산을 장악해서 연고지로 삶을 생각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게
된거죠...이때 당시에 서진룸싸롱사건이 터져서 언론에는 보도가 안됐지만
관할경찰들은 초비상이였죠...먼저 OB파는 부하5명을 칠성파 본거지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칠성파보스 이강환씨에게 아주 간단한 요구를 했습니다.
오늘부로 조직을 없애고 이제부터 부산은 OB파가 장악한다는 것이였죠
이말을 들은 칠성파 조직원들은 그자리에서 OB파 조직원들을 무차별적
폭행을 가합니다.그리고는 봉고차에 태워 OB파 본거지인 광주 광천동에
있는 정형외과 앞에 이들을 내려놓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이사건에 분노한 OB파 보스 이동재씨는 자서전에서 이런얘기를 합니다
"가장 아끼는 부하들에 얼굴을 보고 참을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오늘내로 칠성파를 죽이지 못하면 내손으로 내가 죽겠다"
OB파는 즉각 조직원들을 소집했습니다. 추종세력 조직원들도 불러모았죠
대략 350명정도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때 당시에 칠성파는 70명도 채안되는
조직이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칠성파는 번개 오종철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오종철이라는 사람은 양은이파 조양은에 고향 선배이며
조양은이 형님으로 모신는 사람이였습니다. 칠성파 이강환씨하고는 친구사이였습니다.
오종철은 OB파에 전화를 걸어 중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OB파는 이미 돌이킬수
없다고 중재를 거부합니다. 결국 오종철은 조양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양은이파와칠성파과 오히려 OB파를 먼저 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진룸쌀롱 살인사건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강남에 있는 서진 룸살롱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폭력조직 맘보파와 서울목포파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4명이 살해된 것이다.
이날 밤, 맘보파 일행 7명이 감옥에서 출소한 조직원의 축하연을 벌이고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다른 방에선 목포파 조직원 9명도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에 마주친 두 폭력조직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일어났다.
"야 임마! 너 많이 컸다. 선배한테 인사도 안해!!"
선배격인 맘보파 두목이 목포파 후배를 붙잡고 일어난 일이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양측의 무리들이 복도로 나왔고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윽고 맘보파 두목이 후배의 뺨을 후려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곧바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목포파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목포파 두목이 밖으로 나가 봉고차 안에서 흉기를 꺼내들고 안으로 난입했다.
전세는 뒤바뀌었다. 야구 방망이와 사시미칼을 휘두르는 목포파 앞에서 맘보파는 궁지에 몰렸다.
이어서 일방적이고 잔인한 난도질이 시작되었다. 복도는 온통 피바다로 변했다.
맘보파 네 명이 피를 흘린채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
난투극에서는 이겼지만 눈 앞의 상황은 너무도 처참하였다.
당황한 목포파 조직원들은 황급히 이들을 승용차에 싣고 자리를 떴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다.
목포파는 현장에서 8km 떨어진 정형외과 2층 복도에 이들을 내려놓고 도망쳐버렸다.
중상을 입은 네 명은 과다출혈로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포파 두목을 포함한 7명은 사건 발생 직후 자수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지방으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었다.
폭력조직간의 알력다툼과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검사는 논고에서 이들을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은 8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표출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두 명은 사형, 두 명은 무기징역, 나머지도 각각 실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경찰수사에 의해 언론에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경찰에 의해 과장되었다.
애초에 두 세력은 폭력조직도 아니었고 이권 때문에 싸운 것도 아니었다.
한 쪽은 실체가 불분명한 건달 수준이었고, 또 한 쪽은 대학교 유도부 선후배였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맘보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고, 목포쪽에서 맞대응 한 것이다.
맘보쪽은 싸움에 단련된 건달이었고, 또 한 쪽은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양 쪽은 서로의 힘을 믿고 격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폭력조직도 아닌 목포파가 흉기를 가지고 다녔을까?
당시 두목으로 알려진 장진석은 평소 조폭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차안에 그런 흉기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것이 자신을 인생의 수렁으로 빠뜨리게 된 것이다.
사건을 맡은 경찰은 이들의 사건을 편리대로 짜맞추었다.
양 집단은 맘보파와 목포파라는 이름으로 급조되었고
수사는 폭력조직간의 잔인한 싸움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범행의 잔인성에 비춰 이들이 받은 형량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당시의 경찰들은 왜 이런식으로 사건을 조직화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5~6공의 정치적 선전술의 하나로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울 강남에 있는 서진 룸살롱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폭력조직 맘보파와 서울목포파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져 4명이 살해된 것이다.
이날 밤, 맘보파 일행 7명이 감옥에서 출소한 조직원의 축하연을 벌이고 있었고,
이와는 별도로 다른 방에선 목포파 조직원 9명도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화장실을 다녀오던 중에 마주친 두 폭력조직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일어났다.
"야 임마! 너 많이 컸다. 선배한테 인사도 안해!!"
선배격인 맘보파 두목이 목포파 후배를 붙잡고 일어난 일이었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양측의 무리들이 복도로 나왔고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이윽고 맘보파 두목이 후배의 뺨을 후려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곧바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고 목포파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때 목포파 두목이 밖으로 나가 봉고차 안에서 흉기를 꺼내들고 안으로 난입했다.
전세는 뒤바뀌었다. 야구 방망이와 사시미칼을 휘두르는 목포파 앞에서 맘보파는 궁지에 몰렸다.
이어서 일방적이고 잔인한 난도질이 시작되었다. 복도는 온통 피바다로 변했다.
맘보파 네 명이 피를 흘린채 쓰러져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쳤다.
난투극에서는 이겼지만 눈 앞의 상황은 너무도 처참하였다.
당황한 목포파 조직원들은 황급히 이들을 승용차에 싣고 자리를 떴다.
아직 숨은 붙어 있었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다.
목포파는 현장에서 8km 떨어진 정형외과 2층 복도에 이들을 내려놓고 도망쳐버렸다.
중상을 입은 네 명은 과다출혈로 현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목포파 두목을 포함한 7명은 사건 발생 직후 자수했지만,
나머지 두 명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지방으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었다.
폭력조직간의 알력다툼과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검사는 논고에서 이들을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은 8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표출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로써 두 명은 사형, 두 명은 무기징역, 나머지도 각각 실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여기까지가 경찰수사에 의해 언론에 알려진 내용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경찰에 의해 과장되었다.
애초에 두 세력은 폭력조직도 아니었고 이권 때문에 싸운 것도 아니었다.
한 쪽은 실체가 불분명한 건달 수준이었고, 또 한 쪽은 대학교 유도부 선후배였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맘보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고, 목포쪽에서 맞대응 한 것이다.
맘보쪽은 싸움에 단련된 건달이었고, 또 한 쪽은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양 쪽은 서로의 힘을 믿고 격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폭력조직도 아닌 목포파가 흉기를 가지고 다녔을까?
당시 두목으로 알려진 장진석은 평소 조폭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늘 차안에 그런 흉기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것이 자신을 인생의 수렁으로 빠뜨리게 된 것이다.
사건을 맡은 경찰은 이들의 사건을 편리대로 짜맞추었다.
양 집단은 맘보파와 목포파라는 이름으로 급조되었고
수사는 폭력조직간의 잔인한 싸움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범행의 잔인성에 비춰 이들이 받은 형량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당시의 경찰들은 왜 이런식으로 사건을 조직화했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5~6공의 정치적 선전술의 하나로 이용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서진회관(룸살롱) 살인 사건은 맘보파(범서방파 김태촌의 방계조직)의 두목인
오재홍(이는 김승연 차남 사건 시 관련자로 현재 캐나다 도피중인 그 오모씨임)
이 부하 조직원의 출소 기념으로 서진회관에서 술을 마시려고 하던 중
당시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던 목포 출신으로 유도대 출신인 장진석의 진석파
(장진석이 두목으로 김동술, 박영진, 고금석, 김승길 등)와 충돌하여 맘보파
조직원이던 조원섭, 고용수, 차권, 장경식 4명이 피살된 사건을 말하며
진석파는 당시 살인 사건을 일으킨 후 사회문제화 되자 두목 지시로
두목인 장진석과 행동대장인 김동술을 제외하곤 자수를 하였으며 두목과
부두목은 전북 임실에서 이들을 잡으러 간 경찰에 현장에서 붙잡힌 것임
고금석이 조원섭을 술집 로비에서 칼로 손목을 내리쳐 손목이 덜렁 거릴 정도였다고 함
참고로 조원섭은 당시 맨주먹으로 당할자가 없다던 전국구 싸움꾼 이었으며
역시 죽은 고용수는 범서방파 김태촌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고 함
당시 회자되기로는 조원섭 고용수 2명의 싸움 실력은 넓은 곳에서
맨 주먹으로 싸웠다면 장진석파 일당 모두 제압할수 있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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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날을 그렇게 기리고 싶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섬
소년에서 꿈 많은 대학생, 조직폭력배라는 오명과 살인 그리고 사형수….
고된 인생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지그시 감은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얀 면사포를 쓴 신부가, 박수로 그를 맞는 하객들이, 그리고 만감에 울음을
삼키는 노모까지 모두 눈물에 번져 아른거렸다. 꿈 같았다.
52세의 새 신랑은 그렇게 울고 있었다.
주인공 박영진(왼쪽·52)씨는 신부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는 "내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소원이 이뤄진 날"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신부는 동료 조직원의 누나였던 장우순(53)씨. 박씨와 함께 서진룸살롱
사건에 가담한 동생의 옥바라지를 위해 교도소를 오가던 장씨는 어느새
박씨에게도 늘 기다려지는 존재가 됐다. 처음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는 가톨릭 신자가 됐다. 그를 종교로 이끈 이가 장씨였다. 처음엔
멀리서만 그를 지켜봤다. 그러다 수감 10년이 넘으면서 그의 가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싹트는 걸 느꼈다. 이심전심이었던지 장씨도
그 무렵부터는 매달 찾아와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것이 사랑임을
그제야 알았다고 박씨는 털어놨다. 기약 없는 수감생활에 발이 묶인
그가 품기에는 너무 큰 꿈이라고 여겼으나 모범수로 감형을 받으면서
둘은 희망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출소를 몇 년 앞둔 어느 봄날,
"그립고 기다리는 마음이 커지는 이곳에서 당신만이 나를 채울 수 있는 사람"
이라며 "운명적으로 만난 당신과 영원히 같이하고 싶다."는 옥중 프러포즈를 전했다.
사실, 그에게 결혼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세기의 사건'이라는
1986년의 '서진룸살롱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20년을 복역한
뒤 출소한 그에게 '서진룸살롱 사건'의 꼬리표는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녔다.
강남 역삼동의 한 룸살롱에서 발생한 그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건장한 20대 청년들이 술을 마시다가 우발적으로 충돌, 급기야
회칼 등을 들고 다른 무리와 집단 난투극을 벌여 4명을 살해한 80년대
대표적 사건. 박씨를 비롯한 관련자 12명은 살인 등의 혐의로 모두 구속됐다.
2006년 겨울, 죗값을 치르고 사회에 나왔지만 세상은 여전히 싸늘했다.
당장 생활고에 내몰렸다. 취직도 어려웠다. 그런 그가 '과거'에 매몰되지
않도록 버팀목이 돼 준 이가 바로 지금의 아내와 종교였다. 미혼모였던
아내의 20대 아들도 둘 사이에서 충실한 가교 역할을 하며 힘을 북돋았다.
안경점을 하는 그 아들이 지난해 첫 아이를 낳아 박씨는 결혼도 하기
전에 벌써 '할아버지'가 됐다. 그는 "아들이 대견스럽고 고맙다."며 감사의 뜻을 비쳤다.
출소 후 건설회사를 하는 선배의 도움으로 운전을 하며 새 출발을 준비했던
그는 어렵사리 서울 대치동에 작은 셋집도 마련했다. 지금은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성당 봉사활동에는 빠짐없이 참여하는 모범 시민이다.
그의 늦은 결혼식에는 내로라하는 '왕년의 어깨'들이 운집하는 보기 드문 장면이
연출됐다. 결혼식이 열린 성당 앞마당은 물론 인근 유치원과 진입로가
검은 승용차로 채워졌고, 성당 안팎에는 1000여명에 이르는 검은 양복의
'어깨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그러나 긴 혼인미사가 시작되자 잡음 하나 없었다.
오후 3시 30분. 혼인미사를 집전한 신부가 박씨의 편지를 읽자 장내는 일순 숙연해졌다.
신부에게 전하는 박씨의 마음이었다. "만나지 못할 때 가슴이 저리는 그리움이 생겼고,
그 그리움이 사랑의 결실이 되기를 기도했고, 그리고 그 기도가 오늘 결혼으로 이어졌습니다.
(중략) 하나님을 꼭 기억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 예식을 마치고 행진을 하는 박씨가 그제야 미소를 띠었다.
그는 줄곧 고맙다며 하객과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한 남자의 늦었지만 뜻깊은 새 출발, 넓은 성당을 '어깨들의 박수'로 가득 채웠다.
지금 장진석씨는.. 순천교도에서 23년째인가 복역중..입니다.
5공 무섭던 그시절 모든것을 알면서도 덮고가야만 했던 회장의 가신 이었던 한사람의 말 에의하면
이사람은 서진회관의 모든 주류 물품 사입은 물론 조판 경리와 물품써비스 일채를 관리하여
일하며 회장의 가신중에 제일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마지막 회관 사고장소 처리와
사고벌과금 700만원 까지 직접 납부하여 사고 종결처리하였던 가신이라고 알고있습니다
당시 서진회관에는 모 국회의장 내방이 예약 되었으나
사고로 인하여 급히취소 되었으며
국무의원 다수의 정치인 검사등 당대를 호령하던 몇명의 정치인이 접대행사중 이었으며
그로인해 사건이 다소 축소은페 지연 네지는 과장 되었을 수도 있었으며 언론통재 또한
그당시 당연한 겄으로 보며 과장되거나
정치적으로 협작되어 억울한 부분도 상상할수 있을겄이라고합니다
서울 고검장 대통령후보 서진회관 회장 이세사람은 학연과 지연으로 엮인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