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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누룩의 비유 / 마13:13

by 이덕휴-dhleepaul 2019. 8. 18.



누룩의 비유 / 마13:13
2007-10-10 01:02:10

누룩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13절 


 


먼저 누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누룩은 요즘 이스트(yeast)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룩이나 이스트는 모두 효모제로서 "발효작용‘을 일으킵니다. 물질을 발효시키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밀가루 반죽의 경우 부풀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가정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제가 어릴 때에는 그런 광경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저녁에 밀가루에 이스트를 넣고 반죽을 합니다. 그리고 아랫목에 묻어두고 이불을 뒤집어 쓰워 놓은후 아침에 보면 밀가루 반죽이 많이 부풀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찐빵을 만들어 먹습니다. 만일 이스트 없이 그냥 밀가루를 반죽하여 빵을 만들면 딱딱해서 먹을수가 없습니다.  누룩으로 부풀게 된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면 속에 구멍이 뚫려있고 부드럽고 맛이 좋습니다. 누룩은 대개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는 누룩은 자기 보다 큰 상대를 변화시키는 특징이 있습니다. 둘째는 지극히 적은 양의 누룩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렇게 남을 변하게 하고는 정작 자신은 소금이나 등불 기름과 같이 없어집니다. 말하자면 자기 희생입니다. 지극히 작은 양의 누룩이 조용히, 소리 없이,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는 동안에 상대에게 영향을 미쳐서 변화시키고 발전하게 하며 크게 하고는 자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동문학가로 잘 알려진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이 분 댁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잠자던 식구들을 모두 깨웠습니다. 강도는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방정환 선생은 있는 돈을 찾아 강도에게 주었습니다. 강도는 돈을 챙겨 들더니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소파 선생이 점잖게 한 마디 나무랐습니다. "이 사람아, 돈을 받았으면 고맙다는 말 한 마디라도 하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하나?"



강도는 별 싱거운 사람을 다 보겠다는 듯이 "고맙네"라고 한 마디 던지고서는 나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강도가 얼마 안가서 순찰을 도는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경찰이 강도의 몸을 수색해 보니까 주머니에서 칼과 꽤 많은 돈이 나왔습니다. 경찰은 틀림없이 그가 어디에선가 강도 짓을 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강도를 추궁한 끝에 그를 끌고서 소파 선생의 집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방정환 선생이 경찰과 함께 온 그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서 고맙다는 말까지 하고 갔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입니까?" 경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강도를 풀어주고 갔습니다. 그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서 소파 선생 앞에 백배 사죄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오갈 데 없는 강도를 소파 선생은 한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으로 감동시켜야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는 나를 닮으라는 것이 전도입니다. 내가 예순;la을 믿고 난후의 경험 곧 죄용서함, 기쁨과 평화 그리고 희망 등등 내가 믿는 예수를 당신도 믿고, 내가 구원받았으니 당신도 구원받고, 내가 행복하니 당신도 행복 하라는 것이 전도의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보이지 않게, 숨겨진 역사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 복음의 역사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가루 속에 숨겨진 듯 모르게 들어가서 비밀리에 점점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날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는 염병과 같다"고 표현한 점입니다. 즉 예수쟁이를 이대로 놔두면 염병처럼 번져 성한 사람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장면을 보신다면 "그래 그것이 바로 내가 예언한 그 '누룩'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런 전염병은 제발 좀 걸렸으면 좋겠습니다.


1. 가루의 양이 서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주식으로 하는 팔레스틴의 식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 ?가루 서말?은 한 번 반죽하기에 알맞은 양으로 ?1 에바?에 해당되는 약 22ℓ입니다. 이 양은 10인 가족의 하루 식량으로 추측됩니다. 왜냐하면 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 1인에게 하루를 지낼 수 있는 양으로 1오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기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 문밖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서 보니까 맞은 편에 세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가서 그 분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장막에 들어가서 자기 아내 사라에게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여기서 "세 스아"라는 말은 서말을 뜻합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충분한 떡이 필요합니다. 여인이 최대한도로 빚을 수 있는 반죽의 양이 가루 서말입니다. 아무튼 많은 양의 가루 서말 속에 적은 양의 누룩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루는 많고 누룩은 적으니까, 누룩이 가루에 짓눌려서 가루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많은 양의 가루 속에 들어가서 가루 전부를 부풀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누룩이 가루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누룩이 가루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천국은 작게 시작했습니다. 온갖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은 점점 확대되어 나갔습니다.



미국인들의 조상은 청교도입니다. 오늘의 미국이 저렇게까지 번영하게 된 것도 다름 아닌 청교도들의 신앙과 경건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청교도들의 조상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의 조상은 해적의 대명사였던 바이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해적들은 바다와도 싸우면서 해적질을 하기 때문에 노젖는 것을 비롯해서 매사에 생각을 많이 하고 머리가 대단히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머리 좋은 해적들이 해적의 후예를 어떻게 훌륭하게 이어나갈 것인가를 생각한 끝에 가장 깨끗한 여자를 찾아 결혼을 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주위의 여자들은 방탕하고 병이 많아 위험해서 결혼하기가 두렵고 그러한 결혼을 통해 자식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깨끗한 여자가 누구냐?" 했을 때, 기독교인들이 깨끗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면서 기독교 여성들을 마구 붙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좋은 자식을 낳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억지로 끌려와 해적의 아내가 되었지만 이 아이만은 신앙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성경을 들려주고 기도를 가르치며 깨끗하게 키우느라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라온 이들이 청교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나약한 한 여성이 강제로 끌려가 눈물을 흘리며 마지못해 살지만 이것이 누룩이 됩니다. 해적의 자식을 낳고 그러나 그를 말씀으로 양육시켜 마침내 그가 청교도가 되며 그  청교도가 미국의 조상이 되고, 오늘의 미국은 세계 역사의 선봉장이 되었다 생각할 때, 역사의 처음 시작에 울면서 끌려가던 나약한 한 여성, 그는 분명 누룩입니다. 차마 죽지 못해 해적의 소굴까지 끌려갔었는데 그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누룩이란 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보면 시리아의 군사령관인 나아만 장군의 집에 포로 되어 갔던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인 하녀 하나가 문둥병 환자인 주인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앞에 서게 하고 치유 받게 하며 결국은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5:17)라는 결단을 하게 합니다. 이리하여 시리아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이 적은 누룩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하게 던져졌지만 마침내는 이처럼 놀라운 결과를 이루어 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최대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11억이 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큰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슬람교입니다. 7억 5천만명입니다. 물론 지금도 세계 곳곳에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탄압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계속해서 확장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합니다.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때가 되면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구름 타고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추숫군을 시켜서 다 모아 풀무불에 집어던지실 것입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곡식된 우리는 다 모아서 아버지의 곳간인 하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거기서 의인들은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누룩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 귀한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가루속에 누룩을 넣었습니다.



여기에 여자가 사용한 누룩은 ?복음?, 곧 구원의 복음, 예수의 복음, 영생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문제의 초점은 여자 곧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위탁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가루 속에 누룩을 넣을 줄 알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누룩을 가루 속에 넣을 때만이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누룩은 넣어야 합니다. 누륵은 가루에 접촉하여 스며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안에서 아무리 아멘 할렐루야 하고 세상에서 녹아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녹아들어가야 영향력이 나타납니다. 누룩의 영향력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선반 위에 그대로 두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본문에 등장하는 여자는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깊숙이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누룩이 가루 속에 속속들이 잘 스며들어 반죽이 잘 부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높고 높은 보좌에 가만히 앉으셔서 우리를 쳐다보기만 하시면서 사랑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낮고 낮은 이 땅에 예수님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이 되셔서 가루 서말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갖다 넣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룩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누룩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사명을 누가 감당해야겠습니까? 그 나라의 백성들인 우리가 이 사명을 이어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7:18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부풀게 하라는 것입니다.



인도에 파송된 한 선교사가 원주민 청년 하나를 붙들고 돈은 얼마든지 줄 터이니 당신 나라 말을 좀 배워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못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안 믿어도 좋으니 말만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그 청년의 대답인즉 내가 당신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다가는 내가 예수 믿게 되므로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났다가는 예수 믿게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누룩입니다. 여러분! 누룩과 밀가루가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어떤 밀가루라 할지라도 누룩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누룩이 잘못 밀가루가 되지나 않는지 두렵습니다. 있다면 이는 완전히 변질된 누룩입니다. 따라서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훌륭한 오르간 연주자였습니다. 철학 박사였습니다. 신학 박사였습니다. 의학 박사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말씀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습니다. "이 시대의 부자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 부자는 바로 자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거지 나사로는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흑인들이다. 만일 내가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부자처럼 이것은 나 스스로를 죽이는 길이요, 내 가족을 죽이는 길이라."  그는 즉시 결단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프리카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밀림 속에 있는 불쌍한 흑인들을 돌보면서 자기의 여생을 다 바쳤습니다. 하루는 흑인 여인 한 사람을 치료하고 있는데 그 여인이 궁금하다는 듯 슈바이처 박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박사 학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학자이자 천재적인 음악가이십니다. 그런 선생님이 어떻게 이 오지에 오셔서 고생하며 사십니까?" 그 때 슈바이처 박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제게는 말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재주가 없답니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글로서, 말로서 표현하려고 해 보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별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그 사랑을 내게 보여주신 것처럼 나도 그 본을 따라서 내 행동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뿐입니다.



그런데 비록 작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오히려 내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나에게 이와 같이 건강을 주셨고, 마음의 행복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누룩으로서 가루 서말인 이 세상 속으로 자신을 던지신 것처럼, 슈바이처 박사도 한 줌의 누룩이 되어서 아프리카 밀림 속으로 자신을 던진 것입니다.


3. 그 결과 가루 전체가 부풀었습니다.



누룩의 발효력이 이 비유의 중심입니다. 누룩의 팽창력, 누룩의 변화력, 누룩의 운동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양의 누룩이 가루 서말 전부를 부풀게 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복음의 팽창력, 복음의 변화력, 복음의 영향력, 복음의 정복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음의 확장력, 복음의 전파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 깊이 역사하는 복음의 힘을 가리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누룩 속에는 참으로 대단한 발효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죄의 능력입니다. 죄를 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죄의 발효력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만이 가진 생명의 매력입니다. 그에게는 전 인류를 멸망시키는 무서운 죄와 죄의 삯인 사망 문제를 해결하는 용서의 발효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유월절이 되면 한 주간 동안 무교병을 먹습니다. 누룩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떡입니다. 맛이 없습니다. 돌멩이처럼 딱딱해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조상들의 고생을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6․25가 가까워지면 주먹밥과 개떡을 먹습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월절 한 주간의 기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금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한결 먹기가 좋습니다. 누룩이 가루 서말 속에 들어가 전부 부풀게 해서 맛좋은 떡을 만들 듯이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누룩처럼 살맛 나는 분위기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이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잔이라는 어린 소년이 살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가 13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계속 다닐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벽돌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자기 밥벌이를 자기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잔에게는 남다른 믿음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열심히 하고 일하면서도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린 잔에게 가슴 아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바닥이 질퍽질퍽 거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약한 성도들 가운데는 비가 오면 아예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부자도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또 멋있는 마차를 끌고 다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교회 입구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질퍽거리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린 잔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린 잔은 기도하는 가운데 결심했습니다.


"좋다! 나라도 내 교회 입구를 벽돌로 한 번 멋있게 포장해 보리라!" 그 당시 잔이 벽돌공장에서 받는 일당은 7센트였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식대를 제하고 또 생활비 일부를 제하고 나면, 꼭 하루에 벽돌을 한 장 살 수 있는 돈이 남았습니다. 잔은 그 돈으로 벽돌을 매일 한 장씩 샀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교회에 들러 그것을 가지고 교회 입구를 깔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잔이 벽돌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데는 약 2년의 세월이 걸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그 세월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기뻤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살맛이 났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몹시도 가벼웠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열흘이 지났습니다. 한 달이 지났습니다. 매일 저녁 벽돌을 가져와서 교회 입구를 포장하는 잔의 모습을 교회 어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어찌 그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드디어 무디었던 어른들의 마음이 움직여졌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어른들의 손으로 교회 입구는 깨끗하게 포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교회 안까지도 새롭게 단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잔의 삶을 무한히 더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중에는 큰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체신장관까지 역임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미국의 백화점 왕으로 불리어지는 잔 와나메이커입니다.



우리도 그의 삶처럼 내가 있는 처소에서 누룩과 같이 좋은 영향력을 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로 인해서 내 가정이, 내 이웃이, 내 일터가, 우리 교회가 살맛 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어지는 축복된 역사가 우리 모두를 통해서 날마다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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