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라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요즘 들어 난폭한 범죄들이 난무하고(양아치를 죽였다), 정치권은 나날이 좌우대립, 진보와 보수 그런가 하면 국제적으로는 남북한의 대립에 이어서 일본의 경제전쟁과 미국의 패권주의 홍콩의 대 중국배척 등 복잡다난한 이 시기에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말씀으로 우리 모두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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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도들의 두 가지 관계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적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돕는 베필’(아담과 하와)이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 가운데 유일하게 좋지 못했던 현상, 즉 독처하는 것에 대한 가장 적절한 사랑을 표현하셨고, 그것은 사람에게 창조적인 관계를 허락하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의 관계는 ‘원수’입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서 들어가게 된 관계입니다. 서로를 해치는 관계입니다. 서로 원망합니다. 서로에게 책임을 미룹니다. 시로 질투하고 시기합니다. 서로 모함합니다. 사람은 이 원수적 관계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를 적대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분노를 드러냅니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미루려는 어리석은 악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미 사람들 서로와 하나님에게까지 원수적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2. 새로운 관계
절망 중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회복된 관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된 관계는 모든 원수되었던 관계를 넘어 섭니다.
에베소서 2:14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정리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교회와 성도들의 과거의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은혜가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 되시고 우리를 화평의 관계 속에 있게 하십니다.
마27:50-51에 예수님이 숨이 끓어지자 성소 안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 졌다고 합니다. 왜 휘장이 찢어졌으며 무엇을 말 하는 것입니까?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하는 막(幕)이었습니다. 지성소 출입은 대제사장에게만 제한되었으며, 그도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휘장이 찢어져서 그때까지 지극히 신성하게 여겨지던 장소가 드러난 것은 표상적인 제사가 종식되었다는 것과 표상이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음을 알리는 하늘의 신호였습니다. 휘장이 찢어진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열렸음을 상징합니다.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화평의 새로운 관계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된 성도들은 성도 상호관의 관계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증거들을 생산합니다. 먼저 낮아집니다. 참된 겸손과 낮아짐으로 서로 희생하고 섬깁니다. 말씀과 사명 앞에 순종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생명을 내놓기도 합니다. 물질에서 자유함을 얻습니다. 독점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일에 참된 기쁨이 생깁니다. 나의 희생과 헌신으로 인한 다른 지체의 유익과 기쁨을 참된 보람과 가치로 여깁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경계에 있던 초대교회는 허락하신 새로운 관계와 원수된 옛관계의 경계에 있습니다.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옛관계를 연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경험하는 영적인 딜레마였습니다. 다툼과 분쟁, 시기와 질투가 교회에 있었고, 교만과 자랑이 발생했습니다. 서로 분열하고 비난했습니다. 회복된 관계 속에 원수적 관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3.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
성경이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땅에 세워진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의 경계로서의 교회는 이 두 가지 관계에 있어서도 경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교회와 성도가 여전히 두 가지 삶과 관계의 경계에 있고, 여전히 옛삶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오늘의 본문 20절의 말씀은 화해와 평화에 관한 내용이어야 합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11장에서 12장으로 넘어가면서 교리에서 삶으로 초점을 바꾸고 있고, 20절의 상반부에서 이미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성경적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증거했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6-18)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20절의 말씀은 전후의 이러한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는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나 외경 등에서 등장하는 ‘숯불’의 의미는 심판과 정결을 상징합니다. 제단에는 늘 숯불이 있었고, 우리의 죄를 태워서 정결하게 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창 19:24, 레 10:2, 시 11:6, 겔 21:31) 그렇다면 롬 12:20의 말씀도 이렇게 볼 수있을까요? 우리가 이웃에 대해 선을 행함으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숯불의 일반적인 의미와 본문에서의 의미는 다르게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숯불이 얼굴을 뜨겁게 한다는데 주목했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악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치심을 느끼도록 의도하는 선한 행동은 이미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부정적인 감정을 목적하는 나의 의도된 행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선할 수 있을까요?
4. 숯불의 의미
분명한 것은 오늘의 본문이 세상의 악에 대한 성도와 교회의 적극적인 대응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권면 가운데 숯불과 머리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레이 스테드만’이라는 신학자는 이 문제에 대한 가능성 있는 답을 제시합니다. 그는 두 가지 샘족의 문화적 현상에 집중했습니다. 먼저 샘족 문화권에서는 숯불을 사용하여 불을 붙였습니다. 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보존해야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릇을 사용하여 물건을 운반했는데 많은 경우 그릇을 머리에 지고 날랐습니다. 그는 잠언 25장을 해석하기를, 원수의 집에 불씨가 꺼진 상황을 먼저 상상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원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원수된 관계에서 상대방의 불행을 즐거워하거나 조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절 본문은 원래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아주 반대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의 일반적인 대응과는 아주 반대로 행동하라”는 권면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했습니다. 그런 행동이 의미는 무엇인가하면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어떤 불행이나 어려움이 생기든지 언제든지 돕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불씨 하나를 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언제든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숯불을 머리 위에 쌓아두는 것과 같습니다.
피터 코터렐과 맥스 터너라는 신학자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잠언 25:21-22를 23절과 함께 묶어서 보려고 했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1-23) 23절에서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라는 구절에서 그들은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북풍’이 비를 가져오는 바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북풍과 함께 비를 가져오는 지역은 애굽 지역이었습니다. 잠언이 고대 근동의 많은 나라들에서 영향을 받고, 유대교적 전통으로 해석된 바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혹 애굽의 전통 중에 숯불과 관련된 지혜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클라센이라는 신학자는 이집트의 문서 ‘멤피스의 대제사장 이야기’라는 책에서 숯불에 관한 전통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머리에 숯불이 담긴 토기를 이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의 참된 자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재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나에게 악을 행한 원수를 오히려 먹이고 입할 때 그가 자신의 잘못을 더 잘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원수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를 회개로 인도하라는 말씀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회복된 관계’에 집중해서 본다면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말씀이 의도하는 바 그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원수적 관계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회복된 관계의 삶을 사는 성도와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때로 그것은 다른 사람이, 혹은 심지어 다른 성도가 내게 원수적 행위를 할지라도 그와는 ‘아주 반대로’ 우리는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며 먹이고 입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변화를 그에게도 일어나게 하며, 내게 적용된 회복된 관계 속에 그를 인도하는 길이 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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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으로 살아 가면서 때로는 합당하지 않은 분노가 교회적 관계를 해치기도 하고, 때로 신앙적이지 않은 행동과 말이 교회 안에서 오고 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서로 원수되었습니까?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습니까? 우리의 대답과 행동이 일치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화평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관계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화로에 가득담긴 숯불(온정이다)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로마에 살고 있는 교회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떠한 생각을 할 것인가?
자신들이 살아온 문화 속에서 도저히 이해하라 수 없는 말이 었을 것이다
로마 사람들에게 있어서 원수는 힘으로 갚아야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공의로 여겼다.
원수를 갚은 것은 자신이 마땅히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신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하여야 합니까? 라고 질문할 때에 바울사도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셨다고 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이 말씀은 신명기 32:35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신 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보수 곧 원수를 갚은 것은 내것이라 하셨다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에게 내가 부복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으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 원수가 주리고 있는 것을 내가 보고
목말라 하는 것을 내가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생소한 사람이 아니다.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 아니다.
유대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
공동체 관계를 깨뜨리는 일을 한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수다.
그들에게 내가 똑같은 일을 행하여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한다.
마치 사울과 다윗과 관계와 같은 것이다.
다윗은 끝가지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은 원수를 갚지 아니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라고 한다.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고 하신다. (롬12:20)
(잠 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잠 25:22)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내가 먹이고 마시는 것은 그 사람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것아서
성경의 해석은 성경이 기록이 되었을 때에 살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대 부분의 가정에는 화로에 불을 담아 놓는다,
성전에도 지금 같은 난방 시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에 화로가 있다.
화와로를 밤에 난방용이며 또한 간단한 조리용으로 사용이 되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화로에 담아 두는 숯불을 꺼지게 해서 안된다.
그런데 불이 꺼지게 되면 식구 중에 한 사람이 화로를 들고
옆집으로 가지고 가서 불을 얻어 와야 한다.
옆 짚에서 불을 빌려 가지고 머리에 이고 오는 것이다.
그런데 옆집 여주인이 마음이 관대하면 화로에 숯불을 가득하게 채워준다.
원수가 주릴 때에 먹이고 목마를 때에 마시우는 것은
불이 꺼진 화로에 숯불을 가득 채워주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남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람을 대할 때에
그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되 최대의 관대함을 가지고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머리에 숯불을 넉넉하게 주어서 이고가게 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뉘우치고 회개하게 된다는 듯이 아니다
원수에 대하여 어떻게 하시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나의 행동은 전적으로 세상의 원리와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내가 원수를 갚지 말고 그 문제는 하나님의 몫이라는 말씀에 순종하고
그 원수된 사람의 주림과 목마름이 있을 때에
그의 고통을 보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고
관대함으로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행동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상을 주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크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마음을 먹고 행동하다가
그 사람에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지금까지 모든 행동을 취소하기 쉽다.
그러나 원수를 갚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관대하게 행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와 만나는 사람,
친족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한 직장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이다.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누구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수로 행한 사람에게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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