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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황혼」

by 이덕휴-dhleepaul 2019. 9. 23.

「우상의 황혼」 읽기(완성)  by 김상범 May 09. 2016

0.

니체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우상들과의 전쟁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많은 우상들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니체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는 실재물보다 더 많은 우상”들이 있다. 그리고 우상 일반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형식의 우상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니체가 이 책을 통해 싸우고 대결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상들 전체, 혹은 우상 일반이 아니라 “영구적인 우상들”이다. 이러한 영구적인 우상들은 “가장 많이 신봉된 우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이라고 불리우고 있지 않”는 우상이다.

니체는 철퇴를 통해 이러한 영구적인 우상들을 가격함으로써 이러한 우상들을 청진하고자 한다. 만약 이러한 우상들이 건강하고 단단한 것이라면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쉽게 깨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의사들이 “청진기를 갖다 대듯이 철퇴를 갖다 댄다.” 이러한 철퇴를 이용한 청진을 통해 영구적인 우상들은 가장 “공허한 우상”임이 밝혀진다.

1.

니체가 두 번째 장인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니체는 소크라테스를 단순히 하나의 개인으로 보지 않고, 퇴락해가는 삶의 하나의 전형이자 이러한 퇴락해가는 자들의 <구원자>로 보고 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더 많은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아테네 귀족들의 이면을 꿰뚫어 보고 있었고 자신의 경우가, 즉 자기와 같은 특이형이 이제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파락하고 있었다. 도처에서 같은 종류의 퇴락이 조용한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말할 나위도 없이 그는 답변으로서, 해결로서, 그리고 그 병례에 대한 분명한 요법으로서 훨씬 더 매력을 끌었었다.”(<소크라테스의 문제>,「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그리스도』(청하, 1982),pp.31~32)

소크라테스는 다른 모든 시대의 최고의 현인들처럼 “인생은 무가치하다”는 “우수에 가득차고 인생에 대한 진절머리가 가득”찬 생각에 갇혀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한 “현인들의 의견일치”가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니체는 “그런 판단에는 어딘가 병든 데”가 있으며 이러한 의견일치가 ‘생리상의 의견일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즉 “그 위대한 현인들이 쇠퇴의 전형”이고 인생이 무가치하다는 이들의 주장은 이러한 쇠퇴하는 삶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쇠퇴하는 삶, 즉 데카당스의 삶에 있어서 행복은 본능과 대립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잘 드러나는 것으로, 소크라테스는 본능이 이성에 의해 잘 제어되어야만 참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이성=미덕=행복이라는 이상한 공식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상승하는 삶에서 “행복과 본능은 한 가지”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논쟁의 방법으로서 변증법이 데카당스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논적이 가진 지능의 활력을 박탈”해버리는 “복수의 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가진 상민으로서의 “원한의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일종의 의사로서, 구세주로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변증법이 널리 받아들여진 이유가 그의 시대가 “본능들이 서로서로 적대적이 되어 가고 있었던” 아테네의 쇠퇴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그 당시 아테네가 “멸망하든가” 아니면 “터무니없이 이성적이든가”중에서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는 “병리학적 조건 속에” 있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장 엄격한 일광, 모든 것에 우선시되는 합리성, 밝고, 냉정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본능이 없이 본능에 적대되는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병, 또 하나의 병에 지나지 않았다.”(<소크라테스의 문제>, 「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p.32~33)

그리고 플라톤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형성함에 따라 소크라테스와 그의 사상은 ‘영구적인 우상’이 되었다. 그런데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서양철학의 뿌리는 근본적으로 본능과 삶에 적대적인, 즉 병적인 것에 의해 오염되어 있었다.

2.

니체는 이어지는 <철학에 있어서의 이성>이라는 장에서 소크라테스와 그 후계자인 대륙 철학자들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 온 감각을 부정하는 이성주의적 형이상학에 철퇴를 가한다. 이러한 이성주의적 철학은 “감각의 기만으로부터, 생성 변화로부터, 역사로부터” 벗어난 보편적인 개념을 “우상숭배”한다. 이로부터 <실재세계>와 <현상세계>의 이분법적인 대립이 생겨난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고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구분 속에서 차안의 세계가 아닌 피안의 세계를 지향해 온 종래의 형이상학은 “인생을 헐뜯고 깔보고 탓하는 본능”으로서의 원한에 의한 것이며, <실재세계>와 <현상세계>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퇴폐의 암시”이자 “쇠퇴하고 있는 삶의 한 징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세계>는 구체적으로 무엇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고 날조되어 온 것일까? 그것은 이성에 의해, 즉 “언어의 형이상학”에 의한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서구형이상학은 어떤 활동이든 그 주어가 있으리라는 문법적 믿음에 의해 행위와 행위자를 구별짓고, 이를 통해 <자아>를 날조해내고, 이러한 <자아>라는 실체에 대한 믿음을 “모든 것에 투사”시켜 <사물>과 <존재>를 날조해내게 된다. 니체는 이렇게 형이상학이 문법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된다고 본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법을 믿기 때문에 신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철학에 있어서의 이성>, 「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39)

3.

니체는 다음 장에서 <실재세계>라는 관념의 변화를 통해 서구 인식론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실재세계>로서의 이데아의 세계는 물질과 신체의 오류와 때를 벗은 순수한 영혼에게는 도달가능한 세계였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실재세계.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그는 그 세계 안에 살고 있으며, 바로 그 세계 자체이다.(비교적 지각있고, 단순하고, 설득력 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관념. 「나, 플라톤은 진리이다」는 명제를 바꿔 쓴 것 )"(<실재세계가 마침내 어떻게 하나의 신화가 되고 말았는가>, 「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41)

그런데 기독교의 지배에 의해서 이러한 <실재세계>는 피안의 세계로서 현세에서는 도달할 수 없으나 "현명한 사람, 신심 깊은 사람, 덕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세에 약속된 세계가 된다. 그리고 칸트의 비판철학을 통해 이러한 <실재세계>는 "도달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고, 약속할 수 없"는 세계가 되지만, 동시에 "하나의 의무이며 하나의 명령"인 세계가 된다.

그러나 실증주의의 발달과 함께 도달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실재세계>는 더 이상 의무와 명령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실재세계>는 “쓸모없고, 불필요하게 남아돌고 있는 하나의 관념”이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실재세계>를 폐기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실재세계>가 없어지게 됨에 따라 이러한 <실재세계>와의 대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가상세계> 또는 <현상세계> 또한 사라지게 된다.

4.

니체는 이어지는 장인 <반자연으로서의 도덕>에서 “정념을 죽여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 그대로 ‘반자연으로서의 도덕’인 기독교적 도덕을 비판한다. 니체는 정념을 뿌리 뽑아 근절시키고 거세시키는 것은 삶 자체를 “그 뿌리로부터 공격”하는 것이며 따라서 삶에 적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놀랍게도 이러한 금욕적인 도덕이 금욕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금욕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 그리고 금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자들”, 즉 너무나도 나약하고 퇴락하여 자기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자들이 욕망과 싸우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즉 이들은 너무나 퇴락해서 “자극에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의지박약을 겪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거세’와 ‘근절’로서의 기독교적 도덕이 “만약 눈이 죄를 짓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라는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우매함의 표현일 뿐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또한 이렇게 욕망과 정념에 대해 근절과 거세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 보다는 이러한 욕망과 정념을 <정신화>함으로써 “정념에 대한 지능적인 싸움”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욕망을 정신화하고 미화하고 신성화 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욕망을 <정신화>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는 적의(敵意)의 예를 들고 있다. 좀 더 수준 높은 정치는 적대를 근절시키고 해소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로에 대하여 물질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적의를 <정신화>함으로써, 즉 적의를 “훨씬 신중하고, 훨씬 사려깊고, 훨씬 참을성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니체는 “전쟁을 포기할 때 위대한 삶을 포기한 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른바 한 개인의 <내부의 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나 자신과의 투쟁 속에서만 나는 발전할 수 있고 좋은 성과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발전의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러한 적의를 <정신화>시키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나 자신과의 투쟁을 긍정하기 때문에 <영혼의 평안>이라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상태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앞서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에서도 이러한 안락과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가축떼의 욕망임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이 <정념의 정신화>를 통해 개인과 사회는 정념을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5.

니체는 여섯 번째 장인 <네 가지의 커다란 오류>에서 잘못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오류들에 대해 비판한다. 이러한 오류들에는 첫째로 원인을 결과로 잘못보거나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보는 오류가 있고, 두 번째로는 잘못된 원인을 설정하는 '가상적 원인의 오류'가 있다.

니체는 첫 번째 부류의 오류에 대해 이보다 "더 위험한 오류는 없다"고 못 박는다. 모든 도덕과 종교는 자신이 내세우는 미덕을 실천한 결과로 행복이 찾아올 것이고, 악덕을 실행한 결과로 불행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지만, 니체는 이와 정반대라고 말한다. 니체에 따르면 "자신의 덕은 자신의 행복의 결과다." 왜냐하면 상승하는 인간, 즉 행복한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어떤 행위를 피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어떤 가치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는 또한 모든 도덕과 종교가 '종족이나 민족은 악덕과 사치 때문에 퇴락하고 망해간다'라고 주장하는 데에 대해서도 오히려 악덕이나 사치가 종족의 퇴락의 결과로서 발생한다고 반박한다. 즉 생명력이 나약해져서 "강렬하고 빈번한 자극"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때 악덕이나 사치에 탐닉하게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두 번째 종류의 오류가 인간의 감정 대부분, 즉 “억제, 억압, 긴장, 폭발”등의 감정은 가상적 원인을 만들어내는 충동을 자극하고, 인간의 기억이 비슷한 상황 속에서 특정한 관념을 습관적으로 원인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특히 이러한 오류는 습관적이고 기지적인 것으로 미지의 것을 환원함으로써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니체는 말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마음을 달래주고, 편하게 해주며, 가볍게 해 주는 원인을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체험한 것,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을 원인으로 가정한다는 것, 그것이 욕구의 첫째 결과이다. 새로운 것,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것, 생소한 것은 원인으로서는 배제된다.”(<네 가지의 커다란 오류>,「우상의 황혼」, 『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p.53~54)

니체는 “도덕과 종교의 모든 영역은 이러한 가상적 원인의 개념에 속한다”고 말한다. 도덕과 종교는 유쾌한 감정이 신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또는 선한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불쾌한 감정이 악한 행위의 결과로서. 즉 죄의식으로서 생겨난다고 말하지만, 니체는 이렇게 도덕과 종교가 만들어낸 인과관계가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사람이 신을 믿는 이유는 충만과 힘의 느낌이” 그에게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 죄의식은 도덕과 종교가 심어놓은 환상에 불과하다.

6.

니체는『선악을 넘어서』에서 "도덕 역시 욕망을 표현하는 상징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도덕을 ‘상징 언어’로 보고 이 ‘상징 언어’를 해독하려는 시도는『우상의 황혼』에서도 계속된다. 니체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징후학으로서는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적어도 식자들에게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던 여러 문화나 내면세계에 대한 가장 귀중한 실상을 드러내 준다. 도덕은 징후 언어에 불과하며, 징후학에 불과하다.”(<인류를 “개선하는 자들”>,「우상의 황혼」, 『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57)

니체에 의하면 어느 시대에나 도덕은 인간을 <개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개선>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들이 존재해왔다고 한다. 하나는 동물적인 인간을 ‘길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유형의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는 전자의 대표로서 서구 기독교의 도덕을, 후자의 대표로서 인도의 마누 법전을 통해 표현된 도덕을 들고 있다.

기독교는 인간을 동물원의 동물처럼 길들였고, 이렇게 인간에게 “억압적인 공포감과, 고통과, 상처와 굶주림을” 주는 방법을 통해 인간은 “약화되고, 덜 위험스럽게 만들어”졌다. 이렇게 강력한 인간을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기독교에 대해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는... 찬다라적 가치의 승리이며,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들에게 설교된 복음이며, 짓밟히고, 불우하고, 체질이 허약하고, 특권을 갖지 못한 모든자의 <종족>에 대한 집단적인 반항이며-사랑의 종교로서의 불멸의 찬다라의 복수이다.”(<인류를 ‘개선하는 자들’>,「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60)

왜 기독교 도덕을 찬다라적 가치로 보는가? 그것은 니체가 기독교 도덕을 인도의 마누 법전에 의해 표현된 도덕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찬다라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최하위에 속하는 불가촉천민을 지칭하는데, 마누법전에서 강자, 고귀한 자들은 이러한 찬다라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존재로 그려진다. 모든 강하고 고귀한 것의 특권을 부정하고, 이 들 강하고 고귀한 자들을 길들여서 나약하고 위험하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도덕으로서의 기독교적인 도덕이야말로 ‘찬다라의 복수’라고 니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천민적인 것으로부터 강하고 고귀한 것의 특권을 보호하고 결국에는 이러한 강하고 고귀한 것을 ‘길러내는’ 도덕으로서의 마누법전이 신약성서보다 훨씬 건강하고 위대하다고 말한다.

7.

「우상의 황혼」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장인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에서 니체는 독자적인 예술론과 미학을 전개하는데, 이러한 예술론과 미학은 오늘날 읽어봐도 신선하다. 니체는 도덕을 부정하고 예술이 도덕에 복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비판한다. 니체는 예술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향상시키고 고양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폐기해버렸다고 해서 예술이 “완전한 무목적, 무목표, 무의미한 것”이 될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니체는 예술이 “삶에 대한 커다란 자극제”여야 한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이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현대예술은 “삶 속의 추악하고, 험하고, 의문스러운 많은 것”을 표현하는데 그 본질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니체는 “추함은 퇴락의 표시이자 징후로서 이해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니체는 논리적 아포리아에 빠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퇴락할 위험이 전혀 없는 순수한 상승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을 상승으로 이끄는 힘과 삶을 퇴락으로 이끄는 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구성하고 있다. 진정한 예술은 이렇게 삶을 퇴락으로 이끄는 힘에 대한 삶을 상승으로 이끄는 힘의 승리를 나타낸다. 진정한 예술은 “승리의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감상자들이 추악하고 험한 것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도 작품 속에서 예술가의 승리의 기쁨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움’의 느낌은 우리 내부의 “힘의 느낌, 권력의지, 용기, 긍지” 가 강렬해짐과 동시에 강렬해지며, ‘추함’의 느낌은 이러한 힘의 느낌이 약화될 때 강렬해진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리학적으로 고찰해 볼때 모든 추한 것은 인간을 약화시키고 괴롭힌다....힘의 느낌, 권력의지, 용기, 긍지-그것들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상승한다."(<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우상의황혼」,『우상의 황혼/반 그리스도』,p.83)

따라서 얼핏 보기에 '추한 것' 속에서 심층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만드는 현대예술은 삶을 상승시키는 힘을 느끼게 하는 "삶에 대한 커다란 자극제"라고 말할 수 있다. 니체는 진정한 예술의 본질이 "힘의 충만과 상승의 느낌"으로서의 '도취'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도취'에 의한 충만과 상승의 느낌 속에서 예술가는 "모든 것을 풍부하게 만든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런 상태의 사람은 사물을 변모시켜 마침내 사물이 그의 힘을 반영하게 된다. -사물이 그의 완전성의 반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한 것으로 변모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예술이다."(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탐험>,「우상의 황혼」,『우상의 황혼/반그리스도』,p.76)

이러한 '도취'에는 아폴론적인 도취와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있다. 아폴론적 도취에서는 눈이 긴장되어 환상을 보게되고, 디오니소스적 도취에서는 감정체계 전체가 긴장되고 강화된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도취 속에서 인간은 '변신'을 겪게 된다.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비극의 탄생』서평에서 다룬 바가 있으므로 생략한다.

8.

이렇게 소크라테스, <실재세계>, 금욕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 예술을 위한 예술등의 우상들은 철저하게 비판되는 데, 이러한 비판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바로 ‘삶’이다. 니체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소크라테스 자신의 삶에 대한 병적인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현상세계>와 <실재세계>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쇠퇴하고 퇴폐한 삶에 대한 암시이고, 금욕적이고 기독교적인, ‘정념을 뿌리 뽑는’ 도덕은 삶=생명에 대한 폭력이고, ‘예술을 위한 예술’은 예술이 ‘삶에 대한 커다란 자극제’임을 망각한 주장이다. 이처럼 이 책은 ‘삶’을 위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상승하는 삶에 대한 찬미와 퇴락하는 삶에 대한 경멸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니체는 ‘이기심’조차도 그것이 상승하는 삶의 것인가 아니면 퇴락하는 삶의 것인가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상승하는 자의 이기심은 장려되어야 하고 퇴락하는 자의 이기심은 억제되어야 한다고 니체는 이 책에서 주장한다. 이렇게 니체는 ‘삶’=‘생명’의 철학을 이 책에서 급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서 니체가 이 책을 통해서 목표한 바가 분명히 드러난다. 니체는 삶을 퇴락시키는 ‘우상’을 철퇴로 부수면서 ‘상승하는 인간’을 위한 길을 열어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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