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기원전 43년)
마르쿠스 툴리우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1월 3일~기원전 43년 12월 7일)또는 치체로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또는 치체로는 로마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이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라티움의 아르피눔(Arpinum) 지방기사(Eques)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아들의 출세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수사학, 웅변술을 스카이볼라 밑에서 익히면서 전설적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세계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철학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이드로스에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까지 군복무를 했다.
기원전 88년에서 82년에 걸쳐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당시의 원로원의 후원을 받던 술라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동안 키케로는 아카데미학파의 필론 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게 된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79년에서 77년 사이에 아테네,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고 로도스 섬을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정치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에 선출된다. 5년 뒤 안찰관에 선출되어 재임 기간 동안 유명한 베레스 반박문을 쓰고, 기원전 66년 법무관에 선출되어 당시 정계의 실권자 폼페이우스를 지지하는 변론을 쓴다. 43세의 나이로 (기원전 63년) 이른바 지방 신출내기(homo novus)로서 로마 최고 관직인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재임시 카틸리나 역모 사건을 적발하고 원로원 최종권고(senatus consultum ultimum)를 선포한 뒤, 일당 5명을 붙잡으면서 로마를 위기에서 건졌지만, 이때 재판도 없이 혐의자를 처형한 문제로 나중에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존 원로원 체제의 문제점을 공격하는 도구로 그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기원전 60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그리고 크라수스가 제1차 삼두정치 협약을 하게 되자 공화국 체제를 고수하는 키케로는 이들 실권자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더군다나 키케로에게 개인적으로 유감이 있는 클로디우스는 이 기회를 틈타 키케로가 집정관 재직시 카틸리나의 모반 가담자 5명을 불법으로 처형한 사실을 들추어내어 고소를 함으로써 키케로를 약 1년 6개월 동안 (기원전 58년 3월 - 57년 8월) 로마에서 추방시킨다. 귀향 허가를 받아 로마로 돌아와 정계에 거리를 두면서 주로 저작활동을 한다. 이 시기(기원전 55년 - 51년)에 키케로는《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 《키케로의 국가론》(De re publica), 《법론》(De legibus)등을 썼다.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사이에 벌어진 로마 공화정의 내전에서 키케로는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 하는 갈등 끝에 결국 원로원파인 폼페이우스 진영에 가담한다.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함으로써 내전이 끝나자 키케로의 운명은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에 달리게 된다.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한 후 키케로를 사면해 주면서 심지어 로마를 위해 계속 정치 활동을 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점점 눈에 드러나 보이는 일인 독재 정치에 무력감과 회의를 느끼면서 주로 철학을 주제로 한 책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낸다.
정치적 불만과 함께 기원전 45년에는 사랑하던 딸 툴리아가 사망함으로써 키케로는 삶의 보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키케로는 공화정을 되살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으로 특히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탄핵하는 필리피카이(philippicae)를 발표하여 일인 독재와 폭력 정치를 규탄한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법적 상속자인 젊은 옥타비아누스를 과소 평가하여 정치적으로 기만하지만, 곧 제2차 삼두정치에서 자신의 노력이 헛되었음을 실감한다.
안토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다
기원전 43년 12월 7일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카이에타에서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카이사르와의 친분
“ 나를 잘 이해해주는 당신이 하는 말이니까, 내 행동에선 어떤 의미의 잔인성도 찾아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은 믿어야 할거요. 그렇게 행동한것 자체로 나는 이미 만족하고 있지만 당신까지 그리 찬성해주니 만족을 넘어 기쁘기 한량없소.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해도, 나는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거요.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
— 카이사르의 답장, 카이사르의 내전에서의 관용을 칭찬한 키케로의 편지에 대해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와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 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키케로는 갈리아에서 카이사르에게 친구와 친지들의 인사 청탁(人事請託) 편지를 자주 쓰곤 했고, 카이사르는 기꺼이 응했다. 동생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자, 카이사르에게 동생을 청탁했다. 그리하여 퀸티우스 시세로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장으로 종사하며 갈리아에서 전공을 세웠다.
키케로와 고전 라틴어
정치가로서 키케로는 역사의 거센 흐름에 좌절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반면, 문학자로서 그의 이름은 라틴어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이른바 고전 라틴어는 키케로에 의해서 비로소 그 틀이 잡혀졌으며 그의 라틴어 문체는 곧 고전 라틴어의 표본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이 4세기 중엽까지 로마 제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 밑에 있는 동안 라틴어는 이들 지역에서 이른바 관용어로서 쓰이게 되었으며, 로마제국의 멸망 후 중세기를 거쳐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는 계속 문어로서 두루 쓰여졌다. 여기에서 라틴어 문어를 올바로 쓰고 배우는 첫과정에서 언제나 키케로의 변론문을 라틴어의 표본으로 삼았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오늘날까지 라틴어를 배우는 데에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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