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에 해당되는 글 5건
- 2019.03.22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1>
- 2018.12.28 중세철학 정리<3> 아우구스티누스(2) -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의 철학과 삼위일체 논쟁
- 2018.12.28 중세철학 정리 <3> 아우구스티누스(1) - 플로티노스의 철학
- 2018.12.27 중세철학 정리 <2> 중세 철학 사상가 및 기독교 관련 인물들
- 2018.12.27 중세 철학 정리 <1> 초기 교부들의 사도 바울 수용에 대하여- De vera religione(신실한 종교)
이 글은 김춘오,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번역 김춘오, 누멘, 2009를 요약 정리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
토마스는 로마와 나폴리의 중간쯤에 위치한, 아퀴노Aquino라는 마을 근처에 있는 봉건 귀족 가문에서 1225년 로카세카 성에서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 란돌포Landolfo de Aquino와 어머니 카라촐로 가문의 테오도라Theodora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해, 토마스는 몬테카시노의 베네딕도회 수사들로부터 처음으로 수업을 받았고, 1239년에는 나폴리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7자유학과와 기초 교육을 받았고, 논리학은 마르티누스Martinus로부터, 자연철학은 페트루스Petrus de Irlanda로부터 수업을 받았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탐구했다.
1244년 토마스는 나폴리 대학 출신 요한네스 데 산 줄리아노 신부의 지도로 나폴리의 도미니코 수도원에 들어간다. 이로 인해 베네딕도 수도회의 성직자나 수사가 되기를 바랐던 집안과 충돌했으나, 그의 고집을 꺾진 못하였다.
1248년 여름, 파리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회 장상들의 결정에 의해서, 토마스는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와 함께, 도미니코 수도회의 학원을 설립하기 위해, 동시에 사제직을 준비하기 위해 독일 쾰른으로 이동했다. 토마스는 퀼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한 주해자인 알베르투스로부터 배웠다.
1252년 사제로 서품을 받고, 신학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가 모든 수업을 마쳤다. 토마스는 파리에서 1256년까지 롬바르두스의 <명제집 주해>를 강독했고, 성서 강사로서 성경을 주해 강의했다.
토마스는 1256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로부터 교수 자격을 부여받고 불과 30살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3년 동안 <유와 본질>, <삼위일체론 주해>, <존재에 대한 설명론 주해> 를 집필한다. 그는 성경을 교재로 한 강의legere 및 설교praedicare, 이사야 예언서에 대한 주석과 마태오복음, 요한복음, 바오로 서간들에 대한 주석을 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안 했던 정규 토론disputare를 묶어 <진리론De Veritate>를 출판한다. 1259년, 도미니코회 영국인 수사인 윌리엄William Alton에게 신학 교수직을 물려준 토마스는 이태리로 돌아간다. 그 후 6년동안 이태리에 머물며 1265년까지 나폴리의 도미니코 수도원과 여러 궁정 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비테르보와 오르미에토의 도미니코 수도회 강사로 머물면서 강의를 했다.
그는 1265-1267년 도미니코 수사들을 위한 학원을 개설하고, 운영 책임을 맡게 되어 로마로 이동했고 성 사비나에서 2년동안 신학을 강의했다. 1267-1268년 그는 비테르보에 있는 클레멘스 4 교황의 궁정에 머물렀다. 이 기간에 토마스는 로마에서 신학에 대한 새로운 형식들을 구상하면서, 옹성한 연구 활동과 활발하게 책을 저술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유대인들과 이슬람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한 신학 입문서인 <이교도 대전Summa Contra Gentiles>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권능론>도 집필했다.
1269년 토마스는 다시 파리 대학으로 갔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오해를 토론과 저술을 통해서 신앙과 지혜를 명확하게 논증했다. 특히 파리에서 토마스는 두 가지 논쟁,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해서 브라방의 시게루스Siger de Brabant를 중심으로 한 아베로에스주의자Averroismus와 신플라톤주의를 추종하는 프란체스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Augustinismus들과 대항하여 진지하게 토론했다.
첫째,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아베로에스주의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타협함이 없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지지했고, 둘째, 세속적, 이교주의라 불리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반대하는 보수적인 프란체스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에 대항하여, 토마스는 정확하고 명확하게 믿음을 훼손하지 않았고, 조심스럽게 논증하며, 그들과 사려깊은 논쟁을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토마스는 아베로에스의 추종자들을 대항하여 아베로에스주의를 반대하는 지성 단일성론<De Unitate Intellectus>과 프란체스칸에 반대해서 <세상 영원성론De Aeternitate Mundi>을 저술했다. 파리에서 3년 동안 토마스는 경이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정확한 해석과 주석을 하는데 한계가 없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요한 작품들에 대한 주해 및 저술서를 냈다.
1272년 그는 도미니코 회원을 가르치기 위한 새로운 대학을 나폴리에 설립하기 위해 또 다시 이태리로 돌아왔고, 나폴리대학에서 가르치기 위해 나폴리로 이동했다. 토마스는 파리에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대한 주해 작업을 지속적으로 펼쳐갔으며 그의 저술활동은 이 시기에도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중, 신비 체험을 했고, 그 후 그는 모든 학문 활동을 멈추었다.
나는 계속할 수 없다. (...) 내가 지금까지 작업했던 것이 나에게 계시된 것과 비교하면 지푸라기에 불과하다.1)
그 이후 토마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로부터 리용Lyons 공의회에 초빙되었다. 1274년 토마스는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리용으로 가는 도중 병을 얻어 조카 프란체스카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토마스의 원의에 따라 포사노바Fossanova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갔고, 그 수도원에서
1274년 3월 7일 4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토마스는 1323년 7월 21일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되었고, 1576년 교황 비오 5세로부터 공통 박사Doctor communis와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는 Doctor Ecclesiae 칭호를 받았다. 1880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rtris>에 의해서, 교황은 토마스의 사상에 따른 그리스도교 철학의 부흥을 추진했고, 토마스는 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 신학자가 되어, 가톨릭 학교의 주보성인이 되었다. 토마스는 교회 안에서 항상 위대한 스승으로 남아 있다.
1998년 10월 1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이성과 신앙>에서 토마스 철학의 우수한 기차와 위대함을 재차 확인했다.
토마스 철학의 기원
다방면에서 천재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경 주해와 철학과 신학, 특히 철학 분야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어넘어 존재의 완전성으로부터 형성되어 절대적인 기초가 되는 새로운 철학적 체계, 새로운 차원의 존재 철학의 창안자이다. 토마스는 플라톤도, 디오니시우스도, 아비체나도, 아베로에스도, 디오니시우스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종합적인 사상도 아니다. 토마스의 사상은 전통과는 다르게 권위가 있고, 활기차고 새로운 기원을 형성하는 토마스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상 체계이다.
토마스의 주요한 사상 체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유래한다. 그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이론, 가능태와 현실태, 4가지 원인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플라톤으로부터 분유론과 유비론을 수용했다. 그러나 토마스의 체계는 관념주의, 이성주의, 플라톤주의의 사상 체계와는 다르다. 이러한 사상 체계가 절대자에 대한 묵상과 함께 형이상학을 시작으로 해서, 사물에로 내려오는 하강적인 구조 체계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존재 사물에서 출발해서 절대자인 신에게로 나아가는 상승 구조 체계이다. 즉 사물들의 연구 안에서 절대자 신을 찾고, 다시 궁극적인 존재인 신으로부터 사물의 충만함을 이해하는 사상 체제이다.
그래서 토마스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실재론이다. 토마스는 추론한 존재의 실재로부터 가정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상으로부터 움직이고 실재의 상황 안에서 존재를 심도 있게 연구했다. 철학의 시작과 함께 존재Esse 문제를 제기한 토마스는 플라톤적 영감과 플라톤주의를 극복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 철학도 극복했다.
토마스는 본성에 감춰진 한계, 밑바닥 끝에서 존재에 대한 문제를 심도있게 탐구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향 즉, 존재자ens를 구성하는 그 자체, 양상에 따른 존재자의 연구에서 존재를 존재esse에로 방향 수정했다.
그는 개별적인 양상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유를 구성하는 것에 따라서, 즉 존재에 따라 연구를 시작해서, 유들의 존재 앞으로 올라가 마침내 지속적인 존재, 자립적인 존재 자체Ipsum esse의 순수함에 도달했다. 또한 토마스의 사고는 존재에 관해서 최고의 존재에 집중했고,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존재 자체, 지속되는 항구한 존재와 실존의 충만한 궁극적인 존재 자체에 도달했다.
결론적으로 토마스의 형이상학 체계는 다음과 같다. 최고의 완전한 자립적인 존재 자체이다. 존재로부터 유의 기원은 창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창조란 존재 자체의 완전성에 의한 분여participans로 말미암아 유들이 현존하는 것이다. 유들 안에 존재의 완전성의 한계는 가능성이고 이것이 곧 본질이다. 따라서 유들은 본질과 존재가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이는 토마스가 유와 존재 원인을 근원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한 결과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최고의 완전성은 존재 자체이고, 다른 완전성은 존재 자체로부터 존재를 분여받는 유라는 사실을 인식하여 그 근원과 기원을 발견한 존재철학자philosophia essendi이다.
1) processus canonizationis Neapolie. n. 79 [본문으로]
'중세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마스 아퀴나스의 형이상학 <1> (0) | 2019.03.22 |
---|---|
중세철학 정리<3> 아우구스티누스(2) - 마리우스 빅토리누스의 철학과 삼위일체 논쟁 (0) | 2018.12.28 |
중세철학 정리 <3> 아우구스티누스(1) - 플로티노스의 철학 (0) | 2018.12.28 |
중세철학 정리 <2> 중세 철학 사상가 및 기독교 관련 인물들 (0) | 2018.12.27 |
중세 철학 정리 <1> 초기 교부들의 사도 바울 수용에 대하여- De vera religione(신실한 종교) (0) | 2018.12.27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 철학/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의 체계 (0) | 2019.12.01 |
---|---|
고대 철학/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탈레스 (0) | 2019.12.01 |
근대 철학/헤겔 (0) | 2019.12.01 |
신학과 철학 -Wolfhart Pannenberg (0) | 2019.11.26 |
Marcus Tullius Cicero (0) | 2019.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