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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神學資料

알트 노트 학파의 방법론(전승비평학) 비판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2.

알트 노트 학파의 방법론(전승비평학) 비판   


현대 구약성서학을 석권하고 있는 성서비평학적 방법론은, 그 방법론의 정당성을 우리가 인정하든지 않든지 간에, 저 유명한 폰·라트의 "구약신학"을 배태시킨, 이른바 알트·노트학파(The Alt-Noth School)의 전승사적 연구방법(Traditio-historical method)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인 알트와 노트를 그 주축으로 하는 이 학파는 역시 그 주요 관심을 신학적 문제에 두지 않고 역사적 문제에 두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그 역사적 기원과 그 초기역사를 서술하는 데 궁극적 목표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결코 단일민족으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대 중동의 역사 속에서 이름없이 자라난 여러 부족들의 혼혈 및 복합에 의해서 형성된 "복합민족"으로서 출발한 역사였고 오랜 기간의 "이동하는 삶"을 산 반(半)유목민들(semi-nomads) 또는 이동방목자(transhumant nomads)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 역사형성의 과정은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기원과 초기 모습을 기술하려는 역사가의 과제는 매우 무겁고 어렵다 하겠다. 따라서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사가(史家)는 모름지기 그의 손에 이미 주어져 있는 기록된 사료에만 의거할 수는 결코 없으며 그러므로 그 사료가 형성되기 이전의 과정과 그 사료가 역사가의 손에까지 전래되는 그 전래과정, 즉 역사적 사건들의 그 전승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이 학파의 역사연구의 원리였다.


비로소 여기에 "전승"( berlieferung)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 경우 "전승"은 분명히 하나의 역사를 갖고 있다. 즉 각 전승들의 그 본래적 "삶의 자리"(Sitz- im-Leben)와 그 전승들이 사료로 완성된 형태 사이에는 "오래되고 복잡한 전래의 역사"(a long and complex history of transmission)가 구전으로 또는 서전의 형식으로 개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알트·노트의 역사연구는 바로 이러한 전승의 역사를 탐사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고된 작업은, 알트·노트의 무게 있는 여러 저작들 가운데서 진지하게 진행되었는데 이에 관련된 그 주요한 저작들로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들 역저들 속에 나타난 알트·노트의 이스라엘 역사연구와 구약성서 비평학의 방법론은 19C를 풍미했던 역사비평적 방법과 20C 전반을 석권했던 양식비평적 방법의 극복으로 나타났는데 이에 대한 가장 예리한 도전은 역시 고고학분야의 학자들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논지는 올브라이트(W. F. Albright)의 비평을 기초한 브라이트(J. Bright)의 평가를 중심으로 하고 전개하겠다.



1. 만능적 도구로서의 양식비평적 연구가설


알트·노트학파의 방법이 가지는 그 장점은 사료에 대한 문서비평, 즉 벨하우젠(Wellhausen)에게서 그 절정을 본 고전적 문학비평(역사비평학적 문서비평)에 철저히 기초를 두고 거기서부터 그 연구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실로, 사료에 대한 사료로서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일은 역사가의 건전한 태도 중의 하나라 하겠는데 이 학파는 이러한 사료비평을 철저히 이행한 후, 이 역사문서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단지 하나의 "시작"으로만 보고 그 사료 배후의 전역사에 대한 탐구로 넘어간 후 곧 양식비평적 방법을 채용하여 그 양식비평적 도구에 의하여 전승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략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알트·노트는 양식비평적 방법에게 그 지고 갈 수 있는 이상의 짐을 지우므로 우리가 가진 전승자료들의 그 역사성 조차 문학양식에 대한 조사에 의해서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에까지 도달한다. 즉 그들은 전승자료들의 문학양식이 곧 그 자료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최종 판단자가 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양식비평적 방법은 전승사 연구의 필요불가결한 도구이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적절히 자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만능적 도구로 사용된다면) 역사를 어떤 형식화한 주제(motif)속에 고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족장설화들을 전적으로 전설적인 사담(saga)에로 돌려버리므로 그 역사성을 제거해 버리는 경우 등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그러므로 양식비평은 전승자료의 양식에 대한 그 역사성의 판단자로서가 아니라 그 전승에 대한 평가와 해석을 통제(control)하는 기능으로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역사자료에 대한 그 역사성을 판단하는 일은 객관적이고 외적인 증거가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트(M. Noth)의 "이스라엘 역사"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배타적으로 여호수아가 주도한 세겜 12지파동맹(Amphictyony)에게로 돌리고 이 지파동맹의 주요 동기를 중앙성소의 공동예배에서 찾았다.



"이스라엘은 12지파의 종교연맹이라는 형태를 띤 하나의 역사적 실재로 조직되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의 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기본적 의의를 가진다" "중앙성소의 야훼 앞에서 드리는, 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로서의 법궤 앞에서 드리는 공동예배(cf. 삿 20 : 26f)는 이스라엘 공동생활의 가시적 표현의 그 원초적 모습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배에 관해서는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아마도 그것은 특별한 "때"에 전체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드리는 규칙적인 희생제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마틴 노트는 어떻게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유하자마자 곧 공통된 신앙으로 뭉쳐진 지파동맹을 결성하여 자신을 "통합된 전체"(a unified whole)로 인식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 던지면서 또한 그이 자신이 이 물음에 대하여 명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였다. 단지 그는 그 물음에 대한 최소한 있을 법한 답변을 추리해 내기를 "이스라엘의 통일성과 그 신앙은 어느 한 날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 땅 안에서 한 핵으로부터 점차적인 발전을 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하여 그는 지파동맹을 형성한 그 신앙적 동기의 기원을 "팔레스틴 안에서 점차적인 발전"이라는 말로 얼버무려 버렸는데 결국 그는 <팔레스틴 정착 이전에는> 그 어떠한 종류의 지파동맹이나 이스라엘 신앙의 존재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배척해 버린 셈이다.



물론, 야훼 신앙을 가진 지파동맹이란 사사시대의 주요 관심이긴 하지만 그러나, 비록 노트 자신이 "갑자기가 아니라 점차적 발전"이라고 못박아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파동맹을 주도한 "공동신앙"의 형성이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왜냐하면, 야훼신앙을 가진 지파동맹이 드보라시대(B.C. 12C)에도 이미 명백한 작용을 하고 있어서 가나안 정착기와 드보라의 시기와의 사이가 그와 같은 일사불란한 공동신앙 형성을 위해서는 너무 짧은 기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불가피하게 "모세전승"에 관한 시비에로 확장된다. 노트에 의하면, 모세는 오경설화 밖에서는 별로 크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시내(Sinai)에서 일어난 사건과는 역사적 연결이 없는 인물로서,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그를 이스라엘 민족의 창건자, 또는 율법을 준 자로 기술할 수는 없고" 오직 그의 역사성을 말하는 가장 구체적인 사실은 다만 "요단 건너편" 에 있는 무덤전승(the tradition of the tomb of Moses) 뿐이며 이로 인하여 모세는 중앙 팔레스틴의 지파들에 의하여 땅 영유의 주제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비록 알트가 "여호수아"를 전승해석자 또는 지파분쟁의 조정자로 등장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파동맹이란 그 추진하는 창건자 없이 지표 위로 솟아났는데 민족 창건자를 등장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때, 별로 색깔 없는 한 인물을 민족지도자로 갑작스레 조작해 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한 이름 없는 "요단 건너편"의 부족지도자가 그렇게도 빨리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창건자로 존경받게 되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모세전승을 무(無)로 돌려버리고 지파결성의 기원을 팔레스틴 안으로만 국한하므로 이스라엘 신앙의 기원에 관한 주제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은 그의 방법론 자체를 회의하게 만든다.



알트·노트학파의 방법론적 가설 중에서 가장 색깔이 짙고 가장 많은 비판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원인론적 역사해석의 강조이다. 즉 원인론적 사화들(Etiological tales)은 후대 자녀들의 물음(Kinderfrage)인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하여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야곱이 세겜에서 땅을 사들였다는 사화(창 33 : 19)는 후대지파동맹이 거기서 땅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의 원인론적 설명이며 야곱이 세겜으로부터 벧엘로 순례한 것(창 35 : 1-8)은 후대 제의 의식의 원인론적 설명이고,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삭번제에 관한 사화(창 22 : 1-19)는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방제의의 관습"(local cultic custom)에 대한 원인론적 설명이라고 보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원인론적 설화들은 성서 속에 자주 나타나고 있으므로 문제는 고대사화들 속에 원인론적 요소가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론적 요소와 그 전승내용 사이의 그 우선권(priority)을 전승 내용 보다는 오히려 그 설화 속에 들어 있는 원인론적 요소에 부여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즉 그 설화들의 기원을 후대의 어떤 절기, 제의, 관습, 어떤 영웅의 이름 등에 두고 그 절기, 제의(祭儀), 관습, 어떤 영웅의 이름 등이 가진 그 원인론적 요소가 그것에 관한 여러 가지 전승을 창조해 내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전승내용들은 그 역사성이 철저히 거부당하고 만다. 그러나 존·브라이트는 원인론적 요소들이란 그 설화의 극히 세부적인데만 적용될 뿐으로서 전승의 프라이마리(primary)가 아니라 세컨더리(secondary)라고 말한다. 예컨대 에서와 야곱의 출생에 관한 설화는 "야곱"이라는 말과 "발 뒤꿈치"라는 히브리 언어의 동의성이라는 원인론적 요소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야곱"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원인론적 동인이 야곱에서의 출생에 관한 전승을 창조해 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존·브라이트에 의하면, 특히 국가 발생에 관한 전승에 원인론적 해석을 적용한다면, 필그림(pilgrim)들이 미대륙의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하였다는 설화는 전혀 플리머스 해변에 세워진 "돌"("오늘날까지 거기 있더라!")이 가진 원인론적 요소가 창작한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해진다고 주장하고 ("아이"성에 세워진 돌무더기 처럼?) 그밖에도 풍성한 칠면조 고기의 식사 관습이 곧 미국의 추수감사절 전승을 창조했다든지 로퍼스·락(Roper's Rock)에 얽힌 사화가 곧 미국의 남북전쟁 설화를 창조해 내었다고 하는 이론이 가능해지게 된다고 비꼬아 말한다. 즉 전승과 관습(또는 절기, 제의 등) 사이의 그 프라이오리티를 결코 관습에 둘 수는 없다는 것, 전혀 그 프라이오리티는 전승의 내용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길갈에서 행한 할례에 관한 전승(수 5 : 2-9)이란 후대에 그 성지에서 시행되었던 할례의식의 제의를 설명키 위한 원인론적 사화라고 보는 경우와 같은 형식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이스라엘 "사가(saga)"들 안에 나타난 사건들의 그 역사성에 대한 탄핵과 회의주의적 부정(pessimistic negation)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바벨탑 설화나 타락설화의 경우처럼 원인론적 색깔이 짙은 경우라 할지라도 그 설화들이 원인론적 형태를 갖추기까지는 오랜 역사가 개재되어 있었으며 신앙고백적 동인이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 될 것이다. 문제는, 전승과 그 속에 담긴 원인론적 요소 사이의 우선권(priority)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데 있다.


알트·노트에 의하면, 모든 전승은 어떤 지리적 장소와 제의장소에의 접착점(Haftpunkt)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야곱 전승들은 세겜과 벧엘에, 아브라함과 이삭전승은 네겝 또는 헤브론에, 롯전승은 소알의 어느 동굴에 모세 전승은 요단 건너 바알브올(벧브올)의 무덤에 지역화해 버린다. 즉 장소와 장소 이름이 끈질기게 그 전승들에 접착되어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트·노트의 장소예속화의 원리에 대하여 존·브라이트는, 일방적이고도 그리고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인 교조주의적 일관성(doctrinaire consistency)을 가진 것이라고 비난하고 전승들은 장소예속성(Ortsgebundenheit)을 가진 것이 아니라 민족예속성(Volksgebundenheit)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승의 장소예속성을 비판하고 민족예속성을 주장하는 주요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첫째로서는 전승에 관련된 장소들은 그 전승의 접착점(Haftpunkt)이 아니라 전승작용의 현장(Theatre of operatio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지역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 전승장소에 고정시켜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브라이트는 영국의 항복이나 미국의 남북전쟁을 버지니아(Virginia) 전승이라 할 수 있으며 미국 독립선언은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전승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전승이란 그 전승지역들을 변경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점은 야곱전승이 세겜에서 벧엘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 알트·노트 자신들에 의해서도 인정되는 바이지만 특히 히브리 유목민들의 가동성(mobility)을 통하여 명백하게 증명될 수 있다.


즉 반(半)유목민인 이스라엘 선조들에 관한 전승들은 그들의 가동적 삶과 함께 그 전승지역을 변경시키며 이동되어 갔기 때문에 세겜이나, 벧엘, 네겝, 헤브론 등의 어느 특수 지역에 접착시키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반[半]유목적 아메리카 원주민들인 인디언들의 삶과도 비교될 수 있다) 오경에 나타나 있는 히브리 민족들의 이동영역은 메소포타미아-팔레스틴-네겝-에집트에 이르는 반월형(半月形)의 넓은 지역이다. 그러므로 초기 이스라엘 전승들을 고정된 접착점에 지역화 시킨다는 것은 반(半)유목적 히브리인의 전승에 대한 가장 비현실적인 이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트·노트는 초기 이스라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하나의 확고한 기초로서 오경에 나타난 다섯 개의 주제 ― 족장들에 대한 약속, 출애굽의 구원, 시내산 계시, 광야인도, 땅 점령 ― 를 들고 이들 각 주제들은 각각 독립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 각기 다른 기원(起源)들로부터 발전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지나치리만큼 도그마적이고 그리고 확고한 규칙을 따라가고 있다. 초기 이스라엘 역사전승들이 이와 같은 분립된-각각 독립된 개별적인 ― 주요 주제들을 그 구성골격으로하여 축조되었다는 가설은 하나의 편견적 도그마로 보인다. 초기 이스라엘 역사가 독립된 주제들의 독립적인 발전이라는 이러한 규칙을 따라 축조되었다는 가정엔 아무런 보증이 없다. 예컨대 노트는 시내 전승이 신명기 26 : 5-9와 여호수아 24장에 결핍되어 있다 해서 출애굽 전승과 시내 전승이란 서로 다른 기원을 갖고 있으며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러므로 시내 전승은 후대에 연결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 전승의 누락이 곧 백성들의 그 전승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제왕시의 시인들은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무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특히 출애굽과 시내율법이 십계명(출 20 : 6, 신 5 : 6)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J나 E의 공동 기초 자료인 G(Grundlage)의 가설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알트·노트학파의 이러한 초기 이스라엘 전승사의 주제 설정을 하나의 편견적 도그마라고 비평한 존·브라이트는 시니컬하게도 영국 식민지하의 미 13주 연맹의 전승들을 이스라엘 역사신조(신 26 : 5-9, 수 24)에 대한 알트·노트식의 도식에 따라 열거한다(광야의 정착 ― 기미가 있는 폭풍 ― 세계에 들린 총격 ― 한 국가의 탄생 ― 패배의 밤 ― 최후의 승리). 그리고는 이와 같이 초기 미국의 전승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독립된 주제들로 나누어 놓는 것이 불합리한 표현이라면 노트가 제시한 초기 이스라엘의 전(全)전승사의 기초설정도 역시 불합리한 표현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결  언


변증법적 주관주의에 근거한 19C 역사주의의 방법론이 그 방법론에 대한 적절한 "제재"(制裁 : control)를 가하지 못할 때, 모든 종교사상은 저급한 데서 고급한 사상에로 발전한다는 도그마와 같은 하나의 독단적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음과 같이 양식비평적 도구의 경우나 전승사적 연구의 경우에서도 그 적절한 제재(制裁)가 동반되지 않으면 하나의 도그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20C 초를 석권한 양식비평적 방법은 이미 하나의 "보조적 도구"(Hilfsinstrument)로 물러나고 있다. 실로, 모든 학문적 가설은 그 명백한 제약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컨대, 전승사적 방법이 등장한 이래 웊살라 학파(Uppsala Schule)가 제기했던 제의적 해석이라는 주제는 곧 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실로, 여기에 학문적 가설의 지구력에 관한 문제가 생겨난다(Hier stellt sich einfach die Frage nach der Tragf higkeit der wissenschaftlichen Hypothesen). 전승사적 방법의 의의도 ― 편집자의 신학을 재건하려는 노력도 함께 ―점차로 줄어들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방법론적 성향 사이의 상호협동"(eine Kooperation zwischen verschiedenen methodischen Ans tzen)에의 가능성을 보고 거기서 생겨나는 보다 나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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