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귀한 일들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길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사라는, 믿음으로 이삭은,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모세는 귀한 일들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기록했습니다(히11:4-26). 모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귀한 일들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3-38). 성경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은 모두 믿음으로 귀한 일들을 많이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과 귀중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잠 잘 것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지식도 능력도 필요합니다. 가정도 직업도 재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가정과 교회에 필요한 것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인데 그 중에서 기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모든 불행과 비극은 불신과 미움과 절망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고 구원도 없고 영생도 없고 의롭다 함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2:5).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2: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4:3).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전파하신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스스로 지니는 것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복잡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단순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간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하니”(눅17:5). 우리들도 사도들처럼 “주여, 우리들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 라고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세에는 믿음이 식어진다고 예수님께서 경고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믿음을 지니고 멋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과 의롭다 함의 축복을 가져다주고 그리고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불교와 선도에 깊이 빠져 있었던 평양의 길선주 도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길선주 도사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길선주 도사가 변해서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평양의 깡패 두목 이기풍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이기풍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깡패 이기풍이 변해서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고 제주도 복음화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에서 태어난 소년 손양원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그의 운명이 바뀌어 졌습니다. 전라남도 여수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나환자들의 어버이가 되었고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품은 한국교회의 사랑의 원자탄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주일학교 선생님들 때문에 아니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 때 평양에서 살았고 평양 제5인민학교에 다녔는데 공산당 정부가 일요일 날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학교에 오도록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요일 날 학교에 가지 않고 교회에 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종일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월요일마다 학교에서 벌을 받곤 했고 때로는 정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일 좋았습니다. 결국 저는 11살 때 부모님과 동생들과 고향을 떠나 38선을 혼자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주일을 바로 지키며 하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계시던 목사님 아버지를 찾아가서 남쪽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저를 한참 쳐다보신 후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시던 어머니도 저 없이는 못살겠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도 눈물을 흘리면서 그러면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1948년 8월 어느 날 저는 조그만 가방 하나를 가지고 평양을 떠나 해주에 와서 하룻밤을 지낸 후 어른들 몇 사람들과 함께 38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밤 중에 38선을 넘다가 인민군에서 붙잡혔습니다. 모두 손을 들고 서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고 위협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모두 손을 들고 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설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께 바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혼자서 남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3,40여분 동안 언덕을 넘고 파 밭을 지나고 목에까지 차는 강을 건너서 무사히 남쪽으로 왔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고 바로 섬기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힘을 다해서 뛰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스릴까지 느꼈습니다. 그런데 38선을 넘은 그 사건은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11살 때 하나님을 믿은 저의 믿음은 저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지니고 사는 삶은 너무 귀중한 삷입니다. 성경은 또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사56:7).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무엘은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않겠다고 말하며 평생 쉬지 않고 기도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삼상12:23).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여 봉헌하며 기도하는 솔로몬에게 이런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로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2-16).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기도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145:18). 결국 다윗은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시6:9).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시39:12).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쉬지 않고 기도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단6:10). 예수님께서는 한 평생 기도에 전념하셨고 때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눅6:12).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21:36).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1).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힘쓴 것이 바로 기도였다고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4). “저희가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평생 쉬지 않고 기도에 전념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1:9).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엡1:16).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살전1:2). 그리고 항상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엡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들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은 평생 기도에 전념한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목사가 되기 전부터 이미 뜨거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906년 장대현장로교회에서 조사로 일하고 있을 때 어느 장로(박 씨)와 함께 새벽기도를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최봉석 목사님도 주기철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김치선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모두 기도에 전념하신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 너무너무 귀중하고 기도가 너무너무 귀중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한 사람의 삶을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되고 행복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믿음과 기도는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믿음과 기도보다 더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어떤 삶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믿음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부인하며 무릎을 꿇고 항복하며 회개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계획이나 의지를 포기하고 무릎을 꿇고 항복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간절하게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울면서 항복하며 나의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이 믿음을 지니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맨날 울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7).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사도 바울도 맨날 울면서 회개와 탄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2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실 예수님께서는 회개를 너무 귀중하게 여기시면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한 설교도 회개하라는 설교였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하고 가르친 것도 회개와 믿음의 도리였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회개는 믿음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또한 기도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 깊어질수록 회개가 깊어졌고 기도가 깊어질수록 회개가 깊어졌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실을 다윗과 사도 바울과 성 어거스틴괴 길선주 목사님 등에서 발견합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의롭다 함도 천국도 없다고 성경이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믿음과 기도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입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귀한 종으로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 때문에 성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도 회개와 참회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도 김치선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맨날 우시면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사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버림받을 죄인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 웨슬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눈멀고 병들고 연약한 죄인입니다.” 길선주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이기풍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성봉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발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 김치선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고멜과 같은 음녀입니다.” 박윤선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는 기도는 형식적인 기도이고 위선적인 기도이고 거짓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모두 평생토록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과 고집이 센 사람은 회개와 참회를 잘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시고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회개가 충만한 믿음과 기도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예배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죄인들이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을 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다윗이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 받으시며 저들을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어린 소년 하나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렸을 때, 베다니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을 때, 예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시면서 저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요4:23). 기독교는 제사와 예배의 종교입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셨고, 신약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식 후 첫날인 주일 아침부터 밤까지 드린 예배의 모습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0:7-11). 청교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주일 성수와 예배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초기부터 주일 성수와 예배를 강조해 왔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모든 세속적 업무를 중단하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바쳐야 할 것을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 6부 예배모범은 주일성수의 원리를 엄격히 규정했습니다. “이 날은 주일인 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1920년대 한국교회에 큰 부흥을 일으킨 김익두 목사님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라는 설교에서 주일을 범한 사람들은 구약시대 같으면 다 때려죽일 사람들인데 지금은 때려 죽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때려 죽일 죄라고 지적을 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예배의 제사를 정성껏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제사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를 너무너무 좋아했고 사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종일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면서 살았습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평생 주일 성수와 예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아무와도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왔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너무 많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저는 남한에 와서 부족함이 없는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외롭게 살면서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마다 울기도 했지만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과 봉사 생활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서울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편으로는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지니고 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예배드리고 섬기면서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단 돈 100불을 가지고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 부족함이 없는 유학생활을 한 일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훼이스 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예일대학교 신학대학과 아이오와 대학과 아퀴나스신학원과훌러 신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공부하는 가운데 아무런 어려움이나 부족함이 없이 넉넉한 유학 생활을 했습니다. 주일 성수와 예배는 저의 삶의 기본이고 중심이었습니다. 귀국 후 하나님의 은혜로 한 평생 마음껏 목회와 교수와 선교와 구제와 연합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일 성수와 예배와 새벽기도는 저의 목회철학의 기본이고 중심이었습니다. 셋째로,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요14:12,1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5:7).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사41:10).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 들어갈 것을 잘 알면서도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단6:10).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관원들에게 붙잡혀 많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옥중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사도 바울은 나중에 로마 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 되었지만 원망 불평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지니는 대신 평안과 여유로움과 감사와 기쁨을 지니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0-13).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고후12:10).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믿음과 기도의 삶을 살면서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한 평생을 달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과 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믿음과 기도를 지닐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14:13). 사실 저는 한 평생 모험적인 일들을 즐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제가 11살 때인 1948년 8월 38선을 혼자서 넘은 일을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에 와서 서울 중 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1년 동안 총신에서 공부한 다음 1962년 8월 단 돈 100불을 가지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2년 동안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목회와 교수의 일을 했는데 주일 성수를 방해하는 군사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977년 11월 20일 남산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하루 종일 그리고 밤새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심문하는 사람들을 충고한 일과 잠깐 쉬는 시간에 설교준비까지 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1999년 1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소신껏 말하고 소신껏 비판하고 소신껏 행동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2005년 12월 굳게 닫힌 타직 국경과 아프간 국경을 캄캄한 밤에 뛰어넘어 아프간으로 가서 아프간 무라취드에 세운 학교 준공식에 참석한 일도 대단한 모험과 담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뚫고 나아가면서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고 또 부어주셔서 고난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면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어떤 일을 당해도 평안과 당당함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모험심과 담력을 지니고 뚫고 나아가면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리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산상 설교를 하시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갓임이요”(마5: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셔서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찌니라”(마18:22).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도 바울도 믿음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긍휼’과 ‘용서’와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그리고 긍휼과 용서를 베풀라고 권면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모습은 모든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긍휼’과 ‘용서’와‘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성 프랜시스의 믿음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의 믿음도 ‘긍휼’과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이런 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정욕적이고 위선적인 죄인이지만 주님께서 지니셨던 그리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니셨던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조그만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라도 지니고 참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로 방글라데시로 북한으로 중국 연변지역으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달려가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손길을 조금씩 펴기도 했습니다. 2010년 1월 1일에 정한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눈물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온유와 겸손과 착함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수고와 고난과 희생의 제사를 드리게 하시옵소서.” 2011년 1월 1일에 정한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닮게 하소서. 모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며 사랑하게 하소서. 눈물과 수고와 희생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2013년 새해의 소원과 기도는 마음과 같습니다. “회개와 참회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고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면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합니다. 버림과 성결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고 버림과 성결을 몸에 지니면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합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기를 소원합니다. 섬김과 봉사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고 섬김과 봉사를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기를 소원합니다. 화해와 평화의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고 화해와 평화를 몸에 지니고 살다가 죽기를 소원합니다.” 다섯째로,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면서 첫째 복과 여덟 번 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복이었고 팔 복의 결론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예수님은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사도 바울의 마음과 눈은 항상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이었지만 사실은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3). “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사도 요한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5: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10: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계12:1).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계14: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계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21: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계22:1).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목표는 새 하늘과 천국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모했다고 기록했습니다(히11:16).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기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마라나타” 라는 말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며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려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지니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너무 좋고 돈이 너무 좋고 명예가 너무 좋고 자리가 너무 좋고 쾌락이 너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천국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의 정치 경제 유행에 정신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조금씩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하지만 천국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별했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철원이가 네 살 때 저의 곁을 떠났기 때문에 천국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8년 8월 31일 밤 천국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 이란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사랑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와 그리고 길선주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 등이 먼저 가 계시는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글을 써 보았습니다. 그 글을 소개합니다. “내가 앞으로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 나의 모습이 어떠할까? 기뻐 뛰는 모습일까? 소리 지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모습일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리 없이 흐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평생 사는 동안 주님 위해서 산다고 떠들었지만 사실은 불순종과 정욕과 위선과 교만으로 가득했던 것을 되돌아 보면서 얼굴도 들 수 없고 입도 열수 없어서 그저 고개를 떨구고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주님의 입에서 토해 내지 않으시고 한 평생 붙드시며 사용하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부끄럽고 너무 죄송하고 너무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껴 우는 그런 모습이 주님 앞에 섰을 때의 나의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 그리고 길선주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등 신앙의 선배들 앞에 무릎을 끓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고 또 표시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내가 지옥의 형벌에 떨어지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올라오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자비와 은혜와 사랑 때문이지만 둘째는 신앙의 선배들이 나의 몸과 영혼에 심어준 회개와 믿음과 눈물과 사랑의 씨앗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답게 사랑하시던 어머니를 붙잡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손이라도 한번 꽉 쥐어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에게 두 손과 두 팔과 온 몸을 안겨드리면서 뜨거운 사랑의 눈물을 흘리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옆에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나를 바라보시는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드리는 모습입니다. 믿음의 길 충성의 길 순교의 길을 몸으로 보여주신 나의 아버지 품에 힘껏 안겨서 사랑과 존경과 고마움을 속삭여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무나 슬프고도 아프게 사랑하던 어린 아들 철원이를 품에 안고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는 모습입니다. “저는 또 하나의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친족들과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입니다. 나의 부족한 전도와 목회와 선교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섬기게 된 수 많은 성도들! 부족한 나에게 눈물과 기도와 사랑을 쏟아 바친 수 많은 성도들! 강변의 성도들을 비롯한 지구 곳 곳에 흩어져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 집으로 올라와서 다시 만나게 된 수 많은 성도들을 만나서 너무너무 반가워 하는 행복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너무 부끄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다가 너무너무 반갑고 너무너무 고마워서 소리 내어 웃으면서 행복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지혜와 권능과 위대하심을 무릎을 꿇고 두 손 높이 들어 찬양하고 또 찬양하고 또 찬양할 것입니다.” (2008년 8월 31일 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과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영생도 의롭다 함도 천국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주님께서 탄식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믿음을 지니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귀중한 것은 믿음과 함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이룰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은혜와 복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4-16).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회개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예배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근심 걱정 염려 두려움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십자가에 나타난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삶”이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스스로 지니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복잡한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단순한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모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기도는 우리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을 도와주셔서 기도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살아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회개하면서 날마다 예배 드리면서 날마다 평안과 여유로움을 지니고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날마다 긍휼과 용서와 사랑을 베풀면서 그리고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설교(학)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상급 (0) | 2020.02.28 |
---|---|
거듭남(중생) (0) | 2019.12.29 |
눅1:14 -주님 탄생을 기뻐할 이유 (0) | 2019.12.25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전 6:19-20) (0) | 2019.12.14 |
구약강론 | 신약강론 | 설교집 | 교육자료 | 교회정치,기타 (0) | 2019.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