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뻐할 이유
첫 번째 항목은 세례 요한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라는 15절 말씀입니다. 주 앞에 큰 자가 된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메시아이신 예수님 앞에 큰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곧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이렇게 되면 우선 사가랴에게 큰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 앞에 나타날 큰 자가 곧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명예가 세례 요한을 통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면에는 불행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세례요한은 광야에 거주하면서 독신생활을 하던 자입니다. 그랬기에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가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나이 많아 겨우 낳은 아들인데, 기쁨도 잠시가 되는 것입니다. 사가랴는 이처럼 결혼 못한 아들 때문에 얼굴도 못 내밀었는데, 거기다가 그 아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이 얼마나 큰 슬픈 일입니까? 그러니까, 14절의 ‘너도 기뻐하고’는 잠시잠깐의 기쁨이지 궁극적인 기쁨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이 말장난이나 긍정의 마인드 같은 것들로 해피엔딩이 결코 될 수 없음을 사가랴와 세례요한의 생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사가 전한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라는 이 메시지는 결국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비록 장가도 못가고, 자녀도 없이 요절한 불행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주 앞에 큰 자였다는 사실, 이 사실이 사가랴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아들 요한이 중간기 400년 동안의 암흑기를 깨고, 메시아를 소개하는 인물로 세워졌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것이 궁극적인 의미의 기쁨입니다. 아들을 신앙적인 사람으로 키웠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서도 자식농사는 성공한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저의 이 말에 반기를 들 것입니다. 어디 그게 무슨 성공이냐고? 그러면서 세상적인 성공법칙을 논하며, 성공논리를 운운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겐 신앙으로 키우는 것, 그것이 가장 최고의 일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은 것은 나실인인데, 이는 구약적 의미의 택자를 상징합니다. 또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라는 것은 신약적 의미의 택자를 의미합니다. 곧 세례요한이 신구약을 연결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는 일, 그것은 본인에게 한없는 영광이었습니다. 사가랴가 기뻐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부활과 영생을 믿기에 신앙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이 땅에서 취하는 것들 중의 가장 영예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들 세례 요한이 신앙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주 앞에 큰 자가 되었으니, 사가랴로선 이보다 더 큰 가문의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비록 그것이 인간적인 의미의 성공이나 세속적인 의미의 출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었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맨 나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최우선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남으로 인해 기뻐해야 할 두 번째 항목은 16절 말씀에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이 말씀은 현세적인 기쁨 차원을 뛰어넘어 궁극적인 기쁨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곧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되니 기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일을 맡아서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구체적인 사역의 내용은 17절에 나와 있습니다. 17절에는 두 개의 부정사가 쓰이고 있는데, 이 두 개의 부정사가 세례 요한이 할 일이었습니다. 첫째는 ‘돌아오게 하고’이고, 둘째는 ‘준비하리라’입니다. 곧 세례 요한이 돌아오게 하는 사역을 함으로서 기쁜 일이 된다는 것이고, 또 준비하는 일을 함으로서 기뻐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선, 첫 번째 사역인 돌아오게 하는 사역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돌아오게 하는 사역은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에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라는 말씀으로 설명됩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이란 암흑기와 같은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통치 때에 정치와 종교를 비판하고 싸웠던 엘리야의 상태를 말합니다. 엘리야는 불법적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한 아합과 이세벨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질타했습니다. 또한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와 싸운 일은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정의를 위해 싸웠고, 사악한 종교적 행위와 싸웠습니다. 이게 바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심령과 능력이 요한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곧 요한은 헤롯 안디바가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일을 질타했고,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온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종교와 정치를 넘나들며 담대히 외쳤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인정하실만한 세상을 꿈꾸고 만드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역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엘리야와 같이 죽음을 무릎 쓰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사회개혁, 정치개혁, 종교개혁이 올바로 시행되는 그 날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개혁운동을 펼침으로서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면 이때 바로 주를 위한 백성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12사도는 그렇게 해서 준비된 자들이었습니다. 사도의 자격은 사도행전 1장 21절과 22절의 기록처럼, 그 첫 번째 단서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여야 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 등 12사도들은 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이 주님의 제자들, 곧 사도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감당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준비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16절에서 언급하고 있지요. 요한 때문에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 즉 이스라엘 자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였습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베드로로 이어졌고, 하루에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일시에 주 예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사건이 펼쳐졌던 것입니다. 또한 특정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14절에 언급하는 ‘많은 사람’이 바로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태어남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사가랴만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의 무리는 16절에서 잠깐 이스라엘 자손에 국한된 것처럼 말씀합니다. 하지만 17절 후반절에서는 다시금 특정하지 않은 사람들, 즉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말씀 그대로 그들은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입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 자손도 포함이 되며, 12사도도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류에 속할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바로 이방인입니다. 세례 요한의 복음선포는 결국 이스라엘 자손을 시작으로 하여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퍼지는 기점이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그 결론은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말씀이 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의 말씀은 이렇게 외쳐지고 마쳐졌습니다. 그리고 400년동안이나 하나님의 계시는 사라졌던 것입니다. 이 400년 동안 사람들은 말라기의 이 마지막 말씀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이스라엘 가운데 보내신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400년의 침묵을 깨고 이스라엘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오시기 전에, 곧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구속의 사역이 이루어질 것이었는데, 그 구속 사역이 요한이 태어남으로서 가시화되고 실현과 성취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기뻐할 이유입니다. 세례 요한을 보내주심으로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로 다시금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방인인 우리까지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인 쳐지는 놀라운 역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기쁨에 우리가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기쁨이란 이런 게 진짜 기쁨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억지로 기쁨을 만들어낸다고 해봤자 그런 기쁨은 유한함과 한계가 있겠지만, 궁극적인 기쁨은 유행을 타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짜증나고, 고통스러워도 구속의 은혜, 곧 궁극적인 기쁨이 우리에게 있는 한, 그 기쁨을 우리에서서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뻐할 이유’ 곧, 내가 신앙에 서 있다는 것과 선택된 자라는 사실을 붙들고, 소망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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