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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헤겔- 2장 헤겔의 청년기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9.

헤겔- 2장 헤겔의 청년기(1)

헤겔은 1780년 대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때 그는 슈투트가르트 김나지움에 다녔고, 그 이후에는 튀빙겐 신학교를 다녔는데, 당시의 표현주의적 조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조류는 자기 자신뿐만이아니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들과도 동일하다는 생각, 소위 포괄적인 통합된 삶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헤겔은 이런 이미지의 범례를 고전기 그리스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 외에도 두 가지 다른 중요한 요소가 그의 사유와 열망에 영향을 주었다. 이 두 극단은 그 당시에 이미 명백하게 모습을 있었고, 여러 모양으로 그에게 생동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는 계몽의 도덕적 열망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마침내 이성을 통한 자기 규정의 자유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이 열망의 중요한 대표자로 칸트를 생각하게 되지만, 처음에는 멘델스존과 레싱이 이 분야에서 그에게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

두 번째 그가 주로 참고한 것은 기독교였다. 신학이 그의 관심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그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보다 훨씬 더 깊다. 사실 그가 튀빙겐에서 교육받은 신학은 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튀빙겐 신학은 그가 초기 글들에서 자기 입장을 말할 때 비판적으로 대했던 부정적 사유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의 기독교관이 심오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 하지만 그의 기본적인 견해가 성숙한 체계에서도 줄곧 유지된다는 사실은 이 방향이 그저 지나가는 영향의 결과가 아님을 보여 준다. 

이 세 조류는 잠재적으로 서로 깊은 갈등 속에 있었으며, 성숙한 헤겔의 사유는 이 세 조류를 화해시키고자 한 영웅적인 시도이다. 하지만 초기 튀빙겐 시기에 그는 앞서 말한 이 세 조류가 동일한 방향을 향한다고 느꼈다. 그 시대는 헤겔과 그의 많은 동시대인에게 자발성이 분열하고 억압되는 시기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자발성을 표현적 총체성 속에서 회복하고자 했으며,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활동과 사회적 삶은 단순히 죽어 있는 공식에 의해 규제되기보다는 통일성과 선에 대한 생동적인 경험으로부터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적 열망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계몽의 요청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즉 계몽에 의하면 인간은 과거의 위신에 기초한 외적인 비합리적 권위 대신 자기 자신의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한다.

표현주의와 계몽주의 모두 외부의 권위에 대항해서 인간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문제였으며, 외적인 것과 단순한 지성의 대상에 대항해서 생동적인 것과 자아에 의해 느껴지는 것을 회복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두 경우에 혁명은 자율성과 총체성을 회복한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사회 안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때 지배 관계는 자발적이고 동등한 연합에 자리를 양보한다.

따라서 헤겔과 튀빙겐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그리스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을 계몽에 대한 충성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페리클레스, 소크라테스, 레싱 그리고 칸트는 동일한 이상에 기초해 서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대에 존립하는 기독교와 갈등 관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당시의 기독교는 자신의 주장을 초자연적 권위에 기초해 세웠으며,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 모두에 걸쳐 있는 명령의 위계질서를 지지하고 있었고, 인간 안에서 죄 많은 본성과 정신 사이의 엄격한 분열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헤겔 시대의 젊은 급진주의자들 몇 명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내세웠다. 비록 나중에 입장을 선회하기는 하지만 청년 셸링이 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헤겔은 횔덜린과 더불어, 비록 기존의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고 때때로 그리스도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지만, 이로 인해 기독교 신앙을 파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이해한 예수의 원래 가르침을 표현적 통일성의 요청과, 그리고 이성의 요청과 교환 가능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예수는 문자가 삶을 죽이는 데 반해 정신은 삶을 살린다고 가르친 교사였으며, 아가페의 자발성으로써 율법을 하러 온 선생이었다. 

헤겔은 튀빙겐에서 1788년 1793년까지 살았다. 이 시기는 독일 청년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계몽의 성장, 최근에 일깨워진 그리스의 이상에 대한 동경, 질풍노도기에 뒤이은 문화적 소요 상태 등이 파리에서 발생한 세기적 사건들[프랑스 혁명과 그 여파들]에 덧씌어졌다. 독일이 위대한 아테네 시대의 새로운 버전으로 변할 것이라는 희망, 심지어 그렇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불꽃이 젊은이들의 마음에 점화 되었는데,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헤겔과 교류하고 있던 취빙겐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언어로 자기 자신 및 자신의 이상과 관련하여 이 세 조류[고대 그리스의 통일적 삶, 기독교, 계몽]의 모든 관점을 성찰했다. 

횔덜린의 위대한 언어인 "하나이자 만물"은 인간이 재결합해야 하는 모든 존재를 관류하는 거대한 삶의 흐름을 표현한다. 레싱이 사용하여 유통시킨 "하나이자 만물"의 이상은 앞부분에서 언급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표현주의적 독해에 기초한 것이다. "이성과 자유"는 보편적 슬로건이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를 열망하는 계몽주의자들의 바로 이 그룹은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교회"라 불렀으며,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목표가 "신의 왕국"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청년 헤겔이 생각하기에 독일은 재탄생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은 1) 계몽의 자율적 이성의 승리(계몽주의와 급진적 자유), 2) 그리스의 정신에서 꽃피웠던 것의 재창출(표현주의 운동), 그리고 3) 예수의 순수 가르침의 회복(기독교의 쇄신)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출판되지 않은 헤겔의 최초의 글들은 바로 이 세 열망에 자극받은 연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790년대부터 자신의 체계가 대충의 윤곽을 드러낸 1800년대 초에 이르는 그의 발전은 부분적으로 두 가지 압박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될 수 있다.

1) 재생의 희망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외적 실패 

2) 이 세 경향 모두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 양식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이 세 경향들 사이의 내적 긴장

헤겔이 튀빙겐 대학 시절에 쓴 아주 초창기의 한 수고는 재생을 위한 그의 비전이 프랑스 혁명을 변형시켰던 세속적 혁명가들의 비전이 아니며,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종교적 삶의 재생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헤겔의 종교는 전통적인 경건의 종교가 아니다. 이 단계에서 계몽의 종교는 대개 칸트에 의해 정의되었다.

칸트적 정의가 유행한 이유 종교는 도덕성의 관점에서 고찰되었다. 이에 따르면 나는 내가 당위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종교적 신앙이나 신의 명령에 따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적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 부여한 명령에 따라 규정한다. 사실 종교의 합리적 핵심, 즉 신에 대한 믿음과 불멸성의 토대는 최고의 선이 실현되려면 반드시 요청되는 것으로서 도덕성의 요청이다. 

헤겔의 초기 글들은 우리가 칸트에게서 본 것, 즉 인간은 순수한 도덕 의지의 주체로 행동할 때, 성스러움에 가장 근접하게 된다는 생각에 들어맞는다.

그러나 온전한 의미에서의 종교는 그래도 아직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하다. 인간은 합리적일 뿐 아니라 또한 감각적이기도 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도덕법칙에 대한 순수한 존경에서 행동하는 인간을 최상의 이상으로 정립할 수 있다 하더라도-헤겔은 칸트 윤리학의 이런 핵심에 아직 도전하지 않는다.-이런 생각은 인간이 실제로 서 있는 바와는 아주 거리가 있다. 사실 인간은 감성과 엮여 있는 마음과 경향들로 인해 선한 것에 효과적으로 이끌린다. 바로 이 마음과 경향 등이 다양한 선행의 형태들, 예컨대 사랑, 우정, 연민 등을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헤겔은 루소에 근접해 있다. 

이제 종교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수많은 명제들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외적인 실천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동적인 경건으로서 전인[온전한 인간]을 위해 좋은 것을 수행할 동기를 부여하는 위대한 원천이다. 그래서 헤겔은 이 단편을 객관 종교와 주관 종교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객관 종교는 그저 신학일 뿐이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실천일 뿐이다. 주관 종교는 선과 이 선의 입안자로서의 신에 대한 인간의 생동적 경험이다. 물론 여기서 이런 경험은 신앙과 제의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런 생각은 유행하던 경건주의의 흔적이 이 시기 독일의 사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 경건주의가 부분적으로 계몽주의의 열망과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이런 결합을 레싱에게서 볼 수 있으며, 그는 김나지움 시기와 대학 시절의 헤겔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헤겔의 주관 종교는 따라서 레싱의 『현자 나탄』(헤겔의 초기 글에서 자주 인용된다.)에서 레카가 저주했던 "차가운 독서 학습"의 종교와 대립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헤겔은 처음부터 이성이 허락한 것 이외의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종교에 대한 협소한 계몽주의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그는 미신을 저주한다. 미신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초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응답을 얻기 위해 행위하며, 화난 신을 달래기 위해 희생 제의를 치른다. 그러나 헤겔은 예컨대 희생 제의 그 자체가 형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경건한 감사의 정신에서 신에 대한 의탁을 고마워하는 표현으로 수행된다면 그 제의가 순수한 종교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헤겔은 그리스의 희생 제의에서 그러한 사실을 보았다.) 

이 수고에서 또 다른 중요한 구분은 사적 종교와 민중 종교Volksreligion의 구분이다. 사적 종교는 개인의 삶을 그 개인적 관계와 가족 관계 등에서 건드리며, 민중 종교는 사회라는 공적 삶과 엮여 있다. 헤겔에게 민중 종교의 가장 중요한 모델은 명백히 고대 그리스의 공적 종교들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종교들은 사회적 삶의 필수적 일부였고, 도시의 공동의 실존을 유지하는 다른 측면들과 떨어질 수 없었으며, 심지어 도시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었다. 

이러한 구분이 헤겔의 목적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그가 추구하는 재생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도덕적 자기 규정이라는 자유에 도달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성이 정열과, 혹은 정신이 감성과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인간이 자발적으로 도덕적 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전체성과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체성은 인간 내부의 분열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분열도 치유한다고 한다. 헤겔이 추구한 재생은 따라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분열되지 않는 그런 사회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스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그리스에서 공적 삶은 도전할 수 없는 권위에 의해 주체에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적 표현, 공통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헤겔은 초기 프랑스 혁명에 아주 동조했다. 그리고 사실 1789년의 이상들은 일생 동안 그의 정치적 사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