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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마그나카르타

by 이덕휴-dhleepaul 2020. 1. 3.


Ⅰ. 서론
 주제 선정 이유 및 연구 방향
Ⅱ. 본론 - 역사
 1. 의회 민주주의
  1) 마그나 카르타
  2) 권리청원
  3) 권리장전
  4) 차티스트 운동
 2. 런던 대화재
  1) 대화재에 관한 기록
  2) 사건개요
  3) 대화재와 화재보험
  4) 대화재 그 후
 3. 산업혁명
  1) 배경
  2) 산업혁명의 결과
  3) 산업혁명과 런던 스모그

 본론 – 문화
 1. 날씨와 축제
 2. 영국의 미술과 문학
  1) 미술
  2) 문학
  3) 대영 박물관
 3. 복지
Ⅲ. 마치며
** 참고문헌
Ⅰ. 서론
1. 주제선정 이유 및 연구방향

 ‘영국’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인 ‘EPL’의 나라, 해리포터와 셜록홈즈의 고향. 하지만 영국의 가장 유명한 별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일 것이다. 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 수도 런던은 그들의 문화와 경제력을 통해 여전히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왜 런던이 그 중심이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 발표를 통해 정치에서부터 문화에 이르기까지 런던에 대해서 알아가보고자 한다.


Ⅱ. 본론 - 역사

1. 의회 민주주의

1) 마그나 카르타 (Magna Carta)

  1215년 영국왕 존이 귀족들의 강압에 따라 승인한 칙허장(勅許狀). ‘대헌장(大憲章)’으로 번역된다. 존의 실정(失政)에 견디지 못한 귀족들이 런던 시민의 지지를 얻어 왕에게 승인하도록 한 귀족조항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새로운 요구를 내놓은 것은 없고 귀족의 권리를 재확인한 봉건적 문서였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생각하게 되고 인용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문서로서 영국의 헌정일 뿐만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되었다.

2) 권리청원 (The Petition of Right)
  1625년에 즉위한 찰스 1세는 부왕인 제임스 1세의 절대군주제를 답습하여 계속적인 전제정치를 행하였다. 1628년 에스파냐 등과의 대외전쟁 비용에 궁색해진 찰스 1세가 의회를 소집하자, 의회는 강제공채와 불법투옥 문제를 둘러싸고 왕과 대립을 하게 되었고, 하원의원이었던 E.코크 등이 중심이 되어 국왕에게 청원이라는 형식으로 권리선언을 한 것이 곧 권리청원이다.
 주요내용은 신체 자유권의 확인, 상납금 금지, 의회 동의 없는 과세 금지, 특별 재판 금지, 이유의 명시 없는 체포나 구금 금지, 군대의 강제 민박 금지 등이었다. 특히 국왕보다 법이 우위에 있다는 원칙 아래서 의회가 국왕의 권력과 법률적 권위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그은 시도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는 내용 자체의 효과보다, 주권이 국왕으로부터 의회로 옮겨지는 제1보가 되었고 훗날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이어져 입헌군주제의 출현에 발판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후에 W.피트는 마그나카르타 및 권리장전과 함께 영국 헌법의 성경(聖經)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629년 국왕은 이 권리청원을 무시하고 의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의회의 지도자를 투옥한 뒤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전제정치를 하였다. 이것이 청교도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권리장전 (Bill of Right)
  1642년 크롬웰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의회파는 전제적인 찰스 1세에 맞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켰다. 오랜 내전을 거쳐 1649년 의회파는 마침내 국왕을 처형하고 공화국을 선언하였다. 크롬웰이 죽은 후 1660년 왕정복고에 성공한 찰스 2세는 의회와의 충돌을 피했으나, 뒤이어 제임스 2세는 전제정치를 감행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나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쫓겨났고, 의회는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남편인 신교도 오렌지 공 윌리엄을 공동 추대했다. 이들은 ‘권리 선언’을 수락하고 왕위에 올랐고, 1689년 의회는 의회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권리 장전〉을 요구하여 통과시켰다.
 〈권리 장전〉은 국왕과 의회가 주권을 둘러싸고 거의 10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대립해 온 역사에 일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또한 입헌 군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영국의 절대 왕정을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영국 헌정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미국 독립 선언〉과 〈프랑스 인권 선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4) 차티스트 운동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 계층의 참정권 요구 운동이었다. 1838년 노동자들은 인민 헌장(People's Charter)을 작성한 후 국회에 보내어 참정권 보장과 보통 선거 제도의 실시 등을 청원했다. 이 운동을 차티스트 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의 이름은 그들이 자신의 요구를 여섯 개 조항의 헌장(Charter)으로 정리했던 데서 붙여졌다. 그 성격과 규모 면에서, 영국의 새로운 산업 질서의 산물인 사회적 불의에 대항해 노동 계급이 일으킨 최초의 대규모 정치 운동이었다. 인민 헌장의 주요 내용은 성년 남자의 보통 선거, 인구 비례에 따른 평등한 선거구 설정, 하원 의원의 재산 자격 폐지, 비밀 투표, 의원에 대한 봉급 지불, 매년 선거 등이었다.  중심 세력은 신흥 도시의 산업 노동자였으며, 주로 급진적인 성향을 지닌 노동자들이었다. 이들 차티스트 노동자들은 의회에 대해 서명 운동, 집회와 행진, 파업 등을 계속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조직 면에서 미숙함을 드러냈고 1840년대 경기가 회복되면서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로 1867년 공장 노동자에게, 1888년 농업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부여되었으며, 매년 선거의 요구를 제외한 나머지 차티스트 운동의 주요 정치적 요구는 1918년 의회의 법령으로 거의 실현되었다.







2. 런던 대화재

1) 대화재에 관한 기록
  “육중한 포틀랜드 석재로 만들어진 기념비와 기둥, 소벽(小壁), 기둥머리, 돌기들과 같은 멋들어진 석재들이 열기 속에서 모두 생석회처럼 되어 버린 광경과 (6에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공간을 덮었던) 납 판자들이 지붕에서 완전히 녹아내려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 이렇게 하여 거의 100여 채 이상의 예배당은 별개로 하더라도, 가장 고색창연했던 예배당, 기독교 세계에 있는 초기 신앙의 유서 깊은 걸작 중 하나가 잿더미 속에 누워 있다.”
-존 이블린 1666.09.07.-

2) 사건개요
  화재는 푸딩 레인(Pudding Lane)에 있던 제빵사 토마스 페리너(Thomas Ferriner)의 빵집에서 시작되었다. 한 여름 밤에 오븐을 사용하고 완전히 끄지 않은 불씨가 화재로 번지게 되었고, 그날의 거센 바람과 오랜 가뭄으로 메말라 있던 주변의 것들을 모두 태우며 불은 속사포처럼 퍼져나갔다.
  런던 내의 400a(약 161만 8,743㎡)와 외부의 63a(약 25만 4,952㎡)가 화재의 영향을 받았다. 세인트 폴 대성당을 비롯한 교회 87곳, 동업조합 회관 44곳, 주택 1만 3,200채, 런던 증권거래소, 길드 홀 등 모두가 전소하거나 일부가 소실되었다. 이로 인해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집을 잃게 되었다.
  런던이 상업의 중심지였던 덕분에 1667년부터 바로 재건이 시작되어 5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오랜 중세 도시가 계획도시로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이 새로운 도시를 계획한 사람이 오늘날 세인트 폴 대성당을 설계한 것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렌이다. 그는 중세의 좁고 구불구불한 도시에서 벗어나, 크게 대로를 내고 웅장한 공공건물들을 세우고 곳곳에 교회로 장식하려 했다. 그러나 비용 상의 이유로 의회에서 거절되었고, 그의 비전은 교회 건축으로만 제한되었다.
  많은 피해가 있었던 사건이었지만 화재로 인한 뜨거운 열기에 슬럼가들의 병균이 죽고 열린 하수구나 다름없었던 플릿 강이 살균되어 이후 흑사병이 다시 발발하는 일이 없어졌다.

3) 대화재의 원인
  런던 대화재가 이렇게나 막대한 피해를 낸 데에는 당시 영국의 도시화 현상이 한몫을 하였다. 17세기 런던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였고, 이때는 지방에서 런던으로 옮기는 이촌향도 현상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사람들이 좁은 런던에 몰리면서 자연스럽게 목재로 급하게 지은 거주 밀집 지역이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대화재 당시의 런던은 도시 곳곳에 거대한 나무더미들이 잔뜩 쌓여, 이것들이 불길을 더욱 치솟게 하는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하였다. 맞불을 놓아 화재가 퍼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금전적 이해관계로 망설이는 바람에 이런 처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4) 대화재와 화재보험
  이를 계기로 그 동안 소극적이던 영국 정부도 이듬해(1667년) 런던 시내 도시계획에 화재보험 회사를 운영할 부지를 확보 해준다. 그러나 상품의 설계가 어려워 수차례 실패를 거듭하다 1680년 니콜라스 바본이 국왕의 명을 받아 영국 최초의 화재보험 회사를 설립한다. 그의 회사는 단기간에 정착한 대표적인 화재보험회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1705년 피닉스 화재 사무소로 개명하면서 약 100년 간 영업을 지속한다. 이런 화재보험의 성공에 힘입어 17세기 말 영국에서는 오늘날에 필요한 보험들이 이때 즈음에 거의 다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보험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5) 대화재 그 후 : 도시화의 실패
  찰스 2세는 도시계획과 건축에 관심이 많아 새로운 런던이 단정하고 견고한 계획도시가 되길 희망했다. 그리하여 위원회 설립을 명해 재건축을 하게 하는데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제대로 된 도시화는 성공하지 못 한다. 그 원인으로는
①장기 융자제도가 아직 발달되지 못한 시대여서 자본을 모으기도 어려웠다.
②부동산 증서와 계약서가 대부분 불에 탔고 화재 이전에 발생했던 페스트로 소유주와 임대인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얽키고 설킨 토지 소유관계를 추적하기가 힘들었다.
③전시상황에서 재건축과 보상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힘들었다.

3. 산업혁명

1) 배경 : 왜 영국인가?
①근대적 산업의 발달
산업화를 촉진시킨 가장 중요한 계기는 연료의 위기였다. 16세기 중엽 이후 연료로 사용하던 목재가 점차 고갈되자, 영국에서는 대체연료로 석탄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석탄 산업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 절실해졌다. 또한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은 동력혁명을 이룩했고 이는 기술적인 기초가 되었다. 본격적인 산업혁명은 면직 공업에서부터 일어났다. 대표적인 도시로는 맨체스터와 랭카셔 지방 및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가 있다. 또한 이에 필요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철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제련기술이 발전하면서 철 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었다.


②풍부한 자원
다른 나라에 비해 영국은 산업 발전에 필요한 석탄, 철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했다. 우선 17세기부터 북아메리카에서 목화를 대량 수입 할 수 있게 되면서 면직 공업은 더욱 발전했다. 그리고 증기기관차의 발명으로 더 많은 양의 석탄을 더욱 빠르게 운발 할 수 있게 되었다.

③자본 축적
이렇게 생산된 수많은 물품을 전 세계에 수출하면서 영국의 기업가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대외무역의 증가는 조선과 해운업뿐 아니라 보험, 금융 등 새로운 금융 서비스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런던에서는 세계 최초로 주식시장이 등장하기도 했다.

④풍부한 노동력
우선 유럽의 다른 나라보다 산업화를 주도할 중간계급의 층이 두터웠다. 종래 도시의 상공업자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상승한 부농을 포함하여 심지어는 귀족의 자제까지 중간계급의 활동 영역으로 진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농업의 변화도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새로운 농법의 보급을 통해 농업 생산량이 늘어 18세기 인구 증가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높았다. 또한 토지 경영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지주와 부유한 농민이 소작지로 내주었던 토지를 회수하여 대단위 농지로 조성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다른 지역이나 도시로 떠났다.

⓹지리적 이점
섬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나폴레옹과의 전란에 휩싸이지 않아 국가 자본의 축적이 가능했다.


2) 산업혁명의 결과
①공장제 기계 공업 발달 : 기계가 발명되면서 공장제 수공업 대신 공장제 기계 공업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인류에게 풍요로운 세상을 가져다주었다.

②인구 증가와 도시의 성장 : 공장이 들어서고 일하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이전에는 조용하던 마을이 복잡한 도시로 바뀌었다. 또한 1세기 동안 유럽은 2배 이상, 영국은 3배 이상 인구가 증가하였다.

③노동계급의 형성과 새로운 노동 관행의 도입 : 귀족과 평민, 지주와 농민이 아닌 산업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노동 계급의 대두로 인해 노동 계급의 권리 신장을 위한 투쟁 및 사회주의 운동이 발발하였고, 칼 마르크스를 필두로 해 공산주의가 생겨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④인간의 삶의 방식 변화 : 교통과 통신 분야의 여러 발명은 농촌과 도시의 벽을 허물고 문화의 전파 속도를 빠르게 하였으며 전 세계를 하나로 묶는 결과를 낳았다.

⓹제국주의 시대의 개막 : 유럽의 여러 나라가 식민지를 얻기 위해 싸우기 시작하였다. 산업 혁명으로 부유해진 유럽의 강대국들은 그들의 부를 더욱 늘리기 위해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식민지는 물건을 만드는 원료를 싸게 들여오고 만든 물건을 비싸게 팔 수 있는 곳이다. 결국 유럽은 아시아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3) 산업혁명과 런던 스모그
  1952년 12월 4일 영국 런던의 기온이 급강하하였고, 하늘은 구름으로 가려져 짙은 안개가 지면을 덮고 있었다. 구름과 안개로 태양빛이 차단되어 낮에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으며 습도는 80%가 넘었다. 당시 영국은 가정이나 산업체에서 모두 자국에서 많이 생산되는 석탄을 주로 연료로 사용하였다. 석탄 연소에 따른 연기가 정제되지 않은 채 대기 중으로 배출되었고 때마침 나타난 무풍현상과 기온역전으로 인해 대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지면에 정체하게 되었다. 배출된 연기와 짙은 안개가 합쳐져 스모그를 형성하였고, 특히 연기 속에 있던 아황산가스가 황산안개로 변하였다. 이것은 런던 시민의 호흡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다. 스모그 현상은 12월 10일까지 계속되어 런던 시민은 호흡 장애와 질식 등으로 사건 발생 후 첫 3주 동안에 4,000여 명이 죽었고, 그 뒤 만성 폐질환으로 8,000여 명의 사망자가 늘어나 총 1만 2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1953년 비버위원회를 설립하여 대기오염 실태와 대책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위원회가 제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1956년에 대기오염 청정법을 제정하였으며, 이 사건은 세계 모든 나라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본론 - 문화

1. 날씨와 축제
  서안 해양성 기후(西岸海洋性氣候)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온대 기후에 속하는 기후이다. 주로 남북위 40˚~ 60˚사이인 대륙 서안에서 나타나는 기후로, 대체로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따뜻하며, 연교차가 작다. 대체로 습윤하여 연중 강우량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기와 건기가 뚜렷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기후가 발생하는 까닭은 기압의 배치와, 난류가 흐르고, 편서풍이 부는 것 때문이다. 습윤한 기후 때문에 안개가 자주 낀다. 대도시와 문명이 발달하기 좋은 곳으로, 실제로 대규모 공업단지와 대도시가 밀집한 지역이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쾨펜은 서안 해양성 기후를 가장 따뜻한 달이 22˚C 이하이고, 10˚C 이상인 달이 네 달 이상이면, Cfb로, 10˚C 이상인 달이 네 달 미만이면 Cfc로 구분하였다. 서안 해양성 기후는 주로 지중해성 기후 북쪽에 잘 나타나며, 유럽을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영국,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 오스트레일리아 일부 지역 및 뉴질랜드 등이 이 기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안 해양성 기후는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여 자라는 혼합림이 나타나고, 농작물을 경작하고 가축 사육을 함께하는 혼합 농업 또한 발달한다. 낙농업도 발달하여, 우유로 만든 제품(치즈, 버터, 분유 등)을 얻기도 한다.

또 이러한 기후로 인하여 잔디밭을 이용한 스포츠가 발달한다.

특징은 바다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며 연중 일교차의 차이가 크지 않고 강수량이 계절에 따라 고르다. 그러므로 영국의 경우에는 밀농사, 벽난로 시스템, 그리고 하천을 이용한 수문개방이 발전하였다. 영국의 경우에는 대서양에서 편서풍이 불어와 여름철 기온이 높지 않고 겨울철에도 기온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미술 평론가 크리스토퍼 뉴월의 말에 따르면 ‘영국의 날씨는 매일매일 마치 새로운 계절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 걸쳐 서서히 미묘하게 변하는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서로 다른 계절이 불규칙적으로 조금씩 섞여서 나타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영국 화가들은 풍경화를 그리면서 자신들이 바라보고 기록하는 그 순간의 풍경이 무척이나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에는 풍경화 화가가 많지가 않다. 풍경화가 중 한 명을 꼽아보자면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를 들을 수 있다.

영국의 계절별 축제

<봄 축제(첼시꽃박람회)>
1862년 영국 그레이터런던주 중부의 켄징턴에서 열린 '그레이트 스프링 쇼(Great Spring Show)'에서 유래하였다. 1913년부터 첼시 지역에 있는 왕립병원의 정원으로 전시장이 고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영국의 왕립원예협회(RHS:Royal Horticulture Society)에서 주관하며, 개최 시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대체로 매년 5월 하순의 4일 동안 열린다. 참가 업체나 단체는 왕립원예협회에서 18개월 전부터 그 기획서를 검토하여 엄격하게 선발하는데, 새로원 정원 디자인이나 새로운 재배 기술을 가진 업체를 우선적으로 선발한다.
             
정원을 축소하여 만든 모델 정원이 최고의 볼거리로 꼽힌다. 모델 정원은 가로 8m, 세로 18m 크기의 '정원 꾸미기(Show Garden)' 전시장을 비롯하여 '현대풍 정원(Chik Garden)' 전시장, '안마당 정원(Courtyard Garden)' 전시장, '도심 정원(City Garden)' 전시장, '선플라워 거리 정원(Sunflower Street Garden)' 전시장 등으로 구성된다. 모델 정원에 대하여는 전체적인 조화, 디자인과 건축, 정원의 식물들, 특별한 장식 등 4가지 항목의 평가를 종합하여 금·은·동메달을 수여한다.

이 꽃박람회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국제원예박람회와 함께 세계적인 원예 축제로 손꼽힌다. 세계 각국의 원예 산업의 동향과 다양한 품종의 꽃·나무를 접할 수 있으며, 전문가는 물론 가족 나들이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1987년에는 행사의 진행에 지장을 줄 정도로 관람객이 많이 몰려 1988년부터 관람객 수를 17만 명으로 제한하였다.
                 


<여름(노팅힐 카니발)>
노팅힐 카니발(Notting Hill Carnival)은 8월에 (일요일과 연이은 법정 공휴일) 이틀 동안 열리는 연례 축제이다. 노팅힐 카니발은 1965년부터 지금까지 노팅힐의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이다.[1] 노팅힐 카니발은 1950년대부터 카브리아인이 주로 밀집된 주거지에서 유래되었다. 노팅힐 카니발은 과거에 150만명이 참여할 만큼 인기가 있었고, 유럽에서 가장 큰 길거리 축제 중 하나이다.

노팅힐 카니발은 1976년부터 몇 년 동안 계속된 경찰과 충돌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2] 그러나 최근에 노팅힐 카니발은 조용하게 진행되었고, 많은 참가자로 인하여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다.

노팅힐 카니발 축제가 성장하여, 축제의 규모를 우려한 케네스 리빙스턴이 즉시 설립한 카니발 예상 그룹은 "차후의 노팅힐 카니발의 보호장치로 공식적인 안전지침"[3]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로 2002년에 축제의 노선 변경을 잠정 공표했다. 완전한 보고서가 공표된 2004년에, 노팅힐 카니발은 "사바나"로 하이드 파크가 선정되었다; 이러한 이동은 하이드 파크가 유행하는 반면에, 기존 카니발 거리는 쇠퇴하게 되었다.

2003년에 노팅힐 카니발은 노팅힐 카니발 트러스트 주식회사가 주관했다. 2002년에 런던 디벨롭먼트 에이전시는 노팅힐 카니발 축제가 런던과 영국의 경제에 약 9300 만 파운드를 기여했다고 발표했다.
                 


<가을(로드 메이어 쇼)>
매년 11월 둘째주 토요일 오전 11시에 펼쳐지는 이 축제는 전통 복장과 곡예단, 밴드, 황금마차, 꽃수레, 최고 남녀군인들의 퍼레이드에 눈사람과 공중 비행에 이르기까지 거대하고도 다채로운 거리 행진이 펼쳐집니다. 로드 메이어 쇼의 주제는 매년 새로 바뀌어 도심을 가로지르는 행렬로 재현되고 있으며, 200여마리에 이르는 말과 20여개 악단, 18대의 마차와 약 60대의 꽃수레, 2,000명의 남녀 군인들을 포함해 6천여명이 참가해 약 5km에 이르는 거리를 행진합니다. 저녁 5시에는 워털루 브리지(Waterloo Bridge)와 블랙프라이어스 다리(Blackfriars Bridge) 사이의 템즈 강변에 있는 정박선에서 거대하고도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게 됩니다. 시장 취임 축하식(Lord Mayor's Show)이 처음으로 거행된 것은 1215년으로, 당시 존 왕은 신임 시장은 반드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헌장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새로 선출된 시장은 1397년 디크 휘팅톤(Dick Whittington)이 했던 것(1406년과 1419년에 반복함)처럼 반드시 왕립 재판소에서 의무적으로 서약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 흑사병이 창궐할 때는 이를 막기 위한 행진을 하였고, 1852년에는 웰링톤 공작의 장례 행렬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후 행사는 중단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길고 화려한 행렬이 되었으며, 1422년부터 그 후 1세기동안에는 템즈 강변에 배를 띄웠고, 어떤 해에는 시장이 말등에 오르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유명한 의식용 황금마차를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겨울(트라팔가 광장의 크리스마스)>
12월 첫째 목요일에 점화되는 트라팔가광장의 성탄트리는 노르웨이에서 트리용 나무가 기증되고 오슬로 시장이 점등한다. 이 때 캐롤이 울리고 이후 영국전역에서 1개월 동안 캐롤음악회가 계속된다. 또한 산타클로스 신화를 기념하는 성탄대행진이 12월 초 런던에서 개최된다.


2. 영국의 미술과 문학
1) 미술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년 4월 23일 ~ 1851년 12월 19일)는 영국의 화가이다.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회화에 손을 대어 왕립 미술원에서 그림 수업을 한 뒤, 잠깐 사이에 준회원으로부터 27세 되던 1802년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 획기적인 표현을 낳은 화가이다.
  후에 문학가 러스킨이 격찬하여 명성이 높아졌으며, 일생 동안 풍경화를 계속 그린 화가로서 17세기 프랑스의 클로드 로랭을 능가하는 것이 그의 생애의 염원이었다. 그런만큼 그의 중기(中期)에는 로랭의 영향이 보이나 후에는 여기에서 벗어나 한층 빛의 묘사로 들어간다. 터너는 1819년부터 약 10년마다, 세 번 이탈리아에 여행을 했는데, 물과 하늘, 거기에 빛나는 남국의 태양은 터너의 꿈이요 시였다. 터너는 풍경의 일체를 빛의 묘사에 집중시켜 빛 속에 용해시켜 갔는데, 그것은 균정(均整)이 잡힌 윤곽에서 정중하게 그린, 당시로서는 대담한 창작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시 창작을 계속하여, 《항구 앞바다의 눈보라》(1843)에서는 배 그림자까지 거칠게 불어대는 태풍 속으로 꺼지는 듯 눈보라의 심한 상태를 주제로 잡고, 과거의 회화에 전례없는 동적인 표현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에는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1832), 《전함 테메레이르호(號)》(1839), 《안개 속의 해돋이》, 《비·증기·속력》, 《황금가지》 등이 있는데, 원숙한 빛의 표현이 아름답다. 이상하게도 제자나 후계자가 없는 화가로서 고독한 성격이었으며, 본집 외에 체르시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바꾸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는 채 그 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전함 테메레르’가 있다. 1838년 어느 날 J.터너는 템스 강가로 산책을 나갔다. 거기서 그는 트라팔가르해전에서 나폴레옹군을 물리친 유명한 전함 테메레르가 증기선에 이끌려 선박 해체장으로 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 그림을 스케치하였다.
  석양에 검붉게 물든 강, 그 위로 거대한 전함이 연기를 내뿜는 검은 연통을 단 증기선에 끌려간다. 장대한 일몰과 과거의 명성은 보이지 않는 낡은 전함이 조화를 이루어 향수와 상실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빛과 색채의 격렬한 변화에 따른 전체적인 효과를 중시했다. 터너는 판화와 수채화를 주로 그렸는데 이 작품은 유화를 수채화처럼 얇게 칠하여 우수의 매력을 더했다. 일몰의 역동적인 변화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아름답게 표현해냈다. 터너의 애국심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서정성이 돋보인다. 예인선인 증기선은 새로운 근대 문명의 도래를 예고한다.

터너는 바다와 강에 대한 풍경화, 힘차고 강렬한 자연의 힘을 즐겨 그렸다. 그는 그림을 완성하고도 출품 직전까지 세심하게 새로 고쳤다. 후기 작품 대부분은 빛과 순수한 색채의 조화를 추구했는데 이 때문에 인상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특히 C.모네와 추상화가들에게도많은 영향을 주었다.  
                 
     [윌리엄 터너]            [항구 앞 바다의 눈보라]                [전함 테메레르]

2) 문학
⓵낭만주의 문학
  19세기 초엽의 시단에는 바이런(1788∼1824), P.B.셸리(1792∼1822), J.키츠(1795∼1821) 등이 나타났으며, 보수적인 사회에 반항하면서 혁신적인 자세를 취한 이들 낭만파 시인의 기수(旗手)는 셸리였다. 이들은 사랑과 아름다움을 주제로 많은 시를 읊었는데, 청교도적인 시민계급에 반역하는 인간상을 그린 바이런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한 기조(基調)를 나타낸 것이었다. 또한 낭만주의는 옛 것과 먼 것에 대한 동경이 특색을 이루어 중세의 풍조를 부활시킨 작품이 많았는데, 월터 스콧(1771∼1832)의 작품은 그와 같은 경향을 대표하며, 문예비평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쳐 윌리엄 해즐릿(1778∼1830)이나 찰스 램(1775∼1834) 같은 뛰어난 비평가를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가장 큰 존경을 받은 인물은 셰익스피어였으며, 셰익스 피어의 대표작으로는 4대 비극(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5대 희극(베니스의 상인, 말괄량이 길들이기,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한여름밤의 꿈)이 있다. 오늘날에도 그가 불후(不朽)의 존재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이면에는 19세기 낭만파 비평가들의 활약이 있다.
   
       [월터 스콧]                   [셰익스피어]                       [햄릿]


⓶빅토리아왕조의 영국 문학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한 후 1901년까지 여왕 통치가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빅토리아시대의 특징을 민주주의 발전과 과학의 발달이라고 하며, 과학의 발달에 의한 종교적 회의와 불안의 시대라고도 한다. 빅토리아여왕은 산업혁명이 절정에  이르러 공장의 매연이 영국의 하늘을 뒤덮고, 도시가 공장지대화하여 인구집중이 심화 되던 때에 통치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산업과 실리적으로 이용된 과학기술 및 평화적 무역에 의해 영국은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고 제국주의국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 발전은 이 시대의 소설을 사회적 인도주의적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했고, 과학정신이 보급됨으로 인하여 사실주의적 분석적 수법이 소설에 적용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형이하적(形而下的)으로는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공허하고 위선이 횡행하는 우려가 일고 있었다. 문학은 마땅히 그 시대의 반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소설이 오락 정도로 인식되던 시대에 디킨스(1812∼70)는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를 쓰면서도 사실은 처참한 상황에 처한 하층계급의 애환을 묘사하였다. 새커리(1811∼63)는 상류층이나 중산층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제재(題材)로 그들의 허영을 풍자하는 지적인 소설을 썼다. 또한 19세기에 접어들자 수많은 여류작가가 등장하는데, 제인 오스틴(1775∼1817)과 브론테 자매의 경우, 그 작품은 결코 남성 작가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며, 특히 조지 엘리엇(1819∼80)은 19세기 후반을 대표할 만한 지적인 작가로 평가된다. 이 무렵, 영국에는 근대극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연극은 18세기 이래 희곡의 빈곤에 빠져 연극계는 흥행사와 배우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엽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예술극장 운동에 자극되어 상업극에 대한 반대운동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을 주도한 것은 버나드 쇼(1856∼1950)였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적인 연극운동(아일랜드 문예부흥)이 불길처럼 일기 시작한 것도 거의 비슷한 무렵이었다. 빅토리아 왕조시대에서 에드워드 왕조시대(1901∼10)에 걸쳐 토마스 하디(1840~1928), 헨리 제임스(1843∼1916), 콘래드(1857∼1924), 골즈워디(1867∼1933) 등의 소설가들이 활약하였는데, 시대는 이미 20세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인 오스틴]                      [찰스 디킨스]

3) 대영박물관
  대영 박물관은 1753년 박물학자인 한스 슬론 경이 6만 5천 점의 수집품과 4만 5천 권의 장서를 정부에 기증하면서 시작되었다. 몬태규 후작이 건축가 피에르 퓌에에게 설계를 의뢰하고 베르사유 궁전에 참여했던 화가들에게 실내 장식을 맡겨 세운 건물을 박물관 건물로 결정하여, 마침내 1759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엄격한 심사에 통과한 사람만 관람할 수 있어서 하루 관람객이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후 18~19세기에 이집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의 고고학 유물,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 원정 때 발견해 영국이 전리품으로 가져온 로제타스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군, 서아시아의 발굴 유물 등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이곳으로 옮겨와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대영박물관]                [박물관 내부 1]                [박물관 내부 2]
 
       [아시아 관]                   [한국 관]
3. 영국의 복지
  영국 국가 보건 의료서비스 NHS는 National Health Service의 줄임말로서 1948년에 설립된 영국의 보건의료 제도입니다. 복지로 명성 있는 영국이 자랑하는 NHS는 한국의 소방방재청, 경찰청과 같이 공공기관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공공기관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입니다.

“경제적 능력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최상의 의료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설립되었으며 부분적인 안과와 치과치료를 제외하고는 합법적으로 NHS에 등록된 사람 (영국국적자 혹은 합법적 거주자)이라면 누구든지 무상으로 의료진단 및 약 처방이나 복잡한 수술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불법거주자라도 응급환자일 경우 법적 제재, 출신지 상관없이 무료로 의료혜택이 주어집니다.

이 복지제도는 영연방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리는데, 잉글랜드의 경우에는 NHS,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에서는 NHS Scoland, NHS Wales 라고 불리며, 북아일랜드에서는 Health and Social Care in Northern Island라고 합니다. 영국은 이 4개의 명칭을 합쳐 NHS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예산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NHS는 영국의 대대수의 보건의료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으며, 영국 내 근로자의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이러한 영국의 무상 보건의료제도는 세계 2차 대전 직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세계2차대선 이전, 영국의 대부분의 병원은 자선병원 혹은 지방정부 운영병원이었습니다. 자선병원은 1930년대까지 모금된 기금으로 운영되었으나, 재원은 전체 수입의 20-30%에 불과하였고, 이 때문에 지불능력이 있는 환자에게선 진료비의 50%를 부과하였습니다.

1938년 세계 2차 대전을 앞두고 전국적인 병원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 당시의 산만한 병원체계로는 전쟁으로 발생할 의료요구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정부에 의해 지방병원과 자선병원을 이용한 전국적인 응급의료망이 구축됩니다. 이 경험으로 영국정부는 병원과 의료서비스 사이에 복잡한 연계망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후, 당시 노동당 정부의 보건부장이었던 베번(Aneurin Bevan)은 병원의 국유화를 내세우는 것이 보건의료의 진보된 개혁으로 보고 NHS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42년경 이르러 윌리엄 비버리지가 만든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고서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1948년 7월 5일 현재의 NHS가 시행됩니다.


Ⅲ. 마치며

  영국은 2차 대전이 끝나고 식민지가 독립을 하면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의 수식어는 내려놓게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통한 근대정신의 고취를, 그리고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지금의 세계를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정치, 경제 두 분야에 걸쳐 알아보았으며 그 안에서 발전 되어오고 생겨난 영국의 문화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영국인들에게 “영국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상에 걸맞지 않지 않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해는 졌지만 사자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사자의 위엄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 될 수 있을까? 영국의 미래가 더욱 기대 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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