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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모세의 시대 BC 1300년무렵

by 이덕휴-dhleepaul 2019. 12. 22.

모세의 시대 BC 1300년무렵 (메소포타미아,이집트,동아시아)-하단 구세사 救世史참조

세계사-구약시대 2012. 7. 30. 14:49

모세의 시대 BC 1300년무렵 세계모습


BC 1300년무렵의 메소포타미아 인근지역의 문명의 구도(현재 서유럽의 조상들)


-히타이트 신왕국의 시조는 수필룰리우마스 1세(Suppiluliumas Ⅰ,기원전 1380 ~ 기원전 1340?) 시대에 히타이트의 판도는 가장 커졌다. 히타이트인은 소아시아의 지배를 강화하여 미탄니를 속국으로 하고, 북시리아를 세력 아래에 흡수, 이집트 다음가는 대국이 되었다. 무와탈리스는 이집트의 왕 람세스 2세의 군대와 카데시에서 싸워서 격퇴했다(기원전 1286). 하투실리스 2세는 이집트와 화약(和約)을 맺어(기원전 1269) 오리엔트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동편에서는 아시리아에게 압박되고, 소아시아 서부에서는 후리기아가 대두하여, 그리스계 해상 민족의 침입으로 기원전 1190년경 히타이트는 멸망했다.



이집트- 람세스 2세시대


아모리족- 우르(현재의 이라크,신바빌론,앗시리아)


헷족   - 현재의 터키(마케토니아)를 중심으로 시리아북부지역

(신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다마스커스 포함)


가나안 - 현재의 시리아남부지역 일부,레바논,이스라엘


그리스섬지역 -  미노아문명,크레타문명, 미케네문명




1,히타이트 (성서에서 헷족) 클릭 ☞ 전쟁을 좋아하는 DNA 헷족-히타이트족의 유전자

2,스키타이 (창세기10장) 연관 포스팅 클릭 ☞성경 속 지역명칭-The descendants of Japheth)창세기10장

3,아모리족 - 우르왕조    클릭 ☞인류사人類史의 기록-성경-신화가 아니다(노아 홍수의 흔적) (1)


동아시아인 자료는 여기 클릭하여 중간부분에 있으니 참조 ☞BC2000년 무렵 세계 풍경-테라(아브라함의 부친)시대




1,히타이트------- 기원전 18세기경 아나톨리아 북중부의 하투샤(Hattusa)를 중심으로 형성된 왕국을 말하며, 언어적으로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기원전 14세기경 제국의 융성기에 들어섰으며, 중앙 아나톨리아, 시리아 북서부로 우가리트(Ugarit), 메소포타미아 북부까지 장악하였다. 기원전 1180년 이후에 제국은 분열되어 여러 독립 국가로 나뉘였으며, 몇몇은 기원전 8세기경까지 유지되었다. 이 시기를 신히타이트(Neo-Hittite)라고 한다. 히타이트라는 낱말은 구약성서의 헷 족속(Children of Heth)에서 유래하였다. 19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히타이트를 발굴한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이들을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와 동일시하였다. 현재는 성경에 등장하는 히타이트인과, 하투샤의 히타이트인 혹은 그 이후의 신히타이트 왕국의 식별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역사> 기원전 2000년 무렵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인도ㆍ유럽 어족에 속하는 고대 시리아 민족. 기원전 14세기에 전차ㆍ철제 무기 따위를 이용하여 크게 세력을 떨치었고, 메소포타미아에 철기 문화를 전하였는데, 기원전 12세기에 이웃 여러 민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히타이트는 고왕국(古王國)과 신제국으로 구별된다. BC 3000년기 말엽의 소아시아에는 하티(Hatti:原히타이트)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고대 오리엔트의 다른 민족과는 전혀 다른 언어를 갖고 있었는데 아직 문자는 없었다. 또한 그들은 광범위하게 무역을 하였는데, 광석과 목재를 구해 간 아시리아인의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BC 2000년경, 오리엔트에서 일어난 민족이동의 한 파(派)로서, 북동방에서 할리스강(江) 중류역의 만곡부(彎曲部)에 히타이트인이 이주하여 하티를 정복하고, 몇 개의 소국(小國)을 형성하였다. 


BC 19세기에 이르러 쿠샤라의 왕 아니타시는 카파도키아(소아시아 중부)를 지배하였고, 라바르나시도 영토를 확장하여 소국은 점차 병합되었다. BC 17세기 후반에는 하투실리스가 북시리아까지 군대를 진격시켜, 통일왕국의 수도를 하투샤(터키의 보가즈쾨이)에 두었다. 그를 이은 무르실리스 1세는 그 여세를 몰아 바빌론에까지 원정하였다. 그러나 그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과 이웃나라 미탄니의 세력이 융성해짐에 따라 왕권은 불안정해졌고, 혼란시대가 계속되었다.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투드할리야시 2세였다. 그는 BC 15세기 중엽에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신제국(新帝國)을 건설하였다. 


4대(代) 수필룰리우마스의 국가경영은 특히 두드러져 그는 미탄니와 시리아에 있던 여러 소국을 멸망시키고, 수도에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히타이트를 일대(一大)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히타이트인의 용감한 기질과 더불어 철제무기와 말과 경쾌한 2륜전차(二輪戰車)에 의한 새 전술의 도입이 큰 몫을 하였다. 그의 아들 무르실리스 2세는 남서쪽에 있던 아르자와를 정복하였고, 다시 그 아들 무와탈리스는 시리아의 영유권(領有權)을 둘러싸고 이집트의 람세스(2세)와 오론테스 강변 카데시에서 사상(史上) 유명한 대결전(大決戰:BC 1286?)을 벌였다. 카르나크 신전의 비문(碑文)에는 이집트의 승리가 기록되어 있으나, 시리아는 여전히 히타이트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하투실리스 3세는 신흥 아시리아에 대한 우려에서, BC 1269년경 이집트와 우호조약을 맺고 딸을 람세스 2세에게 출가시켰다. 히타이트는 이 무렵부터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BC 1190년경 서방에서 침입해온 민족에 의하여 갑자기 붕괴하였다. 히타이트인의 일부는 시리아로 피하여, 한때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BC 717년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가 카르케미시를 점령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였다.




2,스키타이 [Scythian]


고대 그리스인은 흑해 북쪽 돈강에서 프루트강에 이르는 초원지대를 스퀴티아(Skythia)라고 부르고 그 초원에 살았던 페르시아계 민족을 스퀴트인이라고 하였다. 주로 BC 6세기~BC 3세기경을 스키타이 족의 활약기로 보지만 학자에 따라 BC 8세기~BC 2세기로 넓게 보기도 한다. 항아리의 부조(浮彫)나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페르시아계 유럽인종에 속하고 장신에 강건한 체구를 가졌으며, 광대뼈가 나오고 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를 4개의 집단, 즉 왕후(王侯)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농민 스키타이 ·농경 스키타이로 구분하였다. 이 중 왕후 스키타이가 지배자로서 군림, 아조프해(海) 북쪽 연안에 궁전을 건립하고 돈강과 드네프르강 사이의 초원과 크림반도를 영역으로 하였다. 

 

스키타이 왕국은 왕후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를 종속국으로 하여 형성한 연맹적(聯盟的) 성격이 강한 국가였으며, 시기와 국가의 특성에 따라 크게 3 단계로 구분된다. 첫째는 BC 7세기 말부터 BC 5세기 말까지 흑해 연안과 근동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유목민 성격이 강했던 시기이다. 두번째는 BC 4세기경부터 전성기를 누린 왕국으로 주로 카스피해 연안과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했으며, 농경 뿐만 아니라 주요 도시를 거점으로 삼아 주변국들과 활발한 무역 관계를 유지했다. 세 번째 시기는 BC 5세기 이후로, 주로 정착생활을 하며 농사를 국가의 기반으로 삼은 시기를 말한다. 


스키타이 족은 BC 11세기경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서서히 침투해 온 민족과 원주민과의 혼혈에 의하여 형성된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는 키메르인(人)과 함께 BC 9세기 경 가장 일찍 유목민화하였다. 민첩하고 강력한 기마민족이 된 이들은 BC 7세기에 소아시아 ·시리아 방면을 침범하고 BC 6세기에는 키메르인을 캅카스의 쿠반강 유역으로 쫓아내고 근거지를 아조프해 북부로 옮겼으며,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서 도나우강 중류지대까지 세력을 확대시켰다.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대왕은 스키타이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BC 4세기 서방 초원에서 사르마트인이 침입하여 왕후 스키타이는 주영토에서 쫓겨나고, BC 3세기에는 켈트인에게 압박당하여 서방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드네프르강 하류와 크림반도에서만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BC 2세기 약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사르마트인과 보스포루스왕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스키타이는 양 ·염소 ·소 등을 대상으로 한 이동목축(移動牧畜)을 영위하고, 가축의 감독과 교통 ·군사상의 필요에서 말을 기마용으로 활용하였다. 흑해 연안의 그리스인 식민(植民)과는 분업사회를 이루어 축산물 ·우랄산 황금 ·북방산 모피 ·수탈한 곡물 등을 제공하는 한편, 포도주 ·올리브유 및 각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다. 이와 같은 교역의 결과 이란적인 요소가 많았던 스키타이 문화는 BC 4세기 이후 특히 그리스 고전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물은 아키나케스식(式)의 단검, 아가리에 입체장식이 있는 청동솥, 장대[竿頭], 세날개 화살촉, 손잡이가 하나인 주발형 흑색토기, 각종 장식판 등이 있으며, 입체적 또는 투조풍(透彫風)의 동물 의장(意匠)은 특히 주목된다. 또 그리스인으로부터 거울[銅鏡]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다만 수많은 황금제 용기와 장신구는 그리스의 공장(工匠:職人)이 스키타이에 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스키타이 문화는 동방의 여러 유목민족 사이에 확산되어 각지에 스키타이풍(風)의 문화를 육성시켰다. 이 계통의 문화로는 알타이 산지의 마이에미르 문화와 오르도스지방의 쑤이위안[綬遠] 문화 등이 있다. 스키타이 문화는 화북을 거쳐 전국시대의 중국문화에 영향을 끼쳤으며, 다시 한국과 일본에도 파급되었는데, 거울은 그 좋은 예이다.

 

카자크(우크라이나어: Козаки́; 러시아어: Каза́ки; 폴란드어: Kozacy) 또는 코사크는 15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있었던 군사 집단이다. 구성원의 출신 국가는 다양하였다.키르기스족과 매우 흡사하며, 체질적으로는 터키인과 몽골인과의 혼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카자흐 족(카자흐어: Қазақ 카작, 러시아어: Казах 카자흐[*])은 카자흐스탄의 주요 민족이다. 터키계 민족에 속하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과 서유럽, 중국, 중동,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에도 거주한다.카자흐인들은 코사크인(Cossacks)들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이러시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코사크인과도 약간의 관련이 있다고 한다.


현재 카자크의 출현에 관한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샴바로바(В. Шамбарова)와 구미료바(Л. Гумилёва)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카자크 인들은 확실히 몽고-타타르 군대의 침입 후에 카소그(Касог)와 브로드닉(Бродник)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카소그인들은 옛날 카프카즈의 민족으로 10~14세기에 쿠반 강 하류 지역으로 이주하였었다. 브로드닉들은 터키-슬라브 민족 출신으로, 12세기에 돈 강 하류에 부락을 이루면서 살았다.(그 당시 이들은 키예프 루시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몽골인들에 의한 정복 후에 카소그 인들은 북쪽으로 피난을 가게되고, 돈 강 유역의 브로드닉 민족과 융합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계승하여 카자크(казак)라 불렀다. 그리고 그때 브로드닉들은 몽골 측에 투항하여 깔까(Калка)강에서의 전투에서 루시를 격퇴하였다. 


그리하여 카자크인의 최초의 조직이 정비되었고, 타타르인들에 의한 복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피정복민인 카자크인들이 그들 자신의 종교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몽골군 중에는 카자크 군에 투항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카자크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사파이스코-포돈스코에(Сарайско-Подонское)교구도 있었다. 금장한국의 분열 후에 금장한국의 영역에 남겨진 카자크인들은 자신들의 군대 조직을 보존할 수 있었고, 그때 이들은 분열된 제국의 일부분이었던 노가이 한국(Ногайская орда)과 크림 한국(Крымское ханство)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루시를 침입했던 모스크바 공국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리고 1380년 카자크들은 드미트리 돈스코이에게 "돈 강의 성모(Донской Богоматери)"라는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전해진다.


3,아모리----(수메르어 마르.투, 아카드어 티드눔 또는 아무룸, 이집트어 아마르, 히브리어 에모리)는 셈계 민족을 말하는데, 기원전 제3 천년기 후반에서 유프라테스의 서쪽의 나라를 점유하였다. 아무루는 그들과 그들의 주신을 말한다.최초의 수메르 문헌은 기원전 2400년경에 시작하며, 아모리(마르.투)의 땅은 서방과 관련되는데 시리아와 가나안을 포함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은 아라비아였던 것 같다. 


아무루와 아마르는 각각 아시리아와 이집트에서 그들을 위해 사용한 특유의 용어였다. 아모리는 달의 신인 신(Sin)과 아무루를 숭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기원전 21세기부터 이어진 아모리족의 대규모 이동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침입과 신 수메르의 우르 제3 왕조의 멸망을 유발하고 일련의 강력한 왕국을 요구하였으며 그들 중 바빌론의 함무라비의 승리로 절정에 도달하였다.


알려진 아모리트족(주로 마리의 그들)은 아카드 방언으로 기록하였는데 기원전 1800년에서 1750년까지로 보이는 점토판에 발견되었는데 많은 북서 셈계의 형식과 구성을 보인다. 아모리트 언어는 아마 북서 셈계 방언이었다.이 언어에 대한 우리의 극히 제한된 지식의 주요 원천은 그러한 글들에 보존된 적당한 이름들이며, 문체는 아카드어와 다르다. 이들 이름의 많은 부분이 후의 성경의 히브리 이름과 유사하다.



우르 제3왕조-------우르에 기반을 둔 기원전 2100년에서 2000년경의 수메르 왕조로, 비교적 짧은 기간이지만, 지역 기반의 정치세력을 유지한 왕조이며, 일부 역사가들은 초기 제국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 부흥기 또는 우르 제3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우르 제3왕조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여려 세기에 걸친 아카드 제국과 구티족 왕들의 지배 이후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신,라르사, 에쉬눈나 등의 도시를 세력권에 포함시켰고, 북쪽으로는 제지라(Jezira)까지 확장하였다.


우르 제3왕조는 아카드 왕국이 무너진 뒤 얼마지 않아 시작되었다. 아카드 왕조의 마지막 왕, 샤르-카리-샤르리(Shar-kali-sharri)와, 우르 제3왕조의 첫 번째 왕인, 우르-남무 사이의 기간에 대한 사료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대부분의 아시리아 학자들은 강성한 도시국가들 간의 주도권 다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우르 제3왕조의 탄생에 대한 정확한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그 중 한 가지는, 원래 장군이었던 우르-남무가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그가, 우르크의 왕 우트-헤갈(Utu-hegal) 왕을 대체하였고, 우트-헤갈은 그 전에 구트 왕 티리간도 패위시켰다. 수메르 왕명록에 따르면, 우트-헤갈은 7년동안 재위하였다.


다른 한 가지는, 우트-헤갈이 우루크를 다스릴 때, 우르-남무가 그의 사령관이었다는 것이다. 우르에서 발견된 두 개의 석판에서는 우르 남무의 생애를 말해주고 있다. 첫 번째 가설과 유사하게, 학자들은 우르-남무가 우트-헤갈에 반기를 들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또 다른 가설에서는 우르-남무는 우트-헤갈의 가까운 친척이고, 후자가 통치권을 양도했다는 것이다. 우르-남무가 우르를 4년간 통치한 후에, 라가시와의 전쟁에서 라가시의 왕을 제거하면서 더욱 더 명성을 얻게 된다. 전쟁 이후, 우르-남무가 수메르와 아가데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왕권이 이어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우르-남무가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했다는 데에는 반대하고 있다. 한 가지 근거로는 우르와 우루크가 단절 없이 계속해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왕들은 적들을 비난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증거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많은 중요한 변화가 슐기의 통치하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제국의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고, 행정 절차들을 표준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행정절차, 기록문서, 조세제도, 달력 등을 표준화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우르에 상비군을 배치하였다. 슐기 왕은 살아 있는 동안 신격화되는 영예를 누렸다.기원전 2004년 엘람인의 침입으로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하고, 바빌로니아는 외세(外勢)인 아모리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헷족의 뿌리(러시아인 조상) 자료 클릭 ☞  이란인-아리아족 VS 스키타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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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서유럽사회를 이루는 민족들의 조상추적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들



-------- 이집트의 그리스 식민화에 다른 서구문명의 계승(기원전 21세기-크레타를 흡수:황소 숭배)→그리스문명으로 계승(미노스 왕과 크레타:그리스 신화-황소숭배)→  기원 후 2세기 이집트 몰락후 그리스도교로 대체→이러한 우상숭배의 기질은 다시 10세기 이후 비잔틴문명으로 부활→오늘날의 무슬림으로 자리 잡는다.



-------게르만족의 주된 신체적 특징은 금발벽안(金髮碧眼)이었다고 한다. 게르만족의 기원지로 여겨지는 곳은 현재의 독일 북부지방과 덴마크, 그리고 발트해를 중심으로 한 지방이다.



★고트족 - 나중에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분화----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


★노르만족,★랑고바르드족


★반달족 -Vandals5세기 로마제국을 침범한 게르만족의 일파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국가를 건설했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한 오도아케르는 반달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바바리아족,★부르군트족


★앵글로 ★색슨족 ★프랑크족


★알라마니족 ★튜튼족 ★프리센족 ★암브로네스 ★바타비아



구세사 救世史 ............중에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기원전 1290~1020)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은 출애굽(기원전 1290년)이다. 출애굽이란 이집트 탈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집트로 들어간 히브리인들이 비옥한 땅 고센 지방에 살며 계속 인구가 불어나자 이를 두려워한 이집트인들이 히브리인들을 억압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1.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에 들어온 지 400년이 지난 후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이집트 왕이 등극하자 그는 히브리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이집트 강물에 던져 죽게 하였으며(탈출 1,22), 히브리 사람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하고 종살이를 시켰다(탈출 1,9-14). 이때 히브리 레위 가문에서 탄생한 모세는 이집트 강물에 던져졌으나 구출되어 이집트 공주(파라오의 딸)의 궁전에서 성장하였다(탈출 2,1-10). 성년이 된 모세는 밖에 나갔다가 동족이 고생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으며,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였다(탈출 2,11-12). 이 일이 탄로 나게 되자 미디안으로 도망갔으며, 그곳에서 이트로(르우엘) 집안 치포라를 아내로 맞이하고 양치는 목자가 되어 살게 되었다.


  1) 모세의 하느님 체험과 소명 - 어느 날 모세는 양떼를 이끌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가 불꽃이 이는 떨기 한가운데에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이집트 땅에서 고생하고 신음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오라는 사명을 주고(탈출 3,1-12),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 즉 “나는 있는 나다.” 라는 분으로 계시하신다(탈출 3,13-15).

  모세는 기적을 행할 힘을 받고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하여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히브리인들을 내보내 달라고 청한다. 모세는 파라오에게 아홉 가지 재앙, 즉 ① 물이 피가 되게 함, ② 개구리 소동, ③ 모기 소동, ④ 등에 소동, ⑤ 가축병, ⑥ 종기 ⑦ 우박, ⑧ 메뚜기 소동, ⑨ 어둠(탈출 7,14ㅡ10,29)을 차례차례 보여주며 청하였다. 그러나 파라오는 계속 마음이 완고해져 고집을 부렸다.


  2) 파스카 사건 - 마침내 열 번째 재앙은 과월절에 치른다. 히브리인들의 문설주에는 양의 피를 발라 두었는데 하느님의 천사가 이것을 보고 ‘거르고 지나감’(파스카),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이집트인들의 집안에 들어가서는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를 죽였다(탈출 12,29). 이를 본 파라오는 마침내 히브리인들을 석방하여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인도로 홍해 바다를 건너게 되고, 추격해 오던 이집트 군대를 홍해 바다 속으로 따돌리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탈출 15,1-21).



  2. 광야 생활과 시나이 계약(기원전 1290~1250년)



  1)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 -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지 한 달 후 시나이 산 근처의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배고프다고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어 그들을 먹여 주셨으며(탈출 16,1-36), 르피딤에 이르러서는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여 먹을 물을 마련해 주셨다(탈출 17,1-7).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고도 부른다.


  2) 십계명 - 그 후 모세는 장인 이트로의 충고대로 원로들을 세워 통치하였으며,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는다(탈출 20,1-17). 이 십계명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계약의 조건이었다(탈출 24,1-11).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는 계약이었다.

  

3) 법령의 제정과 제사 규정 - 그밖에 모세는 하느님의 분부대로 여러 가지 법령을 제정하고 성소와 성막, 계약 궤, 제단, 제복, 사제복 친교제, 제사 규정을 정하였다(탈출 25ㅡ31장).

  

4) 우상 숭배와 신앙의 시련 -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경배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기도 하였다(탈출 32,1-29).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로 40년 간 사막(광야)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시련과 도전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정화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하게 된다.

  

5)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 - 하느님께서는 거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는 동안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어 그들을 먹이시고, 바위에서 물이 샘솟게 하여 마실 물을 마련해 주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탈출 40,34-38).

  


3. 가나안 정착과 판관 시대(기원전 1250~1020년)



  1) 모세의 죽음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가다가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 쪽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120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다(신명 34,1-8).


  2)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정착(기원전 1200년) - 모세의 후계자로 지명된 눈의 아들 여호수아(신명 31,1-8)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에 나선다. 그리하여 요르단 강 건너 예리코를 점령하고 가나안의 여러 땅들을 차지했다(여호 1ㅡ12장). 그리고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각 가문별로 유산을 차지하였다(여호 13ㅡ19장).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섬기도록 다짐하는 뜻으로 열두 부족의 대표들이 스켐에 모여 큰 돌을 세우고 주님의 성소 앞에서 맹세하였다. “너희가 주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 그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너희 자신이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가 증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이제 너희 가운데에 있는 낯선 신들을 치워 버리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여라.” 하자,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습니다”(여호 24,22-24). 여호수아는 이 일을 마치고 110세에 죽었으며, 그의 생전에이스라엘 백성은 줄곧 주님을 섬겼다(여호 24,29-31).

  


3) 가나안의 토속신들과 신앙의 위협 - 여호수아가 죽고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곳의 발달된 농경문화와 그 주민들이 섬기던 바알(Baal) 신과 토속 신, 풍요 신(아스타롯 신, 아세라 신 등)들의 유혹에 끊임없는 신앙적 위협을 받게 된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신앙을 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신과 토속 신앙에 빠지거나 외세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판관들이 나타나 이스라엘을 구하고 야훼 신앙으로 되돌려 놓곤 하였다.

  

4) 판관들의 지도 - 판관들은(기원전 1200~1020년) 이스라엘이 이직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과도기에 일정한 기간 동안만 통치했던 정치적 민족적 지도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판관 형태의 통치는 200년간 지속되었다. 오트니엘(판관 3,7-11), 에훗(3,12-30), 삼가르(3,31), 드보라(4,1-11), 기드온(6,1-40), 톨라(10,1-2), 야이르(10,3-5), 입타(11,1-33), 입찬(12,8-10), 엘론(12,11-12), 압돈(12,13-15), 삼손(13,1-25) 등 열두 명의 판관이 있었다.

  


♱ 성경의 가르침*하느님의 거룩한 백성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나의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스라엘인들에게 알려 줄 말이다(탈출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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