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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신현상학』 서문 (1)

by 이덕휴-dhleepaul 2020. 2. 2.

『정신현상학』 서문 (1)

『정신현상학』 서문, 전대호 옮김


1. 

 이런 설명, 의례 서문이라는 이름으로 책 앞에 던져 놓는 설명-그러니까 작가가 품은 목적이나 책을 쓰게 된 동기, 같은 대상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연구들이 작가가 보기에 여기 이 책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등에 관한 설명-은 철학적인 책에서는 거추장스러울 뿐만 아니라, 철학의 본성을 생각해보면 심지어 부적절하고 일을 망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왜냐하면 철학에 관해 서문에서 어떻게 무엇을 얘기하든 -예를 들어 연구 경향과 연구 관점과 일반적 내용과 결론을 연구가 이루어진 순서대로 서술하든, 여기저기 흩어진 주장들과 강조점들을 묶어 진실이라 늘어놓든- 그렇게 얘기하기가 철학적인 진실을 펼치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철학은 그 근본상 특수한 것들을 제 안에 품은 일반을 기본으로 삼아 이루어지므로, 여타 학문에서보다 더 쉽게 다음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목적 혹은 최후 결론이면 학문 그 자체가 드러난다. 심지어 가장 완벽하게 학문의 근본Wesen이 드러난다. 따라서 그 목적이나 결론을 풀어 놓은 내용은 별로 중요치 않다. 반면에 예컨대 해부학의 경우, 즉 몸의 부분들을 죽은 상태로 고찰하는 학문의 경우, 사람들은 일반 표상만으로 이 학문의 내용을 다 알았다고 여기지 않고, 더 나아가 특수한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학문이라는 이름을 제 맘대로 붙인 여러 지식다발에서는, 목적이나 기타 일반에 대한 논의와 그저 생각 없이 서술하는 논의가 구분되지 않아서, 항상 내용 그 자체에 관하여, 즉 이 신경, 이 근육 등등에 관하여 서술이 이루어진다. 이와 달리 철학에서는 목적이나 일반을 따로 이야기하는 방식이 사용되면서도, 또한 동시에 이런 별도의 이야기 방식이 진실을 담기에는 부족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듯하다.


2. 

 어떤 철학적 작업이 같은 대상을 다룬 여타의 노력들과 맺는 관계를 규정하게 되면 사실 구경꾼들의 관심만을 끌어들일 뿐, 진실을 아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오히려 어둠에 묻히게 된다. 참과 거짓의 대립 속으로 철석같이 믿는 구경꾼은 기존의 학문 체계에 대한 동의나 반박을 기대하기 마련이며, 그래서 기존 체계에 관한 설명을 들으면서 동의 또는 반박만을 보기 마련이다. 구경꾼은 학문 체계들의 차이가 앞으로 나아가며 펼쳐지는 진실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차이 속에서 모순만을 본다. 꽃이 필 때 꽃봉오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꽃이 꽃봉오리를 반박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열매는 꽃이 거짓임을 선언하고 꽃이 차지했던 진실이라는 자리를 차지한다고. 이 여러 모습들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없으므로 서로를 밀어낸다. 그러나 이 모습들의 본성은, 이 모습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에 참여하는 요소가 되게 한다. 이 통일체 안에서 요소들은 서로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부 다 꼭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요소들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필연성이 바로 전체의 삶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문적 체계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꾼은 자기 자신이 위와 같다고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대개의 경우 폭넓게 감싸는 의식으로 자기 자신을 일면성으로부터 풀어 자유롭게 유지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듯이 보이는 요소들을 서로에게 필연적인 요소들로 파악하지 못한다. 


3.

목적이나 결론이나 관계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또 요구에 맞추어 밝히는 것이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으로 중요한 일이라 여겨질 수도 있겠다. 목적과 결론이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철학책의 알맹이를 보겠는가? 또 같은 영역에서 세월을 통해 만들어진 것과의 차이를 말하는 방법 외에 어떤 방법으로 그 알맹이를 더 분명하게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식의 밝힘이 앎의 시작 이상으로, 실현된 앎으로 여겨진다면, 그건 사실상 사태 자체를 외면하고 진지함과 노력의 흉내만 내면서 진지함과 노력 없이 가기 위해 꾸민 잔꾀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태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의 실행으로 완성되며, 결론이 실현된 전체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실현된 전체는 결론과 결론에 이르는 과정 전체이다. 독자적으로 고립된 목적은 생명 없는 일반이어서, 마치 경향이 다만 본능적인 욕구인 것처럼, 아직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벌거벗은 결론은 실현이 뒤에 남긴 시체일 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두 학문 체계의 차이는 다만 사태의 경계선일 뿐이다. 경계선은 사태가 끝나는 곳이다. 다시 말해서 경계선은 사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목적과 결론과 편가르기와 편들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노력은 겉보기와 달리 아주 쉽다. 이런 식의 공부는 사태 자체를 움켜쥐는 대신 항상 사태 너머로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사태 안에 머물러 자기 자신을 잊는 대신, 항상 다른 사태를 찾아다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사태 곁에서 사태에 몰두하는 흉내는 내지만, 사실 제 제 곁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일은 크기도 있고 무게도 있는 것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이며, 더 어려운 일은 그것을 움켜쥐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이 둘을 종합하여 사태 자체를 펼쳐 놓는 일이다.


4.

딱딱하게 굳은 삶의 "그냥Unmittelbarkeit"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일, 즉 배우는 일의 시작은 언제나, 일반적인 원리들과 관점들을 배우는 것에서, 우선 사태 일반에 관한 생각에까지 기어오르는 것에서, 좋다, 사태에 근거를 달아 지지하거나 반박하는 것에서, 구체적이고 풍요롭게 가득 찬 것을 이러저러하다고 규정하여 파악하는 것에서, 사태에 대해 적절한 식견과 진지한 판단을 내놓을 줄 아는 것에서, 언제나 시작은 이런 것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배움의 시작은 그러나 곧 가득 찬 삶의 진지함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충만하고 진지한 삶은 사태 자체를 경험하러 들어간다. 물론 더 덧붙여야 할 것은, 그 경험의 바닥으로부터 진지한 개념들이 솟아오른다는 것, 그리하여 사태에 관한 앎과 판정이 대화 속에서 올바른 제자리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5. 

진실이 가질 수 있는 참된 모습은 오직 진실에 관한 학문적인 체계일 수밖에 없다. 철학이 학문의 모양에 다가가도록 함께 노력하는 것-철학이 앎을 향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실현된 앎이 되는 것-바로 이것이 내가 의도하는 바이다. 앎이 학문이어야만 하는 내적인 필연성은 앎의 본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설명은 오직 철학 자체를 펼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한편 이래야만 하는 외적인 필연성은, 개인의 성격이나 개별적인 동기의 우연성을 옆에 치워 두고 일반적으로만 말한다면, 시대가 표상한 모습을 띤 내적인 필연성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철학을 학문으로 격상시킬 시기가 왔다는 것, 바로 이것을 분명히 밝히는 일이 철학을 학문으로 높이는 목적을 품은 이 책을 위한 단 하나뿐인 올바른 정당화일 것이다. 이 책은 그 목적의 필연성을 제시할 것이며, 그렇다. 이 시도는 또한 동시에 그 목적을 실현할 것이다. 


6.

진실의 참모습을 학문성에 둠으로써-바꾸어 말하면, 진실은 오로지 개념만을 원소로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내가 이 시대에 매우 폭넓고 권위 있게 받아들여지는 생각과 그것의 귀결들에 모순되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므로 비록 여기 서문에서는 나의 적수들의 언성 높인 소리와 다를 바 없는 호언장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나와 그런 생각 사이에 있는 모순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의 말대로 참된 것이 오직 그런 모습으로만, 혹은 더 나아가 그것으로만, 즉 직관이라고도 불리고 "절대das Absoulte"에 관한 즉각적인 앎이라고도, 종교라고도, 있음이라고도-신의 사랑의 중심에 있음이 아니라 신의 있음 자체로 여겨진 있음이라고-불리는 그것으로만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철학을 펼치는 데 있어서도 개념이 아니라 개념에 반대되는 형식이 필요할 것이다. "절대"는 개념화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되고 느껴져야 하며, 절대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의 느낌과 직관이 앞장서서 논의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7.

이런 요구의 등장을 일반적인 맥락 속에 넣은 다음 스스로를 의식한 정신이 현재 서 있는 단계에서 바라보자. 오늘날의 정신은 분명 그냥 한 덩어리인 생명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물론 예전엔 이런 한 덩어리 생명을 정신이 생각의 필수 요소로 끌어들였지만- 그냥 믿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자신과 근본Wesen의 화해에 대해, 또한 근본이 제 안뿐만 아니라 제 밖에도 늘 함께 있음에 대해 가졌던 확신의 안전함과 만족스러움으로부터 이미 벗어나 있다. 정신은 이런 믿음들을 벗어나, 거리낄 것 없는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라는 반대쪽 극단으로 갔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 새로운 극단도 벗어났다. 정신은 뿌리박힌 삶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상실을, 그 상실의 실제 내용인 유한성을 의식하기에 이르렀다. 찌꺼기들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불행을 곱씹고 부끄러워하면서, 정신은 이제 제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철학에게 요구하지도 않고, 옛날의 한 덩어리 풍요로운 있음에 철학을 통해 비로소 다시 도달할 것을 철학에게 요구하지도 않는다. 정신의 이러한 요구 앞에서 철학은 닫힌 실체를 열지도 않고, 실체를 자기의식으로 끌어올리지도 않으며,-혼돈된 의식을 생각된 질서와 개념의 단순성으로 되돌려 놓지도 않고, 또는 생각의 구분들을 뒤엎어 서로 다른 개념들을 눌러 버림으로써 근본에 대한 느낌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통찰도 감동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아름다움, 성스러움, 영원함, 종교와 사랑 같은 말 등은 입질을 유도하는 데 필요한 미끼로만 쓰일 뿐이다. 개념이 아니라 도취가, 차갑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태의 필연성이 아니라 부글거리는 감동이 실체의 풍요를 펼치고 유지해야 한단다.


8.

이런 요구와 맞물리는 것으로, 감각적인 것과 속된 것과 개별적인 것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건져올려 별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하겠다는, 매우 열성적이고 심지어 거의 호들갑에 가까운 노력도 있다. 마치 사람들이 오늘날 신을 완전히 잊고 진흙탕에 지렁이처럼 만족스럽게 살기라도 하는듯이. 예전에 사람들은 하늘을 장황하고 풍요로운 생각과 그림으로 꾸몄다. 모든 있는 것은 자신을 하늘과 연결하는 빛의 끈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았다. 하늘로, 여기 이 지금에 머물지 않고, 눈길은 이 지금을 벗어나 신적인 근본을 향해, 말하자면 "저편의 지금"을 향해 미끄러져 올라갔다. 정신의 눈은 강제로 땅으로 돌려져야 했고, 강제로 땅에 묶여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오직 하늘에만 있던 맑음을 뿌옇고 흐릿한 여기 이곳의 감각에 집어넣는 일이, 이곳의 현재에 그 자체로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경험이라는 이름 아래 관심과 권리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어느새 다시 반대의 위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감각이 지상에 너무나 단단히 묶여 있어서 이를 풀기 위해 예전만큼의 강제가 또 필요한 것처럼. 정신은 지금 너무도 가난해서, 마치 사막을 헤매는 사람이 단 한 모금의 물을 갈망하듯이, 신에 대한 남루한 느낌만이라도 타는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열망하는 것 같다. 정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그것, 바로 그것을 보면 정신이 얼마나 궁핍한 상태에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9.

이처럼 받는 것에만 만족하고 주는 데는 인색한 모습은 그러나 학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감동만을 찾는 사람, 지상에서 자신이 다양하게 정해진 모습과 자신의 생각을 안개 속에 감추고 불분명한 신에 대한 불분명한 만끽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마 잘 알 것이다. 어디에서 그런 것들을 찾을 수 있는지. 그는 혼자서 무언가 열렬히 상상하면서 늘어져 버리기 위한 수단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은 감동적이기를 경계해야 한다.


10.

더구나 이런 식으로 학문을 포기하는 만족감이, 이 감동과 도취가 무엇보다 학문보다 더 높은 것이라는 주장은 더욱 가당치 않다. 이런 예언자 연설은 정확히 중심에, 깊은 심연에 머문다는 생각으로 규정들을 천시하고, 개념과 필연성으로부터도, 유한에만 머무는 반성으로부터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텅 빈 너비가 있듯이 텅 빈 깊이도 있다. 유한한 다양을 묶을 힘도 없으면서 그저 다양 속으로 쏟아져 버리는 실체의 펼쳐짐이 있듯이, 모양없는 강强함, 펼쳐짐 없이 유지되는 힘도 있다. 그런 힘은 피상적인 것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힘은 표현된 만큼 크고, 정신의 깊이는 스스로 열어서 펼치고 기꺼이 자신을 잃는 그 만큼 깊다. 또 이 개념 없이 덩어리뿐인 앎이 자아의 특수성을 근본 안에 담갔다고, 참되고 성스럽게 철학한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다음의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이 앎은 신에게 충실하기는커녕 분수와 규정을 무시함으로써 때로는 자신에게 우연적인 내용을, 때로는 내용에게 자신의 제멋대로의 선택을 얹어 준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다. 그들은 실체의 걷잡을 수 없는 부글거림에 자신을 맡기고 지성의 과제와 자기의식을 숨기면서, 자기들이 잠 속에서 신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신의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실제로 그들이 잠 속에서 받아 낳는 것은 그리하여 꿈일 뿐이다. 


11.

다른 한편 우리의 시대가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과 탄생의 시대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정신은 자신의 "정해져 있음Dasein"과 생각이 이루었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 세계를 과거로 돌리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중이다. 정신은 물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아기가 오랫동안 고요히 영양분을 받은 후 첫 울음소리로, 단지 크기만 느는 과정을 부수고-질적인 도약-이제 아기로 태어나는 것처럼, 스스로 짓는 정신도 천천히 조용히 새로운 모습을 향해 익어 가면서 이전 세계가 지은 집의 부분들을 차례로 부순다. 이전 세계의 흔들림은 다만 산발적인 증상으로만 넌지시 알려진다. 어리석음과 지루함, 기존의 것을 부스러뜨리는 지루함, 모르는 것에 대한 불분명한 예감 등은 무언가 다른 것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파발들이다. 자츰 심해지는 이 부스러짐이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이 솟아오름으로써 이 부스러짐도 마감될 것이다. 한번의 섬광이 단 한번에 새로운 세계의 뼈대를 세울 것이다.


12.

그러나 이 새로움은 마치 갓난아기가 그러듯이 완전하게 실현되어 있지 않다.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첫 번째 출현은 기껏해야 그냥 새로움, 혹은 새로움의 개념일 뿐이다. 터를 닦았다고 집을 다 지은 것이 아니듯이, 이제 막 도달한 전체의 개념이 그대로 전체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도토리나무의 튼튼한 밑동과 펼쳐진 가지와 무성한 잎사귀들을 보고자 할 때 누군가 우리에게 나무대신 도토리 한 알을 보여 준다면, 우리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세계의 수관인 학문도 그 시작에서 완성된 것은 아니다. 새로운 정신의 시작은 다채로웠던 자라남의 모습들이 한꺼번에 뒤집히면서 나오는 산물이다. 여러 갈래로 얽힌 길을 걸어야만 얻는 상이요, 또 그렇게 여러 갈래인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얻는 상이다. 새로운 정신의 시작은, 단계적인 진행과 펼쳐짐으로부터 자신 안으로 되돌아 들어간 전체, 길을 거쳐 이루어진 단순한 전체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 단순한 전체의 실현은, 지나가 버려 요소가 된 모습들이 자신들을 다시 새롭게 새로운 원소 안에서, 이제 이루어진 의미 안에서 새로 펼쳐 자기들에게 새 모습을 주는 것에 있다.


13.

새로운 세계의 첫 나타남은 비록 단순한 하나 안에 숨어 있는 전체, 혹은 전체의 일반적 토대Grund일 뿐이지만, 의식에게는 지나간 여러 모습들의 풍요가 기억 속에 여전히 함께 있다. 새로 나타나는 모습이, 내용이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고 펼쳐지지도 않았음을 의식은 아쉬워 한다. 하지만 의식이 더욱더 아쉬워하는 것은 구분되는 것들을 분명하게 규정하고 고정된 관계 설정을 통해 질서짓는 것을 가능케 하는 "형식"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형식을 완성되지 않는 한 학문은 일반적으로 이해될 길이 없으며, 따라서 학문이 몇몇 개인의 배타적인 소유물인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배타적인 소유물: 학문이 오직 개념이나 속 알맹이로만 있을 테니까. 몇몇 개인에게만: 학문이 펼쳐져 나타나지 못한 채 개별적인 것으로만 있을 테니까. 완전하게 규정된 것만이 비로소 열려 있고 파악 가능하며 배울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학문을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드는 일은, 모두에게 또한 공평하게 모두를 위해 학문으로의 길을 열어 주는 일이다. 지성을 통해 이성적인 앎에 이르겠다는 것은 학문의 길에 나서는 의식이 내놓는 정당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생각Denken", 즉 "순수한 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이미 익숙한 것, 즉 학문과 학문 없는 의식이 공유하는 것, 의식이 학문에 첫발을 내디딜 때 밟는 첫 발판이기 때문이다.


14.

이제 막 시작한 학문은, 시작이기에 세부 내용이 채워져 있지도 않고 형식이 완벽하지도 않아서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비난이 새 학문의 근본을 향한 비난이라면, 완성하라고 요구하는 소리를 학문이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이 부당한 만큼이나 적절치 못하고 부당한 비난일 것이다. 완성의 요구에 무감한 새 학문과 새 학문의 근본을 향한 비난, 바로 이 대립이 현재의 학계에 싸움거리를 주는, 그러면서도 현재의 학계가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핵심 매듭인 것으로 보인다. 한 무리는 손에 잡히는 내용의 풍요로움과 이해할 수 있음을 고집하고, 다른 무리는 차근차근 이해되는 것을 천시하면서 그냥 단번에 알아보는 이성적임과 신적임을 고집한다. 비록 앞의 무리가 진리의 힘에 의해서인지 혹은 뒤의 무리의 습격에 의해서인지는 몰라도 침묵하게 되었지만, 또한 사태의 근본에 관한 논의에서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느끼고 있지만, 그들이 제기한 완성에의 요구는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다. 앞의 무리의 침묵은 절반쯤 뒤의 무리의 승리를 의미하지만, 또한 절반쯤은 지겨움과 무관심을 의미한다. 끝없이 기대감을 품게 하고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이들 앞에서 나타나곤 하는 지겨움과 무관심.


15.

내용과 관련해서는 뒤의 무리가 때로 내용의 크기를 늘리기에 너무도 쉬운 입장에 있다. 이미 알려져 있고 정리되어 있는 재료들을 자기들 마당에 한 무더기 끌어들이는 것으로 뒤의 무리의 내용 늘리기 작업은 완성된다. 또한 그들은 예외인 것들과 기괴한 것들을 주로 다룸으로써, 앎이 나름대로 이미 소화해 놓은 일반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더 잘 아는 듯한, 그래서 더 불규칙적인 것을 다스리는 시도를 하는 듯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절대적인 뜻Idee 아래 종속시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절대적인 뜻을 모든 것 안에서 발견한 듯한, 절대적인 뜻이 부피를 갖춘 학문으로 자라난 듯한 착각을 심어 준다. 그러나 이 부피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하나의 동일한 것이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만듦으로써 그 부피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것을 막무가내로 그냥 반복함으로써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재료에 외적으로 적용되어 지루하기 짝이 없게도 헛차이만 유지된다. 그 하나만 독자적으로 떼어 놓고 보면 충분히 옳은 뜻이 사실상 계속 출발점에만 머물러 있을 뿐이다. 뜻의 펼쳐짐이 이런 식으로 같은 하나의 공식을 반복하는 것뿐이라면, 주체에 속한 하나의 고정된 형식이 눈앞에 있는 것에 두루 펼쳐지는 가운데, 재료들은 밖으로부터 젖어들어 이 움직임 없는 벽돌 속에 잠긴다. 이렇게 해서는, 내용에 대한 제멋대로의 착상이 완성이 아닌 것처럼, 앞 무리가 요구했던 것을,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솟아나오는 풍요와 모양들이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여 만드는 차이를 향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는 오히려 하나의 색깔만 있는 형식주의이다. 다만 재료의 차이에 의존해 차이를 만들고, 이 또한 그 재료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알려져 있기에 가능하다.


16. 

이런데도 형식주의는 그 "하나의 색깔"과 추상적 일반성이 "절대"라고 주장한다. 형식주의자는 강조하기를, 이 "하나의 색깔"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절대적인 관점에 도달하고 그 관점에 굳세게 머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도, 그저 공허하게 달리 생각할 가능성을 들이댐으로써 하나의 생각을 충분히 반박했다고 여기면서 바로 이 공허한 가능성, 즉 일반적인 생각만을 실현된 앎이 가질 모든 좋은 가치를 차지한 앎이라고 여겼던 때가 있었듯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도, 이 실현되지 않은 일반적인 뜻에 모든 가치가 부여되는 것을 본다. 지금 여기에서도 차이와 규정을 없애는 일이, 혹은 더 분명히 말해서 차이와 규정을 구체성 없이 정당화하지 않고 텅 빈 심연 속으로 던져 버리는 일이 "꿰뚫고 아우르는spekulativ" 고찰 방식으로 통하는 것을 본다. 어떤 정해진 무언가를 절대 안에 있는 것으로 고찰한다는 말을 형식주의자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일단 어떤 것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만, 절대 즉 A=A 안에서는 그런 어떤 것이 전혀 없고, 대신에 절대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다. 절대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같다는 이 외톨이 앎은 구분하고 채운, 혹은 채우려 하는 앎과 대립한다. 달리 말한다면 사람들이 자주 말하듯이, 그들의 "절대"는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외톨이 앎은 공허하고 어린 앎이다. 최근의 철학이 비판하고 멸시했으면서도 스스로 또 만들어 낸 형식주의는 그 불충분함이 알려지고 느껴졌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현실에 대한 앎이 자신의 본성을 분명히 알게 될 때까지 학문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표상을 먼저 가지면, 그 표상 아래 이루어질 나중의 일들을 파악하기 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므로, 나중에 이루어질 것의 윤곽을 여기서 넌지시 비추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또한 동시에 그 윤곽을 보임으로써 철학적 앎을 방해하는 몇 가지 굳어진 형식들을 떨궈 내려 한다. 


17.

내가 깨달은 바로는, 물론 체계 자체를 펼쳐놓음으로써 정당화해야 하는 바이지만, 모든 것은 결국 여기에 달려 있다. 참된 것을 실체Substanz로, 뿐만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주체Subjekt로 파악하고 진술하는 것에.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실체성이 앎에 대하여 "있음" 혹은 "그냥"일 뿐만 아니라, 앎의 "그냥" 혹은 "일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신이 하나인 실체라는 말에 한 시대가 화를 낸 이유는 첫째, 만일 그렇다면 자기의식이 유지되지 않고 무너진다는 본능적인 느낌 때문이었고, 둘째, 그와는 정반대로 그저 생각뿐인 생각, 일반적인 것, 즉 바로 그 단순함 혹은 구분 없고 움직임 없는 실체성을 위해서였으며, 그리고 이제 셋째, 만일 생각을 실체의 그대로 있음과 결합함으로써 이 "그냥" 결합 혹은 직관을 생각으로 여기겠다면,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혹시 이러한 예지적 직관이 또 다시 게으른 단순성으로 주저앉아 현실을 현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닌지.


18.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실체는, 참되게 말하면 주체인 있음, 다시 말해서 참되게 현실적인 것, 오직 자기 자신을 세우는setzen 움직임으로서, 혹은 다르게 되면서 여전히 자신과 "연결하는 움직임Vermittlung"으로서 참되게 현실적인 것이다. 살아 있는 실체는, 주체로 고찰될 경우, 순수하고 단순한 "아니라 하는 힘Negativität"이며 따라서 단순한 것의 갈라짐, 혹은 이렇게 갈라져 서로 무관심해지거나 적이 된 둘을 또 한번 아니라 함으로써 이루는 서로 맞선 둘의 같음이다. 오직 이러한 다시 이룬 같음, 혹은 다른 것 안에서 제게로 돌아옴만이 참된 것이다. 원래의 하나임이 그냥 그대로, 또는 "그냥" 그 자체가 참된 것이 아니다. 참된 것은 "자기 자신이 됨", 움직임의 끝을 목적으로 미리 놓아 출발점으로 삼으며 움직임과 끝을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동그라미이다.


19.

따라서 신의 삶과 신의 앎을 자기 사랑의 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런 발상은, 만일 그 안에 진지함과 고통과 "아님"의 작용과 오래 참음이 없다면, 감동뿐인 감동으로, 더 나아가 바보짓으로 주저앉는다. 신의 삶 그냥 그대로는 맑디맑은 자기 자신의 하나임이자 같음이어서 다름이나 달라 낯설어짐이나 낯섦의 극복이 전혀 진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그냥"은, "자신에 대하여 있음"이라는 신의 본성을, 그리하여 형식의 자기 운동을 완전히 간과한 추상적인 일반성에 불과하다. 형식Form이 근본Wesen과 같다는 말을 다만 "그냥 그 자체" 내지 근본을 알면 다 되니 형식은 몰라도 된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그건 오해이다. 절대적인 근본 문장Grundsatz이 또는 절대적인 직관이, 근본 문장을 더 발전시키는 일이나 직관을 풀어 놓는 일을 면제해 준다는 생각도 오해이다. 형식은 근본에 그토록, 그러니까 근본이 근본에게 근본적인 만큼이나 근본적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근본은 다만 근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즉 근본이 그냥 실체 그대로 또는 신의 순수한 자기 직관으로 파악되고 표현될 것이 아니라, 또한 마찬가지로 형식으로 또 펼쳐진 여러 형식들의 풍요로 파악되고 표현되어야 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근본은 비로소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표현된다.


20.

참된 것은 전부이다. 그리고 전부는 펼침으로써 자신을 완성하는 근본이다. 절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절대가) 근본적으로 결과라는 것, 그가 맨 끝에 비로소 참된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절대의 본성이다. 절대의 본성: 현실적인 것, 주체, 자기 자신이 됨, 절대가 근본적으로 산물이라는 파악이 겉보기에는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시작, 근원, 혹은 절대를 맨 처음에 그리고 그냥 얘기하면, 이런 절대는 다만 일반적인 것일 뿐이다. 내가 "모든 동물"이라고 말하면서 이 한마디가 동물학이라 주장한다면 아무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신, 절대, 영원 등의 단어가 그 단어 안에 담긴 것을 발설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사실상 이런 단어들이 그냥 그 자체인 직관을 표현할 유일한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에서 더 나아감, 즉 단 한 문장으로라도 넘어감은, 다시 싸 담아야 할 달라짐, 즉 "연결하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연결 움직임Vermittlung이 혐오의 대상으로 찍혀 있다. 절대는 이 연결 움직임이 아니고 절대 안에는 이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의미라도 이 움직임에 부여되면 절대적인 앎이 포기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