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 고전 읽기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거름, 2004, 61~87쪽
보르디가 지도 하의 PCI(1921~23)
PCI 창당 이후의 3년 :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권력이 공고화되던 기간, 국제적으로 혁명이 퇴조, 러시아 당 내에서 권력투쟁이 개시되던 기간, 이탈리아당과 인터내셔널의 반목 심화.
그람시의 정치적 활동의 배경인 된 역사적 상황 : 국제적인 상황전개와 통일전선, 이탈리아 상황전개와 파시즘, 당 내에서의 보르디가와 타스카에 대한 투쟁
당시 코민테른은 혁명적 파고의 후퇴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그에 대응해 통일전선정책을 제시(1925~26년까지 코민테른의 기본적인 전략) - 코뮤니스트들이 노동계급의 다수파를 확보하기 위해 개량주의자들을 공동행동이라는 형태로 끌어들이노록 노력해야 하고 이후 노동계급이 소비에트를 만들어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분쇄하면,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과 같은 정당들이 스스로 소비에트 권력의 적대자임이 드러나게 된다.
PCI는 중간파를 잠재적 동맹자로 여기는 것을 꺼려, 1921년부터 24년까지 코민테른과 계속적인 불화가 이어졌고,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들은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을 받아들여 사실상 통일전선전술을 거부한다.
혁명의 물결이 퇴조하자, 혁명적 전망을 버려야한다는 ‘청산주의’가 확산되고 보르디가와 그람시 등에게 큰 위험신호로 자각한다. 코민테른의 지속적인 PSI와의 접촉, PCI 내부의 통일전선 지지자들의 이탈리아 사회주의의 전통과의 단절 의사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PCI와 코민테른의 불화는 통일전선정책 선언 이전에도 1920년 보르디가가 선언한 선거불참여주의를 레닌이 비판한 데서 시작된다. PCI가 트로츠키 기조보고서에서 비판받은 ‘혁명적 공세론’를 지지하는 독일공산당 지도부를 지지하자 레닌으로부터 맹공격을 받는다. 2차 인터내셔널과 3차 인터내셔널 사이에 신경제정책(NEP:러시아 내 좌익적 개혁의 완화)이 선포, 이탈리아 파시즘이 성장, 독일의 3월 봉기 실패와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3차 인터내셔설에서는 전체적인 방향이 노동계급 다수파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입장으로 전환하고 통일전선정책을 암시하는 ‘대중에게로’의 구호가 제시된다.
1921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통일전선정책을 공식적으로 채택한다. 이는 경쟁하는 인터내셔널 간, 경쟁적인 좌익정당 간, 노동조합 분야에서의 공동행동을 뜻하고, PCI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조합분야에서만 제한적으로 수용한다.
1922년 코민테른의 PCI와 PSI의 합당 의견에 대해, 보르디가와 테라치니, 그람시는 반박하고 합당이 불가능함을 주장했고, 코민테른의 개입에도 보르디가의 집행부가 그대로 재신임을 받는다.
제4차 인터내셔널(1922년 11월)에서 파시즘의 본질, ‘노동자 정부’슬로건, PSI와의 합당문제에 대한 이탈리아당과 코민테른 사이의 근본적인 견해 차가 전면에 떠올랐다. 지노비예프는 파시즘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간단히 처리한 반면, 라데크의 보고(그람시의 영향)에서는 기본적인 계급모순을 브루주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순에 두면서도 파시즘의 프티부르주아적 구성요소, 프롤레타리아 조직이 퇴역군인에 대해 보여주었던 분파주의적 태도, 파시즘의 권력장악에 대한 대자본의 원조를 강조했다. 반면 보르디가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반동공세와 파시즘 사이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파시즘이 사회민주주의쪽으로 수렴했다는 것을 주장, 파시즘이 지배계급의 대대적인 통일운동이라고 규정한다. : 그람시는 파시즘에 대한 일관적인 분석을 갖고 있지 못했고, 그람시의 초기직관을 발전시킨 타스카는 일관되게 파시즘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지노비예프가 제기한 슬로건인 ‘노동자 정부’ 문제를 보르디가가 격렬히 비판한다. 또한 PCI 다수파는 코민테른의 PSI와의 합당압력에 단호히 대처하나 트로츠키로부터 ‘폭넓은 대중으로부터 동조를 받지 못하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고, 스스로의 기반을 제한시키고 그 기반이 남지 않으면 하나의 파벌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11월 24일 이탈리아당은 최후의 통첩을 받고, 코민테른의 요구에 형식적 수용하자는 보르디가 파와 계속적인 저항으로 당내 우익소수파와 타스카에게 당권을 뺏길 수 있게 된다는 우려를 한 그람시 파로 다수파 내의 분열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는 전술적인 차이일 뿐이었고, 두 달 후 개량주의자들의 축출에도 반합당파 다수가 PSI를 지배하여, 코민테른의 기대와 달리 합당문제는 무산되었다.
코민테른은 보르디가를 견제하기 위해 그람시에게 당 지도권을 맡을 것을 권했으나, 그람시는 거절한다. (21~23년 : 보르디가 / 24~26년 : 그람시의 당지도권은 코민테른의 영향력만으로는 설명할 없는 이탈리아 내에서 당의 정치적 활동의 역사가 고려되어야 한다.)
PCI는 파시스트의 테러가 확산되던 첫해 만들어졌다. 1921년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150만표, PCI는 29만표를 얻어, 그 세력이 작음을 확인한다. 파시스트 폭력이 난무할 때, 무솔리니는 국회에 대한 공작을 펴, PSI와 평화조약을 맺는다. 1921~22년 심각한 경제위기와 부르주아 정부의 허약성은 임금하락과 실업 증가를 불러왔고 CGL의 조합원수와 PSI 당원 수가 대폭 감소한다. PCI는 오직 파시즘에 대항하는 총파업과 직접행동만을 요구하고, 개량주의적 CGL은 PSI에서 떨어져 나와 연립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당 결성을 목표로 했다.
1922년 파시스트의 폭력으로 7월 31일 총파업 선언됐으나, CGL지도자들의 파업거부와 파시스트의 역공세로 분쇄되고 이후 10월,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시에 PCI가 총파업을 부르짖었으나 아무런 반향을 얻지 못하게 된다.
10월 파시스트의 권력장악 이후, 대부분의 반대 정당의 조직들과 신문들을 공격한다. 이러한 탄압에도 PCI는 <오르딘 누오보>를 출판, 배부하고 많은 대중집회를 개최했으나, 보르디가의 지도부는 파시즘의 위협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음을 지적받으며, 1926년까지도 PCI는 파시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일관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탈리아 당의 공위(空位) 기간 (1923~24)
2.1. 보르디가의 체포 : PCI의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코민테른에게는 PCI를 자기노선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그람시 등은 여전시 보르디가와의 단절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으며 타스카와 당 우파가 당지도권을 갖는 것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었다.
2.2. PCI 지도부 내의 세력의 양극화가 극심화 : 구속된 보르디가는 코민테른의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이 PCI 청산을 불러올 것이고, 코민테른 자체가 퇴행의 징조를 보이고 있으므로 이탈리아 당은 이러한 퇴행에 대한 투쟁에서 전위에 서야한다는 주장을 한다. 타스카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고 PSI 내의 제3인터내셔널 파를 끌어들이자고 했으나, 그람시 등은 이를 청산주의적 위협으로 여겨 여전히 보르디가와의 단결을 굳건히 한다.
2.2. 1923년 그람시의 모스크바 체재기간, 특별한 사건을 발견할 수 없으나 이탈리아에 대해 ‘연방소비에트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제기할 뜻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고, 볼셰비키당 내 좌파에서 더 호의를 가졌다.
2.3. 보르디가에 대한 비판 : 보르디가가 이탈리아 내에서의 실제적인 전략이 부족하고, 당과 당·대중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모든 개념과 그의 경직성에 대해 입장을 달리했다. 코민테른의 합당정책에 대해서는 ‘우리 코뮤니트스트들의 대열에 분열과 타락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면서도,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탈리아의 상황에 진정으로 적합한 당 활동과 정치적 공작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주장이 정당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라며 당 내 지도권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수립한 모습을 보인다.
2.4. 그람시는 코민테른의 정책을 비판하는데 있어, “혁명정치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개입이어야 하며, 단지 정확한 입장을 취해 그것이 옳은 입장임이 증명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는 것일 수는 없다.”를 유지하며, 인터내셔널의 퇴행에 대항하는 반대운동을 조직하자는 보르디가와 달리, 필요하다면 인터내셔널을 거역하더라도 당이 이탈리아 혁명의 과업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5. 1923년 내내 PCI는 파시스트로부터 탄압을 받고, 지도자들은 검거되었다. 11월, 그람시는 반파시즘 활동을 위한 코민테른 사무소를 맡기 위해 빈으로 옮기고, 보르디가 없이 새로운 중앙다수파를 조직하고 코민테른과의 유격을 좁히고자 마음 먹는다.
2.6. 활동 : 노동계급 신문 <우니타> 발행 제안, 소비에트 정권을 향한 매개적인 ‘이념의 준비’로서, ‘노동자·농민 연방공화국’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파시즘과 타협하는 CGL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내부위원회에 의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2.7. 대중적 기초 확보를 위한 네 개의 활동 영역 제시 : ⓵ 노동자·농민 슬로건에 대한 집중적인 선전, ⓶ 노동귀족, 개량주의와 투쟁, 남부를 위한 특별조직위원회 창설, 남부에서의 무장폭동 조직⓷ 당 내 정치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지도부에 확대, ⓸ 해외이민인구 사이에서 코뮤니스트 활동을 제고한다. 남부문제에 대한 ‘연방주의적 해결책’에 대한 생각을 개진, 미래의 공장평의회를 위해 세포형성을 촉진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8 당의 오류(당은 스스로를 독자적·자기발생적인 발전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대중은 혁명의 파고가 최고점에 이르거나 당 중앙이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한 후에 대중을 행동을 이끌기 위해 대중의 시선으로 허리를 굽혔을 때에야 합류하는 것으로 인식)를 통해, 새로운 당 개념의 수립
: 당이란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인 운동과, 조직·지도하고자 하는 중앙의 의지가 수렴되어 이루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의 결과이다. 의회그룹, 좀 더 조직적인 형태의 소수파는 당 중앙이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감염된 기회주의 구역이다.
2.9. 당 이론지로 부활한 <오르딘누오보>는 그람시 혼자서 거의 다 써는데, 그는 당을 새로운 정치전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행해져야할 정치교육운동의 중요한 디딤돌로 보았다.
2.10. 1924년 봄, PCI는 부정과 폭력적인 분위기, 개악된 선거법 속에서 선거전을 치뤘다. 야당에게 공동선거블록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해, PSI로부터 거부되어 공식적으로 PCI에 입당한 ‘제3인터내셔널파’를 포함한독자적인 선거명부를 구성했다. PCI는 그람시를 포함한 19명을 의회로 진출시켜, 1921년 선거보다 좋은 결과를 얻었다. 보르디가는 선거기간 중 아예 등장하기를 거부하는데, 국제적, 국내적으로 비타협주의 반대파 입장에 서서 인터내셔널과 당이 반코뮤니스트적인 노선을 걷고 있기에 당규율을 따르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2.11. 5월에 열린 PCI협의회에서 당 좌파, 당 중앙, 당 추파의 테제가 각각 따로 나왔다. 우파는 지금까지의 PCI의 모든 노선을 비판하고 그간의 잘못된 노선에 대해 좌파와 공동책임을 져야하며 제4차 코민테른의 입장을 지지해, 통일전선정책 채택과 ‘노동자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 중앙의 테제는 구지도부가 소수파에 대항하여 싸운 것은 정당하나 제4차 코민테른 세계대회의 노선을 반대하는 것은 오류였다는 입장을 취해, 로마테제(가장 경계할 것은 위기의 사회민주주의적 해소이며 파시즘은 주적이 아니므로 사회당과의 통일전선 형성을 거부)를 거부하고 제한된 의미의 통일전선정책을 수락했다. “무장독재정권의 존재는 이탈리아에서 ‘영구혁명’의 시대를 개막시켰다”며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수립 이전에 어떤 중간적인 국면이 있다고 보는 것은 경계했다. 그리고 파시즘을 ‘자본주의부르주아지와 대토지 소유자 분파의 무장독재’라고 했다. 좌파는 통일전선과 노동자 정부 구호의 위험성에 대한 강조 등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훨씬 짧은 테제를 제출했다.
2.11. 당의 변화를 중앙파를 중심으로 움직였고, 중앙파는 우파를 흡수하여 당의 모든 조직에서 좌파를 패배시켰다. 1923년과 1924년 사이 지도부교체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그람시의 독창적인 국제적 시각이었는데, 인터내셔널은 후진적·원시적 자본주의 형태의 러시아 상황을 반영한 것이어서 극히 주의주의적이고 연극적인 반면, 중서부 유럽국가들에서는 이런 전술이 부적합하며 무가치하기조차 하므로 이들 나라에서는 당을 자체 목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보르디가를 지적한다.
“실제 러시아 코뮤니스트들의 정치적 개념은 국제적 지반에서 형성되었고, 중서부 유럽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은 폭넓은 프롤레타리아트층만 형성한 것이 아니라, 노동귀족, 노동조합관료층, 사회민주주의자 집단들을 낳기도 했다. 이렇게 중서부 유럽에서 발전된 자본주의가 낳은 정치적 상부구조는 복잡한 경로로 작용하여 대중을 더디고 신중하게 만들어서 1917년 볼셰비키에게 필요한 전략보다 더 복잡하고 장기적인 전략·전술을 요구하게 된다. 보르디가가 일국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그 견해가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의 견해가 진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는 우리는, 러시아와의 정치적 동맹관계를 계속 유지해야하며 그것이 누리는 현재의 국제 지위를 인정해야한다. 보르디가가 국제적 소수파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았다면, 우리는 국내적 다수파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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