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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學/神學資料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by 이덕휴-dhleepaul 2020. 3. 26.

[실천신학]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

이남섭 교수 (한일신대)


1. 문제제기와 연구 주제

1.1.1. 문제제기

- [경제기적] 뒤에 오는 [경제정의론]의 의미

[경제정의]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현실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경제기적'도 이루었고, 올림픽도 치렀고, '중산층'도 많아졌고, GNP도 높아졌고, 자가용도 많아졌는데, '경제정의'를 내세운 한 시민운동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시민사회로부터 그렇게 많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소박한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기적'뒤에 몰려오는 이 황당한 '경제정의'의 요구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 황당한 현상은 당연히 다음의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하나는 경제성장으로 상징되는 '경제기적'이 곧 경제정의는 아니라는 문제이다. 경제의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왜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삶을 누리고 있지 못하다고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장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왜 지금 '경제정의'가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경제질서 속에서 그 실현 가능성은 사실상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불가사이한' 현실의 존재가 바로 오늘 우리가 '경제정의'의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하는 출발점이 된다. 사실 교회는 지난 몇 년 사이에 경제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이것은 한국교회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관심사로 나타났으며, 자본주의 사회뿐만이 아니라 구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전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동구의 몰락]이후 자본주의가 인간의 발전과 경제정의 실현의 가장 효율적인 체제라면 이제 그것을 가만히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왜 [경제]가 심각한 주제가 되고 [경제정의]가 계속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소위 변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검토할 필요를 제기한다는 점이다.

1.1.2. 연구주제와 방법 그리고 한계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는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90년대 한국사회에서 경제정의에 대한 신학적 전망이 무엇인지를 논의 하는데 이 연구의 기본 목적이 있다. 우리의 연구과제는 어떤 새로운 신학적 경제정의론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현 우리사회의 경제현실에서 지배적으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타당성을 거시 이론적 차원에서 검토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 우리사회의 지배적 경제질서를 [신 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규정하고 먼저 이 정책의 출현 배경과 특징을 정리 분석한 다음 이 정책이 표명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를 규명할 것이다. 그 다음 이 정책의 국내적 조명을 김영삼 민간 정부의 [신경제 5개년 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전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미시적 접근 방법보다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제정의론의 논의를 전체적 의미에서 평가하는 거시적방법을 취할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의 연구목표는 처방이 아니라 진단에 있다. 왜냐하면 골비쳐가 이미 지적하였듯이 "대안의 모색은 올바른 진단 뒤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이데올로기성 규명에 분석의 초점을 둘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다분히 이론적 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이 이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다. 이 연구는 토론을 위한 시론적 성격의 것으로 완결된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서 논의 되는 경제정의론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하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성서적, 신학적 근거에서 볼때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다. 나머지도 이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하는것으로

2. 이론적 방법론적 전제들 : 왜 신학은 경제를 문제삼는가

신학이 경제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한 가지 비유를 들면서 이 문제를 접근하려고 한다.

"경제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교회는 '앰뷸런스적'인 일을 많이 해왔다. 그러나 이 일은 언제나 필요하나 그것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재해는 다루나 그것의 원인과 예방은 다루지 않는다. '앰뷰런스적'인 행동은 주로 아마츄어적인 이해에 의존한다. '앱뷸런스식'의 차원을 극복한다는 것은 어떤 이슈를 아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전문가 없이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그러나 전문가가 다룰 수 없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주제에 포함된 이슈는 (경제문제) 전문가에게만 맡기기에는 사안이 너무나 중요하다."

이 비유는 오늘 신학이 경제문제를 다루어야 함을 상식적 차원에서 잘 설명해 준다. 이제 좀더 깊이 있는 이론적 근거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의의 개념정의, 여기서 우리는 제3세계,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것이다.

2.1.1. 성서적 근거들

경제 문제에 대하여 성서가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을 우리는 모두 요약 할 수 없다.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개입의 책으로서 성서는 경제적 문제를 다룬다. 그것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신뢰하고 자연을 보존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책임성을 다루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룬다. 하나님의 중심 주제로서 정의에 대하여 논의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의를 빵과 기구들로 바꾸어 놓았는지를 보여준다. 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개입주의자(intervencionista)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지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죄로 가득한 구조를 정당화 하지 않도록, 불평등을 허용하지 않도록, 그리고 노예를 증가하지 않도록, 타자의 희생 위에 부를 축적하지 않도록 그리하여 가난한 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구를 창조하도록 요구한다. 예수 자신은 그의 삶과 가르침을 통하여, 구약에서의 해방의 예언자적 메시지를 가득 채웠다. 이것을 그는 나사렛의 선언에서, 가난한 자와의 연대 속에서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성서적 전망이 우리가 경제적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것을 불가능 하게 한다. 그 자신의 고유한 법과 절대적 원칙을 선호하는 오늘의 세계경제는 우상숭배에 대한 성서적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하나님과 맘몬사이의 선택이 함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 할 필요가 있다. 너는 하나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눅 16:13). 우리는 정의롭고 존속될 수 있는 대안적 경제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미 만들어진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우리의 탐구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행동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성서는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세계는 무에서 창조되었다.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준다. 5개의 빵조각으로 5천명을 먹인 기적이야기,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은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그리스도는 새땅과 새하늘을 약속하시는 분( 계시록 21:5 )임을 가리킨다.

2.1.2. 신학적 근거들

어떤 사람들은 신학은 경제를 분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경제에 대한 윤리적 성찰의 역사는 오래 전부터 있으나 신학적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위대한 신학자들은(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칼빈) 경제와 정치는 결코 교회의 영역이 아니라고 진술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학자들은 신앙과 사회, 정치적 실천을 연결 시켰으나 언제나 간접적으로 하였다. 예를 들면, 루터와 칼빈은 경제와 정치를 세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였지, 영적 영역의 부분으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는 칼빈과 개혁교회의 전통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신앙 그 자체는 경제생활의 원칙이다. 정치와 경제 또한 "영적 영역"의 부문이다. 경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기여가 본질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이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개혁교회의 신학적 유산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영역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요구하는 오늘 우리의 세계질서와는 대립된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교회의 세 가지 신학적 전제에 대한 빠른 이해를 요구받는다. - sola scriptura(오직 성서로)는 (우리는) 삶의 모든 부문에 있어서 오직 성서가 우리를 인도함을 가르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현재 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율법, 예언자 그리고 복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지와는 독립되어 살도록 요구하는 사회와 직면하고 있다. 불의한 경제실천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착취당한 자의 편에 선 하나님의 개입은 분명하게 십계명과 예언자의 가르침, 그리고 그리스도의 관심에 표현되어 있다. Sola gratia (오직 은총으로)는 이해타산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한 선물로 선포된다. 그러나 근대세계 경제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을 노예화하도록 위협하는 파렴치한 힘과 직면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구원과 삶은 신앙의 체험(sola fide)이라는 진리를 확고하게 고수하여야 한다. 그러나 근대세계경제에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이 도래하였다는 주장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요구는 해방을 위한 가난한 자의 희망을 죽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세속화한다.

개혁교회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구조의 영원성, 역사적 순간을 적대화하려는 욕망은 진정한 이단이며 신앙의 적이다. 이점을 16세기의 사회경제적 관계의 변화에 신학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점이 교회에 대한 칼빈의 최대의 선물이었다. 그는 다른 개혁자들이 하지 않은 방법으로 태어나고 있던 자본주의 질서와 쉽지 않은 평화를 이루었다. 여기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교리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론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칼빈은 봉건주의의 구질서를 방어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으며 또 그 질서가 지나가는 것을 슬퍼할 이유가 있음을 느끼지 않았다. 또 하나님이 모든 새질서에 대한 주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칼빈은 그 안에서 기독교의 소명을 발휘하는 정당한 가능성과 적극적 가치를 보았다. 이리하여 경제적 삶과 사상에 대한 칼빈신학의 최대의 기여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경제체제는 하늘아래 없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2.1.3. 경제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행동규범에 대하여 끊임없이 관심을 표명해 왔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의 사회적 교리는 경제적 무질서를 문제삼았다. 가령 1891년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Rerum Novarum (새로운 사태)", "개신교 종교 사회주의(쿠터, 라카츠, 바르트)", 불가코프(Bulgakov)와 베르자에프(Berdiaev)와 같은 러시아의 망명 신학자들, "미국의 라인홀드 니버",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책임사회 윤리", 1961년 교황 요한 23세의 회칙 "Matar et Magistral", "Facem in Terris (땅의 평화 1963)", 1967년의 교황 파울로 6세의 회칙 "Populorum Progressio"등 이 모든 것은 경제적 현실의 문제에 대한 교회와 신학의 우려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 경제활동에 대하여 영향을 주려는 교회와 신학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사실상 경제학자, 경영자, 기업가, 다국적 기업에 의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교회와 신학이 현대 경제체제의 지배적 방향을 비판하고 [공공선]의 중요성과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부의 생산과 분배]를 호소하나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며 불의한 경제구조는 평상시처럼 계속된다.

여기서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활동에 있어서 주요한 위치에 있는 평신도 - 경제학자, 기업가, 경영가 -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전혀 반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가르침에 정반대 되는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에 있다. 교회는 경제적 문제에 대하여 개입할 수 없으며,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는 도덕 또는 윤리적 원칙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경제는 가치 중립적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경제적 영역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성이며, 이것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이익을 내는 데 있다. 한마디로 교회와 이들 경제적 활동의 책임자들 사이의 대화는 "귀머거리 사이의 대화"의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경제계사이의 이러한 관계의 부재는 민중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경제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주지 못하며 이점이 오늘 신학과 경제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정립이 요구되는 배경이 된다.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이 신학을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자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경제를 관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면 [공공선]에 대하여 말하는데) 경제학자들과 기업가들은 이러한 신학적 주장들을 당위적인 것에 대한 것이지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여기서 한가지 분명히 지적해야 할 사실은 이들 경제계의 주체(은행가, 사업가, 상인)들의 입장에서 나타나는 허위의식이다. 이들은 경제적 삶과 윤리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윤리는 인간 삶이 보다 인간적이 되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윤리는 삶의 재생산을 위해 염려하는 데 이것은 경제적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이것은 윤리에게 있어서 중립적 지역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삶의 물질적 조건에서 출발하여, 경제가 삶의 재생산을 돕든지 또는 돕지 않든지를 결정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며 가치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이해관계를 숨기려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이 된다.

이와 반대로, 프리드만(M, Freedmann)과 시카고 학파의 입장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도덕 밖의 것으로 설정하려고 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본성이 다루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신학이 경제학을 비판하게 되는 고유한 경제적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것은 신학자들과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놓으려는 도덕주의적 관점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를 세계의 현실 밖으로 격리하려는 대표적인 경제학이 바로 고전적 또는 신고전주의 경제이며,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서는 스탈린의 경제적 저술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제를 과학이라고 규정하고 신학을 미신이라고 간주, 세계 밖으로 추방하려 하는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모두 분석할 수 없다. 단지 고전적 경제학자들에 제한하여, 그들의 비합리적 허위의식을 지적하려 한다. Julio de Santa Ana 가 정확하게 보았듯이 이들의 중요저작들에는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경제적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대표적 표현이다. 그는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시장을 조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한다. 여기서 그는 시장은 동일한 사회적 힘이 만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적 개념을 마술적으로 (신학적으로) 도입하면서 모순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현실을 숨기려 하였다.

이외에도 고전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의 예들은 많이 있다. "기적", "희생", "구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희생"의 개념은 종교적 실천에 그 기원이 있다. 오늘날 이 희생의 언어는 끊임없이 반복되나 "대중 계층의 희생"만을 가르치지 풍요 속에 사는 이들의 희생은 요구되지 않는다. 이 개념은 시카고 학파와 밀턴 프리드만의 사상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즉 "높은 사회적 희생" 없이 경제 성장은 불가능하다. "구원"의 개념은 외채 - 제3세계의 외채 - 에 대해서 말할 때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서 외채는 민중의 희생으로 또는 외채의 "구제"로 해결된다. 외채의 "구제"와 같은 말들은 겨우 형이상학적인 것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하는 사실은, 경제이론은 근본적 입장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교와 신학에 고유한 단어들을 사용하며, 이러한 상징의 사용도, 무의식적으로, 경제이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숨기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고전적 정치경제학을 가리켜 종교이론이라 규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모든 경제 이론은 하나의 함축적 신학을 포괄하고 있으며 정반대로 모든 신학적 성찰은 또한 그 속에 함축적 경제학을 지니고 있다"는 Julio Santa Ana의 진술은 정당하다고 본다. 이것은 또 우리의 경제정의에 대한 논의가 경제 현실과 유리된 도덕주의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경제적 현실 그 자체에서 출발하게 되는 근거가 된다.

2.1.4.경제정의의 주요 원칙들

이제 우리가 이 연구에서 전제하는 '경제정의' 의 주요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개념 정의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성서적 ,신학적 논의를 그 주요내용으로 한다. 첫째 우리에게 있어서 -교회공동체- 경제정의는 생산과 분배가 중요하게 고려되나 여기서 보다 중요한 것은 노동이며, 노동자의 세계이며 인간 노동의 가치이다. 생산성과 성장은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볼 때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마지막 기준으로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 정의로운 경제 체제로의 가능한 전환은 오직 [하나님의 왕국]의 담지자인 가난한 자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의 삶이 사회경제적 질서를 위한 최후의 기준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수의 논리 (la logia de las mayorias)가 기준이 되는 생산의 새로운 사회관계가 형성되는 사회를 전제한다.

경제 정의는 불의한 경제체제의 변혁을 위해 저항하고 실천하는 착취당하는 이들과의 연대를 요구한다.

3.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있어서 경제정의

"변화된 세계", "새로운 세계질서","경제 제일주의로의 세계질서의 재편"이 오늘의 세계를 묘사하는 대표적 용어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표현-수식어-뒤에 놓여 있는 공통적인 현실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세계적 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정의}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이러한 [세계질서]가 태동하게된 배경을 이해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며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동구권 이후]갑자기 닥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는 점을 분석할 것이다.

3.1.1. 현 국제 경제질서의 재편의 배경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국내 경제학자들은 최근의 세계 경제 질서의 위기와 재편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3자위원회의 전략(Comision Trilateral) 대한 평가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세계자본주의 주도국의 자체 분석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1960년대 말에 시작한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적 위기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국제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프로젝트의 실현을 보장하는 새로운 전략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 당시 논의된 기본적인 적은 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제 3세계와 제4세계의 빈곤이었다.

가난한 나라들은 갈수록 집요하게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의 균등한 재분배, 원자재의 가격과 공산품 사이의 균등한 상호교환, 일련의 기술이전,유리한 환율등을 함축하였다. 부유한 북의 나라들에 대한 가난한 남의 나라들로 결집된 새로운 적의 도전과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구조적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하여, 1973년에 록펠러, 키신저, 브렌진스키의 지도아래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세나라, 미국,서유럽,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가,은행가,다국적 기업의 최고 경영인,정치가,학자 들로 구성되었다. 3자위원회의 이름은 바로 이 세나라가 연합 한데서 나왔다.

이 3자위원회에서 논의된 중요한 결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전지구적이라면, 해결책 또한 전지구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체제로의 전환 또는 남쪽의 가난한 나라들이 요구하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의 수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혁신이 아니라 갱신이다.(세계적 차원에서 직면하고 있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조정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새로운 국제체제]의 출현이 아니라 [갱신된 국제질서]가 필요한 것이다. 이리하여 3자위원회는 자본주의 위기의 극복을 위한 기본적인 전략을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첫째, 경제적 차원에서 다국적 기업을 통하여 자본의 국제화를 강화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소속된 모든 나라들의 체제의 지구적 해결에 가담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 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희구와 독자정치의 수립은 이러한 협력에 대한 가장 중요한 방해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둘째, 재정적 차원에서 기존하는 국제금융기구들(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등)의 기능을 다국적 은행을 통해 강화한다.

세째, 과학-기술적 차원에서,고전적이고 더러운(환경오염)산업기술을 남의 주변부 나라들로 이전하고 중심부 나라들엔 보다 역동적이고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기술 산업의 주요 부분을 보존한다. 여기서 환경산업은 3자위원회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산업으로 고려된다.

네째, 정치적 차원에서,세계자본주의의 위기의 해결은 이 체제를 구성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그 혜택이 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능한] 나라들과 [가능하지 않은]나라들 사이의 선택이 제기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능한 나라들은 브라질, 베네쥬엘라, 멕시코 등 소수의 중진국들이 3자위원회 나라들과 강력하게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나라들로 선택된 나라들은 3자위원회에서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회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즉 "상대적 민주화" 또는 "보호된 민주화"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 말은 제3세계 정치가 또는 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 진 것이 아니고 3자위원회에 의해 만들어 졌다. (간혹 이 용어는 보다 사회적인 언어로 "기독교 민주당",또는 "사회 민주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 이들 나라에 있어서 임금의 상대적 회복을 장려하여 중간층의 구매력을 증가시키고 이를 통해 내수시장의 소비망을 확대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3자위원회의 외부시장(국제시장)에 활력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이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수출하기를 원함으로 인하여 3자위원회의 시장은 포화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구 자유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더럽힌 '국가안보국가'의 야만적 행위를 청소하기 위하여 인권의 옹호와 고무를 진작하는 정책을 취한다.

이상이 3자위원회가 오랜 시간의 협의와 연구끝에 수렴한 체제 위기의 장기적 극복 전략의 전체적 대안이었다. 따라서 이 기본 전략의 실제적 적용은 3자위원회와의 긴밀한 협력의 방식을 통하여(G7회담)실시되며 이 과정에서 개별 나라들의 특수한 결정은 전체적 전략을 준수한다는 조건아래에서 허용되어 졌다. 이 장기전략의 1단계는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나타났고 2단계는 레이건 - 부쉬 - 대처 - 콜-나까소네 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과감한 실시로 나타났다. 지난 80년대 동안 실시된 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로 평가되고 있으나 예상하지 않았던 동구권의 붕괴로 인해 이 정책의 전환 내지 포기는 아직 미결정의 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시장경제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남아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이 오늘 "변화된 세계" 또는 "새로운 국제질서"라는 요란한 소리로 떠들썩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태동하게 된 배경이다.

3.1.2.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특징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태동배경에서 지적하였듯이, 이 경제질서는 제3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던 [정의로운 새로운 국제경제 질서]의 요구에 대항하기 위하여 구상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략적 경제 정책의 한 단계이다. 기본적으로 불의한 기존의 경제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갱신된"경제정책의 하나이다. 이제 갱신된 이 경제질서의 특징이 무엇이며 그리고 이 질서가 제시하는 경제정의론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분석해 보자.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주요한 특징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시장경제의 세계화'(또는 지구화, 국제화)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가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2.1.1.. 시장경제의 세계화

시장경제의 세계화는 이미 10년 전부터 추진되어 왔으나 이것이 국제적 여론의 파고를 타기 시작한 것은 "동구의 몰락" 이후이다. '동구의 붕괴'는 시장경제체제의 환상을 더욱 부풀렸다. 그러나 매스컴을 통한 국제화 논의는 국제화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심지어는 허황된 의식까지 유포하고 있음을 지적되어야 한다.

세계화는 두 가지 모순된 현상을 동반한다. 한편으로는 범지구화 현상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지역 경제블록화 현상이 오히려 강화된다. 이 상반되게 보이는 현상은 사실은 단일한 논리에서 기인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로서의 글로발리즘(Globalismo)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해 왔던 미국이 1950년대 중반 이후 경제적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일본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지배체제의 수립으로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다.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3자 위원회(Comision Trilateral)에 의해 재편되어 졌다.

글로벌리즘은 제한 없는 자유무역을 통하여 세계경제질서를 발전시키자는 강자의 논리이다. 그것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대국의 확장적, 공세적 이데올로기로서 불균등한 세계경제의 갈등구조를 극복 내지 해소하기 보다는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 시장질서의 회복은 흔히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른바 왈라스-파레토(Walras-Pareto)의 일반균형론(teoriade equibrio)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에서 그러한 가정이 나온다. 더구나 국가 주도의 전형적인 발전모델로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시장은 그 안에 인간이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제로이며 결코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물론 1930년대 이후의 국가개입(뉴딜 정책)이 스태그플레이션이 라는 새로운 형태의 모순을 낳은 것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전후에 복지국가가 이룬 모든 개혁적 성과를 부정하고 시장으로 돌아가자는 신자유주의의 시장경제만능론은 현실을 무시한 지나친 비약이다.

다른 한편 경제의 세계화는 시장의 '개방화'로 나타난다. '개방'을 하지 않으면 세계경제에서 낙후되는 것으로 평가된다.이 이론에서는 선진국의 보호주의 정책(슈퍼301조와 같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한국보다 500년이나 앞서서 세계경제에 개방한 라틴아메리카 경제의 낙후성에 대한 설명이 없다. 지난 500년 진행된 개방의 실패경험은 역사의 박물관속에 갇혀 버린다. 개방화 속에서도 선진국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호주의의 장벽에 대해서는 쌍무협정의 조항으로 슬그머니 처리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계화 또는 개방화의 선택적 적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3.1.2.1.2. 경제의 사유화(Privatization) 또는 민영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두번째 특징은 공기업의 사유화 또는 민영화이다. '국가개입의 최소화','작은 정부론','정부규제의 완화','민간의 활력','행정의 간소화'등 경제의 사유화를 상징하는 대표적 용어들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국가의 경제개입을 견제 또는 국가기능의 역할(경제에 있어서)을 최소화하는데 있다.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n)은 케인즈의 개입주의 국가론이 자본주의의 모든 위기의 원인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것은 경제의 사유화를 추진하는 기본이론이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선진제국에서 보여지는 경제위기의 주된 원인은 복지국가체제의 실패에 있다. 케인즈 주의에 입각한 복지정책은 본질적으로 인플레와 노동의욕의 상실로 인한 경기침체로 말미암아 국가재정이 파탄에 직면할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재정의 건전화를 기하기 위해서 공적부문-복지부문-의 지원을 줄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고용과 복지를 창출하는데 드는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이고 공익에 대한 기업의 부담을 덜어 줌으로써 경쟁력 강화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고용과 사회보장제도의 확충을 통한 케인즈주의적 유효수요관리 정책으로부터 유연생산적 공급 지향적 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개입국가적 조치와 함께 꾸준히 늘어난 국가 지출 및 공급지향경제를 지원키 위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막대한 투자는 국가채무규모의 엄청난 증대를 가져 왔으며 이러한 부담은 민영화와 탈규제조치에 의해서만 해결될 것으로 전제한다.

이리하여 이제껏 공익과 고용안정,사회복지의 상징이던 공기업이 어느새 낭비와 비효율의 상징으로 급변하면서 대대적인 민영화의 수난을 겪게 되는 것이다. 민영화 조치는 각종 규제완화,사회복지 삭감,긴축재정과 함께 국제화시대의 각국 정부들이 가장 애호하는 경쟁력 강화전략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한가지 지적할 사실은 경제의 민영화보다는 복지국가가 먼저 선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구의 이 복지국가는 동구의 사회주의 복지국가와의 경쟁 상태에서 형성,전개되었다는 점이며 결과는 체제자체의 위기를 불러온 엄청난 부담이었으며 결국 이 정책의 상호 포기로 귀결되었다.단지 차이는 사회주의적 국가개입을 채택하였던 자본주의 복지국가(케인즈식)정책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가지고 원래의 자본주의 노선으로 복귀하였다면 동구의 현 사회주의 국가들은 기존의 강력한 국가주도의 복지국가사회주의 정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시장경제정책'을 채택하였다는 데 있다. 이것 은 궤도,노선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지 체제의 붕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뉴딜정책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미국자본주의 체제의 붕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듯 유신체제의 긴급조치 8.3을 시행하였을때 아무도 한국자본주의 체제의 ꝷ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3.1.2.1.3. 지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형성배경에서 언급하였지만,'국제화'현상은 세계 각 지역간의 상호의존적 관계의 자유로운 발전의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심화되어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팽창,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 통신위성,정보의 전달 및 수송체계의 비상한 발달로 인하여 세계적 통상의 기회와 규모와 속도가 엄청나게 증가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국제화'는 현대사의 오랜 질곡인 제국주의적 지배와 종속관계가 더욱 악화될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단적으로 지금 자본과 기술과 상품의 자유로운 교류는 가능하지만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은 불가능하다는데 이미 드러나 있다. 무너진 동구의 장벽은 이제 제1세계와 제3세계사이의 국경선으로 옮겨지고 있는 현실이다. 그 구체적 작업은 유럽에서의 이민법제정과 미국의 나프타 체결(NAFTA)의도에서 나타난다. 서구의 지역별 경제블록화 이면에는 제3세계 노동의 제1세계로의 이동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다국적 기업은 싸고 자원이용이 용이한 세계 어느 지역이건 옮겨 다닐 자유를 누리지만 세계의 기층민중에게는 자신의 일자리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사실상 제한되어 있다. 자유는 자본의 것이지 민중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라은 자만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학자 김종철이 "국제화 논의는 성장과 경제개발 및 자유무역의 논리를 전세계적으로 확대하려는 다국적 기업들과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직접 간접으로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라고 단언한 것은 타당성이 있다.

3.1.3.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과 경제정의론

지금까지 서구신학은 서구자본주의 자체를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본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사회학자들이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기독교윤리와의 관계에서 해석해 보려는 시도는 있었으나 교회 내에서 자본주의와 기독교를 동일시한 신학은 없었다. 오히려 기독교와 자본주의 가치 사이의 긴장관계를 보여주는 신학적 진술이 지배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낙관적 신뢰는 "숨은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처음으로 서구신학은 자본주의를 두려움 없이 기독교의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체제로서 정당화하였으며 이것은 신보수주의 신학(Neoconservadurismo ; 이하 NC로 약칭) 또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어졌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이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더 가관인 것은 고전경제학이 도덕신학과의 결합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경제학이 신학임을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행위이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재편은 단순히 새로운 경제정책의 부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러한 정책의 변화를 보장하고 촉진하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과정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수립자들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모순 - 윤리적 위기 - 을 단순히 정책의 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서 출현한 것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 또는 NC이다. 이 NC는 유럽에서 출현하였으나 북미에서 훨씬 대중적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신학자뿐만 아니라 미국의 유명대학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구성되어 지며(Think Toank) 이것은 제도적으로 "종교와 민주주의를 위한 연구소(Institution on Religion and Democracy)"산하에 결집되어졌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로는 카톨릭사제출신의 미첼 노박(Michael Novak), 개신교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 루터교의 노이하우스(J. R. Neuhaus)와 글라사르(N.. Glasar) 그리고 크리스톨(I. Kristol)을 지적할 수 있다. 이기구의 최대의 과제의 하나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있으며 여기에서 경제학은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신학적 전제를 경제정의론에 제한하여 정리해 보려고 한다.

3.1.3.1.1.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개인연금시대 - 개인연금을 위한 경제정의)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의 근본적 목표는 "민주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이고 정당한 체계로 제시하는 데 있다. 이들 NC이론에 의하면,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민주적 자본주의"경제제도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경제체계"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정치경제제도보다 인간의 사회적 문제해결책으로서 더욱 능률적이며, 보다 현실적이다. 이들은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성과 자유를 확보하면서 인간 공동체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건인 재화의 생산분재(경제정의)문제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회경제체제보다 훨씬 합리적인 사회제도라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의 역사의 내적 구조는 이것을 입증한다. 겨우 200년도 채 안되는 자본주의 지배동안에 부르주아는 그이전의 세대들이 이룬 것보다 훨씬 막강한 생산력을 창조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생산기술의 끊임없는 혁명과 동시에 억압적 관계를 해소하는 사회적 관계의 다른 혁명"을 보았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신학(노박과 피터 버그)은 거의 배타적으로 자본주의의 장점만을 찬양하였다.

NC의 경제신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에 있는 덕목은 효율성과 성장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과 기업정신이다. 창조적 환상없이 이윤도 효과적 성장도 없다. 창조적 상상력과 함께 기업의 팀웍이 있으며, 기업적 관리를 견디는 합리적, 인간적 조정이 있다. 시장경제의 이러한 덕목은 자유와 정의(경제)에 유리한 조건들을 창조하도록 이끈다. 이것은 사회적 다원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그와 함께 자유와 연대의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자본주의의 덕의 극치는 분배능력에서 나타난다. 시장경제도 다른 어떤 체제보다 나은 분배를 실현한다. 당연히 국가의 계획경제보다 나으며 심지어는 복지국가의 빈곤에 대항한 투쟁의 방법들보다 낫다. 이점을 버거는 입증할 수 있는 경험적 분석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소위 쿤츠(Kunts)의 곡선에 의하면, "만약 경제성장이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부와 이익의 불평등은 처음에는 심해지나 그후에는 빠른 시간안에 감소되며 그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한 위치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쿤츠의 테제를 입증해 주는 구체적인 예로 아시아의 자본주의(NICS)경험을 제시한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는 모두의 운명을 개선한다. 부자와 가난한자 둘 다 동등하게 자본주의로 인해 더 많은 것을 확보한다. 시장경제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혁명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그 어떤 체제보다 정치경제적 과정에서 보다 해방적이다. 빈곤과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보장하며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을 보장한다. 그리고 자유와 경제정의의 생산은 시장경제가 확대될수록 더욱 증가한다. 말하자면 시장경제가 생산하는 상품으로서 '경제정의' 인 셈이다.

2) 자본주의체제의 도덕적 위기 극복책으로서 경제신학

앞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객관적 분석보다도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이란 보다 폭넓은 프로그램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NC의 민주적 자본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전통의 재건을 위한 신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반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던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동맹을 맺게 된 위기의식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 자본주의는 깊은 사회-문화적 위기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 진단은 정치적, 문화적 세계뿐만 아니라 종교적 세계에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근대성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들에 의하면 근대사회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모순에 있다. 근대자유의 두 가지 역동성 사이의 충돌, 즉 경제적 역동성과 문화적 역동성이 충돌할 상황에 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근대 경제학은 갈수록 많이 생산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의무를 추진한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조건의 추구가 근대경제학의 주요관심사였다. 이를 위해 적합한 계획, 효과적 관리와 높은 이윤을 끈덕지게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으로 잘 훈련된 대담한 기업적 인간이 요구되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실현의 표현을 향한 근대적 근대성, 자신의 본래성의 실현을 추구하는 문화적 근대성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주관성과 그 실현을 중심에 둔다 이 문화적 근대성의 극단은 나르시즘과 쾌락주의(hedonismo)의 탐구로 나타난다. 신보수주의 이론가들은 상반된 이 두개의 역동성이 현재 극적으로 충돌할 과정에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이들이 이과정을 심각하게 느끼는 이유는 문화논리가 경제논리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게 하는 가치들을 방해한다는 데에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것은 자본주의를 위해 아주 위험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적 과학적 생산의 근본을 뿌리채 흔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난 200년 동안 자본주의체제를 뿌리내리게 해온 것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태도들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NC가 염려하는 중심적 도덕은 청교도적 윤리이다. 근대성에 대한 NC진단의 핵심을 성격 지운다면, 그것은 청교도적인 도덕성의 상실, 가치의 상실에 있다. 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자본주의 근대성의 하나의 영적 위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 NC이론가들은 민주적 자본주의의 현실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자본주의 근대성의 허약성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다니엘 벨의 테제는 바로 이것을 포착하고 있다. 소비주의와 쾌락주의는 자본주의 근대성의 문화적 역동성의 표현이다. 여기서 지배적인 가치는 소유와 소비가 제공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통해 체제의 멤버들에게 (대중)체제를 정당화하여 체제는 이렇게 그들의 멤버를 정당화시킨다. 그러나 근본에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는 도덕적, 성스러운 것의 경험이 없다.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의 한계가 허공에서 사라져 버린다. NC의 우려는 문화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 있다. 새로운 것을 맛보려고 하는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의 희구는 단지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만을 위해 움직이는 윤리이다. 이 윤리는 질서로 훈련되고 질서를 사랑하는 노동자의 인격을 양성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개념, 완전히 쾌락주의적인 개인, 체제가 요구하는 특성을 지니지 못한 개인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쾌락주의적 병폐를 중단시켜야 하며 생산성의 윤리, 질서, 규율의 윤리를 회복해야 한다. NC의 사상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능의 기본에는 아담 스미스가 아미 본 것처럼, 그것 없이는 체제가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일련의 가치체계가 있다. 그것은 체제의 규범을 존중하는 것, 협약의 준수정신이다. 또 중요한 다른 가치는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의 능력이다. 이 두 가치는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NC이론가들은 생산적이고 희생적 윤리의 나무는 종교적 기반이 없이는 고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NC의 진단에는 윤리를 회복하기 위한 종교의 필요성에 대해 일반화된 의견이 있다. (유대-기독교) 종교 없이는 노동, 포기, 질서등과 같은 정신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보증이 없다. 다시 말해, 체제의 봉사를 위한 종교적 부흥이 필요하게 된다. 체제의 도덕적 기능을 위한 봉사, 체제의 정신적 기능을 위한 봉사에 윤리와 종교가 요구되어 진다.여기서 체제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도덕적 덕목에 대한 교리적 강화가 일어난다. 미첼 노박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경제신학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미첼 노박의 경제신학은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종교(성서)를 이용한다. 기독교는 민주적 자본주의의 정신으로 받아들인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영혼"으로서, 궁극적 인간화와 조화의 힘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이점이 또한 NC의 경제신학이 우리시대의 사회。 문화적 위험중의 하나가 되는 이유이며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근거이다.


4. 한국사회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와 경제정의

앞에서 우리는 우리시대 지배적인 경제체제인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발생배경, 특징 그리고 경제정의론의 한계를 분석하여 보았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한국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이과정에서 제기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와 한계를 김영삼 민간정부의 경제5개년계획과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을 중심으로 논의해 보려한다. 여기서 우리의 논의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고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경제정의론의 정책논의의 전체적 의미를 평가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4.1.1. 「신경제5개년계획」의 성격과 경제정의관

김영삼 민간정부가 지난 1년간 추진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경제활성화, 경제개혁 그리고 국가경쟁력 강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기본 경제정책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1960년대부터 6공화국 말기인 1993년 2월까지 약 30년간 이어져온 경제정책의 기조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0년간의 경제정책이란 중앙 통제적(국가 계획적) 경제정책을 의미하며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은 i)중앙정부의 계획에 따라 세운 성장목표의 추구; ii)중앙정부의 금융, 세금감면 또는 보조금, 행정지원 등의 직。간접지원; iii)중앙정부의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의 직접적 통제, 규제를 특징으로 한다. 30년간 6차에 걸친 경제개발정책은 한마디로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그 형식상 크게 차이가 없는 계획경제였다.

김영삼 민간정부는 취임이후 1960년대 이후 30년간 6차에 걸쳐 추진해왔던 '경제개발계획(제7차경제사회개발1992-1996)을 포함하여'이란 이름을 폐기하고 '신경제5개년계획(92-97)'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입안하였다. '신경제 100일계획'이라는 단기 전략아래 시행해온 경기활성화의 추구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 실시로 표현되는 개혁적 경제정책, 그리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조인에 따른 국제화, 개방화의 추진과 국가경쟁력 강화로 요약된다. 그러나 김영삼정부가 지난 1년간 시행해온 경제정책의 방향은 지난 30년간 군사정부가 추진해온 성장지상주의 경제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 임금인상의 억제를 노사합의의 형태로 강제하고, 금년을 노사분규가 없는 해로 만들겠다는 선언등은 노동시장 및 노사관계를 직접 통제해온 과거 30년의 정책기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지난 1년간의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기본방향은 지난 30년간 군부통치 시대의 중앙 통제적 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해 계승하고 유지하되, 낡은 중앙 통제적 정책에 새로운 이름만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신경제5개년계획'에 관련하여 계속된다. 정부는 '신경제5개년계획지침'에서, 민간의 창의를 최대한 발현시킬 수 있도록 과거의 정부주도적이고 개입 위주의 경제운용에서 벗어나 시장의 자원배분기능을 최대한 활용하는 민간주도형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 '지침'에 의하면, '신경제'의 기본이념도 정부의 지시와 통제 대신 국민의 참여와 창의가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는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부국제가 대폭 줄어들어 기업 활동이 자유로운 경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달 후 발표된 '신경제5개년계획'에 따르면, '신경제'란 "모든 국민이 함께 하는 경제"를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모든 국민에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포함되었다. 즉 신경제란 "정부와 민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경제"를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신경제'는 민간주도경제운영과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요약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산업독점자본의 이익을 관철하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신경제'는 자본분파간의 관계를 합리화하여 산업자본을 강화하고, 생산자계층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강화하여 사적 독점자본의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하고 국제적인 자본경쟁에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경제'는 '신자유주의'전략에 의한 슘페터적 근로국가로의 이행을 기본으로 하되 신국가주의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는 장상환의 평가는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상반된 평가에 직면하게 된다. 개혁지향적인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제적 불평등,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전망한다. 이와 달리 [경실련]의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정부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진보적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김영삼 민간정부의 '신경제'는 전혀 새로움이 없는 과거의 성장정책의 재판이다. 차이는 지난 80년대 한국경제의 여건변화를 감안하지 않은 채 신자유주의 논리-시장경제논리-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비결은 재벌지배의 강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점을 신경제의 대외무역정책, 산업발전, 금융정책, 재정정책, 토지, 주택부문정책, 농업정책, 노동정책, 사회복지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였다. 이 분석에 의하면, 재정정책안을 제외하고, 신경제의 대부분의 정책이 철저하게 시장논리를 따르고 있으며, 현재의 경쟁력 강화대책은 재벌위주로 짜여져 있다고 지적된다.

그러나 민간정부의 '신경제'가 신자유주의의 시장논리를 철저하게 반영되지 않는 부문도 인정한다. 그것은 재정정책부문에서 발견되는데, 이상영은 정부가 내세운 '작은 정부'라는 것이 재정정책에서 전혀 0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구호와 정책이 따로 놀고 있는 예라고 지적한다.

경제정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는 노동 부문과 사회복지부문에 대한 [신경제]의 정책 방향은 부정적이다. 노동부문을 분석한 이병희는 신노동정책이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목표로 고통 분담과 의제적 합의만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별 자본의 노동 통제 강화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감소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사회복지부문을 다룬 강혜구는 기초복지에 대한 정수 지출이 다른 중간 수준의 자본주의 국가보다도 낮은 현실에서 (도표 참조) 신경제정책은 이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신경제정책은 재정의 지원이 필요한 기초복지는 외면한 채 민간이 사회복지부문에 적극 개입하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 가령 실버타운 건설에 민간 자본의 주도를 장려 - 비판한다. 시장논리에 입각한 이러한 정책은 사회복지부문에서의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라 전망하였다.

노동부문과 복지부문에 있어서 경실련의 경제학자들도 긍정적 결론을 얻지 못한다. 93년호에 7-8%의 경제성장률과 4-5%의 물가상승억제선을 제시한 김영삼정부의 경제학은 국민에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통분담 및 임금인상의 자제를 요구했으나, 결과는 저성장, 고물가상승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고통분담에 참여한 국민에게 더 큰 고통을 부담시겼다고 비판한다.

경실련의 대표적 경제학자인 이근식도 신경제의 경제개혁은 재벌 위주로 경제가 운용되었음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경제개혁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분배정의를 보장하는 조건으로 불로소득의 배제를 강조한다. 요약하면 [신경제]는 재벌위주의 종전의 성장정책이 크게 변화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경제적 민주화]의 전망을 제시한다. 심지어, 강철규는 '1백일 계획' 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발상자체가 시장경제질서로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그는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개혁을 요구한다.

4.1.2.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성격

1989년 7월 시민운동의 활성화를 통해 한국 사회의 건전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취지 아래 창립된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이제 거의 4년에 걸친 활동 끝에 명실공히 한국 사회의 중요한 시민운동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경실련의 시민운동으로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긍정적인 평가가 있을 수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무엇보다도 [경제정의]의 문제를 짧은 시간에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제기하였다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동시에 [경실련]의 한계에 대한 논의도 당연히 경실련이 제기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향방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이 그동안 제시한 경제정의의 구체적인 정책 대안에 대한 미시적 분석보다 구체적인 정책대한에 내포된 전반적인 철학적 성격을 검토해보려 한다.0

필자가 보기에는,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철학적 기조는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경제신학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비록 민주복지국가형에 대한 기대에서 보여지는 모순적 이념형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을 토대로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제정의론]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의 새로운 점은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순을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시각에서보다는 생산계층과 비생산계층의 모순이라는 각도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토지투기로 인한 엄청난 불로소득과 이로 인한 빈부의 격차 심화 현상은 노사간의 모순이라는 접근방식으로 풀리지 않는, 그러나 한국 사회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경제 문제라고 인식한다. 따라서 경실련은 한국 사회 '경제민주화'의 핵심을 불로소득의 척결에 두고 토지 세제의 개혁과 금융자율화, 그리고 임대주택을 비롯한 복지정책의 확대를 목표로 설정하였다. 당연히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 경제 질서를 확립하는 것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경실련]의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따르고 있음을 보나, 국가의 역할에 있어서는 약간의 수정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경제분야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사회복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우는 개발 독재 과정에서 세제와 금융 혜택을 통한 정부와 재벌의 유착이라는 정경유착 - 금권정치의 왜곡된 형태로 국가의 개입이 이루어져왔다고 진단한다. 이에 대해 경실련은 국가의 역할은 공공복지에 국한되어야 하며 그 이외의 것들은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맡겨야 한다고 처방한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의 역할을 넘어서는 경제분야의 정책은 반시장적, 중앙통제적이며 반자유주의적 경제질서를 도모하는 것으로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정책들이라고 규정한다.

[경실련] 경제학자들의 경제정의론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장경제 질서에 기반을 둔 인본적 시장경제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민주적 자본주의론'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경실련] 경제정의론의 문제점을 지적해보도록 하자.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가정은 성장과 분배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자와 기업가의 관계는 결코 적대적인 것이 아니므로 공존공생의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 계급의 일방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와 기업가 모두의 공동 이익 - 사회의 일반 이익이나 공공 선 - 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 '공동 이익' 또는 '사회의 일반 이익'과 '공공 선'의 내용을 누가 정하느냐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경실련의 한국 중산계층의 초계급적 입장을 취한다는 평가는 지나치게 이상화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의 경제정의론에서 문제되는 두번째 전제는 경제와 정치의 지나친 구분이다. 경실련은 경제의 정치화를 두려워한다. 시장경제의 자율성에 대한 신화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는 시장 기능을 민주적으로 통제해나가야 하는 데서 당연히 직면하는 정치적 역학 관계의 중요성이 무시된다. 이것은 시민단체, 노조, 소비자운동 등이 직접 시장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에 대한 정치적 인식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남미에서의 경험은 민주화와 시장경제 정책 자체가 자동적으로 경제적 정의를 약속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경제의 운용은 자율성보다는 전체적 계획(planification total)이라는 구도 하에서 조작,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견제는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미시적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에 있어서 소수의 Big Player들에 의한 전체적 계획에 대항하는 시민사회의 전체적 행동, 즉 정치적 행동의 차원이 요구됨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경실련이 민주화를 '정치적 민주화' 단계와 '경제적 민주화' 단계로 나누고 현 단계를 '정치적 민주화'에서 격리시켜 '경제적 민주화'를 해결하려 하는 것은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와 독립된 '경제적 민주화'의 실현이 가능함을 입증해야할 과제를 [경실련]은 현재 안고 있다고 보인다.


5. 맺음말 : 요약과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신학이 경제정의를 문제 삼는 이유와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있어서 경제정의론의 의미와 한계를 이론 분석적 측면 - 주로 거시 분석적 방법 - 에서 논의하였다.

5.1.1. 요약

이 연구에서 우리가 규명하려 한 점은 정치와 경제, 신학과 경제는 기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며 이 두 관계를 분리하려는 고전 경제학의 시도는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전 경제학의 신학적 전제에서 출발하여 형성된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시장경제의 세계화와 사유화를 통해 극복하려는 동기로 탄생하였으며, 그 목표는 기본적으로 성장을 지속하려는 데 있지 분배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있어서 분배정의의 목표설정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신자유주의 경제신학에 의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위장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의론이 현실적으로 실현불가능한 환상이라는 것은 서유럽과 미국, 제3세계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패한 것에서 입증되었다. 그것은 성장도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지정책의 포기, 빈곤의 성장, 빈부의 격차가 더 심해지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국내적 상황에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정부와 시민운동 단체, [경실련]에서 논의되는 경제정의론의 의미를 검토하여 보았다. [신경제5개년계획]에 표현된 정부의 '경제민주화'의 목표는 지난 30년간 지배해왔던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정책과 크게 다름이 없음을 지적하였으며 [경실련]의 [경제정의론]도 기본적으로 시장경제를 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배정의]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평가하였다. 양자의 차이는 국가의 기능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성서적, 신학적 전통에서 볼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보장하는 경제정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이다.

5.1.2. 과제

이 연구에서 우리가 규명하려 한 점은 시장경제에 근거한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경제정의]를 보장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정의]는 어떠한 경제질서 속에서 가능한 것인가? 현실사회주의의 경제질서가 더이상 사실상의 대안으로서 제시될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의 성서적 [경제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질서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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