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 논쟁
신학자료실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논쟁에 대한 재평가
(自由意志論을 중심으로)
김 승 일
목 차 Ⅰ. 시작하는 말 Ⅱ.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고찰 Ⅲ. 어거스틴의 반론에 대한 고찰 Ⅳ. 종합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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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시작하는 말
이 글은 역사적으로 있었던 4C 펠라기우스주의 논쟁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재평가 하고자 함에 있다. 이유는 당시의 논쟁에서 펠라기우스주의의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으며, 어거스틴의 주장은 정당한 견해로 채택 평가되었다는 데 기인한다. 이렇게 논결된 어거스틴의 주장을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과연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그 진위를 분명히 밝히고자 함이다.
Ⅱ.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고찰
1. 역사적 배경과 펠라기우스의 관점
펠라기우스주의의 논쟁은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가 북부 아프리카를 방문했을때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AD 410년 알라틱 침략시까지 적어도 20∼30년 동안을 로마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기독교화된 로마와 로마교회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하여 로마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옛날의 덕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엄격한 명령에 복종케 함으로써 윤리적 삶에 대한 책임을 강조한다.
2. 펠라기우스주의의 이론적 기초
1) 하나님은 명령자이시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는 사실은 인간이 그것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뜻만 가진다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에 있어서 각 사람의 공로만을 보신다.
펠라기우스는 그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의 저명한 왕(하나님)의 명령을 특권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하여 조소에 가득찬 퇴폐적인 소리로 “이것은 너무 어렵고 곤란하다.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어리석음이며 오만 무례한 참담한 말인가! 우리는 이중의 무지의 죄를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즉 자신의 창조에 대한 무지와 또한 자신의 명령에 대한 무지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연약함을 잊고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신 것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동시에 우리는 의로우신 분께 불의를 돌리고 거룩하신 분께 잔인성을 돌리고 있다. 첫째는 그가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명하셨다고 불평함으로써 둘째는 사람들이 할 수가 없어서 못한 일 때문에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함이다.
이와 같이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명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의를 설명한다.
2)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책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인간자신의 자유로운 의지결정에 따른 선택의 결과이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를 범한 모든 행동의 책임을 인간 자신이 담당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소유했으며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능력(bonum naturae)도 소유했다는 말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세 가지를 구별하여 순서를 나눌 수 있다. 먼저 ‘가능성(posse, abilit, possibility)’을 첫째로 놓아야 한다. 둘째로 ‘의지(velle, volition)’를 놓아야 한다.
셋째로‘현실(esse,existence,actuality)’을 놓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가능성을 自然에 돌리고, 意志는 뜻을 가지는 일에 현실은 실제적 실현에 돌린다. 이와 같이 볼 때 제일 먼저 가능성은 그것을 그의 피조물에 부여하신 하나님께 돌리고 한편 다른 두 가지 즉 의지와 현실은 인간행위에 돌려져야 한다.
논자가 볼 때 펠라기우스는 현실의 실제적 상황에서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있음을 주장한다.
3) 죄의 책임은 유전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이처럼 인간의 자유를 가리켜서 하나 하나의 행동을 선택하며 행할 수 있는 자연적 능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 파의 자유의지에 대한 개념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罪에 대한 개념을 암시해 준다. 펠라기우스는 죄에 관하여 논술하기를 죄는 그릇된 감정이나 욕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意志의 개별적 행동으로 성립된다.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아담은 자유의지와 미정적(未定的)의지를 가졌는데,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편한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의 길을 선택하였고 결국 자신을 害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없도록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罪惡의 성질이나 죄책의 유전은 있을 수 없다. 즉 原罪와 같은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하여 당사자를 벌하거나 용서해 주시는 것은 가능하지만 타인이 지은 죄 때문에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아담이 비록 죄는 지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은 아직까지 죄없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즉 인간은 출생시에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나는 것이요, 죄도 없고 덕도 없고 다만 선행과 악행의 능력을 가지고 날 뿐이다. 인간이 죄를 짓든지 혹은 악을 행하든지 하는 것은 모두 그 개인의 후천적 의지 활동의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논증한다.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인간관이다. 이 인간관은 자연주의적이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며 그 의지로 선행을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죄가 없을 수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 원죄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인간관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불신하게 된다. 논자가 볼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이란 인간의 理性을 啓發시켜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며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총은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神的의지의 계시이며 특히 그리스도 자신의 산상수훈적 교훈과 모본, 약속과 훈계, 경고와 시련 등으로 주어진 신적 의지의 계시를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役事는 단지 인간 의지의 바른 행위를 도와주는데 지나지 않으며 또한 인간편에서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는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Ⅲ. 어거스틴(Augustine)의 반론에 대한 考察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총과 자유의지에 관한 어거스틴의 은총론은 그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어거스틴의 견해를 탐색해 보기로 하자.
1.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
어거스틴은 罪를 善에 대한 상실로 表現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참 善을 행할 수 없으며 자기의 운명을 실현할 수도 없고 더 깊은 죄의 노예 상태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고 말한다. 은총이전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를 범할 뿐이며 율법은 그러한 자연인을 정죄하여 사망에 던져 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데 대하여는 부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마음과 편지 라는 글을 통해서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하기를 은총으로 인하여 선택의
자유 즉 자유의지를 폐하여 버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선택의 자유의지를 오히려 세운다. 율법이 신앙으로 폐지되지 않음과 같이 선택의 자유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폐하여 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세워진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강조한 반면,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며 善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한다.
2. 어거스틴의 은총론
어거스틴은 은총론을 전개하기 위하여 죄에 관한 포괄적 특성을 전개한다. 죄가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사멸성을 가져왔고 실제적으로 새로운 죄를 짓기 원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을 자제할 수 없다. 이같은 죄된 상태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은총을 통한 길밖에 없다. 이 은총은 성령의 役事로 말미암아 집행된다.
첫째로, 율법을 통하여 죄와 죄책의 느낌을 일으키게 한다. 둘째로,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義롭게 됨과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예수의 속죄 사업을 나타낸다. 셋째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성령은 성화된 인간의 의지와 일생을 통하여 협력한다. 이와 같은 성령의 役事로 하나님의 은총은 불의한 인간들로 하여금 선한 생활을 하게 된다고 진술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하여 정의하기를 “무상으로 순수하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또한 “선물이란 무상이 아니라면 은총이 될 수 없다.”라고 한다. 인간이 자기의 공로를 통하여 은총을 얻어낼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간의지의 잘못된 방향정립 때문에 생긴 불안상태의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라고 주장하면서 은총에 관하여 몇 가지로 구분하여 논술한다.
1) 예정적 은총
야곱의 선택과 에서의 유기에 관련하여 양택설을 전개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치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롬9:10∼29)”기록된대로 어거스틴은 예정적 은총론을 전개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은총되기 위해서는 예정적 은총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장 합당하신 섭리의 미리 아신바 되고, 예정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화롭게 하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증명하지 못하였다고 까지는 할 수 없으나 아직 출생하지 않았을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따라서 결코 멸하지 아니한다. 누구에게 신앙을 허락할 것인지 하나님께서 미리 알지 못하시었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그가 누구에게 신앙을 허락하실지 예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그의 자비도 분명히 예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예정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예지와 작정이다. 이로써 성도들은 확실한 구원을 받는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예정적 은총론을 전개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느정도 묵살됨을 암시하고 또한 은총의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지 예정을 강력히 주장한다.
2) 선행(先行)적 은총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의지보다 先行한다고 한다. 이것은 구원의 질서에 있어서 신앙적 은총이 제일 우선하며, 다음에 영혼을 고치는 은총이 오며, 다음에 자유의지가 다음에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 義에 대한 사랑이 주어진다고 그의 ‘마음과 편지’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신앙으로 은총을 얻게 되며, 은총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죄의 병으로부터 고침이 오며, 영혼의 고침으로부터 선택의 자유가 오며, 선택의 자유로부터 義에 대한 사랑이 오며, 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율법을 행함이 온다. 은총은 의지를 고치고 이로써 의를 자유롭게 사랑하게 된다.
어거스틴의 논리를 정리해 보면 예정적 은총을 입은자, 즉 선택하여 부르신자에게는 先行적 은총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로써 의롭다함을 얻게된 후 善行할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에 있어서 은총은 사실상 모든 것에 先行한다고 볼 수 있다.
3) 불가항력적 은총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의지에 결정적으로 역사하여 불가항력적으로 善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도움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하여 주신다. 인간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불변하게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4) 견인적 은총
어거스틴은 견인의 선물이 없으면 인간이 선행적 은총에 의해서 비록 표면상으로 선택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멸망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지막까지 은총안에서 인내해야 하는 것이다.
약한 성도들에게는 -아담은 강한자- 은사를 주시어 이로써 저들이 선한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원하게 하시었고 또한 선을 버리는 일도 불가항력적으로 거절하게 하시었다.
Ⅳ. 종합적 평가
논쟁의 핵심적인 주제는 한가지로 요약된다. 펠라기우스의 논점은 인간의 독자적 자유의지로 善行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어거스틴의 논점은 하나님의 협조적 은총에 의해 변화된 인간이 자유의지로 善行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은총론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은총론에 대한 전제로서 예정론을 진술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논증방법은 기독교 진리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예정론에 대한 논리적 체계를 형성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는데 기여를 하였지만 논자가 볼 때 몇 가지 결정적인 문제를 파생시킨다.
1. 절대주권과 자유의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은 철저한 인본주의 신학이다. 그는 모든 것이-선택권, 결정권, 행동력-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실현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은 은총이전의 자유의지(타락인)와 은총이후의 자유의지(중생인)로 구분된 이중적 의지론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를 독립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이원론(二元論)에 귀결되는 문제를 조성하게 되며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간의 상대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인식미숙의 결과이다. 박용기 목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절대자는 하나님이시요, 상대자는 인간이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절대자와 상대자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요, 능동자와 피동자의 관계이다. 즉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주관자요, 지배자요, 자결권을 가진자요, 상대자인 인간은 따르는 자요, 지배를 받는 자요, 아무런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특히 절대라는 관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어느 그 무엇의 도움이나, 간섭이나 장애를 받으시는 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지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종속된 의지이다.
2. 예정론과 자유의지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박하면서, 인간은 원래 무죄한 가운데 자유의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의 선행과 교리를 지킴으로써 스스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논자가 볼 때 그는 철저한 인본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에 반해 어거스틴의 예정설은 인간의 시조였던 아담만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죄악을 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가운데 오직 神意를 좇아서 불멸의 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사단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결과 모든 인간도 原罪의 씨를 물려 받아서 마침내 죄악을 범하게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악에 물든 죽음에 던져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셔서 衆生을 구원하신다. 하지만 모든 인간을 구원하심도 아니고 인간이 구원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神이 그들 중에서 일부에게만 은총을 베풀고 나머지는 선택의 범위에서 제외시킨다. 이와 같이 神의 意志에 따라서 결정지어지는 예정설을 진술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예정설은 어거스틴 자신에게도 근본적인 문제를 파생시켰다. 그것은 악에 대한 기원을 자세히 밝히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예정의 목적으로 삼아 진술함으로써 타락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악의 발생에 대한 설명을 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악에 대해서도 이를 단순히 善이 결핍된 정도로 정의한다.
결국 어거스틴의 고민은 惡의 문제이다. 하나님을 악의 조성자로 여길 수 없고 방관자로 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악의 출처를 밝히기가 더욱 모호하게 된다.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어거스틴의 논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귀결된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신학적 한계는 예정의 목적을 인간의 구속을 위한 범주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한 계시적 범주이다. 즉, 계시의 형식인 언약과 성취의 근거로써 인간을 예정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창조하시고, 예수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언약을 이루심으로써 선택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예정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발견하고 주권적인 구원섭리에 나타난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악에 대한 문제는 과연 하나님의 영역 밖에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답하면서 다음에 자세히 진술하기로 한다.
3. 自由意志와 責任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하나님은 명령자이시다. 이것은 인간이 그 명령을 지킬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한도내에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적인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으며 이행하지 못한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당사자인 인간이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펠라기우스의 견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어거스틴은 논술하기를 아담이후 타락한 인간은 惡을 행할 수 밖에 없는 자유의지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은총을 입은 인간에게는 善을 행할 수 있는 의지도 함께 주어져 있다고 말한다.
결국 두 사람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므로 의지의 선택 결과에 따른 행동에 대한 책임도 인간이 담당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논자의 견해를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밝히도록 한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절대종속된 자이다. 즉 하나님의 간섭을 받으며 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시조인 아담도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 종속된 몸이었다. 단 절대자 하나님께 종속된 상태에서의 종속된 자유의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타락한 이후에는 아담과 모든 인간들도 타락이전 아담이 소유했던 종속적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완전히 죽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바울의 말처럼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6)고 말했듯이 전적으로 사망 권세의 다스림 안에서 종노릇하게 되는 노예의지만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중생한 자에게 있어서는 불순종으로 인하여 죽었던 선택된 자들의 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아담이 소유했던 자유의지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전 아담은 죄의 저주가 덮이지 않은 몸-생령체-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생인은 아직도 죄의 저주가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중생인은 아직도 죄의 저주가 덮인 육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중생인은 자유의지에 있어서도 아담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겉사람은 죄의 법 아래 매여 죄의 노예가 된 상태이고 속사람은 성령의 절대적 능력으로 직접 장악을 받는 성령의 노예가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에게 독자적인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책임의 소재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논자는 책임에 관한 개념적 성격을 분석해 봄으로써 그 해답을 얻고자 한다. 책임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인간 서로가 상대적인 입장에서 공통으로 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념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으로부터 피조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지워지는 것이다. 책임이란 지워 주는 자가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며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절대자이신 하나님께는 책임이란 용어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하나님에게 책임을 지워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절대자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게 하시면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에 대해 바울의 말처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19∼20)」라고 말했듯이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도 없으며 책임져야 되도록 부과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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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dongsanlogos.tistory.com/128?category=596350 [대구동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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