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그는 23년의 신앙생활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일구어낸 한국교회 영성사의 한 맥을 이룬 신앙의 대선배님이다.
1880년 무등산 기슭의 화순 도암에서 태어나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그는 28세에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10년만에 마을의 최고 갑부로 성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근검성실한 생활자세를 읽을 수 있다.
30세 때 14세 연하의 여인과 결혼한 그는 나이 40이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해 득병하고 드디어 몸져 눕게 되었을 때 마을의 미친? 여자가 외치는 소리, "예수 믿어야 산당께, 예수 믿어야 살아"라고 하는 말에 회심의 전기를 마련한다.
마치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날 길가의 어린이들이 노래처럼 불렀던, "성경을 읽을지어다, 성경을 읽을지어다"라는 소리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후 그는 성경의 내용을 그의 신앙생활의 신조로 삼고 모든 재산을 환원시킨다. 또한 성경을 밤낮으로 읽고 실천하면서 가르치면서 일체의 생활의 표준을 성경에 의한다. 이후 이세종은 아내와 합방하기를 멀리하고 남매처럼 지내는 생활을 시작한다.
카톨릭 초기에 전주 치성산에 묻힌 성 누갈다처럼(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김홍섭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 성바오로 출판사, 113면 이하참조)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남의 집으로 전전하다가 후일에는 다시 이세종에게 돌아온다.
이세종은 참으로 청빈의 삶과 신비적 사랑으로 예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다가 만년을 깊은 산속에서 살다가 임종하였다. 이세종의 신앙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좁은 문의 신앙이었다. 그는 좁은 길을 택한 것이다. 사실 그는 큰 길에 대문을 활짝열고 "아무나 와도 좋소"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실제 그의 신앙자체가 좁은 길을 선택한 고난의 십자가의 영광을 몸소 실천한 우리의 신앙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1942년 2월 63세의 나이로 지상생애를 마감할 때 지니고 있던 것은 가마니 한짝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또한 평생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혼과 얼은 한국기독교 영성의 한 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세종 생가 안내표지판: 전남 화순군 도암면소재
참조: http://jndomin.kr/article.php?aid=14406622668308045
'홈지기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 (0) | 2020.03.29 |
---|---|
‘도암의 성자’ 고 이세종 선생 (0) | 2020.03.27 |
볼테르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서 싸우겠다 (0) | 2020.03.20 |
Are you Jesus? (0) | 2020.03.19 |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0) | 202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