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인 ‘하나님 나라’ 실천의 삶
사랑과 정의의 사도라 일컬어지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의 평전이 2018년 2월 신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평전은 1988년 가가와 도요히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로버트 실젠(Robert Schildgen)이 집필하였고, Toyohiko Kagawa, Apostle of Love and Social Justice(Centenary Book, 1988)라는 서명으로 미국에서 출판된 책을 일본 메이지가쿠인대학의 서정민 교수와 일본에서 연구자로 활동하는 홍이표 박사가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가가와는 사회운동가, 교육가로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 중 하나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인종·종교·국가 간의 분쟁과 폭력을 반대하고, 빈곤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는 근대화가 촉진되고 제국주의로 전환되던 대격변기에 일본에서 태어나 불행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일찍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청소년기에 남장로교 선교사 마이어스(Dr. Harry W. Myers)와 로건(Dr. Charles A. Logan) 박사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다.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 신학 예과와 고베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받아 들였고 자기 나름대로의 ‘해방신학’의 형태를 구상하였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그는 허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고베의 빈민굴에 들어갔다.
빈민굴은 오물과 분뇨로 악취가 가득했고 파리와 모기가 들끓었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주민으로 싸움꾼, 노름꾼, 매춘부, 건달, 술주정뱅이, 의존증 환자, 실업자들이었다. 이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하고 함께 살았지만, 정작 그가 돌보던 사람이 그를 죽이려는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가 빈민굴에서 생활하면서 얻은 다양한 경험은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고 강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가가와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포기하지 않았고, 암울한 사회를 변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개인적으로 행하는 봉사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협동조합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후원 회원을 모집하고, 빈민들을 협동조합원으로 조직하여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갔다. 이후 미국 유학을 통해서 자신이 경험한 빈민굴의 생활을 토대로 빈민복지와 노동운동을 연구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비폭력주의와 생활협동조합을 근간으로 하는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일본 최초의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농촌 문제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노동학교와 농민학교를 세웠으며, 간토대지진 때 조선인 구호활동을 벌여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초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태평양전쟁 당시에 그는 전쟁 반대주의자로 감시와 심문, 체포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고, 저술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 중심의 아시아 재편이라는 폭력적인 정세에 의해 그의 비폭력주의는 잠시 굴절되기도 하였다. 즉 자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훗날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정당하다 할지라도 가가와의 사상과 행적을 허물어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업적과 사상이 오늘의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가가와는 1947년부터 여러 차례 일본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를 정도로 문학적인 소질이 있었다. 1920년에 썼던 자전적 소설 『사선을 넘어서』와 1935년에 영문으로 발표한 『우애의 경제학』, 1959년에 펴낸 『우주의 목적』 등 380여 편을 저술하였다. 수백 편의 논고들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주요 신문과 잡지에 번역문이 연재되기도 하였다.
이 책의 저자 실젠은 집필 당시 캘리포니아주 생활협동조합의 주간지 Co-op News의 편집장이었다. 실젠은 해방신학과 사회복음 연구를 하면서 가가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즉 가난과 차별로 밀려난 사람들의 해방과 인간성 회복이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라고 본 것이다. 일본인이 아닌 미국인이 평전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하여 저자는 ‘국제적인 우호’와 ‘생협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가와가 행한 모든 노력의 기초를 이룬 것은 ‘심오한 신비주의’였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또한 집필 작업을 하면서 가가와의 활동과 사상 사이에서 깊은 접점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집필의 의미를 되새겼다. 실젠은 집필을 위하여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였다. 가가와의 차녀 모미 우메코(紉井梅子) 인터뷰와 자료, 관련 일본문헌과 정부문서들은 일본인 조력자들의 입수와 번역을 통하여 해득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이 가가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 확보와 평가를 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가와 도요히코 학회 회장인 후루야 야스오(古屋安雄)는, 이 평전에서 말하는 가가와의 사상은 한마디로 ‘사랑과 사회정의’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그것이 바로 가가와가 평생 추구해온 ‘하나님 나라’의 신앙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가가와가 벌인 기독교 전도활동, 노동운동, 농민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 평화운동 등을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책을 높이 평가하였다.
미국에서 출판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데에는 어떤 각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 책을 함께 번역한 서정민 교수와 홍이표 박사는 한국 사회와 교회에 대하여 늘 침음(沈吟)하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몇 년 동안 전개된 한국 사회와 교회의 상황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의 도를 실행한 실천적인 삶”을 살아간 가가와 도요히코를 소개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 책은 지금,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 혼미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미는 예수의 사상과 가르침을 하나하나 낮은 곳에서부터 실천하고, 역사 안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실천적 삶과 귀감이 부족한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가와는 개인의 안위함을 추구하면서 거짓과 허위의식으로 점철된 기독교인들에게 시공을 초월하여 온 몸으로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완화시키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전하신 사랑의 메시지가 국민 전체에게 퍼져 가는 것은 나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이 사명이 성취되어 일본이 “빛”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할 때, 아시아, 세계 전체가 이 “빛”을 향해 방향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더욱 더 많은 밀알의 씨를 뿌려 죽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는 불안과 공포로 아우성치고 있다. 십자가의 참 뜻이 파묻혀 있는 한, 암흑의 힘이 지배한다. 우리는 복음을 더욱 더 깊이 이해하고 묵상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한 알의 밀’이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의 본질이다.”(464-465쪽)
가가와의 외침은 교회에서 흔히 듣는 설교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일 뿐 공허한 말잔치에 그치는 것이 한국 교회와 교인의 현주소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대하여 “사람이 먼저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교회 밖에서도 사람이 먼저라고 하는데, 교회는 어떠한가? 소외된 자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곧 ‘사람이 먼저’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을 보듬을 수 있는 행위와 대안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진정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실젠도 한국어판 서문에서 “가가와가 품었던 평화와 정의를 저마다의 역할을 자신의 자리에서 계승해 주길 바란다.”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에 가가와 도요히코 평전의 한국어 출판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사상」 716호(2018.8), 210-214쪽에 게재
로버트 실젠, 서정민‧홍이표 역, 신앙과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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