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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최고의 이인 이세종
① ‘도암의 성자’ 고 이세종 선생
아침의 깨우침, 모든걸 나누고 비웠다
» 개천산 중턱의 이세종수양관을 홀로 지키고 있는 심상봉 목사가 이세종의 깨달음을 글로 써보았다.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 세상 만물은 나와 한몸이다’는 뜻이다. 불신자는 물론 자연 만물까지 내 몸으로 여겼던 이세종에게 ‘배타심’은 붙을 수가 없었고, 오직 사랑뿐이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지 120년이 지났다. 특히 올해는 1907년 1월 평양에서 일어난 회개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면서 개신교가 급격히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개신교의 토착은 이 땅을 세계 종교·정신문명사에 독특한 위치로 부상시켰다. 우리나라를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 종교들과 기독교가 비슷한 세력으로 양립해 조화를 이루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지금 ‘부흥’과 ‘전도’, ‘성전 건축’ 등 외형 확장을 위한 구호가 가득하다. 그러나 초기 개신교는 유교가 기득권의 이데올로기로 바뀐 뒤 핍박받고 소외당하던 여성, 노약자, 빈자, 상민, 장애인, 고아 등 약자들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그것은 봉건의 땅을 깨운 정신 혁명이었다. 그런 정신 혁명은 말보다는 행동, 승리보다는 사랑, 외형보다는 빛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숨은 예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리즈는 동서양 어디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 땅의 기독교 영성가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주요 버팀목이 된 ‘토착적 기독교인상’을 재발견하기 위해 마련했다.
마흔 넘어 접한 창세기에 감화 ‘개안의 기쁨’
머슴살이 끝 모은 큰재산 나눠주고 철저 금욕
자연 섬기고 신앙 실천…60여년 지나도 큰빛
전남 화순군 도암면. 천불천탑 이야기가 전해오는 운주사가 가까워오자 왼쪽에 올림픽 성화 같은 모습의 개천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향하고 있다. 개천산. ‘하늘문이 열렸다’는 산이다.
그 산만을 바라보고 가니 맑은 물이 고요한 등광저수지가 거울처럼 개천산을 비춰주고 있다. 호수 옆 마을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음식을 나눠 먹다가 처음 본 나그네조차 손짓으로 불러 한입을 권한다. 바로 이세종(1880~1942)의 마을 사람들이다.
등광리 산길을 따라 개천산으로 한참을 오르니 외딴 산기슭에 조그만 집 한 채가 서 있다. ‘이세종수양관’이다. 수양관을 홀로 지키는 심상봉(71) 목사와 어린 시절 이세종을 보았던 이원희(75) 장로, 이세종의 삶을 좇아 독신수도자로 살아온 한영우(78) 장로가 그의 삶을 전해준다.
삼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은 이세종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가난에 한이 맺힌 그는 전답과 집을 마련해 남보란 듯이 살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래서 주위에 인정을 두지 않고, 자린고비로 살며 악착같이 재산만 그러모았다. 마흔살이 넘자 그는 어느새 100마지기에 이르는 전답을 지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열여섯살이나 어린 아내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자식을 얻기 위해 무당이 잡아준 터에 산당을 지었다. 산당을 짓던 목수는 기독교 신자였다. 목수는 일하면서 찬송가를 불렀고, 쉬는 시간엔 성경을 보았다. 이를 지켜보던 이세종은 어느 날 그에게 성경을 빌렸다. 그러나 그는 까막눈이었다. 마을 사랑방에 가 글자를 아는 사람에게 성경 첫줄을 읽어달라고 했다. 창세기 1장 1절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였다. 그 한 구절을 새기며 개천산을 오르던 이세종의 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 펼쳐졌다. 호수와 산과 나무와 풀…. 그 모든 것이 나와 다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형제요, 천지가 바로 우리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는 갑자기 춤을 추었다. 펄쩍펄쩍 뛰는 폼이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직 ‘나’와 ‘내 것’에만 집착해 눈동자를 덮던 안개가 걷혀버려 눈이 훤해진 개안(開眼)과 개천의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 기쁨으로 밤을 밝혀 글을 깨친 그는 성경의 정신을 꿰뚫었다. 고리대금업자처럼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챙겨온 그는 그 자리에서 모든 빚문서를 태워버렸고, 재산을 팔아 걸인과 빈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영원히 사는 것’을 알게 된 그에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자식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이세종은 그 뒤 빌공(空)자를 써서 스스로를 이공이라고 했다. 그가 철저히 부인한 것은 이름만이 아니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이 탐할 수 있는 재산욕, 명예욕은 물론 식욕, 색욕, 수면욕도 철저히 극복해 초월했다. 그때부터 아내를 누이로 대했고, 죽는 순간까지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결혼한 몸으로서 인도의 간디보다 앞선 금욕의 선언이었고, 그보다 더욱더 철저히 이를 지켰다.
하루아침에 탈속해버린 이공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아내였다. 여전히 젊은 욕정을 잠재울 길이 없던 아내는 참다 참다못해 새서방을 얻어 집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이공은 아내의 짐을 지게에 져 날라다주었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찾아가 “살다 살다 못 살면 언제든 다시 오라”고 말했다. 얼마 뒤 아내는 돌아왔으나 다시 다른 서방을 얻어 떠나갔다. 수년 뒤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는 이곳보다 더 깊은 화학산 외진 산골에서 걸인처럼 살던 이공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이공이 죽자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3년간 시묘살이까지 했다.
이공이 개안 후 가장 변한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였다. 그는 “피는 생명”이라며 일체의 육식을 하지 않았다. 독에 빠진 쥐를 건져주고, 자기를 문 지네를 풀숲에 놓아주었다. 그는 혹여 개미를 밟을까봐 길을 걸을 때도 조심스러워했고, 나무와 풀이 꺾인 것을 보고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이공은 말했다.
“세상엔 버릴 것이 없지라. 잡초만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지라우. 버린 돌이 집 초석이 되곤 한당께요.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째서 그것을 모른다요.”
이공은 죽음이 가까워오자 석 달 동안 곡기를 끊었다. 화학산 골짜기에 찾아온 다섯 명의 제자들이 마른 장작처럼 말라 거지 옷을 입고 있는 그를 둘러메자 그는 “올라간다 올라간다 올라간다”고 춤을 추듯 노래하며 눈을 감았다. 큰 재산가였던 그가 죽을 때 남긴 것은 땅 한 평은커녕 옷 한 벌도 없었다. 그의 유산은 말이 아니라 오직 행동으로만 전도하라 했던 그를 따랐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성녀 수락기댁, 소록도를 세운 나환자들의 아버지 최흥종 목사, 걸인들의 아버지 강순명 목사 등 수많은 제자들의 ‘삶’ 속에서만 살아서 숨쉬고 있었다.
화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한겨레신문 2007년 1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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