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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만기요람(萬機要覽)

by 이덕휴-dhleepaul 2020. 8. 8.

                             김규성(金奎聲)

 

《만기요람(萬機要覽)》 11권은 조선 왕조 제23대 순조왕(純祖王) 8년(1808년)경에 시임(時任) 호조 판서(戶曹判書)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奎)가 같이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으로 있으면서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것이다. 이 책은 재용편(財用篇) 6권과 군정편(軍政篇) 5권으로 되어 있으니, 재용편에는 국가 재정ㆍ경제의 제도와 실정 및 그 운용에 대하여 서술하였고, 군정편에는 국내 군사의 체제와 군정(軍政)을 집행하는 각 기관과 여러 진영(陣營)의 직장(職掌) 기타를 서술하고 아울러 경비조달의 방법을 실었으며, 그때의 상황만 밝힌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온 연혁까지도 대략 밝혀서 전체가 간결하게 요점만 간추려져 있다. 요컨대, 이 책은 그 서명(書名)과 같이 만기(萬機)를 친재(親裁)하는 군주가 일상 정무를 총람(摠攬)하는 데 있어서 항시 좌우에 두고 참고로 하여 비망(備忘)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책이다. 만기란 말은 《서경(書經)》 고요모(皐陶謨) 편에 “일일 이일 만기(一日二日萬幾)”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기(幾)는 미묘한 기틀[機]을 말하는 것이니, 임금이 나라를 다스려가는 데 하루나 이틀 같은 짧은 시간일지라도 만반의 미묘 복잡한 사기(事機)가 닥쳐와서 처리하게 되는 것이니, 그 중 한 가지라도 소홀히 해서 과오가 있으면 안 된다. 기(幾)는 기(機)와 통하는 같은 뜻을 가졌기 때문에 후세에 내려오면서 만기(萬幾)가 도리어 만기(萬機)로 쓰이게 되어 군주의 정치하는 전용어로 사서(史書)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 《만기요람(萬機要覽)》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반 신민(臣民)이 보는 책이라기보다는 통치자인 국왕이 보기 위해서 만들어진 책이므로 그 서명을 이렇게 정했다 하겠다.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활동의 중심점은 재정과 국방에 있는 것이니, 그 궁극의 목적은 국정수행에 필요한 경비의 사용이 공정하고 타당함을 기하여야 하고, 그 재정의 조달되는 방법도 역시 공정타당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만기요람(萬機要覽)의 편찬이 요청되게 되었고, 또 그 내용이 특히 재정면에 주안(主眼)을 두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본서를 편찬함에 대하여 그 발의(發議)와 경과 등에 관하여 당시의 사실을 왕조실록(王朝實錄)ㆍ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ㆍ일성록(日省錄) 등 중요사료에 기록된 것을 찾아 보면 그 기사의 내용이 조금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기사의 줄거리는 거의 같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일성록(日省錄)》 순조(純祖) 8년 무진(戊辰) 5월 30일 을축조(乙丑條)에 의하면,

비국당상(備局堂上) 심상규(沈象奎)와 승지 송지렴(宋知濂)을 성정각(誠正閣)에 불러 보시고 상규에게 하교하시기를, “중앙과 지방의 거두어들이는 곡식 문부(文簿)와 군제(軍制)ㆍ전결 총수(田結摠數) 등을 분류하여 긴요한 항목을 모아 책자(冊子)를 만들어서 올리게 하라. 곡부(糓簿)에는 모조(耗條)와 가분(加分) 등 명색(名色)을 기록하고, 군제에는 분번(分番)과 납포(納布)의 절목(節目)을 기록하고, 전결 총수에는 밭과 논[畓]의 수량을 상세히 기록하여 편람(便覽)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상규가 아뢰기를, “여러 조목 중 곡부로 말하면, 그 원수(元數)가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 소속된 것을 한 번만 알아보면 다 알 수 있겠으나, 이외에도 비국(備局)에서 마감하는 것도 있으며 각 도(道)에서 그 자체대로 구획(區劃)하는 것도 있고, 또 각 고을에서 수령들이 봉급에서 일부를 갈라서 백성들의 공역(公役)에 대한 비용에 보조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은 실은 공용(公用)으로 쓰이는 것인데 사곡(私糓)처럼 취급되어 표면에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있으니, 이러한 여러 가지 종류가 적지 아니하오니 이것을 모두 빠짐없이 수록한다면 그 수량이 너무 호번(浩繁)하지나 아니할까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너무 호번하게는 하지 말고 힘써서 요긴한 사항만을 상세히 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려면 책이 몇 권이나 되겠는가?” 하시니, 상규가, “전곡(錢糓)과 갑병(甲兵)이 그 속에 다 들어가야 할 것이니 책 권수가 상당히 많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지금 비국의 유사당상(有司堂上)들은 누구인가?” 하시니, 상규가, “서영보(徐榮輔)와 김희순(金羲淳)이 있고 또 결원(缺員)이 한 사람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은 이르시기를, “호조 판서(戶曹判書)와 상의하여 잘 되도록 해보라.” 하시다(이 기사에 상당한 왕조실록 중의 기사는 《순조실록》 11권 8년 5월 동일조에 실려 있다).

 

이상에서 처음으로 본서 편찬의 하명을 하는 제1차의 군신간의 문답을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윤5월 한 달을 지나고서 50여 일 후에 두 번째 소견(召見)이 있었으니, 《일성록(日省錄)》 동년 6월 20일 갑인조(甲寅條)에 의하면,

비국 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 서영보(徐榮輔)와 심상규(沈象奎)를 성정각으로 불러 보시고 하교하시기를, “그 책자는 편집이 지금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가?” 하시니, 영보와 상규는 주달하기를, “책자를 편찬하는 사이에 지나간 범례(凡例)로서 감히 한 번은 성상께 품재를 올리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우선 초본(草本)으로 두어 권 만들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지금 문밖에 대령하여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들이라고 명하시고, “이 책이 전편(全編)이 다 되면 모두 및 권이나 되겠는가?” 하니, 영보가, “아마도 10권은 넉넉히 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가지고 와서 올린 것은 재용편(財用篇)인데 마땅히 4귄으로 될 것입니다.” 하고, 상규가, “지금 올린 이 초본을 우선 대내(大內)에 두시고서 때때로 하람하시옵소서. 이 중에는 모든 명목(名目)과 제도(制度)가 다 실려 있으며 날마다 친재(親裁)하시는 정무(政務)를 보시는 사이에 만약 하문(下問)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혹 차대(次對)할 때나 또는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실 때에 일에 따라서 질문하시고 반복하여 강습과 토론하시는 것이 심히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만약 물을 일이라도 있으면 비록 경 등이 입시(入侍)할 때가 아니라도 마땅히 승정원(承政院)을 통해서 경 등에 물을 터이니라.” 하시다. 상규가 다시 주달하기를, “선왕조(先王朝)에서 어정(御定)하신 《군려대성(軍旅大成)》이라는 책이 현재 주합루(宙合樓)에 있사오니 지금 편찬하고 있는 책자 중에 군제(軍制)에 관한 사항으로 그 중에서 참고할 자료가 많이 있으므로 조금 가져가려 하오나 품청(禀請)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감히 주달하나이다.” 하니, 임금이, “그 책을 가져다가 참고하고 내각(內閣)에 시켜서 2벌만 더 등사해서 한 권은 궁중에 올리게 하고 한 벌은 내각(內閣)에 두게 하라.” 하시다. 영보가, “재정 수입의 근원은 전결(田結)에 있으므로 재용편(財用編) 조목(條目) 중에는 전결(田結)을 제일 먼저 싣게 하였습니다. 그때에 전결이 누락된 것이 많고 경비의 수용은 점차로 증가하여 1년의 세입(歲入)이 대개 10만 석이라고 한다면 즉 2만 석은 부족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는 옛날부터 군구(軍九) 광칠(廣七)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대개 군자창(軍資倉) 수입이 9만 석이고 광흥창(廣興倉) 수입이 7만 석이 있다는 것이니, 만약 항상 이러한 수입이 있으면 1년에 120,000석씩 수용(需用)한다 하여도 3년을 지나면 남아서 축적되는 곡식이 오히려 1년분 수용할 액수가 되어 여유가 넉넉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입을 가지고 지출을 예산하여 나가도 해마다 20,000석의 부족을 보게 됩니다. 재정은 국가의 혈기(血氣)이니 군속하고 갈핍(竭乏)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라살림을 꾸려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규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정이니 재정의 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 재정을 올바르게 쓰는 것이 또 어려움을 알 것입니다. 만약 재정의 나는 것이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면 재정을 옳게 쓰는 것도 알 수 없게 되어 자연 나라 살림이 군색하게 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상과 같이 제2차 군신간의 문답으로서 첫째로 본서(本書)의 편찬에 서영보(徐榮輔)와 심상규(沈象奎)가 주체가 되어 있음과 승지 송지렴(宋知濂)과 비국 유사당상 김희순(金羲淳) 등이 참여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지난 5월 제1차 소견(召見) 이후 겨우 50여 일의 짧은 시일에 벌써 재용편(財用篇)의 초고(草稿)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현직 호조판서로서 비국유사당상을 겸한 서영보의 주달로서 당시의 국가 재정의 곤박한 실정을 알 수 있는 동시에 국왕을 비롯하여 재정과 군사정책 수행의 중추적 지위에 있는 중신(重臣)들에게는 본서(本書)와 같은 일상 집무의 편람서(便覽書)의 비치가 필요함에 따라 이 편찬이 시급하여진 것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본서 편찬을 시작함으로서 그 기본자료로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중앙과 지방의 각 관청의 각종 통계ㆍ법규 등이 수집됨을 알 수 있고, 어정 군려대성(御定軍旅大成) 같은 군정편의 중요자료가 발견된 것 등을 알았다. 그 후 순조(純祖)가 본서 편찬에 대하여 제3차로 두 유사당상을 소견(召見)하고 최후로 마무리 한 것은 2차 소견 후 40일 후인 그해 8윌 1일이다. 즉 《일성록(日省錄)》 순조 8년 1월일 갑오조(甲午條)에 의하면,

비국 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 서영보와 심상규를 성정각(誠正閣)에 불러보시고 하교하시기를, “지난번에 올린 책자(冊子)는 지금 고람(考覽)하고 있노라. 그 나머지 부분은 어느 때에 끝나겠으며 다 마치게 되면 모두 몇 권이나 되겠는가?” 하시었다. 서영보가 주달하기를, “지금 다 된 것부터 정서(正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직 지방의 등록(謄錄)을 그 사이 상고해서 가져오지 못한 것이 있어 다 되지 못했으나 전부 다 되면 총 권수가 10책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중략〉 임금이 책자(冊子) 한 권을 내어 주시면서 하교하기를, “이것은 전 평사(評事) 홍의영(洪儀泳)이 진상한 《북관기사(北關記事)》라는 책이니, 경 등이 한 번 보는 것이 좋겠다.” 하고, 〈중략〉 임금이 이르시기를, “《만기요람》 여러 편중에 어느 것이 가장 절요(切要)한 것인가?” 하니, 서영보가 아뢰기를, “재용편에는 경비(經費) 출납의 정사를 자세히 실었고, 군제편(軍制篇)에는 군사사무와 지휘절제(指揮節制)하는 방법이 상세히 실려있으니 예람(睿覽)하시면 심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물편(貢物篇)에는 진배(進排)하는 물품 종류와 그 가격을 마련한 것이온데, 수효가 아주 많고 명색(名色)도 각각 다르니 처음 이렇게 값을 정하기는 전혀 백성들의 부담을 덜게 하려는 뜻으로 했으므로 공가(貢價)와 물가(物價)가 현저한 차가 있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도리어 오활한 처사라고도 생각됩니다. 이런 것을 또한 자세히 보시면 물정(物情)을 통달하는 방도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시기를, “공물편 소주(小註)에 기재한 월령삭선(月令朔膳)은 각 고을에서 진배(進排)하는 것도 역시 공가(貢價)에서 회감(會減)하는 것인가?” 하니, 상규가 아뢰기를, “각읍에서 진상하는 물선(物膳)은 모두 그 도(道)의 저치미(儲置米)로 회감합니다.” 하고, 영보가 아뢰기를, “선혜청(宣惠廳)이 설치되기 전에는 그때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대동법(大同法)을 경기지방(京畿地方)부터 시행해서 물산(物産)을 참작하여 가격을 상정(詳定)해서 월령(月令)으로 진상하는 삭선(朔膳)의 많은 종류도 다 대동저치미(大同儲置米)로 회감하였습니다.” 하였다. 〈중략〉 영보가 아뢰기를, “이 책의 범례(凡例)는 주로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 많이 모방하여 강(綱)으로 큰 것을 들었고, 목(目)으로 적은 것을 널리 폈고, 또 소주(小註)로서 상세히 갖추게 하였으며, 또 힘써서 간이(簡易)한 방법을 따라서 편질(編秩)을 초략(抄畧)히 하였으므로 예를 들면 성자(聖字)나 교자(敎字) 같은 글자도 별행(別行)으로 높혀서 올려 쓰지 않고, 휘호(徽號)ㆍ전호(殿號)도 조금 띄어서 쓰기만 하였으니, 이것은 선조(先朝)에서도 정례(定例)가 있었으므로 이번에도 이에 의하여 하고 있으나 편람(便覽)하시는 데는 무방할 것으로 압니다.” 하니, 임금은 윤허(允許)하시었다고 하였다.

이 8월의 제3차의 소견(召見)으로 군신간의 문답은 실로 장장 몇 시간을 끌어서 전후 수천언(數千言)의 담화가 계속되었는데, 이상은 주로 본서 편찬에 관한 체제(體制)ㆍ편차(編次)에 관한 것만 추려서 고증(考證)한 것이고, 그 외에도 대체로 본서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나 본문을 전부 싣기는 너무 길어서 대략 그 내용의 요령만 들어본다면, 첫째, 연행시(燕行時)의 급포(給包)에 관하여 삼포(蔘包)ㆍ은포(銀包)ㆍ잡포(雜包)에 대한 것. 둘째, 공신사패(功臣賜牌)에 관한 것. 셋째, 북관개시(北關開市)에 대한 패해 교정의 방책을 말하였고, 넷째, 공물진상(貢物進上)에 관한 것. 다섯째, 균익(均役)에 관한 문제로 구폐(捄弊) 방책을 말하였고, 여섯째, 경향군제(京鄕軍制)를 말하여 속오군(束伍軍)에 관한 실정을 설명하였고, 일곱째, 습조(習操)에 관한 유명 무실의 실상을 말하였고, 여덟째, 군기(軍技)에 대하여 월도십팔기(月刀十八技)ㆍ삼련법(三練法)을 말하고 군심수습(軍心收拾)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아홉째, 군기관리(軍器管理)의 소홀과 축성관계(築城關係) 및 병기(兵器)의 성능에 대한 이야기였고, 열째, 국고(國庫)의 빈곤과 양전(量田)의 개선책을 말했고, 열한째, 관리 반록(頒祿) 관계, 열두째, 조적(糶糴)과 모곡(耗糓)관계, 열셋째, 재년(灾年)의 감세(減稅)관계 등이 비교적 상세한 문답으로 전개되었으니 이것은 다 본서의 내용의 각 해당 사항과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8월 소견(召見)의 기록으로서 《만기요람》 편찬의 전모가 완전히 부각(浮刻)된 것이다. 이로서 본서를 《만기요람》이라는 서명(書名)이 처음으로 정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대체의 체제ㆍ내용ㆍ편차 등이 대략 완성에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으며, 순조(純祖)가 그 사이 올라온 본서(本書)의 일부 초본(草本)으로 을람(乙覽)이 계속되어 이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진지(眞摯)해 진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기요람》의 편찬을 주재(主宰)한 서영보(徐榮輔)와 심상규(沈象奎)는 그때에 학문과 식견(識見)이 조신(朝紳) 중에서 탁월한 분으로서 명망도 높은 인물들이다. 서영보는 영조(英祖) 35년(1759년)에 나서 정조(正祖)ㆍ순조(純祖) 두 조(朝)에 역사(歷仕)하였으니, 자는 경재(景在) 호는 죽석(竹石)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니 대제학(大提學) 유신(有臣)의 아들이다. 명문(名門)에서 생장하여 총명한 자질을 가졌으니 정조 12년에 유학(幼學)으로 전강(殿講)에 수위(首位)가 되어 직부전시(直赴殿試)의 명을 받고 다음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정조는 그를 곧 규장각 검교(奎章閣檢校)ㆍ직각(直閣)에 올려 천부의 재화(才華)를 더욱 연마하게 하였다. 그 후 승지(承旨)가 되고 또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나가기도 했으나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견문을 넓혔으며, 정조 23년에는 다시 규장각에 들어가서 정조의 어제문고(御製文稿)의 정리ㆍ교정에 종사하였다. 이때도 각신(閣臣) 심상규(沈象奎)와 같이 구관당상(句管堂上)이 되어 왕의 춘저 시대(春邸時代)부터의 총저술(總著述) 191권의 교정을 완료하여 올렸으니, 이것이 후일 《홍재전서(弘齋全書)》의 원고본(原稿本)이 된 것이다. 동 24년에는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나갔다가 순조(純祖) 4년에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옮기고, 또 곧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이 되고, 다음 해에 예조 판서(禮曹判書), 동 6년에 대사헌(大司憲)ㆍ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비국 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하였다. 동 8년에는 왕명을 받아 심상규와 《만기요람》의 찬진(撰進)에 종사하여 불후(不朽)의 대저(大著)를 완성하였다. 이 해에 판의금(判義禁)을 지나서 평안 감사(平安監司)로 나갔는데, 다음 해 2월 문형권점(文衡圈點)에 수위로 추천되어 즉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임명되었으나, 중신(重臣)의 요청으로 관서(關西)의 민정(民政)이 중대하므로 그대로 기백(箕伯)으로 잉임(仍任)하라는 특명이 내려 그대로 눌러있다가 다음 해 4월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돌아와서 곧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다가 형판(刑判)ㆍ병판(兵判)을 지내고 동 13년에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가 되었고, 동 6년에는 수원 유수(水原留守)로 나갔고, 그 후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ㆍ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내다가 그해(1818년)에 58세로 죽었으니, 문헌(文獻)이란 시호가 내렸다. 그는 문장과 필법이 아울러 뛰어났으며 시에 유명하였다. 유저(遺著)로 어사고풍첩(御射古風帖)ㆍ장릉령천비(莊陵靈泉碑)ㆍ지지대비(遲遲臺碑)ㆍ풍악기(楓嶽記) 등이 있고,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수충사비(酬忠祠碑) 같은 글씨가 세상에 알려져 있다. 순조 5년에 편저한 교초고(交鈔考)는 드물게 보는 화폐제도(貨幣制度)의 자료를 엮은 것이다. 그 외에도 죽석관유집(竹石館遺集)ㆍ죽석관시초(竹石館詩抄)ㆍ죽석봉교서첩(竹石奉敎書帖) 등이 그의 아들 매원(梅園) 서기순(徐箕淳)의 손으로 편집되어 세상에 전한다.

 

심상규(沈象奎)는 청송 심씨(靑松沈氏)로서 영조 42넌(1766년)에 태어났다. 자는 치교(穉敎), 호는 두실(斗室) 또는 이하(彛下)라고 한다. 그 아버지 함재(㴠齋) 심염조(沈念祖)가 서적을 많이 수집하여 장서 수만 권을 가져서 국내에 유명하였다. 상규는 총명한 재질로 시례(詩禮)의 가정에서 성장하여 소년 때에 벌써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다 섭렵하였다. 정조 7년에 18세의 소년으로 진사시(進士試)에 올랐고, 동 13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몇 해를 지나 규장각에 들어갔다. 동 21년에는 왕명을 받아 《오륜행실(五倫行實)》을 편집하여 주자소(鑄字所) 활인(活印)으로 찍어 반포하게 하였고, 그 후 직각(直閣)이 되어 서영보(徐榮輔)와 같이 정조어제(正祖御製) 《홍재전서(弘齋全書)》 초고를 편집ㆍ정리하여 동 23년에 완료하였다. 순조(純祖)가 즉위한 후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채지영(蔡趾永)의 탄핵으로 홍원(洪原)에 귀양갔다가 1년 만에 돌아와서 다음 해에 승지가 되고 동 3년에 대사간(大司諫), 4년에 이조 참판을 거처 5년에는 전라 감사(全羅監司)가 되었으며, 6년에 이조 참판으로 돌아왔으며, 동 8년에는 부제학(副提學)으로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하였으니 이때에 왕명을 받들어 본서 《만기요람》의 편찬을 맡아서 서영보와 같이 단시일에 완성 제진(製進)하였다. 그해 겨울에 이조 참판 다음 해 봄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ㆍ도승지(都承旨)ㆍ호조참판(戶曹叅判)을 지나서 가을에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다음 해 순조 10년에 형조판서(刑曹判書)ㆍ공조판서ㆍ호조판서 등 중요 지위에 역임(歴任)하였고, 10월에는 규장각제학에서 홍문ㆍ예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랐으며, 동11년에는 보국계(輔國階)에 승진하고, 그해 윤3월에 문형(文衡)을 시임한 후 다시 호조ㆍ이조판서를 지나서 8월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평안도에서 홍경래(洪景來) 난이 일어나서 군정 책임자로 노심초사하다가 난이 종식되기 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옮겼다. 이때부터 순조 25년 10월에 우상(右相)이 되기까지 전후 15년 사이에 그의 관력(官歷)은 실로 호화로웠다. 즉 판의금(判義禁)ㆍ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다시 지났고, 이조판서 3회ㆍ병조판서 2회와 예조(禮曹)ㆍ호조(戶曹)ㆍ공조판서 등을 다시 지냈으며, 외직으로 광주유수(廣州留守)ㆍ평안감사(平安監司)ㆍ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3회ㆍ동좌빈객(同左賓客) 2회를 지났다. 그러나 우상(右相)이 된 지 1년 반을 지나서 대사간 임존상(任存常)의 탄핵으로 순조 27년에 이천부(伊川府)로 귀양갔다가 반년 후에 풀려났으나 환로의 뜻을 끊고 장단(長湍)의 선영하(先瑩下)에 돌아가 고요히 지나다가 동 32년에 다시 우의정(右議政)에 재임되어 여러 차례 사퇴하였으나 기어이 나가게 되고 한 달 후에 좌상(左相)이 되고 또 2달 후에 영의정(領議政)의 자리에 올랐고 호위 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다. 순조가 승하(昇遐)하고 나서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면서 대행왕(大行王)의 인산(因山)까지 마친 6월에 소를 올려 영상직(領相職)을 사임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의 한직으로 있으면서 한 때 순종실록총재관(純宗實錄摠裁官)으로 일하였다, 헌종(憲宗) 4년에 73세로 죽었으니,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거행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는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시와 독서(讀書)을 잘 하기로 이름이 났다. 유문집 《두실존고(斗室存稿)》와 《건릉지장속편(健陵誌狀續編)》 등이 전하고 있으니, 그가 〈정조 대왕(正祖大王) 천릉지문(遷陵誌文)〉을 제진(製進)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본서 편찬을 담당한 심상규(沈象奎)와 서영보(徐榮輔)는 다 문장에 능하고 다년간 내각에서 서지편찬(書誌編纂)에 많은 경험과 간능(幹能)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일생의 관력으로 보아서 문장과 필법에만 능할 뿐 아니라 재정ㆍ경제ㆍ군사ㆍ형정(刑政) 등 국정 전반에 통효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또 정(正)ㆍ순(純)ㆍ헌(憲) 3조에 역사하여 군주의 신임과 은총이 두터웠으므로 본서 찬진(撰進)의 특명이 이들에게 내린 것은 실로 우연함이 아니라 하겠다. 헌종 때 문명(文名)이 높았던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은 심상규(沈象奎)의 시장(諡狀)을 지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운석유고(雲石遺稿)》 20권에 실려있다.

“상(上)이 일찍이 공을 앞자리에 인견(引見)하시고 조용히 시무(時務) 중에 긴급한 것을 하문(下問)하시고 인하여 《만기요람》 12권을 편진(編進)하라고 명하여 그 책을 길이 어안(御案)에 두고서 항상 보시게 되었다. 공은 전부터 비국(備局)에 오래 있으면서 국조전장(國朝典章)과 전곡(錢糓)ㆍ갑병(甲兵)에 관한 일은 모두 그 본말을 널리 살피고 자세히 이회(理會)하고 있기 때문에 매양 조정에서 큰 논의가 있을 때는 중신들 중에서 재능과 지략이 있다고 이름난 자도 공이 의견과 계획에 지나치는 것은 볼 수 없었다.”

이로서도 그의 연달(練達)한 식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장(諡狀) 중에 말한 만기요람 12권이라고 한 것은 실지 권수와 같지 아니하니 혹 운석(雲石)이 그 권수를 잘못 알았던 것인가 또는 그 당시의 편차에 있어서 지금 전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었던가 잘 알 수 없다.

 

《만기요람》 편찬에 관한 기록은 이상에 밝힌 여러 자료 이외에는 다시 이에 관한 기사를 볼 수 없으므로 본서가 완성되어 진상(進上)한 일시를 확정할 수 없으나 본서 중에 실려있는 가장 가까운 계수(計數)는 대개가 순조 7년 정묘(丁卯)의 숫자이고, 오직 북관개시(北關開市)조의 양시차수용하(兩市差需用下)에만 순조 8년 무진(戊辰)의 총수를 기재하였다. 거기에는 가령(假令)이라는 어귀를 넣어서 즉 예산(豫算)으로 실었다고는 할지라도 이로서 순조 8년의 계수(計數)가 실려있는 것이니 본서는 그 전부를 완성한 것은 아마도 순조 8년 중이거나 그 다음 해 9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래 이 책은 현대의 연감(年鑑)식으로 편찬하여 각 조항에 대한 처리 방식과 지나온 연혁을 서술하여 앞날에 대처할 기초자료로서 일상에 편람(便覽)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앞으로 해마다의 실적(實績)을 추가 정리하여 갈 수 있게 한 것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므로 다른 완성된 서적과는 다르게 취급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때 내각(內閣)에서 편성한 많은 서적은 거의 활인(活印) 간행이 되었으나 이 책만은 사본(寫本) 그대로 두고서 필요에 따라서 국왕 이외 중신(重臣)들 사이에 서로 전사(傳寫)하여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 총 권수에 대해서도 《일성록(日省錄)》 기타 사료에는 재용편(財用編) 4권 전부 10권 정도로 예상하였고, 또 《운석유고》에는 12권으로 되어 있으나 현재 전래된 실지 권수는 11권으로 되어 있으니 이것은 처음에는 편의상 합질(合秩)하려던 것이 아닌가 한다. 앞서 8월의 답신(答申)에 의하면 재용편(財用編)ㆍ군제편(軍制編)ㆍ공물편(貢物編) 3가지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현재는 공물 편은 따로 두지 않았고, 이 공물편이란 재용편 권1의 공상(供上)과 각공(各貢)의 1권을 말한 것이니, 그 때문에 원 목차에 의하면 재용편1이라는 기호는 현재 제2권인 전결(田結) 기타의 권에 부쳐져 있고, 제일 위에 있는 공상ㆍ각공에는 그냥 재용편이라고만 표시하고 수자로 권수를 불이지 아니하였다. 또 제5편이 되는 환총(還摠)ㆍ제창(諸倉)에는 편수(編數)를 표시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다른 사본(寫本)에 의하면 이것이 군정편(軍政編)중에 들어 있으니 그 내용으로 봐서 군향(軍餉)ㆍ군창(軍倉)이기 때문에 군정(軍政)으로 통합했다가 다시 재정관계라고 해서 재용편에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보면 찬수(撰修)한 서영보(徐榮輔)의 주달에 재용편은 4권이라고 한 것과 재정에는 전결(田結)이 제1이라고 한 것이 입증도 되며, 당초의 계획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이러한 여러 점을 종합하여 처음 계획은 공물편(貢物編) 1권ㆍ재용편(財用編) 4권ㆍ군정편(軍政編) 5권 합계 10권으로 예정한 것이라 하겠다.

《만기요람》은 이러한 편찬의 과정을 거쳐서 초본으로 전해 내려오면서 재정ㆍ군정 등 운영에 많은 참고와 지혜를 도와 왔으나 간행이 되지 못하고, 전사본(傳寫本)으로 몇 부만 겨우 전해진 관계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못했던 바 일정치하(日政治下)에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에서 그들이 정무자료(政務資料)로 쓰기 위하여 우리 나라 고전을 많이 정리 간행하던 중 1938년에 본서의 출판을 간행하려고 경성대학 사방박(四方博) 교수에 그 감교(勘校)를 위촉하여 재용(財用)ㆍ군정(軍政) 2편으로 나누어 양장(洋裝) 2책으로 출판하였다. 이제 교정자(校訂者)인 사방박교수의 권두에 쓴 예언(例言) 중 본서 유전된 여러 사본의 내용에 대한 해설을 빌려 참고로 하면 다음과 같다.

 

본서 교정에 쓴 11종의 사본은 각기 제대로 특징이 있으나 그 중에 기사가 가장 정확(正確)하다고 인정되는 집옥재본(集玉齋本)으로 원본(原本)을 삼았다. 그러나 이 본에는 재용편(財用編) 5권의 《세폐(歲幣)》에서 《신사(信使)》까지의 조항이 없으므로 다른 본의 것을 가져다가 보충하였다.

 

지금 현존하는 여러 본을 들어 보면,

1. 집옥재본(集玉齊本) 11권, 경성대학 도서관 소장.

이 책에는 집옥제(集玉齊)의 인(印)이 있다. 집옥재는 왕궁의 장서각(藏書閣)이니 이로서 왕실의 소장본임을 알 수 있다. 그 기술(記述)이 가장 정확(正確)하고 오자가 적으므로 이것을 원본으로 해서 편차(編次)도 이 책대로 따랐다. 군정편 중의 《진도(陣圖)》는 다른 본에는 없는 것이 많고, 《폐사군지도(廢四郡地圖)》는 이 원 본만이 싣고 있다.

2. 신갑균 본(申甲均本) 11권, 경성대학 도서관 소장.

신(臣) 신갑균(申甲均)이라 쓰고 취초(醉樵)라는 주인(朱印)이 찍혀져 있다.

3. 박제문본(朴齊?本) 11권, 내등길지조(內藤吉之助) 소장.

이 책에는 신라(新羅) 후예(後裔) 반남인(潘南人) 박제문(朴齊?) 경소(敬韶) 장서소(藏書所)라 쓰였고, 전재(鐫齋)라는 인이 찍혀져 있다. 재용편 5권의 지칙(支勅)조 종 일칙소입도수(一勅所入都數)가 다른 본에는 볼 수 없을 만큼 정밀하여 순조(純祖) 12년 임신까지의 계수(計數)가 실려져 있다. 다른 본에는 대개 순조 7년까지의 숫자에 끝났는데 이 책에만 그후 계속 보기(補記)하여 온 것으로 본다.

4. 마생본(麻生本) 11권, 마생무귀(麻生武龜) 소장.

5. 대내본(大內本) 10권, 대내무차(大內武次) 교수 소장본.

이 책에는 재용편 3의 《호조공물(戶曹貢物)》ㆍ《대동작공(大同作貢)》을 2권에 넣었고, 3권중에는 6권의 《환총(還摠)》ㆍ《제창(儲倉)》을 합쳐서 실었다. 모두 10권이다.

6. 송인식본(宋寅植本) 10권, 경성대학 도서관 소장.

이 책에는 덕은(悳殷) 송인식(宋寅植)이라는 인이 있다.

7. 이왕직본(李王職本) 10권, 구황궁 소장.

8. 등전본(藤田本) 10권, 등전양책(藤田亮策) 교수 소장.

이상 3본은 모두 환총(還摠)과 제창(諸倉)을 군정편 5에 수록하고서 전부 10권으로 되어 있다.

9. 김세균본(金世均本), 경성대학 도서관 소장.

이 책은 산질(散秩) 3가지가 합쳐서 재용편 5책을 만들어져 있다. 1권에는 전결(田結)에서 삼포(蔘布)까지이고, 2권에은 호조공물에서 조적(糶糴)까지, 3권은 공상(供上)과 각공(各貢), 5권은 희생(犧牲)에서 신사(信使)까지인데, 이상 2ㆍ3ㆍ5권에는 김세균(金世均)의 인(印)이 있다. 김세균은 헌종(憲宗)ㆍ철종(哲宗) 때 사람이라 한다. 4권은 환총(還摠)과 제창(諸倉)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재용편 중의 《전화(錢貨)》 내지 《삼파(蔘把)》와 군정편 전부가 없는 산질본(散秩本)이다.

 

이상 여러 본을 통람하면, 형식상으로 봐서 10책 본과 11책 본으로 차이가 있다. 전자도 재용편ㆍ군정편 모두 5책씩으로 되어 있고, 후자는 재용편 6책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이렇게 달라진 것은 환총(還摠)과 제창(諸倉) 조의 배치(配置) 때문이다. 10책 짜리에는 이것이 3권에 들어 있는 것과 전부 군정편의 끝에 붙인 것이 있는데, 편차상(編次上) 그렇게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공상(供上)과 각공(各貢)의 위치인데 이것을 재용편 첫머리에 둔 것은 집옥재본과 박제용본이다. 다른 것은 재용편 3권이나 끝권에 실었다. 당초에 이것을 공물편으로 독립시키려 했던 것이므로 원본대로 제1위에 둔 것이다. 다음은 군정편의 목차 말미에 있는 〈비변사(備邊司)〉란 항목 위에 〈제사편(諸司編)〉이라는 대제목이 실려 있으나 본문 중에는 해당할 항목이 없다. 그러나 혹 이것은 대분류(大分類)를 만들어 가지고 비변사 이외의 여러 관청을 계속해서 기술하려다가 둔 것인가 또는 그 다음 권에 나오는 병조 이하의 제영(諸營)을 일괄 기재하려던 취지였는가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상으로 당시 여러 사본의 내용과 간행한 원본 정리한 것을 알 수 있고 또 세밀히 감교(勘校)한 것을 볼 수 있다. 간행본에 의하면 각본의 상이점을 일일이 적출하여 두주로 밝혔으며 종래의 목차가 너무 소략하여 검색의 불편이 있다 하여 다시 3단계의 상세한 목차를 만들어 이용상 지극히 편리하게 하였다. 이번에 국역본에도 이 목차를 대개 그대로 쓰고 내용에도 세분한 목차의 항목을 별항으로 표제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각본과 교감한 것도 의미상 차이를 가져오는 것만 골라 교감(校勘)란을 만들어 실었다.

 

이로서 만기요람은 찬진(撰進) 당시에는 그때 국정수행에 큰 참고가 되어 비익(稗益)이 되었거니와 세대가 지나간 지금에 와서는 지난날의 국가 재정ㆍ경제와 군사ㆍ군정에 대한 귀중한 자료로서 지니고 있는 그 가치는 한층 더 진귀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기록된 계수(計數) 이외에는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연구하는 일부 학도에 많은 난삽을 주었으나, 이제 우리 글로 완역되어 나오게 되었으니 이로서 지난날 우리 선민(先民)들이 국토를 경영하고 민족을 수호하며 발전케 한 취지와 사업을 찾아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갓 학구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뿐 아니라 국가 민족에 관심있는 사람은 누구나 읽어서 국가 장래의 징전비후(懲前毖後)의 자료가 될 것으로 믿는 바이다.

 

1971년 12월 30일

ⓒ 한국고전번역원 | 김규성(金奎聲)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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