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범주
복합감성/한중록
개요 작품포인트
혜경궁 홍씨는 부친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서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인 사도세자를 남편으로 두어 평생 큰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는 아들 왕세손을 부둥켜안고 운명적 한으로써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아픔과 불효의 망극함, 함께 죽지 못하는 비통함을 절규하는 것이다. 침묵하여 내면에서 삭히고 잠재우기엔 너무 깊은 한이요 원통함이었다. 왜곡된 진실을 밝혀야만 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그 실상들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멸문지화를 당한 친정의 누명과 억울함, 그토록 비극적 한의 세계로 몰고 갔던 흉심과 야욕의 주역들, 이러한 모든 실체와 상황적 아픔들을 폭로하고 설원해야 했다. 혜경궁 홍씨는 한이 많은 여인이었다. 28세에 남편을 잃은 후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기쁨과 영광의 날보다는 고통과 번민의 날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팔순을 넘기도록 산 그 삶 자체가 한일 것이다. 작자는 3편의 글을 쓸 때까지도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한 것 같다. 실제로 3편의 글에서 다른 사건이나 인물에 관련된 것 외에 남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나 마지막 편에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밝힌다면서 섬세하게 그 날의 일을 전개하고 있다.
한중록은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의 오해를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부자 사이에 얽힌 오해가 불러온 역사적 비극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혜경궁 홍씨의 복합적인 마음을 드러낸다.
주요인물
1.혜경궁홍씨 : 어린 나이에 입궐하여 한 평생을 눈물로 보낸 인물이다. 그녀는 남편과 시아버지 사이에 생긴 오해의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있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한 인물이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게다가 한 나라의 세자빈으로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기에 그녀에게 가해진 삶의 무게는 더욱 무거운 것이었다.
2.영조 : 좋고 싫음이 너무도 분명한 인물이다. 그는 후사가 없어 걱정하던 차에 아들을 얻어 기뻐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항상 마음에 차지 않았으므로 항상 꾸중과 성냄의 감성으로 아들을 대한 인물이다. 해가 거듭 될수록 아들과의 골이 더욱 깊어져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한번 정해진 마음의 결을 고집 세게 고수하는 인물로, 결국에는 마음을 잘 풀어내고 다스리지 못해 비극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3.사도세자 : 탄생 시에 누구보다도 많은 축복을 받은 인물이다. 유달리 총명하고 건강하여 성군의 자질을 지녔었는데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의 인물이다. 생각이 많고 감성이 풍부한 인물로, 아버지의 끝없는 미움 앞에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풀어야할 지점을 몇 차례 놓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배경
시간 : 조선시대 영·정조 대
장소 : 한양 대궐
전체줄거리
혜경궁 홍씨는 나이 9살에 동갑인 동궁 빈으로 간택된다. 이듬해인 10살에 가례를 치르고 궁중에 입궐한 후 81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줄곧 궁중에서 생활하였다. 입궐 초기에는 영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앞으로 군주가 될 동궁의빈으로서 쇠락하던 친정 집안을 다시 일으켰고, 후에 정조가 된 국본을 생산하는 일들로 기쁨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입궐 초에 징후가 나타나던 세자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 백약이 무효이고, 주변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도 빛을 보지 못한 채 28세의 나이에 생부인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 사건은 작자에게 지울 수 없는 여러 가지 한의 고리가 되었다.
이 때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시부인 영조의 변함없는 자애와, 이제 겨우 11살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는 아픔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대신에 왕위에 오르게 하여 아버지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실로 이 염원을 이루기 위해 혜경궁 홍씨는 아들에 대한 사사로운 정을 덮어둔 채, 할아버지인 영조의 처소로 그를 보내고 그리움을 나날을 보낸다.
그것은 남편 사도세자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병의 단초를 부자간의 사랑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고 갈파하였기에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보위에 오르자마자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하여 혜경궁 홍씨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아버지를 가둔 뒤주를 외조인 홍봉한이 들이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처분들이 시누인 화평옹주와 시모인 정순왕후 측의 이간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정조는 전날의 처분들을 후회하면서 어머니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혜경궁 홍씨는 환갑 되는 해에 처음 붓을 든 1편에서 지난날의 아픔을 담담하게 뒤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담아낸다.
이렇게 현명한 노모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정조의 극진하나 효도로, 만년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으로 인하여 혜경궁 홍씨에게 다시 비운이 감돌게 된다. 그것은 손자인 순조가 보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후 혜경궁 홍씨와 시모의 두 집안 간에는 끝이 없는 투쟁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67세와 68세에 작품 2-3편을 집필하게 된다.
그 후 혜경궁 홍씨는 이러한 모든 비극의 실마리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식하고,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남편 사도세자의 병의 원인과 그 증세를 자세히 밝힌다. 또한 사도세자 처단 때 사용된 뒤주는 영조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 일로 인해 수차에 걸쳐 수난을 겪은 친정 집안의 억울함을 손자가 풀어 주기를 소망하면서 71세의 노년에 10년에 걸친 회고록을 마감한다.
감성이야기
13일에 소조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셨다.
‘어젯밤의 소문이 더욱 무서우니 큰일일세. 일이 이리 된 후이니 내가 죽어서 모르거나,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또 세손을 구하는 것이 옳으니 내가 살아서 빈궁을 다시 볼 줄 모르겠노라.’
나는 그 편지를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그런 큰일이 일어날 줄이야 내 어찌 알았겠는가. 그날 아침에 대조께서 전좌를 정사를 보시고 경현당 관광청에 계셨다. 선희궁께서 그곳에 가 우시며 대조께 고하셨다.
“세자의 병이 점점 깊어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마마, 소인이 이 말씀은 차마 어미 된 자로 못할 일이지만, 성궁을 보호하고 세손을 건져 종사를 평안히 하는 일이 옳으니 대 처분을 하옵소서. 하오나, 부자간 정으로 차마 이리 하시겠지만 다 세자의 병입니다. 죄는 책망하겠으나, 병을 어찌 책망하겠습니까? 처분은 하시나 은혜를 베푸셔서 세손 모자를 평안케 하시어 주소서.”
내가 차마 이를 두고 옳다고 하지 못했다. 일인즉 어쩔 수 없는 지경이니 내가 따라 죽어 모르는 것이 옳으나 차마 세손과 이별하지 못하였다. 다만 내가 만난 세월이 몹시 살기 어려움을 서러워할 뿐이다.
대조께서 들으시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창덕궁 거동령을 급히 내렸다. 선희궁께서는 어머니로서의 정을 버리고 큰 뜻으로 말씀을 아뢴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가슴을 치고 죽는 듯이 괴로워하셨다. 그리고는 당신이 계시던 양덕당으로 오셔서 음식을 먹지 않고 누워만 계시니, 만고에 이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전부터 선원전으로 거동하는 길이 두 길이었다. 만안문으로 드시는 거동 때는 탈이 없고, 경화문 거동 때에는 탈이 났었다. 그런데 그날 거동령이 경화문으로 났다.
소조께서는 11일 저녁에는 수구로 다녀오셔서 몸을 상하시고, 12일은 통명전에 계셨다. 그날 갑자기 대들보가 부러지는 것같이 소리가 크게 났다. 이 소리를 들으시고 소조께서는 탄식하였다.
“내가 죽으려나 보구나. 이 어인 일인고.”
그때 아버지께서는 첫 5월에 엄중한 교지를 받아 재상직에서 파직되고, 동교에 한 달 가까이 나가 계셨다. 소조께서 당신이 스스로 위태하다 느끼셨던지 계방 조유진을 통해 춘천에 원임대신으로 있던 조재호에게 올라오라 말을 전하셨다. 이런 일을 보면 병환이 계신 이 같지 않았으니 이상한 하늘의 뜻이로구나. 거동령을 들으시고 두려워하여 아무 소리 없이 기계와 말을 다 감추었다.
“내가 이른 대로 하라.”
그러고는 교자를 타시고 경춘전 뒤로 가시며 나를 오라고 하셨다. 근래에는 사람이 눈에 보이면 곧 일이 나니, 교자에 가마뚜껑을 하고 사면에 휘장을 치고 다니셨다. 그러면서도 춘방관과 학질이 밖에는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하셨던 것이다. 그때가 정오쯤이었다. 홀연 까치가 무수히 경춘전을 에워싸고 울었다. 이것이 어떤 징조인지 괴이하였다. 그때 세손을 환경전에 있었다. 내 마음이 몹시 급하여 세손의 몸이 어찌 될 줄 몰라서 그리로 내려가 세손에게 일렀다.
“밖에 아무 일이 있어도 놀라지 말고 다음 단단히 먹고 있어야 한다.”
천만 당부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대조께서 거동을 지체하시더니 오후 1시가 지나서야 대조께서 휘령전으로 오신다는 말이 있었다. 그럴 때에 소조께서 나를 덕성합으로 오라 하시기에 가 뵈오니, 그 장하신 기운도 없으시고 좋지 않은 말씀도 않으셨다. 소조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하시며 힘 없이 벽에 기대어 앉아 계셨다. 소조의 안색은 놀라서 핏기가 없었다. 나를 보시고 응당 화증을 내실 터임에 분명했다.
‘소조의 화증이 오죽 심하지 않을까?’
싶어 내 목숨이 그날 마칠 줄 알고 스스로 염려하였다. 그래서 세손에게 경계를 부탁하고 왔던 것이다. 그런데 소조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소조가 나를 보시더니 힘없이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괴이하니 자네는 잘 살게 하겠네. 그 뜻들이 무서우이.”
나는 눈물을 머금고 말없이 있다가 황당하여 손을 비비고 앉았다. 대조께서는 휘령전으로 오셔서 소조를 부르신다고 하였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어찌하겠는가. 소조께서는 피하자는 말도, 달아나자는 말도 않으셨다. 좌우를 치우지도 않고 조금도 화를 내신 기색이 없었다.
“빨리 용포를 달라.”
하여 용포를 입으셨다. 그러더니,
“내가 학질을 앓는다고 말씀드리려 하니 세손의 휘항을 가져오라.”
내가 생각하기에 세손의 휘항은 작은 것이었기에 당신 휘항을 쓰시는 것이 좋을 듯하였다. 그래서 내인에게 소조의 휘항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소조가 천만 뜻밖에 말씀하셨다.
“자네는 무섭고 흉한 사람이로세. 자네는 세손을 데리고 오래도록 함께 살려 하는군. 내가 오늘 나가 죽을 터이니 그를 꺼리어 세손의 휘항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심술을 내 잘 알겠네.”
내 마음은 당신이 그날 그 지경에 이르실 줄을 어찌 알았으리오.
‘이 끝이 대체 어찌될꼬? 사람이 다 죽을 일이요, 우리 모자의 목숨이 어떠할런고?’
내가 어찌한다 말씀을 하지 않았는데 천만 뜻밖의 말씀을 하시니 내가 더더욱 서러워 다시 세손의 휘항을 가져다 드렸다.
“그 말씀은 너무 마음에 없는 말이시니 세손의 휘항을 쓰소서.”
“싫다. 꺼려하는 것을 써서 내 무엇할꼬?”
이런 말씀을 하실 때면 병환이 있으신 분 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이 공손히 나가려 하셨던 것일까. 모든 것이 다 하늘의 뜻이니 원통하고도 원통하구나. 그러할 때에 날이 이미 늦었다. 재촉하여 나가시니 대조께서 휘령전에 앉아 계셨다. 칼을 안고 두드리시더니, 처분을 하시었다. 차마 망극하고도 망극하니 이 모습을 내가 어찌 기록하겠는가. 서럽고도 서러울 뿐이다.
소조께서 나가시자 대조의 노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들려왔다. 휘령전과 덕성합이 멀지 않았으므로 담 밑에 사람을 보냈다.
“벌써 세자께서 용포를 벗고 엎디어 계십니다.”
대처분인 줄 알고 천지가 망극하여 내 마음이 무너지고 깨지는 듯하였다. 하늘도 땅도 무너지고 이제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 가슴이 먹먹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이 부질없어 세손이 있는 곳에 와서 서로를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자 내관이 다급히 들어와 말했다.
“밧소주방의 쌀 담는 궤를 내라 하십니다.”
대체 이것이 어쩐 말인고! 저들도 어찌할 줄 몰라 궤를 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세손궁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을 알고 대문 안에 들어가 아뢰었다.
“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썩 나라가!”
대조께서 엄히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세손은 왕자 재실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그때의 정경이야, 고금천지간에 없었다. 세손이 나가자, 하늘과 땅이 맞붙는 듯, 해와 달이 깜깜한 듯하니, 내가 어찌 잠시나마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었겠는가. 칼을 들어 목숨을 끊으려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빼앗아 뜻대로 못하였다. 다시 죽고자 하였지만 촌철이 없어 못하였다. 숭문당을 지나 휘령전으로 나아가는 전복문 밑으로 갔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께서 칼을 두드리는 소리와 소조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렸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아버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용서하소서! 제발 살려주소서!”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가슴을 두드린들 대체 이 일을 어찌하겠는가. 당신의 용맹스러운 힘과 건장한 기운으로 어찌 궤에 들어가셨는고.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궤에 들어가라!”
아무리 엄히 명하신들 아무쪼록 들어가시지 말 것인지 어찌 들어가셨는가. 처음에는 뛰어나오려 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이르니, 하늘이 어찌 이렇게 하셨는지.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다. 하늘아, 하늘아, 어찌 이리 만드시는고. 내가 문 밑에서 목 놓아 슬피 울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소조는 벌써 폐위되었으니 처자인 내가 어찌 편안히 대궐에 있겠는가. 세손을 밖에 그저 두어서 될지 어떨지 차마 두렵고 조마조마하여, 그 문에 앉아 대조께 상소하였다.
“마마, 처분이 이러하시니 죄인의 처자인 제가 편안히 대궐에 있기 황송합니다. 또 세손을 저리 오래 밖에 두면 죄가 더 무거워질까 두렵습니다. 이제 친정집으로 나가겠습니다. 천은으로 세손을 보존하여 주소서.”
가까스로 내관을 찾아 들이라 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오라버니가 들어왔다.
“마마, 동궁을 폐하여 평범한 서인이 되었으니 대궐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 본집으로 나가라고 하시어 가마를 들여왔으니 나가십시오. 세손은 남여를 들여오라고 하였습니다. 나가십시오.”
우리 남매는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나는 오라버니에게 업혀 청휘문을 지나 저승전 차비문에 놓인 가마로 갔다. 윤상궁이 함께 안에 타고 별감이 가마를 메었다. 허다한 상하 내인들이 다 뒤를 따라 쫓으며 통곡하였다. 만고천지간에 이런 정상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가마를 탈 때 가슴이 막혀 정신을 잃었다. 윤상궁이 나를 주물러 겨우 목숨이 붙었지만 오죽하였겠는가. 소조께서 궤 속에 들어가 홀로 외로이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궐 밖으로 나가야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하였겠는가. 하늘이 어찌 이리 만드시는지 원통하고도 원통하다.
감성분석 장면 하나
:남편을 죽이려는 시아버지를 바라보는 장면
: ‘공포’ + 절망
장면분석
영조께서 휘녕전에 좌하시고 칼을 안으시고 두드리시오며 그 처분을 하시게 되니 차마 망극하니 이 경상을 내 차마 기록하리오. 섧고도 섧도다. 나가시자 대조께서 크게 성난 성음이 들려왔다. 휘녕전이 성덕합과 멀지 아니하니 담 밑에 사람을 보내어 보니 벌써 용포를 벗고 엎디어 계시더라 하니 대처분이오신 줄 알고 천지 망극하여 흉장이 붕렬하는 지라.게 있어 부질없이 세손 계신데로 와 붙들고 어찌할 줄 몰랐더니 신시 전후 즈음에 내관이 들어와 밖 소주방 쌀 담는 궤를 내란다 하니 어쩐 말인고.
황황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궁이 망극한 줄 알고 문전에 들어가, “마마! 아비를 살려 주소서, 아비를 살려 주소서.”하니 대조께서는 “나라가!” 엄히 명하셨다. 그때의 정경이야 고금천지간에 없었다. 세손이 나가자 하늘과 땅이 맞붙는 듯, 해와 달이 깜깜한 듯하니, 내가 어찌 잠시나마 세상에 머물 마음이 있었겠는가.
심리분석
“동궁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는데 일월의 빛이 거듭 밝았으니, 이에 넉넉함을 주는 아름다움을 기쁘게 여기노라. 과연 내가 왕위에 올라 어려운 일이 많았다. 내 한 몸으로 홀로 중책을 받들었으니 언제나 두려운 마음으로 후사를 계승할 걱정이 있었는데 집안과 나라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여러 사람의 마음을 메어 둘 데가 없을까 염려되었고, 내 나이 점점 늙어 가니 선조의 대통을 전할 데가 없음이 두려웠었다. 태자의 궁문이 닫힌 지 거의 10년의 나머지에 다행히 하루아침에 아들을 점지하는 길사를 얻었다. 삼종의 혈맥을 잇게 되었으므로 내가 종묘에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고 파도의 온 백성이 모두 기뻐하니 종묘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세자의 탄생은 누구보다도 영조의 기쁨이었다. 또한 삼종의 혈맥을 보호할 수 있게 되어 종묘에 배알 할 면목이 서게 한 온 나라의 경사였다. 영조는 이 기쁜 마음을 교문에 담아 선포하였다. 늦은 나이에 얻은 세자가 일찍 잃은 첫 아들과는 달리 총명할 뿐 아니라 건강하였으므로 영조의 기쁨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귀한 것일수록 아껴야 한다는 삶의 지혜를 외면한 대가는 너무나 큰 비극을 초래했다.
세자는 훌륭한 성군이 될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내인들에게 맡김으로써 긍정적인 자질을 개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적으로 변모하게 되어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아버지 영조에게 비친 아들은 항상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나면 칭찬과 사랑을 주기보다는 꾸중과 화를 내는 날이 많아지게 되어 아들인 동궁에게는 영조가 자애로운 아버지이기 전에 자연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린 시절 형성된 부자간의 부조화는 해를 거듭될수록 그 골이 더욱 짙게 되어 훗날 크나큰 비극의 요소가 된 것이다. 또한 영조의 성격은 균형을 잃을 정도로 극단에 치우쳐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 영조의 편애를 한스럽게 여겼다. 좋고 싫은 마음을 너무도 분명히 드러냈던 시아버지가 그녀의 남편에게 보내는 마음은 무조건적인 미움이었던 것이다. 미움의 크기에 비례한 사랑이 존재하리라 믿고 또 믿었지만, 남편에 대한 시아버지의 미움은 날로 커지기만 했다. 혜경궁 홍씨는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시아버지의 마음이 남편을 향한 것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람일 뿐이었다.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마음속으로 담아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아버지 영조의 미움은 깊어졌고, 사도세자의 병도 깊어졌다. 혜경궁 홍씨의 남편인 사도세자는 옷을 입으면 견디지 못하는 병증을 앓고 있었는데, 마침내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는 그저 바라보고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시어! 하늘이시어! 차마 어찌 이리 만두십니까.”하고 하늘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상처투성이인 남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에 애꿎은 하늘만 원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시아버지 영조를 향한 원망스러운 마음으로 볼 수 있다.
생모가 영조에게 처분을 고할 때에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고 했듯이 혜경궁 홍씨도 이 모든 결과의 원인은 사도세자의 병으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러면 무슨 병이 있었기에 생부 손에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되었을까? 사도세자 참상의 원인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오던 것이 급기야는 입에 담기 어려운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상식을 벗어난 세자의 행동은 오랜 병이 누적되어 나타난 행동이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병증이 점차 심해진 원인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미움에 있다고 보았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은 풀리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이 이르게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는 오해의 골만 깊어졌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그녀의 남편에 대한 마음을 풀지 않았던 시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남편의 죽음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남편을 죽이려는 시아버지를 바라보며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공포감에 휩싸이게 된다. 남편의 죽음을 지시하는 시아버지가 원망스러울 뿐 아니라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아들에 대한 오해로 결국은 자기가 낳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으려드는 시아버지는 공포의 대상이며, 이것은 곧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죽음을 명하는 시아버지를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남편을 죽이려는 시아버지를 바라보는 혜경궁 홍씨의 감성은 공포로 가득했으며, 이것은 곧 삶에 대한 절망감으로 이어진다. 이때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하게 만드는 이는 가족이기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은 더욱 가중된다. 가까운 사람 사이이기에 깊은 상처를 가져오는 공포와 절망인 것이다. 남편을 죽이려는 시아버지를 바라보는 혜경궁 홍씨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모든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끼고, 한없이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면 둘
: 남편의 죽음을 바라보는 장면
: ‘절망’ + 비애·연민
장면분석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대조께서 칼을 두드리는 소리와 소조가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렸다. “아버님! 아버님! 잘못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라 하시는 대로 하고, 글도 읽고, 말씀도 다 들을 것이니 이리 마소서.” 내 간장은 마디마디 끊어지고 눈앞이 캄캄하니 가슴을 두드린들 어찌하겠는가. 당신 용력과 장기로 궤에 들라 하신들 아무쪼록 아니 드시지 어이 필경 들어가시던고. 처음엔 뛰어나오려 하시다가 이기지 못하여 그 지경에 미치오니 하늘이 어찌 이렇게 만드시는고. 만고에 없는 설움뿐이다.
심리분석
부친 영조에 의해 뒤주 안에서 죽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 사도세자를 바라보아야 하는 부인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을 에는 아픔과 함께 죽지 못하는 비통함을 혜경궁 홍씨는 절규하고 있다. 침묵하여 내면에 삭히고 잠재우기에는 너무 깊은 한이요 원통함이었다.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혜경궁 홍씨는 당시의 아픔을 한중록을 통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통탄스럽고도 통탄스럽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도 잔인한 것인가”, “통탄스럽기만 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글을 쓰려고 하면 눈물을 금할 수가 없고 말로 하려고 하면 소리를 먼저 삼켜야 하며 차마 붓을 먹에 적시지 못하여 이제까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사도세자는 이승에서의 짧은 삶 동안 극단의 영욕을 함께 하면서 괴로워했고, 이런 남편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가 바로 혜경궁 홍씨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픔은 곧 혜경궁 홍씨의 아픔이었고, 따라서 남편의 죽음은 곧 그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부친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영조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때가 늦었다. 사도세자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간곡히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런 남편을 지켜보는 혜경궁 홍씨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녀도 숨죽여 지켜보며 남편과 함께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부자사이의 얽히고 맺힌 마음을 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기 때문인지 영조의 마음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죽을 줄 알면서도 궤에 들어가는 사도세자의 마음, 또 그를 바라봐야 하는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을 것이다.
부자 사이의 갈등과 충격적 행위들, 그리고 중간적 위치에서 이를 조율하고 가슴 졸여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삶은 한스러움으로 설명할 수 있다. 뒤주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해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미워하면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주하고 원망해야 할 대상들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더 견디기 어렵고 안타까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입장에 서서 남편을 수용하고 이해해야만 하는 처지여야 했다. 하지만 때로는 시아버지인 영조의 입장에 서서 국명이라는 지엄함과 명분, 그리고 봉건적 가치관, 인륜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했다. 아내로서, 며느리로서의 혜경궁 홍씨가 겪어야 했던 갈등은 비극이고 한이었다.
아들을 미워하는 아버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아들, 혜경궁 홍씨는 그들 사이에 있었다. 부자간의 갈등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중간적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부자 사이를 조율하고, 때로는 가슴 줄이며, 그렇게 갈등을 지켜보았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을 테니 그 아픔을 짐작해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는 시아버지의 마음도 이해해야 했고, 남편의 마음도 이해해야 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바라보아야 했던 혜경궁 홍씨는 절망하는 것 외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두 부자를 위한 절실한 화해의 노력은 결국 성사되지 못하였고, 남편은 처참하게 뒤주 안에서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원만하고 화복한 관계를 바라고 바랐던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미약한 힘을 탓하며 크게 절망했을 것이다. 이것은 곧 남편, 어찌 보면 두 부자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어진다. 작은 오해가 점점 커져 결국은 비극적인 상황에 이르고 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연민과 비애의 시선이 교차하는 것이다.
한중록은 가장 가까운 사람 사이의 오해를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담아내고 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 얽힌 역사적 비극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삶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에게 소홀하게 대하는 것,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것인지를 혜경궁 홍씨의 마음을 통해 짐작하게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해가 쌓이기 전에 마음을 풀어내는 것,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살아야 한다고 혜경궁 홍씨는 전하고 있다.
감성&역사
사도세자는 왜 죽었을까?
영조와 정조는 조선 후기 개혁군주로서 역사상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1762년 폭염 속에서 뒤주에 갇혀 죽는 비운의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 해 세자가 내시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나경언의 고변이 있은 후, 영조는 세자에게 자살할 것을 명했다가 신하들이 만류하자 뒤주에 가두어 죽인 것이다.
사도세자는 과연 왜 이러한 운명에 처해졌을까?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 국왕인 영조 자신이었고 따라서 이에 대한 해명과 논란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료상으로도 이를 해명해줄 수 있는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못하고, 다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 기록만이 조금 남아있는 한계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이다. 따라서 <한중록>은 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혜경궁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기술한<한중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시각에서 다양한 검토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한중록>에서는 참변이 사도세자의 정신병 증세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사도세자의 홧증은 영조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는데,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자마자 저승궁으로 보내져 유모와 나인들 품에서 성장하여 부모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고, 자라면서 가끔 만나는 영조는 격노하여 자주 꾸중함으로써 세자를 두렵게 하였다는 것이다.
영조와 세자의 성격 차이는 부자관계를 악화시켰고,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세자가 15세부터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행하게 되면서, 정사를 처리할 때마다 영조의 눈치를 봐야하는 등 심리적 압박이 심화되었고, 그로 인해 세자의 홧증이 생겼다고 한다. 요컨대 세자의 죽음은 정신 질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혜경궁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중록>이 지어질 당시 혜경궁의 친정 식구들은 정치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그녀의 아버지 홍봉한이 사도세자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전적으로 정신병 때문이었고, 정신병의 원인은 부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치적 이유가 컸을 것이라 근래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나경언의 고변이 형조에 올려진 후, 형조 참의는 영의정이자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상의한 뒤 영조에게 알렸다. 영조는 나경언을 친국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세자의 비행 10여 조가 고발되었다. 그 전체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데, 국문한 내용이 적힌 공초 및 <승정원일기>의 기록 등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다만 <영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내용들이라 한다.
세자의 아들 인을 낳은 첩을 포함하여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 여승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것, 시전상인의 재물을 빌려 쓰고 갚지 않았다는 것,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다는 것, 평안도로 여행했다는 것 등이다.
이 가운데 그러한 비참한 죽음을 불러올 만큼의 사안은 평안도 여행이 아닐까 주목한 연구가 있다. 단지 폐서인되는 선에서 그칠 수 없었던 심각한 사안은 ‘역모’에 해당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평안도 여행은 ‘행역(行役)’이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군주가 그곳의 군대상황을 시찰한다는 뜻인 ‘순수(巡狩)’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역모’의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세자가 쿠데타를 도모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세자가 홍계희 일당의 흉계를 뒤집기 위해 가서 군대 시찰 내지 군대 요청을 하였는데, 이것이 역으로 이용되어 역모로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전반적인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원인이 살펴지기도 했다. 이는 영조의 정치적 입지 내지는 왕위의 정통성 문제와 연계된다.
숙종 후반에 인현왕후의 복위를 계기로 정치무대에 복귀한 노론 측은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을 사사시켰다. 반면 소론 측은 세자인 경종의 보호를 주장하고 장희빈을 구하려고 하였다. 장희빈을 사사시켜 경종과의 관계가 껄끄러웠던 노론 측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지지하였다. 결국 경종이 즉위하였으나 30이 넘도록 후사가 없자, 노론측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나아가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소론은 맹렬히 반대하였다.
소론측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으로 탄핵하여 정국을 주도하였고, 결국에는 소론정권을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 신축옥사(辛丑獄事)라고 한다. 다음해 목호룡(睦虎龍)이 노론 및 연잉군 측근 인물들이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고변하였다. 이 고변으로 8개월간에 걸친 국문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命)?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화를 입었는데, 이를 임인옥사(壬寅獄事)라고 한다.
이 두 옥사를 아울러 신임옥사(辛壬獄事)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평가 문제는 영조대에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는 과정에서도 계속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해 노론은 영조를 왕위계승자로 확립시키려했던 자신들의 입장이 옳았고, 그로 인해 화를 입었던 두 사건을 따라서 신임사화(辛壬士禍)라 했다. 반면 소론은 노론의 그러한 행위가 경종을 배반한 것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진행되었으므로 두 사건을 신임의리(辛壬義理)라 하였다.
영조는 즉위 후 원만한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할 목적과 특정 정치세력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는 약점을 만회하기 위해 탕평책을 펴나갔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불문하고 탕평책 동조자를 중심으로, 당파간 대립관계를 조절하며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영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즉위에 있어서 노론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다는 한계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노론은 영조와의 관계 속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당시 정국의 상황은 그 연장선상이었다.
사도세자는 노론의 독주와 영조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이에 정국을 바꾸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영조 왕위계승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민감한 사안인데, 이에 대한 세자의 입장이 달랐음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한편으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던 시기는 정국이 노론과 소론이라는 구도로 대립하는 것을 넘어, 노론 내부의 분열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새로운 정치적 구도 속에서 사도세자의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분명한 것은 세자가 영조의 정치관과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당시의 정치세력의 분화와 그에 따른 여러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었다는 데 원인이 있었다. 더불어 영조 자신도 그런 상황에서 불안한 왕위 계승을 하였다는 점이 중첩되어 이 불행한 사건에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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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유월에 세손 책례를 명정전에서 행하니, 엄숙히 숙성하심이 다 어찌 이르겠는가. 겉으로 보면 당신 몸이 정사를 듣고 처리하시는 왕세자이시고, 아들이 여덟 살이 되어 세손 책례를 지내니 숙세 태산 반석 같고 무슨 근심이 있을까. 하지만 갈수록 하늘을 우러러 물을 길이 없었다.
가을과 겨울에는 성혼하신 후 성심이 자연 한가치 못 하셔서 일이 적으셨다. 겨우 그 해를 보내고, 경진을 당하니 그 해는 병환이 더 극심해졌다. 대조께서 또 책망하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하시니, 격화는 점점 성하시고 의대 병환이 더 극심하셨다.
홀연히 지나가지 않는 이가 보인다 하셔 다니실 때는 미리 사람을 내어 놓아 금하고, 지나실 때 혹 미처 피하지 못하여 얼핏이라도 뵈면 그 의대를 못 벗으시고, 비단 군복 한 짝을 입으시려면 군복 몇 짝을 지어 무수히 불에 태워 사르시고 겨우 한 벌을 입으시니, 기묘 경진 간에 군복 지어 없이한 것이 비단 몇 궤인 줄 알리오. 조금도 범연한 비단을 못하니 그때 내 간장이 어찌 상했던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월 이십일 일이 태어나신 날이니 그 날을 예사로이 보내시면 좋으련마는, 부디 그 날 차대를 하시거나 춘방관을 부르시거나 하여 동궁 말씀을 하셨다. 그 일로 큰 슬픔이 되시니 갈수록 섧고 애달파 하셨다. 어느 해에 탄일을 예사로이 잡사오신 해가 있을까. 그 날은 굶으시고 궁중이 온종일 어쩔 줄 몰라하며 지내니 어찌 팔자 그토록 하시던고. 서럽고도 서럽다.
경진 탄일에 또 무슨 일로 격화가 대단히 오르셔 그날부터 부모 위하시는 공경하시는 말씀을 못하시고, 상말로, 천지를 분리하지 못하듯이 노엽고 서러워 하셨다.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살아서 무엇 할까.”
선희궁께 공손하지 못한 말을 많이 하시고, 세손 남매 문안하니 크게 소리 지르시며,
“부모 몰라보는 것이 자식은 알아보랴! 썩 물러가라.”
하시니 아홉 살, 일곱 살, 다섯 어린 아들들이 아버님 생신이라 인사하여 뵈려 하다가 엄한 호령을 듣고 크게 놀라던 모습이 오죽하리오. 병환이 심하시되 나에게나 괴로이 구셔도 어머님께는 그리 못하시더니 그 날에는 병환을 감추지 못하셨다. 전일 선희궁께서 비록 병환 말씀을 들으셔도 혹 과한 말인가 의심도 하시다가 처음으로 보시고 크게 놀라 아무런 말씀도 못하셨다.
병환이 점점 깊어지셔서 칠순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하시고 자녀를 사랑하시던 것을 잊으시고, 그리하셨다. 선희궁 어머니의 놀란 마음과 어린 아들들이 놀란 것이 불기운 식어 온기 없는 차디찬 채 같았다. 저런 광경이 세상 어디에 있으리오.
<후략>
□ 검수위원
김현룡(건국대학교) /신동흔(건국대학교) / 김종군(건국대학교)
*원천자료 : <한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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