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냉전 희생의 섬, 제주도
제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냉전 체제가 구축되어 가던 1948년, 한반도의 남 쪽 섬 제주도에는 광란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빨갱이의 섬'으로 낙인찍힌 채 자행된 대량 학살과 인간성 유린은 우리 민족의 최대 참극인 6·25 전쟁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만도 제주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 이상이었는데 이는 6·25 전쟁 당시 희생당한 남북 한국인의 비율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4·3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다.
광복 공간에서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염원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고립 무원의 섬'이라는 이유로 제주도는 냉전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50여 년 동안 분단이라는 왜곡의 역사 벽에 갇힌 채 4·3은 제주인들의 삶을 억압하여 왔다.
Ⅱ. 4·3의 배경
제주 4·3은 한마디로 미군정 아래에서 한민족이 안고 있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보려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분할되던 냉전 상황과 그리고 제주도의 정치·경제·사회적 여건, 그리고 저항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살펴야 한다
제주도에는 1920년대부터 제주∼대판간 직항로가 개설되어 군대환(君代丸) 등의 정기 여객선이 운항되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자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광복 직후의 제주는 25%라는 전국 최고의 인구 변동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돌아온 사람들은 일본에서의 치열한 삶 속에서 일정한 민족 의식과 사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대학 교육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많았다.
광복 직후 건국 준비를 위해 인민위원회를 만들고, 마을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당시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적인 삶을 바탕으로 중앙과는 다르게 좌와 우의 대립 없이 온건하게 일을 추진해나갔는데, 항일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지역 주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원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으며,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전까지는 미군정과의 협조도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뜨거웠던 제주도 교육 열기는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중등 학교 10개소, 초등학교 44개소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B.Cumings)는 1947년 2월 시점에서 전국 각도 15개 군의 15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초등학교 이상의 졸업생 비율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북제주군이 35.7%로 교육 수준 1위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광복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은 곧 무너지기 시작했고 미군정에 대한 불만도 서서히 확산되고 있었다. 게다가 6만 귀환 인구에 따른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300여 명의 희생, 대흉년과 미곡 정책의 실패 등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특히 일제 경찰의 미군정 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군정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47년 3월 1일 제주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는 3·1절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시위 후 구경을 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군정 당국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6명의 사망자가 초등 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시위를 보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 인한 발포였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4·3의 역사적인 배경을 고찰하는 입장에서 광복 직전의 제주 상황을 살펴보겠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광복'을 뜻했다. 일제는 제2차 대전 말기에 오키나와까지 점령당하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 보루로 삼고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 정예군 7만 명을 이동 배치했다. 소위 결 7호 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미군이 제주에 상륙할 경우 7만 일본군이 한라산을 중심으로 최후까지 유격전을 벌이며 옥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당시 20만 명의 제주도민을 산중으로 끌고가 최후 결전의 소모품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군 정보팀은 미군의 제주 상륙 시기를 9∼10월, 상륙 병력을 2∼5개 사단으로 예측했다. 제2차 대전이 한 달만 더 연장되었어도 제주도는 강대국의 전쟁터로 그야 말로 불바다가 될 뻔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광복을 맞았기에 제주도민의 감회는 본토민들의 그것보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발생한 3·1절 발포 사건은 제주도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그러나 군정 당국은 이 발포를 정당 방위라 주장하면서 민심 수습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사건 열흘 뒤인 3월 10일,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관의 처벌, 경찰 수뇌부의 인책 사임, 희생자 유족 보상 등을 요구하면서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이 파업에는 도청을 비롯한 도내 156개 관공서, 국영 기업들도 참여하였다. 도내 전체 학교가 항의 휴교를 했고 상점들도 동참해 문을 닫았다. 심지어 경찰관들마저도 파업에 동참하였으며 도지사 박경훈도 항의성 사표를 제출할 정도였다.
여기에 지방 신문들도 희생자 조의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며 파업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 제주도민 전체가 미군정의 실정에 분노하고 있었다. 미군 정보팀이 "총파업에는 경찰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좌·우익 세력이 공히 참가하고 있다"라고 보고할 정도로 제주도 전체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했다. 미군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도민 감정의 격화와 이런 도민 감정을 선동하여 증폭시킨 남로당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러면서도 '경찰의 발포 행위'는 애써 무시한 채 '남로당의 선동' 부분에만 치중하여 사태 해결을 모색하므로써 강공 정책을 추진해 갔다.
미군 조사단이 제주를 떠난 다음날부터 경무부장 조병옥과 응원경찰대가 제주도에 들어오고 타 지역 수사 요원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 수사대가 설치되었다. 이 무렵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미군정은 외부 세력을 끌어 들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토에서 온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을 했고 심지어 금품을 갈취하기 위하여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내는 등의 백색 테러를 계속하였다.
검속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4·3 직전까지 1년간 2,500명이 구금되었다.
특히 1948년 3월에는 조천 지서와 모슬포 지서 등지에서 3건의 고문 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사회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그리하여 뭔가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위기 상황이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제주도의 상황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치닫던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심각하게 돌아갔다. 좌파뿐만 아니라 김구와 김규식 등 양심적인 우파 및 중도 세력들도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으며 이처럼 분단을 막아보려는 분위기는 당시 제주도민 사이에도 조성되어 있었다. 남로당 제주지부는 미군정에 불만이 많았던 민심에 부응하여,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Ⅲ. 4·3의 전개와 인명 피해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경 김달삼을 중심으로 조직된 500여 명의 무장대가 11개의 지서와 서청, 대청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면서 무장 봉기가 시작되었다.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단선·단정 반대', '응원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주장하며 일어난 것이다. 미군정은 이 사건을 초기에는 치안 상황으로 간주, 4월 5일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는 한편, 본토 경찰 1,700명의 제주 파병을 승인하고 서북청년회를 증파했다. 그런데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횡포가 심해 도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그 결과 무장대 세력이 더욱 커져 사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 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인해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여 '선선무 후토벌'을 원칙으로 정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 이 결과 1948년 4월 28일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연대 정보참모 이윤락 중위, 그리고 무장대 측 군사총책 김달삼 등이 만나, '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 청년단의 조작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과 5월 3일 기습사건 등이 잇달아 발생, 평화 협상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5월 5일 군정장관 딘(W.F.Dean) 소장은 제주도에 와서 최고 수뇌회의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평화적인 해결 방안을 건의하다 경무부장 조병옥과 충돌한 김익렬 연대장을 전격 해임하였다. 이로써 무장대 측과의 평화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5월6일 김익렬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했고 수원에서 창설된 11연대가 제주에 추가로 파견되었다.
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의 경우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 거부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은 제주도를 눈의 가시로 여겨 5·10 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병력과 응원경찰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증강된 군병력을 총괄하기 위하여 5월 중순 브라운 대령(미군 20연대)을 제주지구 미군 사령관으로 파견하여 경비대, 해안 경비대, 경찰과 미군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원인 치유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진압 일변도로 몰고 나갔다. 신임 박진경 연대장도 대대적인 토벌 위주의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폭도 아닌 폭도를 잡아들이는 부작용을 일으켜 제주도민의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도민의 반감은 저항의지로 혹은 두려움으로 나타나 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1948년 5월 20일에는 박 연대장의 토벌정책에 반기를 든 41명의 경비 대원들이 모슬포 연대 본부에서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 탄약 5,600발을 갖고 탈영, 산쪽에 가담함으로써 무장대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딘 장군은 박진경 연대장의 강경 토벌책을 오히려 칭찬, 6월초에 직접 내려와 대령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박진경의 강경 토벌은 부하들의 반발마저 일으켜 6월 18일 부하 문상길 등에 의해 암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 토벌대에 충격을 주었다.
이후 제주 사태는 1948년 8월까지 잠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무장대 측은 지하선거와 해주대회 참여에 주력하였고 이승만 세력은 남한정부 수립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1948년 10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토벌의 강도가 다시 강화되었다. 남과 북에 적대적인 정부가 출현함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넘어 정권에 대한 강한 도전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남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는 평북 출신의 극우 인물을 새로이 제주도경찰국장에 임명하고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본토의 군병력을 대거 제주에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신임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지역을 적성 지역으로 규정, 이 지역에서 보이는 자는 폭도로 인정, 무조건 총살시킨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포고령에 따를 경우 해안 마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중산간 마을이 적성 지역에 해당한다.
이어서 10월 18일에는 해군 함정 7척을 동원하여 다른 지방과의 뱃길을 차단하고 제주도 포구의 모든 배에 출어 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제주도는 완전히 외부로부터 차단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제주도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에 파병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4·3 토벌을 거부하며 여수에서 총부리를 돌려 이른바 '10·19 여순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여수 10·19 여순사건은 좌익 세력 탄압의 빌미가 되어 이미 계획된 제주 초토화 작전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고 결국 참혹한 양민 학살을 재촉했다. 초토화 작전을 원활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토벌대는 10월 후반기에 제주 읍내 유지들에 대한 일제 검속을 강행하였다.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천막 수용소에 대부분의 유지들이 소환되면서 제주 읍내는 일순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법원장이 연행되었고 현직 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마저 끌려가 즉결 처분되었다. 제주중학교 초대 교장(현경호), 제주신보 편집국장(김호진)이 총살되었고, 제주도청 총무국장이 서북청년회에 의해 고문치사 당했다. 게다가 서북청년회는 당시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하기까지 했다. 11월 초순에는 9연대 장병들 중 제주도 출신자를 중심으로 100여 명이 재판도 없이 처형되었다. 11월 17일에는 제주지역에 불법적인 계엄령마저 선포하여 초토화 작전을 집행하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였다.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학살이 행해졌다. 4·3 전 기간 동안의 사망자 수는 3만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반해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기 전인 1948년 9월말까지의 사망자 수는 대략 1,000명 미만으로 알려져 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질렀다. 소개령이 내려졌는데도 병자, 노인, 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은 자행되었으며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진 곳도 많았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이른바 '삼진정책(三盡政策)'은 제주도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하였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미라이 학살' 보다 더 참혹한 양민 집단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 1948년 12월 14일 밤 표선면 토산리에 들어 닥친 토벌대는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연행한 후 죄의 유무도 묻지 않고 모조리 총살했다. 그리고 나서 얼굴이 고운 여자들을 골라 성폭행한 후 역시 죽였다. 그때 죽은 사람은 157명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토산리 마을 학살).
* 1948년 12월 22일 토벌대는 표선면 가시리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호적을 일일이 대조시켜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는 집을 골라내어 '도피자 가족'이라고 몰아 76명을 집단 학살했다.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으면 토벌대는 그 부모, 형제를 대신 학살했다. 이것을 '대살'이라고 불렀다(가시리 마을 학살).
* 집단 학살(genocide)은 중산간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1949년 1월 17일 해안 마을인 북촌에서 가장 비극적인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다. 세칭 '북촌 사건'의 발단은 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 11시경 2개 소대쯤 되는 무장 군인들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를 대면서 북촌 마을을 포위, 300여 채의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 1,000여 명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차례로 인근 밭으로 끌고 가서 총살하였다. 이 집단 양민학살은 늦게 도착한 상급 지휘자의 명령으로 일단 끝났지만 그 다음날 함덕으로 소개된 주민들이 다시 처형되었다. 결국 이틀 사이에 북촌 주민 400여 명이 억울하게 죽었다. 이와 같은 '보복성 집단 학살'은 비단 북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북촌 마을 학살).
미흡하게나마 조사된 제주도 의회 신고 자료에 의하면 마을별 희생자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봉개리 591명, 아라리 569명, 노형리 560명, 가시리 511명, 북촌리 479명, 삼양리 453명.... 이처럼 마을 별 사망자 숫자는 끝이 없을 정도이다.
초토화 작전으로 무장대는 빠르게 약화되어 갔다. 이때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무장대와 토벌대로부터 처벌을 피하고 싶은 주민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무장대에 의한 주민 학살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초토화 작전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이승만 정부는 1949년 3월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 4·3 마무리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토벌대가 5만여 명의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대거 동원, 산을 빗질하듯 쓸어 내리게되자 쇠약했던 무장대는 거의 궤멸 상태가 되었다. 무장대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1949년 4월 9일 이승만이 제주를 방문하고 5월 10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는 등 정부의 통치력이 과시되었다. 5월 중순에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해체되고 1개 대대만이 4·3진압에 나설 정도였다. 더구나 6월초에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의 저항은 거의 소멸되었다. 살아 남은 양민들은 토벌대의 눈치를 보면서 일상적인 삶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집단 학살은 다시 자행되었다. 4·3 봉기에 연루되어 육지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북한군이 들어오기 전에 대부분 처형되었고(1950년 7월) 훈방되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1950년 7월∼9월).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사상이 의심스럽다', ' 경찰과 다투었다', ' 군경에 비협조적이다', '3·1절 시위 발포 사건과 관련하여 총파업에 가담하였다', '4·3 때 가족 중 누군가 죽었다' 등 지극히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인 판단으로 연행되어 죽어간 것이다. 이러한 비이성적인 사상 청소 작업으로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 수는 약 1천명 정도가 된다(경찰서 별로 제주시 400∼500명, 서귀포 250명, 모슬포 250명, 성산포 6명). 백조일손지묘에 묻힌 사람들도 이때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공권력에 의한 집단 학살의 광기 속에 신음하던 제주는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를 폐지함으로써 4·3 발생 6년 6개월만에 외면상 평시 체제로 환원되었다.(최후의 무장대원 오원권은 송당 지역에서 1957년에 생포됨)
3 만 여명의 무고한 양민이 죽음을 강요당한 제주 4·3은 단순히 제주 지역사로 치부될 수 없는 대사건으로,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리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다. 친미 반공 국가를 구축하려고 했던 미국과 미국이라는 외세에 기대어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이승만 세력에 의해 제주도는 냉전 체제의 희생양으로 철저하게 짓밟혔던 것이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이(제주도의회의 자료에 의하면 83% 이상이 토벌대, 11% 정도가 무장대에 의한 희생이었음) 이를 말해 주고 있다.
Ⅳ. 제주 4·3의 성격
4·3은 해방 정국하의 통일조국건설운동이다. 그리고 미완의 해방을 진정한 해방으로 전환시키고자 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와 같은 성격은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봉기 목적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 도식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지도부를 제외한 대다수 일반 민중들이 실제 이처럼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과장하는 것은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깊은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때문에 세련된 정치의식은 갖지 못했을지라도 생활 속에서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즉 항쟁 지도부는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통일조국건설만이 민중의 고통을 더는 지름길임을 제시했고 민중은 이들을 믿고 따랐던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4·3은 강요된 저항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조건에서 이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구조가 이를 말해준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 이후 다음해 4·3 봉기 이전까지 약 2,500명이 구속됐던 상황만으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마을의 지도자급 청년이라면 거의 대부분 체포되었다는 점을 의미하며 이는 곧 제주도민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북한의 사주 혹은 남로당의 사주였다는 주장은 이미 그 근거를 잃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중을 단순히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천박한 역사인식을 드러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4·3은 제주민중의 수난사이다. 4·3을 역사적 사건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도 엄청난 인명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3만 명이란 숫자는 통계 수치로는 간단할 지 모르나, 한 사람 한 사람 그 가족의 아픔과 함께 가슴으로 다가간다면 이러한 대량학살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혹자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모한 무장투쟁 노선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도부의 소영웅주의적 행태와 민중들의 자발적 투쟁을 동일하게 매도해서는 안된다. 패배한 역사였기에, 그들이 봉기할 수밖에 없었던 모순구조를 무시하고 4·3봉기를 비난만 한다면, 과연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전봉준과 농민군은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수난사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맥없는 넋두리나 양비론이 아니라 대량학살을 자행한 반인륜적 세력을 명확히 지적해내는 일이다.
Ⅴ. 맺음말
한동안 4·3은 누구도 말해선 안 되는 사건이었다. 4·19 혁명 직후 겨우 일기 시작한 진상규명운동은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 정변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4·3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옥고를 치렀고, 4·3에 관한 글은 판금되거나 필화사건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군부독재정권은 4·3을 은폐 왜곡했고 철저히 금기시 했다. 그에 따라 오랜 기간 제주도민들은 4·3을 입에 담지도 못했고 심한 허무주의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 시달려야만 했다.
유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부모가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는 이유 하나로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장래가 막혔다. 깡그리 불태워져 잿더미가 된 마을로 돌아온 후 굶주림에 벗어나기 위해 맨손으로 척박한 땅을 일구며 몸부림쳤던 것도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고립 무원의 섬에서 발생한 이 처절한 학살극에 대해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는 왜곡된 내용만을 전달하고 있을 뿐이며 언론도 오랫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형성된 민주화 분위기 덕분에 비로소 진상규명운동이 다시 시작됐고, 이로써 일부나마 겨우 국민의 관심을 얻게 됐으니, 도민들에게 그간의 세월은 '아무도 달려와 주지 않았던 40년'이었다. 1989년 제민일보 4·3 취재반의 4·3 기획연재 및 제주4·3 연구소의 발족은 4·3 진상규명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에 비해 직접 조사 활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93년 제주도의회에 '4·3 특별위원회'가 설치되어 피해자 신고작업을 시작했으며, 1997년에는 각계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제주 4·3사건 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00년 1월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었다.
4·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정부와 미국이 비밀 자료를 당당히 공개해야 한다. 미군이 한국군의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초토화작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비밀문서 공개는 무엇보다 필요하며 정부가 가진 4·3 관련의 모든 자료 역시 공개되어야 한다. 또한 국회와 정부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 작업과 명예 회복, 위령 사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적절한 보상 및 지원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만이 지난 세월 응어리진 도민의 마음과 말문을 활짝 열고 화합의 시대, 평화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될 것이며 4·3의 한을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냉전 이데올로기의 벽이 완전히 무너지고 남북이 통일될 때, 단선·단정에 반대한 상징적 사건인 제주 4·3이 통일조국건설운동으로서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3 취재에 10년 세월을 오롯이 바친 제민일보 어느 기자의 글에 실린 희생자의 아픈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가 용서와 화합의 증언으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난 어릴 적부터 한번도 악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가족을 죽인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지도 않습니다. 죄가 있다면 학살을 명령한 이승만에게 있지요. 그런데 억울한 한은 풀어야 할 게 아닙니까. 요즘 보니까 비행기 사고가 나면 뼈라도 건지고 하다못해 그곳 흙이라도 담아오던데, 나는 남편이 묻힌 장소를 정확히 모르니 그조차 못해봤습니다. 난 텔레비전 연속극은 재미가 없어서 안 보지만 뉴스는 꼭 봅니다. 정치가 잘돼 죽기 전에 억울한 한을 풀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 제주사랑 역사교사 모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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