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사본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
차 례
서론: 건전한 비평의 토대
I. 필사본(筆寫本) 시대의 사본
1. 필사본의 형성
2. 구약 사본과 고대 역본(譯本)들
3. 신약성경 사본의 계열(系列)
II. 인쇄본(印刷本) 시대의 사본
1. 히메네스의 「여러번역 대조성경」
2.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3. 스테파누스의 헬라어 성경
4. 베자의 헬라어 성경과 텍스투스 리셉투스
III. 비평판(批評版) 헬라어 성경 시대
1. 비평본문 시대
2. 원문으로부터의 번역
결론: 사본의 정통성(正統性)의 기준
1. 시기적으로 사도시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2. 여러 다른 사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3. 비평 연구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주요 참고자료
서론: 건전한 비평의 토대
비평의 목적은 건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아카데미즘의 향상을 도모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의 비평풍토는 아직 여기 만큼 성숙되지 못해서 건전한 비평보다는 감정적 비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논자는 지난 십여년간 여러 보도 매체를 통해 논자의 교리적 신학적 견해에 대해 비난성 반론과 단죄를 받아왔다. 귀신론을 주장하는 이들로부터는 "인본주의자"라는 비난을, 교회론과 구원론에 대한 나의 변증에 대해서는 "이단 옹호자," 또는 "이단"이라는 단죄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신약성경의 여러 사본 중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 또는 "수용본문"(受容本文)이라고 불리는 사본을 옹호하는 소위 "텍스투스 리셉투스 옹호자"들과 「흠정영역성서」(欽定英譯聖書, King James Version) 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킹제임스주의자"들로부터 수년동안 여러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 공격과 비난을 받아왔다.
이 논문에서는 "텍스투스 리셉투스 옹호자," 또는 "TR 옹호자" 라는 말과 "킹제임스성경 주의자," 또는 "KJV 주의자" 라는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그들은 성경과 사본에 대한 논자의 신학적 견해를 비판하고, 논자가 대한성서공회의 개역성경 개정감수 작업에 참여한 것을 문제삼아 대한성서공회와 개역개정판 성경 자체와 그 일에 참여한 학자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선 이들이라며 비판했다. 논자는 신학대학에서 교리를 강의하는 교수로서 인터넷 사이트 등 독자가 제한되지 않은 매체를 이용한 일방적인 비판은 수용하기 어려웠다. 성숙한 비평은 문제의 핵심에 대한 학문적 견해를 피력 또는 변증하는 것이지, 문제의 근원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개인의 인격과 사상에 대해서까지 왜곡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논자와 교리 논쟁을 했던 이들과는 그런 일이 있은 후, 직간접적인 대화나 "의견 주고 받음"이 있어서 조금씩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으나, TR 옹호자들의 경우는 그런 일을 전후해서 나와는 단 한번의 대화도 없었고 사본에 대한 의견 교환도 없었다. 나의 학생들 가운데는 테스투스 리셉투스 옹호자들의 이론에 동조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사본의 정통성에 동의하는 학생들도 간혹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학생들에게 사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사본을 연구하는 공평하고 올바른 학문적 접근법을 가르치기에 여간 힘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판적인 글을 읽은 사람들도 적지 않아서 해명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모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 논문을 통해 신약성경 헬라어 사본의 정통성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하고자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성경의 본문비평은 본문을 분석해서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본문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부언해두는 바이다. 이 논문은 학술적인 연구라기 보다는 평신도 지식인들과 대학원 과정의 연구자들을 위하여 사본과 "책으로서의 성경"에 나의 견해를 이해하기 쉽게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I. 필사본(筆寫本) 시대의 사본
성경은 기록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앉아서 한꺼번에 쓴 책이 아니라, 모세 시대로부터 사도 요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약 천오백년, 또는 천삼백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각각 다른 지역에 살던 다양한 직업의 소유자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이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사본(寫本)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1. 필사본의 형성
지금까지의 발견과 연구에 의하면, 성경은, 원기록자들이 남긴 원본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이와 잉크가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의 각 책들은 대부분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 기록되어서 교회에 회람되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파손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신자들은 그것이 낡아지기 전에 개인적인 소장을 목적으로 다른 종이에 손으로 베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단순히 개인적으로 소장한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며, 바로 이러한 동기와 노력이 오늘날 많은 사본을 남기게 하였을 것이다. 1450년 쿠덴베르그(Johannes Gutenberg)가 인쇄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보존되었다.
AD 313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밀란 칙령을 내림으로써 박해는 끝나고, 330년에는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콘스탄티노풀로 개명하였다. 황제는 새 수도 콘스탄티노풀의 교회들이 사용할 성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듬 해인 331년에 가이사랴의 감독 유세비우스(Eusebius)에게 필경사들을 동원하여 50권의 사본을 제작하게 하였다. 이것은 아마 맛소라 서기관 이래 단체적으로 사본을 제작한 최초의 거사일 것이다.
중세 수도원 시대에는 성경을 필사하는 것을 전문으로한 수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의 경우 한 줄을 읽고, 글자수를 세고 함께 앉은 이들이 한 줄을 다 기록한 후에는 쓴 것을 소리내어 읽고 글자수를 세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한 글자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값비싼 양피지라고 할지라도 화덕에 넣어 불태워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보존하려는 그들의 희생적 결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약성경 사본으로는 파피루스가 98개, 대문자로 쓰여진 것이 301개, 소문자 사본이 2,829개, 성서 일과[표] 2,200개 등 약 5,500개에 이른다.
Nestle-Aland, New Testament Greek, 27th ed. append., 684-713. 이 NTG에는 98개로 기록되었으나, 같은 본문을 사용한 UBS의 GNT preface, 9쪽에는 97개로 기록되었다. 말씀보존학회가 1989년에 펴낸 「희랍어 표준원문에서 직역하고 정통교리에 준한: 새성경」의 서문에서는 파피루스 88, 대문자 필사본 274, 초서체 필사본 2,795, 설교문(성서일과표) 2,209 본, 도합 5,366 본으로 소개되었다. 사본의 숫자는 발견 연도와 부분적 사본의 인정여부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Robertson은 사본의 수에 대한 Kenyon과 Doboschuetz의 통계를 비교하면서 아무도 자신의 견해만이 옳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통계는 1912년과 1923년 사이의 변화를 보여준다:
Kenyon(1912년) Doboschuetz(1923년) 증감
Papyri 14 32 +18
Uncials 168 170 +2
Minuscules 2318 2320 +2
Lectionaries 1565 1561 -4
4065 4083 +18
A. T. Robertson, [신약성경 본문비평 입문] An 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Nashville: Sunday School Board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 1925), 69; F. G. Kenyon, Textual Criticism of the N.T., (N.p. 1912), 129; E. Dobschuetz, In Nestle's Einfuehrung in das Griechische Neue Testament, (verte Aufl., 1923), 85.
이들 사본은 AD 8세기까지는 인쇄체 대문자(Uncials)로 기록되고 AD 9세기부터는 소문자(Minusculs)로 기록 되었고, 초서체(Cursive)로 쓰여진 성서일과(Lectionary) 역시 9, 10세기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사본의 형태는 두루마리형(Scroll)과 공책형, 즉 코덱스형(Codex)으로 되었으며 코덱스형의 크기는 사본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평균 37×33cm 정도이다.
필사자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쓴 작업은 온전하지 못해서 5,500 개에 이른 사본 중 서로의 낱말과 문장이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곱틱어, 라틴어, 시리아어 등의 고대어로 번역된 약 8,000개의 성경들도 수많은 차이가 있다. 역본들과 사본과 사본 사이의 차이점을 합하면 모두 30만여 곳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을 모두 오류(誤謬)나 오역(誤譯)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거기에는 소위 "비의도적인 오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번역자들이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마음에 그리면서 "아버지"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아브"( )를 때로는 "아비"로, 때로는 "부친"으로, 때로는 "부모"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본에는 "예수"로 기록되었고 다른 사본에는 "그리스도"라고 된 것을 필사본이나 번역본에서 어떤 한 사본의 것을 선택하지 않고 두 내용을 나란히 적어(竝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후자는 "본문결합"(Conflation)이라는 비평어휘로 불린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선택의 문제와는 달리 성경 본문의 내용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면: (1)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열왕기하 8:26에는 20세로 기록되었고 역대하 22:2에는 42 세로 기록되었다. 이것은 열왕기의 기록이 맞다. 만약 역대하의 기록대로 아하시야가 42세에 왕위에 올랐다면 40세에 죽은 아버지(왕하 8:17)보다 2년 먼저 태어났어야 했??. (2) 마태복음 10:9-10은 전도하러 나갈 때는 금, 은, 동, 주머니, 두 벌 옷과 지팡이를 가지지 말고 입은대로 가라고 했으나, 마가복음 6:8은,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라고 하여 지팡이는 가지고 가라고 했다. (3) 사무엘하 8:4은 다윗은 한 전쟁에서 마병 일천 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았다고 했으나, 역대상 18:3은 다윗이 병거 일백승과 기병 칠천과 보병 이만을 빼앗았다고 했다.
또한 문맥이 일치하지 않는 기록도 많다. 그 중 사무엘 상 17:31-58 사이에 기록된 사울왕과 다윗의 만남의 경우를 검토하면, 다윗이 사울 앞에 섰고(31절), 사울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하고 축복하고 자신의 갑옷을 다윗에게 입혀주었으나(37-38절), 55절에는, 다윗이 출전할 때 사울이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하고 물었고, 아브넬은. "왕의 사심[생명]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대답했다
"본문충돌"과 명백한 기록 오류로 보이는 곳이 신약에도 나타난다.
"본문충돌"(Conflict)이란 말은 논자가 독자적으로 사용한 말이다. "모순"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않으면서도 내용이 상반되는 것을 일컫는 어휘로 선택했다.
마태는 가룟 유다가 목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했으나(마 27:5), 누가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나와 죽었다고 기록했다(행 1:18).
어떤 원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번역된 내용이 서로 완전히 다른 곳도 있다. 마태복음 21: 28-31에서, 아버지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 하라는 지시를 받은 형제의 반응도 원문에 따라 다르게 번역되었다. 개역성경과 새번역과 킹제임스역, 개역개정판은 아버지의 말씀에 맏아들은 "예"라고 대답 하고도 가지 않았으며, 작은 아들은 "아니오"라고 대답하고서도 뉘우치고 가서 일했다고 되었으나;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천주교 200주년기념 신약성서, [미국]개역표준역(RSV), 리빙 바이불(LB), [미국]새개역표준역(NRSV) 등은 맏아들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으나 가서 일했고, 둘째는"예"라고 대답했으나 가지 않았다고 번역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RSV는 Eberhard Nestle의 Novum Testamentum Graece 21판을 text로 사용했다. 번역이 원문과 달리, 정황에 따라 옮겨진 것도 있다. 즉, 같은 본문을 가지고도 반대로 번역한 것이 있다는 의미다. UBS의 GNT 3판의 본문은, 맏아들이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고도 나중에 뉘우치고 갔다고 되어있는데 ( , ), 정작 GNT 3판을 근거로 개정한 「개역개정판」은 「개역한글판」과 마찬가지로, 맏아들이,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29절)라고 되어 있고; Nestle의 NTG 21판의 본문은, 맏아들이 가겠다고 하고서 가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 ), NTG를 text로 번역한 RSV에는 원문과는 달리, "I will not'; but afterward he repented and went" 라고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사본에서 원문의 글자를 잘못 쓴 곳도 있다. 로마서 5:1의 "화평을 누리자"는 단어는 "에코맨"( )이어야 하는데 "화평을 누린다"는 의미의 으로 잘못 필사되었다. 즉, "오메가"를 써야 할 자리에 "오미크론"을 써버린 것이다. 그러나 번역판에서는, 오기(誤記)를 알고 모두 "화평을 누리자"로 고쳐 번역했다. 또, 마태복음11:16의 "친구들"은 "헤타이로이스"( )라고 써야 되는데 이것을 "다른 것"이란 의미의 "헤테로이스"( )로 잘못 기록했다. 이번에도 역시 번역자들은 오기를 알고 "친구들을 {불러]"로 바로잡았다.
본문비평은 바로 이런 것을 바로잡아 나가는 작업이다. 그러나 잘못 기록된 것이 아무리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본문을 직접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장치"(Appratus)라는 것을 통해서 각주(脚註)에 그것을 설명해 둔다.
신약성경에는 심지어 본문이 아닌 것이 본문으로 잘못 기록된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베데스다 못에 가셨을 때의 기록(요5:3하-4) 중에: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던지 낫게 됨이러라]"는 내용은 성경의 본문이 아니라, 성경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기록자가 참고로 기록해놓은 것을 본문 속에 넣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본문비평에서는 이 구절을 함부로 삭제하지 않고 그 내용의 앞뒤에 꺾쇠([ ]) 표시를 해두었다. 이 꺾쇠 표시는 그 부호 안에 있는 내용이 중요한 사본에 기록되지 않았다든지 혹은, 원본과 관련된 문제로 신빙성이 부족한 것을 표시하는 기호이다.
사본의 오류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사본의 영감성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영감은 성경을 기록하는 이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계시였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주어지는 일반적인 계시가 아니었으므로 사본을 기록하는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만약 필경사들에게도 영감이 주어졌다면 오늘날의 사본이 현재와 같은 차이와 독특성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며 하나의 사본만 있어야지 5,500개에 달하는 각각 다른 사본이 존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의 초기 사본들은 대부분 성경을 기록해서 사본을 만들어 후세에 남긴다는 생각보다는 사도들이 쓴 예수의 가르침을 항상 가까이 두고 읽기 위해 개인적으로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정확도에는 훈련된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맛소라 성경(구약)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신약성경 27권이 정경(正逕)으로 결정된 것이 AD 393년 힙포(Hippo)에서였고, 그것이 불변하는 결정이라고 확정된 것이 397년이었으므로, 최소한 그 때까지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사도시대 이후에 기록된 수많은 문서들을 단지 성문서(聖文書)라고만 생각하고 기록해두거나 읽었을 것이다. 성경은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기록하고 보존하는 과정에서 많은 실수를 첨가하였다.
2. 구약 사본과 고대 역본(譯本)들
신약성경 사본과는 달리 구약성경 사본은 전통적 서기관의 후예인 맛소라 학자들에 의해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되었으며, 정경으로 확정된 것도 신약성경보다 300년 가까이 이른 AD 90년 얌니아(Jamnia) 회의에서였다. 1909년에 키텔(Rudolf Kittel)이 편찬한 히브리 성경, Kittel's Biblia Hebraica(BHK1) 1판이 출판된 이래 거듭 수정 보완되어서 1990년에는 나이다(Eugine A. Nida) 교수 연구팀(HOTTP)에 의해 [히브리성경]의 제5판에 해당하는 Biblia Hebraica Quinta (BHQ5)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구약의 사본은 맛소라 서기관들에 의해 기록 보존되어 왔으며, 1909년에 야곱 벤 하임(Jacob Ben Hayim)의 제2 랍비성서(Biblia Rabbinica, Jerusalem: Makor, 1524-25)를 텍스트로 하여 Rudolf Kittel이 편찬한 Kittel's Biblia Hebraica(BHK1)이 출판되고, 1912년에는 BHK2가 출판되었고; 1937년에는 레닌그라드 사본을 텍스트로 하여 BHK3이 출판되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1977년에는 독일 성서공회에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BHS4)가 출판되었다. 히브리성경 제5판에 해당하는 Biblia Hebraica Quinta는 Eugine A. Nida의 주도 아래 시작된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HOTTP)의 11년간의 노력의 결실로 1990년에 출판되었다. 특히, BHQ에는 1947년에 발견된 쿰란 문서들이 비평장치에 보완되었다. Cf. 민영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서울: 도사출판 두란노, 1996), 109쪽 각주.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은 인류의 언어와 문화 및 지정학적 지배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5, 6세기 경부터 아람어가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어로 사용되는 것을 계기로 번역되어 타르굼(Targum)이 탄생했으며, 기원 전 3세기에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알렉산드리아와 지중해 연안의 유대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이 대문자로 기록되어서 코덱스형으로 나왔다. 또, AD 3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교부 오리겐(Origen)은 히브리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헬라어 음역, 아퀼라역, 심마쿠스역, 70인역, 데오도션의 개정역 등 여섯 개의 번역 성경을 대조 편찬하여 「여섯본문대조성경」(Hexapla)을 펴냈다. 불행스럽게도 이 사본은 AD 6세기 이후에는 사라지고 지금은 사본의 작은 부분들만 남아 있다.
성경은 AD 3세기부터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주후 3-4세기 경에 시리아어로 번역되기 시작해서 5세기에는 페쉬타(Syria Peshitta)가 완성되었다. 로마의 감독 다마수스(Damasus)는 라틴어를 예배와 신학 공용어로 사용하기 위하여 AD 382년에 제롬(Jerome, 일명 Eusebius Hieronymus)에게 성경을 쉬운 라틴어(vulgata)로 번역하도록 의뢰하여 405년에 「볼가타」(Volgata)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이 라틴어 성경은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방교회에서만 사용되었고 동방교회인 희랍정교회(Greek Othodox Church)는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헬라어 성경을 사용하였다. 서방교회, 즉 로마 가톨릭교회는 제2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1962년까지 지역과 언어를 초월하여 온 세계 가톨릭 교회에 라틴어만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벌게이트를 전후로 이집트어 곱틱(Goptic)역, 고트역(Gothic), 아르메니아역(Armanian), 에티오피아역(Ethiopic), 고대 슬라브어역(Old Slavonic), 아라비아역(Arabic) 등이 번역되었다.
A. T. Robertson, "The Versions," An Introduction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112-30.
이러한 역본들은 오늘날의 정경 66권이 아니라, 맛소라 성경, 「70인역」, 또는 외경이 포함된 성문서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역본들을 연구하는 것은 그 역본의 원본이 되는 사본의 성격과 언어, 및 계열(系列)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하겠다.
3. 신약성경 사본의 계열(系列)
원본이 여러 개의 사본으로 만들어져서 기독교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 보급되는 동안 사본들은 지역적인 특성을 띠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든(발견된) 사본과 콘스탄티노풀에서 만든 사본은 내용과 성격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가 넓은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니 이것이 곧 사본의 계열화 또는 지방화 현상이다.
사본이라고 말할 때는 (1) 파피루스 문서, (2) 대문자 문서(Uncials), (3) 소문자 문서(Minuscules), 및 (4) 초서체(Cursive)로 쓰인 성서일과[표](Lectionary), 이 네 가지를 의미한다.
이 네 종류의 사본들은 당시 성서세계의 지역에 따라 각각 독특한 유형(類型)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유형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지만 원문비평에서는 이 유형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그 중 한 유형의 사본만을 지정하여 그것만이 정통적인 것이고 다른 것은 모두 의도적으로 편집되거나 조잡한 내용이라는 독선적 견해를 가지기도 한다.
사본의 계열을 나누는 방식으로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과 그것을 다시 기호화해서 표시하는 방식이 있다. 원문비평에서는 이것을 기호화하여 (1) A-text: 비잔틴 계열의 전통원문, (2) B-text: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 (3) C-text: B와 D의 중간 계열 사본, 즉 가이사랴 계열 사본, (4) D-text: Codex-D, 즉 서방형(Western) 계열 사본으로 표기하였다.
Eldon J. Epp, "Ancient Texts and Versions of the New Testament,"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8. Epp은 다음과 같은 기호를 사용했다: A-text=Byzantine- Traditional, B-text=Alexandria, C-text=Caesarea, D-text=Western
이것을 계열별, 또는 지역별로 다시 설명하면: (1)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mdrian) 계열, (2)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방(Western) 계열, (3)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한 비잔틴, 즉 전통원문(Byzantine-Traditional) 계열 등 셋으로 분류되거나, 또는 여기서 알렉산드리아형과 서방형의 일부 텍스트를 나누어 가이사랴(Caesarean) 계열 사본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1)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계열 사본
(1) 시내산 사본(Codex-Sainaiticus, )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의 대표적인 것은 1884년과 1859년 두 차례에 걸쳐 독일 신약학자 티셴도르프(Constantine von Tischendorf)가 시내산 성 케더린(St. Catherine) 사원에서 발견한 시내산 사본, 즉 "알렙"( ) 사본이라고 불리는 코덱스 사이나이티쿠스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본은 대문자 책모양(Uncial Codex)의 사본으로 양 100마리분의 양피지에 쓰였으며 외경이 포함되었다. 이 사본은 AD 4세기에 가이사랴의 학자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틴 황제의 부탁으로 작성한 50권의 사본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2) 바티간 사본(Codex Vaticanus--B)
작은 Uncial 글자로 양피지에 기록돤 Codex형 사본으로서, 1475. 바티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성문서 목록에 처음 나타났으며, 1889-1890에 코자 루지(Giuseppe Cozza-Luzi)가 편찬하였다. 이 사본에는 신구약의 외경이 대부분 포함되었으나 창세기가 46장 28절부터 시작되고 시편이 많이 빠지고 신약과 외경에도 빠지거나 손상된 부분이 많다. 이 사본에는 지우고 고친 곳이 많고, 바울 서신이 연속적으로 쓰였는가하면 데살로니가 전후서 사이에 히브리서가 끼어 있기도 하다. 이런 특징으로 볼 때 이 사본은 유세비우스의 필경사들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사제나 어떤 유력 인사가 성경을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알렉산드리아 사본(Alexandriaus-A)
5세기에 기록된 Uncial Codex형 사본으로서 양피지에 네 권으로 나누어 기록되었고, 구약성경 중 창세기, 사무엘상, 시편 등에 누락된 곳이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매우 온전한 사본이다. 데클라(Thekla the Martyr)가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1628년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인 대주교 루카(Cyril Lucar)가 Charles I세에게 기증한 사본이다. 이외에도, 20세기 중반에 새로이 발견된 "Pre-Samaritan texts"라고 명명된 "사마리아 오경 신조 사본" 등이 이 계열 사본에 속한다.
2) 서방 계열 사본(Western)
여기에는 구역 라틴어 역본(Old Latin Version), 제롬(Jerome)의 벌게이트(Latin Vulgate) 등이 포함되는 로마 가톨릭 계열의 사본이다.
이 외에도 필사본 Dea(Codex Bezae Cantabrigiensis), Dp(Codex Clamontanus), Ea(Codex Laudianus) 등이 있으며, 1852년에 번역 출판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두웨이 성경(Douay Version)은 이런 사본들을 text로 한 영역본이다.
3) 비잔틴 계열의 전통원문(Byzantine-Traditional)
시리아의 페쉬타(Syrian Peshitta, 3-5 세기), 이집트의 고딕(Gothic, 4 세기), 코덱스 프리아누스(Codex Freeianus, W문서) 및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복음서 부분 등이 이 계열 사본에 속한다. 이 계열의 사본을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계열에 속한 헬라어 사본이 수적으로 많기 때문이며, "전통원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본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것만이 신약성경의 전통을 이어온 사본이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인쇄본 시대에 이르러 베자와 에라스무스가 이 계열의 초창기 사본으로 신약성경을 편찬하여 출판하고 권서(勸書)하는 과정에서 소위 "텍스투스 리셉투스," 즉 "수용본문"이라는 어휘가 생기기도 했다. 이 비잔틴 계열 사본에서 루터의 독일어성경(1522-34)과 영국의 킹제임스 성경(1611)이 번역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이 손에서 손으로 필사되어 전달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대문자로 기록되다가 9, 10 세기경부터는 소문자와 초서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신속하게 쓰기 위한 목적과 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5세기에 인쇄기계가 발명되자 16세기부터는 성경의 편집이 시작되고 곧 인쇄본 시대로 접어든다.
II. 인쇄본(印刷本) 시대의 사본
역사가들이 암흑시대라고 일컫는 중세기의 한 가운데서 문예부흥(Renaissance)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과 유럽 중심에서 실증주의(實證主義) 풍조가 일어나자 지식계급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도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교회가 베푸는 강론과 라틴어 성경 「볼가타」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로 된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예수의 가르침과 자신들의 신앙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쇄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성경 사본의 인쇄를 부채질했다.
1. 히메네스의 「여러번역 대조성경」
스페인의 대주교 히메네스(Francisco Ximenes at Alcala, 1437-1517)는 1514년에 여섯 개의 언어로된 「여러 역본 대조성경」(Complutensian Poliglot)을 편집하면서 그 중 5권에 헬라어 성경을 넣었으나 그것이 어떤 사본인지는 알 길이 없다.
라벗슨(A. T. Robertson)은 이 대조성경의 서문에, "여기에 사용한 사본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교한 것"으로서 히메네스가 바티칸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본을 교황 레오의 허락을 받아 사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했고,
Robertson, "Textus Receptus," 18.
메츠거(Bruce M. Metzger)는 그의 저술에서, 히메네스가 교황 레오에게 "신약과 구약의 매우 오래된 사본(Codex)들"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의 편지를 인용하였다.
Bruce M. Metz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Its Transmission, Corruption, and Restoratio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4), 98,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정체(正體)," 24에서 재인용.
히메네스는 대조판 성경의 편집을 끝내고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출판을 미루다가 1520년에 교황 레오(Leo X)의 재가를 받고 1522년에야 책을 출판했다.
2.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히메네스의 여러 번역 대조판이 출판에 시간을 끄는 사이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성경이 먼저 출판되었다. 스위스 바젤의 출판업자 프로벤(Johann Froben)은 히메네스의 성경이 출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먼저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중 1514년 8월에 마침 바젤을 방문한 화란 학자 에라스무스를 만나 자신의 헬라어 성경 출판 계획을 말하고 사본을 편집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듬해 6월에 다시 바젤에 가서 대학 도서관 등에서 헬라어 사본을 찾아보았으나 신약 전체를 포함한 사본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12세기에 기록된 별로 신빙성이 없는 두 개의 사본을 발견했는데, 그 하나는 복음서 사본이었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 사본이었다.
박창환, ibid., 25.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중심으로 다른 두 세 개의 사본들과 비교하면서 편집 교정한 원고를 프로벤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그 자신의 고백에 의하면, 그가 친구에게서 빌린 요한계시록 사본은 마지막 장이 떨어져나간 것이어서 여섯절을 라틴어 볼가타에서 역으로 헬라어로 번역해서 첨가했는데, 이 부분은 후에 발견된 그 어떤 헬라어 신약 사본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Robertson, "Textus Receptus," 18;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정체," 25;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99-100.
에라스무스는 요한계시록에서 여섯 절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라틴어 성경을 텍스트로 교정을 보거나 헬라어로 번역해서 빈자리를 메꾸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라스무스의 성경은 히메네스의 「여러번역 대조성경」이 출판되기 6년 전인 1516년 3월 1일에 출판되어 많이 팔렸고, 1519년에 나온 2판은 말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대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에라스무스는 1522년에는 3판을, 1527년에는 약 90여 곳을 수정하여 4판을 인쇄했고, 그가 죽은 후 1555년에는 5판이 인쇄되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 매우 값진 것이지만 편집을 시작한지 불과 2년만에 성경이 급히 인쇄되어 나온 점, 성경 전체를 기록한 사본이 하나도 없이 편찬한 점, 소문자 사본 5-6개만을 텍스트로 해서 편집하고 교정한 점 등이 결점이다. 사본의 형성과정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소문자 사본은 AD 9세기 이후에 기록된 것들로서 그보다 앞서 기록된 것들 보다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 성경에 대하여 메츠거는 「여러번역 대조성경」에 든 헬라어 성경보다 비평적 가치가 열등하다고 했다.
Metzger, The Text of the New Testament, 102ff.
3. 스테파누스의 헬라어 성경
프랑스 빠리의 출판업자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 프랑스식 이름은 Estienne)는 히메네스와 에라스무스의 성경을 혼합하여 1546년부터 1551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다. 그 중 3판은 영국에서 표준성경으로 불릴 만큼 인정받았다. 3판은 각 쪽마다 열다섯 개의 다른 사본들과 히메네스의 "성경읽기"(Reading)를 포함시켰는데 그 중 하나가 베자의 사본(Codex Bezae, 즉 D)이었다.
Robertson은 열다석 개의 사본이라고 했으나, 박창환은 열 네 개라고 했다. Robertson, 20; 박창환, 26.
4. 베자의 헬라어 성경과 텍스투스 리셉투스
칼빈의 동료 개혁자이자 학자였던 베자(Theodore de Baeza, 1519- 1605)는 1565년부터 1605년, 즉 그의 생존시에 아홉판의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고, 그가 죽은 후인 1611년에는 10판이 나왔다. 그는 후에 "베자 사본"(Codex Bezae)과 "클레로몬타누스 사본"(Codex Claromontanus)이라고 이름 붙여진 비교적 훌륭한 사본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註)에만 사용했을 뿐 본문 편찬에는 사용하지 않았고, 본문은 1551년에 출판된 스테파누스의 헬라어 성경을 대부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코덱스 베자와 코덱스 클레로몬타누스 사본이 스테파누스의 본분과 너무나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감히 수정할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미 출판된 성경이 거의 공인 성경으로 인정받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기존의 성경과 내용이 많이 다른 성경을 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1611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된 흠전영역성서, 즉 킹제임스 성경의 텍스트가 1588-1598년에 출판된 베자 사본이었다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공로는 매우 컷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은 1881년까지 번역된 모든 성경의 텍스트로 사용되었다.
화란 라이덴의 인쇄업자 엘제비어(Bonaventura Elzevir, Abraham Elzevir) 형제가 주로 베자의 1556년판 헬라어 본문을 편찬하여 성경을 출판했고, 1633년에 2판을 내면서 서문에 자신들이 출판하는 성경을 자랑하고 "베스트 셀러"로 선전하기 위해서 "받아들여진 성경"이란 의미의 라틴어, "Textum … receptum"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 오늘날 그 성경을 "텍스투스 리셉투스(Textus Receptus)" 곧 "수용본문"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이다.
실천하는 신학
그 후 비잔틴 계열의 성경, 특히 베자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은 "표준원문," "전통원문," 또는 "유일하고 참된 본분"(the only true text) 등으로 불려졌다. 19세기 미국의 신약학자 라벗슨과 신약 비평 학자 호르트(F. J. A. Hort)도 다 같이 텍스투스 리셉투스는 나쁜 텍스트가 아니며, 이단성을 띤 것도 아니며 비교적 정확한("substantially correct text") 사본이라고 평가했다.
Robertson, "Textus Receptus," 21.
이 말은 이들 학자들은 편견 없이 모든 사본을 공정하게 평가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오직 비잔틴 계열의 원문만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한 거짓된 사본과 거짓된 번역판이라고 주장하는 록크만(Peter Lockmann)을 중심한 텍스투스 리셉투스 옹호자들과 킹제임스 주의자들의 독선적 태도는 해소하기 어려운 비평학계의 문제점이다.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정통성을 맹신하는 이들에 대하여 로벗슨은, "신학 사조는 오히려 전통원문의 신빙성을 반대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Ibid., 23.
역사적으로 많은 건전한 학자들이 초기 사본, 특히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연구하는 데 생애를 바쳤다. 프랑스의 신약학자 마르땡(Abbe J. P. P. Martin)은 자신이 편찬한 텍스트에 비평장치를 해서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옹호했고,
Abbe, J. P. P. Martin, Introduction a la Critipue Textuelle du Nouveau Testament, 6 vols. (N.p., 1883-86).
밀러(E. Miller)와 버곤(J. W. Burgon)은 개인적 저술과 공동저서를 통해서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옹호하는 대열의 선두에 섰다.
E. Miller, The Oxford Debate on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1897; Present State of the Textual Controversy, 1899; Burgon and Miller, The Traditional Text, 1896, The Causes of the Corruption of the Traditional Text of the Holy Gospel, 1896.
특히, 버곤은 교부 문서에서 신약성경에 관한 자료를 많이 찾아냈으며, 스크라이브너(F. H. A. Scrivener)는 소문자 사본과 초서체 사본 연구에 큰 공적을 남겼다. 1887년에 스크라이브너가 출판한 헬라어 성경은 스테파누스, 베자, 엘제비어, 라흐만, 티셴도르프, 트레겔러스, 위스트코트 호르트 및 헬라어 성경 개정자(Revisers)들에게는 훌륭한 텍스트를 제공했다.
F. H. A. Scrivner, Plain Introduction to the Criticism of the New Teatament, 2 ed., 1874.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비잔틴 계열의 사본과 텍스투스 리셉투스는 9세기 이후에 필사된 5-6개의 소문자 사본으로 편집한 것이지만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세 사본( , B, A)은 기록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바티칸 사본(B)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5세기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며 이 세 사본이 모두 부분적 결장(缺章)을 제외하고는 외경을 포함하여 성경 전체를 포함한 온전한 것이다.
여러 정황과 객관적 증거를 참조할 때 시내산 사본( )은 AD 4세기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부탁으로 작성한 50권의 사본 중 하나로 인정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시내산 깊은 곳 성 케더린 사원에 숨겨 놓으셨다가 "때가 차매" 1859년에야 테셴도르프를 통해 세상에 공개하셨던 것이다.
만약 킹제임스 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새로운 사본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일은 당장에 그쳐야 하며, 텍스투스 리셉투스와 그것을 대본으로 번역한 킹제임스 번역판 외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모두 불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은 비잔틴 계열의 다수본문과 텍스투스 리셉투스 만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온전한 사본이며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텍스투스 리셉투스"라는 말은 인쇄업자가 자기가 출판한 성경을 선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지 그 성경의 가치를 평가하는 호칭이 아니다. 베자의 헬라어 성경은 1565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했고 "텍스투스 리셉투스"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633년에 엘제비어가 2판을 내면서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 출판될 때(1611)는 "텍스투스 리셉투스"라는 고유명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III. 비평판(批評版) 헬라어 성경 시대
텍스투스 리셉투스(여기서부터는 "TR"이라고 적음)가 출판된 이후 학자들은 꾸준히 사본 연구를 계속했으며, 또한 그들은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사본을 찾기 위해 옛 도서관과 수도원 등을 방문했다. 헬라어 성경이 인쇄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TR을 옹호하는 이들과,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논쟁과 연구가 계속 되었다.
1. 비평본문 시대
밀(John Mill)은 1707년에, 1550년에 출판한 스테파누스의 텍스트를 연구하면서 약 78개의 다른 헬라어 사본과 고대 라틴어 사본을 참조했고, 벤틀리(Richard Bentley, 1662-1742)는 그것을 라틴어 성경과 비교하며 읽을 수 있는 새로운 헬라어 사본을 준비했으며, 벵겔(J. A. Bengal)은 1734년에 사람들이 읽기 쉽게 주(註)를 단 텍스투스 리셉투스를 출판했다. 웨스타인(J. J. Westtstein)은 1751-52년에 대부분 엘제비어의 성경을 사용해서 2절판(folio volumes) 성경을 펴내면서 광범위한 비평장치(Critical Appratus)를 첨가했다.
또한 그리스바하(J. J. Griesbach)는 1774-77년에 비평장치와 원문비평 이론을 게재한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다.
Ibid, 23-27.
라크만(Karl Lachmann)은 1831년에 "과학적인 본문비평"을 시도했고, 티셴도르프가 시내산 사본을 발견한 이래 1841-72 사이에 여덟판의 헬라어 성경을 출판했고, 같은 기간에 트레글러스(S. P. Tregelles)도 헬라어 성경을 펴냈다.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정체," 27.
이런 학자들의 원문연구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 바로 1881-82년에 위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르트(F. J. A. Hort)가 출판한 「원문 헬라어성경」(The Greek New Testament in Original Greek)이었다. 박창환은, 이것으로서 텍스투스 리셉투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Ibid.
본격적인 비평판 헬라어 성경의 출현은 1898년 독일성서공회가 출판한 네슬레(Eberhard Nestle)의 헬라어 신약성경, Novum Testamentum Graece(앞으로는 NTG로 표기)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NTG는 1952년 21판을 출판할 때부터 알란트(Kurt Aland)가 이 비평본문의 공동저자로 참여한 이래 27판까지 수정 보완되면서 출판되었다. 특히, 26판은 본문과 비평장치에 파피루스 사본 등 새로 발견된 자료를 보완하는 것을 목적으로 편집하였다.
1955년에, 알란트는 불렉(M. Black), 메츠거(B. M. Metzger) 등과 함께 세계 연합성서공회 (United Bible Societies, 앞으로는 UBS로 표기)로부터 헬라어 신약성경, Greek New Testament(앞으로는 GNT로 표기) 편찬에 동참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자신의 NTG 연구자료를 이 GNT에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NTG 26판(1979)과 GNT 3판(1975)부터는 두 비평 헬라어 성경이 동일 본문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NTG와 GNT는 발행 목적과 성격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알란트(B. Aland, K. Aland)는 이 차이를 NTG 27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두 비평본이 설정한 목표는 이전에도 그랬듯이 서로 다르다. GNT는 번역자들을 위하여 고안된 것이므로 단지 선택된 곳에서만 비평자료를 제공한다. 흔히 문제를 삼는 곳은 현대의 번역작업에서 번역상으로 차이가 나타나는 곳이다. 이렇게 한 것은 번역자에게 스스로 조사할 가능성을 제공해 주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NTG는 사용자가 비판적으로 본문조성(Textgestaltung)을 재수행(再遂行)해 볼 수 있게 한다. 따라서 NTG는 본문의 전체 범위에 대해서 비평자료를 제공한다.
Babara Aland and Kurt Aland, Novum Testamentun Graece (Stuttgart, 1993), 서문, 박창환 번역.
NTG 26판과 27판의 본문은 동일하지만 27판에는 비평장치가 현저하게 보완되었다. NTG 27판은 1994년에 출판된 GNT 4판과 같은 본문을 사용하였다.
2. 원문으로부터의 번역
헬라어 원문으로 영역(英譯)한 최초의 성경은 22년 동안의 노력 끝에 1320년에 완성된 위클리프 성경이며(John Wycliffe, 1320), 다음으로는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텍스트로 하여 번역하여 1525년에 출판된 틴들(William Tyndale)의 성경이다. 그후 Coverdale's Version, Taverner's Bible, 로마 가톨릭 성경, Douay Bible 등이 출판되었고 마침내 1611년에는 베자의 사본을 텍스트로 8년간의 노력의 결실로 「흠정(欽定)영역성서」(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신약성경에는 많은 오류가 발견되어서 1616년까지 수정하였고, 1629년에는 1차 개정, 1638년에는 구약을 포함한 대대적인 개정이 있었다. 청교도 휴 브로튼(Hugh Borughton)을 중심으로한 기독교계가 의회에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을 낸 결과 1657년에는 의회 안에 공식적인 KJV 개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660년에는 성경을 다시 번역해달라는 요청이 왕실에 접수된 일도 있었다.
Davis Horton, The Worship of the English Puritans(Westminster: Dacre, 1948), 14ff.
1724년에 또 한번의 개정작업이 있었고, 1762년에는 캠브릿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패리스(Thomas Paris)에 의해, 1769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불레이니(Benjamin Blainy)에 의해 많은 부분들이 개정되었다. KJV는 1881년까지 100회에 가까운 개정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John Wesley)는 1758년에 성경 개정판을 펴내면서 킹제임스 성경에서 12,000 곳을 수정해야 했다.
1870년에는 영국 학자 67명, 미국 학자 34명으로 새로운 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작업에 들어갔다. 개정 작업 도중, TR 옹호자로 알려진 스크라이브너는 계속적으로 베자 사본을 텍스트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위스코트와 호르트 등 대부분의 학자들은 텍스투스 리셉투스 이후에 출판된 다른 본문의 사용을 주장했다. 결국은 위스코트와 호르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서 1611년 이후 처음으로 다른 본문을 가지고 개정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881년 5월 영국에서는 Revised Version(RV)이 출판되고, 미국에서는 American Standard Version(ASV)이 나왔다.
1946년에는 영국과 캐나다 40여 개 개신교단이 연합하여 ASV를 개정한 Revised Standard Version(RSV)을 출판했고, 영국에서는 아홉 개 개신교단이 연합해서 RV를 개정한 New English Bible(NEB)을 발행했다. 1973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 문법에 매지지 않고 표현에 강조점을 둔 현대적인 영어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이 출판되고 1982년에는 다시 KJV를 대폭 수정한 New King James Version(NKJV)이 출판되었다. KJV가 이런 개정작업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인데, 한국권위역성경 번역위원회 등은 현재의 영어 본문은 1611년판 그대로라고 주장하며, 1886년에 대대적으로 수정한 철자법, 구두점, 대소문자 사용, 괄호처리 등도 원본대로라고 주장한다.
권위역성경 번역위원회, 「권위역성경」(서울: 도서출판 안디오크, 1996), 일러두기.
사람이 필사하거니 번역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든 다른 어떤 성경이든 작업 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본의 오류면 본문비평을 통해, 번역판이면 개정작업을 통해 수정 보완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보존하는 방법일 것이다.
결론: 사본의 정통성(正統性)의 기준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을 기초로, 독자는, 사본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과 TR 옹호자들과 KJV 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떤 면에서 공정성을 잃고 있는지 파악했을 것이다.
1. 시기적으로 사도시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본의 특징은 파피루스에 쓰였거나, 대문자, 즉 언셜 코덱스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형태의 사본은, 비잔틴 계열의 전통원문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 B, A 등의 사본으로서 4세기부터 늦게는 8-9세기까지 쓰여졌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은 소문자 사본으로서 이것은 기록 연대가 9세기 또는 10세기 이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에는 다른 계열의 사본들과는 달리 AD 350 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헬라어 필사본이나 역본, 또는 교부들의 문서가 하나도 없다. 이 말은 곧 에라스무스와 베자가 편찬한 헬라어 성경의 텍스트가 9세기 이후에 쓰여진 사본이라는 의미도 된다.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은 AD 4세기 경부터 기록된 것들로서, 이 계열에 속하는 세 개의 사본은 기록의 정확성과 분량, 보존상태와 내용이 가장 온전하며, 특히 시내산 사본( )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황제의 지시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1400여 년 동안 깊은 수도원에 간직되어 있다가 19세기에 발견된 것으로서 아무도 그 내용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열의 사본은 후에 Westcott-Hort, Nestle-Aland, UBS가 헬라어 비평 본문을 편찬할 때 주로 사용한 본문이 되었다.
이 본문에 따른 대표적 영역본으로는, 검토한 바와 같이 RV, ASV, RSV, NEVB 등이 있고; 현재 대부분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한글판은 1993년 개정 작업을 사작하면서 개정 텍스트로 위스코트-호르트와 네슬레-알란트의 연구를 잇는 헬라어 신약성경, 즉 UBS 3판을 사용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1966년에 출판된 GNT 1판을 텍스트로 했고, 표준새번역은 1983년에 출판된 GNT 3판을 텍스트로 했다.
2. 여러 다른 사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본의 수가 많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를테면, 맛소라 사본이 1947년 사해의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 사본과 일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비잔틴 계열의 헬라어 사본은 "다수본문"이라고 불릴 만큼 수가 많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나 로마가 4세기 이후에는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은데 반해 콘스탄티노풀은 15세기 중반까지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자와 에라스무스의 사본이 다른 비잔틴 계열 사본의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TR 옹호자로 잘 알려진 버곤은 TR 개정판을 내기 위한 조사에서 마태복음에서만 TR과 "다수본문" 사이에 150개의 차이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 29.
독자는, 만약 신약성경 전체를 조사한다면 얼마나 많은 차이가 발견될 것인지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KJV 주의자 레이(Jasper J. Ray)는 신약에서 162 시험 구절을 선택해서 비평헬라어 성경과 영역성경을 비교한 결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 구절 TR과 다수본문에도 적용하여 비교한 결과 31개 구절의 내용이 달랐다는 통계를 내었다.
Jasper J. Ray, 「하나님은 오직 한 성서를 쓰셨다」 [God Wrote Only One Bible] (Eugene, Ore: Eye Opener, 1980), 32-70,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 30도 참조.
현대 본문비평 분야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카슨(D. A. Carson)은, 비잔틴형 본문이 TR과 같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텍스투스 리셉투스는 겨우 몇 개의, 비교적 늦은 시대의 사본들을 기초로 한 것"이라 강조했다.
D. A. Carson, The King James Version Debate: A Plea For Realism(Grand Rapids, Baker, 1979), 67-68. 박창환, "텍스투스 레셉투스," 30-31.
3. 비평 연구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오늘날 비평 헬라어 본문의 근간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은 서로 간에 큰 차이가 없이 내용을 지지해주고 있다. 독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스트코트-호르트와 네슬레-알란트, UBS판 GNT는 텍스투스 리셉투스와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성경이 아니라, 바로 그 TR 본문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사본을 찾아내어 수개정을 거듭하고 비평장치를 첨가하여 본문의 온전성을 도모한 성경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작업은 수백년 동안 5,400여 개의 신약 필사본과 8,000개 이상의 번역본과 교부들의 문서 등을 참고하여 수행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부 편협한 TR 옹호자들과 KJV 주의자들은 전통원문과 킹제임스판의 온전성 만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감추어진 사본을 찾는 일이나 사본을 비교 연구하는 일, 성경을 개정하는 일이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본문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지를 가려내는 작업이다. 한 계열의 학자들이 부분적인 사본 몇 개를 가지고 편찬한 헬라어 성경 하나와 그것을 번역한 영어성경 하나 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불편부당한 편견일 뿐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본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공정한 입장에서 비교 연구 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일 것이다. 라벗슨(A. T. Robertson)이, "비평장치를 갖춘 네슬레의 성경(1901)이 가장 훌륭한 현대적 텍스투스 리셉투스" 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일 것이다.
Robertson, "Textus Receptus," 23. "The bset modern edition of the Textus Receptus is by Nestle(1901) with some critical appratus."
* 주요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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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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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stle, Eberhard. Novum Testamentum Graece 21st ed.
Nestle-Aland, New Testament Greek, 27th ed.
UBS. GNT. 3d. 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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