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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 스펜서

by 이덕휴-dhleepaul 2020. 8. 14.

다이애나 스펜서

최근 수정 시각: 2020-08-14 21:30:13

 

분류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선정 위대한 영국인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로버트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Diana, Princess of Wales

 

이름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Diana Frances Spencer)

출생

1961년 7월 1일

영국 노퍽 샌드링엄 파크 하우스

사망

1997년 8월 31일 (36세)

프랑스 파리 피티에살페트리에르 병원

장례식

1997년 9월 6일

영국 노샘프턴셔 알소프 레이크 라운드 오벌

배우자

웨일스 공 찰스 (1981년 결혼 / 1996년 이혼)

자녀

윌리엄, 해리

아버지

제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

어머니

프랜시스 섄드 키드

형제

사라, 제인, 존, 찰스

서명

 

1. 소개2. 작위3. 일생

3.1. 어린 시절3.2.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3.3. 불행한 결혼 생활3.4. 활발한 사회 활동3.5. 비극적인 죽음

4. 전세계의 추모의 물결5. 가족관계6. 이모저모7. 관련 문서

1. 소개[편집]

People's Princess[1]
민중의 왕세자비
England's Rose[2]

다이애나, 프린세스 오브 웨일스[3]. 영국의 전 왕세자비[4]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윌리엄 왕세손)3위였으나 이제는 세 조카들한테 밀린 6위인 해리 왕자의 친어머니이다.

1981년 '찰스 왕세자'와 결혼해 영국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영국왕세자비[5]였다. 한국에서는 흔히 다이애나 비(妃)라고 부른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순탄하지 못한 왕실 생활과 불화 끝에 1992년부터 별거에 돌입한 후 1996년이혼했다. 이혼 후로도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활용하여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하여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이혼 다음 해인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전세계적인 애도를 받았다.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당시 영국영연방 왕국에서는 대대적인 추모 열기가 일어났고, 영연방 공화국이나 영연방이 아닌 국가에서도 추모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한국 역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애도를 표시했고 주영 한국대사관도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조화를 보냈다.

만약 그녀가 현재까지 생존해 있었다면 59세이다.

2. 작위[편집]

 

 

결혼 시절(1981년~1996년) 쓰던 문장

이혼 이후 (1996년~1997년) 쓴 문장

다이애나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와 결혼했을 때 정해진 공식적인 호칭은 다음과 같았다.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체스터 백작부인, 콘월 공작부인, 로스시 공작부인, 캐릭 백작부인, 렌프루 남작부인, 아일의 레이디, 스코틀랜드 공작부인이신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자비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and Countess of Chester, Duchess of Cornwall, Duchess of Rothesay, Countess of Carrick, Baroness of Renfrew, Lady of the Isles, Princess of Scotland)'

그리고 1996년 이혼한 후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Diana, Princess of Wales)'로 호칭이 변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전하(Her Royal Highness)'의 경칭이 빠졌다. '전하'는 왕족에게만 허용되는 경칭이므로, 전하로 불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왕족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론적으로는 '왕족이 아닌' 다이애나가 공식 석상에서 '왕족'인 자기 아들들에게 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이걸 잘 알고 있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전하'의 경칭을 유지하기 위해 왕실과 신경전을 벌였으나, 장남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왕세손이 "내가 왕이 되면, 엄마한테 다시 전하의 칭호를 돌려줄게요"라고 말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왕이 못 되었다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남동생인 앤드루 왕자의 전부인 요크 공작부인 사라 퍼거슨도, 찰스와 다이애나가 이혼하기 얼마 전에 이혼했다. 다이애나에게는 손아래 동서가 된다. 사실 다이애나와 사라는 어렸을 때부터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다이애나가 사라를 왕실이 주최하는 행사에 초대했고, 앤드루와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사라 역시 왕족의 뜻인 "전하"의 경칭이 빠진 채 단지 "요크 공작부인"으로만 불리고 있다.

다이애나 사후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추도연설에서 그녀를 '민중의 왕세자비(People's Princess)'라 불렀는데,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호칭보다도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칭호의 변천사는 다음과 같다.

  •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영애 The Honourable Diana Frances Spencer (1961년 7월 1일 ~ 1975년 6월 9일)

  • 레이디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 Lady Diana Frances Spencer (1975년 6월 9일 ~ 1981년 7월 29일)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스코틀랜드에서는 로스시 공작부인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uchess of Rothesay (1981년 7월 29일 ~ 1996년 8월 28일)

  • 웨일스 공비 다이애나 Diana, Princess of Wales (1996년 8월 28일 ~ 1997년 8월 31일)

3. 일생[편집]

 

3.1. 어린 시절[편집]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

8대 스펜서 백작 존 스펜서(Edward John "Johnnie" Spencer, 1924.1.24.-1992.3.29.)의 3녀로 영국 왕실이 즐겨 찾는 휴양지인 노퍽 주 샌드링엄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언니 사라, 작은언니 제인, 남동생 찰스가 있다.[6]

다이애나의 친정인 스펜서 가문은 스튜어트 왕조 찰스 2세의 후손으로, 찰스 2세의 사생아 중 하나였던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의 후손이다. 다이애나의 8대조 할아버지 존 스펜서를 통해 윈스턴 처칠과도 혈연이 닿아 있다. 존 스펜서의 방계 후손이 바로 처칠의 집안인 말버러 공작 가문이다. 즉 다이애나는 엄연한 귀족 가문의 딸이다. 위의 개인 문장에서 조개 3개가 있는 것이 가문 문장이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외가는 퍼모이(Fermoy) 남작가문으로 어머니 프랜시스(1936~2004)는 4대 퍼모이 남작 모리스 로셰의 차녀이다.

찰스 왕세자가 그녀와 결혼한 것도, '귀족 가문의 딸' 이라는 신분을 보고 결혼을 생각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이다. 가문의 역사만 놓고 보면 스펜서 백작 가문이 영국 왕실인 윈저 왕가보다 더 유서가 깊을 정도이다. 귀족 가문 출신인 데다 스펜서 백작 가문의 선대가 무역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덕분에 다이애나와 그 언니들, 남동생 모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재산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현 스펜서 백작 찰스[7], 그리고 다이애나의 아들들인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가 물려받을 외가 스펜서 백작 가문의 재산도 상당하다고 한다.[8]

그러나 6세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인생에 걸쳐 불행한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다이애나의 부모는 조용하고 섬세한 그녀를 깊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왕세자비가 되었을 때, 언론의 과도한 집중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결혼 전에는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시간제 보모로 일했다고 한다. 한국 언론과 인터넷 등에서는 이것이 와전되어서, 평범한 유치원 보모가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으로 한 방에 인생역전을 한 것처럼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이 적성에 맞았고, 이 일을 하면서 존재감을 인정받고 행복을 느낄 정도로 아이를 좋아해서, 유치원 보모로 일하면서도 친분이 있는 다른 귀족의 자녀를 돌보는 베이비시터로도 일했다.

워낙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였다. 언니들과 남동생(명문대인 옥스퍼드 대학 졸업)은 모두 우등생인데 본인만 낙제해서 열등감을 느꼈으며, 이 역시 그녀의 소극적인 성격에 한 몫을 했다. 이렇게 학력이 짧았던 탓에 정식 직업을 갖지는 못했고, 전술한 것처럼 시간제 보모와 개인 파티의 웨이트리스, 지인의 집의 청소부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고 한다.

유념할 점은, 생계를 위해 일한 게 아니란 점이다. 본래 영국의 상류층(귀족들)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스펜서 가문이 워낙 부유한 덕분에, 고등학교 중퇴 후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에게서 독립해 런던에 아파트를 얻어 친구와 살 때도 그 아파트가 다이애나 소유라 친구들에게 방세를 받았다고한다. 다이애나가 짧은 처녀 시절 동안 시간제로 여러 일을 한 것은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

3.2. 찰스 왕세자와의 결혼[편집]

다이애나가 찰스 왕세자의 남동생 앤드루 왕자와 소꿉친구라 아주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가 영국의 왕세자에다 다음 왕이 될 사람이라 조금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후에 본인의 남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했겠지만

다이애나와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가 서로를 제대로 인지하면서 처음 만난 것은 다이애나가 17세 때의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저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만 넘어갔다. 그러다 3년 뒤인 20세 때 다시 만난 자리에서, 찰스는 다이애나의 자상함과 아름다움에 호감을 가지고 교제를 시작했다.

 

이후 시도때도 없이 기자와 파파라치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에게 달라붙어 찰스 왕세자와의 관계를 캐물었고, 쏟아지는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으로 정신이 없어질 무렵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9]

찰스와 다이애나의 연애 기간 내내, 각종 언론들과 파파라치들은 다이애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인 왕세자가 과연 어떤 아가씨를 배우자로 맞이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영국 국민들은 스펜서 가문의 3녀이자 유치원 보모인 19살의 아가씨 다이애나가, 미래의 왕이 될 찰스의 신붓감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다이애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 알기도 전에, 흥분감과 두려움 속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 하고, 찰스의 곁에 남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왕실은 1981년 2월 24일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스펜서의 약혼을 공식 발표했고, 5개월 후인 7월 29일 세계인 수억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10] 이때 다이애나의 나이는 20살이었다.


결혼식 때 다이애나가 입은 웨딩드레스.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티아라를 대여하지 않고, 대대로 친정 스펜서 가문에 물려내려오는 티아라를 썼다. 귀족 가문의 위엄

'20세기의 신데렐라'로 불리며 새로운 왕세자비가 된 다이애나를 본 세계인은, 그녀의 매력과 아름다움에 열광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부부가 앞으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이애나가 입은 의상과 착용한 장신구는 당대의 패션을 선도하는 유행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고, 영국의 왕실은 더할 나위 없이 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흥분 속의 세기의 결혼식신혼여행을 거치며, 다이애나는 '결혼식이 끝났으니, 더 이상 언론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갖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했던 그녀의 착각이었다. 언론은 끊임없이, 다이애나를 쫓아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사진에 찍혔던 인물(The most photographed woman in the world)이 된다. 실제로 이 말은 타임이나 뉴스위크 같은 대중지에서 다이애나를 표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된다. 다이애나는 20세기 통틀어 그 어떤 연예계 스타나 정치인보다도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만큼 사진도 많이 찍혔다. 그녀는 말 그대로 파파라치들의 돈줄이었다. 마이클 잭슨, 엘리자베스 2세보다도 많은 사진이 찍혔으니 말 다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도 이 정도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없다.

다이애나에게 쏟아지는 이런 대중의 관심은 영국 왕실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당황한 사람들 중에는 남편 찰스 왕세자도 있었다. 찰스 왕세자는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는 생애 단 한 번도 사람들의 관심도에서 다른 사람에게 뒤쳐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어린 아내가 찰스보다 훨씬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찰스 왕세자는 부부 동반으로 타국을 방문할 때면 "나는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수행해 온 사람"이라고 기자들 앞에서 너스레를 떨었다.[11] 사람들은 "찰스 왕세자가 어린 아내에게 대중의 관심을 빼앗기고도, 나이 차이가 많은 남편답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3.3. 불행한 결혼 생활[편집]

 


남편인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카밀라 파커 보울스와 연인이었다. 카밀라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유부녀였음에도 그들의 간통은 계속되었다. 남편의 마음이 본인에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이애나는, 찰스가 본인과 결혼한 이유가 '왕세자비라는 자리에 앉혀놓기 위한 적당한 인형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닫고 절망했다. 사실 다이애나는 결혼 직전에도 찰스 왕세자가 과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지를 물어보았고, 이에 찰스는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사랑해. 사랑이 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지만.


찰스 왕세자


사실 찰스가 카밀라와의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할머니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사이가 나빠질 것을 각오하며, 큰할아버지 에드워드 8세를 본받아 왕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카밀라와 결혼하면 되었다. 하지만 찰스는 '왕위 계승권'과 '사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다. 그래서 대중을 눈속임하여 왕세자로서의 인기를 얻으려고, 젊고 아름다운 데다 '성공회 신자'인 다이애나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것이다. 심지어 다이애나와의 신혼여행 중에도 카밀라가 선물한 커프스를 달았다. 결혼한 다이애나의 눈에 찰스의 간통이 보이지 않았을 리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카밀라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여러 번 요구했다. 그러나 찰스는 오히려 "다이애나가 괜한 걸로 트집 잡아 오해한다."며 뻔뻔하게 카밀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다이애나는 자살 시도에 거식증과 폭식증으로 심신이 지쳐갔다.

다이애나가 15년 간의 왕실 생활을 하며 괴로워했던 여러가지 이유 중 하나는, 딱딱하고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절제하며, 국민들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마치 딴 나라 사람들처럼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왕족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왕족들은 외부인 출신 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와 사라 퍼거슨을 은근히 소외시켰으며,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것에도 두 며느리를 번번히 제외시켰다. 왕족들은 찰스와 비교도 안 될 만큼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에 대해 비밀리에 악의적으로 타블로이드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으며, 왕실이 결정한 일에도 마치 다이애나가 골칫덩어리인냥 이미지메이킹을 하는 데에 바빴다.

다이애나의 왕실 생활이 계속될수록 왕궁 내에 그녀의 적들이 많아졌다. 찰스 왕세자의 귀족 친구들은 타블로이드에 다이애나를 향한 악의적인 기사를 내도록 지시했고, 궁정인들은 다이애나의 전화를 도청하고, 휴지통을 뒤져 다이애나가 사용한 서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궁정인들의 행보에 숨막힐 듯한, 폐소공포적인 왕실 생활에 다이애나의 불안감과 우울함은 고조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 뿐만이 아니라, 은근히 자신을 따돌리는 왕족들과 가식적이며 허울 뿐인 군주제에 불만을 품었다. 다이애나는 그녀가 국민들을 만날 때 혹은 공무를 수행할 때에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러나오는 말과 행동만을 했다.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버린 다이애나는, 훗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감정표현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쳤다.

후에 다이애나가 1995년, 마틴 배셔와의 인터뷰 도중에 말했듯이, 왕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고, 꼭두각시처럼 조용하게 왕세자의 옆을 지켜주지 않는 그녀의 다른 왕족들과는 다르게 통통 튀고, 자꾸만 왕실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에, 그녀를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왕실은 나를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왕비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라고 다이애나는 말했다. 이를 보아 다이애나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지를 알 수 있다.



1995년에 남편과 아들 둘과 함께한 가족 사진.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다이애나는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 찰스의 간통을 호소하기에 이르지만, 다이애나의 간청을 들을 때마다 여왕은 "왕세자는 구제불능이구나."라는 대답만 반복하고 찰스에게 어떠한 꾸짖음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시아버지인 필립 마운트배튼 공만이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왕실은 왕세자 부부의 화목한 모습을 바라는 대중을 위해 끊임없는 언론플레이를 실시하고, 다이애나는 언론플레이에 맞춰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일을 반복하였다.

비록 찰스 왕세자의 진심 어린 사랑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슬하에 두 아들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를 출산해 차기 대통을 잇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를 다한 다이애나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듯 아들들을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양육하였다. 동서고금 어린 왕자와 공주의 양육을 유모에게 맡기는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이례적으로 모유를 먹이며 두 아들을 직접 돌보는 양육법을 고수하였다.


장남이자 후계자 윌리엄 왕세손을 바라보고 있는 다이애나 스펜서


다이애나와 윌리엄, 해리

어머니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성장한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는 미래의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세대로 부각되었으며, 왕실에 오만 정이 떨어진 다이애나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본인이 어렸을 때처럼 부모의 이혼으로 자식이 불행해지는 것을 막기위해,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을 15년 간 지속했다.

한편, 다이애나의 관심은 왕실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라는 지위로 대외 활동에 나선 다이애나에 대한 영국 국민의 인기는 매우 높아졌고, 왕실은 찰스 왕세자를 대신해 인기를 독차지한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며 다이애나를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분노한 다이애나는 더 이상 참고만 있지 않았다.

찰스 왕세자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보란 듯이 승마 교관이었던 제임스 휴이트와 맞바람을 피우는가 하면, 왕실 근위병 및 경호원들과의 연애를 하며 염문설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실 전기 작가의 손을 빌려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과 왕실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모두 폭로, 고발하는 책을 출판하고는 1992년 12월 9일부터 별거에 들어갔다. 다이애나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찰스의 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찰스와 다이애나의 불화설이 조금씩 언론에서 보도가 되고 있었는데, 이 때를 틈타 찰스의 귀족 친구들은 마치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을 망친 주범이 다이애나라는냥, 다이애나가 편집증을 앓고 있으며 마치 미친 여자인 것마냥 기사를 내보냈다. 결국 10여년 간 참고 있던 다이애나는 폭발했고, 그것이 책을 집필하게 한 이유였다. 별거에 돌입한 다이애나는 비교적 자유로워졌으나, 그녀를 향한 파파라치와 각종 언론들의 폭발할 것 같은 관심에 그녀의 마음은 점점 피폐해졌다. 결혼 생활 정리와 의전 문제를 마무리 짓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1995년 BBC와 인터뷰한 다이애나는 "왕실과 남편이 체면치레를 위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대놓고 비난의 칼날을 세웠고, 결국 1996년 8월 28일 최종적으로 찰스 왕세자와 이혼했다.[12]

'마마/전하(Her Royal Highness)'라는 경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왕위 계승 서열 2위와 3위 왕자의 어머니라는 점을 참작하여 '왕세자비(Princess of Wales)'이라는 직함은 유지하고 양육권을 나누어 가졌으며, 이전부터 살던 켄싱턴 궁전에 계속 거처할 권리와 함께 1,700만 파운드 위자료[13]를 받았다.

나중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는 웨일스 공비(=왕세자비)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콘월 공작 부인(Duchess of Cornwall)으로 불린다. 사실 영국 헌법부에서는 "찰스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카밀라가 왕비(Queen consort) 칭호를 쓸 수 있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하원의 반대와 국민의 여론에 밀렸다. 또한 추문을 일으킨 탓인지 왕실은 왕의 배우자(princess consort)를 쓰도록 정했다. 하지만 2018년 기준으로 이 내용에 관련된 언급이 모두 삭제되었고, 사실상 찰스가 왕이 되면 Queen Consort를 쓸 확률이 높다고 한다.

훗날 공개된 다이애나의 인터뷰에 의하면 이미 결혼 직후부터 불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2004년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 내용, 원본 영상.[14]

3.4. 활발한 사회 활동[편집]

자선과 봉사에 열성적이었던 다이애나는 테레사 수녀와도 가까워졌는데, 공교롭게도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급서한 뒤 1주일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9월 5일 테레사 수녀도 선종하여, 언론들은 '세계는 연인과 어머니를 모두 잃었다'며 추모했다.

왕세자비 시절부터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다이애나는, 이혼한 뒤로는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이며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관여했던 다양한 봉사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애착을 가졌던 사업은 대인지뢰 제거운동이었다. 그녀의 사망 직후인 1997년 하순에는 대인지뢰 금지 국제운동 본부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열성적이고 진심어린 다이애나의 사회 활동에 전 세계는 감동했고, 그녀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당연히 그에 비례해 영국 왕실의 인기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테레사 수녀와 다이애나

1997년 1월, 앙골라를 방문해 대인지뢰 제거 현장을 찾은 다이애나

3.5. 비극적인 죽음[편집]


영국 시간으로 오전 7시 쯤에 방송된 BBC의 추모방송,[15] 느린 영국 국가와 함께 유니언 잭이 반기 형태로 걸린 영상과 함께 'Diana, Princess of Wales(다이애나 왕세자비) 1961-1997'이라는 자막을 송출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원래라면 왕가[16]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내보내야 하는데 유니언 잭을 내보냈다고 댓글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방송은 녹화해 CNN에서 다시 내보냈다.

(여자 아나운서 멘트) (여기는 런던 BBC 텔레비전입니다.)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뉴스 스튜디오에서 마틴 루이스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마틴 루이스 앵커) 여기는 런던 BBC 텔레비전입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프랑스 정부가 새벽 5시에 발표했습니다. 버킹엄 궁전 측에서는 곧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늘 지구촌의 톱뉴스는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사망 소식이었습니다. 찰스 왕세자와 이혼한지 1년 만에 다이애나 비는 오늘 새벽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그녀와 함께 차에 타고 있었던 이집트의 억만장자 애인도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20살에 왕세자비가 된 후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숱한 얘깃거리를 안고 살아온 다이애나 비는, 마치 프랑스 영화의 슬픈 피날레처럼 36세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권재홍 앵커의 1997년 8월 31일 일요일 MBC 뉴스데스크의 오프닝 멘트.


다이애나가 이혼한 후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피할 수 없었고, 그 중에서도 이집트 출신으로, 런던 해로스 백화점과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풀럼 FC를 운영하는 백만장자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아들인 42세의 도디 알파예드와 연인 관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집사의 증언에는 그가 아닌 파키스탄 출신의 하스낫 칸이 연인으로 추정된다.

다이애나는 찰거머리처럼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변장까지 했지만 완전히 따돌리지는 못했다. 이미 영국 왕실과 싸운 적도 있는 다이애나는 참지 않고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파파라치 1명을 잡아서 패기도 했고, 파파라치의 사진기를 압수하기도 했고, 마틴이라는 유명한 영국 파파라치를 300m 안에서 접근 못하도록 접근금지령 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그러자 마틴은 "그까짓 사진 좀 찍히는 게 무슨 대수라고요! 다이애나보다 내가 더 고통스러운 처지예요!" 라고 징징거리며 망언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다이애나의 사진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였고, 그녀가 알 파예드와 요트에서 밀회를 즐기는 사진은 1997년 당시 돈으로 30억원에 팔렸다. 이러니 파파라치들 눈이 안 뒤집어질 수가 있었을까. 아예 사진과 영상을 조작해서 판매하는 일도 부기지수였다. 다이애나가 애인의 등 위에 타고 말처럼 몰고 다니는 영상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는데, 돈을 노린 조작이었던 것으로 판명되기까지 했다. 또한 오토바이, 차, 요트, 헬리콥터까지 총동원된 도촬 작전이 벌어졌다.

운명의 1997년 8월 31일, 프랑스 파리.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이 제공한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에 올라탄 다이애나와 도디 알파예드를 파파라치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갔다.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인 벤츠는 중심을 잃고 퐁드랄마의 지하차도 기둥에 충돌했다. 운전사 앙리 폴과 도디 알파예드는 즉사했고 다이애나는 치명상을 입은 채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만, 파파라치들은 그녀를 구출하려 하기는 커녕 그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들이대며 플래시를 터뜨려댔다. 그녀는 약 20분 후에야 지나가던 시민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당연히 이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선한 사마리아인 법)로 체포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비난 받았다. (체포 당시 머그샷과 이름.)

잡지사들은 죽어가는 다이애나의 사진을 사겠다고 파파라치들에게 비밀리에 수억 원의 돈을 제시했다가 CNN에 의해 폭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다이애나의 남동생 찰스 스펜서 백작이 '파파라치들에게 인정사정없이 다이애나 사진만 찍게 한 신문사들이여, 기어이 당신들의 두 손에 다이애나의 피를 묻히게 되었구나!'라고 매우 격앙된 비난을 하였다.

20세에 왕세자비가 되어 15년 간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막 자유로워진 다이애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6세 71일의 짧은 삶이었다.

도디의 사후 그의 아버지 모하메드 알 파예드는 그의 아들과 다이애나의 죽음에 영국 왕실, 특히 다이애나의 시아버지필립 마운트배튼 공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그러나 왕실 사람들중 다이애나가 힘들때 위로해준 사람은 마운트배튼 공 밖에 없다고 하니... 참고로 알 파예드는 매우 성공적인 사업가지만, 영국유럽에서의 현지 평판이 원래 매우 나쁜 인물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로는, 조폭이 유력 기업을 소유한 꼴이었다. 그래서 다이애나가 알 파예드의 아들과 연인 의혹이 있다는 것에 더욱 왕실의 분노를 샀다. 또한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도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재혼할지도 모른다는 데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알 파예드는 유명한 바람둥이로 첫 결혼을 8개월 만에 끝낸 것으로 유명했고, 이미 모델 출신 약혼녀까지 둔 상태에서 염문을 뿌리고 있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그의 별장들을 순회할 때마다 각 지역의 모델들을 불러서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아직도 다이애나의 죽음에는 많은 의문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높은 수준의 프랑스의 응급치료가, 다이애나에겐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국가의 응급의료 시스템이 훈련된 구급대원을 사고 현장에 보내 이송 중 환자 상태의 악화 방지 혹은 지연을 목표로 피동적 대응을 한다면, 프랑스의 응급의료 시스템인 SAMU는 현장에 구급대원만이 아닌 의사를 동행시켜 악화 방지, 지연만이 아닌 상태 파악, 진단과 그에 따른 조치 등 좀 더 적극적인 의료 대응 시스템을 갖고 있다. 이런 프랑스 의료 체계는 마이클 무어가 만든 식코에서도 잘 나온다. 수십년 뒤 코로나19로 인해 실상이 까발려 지지만 일단 넘어가자

다이애나의 교통사고가 영국 왕실&정보부의 공작이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 제시하는 다른 의혹들은 영문 위키피디아 문서를 참고하자.

그리고 다이애나비가 사망한 1997년 만들어진 '다이애나비 추모 기금'이 있으며 2013년 윌리엄 왕자 부부와 해리 왕자 부부가 함께 활동한 '왕립재단'에 불입됐으며 수년간 모금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유산이나 기부금을 통해 자금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4. 전세계의 추모의 물결[편집]

누나라고 부를 수 있어 자랑스러웠던, 한 여인의 삶에 감사를 표합니다.
독특하고 복잡하고 특별하고 유일무이했던 다이애나.
내적, 외적으로 모두 아름다웠던 그녀를 우리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찰스 스펜서[17],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읽은 추도사의 마지막 부분.

다이애나의 갑작스런 사고사는 세계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특히 다이애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대단했던 영국 국민의 상실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영국 국민들 한명 한명 모두 다이애나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다. 다이애나의 행보는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발이 강했던 노동자계층이나 서민계층 심지어 공화주의자 계층에게서도 진심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다이애나의 인생에 대한 재평가가 속속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이애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꽃다발이 생전에 거주하던 켄싱턴 궁전 앞에 쌓이기 시작했다.

 

 

위의 사진에 하얗게 보이는 것들이 전부 다 켄싱턴 궁전 정문 앞에 쌓인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꽃다발들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가 머물던 버킹엄 궁전 앞에도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항의의 표시로 꽃다발이 쌓여갔다. 그렇지만 왕실은 찰스 왕세자와 이혼해서 왕실을 떠난 다이애나의 죽음에 쌀쌀한 반응을 보였다.[18]하지만 이러한 왕실의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한 국민들의 대규모 분노를 불러왔다.

왕실의 차가운 반응에 그렇지 않아도 엄청난 상실감에 휩싸여 있던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 왕실이 다이애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는 여론이 떠올랐고,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의 분노는 이례적으로 극도로 커져갔으며,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이례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다이애나의 죽음을 왕실이 추모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왕실은 기존의 입장을 번복해 다이애나의 장례를 왕실장으로 치르고 전세계에 텔레비전으로 방영했다.[19] 당시 왕실에 대한 영국 국민들의 여론은 수백년만에 최악을 찍었으며, 왕정 폐지의 지지율이 사상 처음으로 50%에 육박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지금은 다시 10% 안팎으로 폭락했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결혼생활과 죽음은 영국인들의 왕실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완전히 지우지 못하고 있고,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금 더 개방적인 분위기로 왕실을 개편해 왕실지지율을 올린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씻을 수 없는 흑역사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찰스 왕세자는 아예 이것때문에 국민들에게서 왕위에 오르는것에 반발을 받고있으니 뭐..

 

 

(왼쪽 사진) 필립 마운트배튼, 윌리엄 왕세손, 다이애나의 남동생인 스펜서 백작, 해리 왕자, 찰스 왕세자.


다이애나의 왕실장 영상. 노래는 버니 토핀이 개사하여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Candle In The Wind 1997. 생전의 다이애나와 매우 절친했던 엘튼 존은 "내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보나마나 '다이애나와 사귄다'라고 난리법석을 떨었을 것이다."라고 황색 언론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추모 방송에서 그는 이 노래를 피아노로 연주하며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다이애나의 무덤

 

(왼쪽)다이애나 & 찰스 왕세자의 약혼 반지
(오른쪽)캐서린 미들턴 & 윌리엄 왕세손이 물려받은 결혼 반지

다이애나의 장례식은 런던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1997년 9월 6일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올소프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14년이 흐른 2011년 4월 29일, 다이애나의 큰아들인 윌리엄 왕세손은 어머니를 떠나보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약혼녀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해석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인생에서 가장 경사스러운 의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우선 윌리엄이 언론에 결혼을 발표하면서 약혼녀인 캐서린 미들턴의 손가락에 끼워준 사파이어 반지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약혼반지였다. 그리고 결혼식이 있기에 앞서 윌리엄은 올소프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에 캐서린과 함께 참배했다.

윌리엄과 캐서린의 결혼식 당일 강론한 리처드 샤트레스 주교는 다이애나의 10주기 추도식에서도 강론했으며,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추모곡을 열창한 가수 엘튼 존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청받았다.

또한 예식 때 부른 성가 <전능하신 여호와여>는 다이애나의 장례식 때 불렸던 곡이기도 하다.[21]

사고 현장이었던 퐁드랄마 지하도 위에는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금빛 불꽃 모양의 조형물이 1999년에 세워졌다. 사람들은 윌리엄의 결혼식 날 여기에 꽃다발을 헌화하며 다이애나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마이클 잭슨이 HIStory World Tour를 진행할 때 다이애나가 사망하자 그날 예정되었던 공연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곧 진행된 투어를 다이애나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Heal the World"를 공연할 때 그녀의 사진을 3분 간 게시하였으며, 추모의 의미로 "Gone Too Soon"을 불렀다.

5. 가족관계[편집]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 자녀

1남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자
(Prince William, Duke of Cambridge)

1982년 6월 21일(38세)

캐서린 미들턴
슬하 2남 1녀[22]

2남

서식스 공작 해리 왕자
(Prince Harry, Duke of Sussex)

1984년 9월 15일(35세)

메건 마클
슬하 1남[23]

6. 이모저모[편집]



영국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연방 왕국에서도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1983년에 찰스와 당시 갓난아기였던 윌리엄 왕세손과 함께 호주를 방문했을 당시 찰스 왕세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처음 봤다."고 했을 정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마이클 잭슨과 친밀한 관계였다. 두 명 모두 20세기 가장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많은 공감대가 있었고 각자의 아픔을 이해했다고 한다. 1988년, 마이클 잭슨은 Bad World Tour를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콘서트 직전 다이애나와 찰스를 만나 45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때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다이애나는 마이클 잭슨에게 그의 히트곡 "Dirty Diana"[24]를 공연할 것인지 물었고, 잭슨은 그녀를 위해 당시 콘서트의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고 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에요."라고 말했고, 그 노래는 콘서트에서 공연되었다.





1992년 11월, 한국을 공식 방문하여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도 회동 및 만찬을 가진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미 남편 찰스 왕세자과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고, 공개 석상에서조차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국 방문 1달 후, 공식 별거를 선언했다.[25] 청와대 영빈관 만찬 영상을 보면 찰스가 환영 만찬의 답사를 읽을 때 다이애나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당시의 한국 방문은 찰스, 다이애나 두 사람이 부부로서 함께 공무를 수행한 마지막이었던 셈이고, 때문에 지금까지도 둘의 비극적인 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영국괴상한 사이비 국가에 별 관심이 없어 그 나라와 관련된 우표는 하나도 만들지 않았지만, 북한에서 기념우표를 만들었다. 북한이 외화를 벌기 위해 기념우표를 남발하여 수출하는 케이스 중 하나이다.[26] 실제로 이 우표들은 북한으로 역수입되어 유통되지 못하게 소인이 찍혀 있다. 비행기[27]가 3번째 우표를 겨냥하고 있다



2011년 7월 1일, 살아 있었다면 50세가 되었을 다이애나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뉴스위크지가 그녀의 50세 모습을 CG로 합성해 고인드립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저 표지가 실린 뉴스위크지에는 "다이애나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존했다면 어땠을까"를 다룬 가상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연적 카밀라 파커 보울스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사와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트위터 팔로워를 1천만명 이상 거느리며, 큰며느리 캐서린 미들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젊은 며느리의 등장으로 다이애나의 위치가 예전 같지는 않을 것이고, 도디 알파예드와 이혼한 뒤에는 어째 이혼한다고 못이 박혔다? 뉴욕에서 거주하며 각종 자선사업의 후원자로서 열성적으로 활동할 것' 등이었다.

신장이 178cm인데, 서양 여성임을 감안해도 키가 상당히 크다. 실제로 학창시절에 발레에 소질이 있었지만, 키가 너무 커서 계속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본 문서에 올라와 있는 테레사 수녀와 같이 찍은 사진만 보아도, 다이애나가 얼마나 키가 큰지 알 수 있다. 생전에 방일했을 때 나루히토 천황과 같이 찍힌 사진에서도 그보다 훨씬 더 컸다.[28] 다이애나가 장신인 덕분에 그녀 소생인 윌리엄 왕세손, 해리 왕자 모두 190cm에 육박하는 장신으로 자랐다. 심지어 찰스 왕세자는 결혼 기간 내내, 다이애나가 자신보다 키가 커 보일까봐 같이 다닐 때 아내가 하이힐을 신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한다.[29]

큰 키와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 답게 패션센스도 평균이상으로 갖췄는데, 항상 다리 뒤쪽으로 봉제선이 있는 팬티스타킹 중에서도 발 뒷꿈치에 장식이 달린 원 포인트 스타킹을 즐겨 신었다. 비록 이혼했으나 한때 영국 왕실의 구성원이었고, 유행을 만드는 패션센스로 인해 언제나 파파라치들의 중요한 취재대상이었다.

영국의 락 밴드 오아시스의 곡 'Falling Down'의 뮤직비디오는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영국 왕실에서 결혼으로 맺어진 왕가의 일원, 불륜, 그리고 결정타로 뮤직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찰스 왕세자까지 다이애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여동생으로, 스캔들이 엄청났던 마거릿 공주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이애나가 오아시스 멤버들에게 경멸받을 만큼 먼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다닌 것은 아니었으며, 배우의 생김새도 마거릿 공주와 닮았다. 결정적으로 뮤직 비디오를 감독한 Wiz가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의 일종의 가상 남매로 마거릿 공주를 설정했다"고 밝혔다.기사[30] 결국 영국 왕실의 이면을 혼합한 것으로 보는게 옳을듯하다.

영국의 여배우 나오미 왓츠가 주연을 맡고, 몰락으로 유명한 독일의 히르슈비켈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다이애나>가 2013년 9월에 영국에서 개봉했다. 예고편. 그러나 지독한 혹평을 받았다. 나오미 왓츠는 "정말 안 어울린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첫 주 흥행은 겨우 62만 파운드에 그쳤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2세를 다룬 영화 <더 퀸>은 개봉 첫 주에 250만 파운드를 넘게 벌었다. 한국에서는 2014년 3월 6일 개봉했다. 제목만 보고 가면 다이애나의 일생을 다룬 전기영화로 오해하기 쉬우나, 다이애나와 파키스탄 외과의사의 연애를 다룬 영화라서 아무것도 모르고 보면 매우 실망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디에 중점을 맞춰야 할지 갈팡질팡하다 끝나는 경향을 보인다. 이름도 유명한 파예드는 영화 막판에 5분 정도밖에 안 나오며, 찰스 왕세자나 왕실의 주요 일원들은 등장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윌리엄 왕세손해리 왕자는 딱 한 컷 얼굴은 보인다.

영드 스푹스 시즌 4에서 다이애나의 죽음이 계획되었다는 설정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고, 사고가 맞았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으로 한 영화로 제작한다.#

2015년 5월 2일, 윌리엄 왕세손캐서린 왕세손빈의 둘째(장녀)인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가 태어났다. 샬럿과 엘리자베스는 왕실 가족들의 이름에 자주 등장해 할아버지 이름의 여성형 또는 조지 4세의 왕비의 이름(샬럿), 증조할머니 또는 고조할머니 또는 외할머니(캐롤 엘리자베스 미들턴)의 이름이나 어머니(캐서린 엘리자베스 미들턴)의 이름(엘리자베스)을 붙였다는 해석이 분분했지만, 다이애나만은 빼도 박도 못하게 샬럿 공주의 할머니인 다이애나 스펜서 뿐이다.[31] 윌리엄이 "딸을 낳으면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다이애나라 짓겠다"고 평소에 말하고 다녔던 것도 한 몫 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 엘리자베스 2세가 건재한데다가, 찰스와 결혼한 카밀라도 있으니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퍼스트 네임으로는 쓸 수 없기에, 미들네임으로 넣은 듯하다.

다이애나의 죽음과 관련한 애너그램이 있다. Princess Diana(다이애나 비) → End is a car spin(끝은 교통사고). 원래 이런 식의 애너그램은 짜 맞추기이므로 그냥 재미로만 보자.

미국의 인터넷 예언가 솔로그(sollog)는 자신이 다이애나 비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주장했다가 전세계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지만, 기록으로 인해 사실로 드러남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엘튼 존의 절친이라는 사실 때문에 게이 커뮤니티에서 환영받는 인사 중 하나다. 다이애나의 죽음에 수많은 게이들이 안타까워했다고. 미디어에서의 예로 미국 드라마 모던 패밀리에서 게이 역인 캐머론 터커가 "그때 난 제정신이 아니었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을 접했을 때라고." 하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017년에 별세 20주기를 맞아 런던 켄싱턴 궁전에 다이애나 비의 모습을 새긴 영구적인 동상을 세운다.#


윌리엄 왕세손의 세 아이 중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만이 다이애나를 많이 닮았다. 다이애나의 조카, 키티 스펜서의 어린 시절과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머지 두 아이는 모두 외가 미들턴 쪽과 비슷하다.

7. 관련 문서[편집]

[1] 아름다운 미모와 훌륭한 인품, 세계적인 외교 봉사 활동으로 서민들이 사랑했던 왕세자비라는 의미.[2] 다이에나 왕세자비의 추모식 엘튼 존버니 토핀이 자신의 노래를 개사한 유명한 Candle In The Wind 1997의 첫 마디, Goodbye England's Rose. 다이애나를 생각하는 영국인들의 기억에 적절한 단어.[3] 전통적으로 영국왕세자비라는 뜻. 직역하면 웨일스 공비.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칭호도 프린스 오브 웨일스[4] 이혼왕족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왕실 특성상 현 왕자들을 낳은 왕세자의 정부인의 의미에서 왕세자비 칭호는 그대로 유지했다. 사망한 후 찰스 왕세자가 재혼하면서 현 왕세자비는 카밀라 파커 보울스가 되었다.[5] 영국은 자주왕국이므로, 그 후계자는 왕세자가 아닌 왕태자로 봉해진다. 따라서 왕태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와 결혼한 다이애나는 왕태자비라고 불려야 하는 것이 맞다라는 주장이 있지만, 동양식 칭호를 억지로 서양의 번역어로 짜맞출 필요가 없으며, 주한영국대사관에서는 왕세자 등으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옳다.[6] 바로 위에 오빠 존이 있었으나 태어난지 10시간만에 사망하였다.[7] 미국 NBC 방송사의 기자 및 특파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이튼 스쿨옥스퍼드 대학교(현대사 전공)를 졸업했다.[8] 그러나 지금 현재의 스펜서 가문의 재산은 그닥 많지 않다. 다이애나의 남동생이자 윌리엄과 해리의 외삼촌인 찰스 스펜서 백작의 거듭되는 사업 실패로 스펜서 가문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라고. 때문에 윌리엄과 해리의 외사촌인 키티 스펜서(Lady Kitty Spencer)는 아버지 뻘되는 갑부와 결혼한다고 한다. 참고로 키티 스펜서는 고모인 다이애나를 닮아 굉장히 미인으로 유명하다. 해리 왕자의 결혼식에서 신부인 메건 마클보다 뛰어난 미모로 주목을 받았을 정도.[9] 찰스는 다이애나와 열두번 만난 후 청혼했다고 한다.[10] 이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뮤지션 마이크 올드필드가 작곡한 "Royal Wedding Anthem"이다.[11] 비슷한 드립을 존 F. 케네디도 친 적이 있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미국 대통령인 자신보다 젊은 영부인재클린이 더 많은 관심을 받자,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한 것. 물론 이쪽은 찰스와 달리 JFK의 여유와 유머를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12] 이후 찰스 왕세자와의 별다른 접촉이나 충돌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찰스 왕세자는 비통한 표정으로 장례식에 참가했지만, 속마음은 어땠을지...[13] 18년 현재가치로 따져도 260억에 달하는 돈. 23년 전이니 그 가치는 배 이상이다.[14] 해당 인터뷰는 다이애나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92년에 촬영된 것이다.[15]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16] 이혼하기 전에는 이 깃발을 썼으나 이혼 후에는 이 깃발을 쓴다. 관에도 덮어진 깃발이 바로 이것.[17] 다이애나의 남동생. 현 제9대 스펜서 백작이다.[18] 사실 엄밀히 말하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가 맞을 것이다. 왕위 계승 서열 순위 1위인 왕세자가 왕세자비와 이혼한 사실도 흔한 상황이 아니지만, 이혼한 뒤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왕가에서 그동안의 전례도 없고, 예법도 없는 상황에서 장례를 치뤄야 했다. 여러가지로 예법상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었으나, 당시 국민 정서상 예법대로 했다면, 현재 영국의 왕실이 남아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운구가 지나갈 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장면 등은, 아직도 예법에서 어긋난다고 한다.[19] 이 사연을 엘리자베스 2세의 시각을 중심으로 다룬 영화가 2007년 개봉한 <더 퀸>이다.[20]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이 사그라 든 것도 있지만 영국 왕실에서도 자신들의 씀씀이를 대폭 줄이는 등 지지를 회복하게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물론 지금도 "태생 잘 태어나서 세금 처먹는다"는 논란은 끊이질 않는다.) 찰스 왕세자의 불륜녀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도 자신에 대한 반감을 어떻게든 줄이기 위해 흠잡히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그래도 아직도 다이애나를 기억하는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마녀"라며 찰스 왕세자와 함께 왕실에서 제일 인기가 없으며, 심지어 찰스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후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적지 않을 정도이며, 영국정보부의 암살의혹조차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이다.[21] 새찬송가 451장, Cwm Rhondda로도 알려져 있는 웨일스 민요가 원본이다.[22] 케임브리지의 공자 조지, 케임브리지의 공녀 샬럿, 케임브리지의 공자 루이[23] 아치 마운트배튼윈저[24] 이 곡에서 Diana는 그루피를 지칭하며, 이름이 다이애나인 왕세자비에게 결례를 끼칠 가능성을 고려하여 당시 세트 리스트에서 제외된 곡이었다.[25] 당시 동영상을 보면, 다이애나의 표정이 계속 굳어있다가 아이들이 꽃다발을 건넬 때만 잠깐 미소짓는 것을 볼 수 있다.[26] 북한은 심지어 대만을 넘어 동아시아의 유명한 가수였던 등려군의 추모 우표까지 만들었다.[27] 저 비행기는 영국항공콩코드이다.[28] 나루히토 천황은 키가 작은 편이다. 배우자인 마사코 황후보다도 작다.[29] 찰스 왕세자도 키가 178cm이다.[30] Director Wiz told NME.COM that the lead actress in the video is playing the role of “a contemporary Princess Margaret – a sister of William and Harry maybe”.[31] 게다가 샬럿 엘리자베스 다이애나 공주가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은 성당은, 할머니인 다이애나가 세례를 받은 성당이기도 하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윌리엄 왕세손의 세 자녀 중 샬럿만이 유일하게 다이애나를 닮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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