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이 말은 양명학의 골격이다.
그렇다면, 양명학이 뭘까요?
양명학이 다소 생소한 학문이라 생각하신다면, 주희의 성리학을 떠올려 보세요.
성리학은 뭔지 잘 아실겁니다. 바로 조선의 근간이 되는 학문이었으니 말이죠. 양명학은 성리학과 대비되는 학문으로써, 수세기동안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건너가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왕명학이란 학문을 창시한 인물이 바로 왕수인입니다.
주희와 더불어 신유학의 한기둥을 담당했던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청년 왕수인,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다. 그의 호인 '양명'에 성을 붙인 '왕양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왕수인 명와조가 수립된 백여 년 후인 1472년, 지금의 저장성에 있는 여요에서 명문의 자손으로 태어납니다.
11세였던 왕수인은 "공부의 목적은 과거 급제에 있다"는 스승의 말에 "아닙니다. 공부는 성인이 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유명한 일화만큼 그는 뛰어난 학구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부에만 뜻을 두지 않고 시인이였던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빼어난 시를 쓰기도 하였고, 15세에는 북방을 유람하고는 장차 위대한 장군이 되겠다는 방대한 꿈을 꾸는 소년이기 하였습니다.
이렇게 관심분야가 다양했던 왕수인이 학문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던 때는 18세인데, '누일재'라는 학자를 만난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공부한 왕수인은 3년만에 위기를 맞게 됩니다.
'격물치지'의 일환으로 뜰에 서 있는 대나무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7일 동안 꼬박 대나무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얻을 것은 없는 채 병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왕수인은 주자학 공부에 회의를 품고, 문학, 병법, 도교와 불교 공부 등에 다시 마음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고난 속의 깨달음, "마음이 모든 것이다!"
35세가 되던해, 평온했던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풍파가 찾아옵니다.
유근이라는 환관과의 대립 때문이었는데요.
왕수인은 그의 비리를 고발하다 오히려 처벌받은 관리들 편에 서서 맞서다 그만 왕수인 역시 처벌받고 귀양길에 오르게 됩니다.
용장이라는 유배지에서 1년을 지내는 동안, 그는 비로소 사상가로서 틀을 잡게 됩니다.
왕수인은 모든 것을 이치로 파악하는 주자학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음을 밝히고, 진정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내 마음은 밝게 빛난다."
이렇게 "용장에서의 큰 깨달음"을 얻은 왕수인은 1509년에 유근이 실각, 처형되자 유배에서 풀려나고 다시 관리가 됩니다.
한동안 지방관으로 일하는 동안, 그는 근무하는 한편으로 자신의 학술을 가다듬고 제자를 기렀습니다.
45세부터 약 4년 동안 어사로서 각 지방의 도적을 토벌하면서, 그동안 열중했던 병법 실력을 발휘하여 매번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러는 중에 무너진 향촌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여러 제도도 고안해서 시행하기도 합니다.
십가패법, 민병제, 명나라에서 최초로 시행한 향약 등 후에 명나라 중앙정부에서 정식 채택을 함으로써 큰 영향을 끼치게 되죠.
왕수인이 영왕의 반란을 진압할 때 처음 사용한 화포 그는 학술과 교육에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대학]의 주자학적 해석을 반박하는 [고본대학], 자신의 사상을 풀어낸 대표작[전습록] 주희의 사상이 만년에는 많이 바뀌었으며, 자신의 양명학은 그 주희 만년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한 [주자만년정론] 등을 펴냈습니다.
심즉리와 치양지
그렇다면 양명학은 과연 성리학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왕수인은 세상의 이치를 직접 궁구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고 바로잡음으써 그곳에서 이치를 밝혀내는 방식, 이것을 "마음이 곧 이치이다. 세상에는 마음만이 있으며, 마음 없이는 아무런 이치도 없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었으므로 양명학을 심학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주희와 달리 왕수인은 사람의 마음에는 본래 선악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선택할 때 지를 사용하는데, 만약 제대로 안다면 선량한 행동을 하고, 양지를 잊어버리고 '어리석은'지로 판단한다면 악한 행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왕수인은 이에 본래의 지를 회복하고, 마음을 가득 채운 다음 보존하는 수양법인 치양지를 주장했습니다.
평가...
전 개인적으로 성리학보다는 양명학을 더 높이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경전이나 스승의 권위를 부정하고 오직 자신의 마음에 선악을 선택할 권리를 준 것, 이것은 곧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와 전통이 권위를 잃고 개인의 의지가 모든 것의 중심에 서세 된 사장적 전환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양명학의 특성에서 "근대성"이란 실마리가 나오는 것은 그 당시 사회질서나 제도를 본다면 매우 획기적이고 뛰어난 발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물론 왕수인 본인은 근대적 사상의 소유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사상이 후에 양명학파에 근대적 사상을 심어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물이라 생각됩니다. |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정의 라엘 리우스 (0) | 2020.08.30 |
---|---|
과학에 있어서, 철학 은 "추론 예술"이다 (0) | 2020.08.22 |
Main thoughts of Hegel's Philosophy (0) | 2020.08.15 |
Hegel -철학백과 사전 0/3 (0) | 2020.08.15 |
https://hegel.net/en/e0.htm (0) | 202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