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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Friedrich Heinrich Jacobi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극작가, 사회주의자, 문학적 인물인 프리드리히 야코비(B. 1743년, d. 1819년)는 노골적인 비평가로, 처음에는 독일 후기 계몽철학의 합리주의, 그 다음에는 칸트의 초월적 이상주의, 특히 초기의 피히테가 그것에 준 형태로, 마지막으로 후기 셸링의 낭만적 이상주의였다.
Polemicist, socialite, and literary figure, Friedrich Jacobi (b. 1743, d. 1819) was an outspoken critic, first of the rationalism of German late Enlightenment philosophy, then of Kant’s Transcendental Idealism, especially in the form that the early Fichte gave to it, and finally of the Romantic Idealism of the late Schelling.
모든 경우에 있어서 철학자들에 대한 그의 반대는 그들의 설명에 대한 열정이 자신도 모르게 개념화의 조건과 존재의 조건을 혼동하게 하여 개인의 자유나 개인적인 신을 위한 모든 여지를 부정하게 한다는 그의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야코비는 개인주의와 개인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여러 가지 공개적인 논란에서 이 점을 지적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는 순환적인 표현과 주제를 집어넣었다.
그는 모든 철학자들의 방식대로 머리 위를 걷고 있다고 생각했던 레싱에게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아 상식을 이유로 다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살토 모탈(머리 위로 점프 힐)을 공연하도록 초청한 사람이었다. - He was the one who invited Lessing, who he thought was walking on his head in the manner of all philosophers, to perform a salto mortale (a jump heels over head) that would redress his position and thus allow him to move again on the ground of common sense.
그는 또한 자신이 철학자들을 비난했던 조건인 '니힐리즘'의 개념을 위조하여 그것과 관련된 담론을 시작하게 한 책임이 있다. 그가 먼저 계몽주의 합리주의 옹호자들을 향해, 그 다음 칸트와 그의 후계자들을 향해 던진 그의 전투적 외침은 '일관 철학은 스피노즈주의자, 따라서 팬티스트, 운명론자, 무신론자'라는 것이었다. 그 공식은 당시의 철학적인 논의의 중심에 스피노자를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칸트와 그의 이상주의 계승자들 앞에서, 야코비는 그들이 '나'의 언어를 사실 원래의 가치를 부정하는 추상적인 것에 기초하여 다시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역행했다고 불평했다. 따라서 그들은 진정한 자아를 하나의 환상으로만 대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야코비의 공식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것은 '도우(너)'가 없이는 '나'가 없고, 두 사람이 초월적이고 개인적인 신 앞에서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But perhaps the most influential of Jacobi’s formulas was the claim that there is no ‘I’ without a ‘Thou’, and that the two can recognize and respect one another only in the presence of a transcendent and personal God. 개인에 대한 그의 방어와 '예외' 때문에, 야코비는 때때로 원생존재자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견해는 야코비가 당시의 문화로부터 위협을 느낀 보수적 가치의 옹호자였다는 점, 자신을 결코 비이성주의자로 보지 않았다는 점, 반대로 자신의 '신앙'이 본질적이고 진정으로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점, 그리고 r의 긍정적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다는 점 등을 고려함으로써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eason. 문학적 인물로서 스투름 und 드랑 운동을 비판하고 두 소설에서 개인주의와 사회적 의무를 조화시키는 문제를 극화하였다. 영국의 경제 및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야코비는 프랑스 혁명의 초기 비판자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파괴력은 철학자들에 의한 투기적 허무주의의 실질적인 상대라고 여겼다.
1. 인생과 지적 경력
2. 주요 철학 작품
2.1 스피노자 레터(1판st, 1785)
2.2 '데이빗 흄' (1판st, 1787년)
2.3 스피노자 레터(2판nd, 1789년)
2.4 피히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1799)
2.5 1800년 이후
3. 문학작품
4. 극지 작품
5. 회상
참고 문헌 목록 일차 문학
2차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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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인 현대 괴테(1749–1832)처럼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는 적어도 당시의 기준으로 측정했을 때 장수의 복을 받았고, 서유럽의 문화적, 정치적 면모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그 과정에서의 사건들을 목격하는 행운을 누렸다.[1]-Like his junior contemporary Goethe (1749–1832), Friedrich Heinrich Jacobi was blessed with a long life, at least as measured by the standards of the time, and had the good fortune of witnessing in its course events that radically altered the cultural and political face of Western Europe. [ 1 ]
야코비는 계몽주의(die Aufklerrung)가 독일 땅에서 자리를 잡고, 특이하게 독일 문화적인 형태로 성숙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후기 낭만주의의 선구자였던 주관성과 자연,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심에 대한 사상을 배양하면서 그것을 보았다. 그는 또한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사건들에 의해 18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격렬하게, 심지어 잔인하게 혼란에 빠졌고, 마침내 19세기의 새로운 질서에 굴복하면서 그것을 보았다. 오랜 투병에도 불구하고, 야코비는 이러한 세상을 흔드는 사건들에 깊이 관여했고,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방대한 문학 활동과 무게 있는 국가 책임을 겸비할 수 있는 괴테의 정치군사적 관여를 갖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분명 영향력 있는 문화정치적 해설가였다. Jacobi는 그의 활동적인 삶 내내, 교육받은 독일 여론 형성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야코비는 또한 사회의 특권층에 속하는 행운을 누렸다. 프랑스 혁명뿐만 아니라 계몽주의도 그에게 단순한 지적 도전 이상의 것을 주었다. 그들은 각기 다
른 방식(제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야코비는 그러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됨)으로, 둘 다 그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가치 체계를 위협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프랑스에서의 사건들이 라인 강을 가로질러 흘러 넘쳤고 그의 삶에 많은 탈구현상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위협도 물리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순수하게 지적인 것 외에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한 그의 반응에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고 야코비의 삶에 대한 완전한 연구에서 면밀한 감시를 받아야 할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와 같이 주된 관심사가 언제 그의 사물에 대한 내부 논리, 즉 그것이 결여되어 있을 때로부터 추상화될 수 있다. 주요 사건들과 그의 삶에서 더욱 영향력 있는 상황에 대한 빠른 검토는 적어도 그의 지적 경력의 징표로서 그에 못지 않게 질서정연하다.
야코비는 1743년 1월 25일 뒤셀도르프에서 유복한 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인 요한 게오르그는 가족이 지적 경력에 발탁한 사람으로, 그는 정말로 글림이라는 감상적인 문체로 시인으로서 어떤 악명을 얻었다. 가족의 상업적 활동을 추구하는 임무는 젊은 야코비를 위해 남겨졌다. 가족에는 이복자매인 야코비에게도 두 딸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지 않았고, 결국 야코비의 집안 관리를 떠맡았다. 자기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야코비, 1785:8; 1787, 67ff; 1789, 328ff ) 야코비는 젊은 시절부터 기질적으로 신앙의 극단에 주어졌고, 신의 존재와 시간의 무한성에 관한 질문으로 끊임없이 고민했다. 확인 후, 그는 이러한 경향이 강화된 동료의 피에티스트 모임에 가입했다. 16살 때, 프랑크푸르트 상업 주택에서 짧고 실망스러운 견습생 생활을 한 후, 그는 1759년에 제네바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그가 임명한 직업에 필요한 사회적 기술을 개발했다. 사회적으로 성숙함에 따라 프랑스 사상에 노출된 야코비 역시 그의 지적 경력을 끝까지 인도할 수 있는 기본 신앙을 정립한 것이 바로 그 도시다. 유명한 수학자 G.L. 르 세이지의 지도 아래 그는 전통적인 학문적 형이상학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심리적인 관능주의의 요소들이 사후세계와 같은 기독교적 신념과 결합(알려진 조화로움까지)된 것을 발견한 샤를 드 보네(Charles de Boinn)의 글에도 힘썼고, 루소의 에밀레(1761년)를 읽었다. 후자에 덧붙여 '사보야드 비카르의 믿음의 프로페셔널'이라는 제목의 선언문은 당대의 합리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성의 종교에 대항하여 '심장'의 권리를 옹호하는 선언문이었다. 당시 야코비의 결심은 실제 존재에 대해 시험해 볼 수 있고 신에 대한 그리움과 모순되지 않는 한 사상 체계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762년 독일로 돌아온 야코비는 철학적 연구를 계속했다. 그는 그해 베를린 아카데미가 후원한 공모전에 대해 모세 멘델스존과 칸트가 제출한 수필을 '형이상학적 과학에 대한 논리적인 증거'라는 주제로 열심히 읽었다. 야코비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비록 1등상은 멘델스존에게 수여되었지만, 야코비는 칸트의 에세이가 멘델스존의 에세이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야코비, 1787: 74–75). 그는 스피노자 연구에도 참여한 것이 분명했고, 칸트의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한 근거' 에세이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야코비, 1787: 78–8. 1764년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맡았고, 아들을 잉태한 가정부와의 불륜 이후, 현대적인 기준으로 매우 초라하게 대했다(Booy/Mortier, 1966년). 그는 부유한 재산가 베티 폰 클레르몬트와 결혼했다. 그녀와 함께 그는 이미 언급된 문학 살롱을 펨펠포트에 설립했다.
1772년 야코비는 자신의 모든 사무를 유능한 처남의 손에 맡기고 훌리히와 버그의 두치 통치 기구에 가입하라는 청첩장을 받아들였다. 그의 임무는 지방 제조업과 조세 관행을 합리화하는 것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1779년에는 뮌헨에도 초청되어 바이에른 땅에서 비슷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이러한 공식적인 활동도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야코비의 자유주의적 견해는 뮌헨의 궁정에서 빠르게 공격을 받았고, 심한 논란에 휩싸인 야코비는 고향인 뒤셀도르프에게 돌아갔다. 이 에피소드에서 문학적으로 낙오된 것은 야코비가 아담 스미스의 경제관을 옹호한 두 편의 에세이 중 출판물(야코비, 1779년 (1) & (2))이었다. 첫 에세이는 야코비가 아직 뮌헨에 재직하고 있을 때 발표되었으며, 그 자체가 그곳에서 그의 고민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런 설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동안, 야코비는 더 인간적인 관심사를 버리지 않았었다.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상업적인 연습으로 여전히 바쁜 와중에 동생 게오르그와 결탁하여 이미 몇몇 작은 문학 출판물에 모험을 한 적이 있었다. 1772년, 야코비가 형을 통해 알게 된 비엘랜드와 함께 메르쿠레 드 프랑스를 본떠 만든 독일 저널의 계획을 발표했다. Deutcher Merkur는 곧이어 Wieland의 편집장으로 등장하였다. 야코비는 1777년까지 이따금씩 쓴 글의 일부의 이동물로 이 일기를 사용했는데, 이때는 정치 문제에 관한 두 사람(야코비, 1781년, 178년, 1782년)의 심한 의견 차이로 인해 윌랜드와의 협업이 막을 내렸다. 야코비의 미래에 더 중요한 것은 다음 해에 일어난 두 개의 다른 사건이었다. 첫 번째는 괴테가 베이스도와 라바터 일행의 펨펠포트를 방문한 것이었다. 이미 유명한 시인과 그 뒤에 나온 야코비의 만남은, 양쪽이 남긴 보고에 의하면, 감정적으로 매우 충만한 성격의 만남이었다(Prantl, 1881: 579).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야코비의 두 소설인 올윌의 브리프삼믈룽과 월드마르는 그 사건 때문에 그들의 기원을 이루었다. 그들은 방문 중에 괴테가 자신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모든 것을 글로 써넣어 달라는 간절한 요청에 대한 야코비의 대답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괴테는 재빨리 야코비 쪽으로 냉정을 되찾아 후자의 실망이 컸고, 나중에(1779년) 막 출판된 볼드마르 신판의 사본(Stockum, 1957년; Sudhof, 1959년; Di Giovanni, 1994년: 52-53년).
다른 사건은 1780년 7월 5일 야코비를 울펜뷔텔로 데려간 긴 여정을 계기로 일어났다. 울펜뷔텔은 레싱이 헤르조그 아우구스트 도서관의 사서였다. 야코비는 즉시 그 유명한 남자를 찾아갔는데, 그 곳에서 레싱의 집에 손님이 왔을 때, 야코비가 지금 유명한 대화에 그의 진행자를 참여시켰다고 야코비의 보고에 따르면 레싱은 자신이 스피노지스트라고 선언했다(야코비, 1785: 10–4. 레싱의 갑작스러운 죽음(1781년)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이루어진 이 주장된 폭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본질과 특히 스피노지즘에 대해 야코비와 모세 멘델스존 사이에 서신을 주고받는 계기가 될 예정이었다. 멘델스존은 당시 레싱의 위대한 친구로, 그리고 그 자신으로서 독일 계몽주의의 예술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교환은 1783년(야코비, 1785:1)에 시작되어, 사랑하는 베티(1784), 작은아들의 조혼으로 야코비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기간에도 계속되었고, 건강도 나빠지고 있었다. 복잡하고 불쾌한 상황의 결과로 - 곧 이어진 논쟁에서, 멘델스존과 야코비 둘 다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 후자는 1785년에 "편지에서 스피노자의 교리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그 편지를 논평으로 완성했다.s는 헤르 모세 멘델스존에게 (스피노자 레터즈)
이 책의 출판이 야기시킨 논쟁의 범위와 격노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스피노즈주의 또는 팬티즘 분쟁(Jacobi, 1916년)이라는 이름으로 문헌에 실려 있다. 멘델스존은 야코비에게 서면(1786)으로 회신했지만, 그의 답장을 활자로 볼 수 없었다.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사망하였다(1786년 1월 4일). 야코비는 회답(1786년)에 응했다. 두 출판물은 모두 몹시 개인적인 어투로 유명했다. 돌이켜보면, 야코비가 제기했던 문제들이 계몽주의가 후원하고 있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본질과 가치에 의문을 품게 되었기 때문에, 그 논란 자체와 그것이 가정한 개인적인 어조가 일리가 있었다. 괴테가 몇 년 후에 언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논쟁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신념을 불러일으켰다.[2] 멘델스존의 죽음은 그의 변호인들(분명히 니콜라이가 이끄는 베를린의 아우프클레이러)이 그들의 영웅을 순교자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이 논쟁을 더욱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 시절의 하만과의 두터운 서신(Jacobi/Hamann, 1955–1979)에서 야코비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건의 상세한 설명을 수집할 수 있다. 하만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팍한 자신의 자신이 반복적으로 친구를 놀리는 것을 삼갈 수는 없었지만, 야코비 편을 들었다. 이 에피소드의 두 가지 예상하지 못한 결과는 당시까지 지엽적인 작가였던 야코비가 대중의 관심의 중심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미 스투름과 드랑의 문학계 사이에서 영향력이 컸지만, 그렇지 않으면 전통적으로 학파의 철학자들로부터 거부당한 스피노자의 철학은 철학적 디스커시오의 대상이 되었다.n.
1787년에 야코비는 데이비드 흄을 신앙, 즉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대화로 출판했다. 그 속에서 그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에서 이성을 둘러싼 글라우베의 영장('신앙' 또는 '믿음')을 옹호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불리하게 제기된 비합리주의의 혐의를 벗기려 했다. 이러한 방어에서 흄의 권위에 호소하기는 했지만, 야코비 역시 자신이 오히려 현실주의자라는 감각을 선언함으로써 후자의 회의론으로부터 억지로 거리를 두었다. 이 대화는 칸트의 '순수한 이성 비평' (1787년) 제2판 출간을 계기로 등장했으며, 칸트의 초월적 이상주의가 혹독하게 비판받는 부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부록은 반칸티즘의 중심 고전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첫 출판 이후 이미 비평에 대해 제기되어 온 주요 반대 의견을 웅변으로 다시 한 번, 다양한 형태로, 앞으로 몇 년 안에 비평에 대해 다시 한번 되풀이할 예정이었다. 야코비가 유명한 quip을 만든 곳이 바로 그곳이다: '[그 자체로 '무엇'의 전제 없이는] [칸트] 체제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 나는 그 안에 머물 수 없었다."(야코비, 1787: 223) 그의 요점은, 알려진 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물 그 자체'를 전제로 하지만, 칸트는 그 시스템에 작용한 많은 기능을 할당함으로써, 사실 그 지식을 증명하고 있었고, 따라서 비판적 무지에 대한 그의 가정과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코비가 이 부록에서 가정한 부정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는 그가 언제나 칸트와 정신적으로 가깝게 느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했다. 그는 칸트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에서 멘델스존의[3] 편을 들었을 때 깊은 상처를 받았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야코비가 이미 초월적 이상주의에 대한 훨씬 더 건설적인 비평을 개발했고, 심지어 대화 자체의 본체에서 그에 대한 정교한 대안까지 제시했다는 사실을 무색하게 하면서, 자기 자신의 리얼리즘을 과시했다는 사실이다(2.2절 참조). 이는 칸트 자신의 일부 제자들에게서 상실되지 않은 대화의 한 단면이며, 포스트 칸트주의 이상주의 발전에 한 요인이 되었다.
1789년 1초에 크게 확대된 스피노자-레터즈 판이 인쇄되었다. 최근 출간된 칸트의 '실용적 이성 비평'(1788)을 반영했다. 많은 추가 사항들 중에서, 그것은 두 개의 사전적 논문집합이 포함되었는데, 첫째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을 주장하면서, 함께 칸트가 제안한 것과 상당히 다른 자연과 자유 사이의 반물질의 해결을 시사했다. 또한 여러 가지 새로운 부록이 포함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야코비의 의견으로는 신에 대한 생각이 상당했던 허더를 반신반의하는 팬티즘에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4] (야코비, 1789년: 349년–357년) 야코비의 인간 자유에 관한 서약서는 곧 K사이에 일어나게 될 이 주제에 대한 논쟁에 큰 영향을 미칠 예정이었다.L 라인홀드와 C. C. E. Schmid. (디 조반니, 2001년) 그 논쟁은 재빨리 다른 많은 성격들, 즉 그들 사이에 피히테를 포함시켰다.
그 다음 해는 하만, 스톨베르크, 헤르더, 괴테의 펨펠포트 방문(1792년 11월)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곧 정치적 사건들은 철학적 담론을 추월하는 것이었다. 루이 16세(1793) 파리에서 참수된 사건은 독일 여론을 충격에 빠뜨렸고, '외로운 사상가의 우연적 외침'(Jacobi, 1795)에서 야코비의 한탄을 자아냈다.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이 라인 강을 건너 뒤셀도르프를 폭격하기 시작하자, 야코비는 펨펠포트를 버리고 북쪽에서 오랜 숙청을 맡았는데, 그의 동료인 많은 친구의 손님이었다(프란틀, 1881년: 582년: 582). 그는 한동안 유틴에 정착했다. 이때 그는 비로소 완성하여 출판한 원고인 '신성한 것'의 작문을 시작했다. 1799년 그는 이른바 '무신론 분쟁'에 연루되었다. 이것은 야코비 자신이 창안하지 않은 피히테의 무신론을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라바테르의 요청에 따라 피히테(Jacobi, 1799)에게 공개서한을 써서, 철학과 특히 새로운 이상주의에 대한 모든 이의제기를 다시 하고, 신앙의 영장성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재확인했다. 그는 또한 피히테를 철학에 대한 자신의 모든 오감을 깨달은 사람으로 꼽았는데, 피히테는 주관성의 관점에서도 스피노지즘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야코비는 편지에 대한 보충서(보완서 II)에서 '이성의 개념에서 자유와 섭리의 개념의 불가분성에 대하여'(Jacobi, 1812–1825)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수집한 작품의 제2권(1815)에 다시 게재한 이성의 본질에 대한 장문의 논평을 포함시켰다. 1802년, 그는 '이성을 이해로 줄이기 위한 비평의 책무에 대하여'(Jacobi, 1802년 (1))를 발표했는데, 이 후자는 특히 칸트를 겨냥했다.
1804년, 야코비는 재정적인 운명의 급격한 반전을 겪었지만, 같은 해 말, 뮌헨으로부터 과학 아카데미 개편에 그곳에서 일하라는 요구로 인해 훨씬 줄어든 생활양식을 면하게 되었다. 야코비는 초대에 응했고 이듬해 뮌헨으로 이사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1807년 개혁 아카데미의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불행하게도 취임 연설에서 남독 문화에 대한 비판을 암시함으로써 최근 아카데미에 초청된 외국인들에 대해 뮌헨에서 이미 느끼고 있는 적개심을 부채질했다(야코비, 1807년 그는 또한 당시 뮌헨 예술 아카데미의 이사였던 셸링에게 반감을 샀다. 1809년 스피노자에 대한 그의 이해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은 셸링의 인간 자유에 관한 글에 대응하여, 야코비는 미완성 원고인 '신성한 사물의 것'을 부활시켜 셸링이 추진하던 새로운 자연철학에 대한 명백한 극본으로 완성하고, 1811년에 '신성한 것의 것'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사물들과 그들의 계시' (Jacobi, 1811). 그 에세이는 셸링의 대답을 자극했고, 결국 야코비의 반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야코비가 연루된 주요 논쟁들 중 세 번째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이전 논쟁들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톤이고 씁쓸한 톤이었다.
1812년 야코비는 은퇴하고 제자들 J. F. 쾨펜과 C. J. F. 로스의 도움을 받아 수집된 작품의 준비를 시작했다(야코비, 1812–25). 세기가 바뀐 이후, 그는 F. D. E. Schleiermacher, J. F.와 같은 젊은 인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감자튀김이랑 F. Bouterwek - 그가 생각을 고취시켰지만 결국 이성의 본질에 대한 그의 최종 정의에 영향을 준 새로운 학자들. 그들은 모두 대조적인 도덕적/종교적 실증주의와 결합한 과학적 실증주의를 공유했는데, 이 후자는 더 높은 가치와 신적인 사물의 실체가 감정에 의해 직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 젊은 세대는 19세기에 야코비의 생각과 태도 중 일부를 대중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오랜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코비는 일부 독일 가톨릭 신학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Weindel, 1950).
1817년, 야코비는 친구 요한 넵에게 보낸 편지에서 헤겔의 2권(Jacobi, 1825–27: vol. 2, 467–68; 디 조반니, 1994: 165–166)에 대한 호평을 언급했다. 헤겔의 에세이 '글로벤 und 위센'('Faith and Knowledge')이 1801년 그에게서 불러일으켰던 분노의 댓글에는 뚜렷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야코비, 1803: 221). 야코비는 헤겔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 옳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허용하고, 헤겔의 철학을 연구하는 것을 방해한 것은 노년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두 사람이 마음의 만남에 올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야코비의 광대한 여행은 그를 1786년 런던으로 데려갔고 1801년 파리로 데려갔다(프란틀, 1881: 581, 582). 비록 프랑스 문화 환경에서 처음으로 철학에 노출되었지만, 야코비는 평생 동안 앵글로필이었고, 영국 철학자들과 프랑스 철학자들을 호의적으로 비교했다. 그는 영국인들이 덕이 스스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고, 그것을 단지 행복의 도구로 만들지 않았다고 공로를 돌렸다. 반대로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철학이 단순한 상식을 넘어 진보하는 순간, 물질주의에 빠지는 도덕적인 문제에서는 항상 너무 성급했다(야코비, 1812–125: vol. 5, 73–74).
야코비는 그의 작품의 기획판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는 1819년 3월 10일에 죽었다.
2. 주요 철학 작품
2.1 스피노자 레터(1판st, 1785)
스피노자 레터스는 번거로운 작업으로, 그 짜임새 없는 구성은 그것이 조립된 서두름을 나타낸다. 제1판은 제2판에 투하된 괴테의 시의 본문으로 시작한다. 이 시는 작가의 이름을 담고 있었지만, 야코비에 의해 기계적으로 편집되어, 그에게 특히 중요한 이미지인 어떤 핵심 구절들을 안도 속에 인쇄했다. 이렇게 편집된 시는 이교도의 신들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때문에 큰 글씨로 쓰여진 인간이라는 생각을 전달하였다. 짐승 같은 자연은 감정이나 분별이 없는 반면, 인간은 판단하거나 구별을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감히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연을 초월한다. 이것은 야코비가 진심으로 동의한 휴머니즘적인 메시지였다. 멘델스존과의 서신 교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한 후, 본문은 다소 약화된 버전의 서신 그 자체로 이어진다. 첫 번째 편지에는 야코비가 볼펜뷔텔을 방문하는 동안 스피노자를 주제로 레싱과 나눈 대화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고, 애초에 대화의 계기가 되었던 괴테의 또 다른 시인 프로메테우스의 본문을 포함시켰다. 지금까지도 출판되지 않은 이 시는 저자의 이름 없이 인쇄되었으며(일부 사람들은 야코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시에서 발견된 것과는 상당히 다른 신들의 모습을 전달했다. 그것은 그들이 인간 못지 않게 모든 것을 지배하는 맹목적인 '전능한 시간'의 대상임을 시사했다. 그러므로 '영원한 운명'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에서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비참하다. 왜냐하면 후자는 적어도 사물의 질서에 반항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프로메테우스에 의해 전형화된 것처럼 인간은 그들 자신의 고통 속에서 기뻐할 수 있고, 이 반항으로 인해 운명의 면전에서 자신의 개성을 지지할 수 있다.
나머지 편지에서 우리는 멘델스존이 레싱이 스피노지스트임을 인정하는 것의 심각성을 축소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다. 멘델스존은 처음에 야코비 자신이 스피노지스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가 그들을 이해한 대로 스피노지즘의 기본 교리를 공격하는 한편, 그들이 학교 형이상학의 받아들여진 가르침에 다시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내면적으로 더욱 일관된 형태로 개혁될 수 있는지를 제시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야코비는 그의 입장에서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학문적(그리고 실로 더 정확한) 지식을 과시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멘델스존의 스피노자 비판에 대해 그는 스피노지즘이 오히려 완벽하게 자기 일치적인 입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했다. 스피노지즘을 논리적으로 이끌어 갈 학교 형이상학이었는데, 만약 그 함의가 그 반대 방향이 아니라 그저 완전히 이해된다면 말이다. 야코비는 이 편지들을 출판하기로 한 갑작스런 결정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이후 멘델스존은 그의 Morgenstunden,[5] 책으로 멘델스존이라고, 그는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를 상정할 것은 임박한 출판 발표했다, 야코비는 그의 상대는 생각했다.부당하게 공개 머리가 그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것 전에 민간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논쟁 시작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상호 합의에 따라 그리고 나서 야코비는 그 책을 여러 신학자들로부터 장황한 인용구로 마무리 짓고, 라바이터의 발췌문을 통해 그 (그의 표현)을 '봉쇄'했다.
멘델스존은 야코비의 볼륨이 괴테를 머리로, 스피노자를 몸통으로, 라바터를 발로 놀리는 괴물 같다고 칸트에게 불평하는 것이 씁쓸했다. 그의 불평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분열과 본문의 만연한 설교적 어조에도 불구하고, 야코비가 전달하고 있는 철학적 메시지가 분명히 있었다. 철학자들은 기질적으로 설명의 요건에 따라 실체를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으며, 존재의 요건은 완전히 무시한다. 그들은, 말하자면, 설명의 추상적인 원리를 존재의 원리로 착각하게 만드는 논리적인 광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사물의 개성은 이 혼란의 첫 번째 희생물이지만, 그러나 개성은 모든 존재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것처럼 세상에는 진실로 현존하는 주체들, 즉 최소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진지하게 책임을 지고 한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요원들에게는 아무런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뒤따른다.사람 대 사람으로서, '너'의 '나'는 '너'의 '나'이다. 인간 본성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모두(괴테의 첫 시, 야코비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특히 결정을 내리고 짐승의 본성을 초월하는 능력은 이와 같이 부정되고, 인간 개개인이 적어도 하나의 품위를 지키려고 한다면, 오직 허황된 감각으로만 즐거움을 얻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대안도 남아 있지 않다. 자유의 (괴테의 두 번째 시에 따르면, 야코비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순수한 합리성의 이상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휴머니즘은 엉터리일 뿐이었다. 그것은 사실상 '니힐리즘'(야코비가 대중적으로 만든 용어)으로 이어졌다.
야코비의 레싱과의 대화 보고에 따르면, 이성의 요구만을 바탕으로 한 사상의 파괴적인 효과에 관한 자신의 입장에서의 취득과 스피노자에 대한 레싱의 명백한 동정 선언에 따라, 야코비는 후자에 대해 살토 모탈레(Jacobi, 1785: 17), 즉 일종의 점프(Jacobi, hh)를 행할 것을 촉구해 왔다.뱀장어 머리 위로 올라가면 그의 위치가 회복될 거야 깨달은 철학자 레싱은 그의 머리 위를 걷고 있었다. 레싱이 노년을 핑계로 유머러스하게 집행을 거절한 점프는 (야코비: 1785, 33–34) 상식의 단단한 토양 위에서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레싱과의 만남 당시와 후에 멘델스존과의 의견 교환에서 야코비의 분명한 의제는 계몽주의의 합리주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암시된 것은 괴테에 대한 비판이었다. 후자는 지금 야코비가 비난하고 있는 것과 같은 합리주의에 대항하여 스터름과 드랑의 반동을 주도했었다. 야코비의 베일에 싸인 메시지는 이 새로운 문화 현상의 아데프들이 철학자들의 이성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들이 주창하는 반항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은 철학자들의 현실 관념이 옳다는 전제에서만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괴테가 쓴 두 시의 야코비의 저서에서 그렇지 않으면 곤혹스러운 존재감을 설명하는 것은 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괴테와 야코비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하고 괴테의 두 번째 시 작자조차 모르고 있었던 야코비의 동시대인들에게, 그들의 책 수록은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어쨌든 야코비의 어젠다가 계몽주의로 향하던지, 스터름 언드 드랑으로 향하던지, 레싱과의 대화에서나 나중에 멘델스존과의 논쟁에서나 스피노자의 존재는 분명했다. 야코비의 괴테와의 첫 만남에서 그가 토론의 중심 대상이었다는 사실과는 전혀 별개로, 즉 야코비의 동시대인들이 알 수 없는 또 다른 상황이었던 스피노자는 이제 야코비에 의해 철학자들의 논리주의를 궁극적인 한계까지, 그리고 드라로 몰아붙일 용기를 가진 하나의 철학자로 묘사되고 있었다.w 그것으로부터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론. 스피노자는 하나의 추정된 개별적인 것과 다른 것으로 추정되는 것, 그리고 만물과 신 사이의 진정한 구분이 거부되고 있다는 순 결과와 함께 하나의 가장 높은 추상화 하에서 모든 현실을 요약했다. 진정한 세대, 아니 일시성과 연관된 것은 그저 환상적 현상으로만 제외하고 똑같이 사라졌다. 이것은 허무주의적 결론으로서, 야코비의 의견으로는, 사람이 추첨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결론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눈에는 스피노자가 철학자 파 탁월함(그러나 나중에 피히테에게 수여한 속성)으로 서 있었다. 그가 그린 공식에 따르면, 철학은 스피노즈주의와 동일하고, 스피노즈주의는 차례로 무신론과 동일하다 - 이 방정식의 마지막 부분은 스피노자의 신 이후, 비즈라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의 속성이 결여된 물질은 진정한 종교의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왜 Jacobi가 스피노자를 대하는 태도가 Mendelszahn과 이후의 비평가들에게도 혼란의 원인이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야코비는 스피노자를 철학적 이성이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한 객관적 교훈으로 지목했다. 한편, 그는 그를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가 생각한 대로 멘델스존도 포함시켰다. 멘델스존은 그의 철학을 완화되지 않은 합리주의의 결과로부터 '구원'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인해 철학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야코비가 스피노자에 대한 다른 곤혹스러운 선입견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 베네딕토스, 그가 한 때 부르듯이, '복받은 자'는 진리가 자신의 기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것은 탐색적인 이성을 발견하는 것은 순응할 수 없지만, 직관적으로 즉시 체포되어야 한다. 이것 또한 야코비의 입장이었다. 철학자들의 합리주의에 대한 그의 반대는 정확히 이것, 즉 그것은 직관적인 근원과 연락이 끊긴 이성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 자신의 생산물을 실물과 착각하게 되었다. 이 점수에 대해 야코비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합리주의적인 인물에서 이상한 동맹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피노자 레터즈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야코비는 스피노자와 대조적으로 '직관'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철학이 '역사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아마도 인간의 행동과 인간 사건의 기록에서 출발점을 찾아야 하며, 경험이나 상식을 결코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비록 모호하고 잘 정의된 지위에 대한 근거는 거의 없지만, 그 자체로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야코비는 그 후 마지막에 경건한 경건한 경건한 경이로움으로 그들을 모호하게 했다. 그 중에서도 철학의 임무는 단순히 드러난 신앙의 내용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신학자 예루살렘과 기적의 증인을 믿었던 라바터를 인용함으로써 말이다. 그는 철학과 철학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성서의 계시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는 인상을 쉽게 줄 수 있었다. 즉, '직관'에 의해, 그는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레싱은 야코비와의 대화가 끝날 무렵에 그런 의심을 품었다.
2.2 '데이빗 흄' (1판st, 1787년)
야코비가 1787년에 발표한 대화에는 신앙에 관한 데이비드 흄, 즉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A Dialogue라는 완전한 제목이 실려 있었다. 그것은 원래 최종 제품의 구조가 여전히 배신하기 때문에 세 개의 개별 대화로 의도되었다. 야코비의 초기 철학적 교육에 대한 많은 지식의 원천인 제1과 제2를 연결하는 자전적 막간과 함께 분명히 세 부분으로 나뉜다. 야코비는 그것을 처음부터 얼마나 기질적으로 자신이 그 어떤 개념적 표현보다도 즉각적으로 파악된 것처럼 존재에 우선권을 주기 위해 항상 기질적으로 추진되어 왔는지를 기록하고, 또한 아직 젊었을 때 자신이 칸트의 입장에서 가장 만족하는 이 거부할 수 없는 경향을 발견했다는 것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초기의 두 수필, 하나는 형이상학에서의 증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에 관한 것이다(야코비, 1787:67ff). 이러한 자전적 발언은 '대화'의 첫 부분에서 스피노자 서신에서 '신앙'(Glaube, 독일어로 Glaub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주로 그에게 불리하게 제기되는 비합리주의의 비난에 대한 방어에 뒤이어 나온 것이다. Jacobi의 많은 장황한 분열들, 수비의 주요 선은 매우 간단하다. 흄은 또한 경험에 근거하고 판단의 형태로 표현되는 동의의 종류에 대해 '믿음'(Glaugebe라고도 독일어로 번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그런 동의는 즉각적이고, 미련보다는 감정의 문제며, 이성만으로는 결코 스스로 유도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정확하게는 비난할 수 없는 것이다. 야코비는 스피노자 서신에서 존재의 판단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같은 의미로 '신앙'(독일어로도 글라우베)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변화 과정도 그것에 수반되는 확실성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의도적이든 암시적이든 '비합리주의'는 없었다. 반대로 야코비는 그 용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이치에 반대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후기를 미리 비웠기 때문에, 그것을 지나치게 제한한 것은 실재로부터 추상화하여 궁극적으로 존재의 판단과는 무관한 일종의 디스커버리적 개념화(Jacobi, 1787: 29ff)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대화형 논쟁의 많은 우여곡절에서 발췌한 이 이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그 출발점은 사실과는 반대로 고전적 경험주의의 근본적 가정 즉, 그 경험은 순전히 주관적인 표현에서 출발하며, 외부 물체에 대한 믿음은 이러한 표현들 중 일부의 수동성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서만 도달되기 때문에 부정이다. 이러한 가정은 필연적으로 흄의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Jacobi는 사실, 피험자가 자신의 주장 중 일부에 대한 주관성을 인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즉, 외부 사물에 반대되는 자신의 '자신'을 정의하지 않고서는, 즉 자신의 주장을 즉시 다른 사물에 언급하지 않고서는, 즉 자신의 주장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거부한다.자기 자신. 주관성의 바로 그 가능성은 객관성의 가능성을 수반한다. 야코비가 이 자리에 대한 고전적인 공식은 '토우'가 없으면 '나'가 없다는 것이다(야코비, 1787: 63–65)
2.흄은 물론 우리가 어떤 확실한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부정은 '자신'에 관해서 순전히 이론적인 관점을 가정해야만 야코비에 따라 가능하다. 우리는 행동하고, 정확하게 행동하면서 우리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Jacobi, 1787: 102ff). 자기 인식은 행동을 동반하는 피실험자의 권력감각에서 비롯된다. 야코비는 흄의 이론적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그 주장을 정확하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흄 자신을 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한다. 권력에 대한 감정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펠트 파워를 방해하는 외부적인 어떤 것의 주체에 즉시 존재함을 내포하고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현실적 점검도 제공한다.
3.표현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권력에 저항하는 외적인 것의 차이를 가려내기 위한 피험자 부분에 대한 성찰적 시도로서 작용한다. 이것은 칸트뿐만 아니라 흄도 대신 외부적으로 합성을 꾀했던 의식의 세 가지 요소, 즉 느낌, 감각 표현, 성찰적 개념화를 원초적 통합으로 불러들인 공식이다. 그런 다음 일련의 논쟁을 통해 야코비는 어떻게 칸트가 프리티(priori)를 제안했던 모든 범주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서술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보여준다(야코비, 1787: 111–121) 자오비와 그 '기타' 사이의 거리를 규정하는 기본적인 조건들을 파악한다(Jacobi, 1787: 111–121).
4.'이유'는 선험적인 '사죄'에 초월한 교직원이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분별 있는 표현의 보다 정제된 형태라는 것을 뒤따른다. 야코비의 표현대로 대상의 민감성이 클수록 그의 합리성도 커진다. '사죄'와 '이유'라는 두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야코비, 1787: 125–34)
이 점을 마지막으로, 야코비는 토마스 리드에 대해 이런 직접적인 맥락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패러프레이즈로 묘사한다.[6] 그는 분명히 흄을 상대로 스코틀랜드 '상식' 비평가들이 이미 그에게 진일보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또한 그에 따라 '직관'이 의미하는 바 즉,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진리에 대한 즉각적인 이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었다. 이제 문제의 직관은 '사찰'의 산물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 리드의 정신에서 야코비가 이해한 바와 같이, 그리고 확실히 흄과 칸트의 감성에 대한 관념과 대조적으로 - '감각'은 마음의 수동적인 인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체와 대상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 훨씬 더 반성으로 발전될 수 있다.e (즉, 대표) 양식. 야코비는 실제로 감각으로부터 반사적 표현을 도출하는 현재의 방법의 정석적 발상을 위해 스피노자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한다(야코비, 1787: 120, 노트 25). 그러나 흄, 리드, 스피노자에 대한 어떤 언급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칸트와 그의 초월적 방법을 의도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는 점이며, 따라서 그들 중 어느 하나보다는 그(칸트)가 내내 그의 주된 관심사였다고 배반했다는 점이다(야코비, 1787: 119–20, & 120, 노트 25). 야코비는 그의 생각으로는 칸트의 이론과 경쟁할 수 있는 지식의 이론을 진전시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설명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근본적인 개념의 사실적 필요성까지도 설명하면서, 그의 의견과 많은 칸트의 현대 비평가들이 칸트 자신의 초월적 방법에 영향을 미치는 형식주의 같은 것을 초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코비의 첫 번째 진술은 직접 경험에서 도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야코비가 오히려 '지성의 선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칸트의 범주에서 선험적으로 그것에 적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야코비의 제안설에는 내재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대화의 세 번째 부분 즉, 대부분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설명에 바쳐진 부분(Jacobi, 1787: 144ff)에서 가장 정숙하게 나왔다. 여기서 야코비는 독일 라이프니츠를 개성의 챔피언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적절히 변형된다면 자신의 모나도학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2부와 3부의 대화에서의 전환은 수사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개념적 근거가 있었다. 야코비의 방금 제안된 경험론과 라이프니츠의 모나도학 사이의 명백한 논리적 연결고리에서 난관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 이론이 내포한 합리성에 대한 유기적 개념(이성은 더 발달하고, 더 반사적이고, 감성의 형태에 지나지 않음)은 라이프니츠의 시스템과 정말 잘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것은 라이프니지스의 자연주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 것'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나드학에도 잘 들어맞으면서 동시에 우주의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반영함으로써 그 자체라는 라이프니지스의 입장도 똑같이 이끌어냈다. 그러나 야코비는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참고하여 설명될 수 있다는 가정과 정확히 대조함으로써 철학적 데뷔를 했다. 즉, 설명에 대한 철학자들의 논리적인 열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결국 인간의 주관성을 훼손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반대했던 입장이었다.
2.3 스피노자 레터(2판nd, 1789년)
훨씬 강화된 제2판 야코비의 첫 번째 주요 저작물에는 멘델스존과의 서신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와, 무엇보다도 야코비가 스피노자의 철학을 좀 더 상세히 설명(Supply VI, VII)하고 헤르더의 스피노지즘(Supply I) 버전에 대한 장황한 비판(Supponment I)이 포함되어 있었다.V) 또한 52개의 명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논제를 옹호하려는 23개의 주장과, 나머지 29개의 반대 논제인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첫 번째 논문의 변호에 있어서의 논쟁은 인간사정이 기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가정, 즉 순수하게 효율적인 대의명분들의 결합에 따라 각자가 다른 모든 것의 외부적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논문을 옹호하는 데 있어서 야코비는 스피노자를 바짝 따른다. 문제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인지적 측면에 그의 신체적인 측면과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의식, 즉 대표성이 있는 존재는 연장된 존재의 거울에 불과하다. 후자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상 자체의 존재 양식에 따라 생각의 측면에서 반복된다. 그러므로, 야코비에 따르면, 삼단논법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기계론적이며, 어떤 물질적 일련의 사건들만큼도 원칙들에 의해 추진된다. 반대되는 논문에 관한 한, 야코비는 데이비드 흄으로부터 주제를 되찾아 그것을 주장한다. 만일 유한한 '나'가 동등하게 유한한 '터우'에 맞닥뜨릴 때만 정체성을 획득하는 경우라면, 두 사람 사이의 필수 상호작용이 서로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 '패시브리티'의 근원을 양쪽에 가정해야 하므로, 그 안에서 또한 동등하게 상쇄되는 '활동'의 근원을 가정해야 한다. 이 근원은 되돌릴 수 없다. '활동'과 '패시브리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구석구석 뛰어다닐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것을 뒤따른다. 어떤 부분에서는 한 요소가 다른 요소보다 더 강한 강도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두 요소 중 하나가 다른 요소를 완전히 압도할 수는 없다. 또한 메카니즘이 가능하기도 하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개인의 자유, 즉 외부관계로 모든 것을 축소시킬 수 있는 사물의 완전한 기계론적 조직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Jacobi, 1789: xxxv-xxxxvi). 그건 그들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만들 거야. 그러나 '유동성'은 '활동성'에 관한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개별적으로 귀속되는 인간행위의 현실을 부정하는 개념적 근거는 제거된다.
칸트의 '실용적 이성 비평'이 출간된 지 1년 후와 같이 등장한 두 논문은, 자유의 문제를 반론(反論)의 형태로 규정하는 칸트의 전략에 대한 묵시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야코비의 두 논문은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기계론적 설명과 도덕적 요구 사이의 명백한 반대는 두 번째 논제를 상세히 기술하는 명제에서 이미 해결되었기 때문에 반제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명제의 집합에 의해 전제되는 것은 야코비가 받아들이는 가정이며, 존재(적어도 창조된 존재)는 한정된 관계에 존재하며, 그러한 관계는 그 안에 들어가는 양쪽의 활동뿐만 아니라 수동성의 불가해한 요소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두 명제의 차이점은 두 번째(자유를 옹호하는 자)는 어떤 관계의 이 필요한 조건을 존중하는 반면, 첫 번째 명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철학자만이 추상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한편으로는 순수 기계론적 관계를 잉태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는데, 그 관계 중 하나는 사실상 활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따라서 원하는 관계의 기초를 없앤다.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활동적이고 배타적으로 자발적이며, 따라서 그에 의해 같은 결과를 얻는다.반대 방향의 길 이 마지막 점을 위해 야코비는 칸트의 자유라는 개념을 순전히 자발적인 활동으로 스피노자의 인과수(人義水)와 쉽게 연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자의 추상화에 대한 열정에 굴복했을 때 비로소 칸트의 일종의 반론적 관점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 관점은 비록 진정으로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호소에 의해서만 조정될 수 있는, 반대하지만 개념적으로 타당한 견해의 충돌이다.
즉, 야코비가 스피노자 레터스의 신판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에게 맞선 선택은 개념적으로는 타당하지만 모순되는 두 주장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의 반인륜주의와, 그 근거는 추상화에 있었다 - 그리고 반대로 경험의 사실에 가까이 머물러 있는 휴머니즘 사이에 있었다.nce. 이런 점에서 야코비는 이미 레싱에게 10년 전에 했던 지적, 즉 철학의 불합리한 결과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철학을 언제 그만둘 것인가를 아는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기계적인 원인의 체계와 자유의 체계 둘 다 그의 두 가지 명제 세트에서 상호 작용하는 두 힘의 동일한 일반적인 패러다임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했었다. 이것은 길을 잃지 않는 지점이었다. 피히테는 곧 그 패러다임을 과학적 설명이 요구하는 일종의 기계론적 조직으로서 자유가 요구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칸트의 반론적 해결의 근간으로 삼게 되었다. 야코비가 적절한 순간에 철학적 성찰을 중단함으로써 그 반성을 완전히 회피하려 했던 곳에서는 피히테는 대신 그 반성을 더 높은 수준의 추상화에 유도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야코비에 관한 한, 그런 움직임의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후, 그가 철학자들에 대한 자신의 본래의 개입 이전보다 더 강한 용어로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 것은 실로 피히테에 대한 반대였다.
2.4 피히테에게 보내는 공개서한(1799)
그의 공개편지에서, 야코비는 피히테를 칸트의 진정한 제자로, 즉 초월적 이상주의의 전제를 논리적인 결론에 이르게 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스피노자에 대한 이전 추정치도 수정했다. 그는 항상 후자를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한결같다고 묘사했었다. 그는 이제 그 속성이 피히테의 진리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사실 철학자 파르스였다 - 이성의 메시아스, 지금 야코비가 큰소리로 자신을 선언하듯이. (야코비, 1799: 2) 피히테는 주관성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이 주관성 자체를 순수한 생각에서 면제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스피노자가 그 나침반 안에서 되찾기까지 간 철학적 추상화의 범위를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피히테의 이상주의는 반전된 스피노지즘의 경우, 영적 물질주의(Jacobi, 1799: 2–5)의 경우였다. 모든 것을 특별히 설명하지 않고 설명함으로써 모든 것을 설명하는 스피노자의 실체에 대해, 따라서 개인의 결정을 외부 원인의 끝없는 메커니즘으로 강등시키는 것으로, 이제 그 최초의 객관화로서 순수 반성의 산물로 재도입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성찰이 순수한 생각의 에테르에 있는 모든 사물을 순수한 자유에서 용해시킨 다음 다시 재조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주장의 규칙에 따라 게임으로서(Jakobi, 1799: 24–27)
이 모든 것이 야코비를 격분시켰다. 피히테에게 보내는 이 편지만큼 종교적인 언어가 넘쳐나는 것은 그의 작품도 없다. 그러나 여기에 전시된 미사여구는 라바터의 치욕적인 승리주의, 그의 초기 작품들을 비토하게 했던 라바터의 매질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가 이성의 궁극적인 허무주의라고 생각한 것에 직면하여 진정한 공포에서 태어난 것 같다. 야코비는 피히테에 대한 논쟁도 없었고, 자신의 개념적 근거에서 그를 반박할 방법도 없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철학자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사람으로 그의 앞에 서서 청중들에게 그와 그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했다. 칸트나 피히테의 도덕성에 대한 보편적인 규범에 반하여, 그는 오히려 예외의 옹호자로 서 있었다. 즉, 개인을 위해서,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살인까지도 감히 신성한 제단을 더럽힐 수 있는 야코비 (Jacobi, 1799: 32–33) 이것은 야코비가 선전하고 있는 강력한 개인주의적 선언문이었는데, 반세기 이상 지나 키에르케고르드까지는 그런 종류의 말이 다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시절에 야코비가 염려했던 원인이 되어 왔던 스터름 und 드랑 운동의 전형적인 반사회적 개인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피히테와의 이 소동 전에도, 그리고 아마도 괴테를 염두에 두고 야코비는 오랫동안 사회 속에서 개인의 위치를 명상하고 있었고, 스스로 확실한 사회 이론을 공식화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생각을 모으기 위해서는 적절한 장소에서 하듯이 그의 더 많은 문학 작품들에 의지해야 한다(3절 참조).
2.5 1800년 이후
야코비의 생애 마지막 시기는 무엇보다도 두 개의 주요 출판물과 그의 수집된 작품의 판본 제작을 보았다. '재조사' 섹션(5장)의 마지막에 이 점을 고려한다. 나머지 두 작품에 대해서는, 첫 번째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칸트의 초월적 이상주의에 대한 새로워지고 더욱 날카롭게 공격한 것으로, '이성을 이해로 줄이려는 비평의 시도에 대하여'이다. 본문 자체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야코비의 제자 쾨펜에 의해 완성되어 1802년에 출판되었다. 맨 최소치로 줄인 이번 공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1) 칸트는 담보권을 벗어나는 대상(= x)과 대상(= x)을 가정하여 합성 선험적 판단의 가능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했지만, 이 판결에 기초하는 경험 체계는 그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두 가지(viz, 주체 및 대상)는 경험 시스템의 가능성의 초월적 조건을 구성한다. 그러나 칸트의 시도는 풀 수 없는 난관을 수반한다. 가정된 주제와 대상은 검증될 선행적 판단의 체계 밖에 있는 요소들이지만(즉, 그것들은 '투과적'이다), 그것들은 오직 그 시스템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 개념과 특성의 관점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칸트는 자신이 부정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는 동시에 자신의 체제 조건의 초월성을 긍정함으로써 후자가 그것들로부터 도출해야 할 안정성을 훼손한다(Jacobi, 1812–25: vol. 2, 85–91).
(2) 칸트의 비평에서 얻는 '이유'와 '이해'의 관계 측면에서도 동일한 이의제기를 일반화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경험의 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추가적인 시스템 조건을 규정하는 것이 이성의 과제라고 한다. 그러나, 저당권 외에, 이성은 이 조건들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것에 의해 정의된 바와 같이, 그것들은 경험의 체계화라는 그 끝없는 작업에서 이해에 의해 이용되는 정도까지만 의미를 획득하는 공허한 개념구축이다. 이 정도까지 이성은 전적으로 이해에 종속된다. 그러나 후자는 이성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 이성은 아이디어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정도까지, 그것을 통해 진정한 지식을 산출한다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 논리적으로, 그것의 개념이 이해의 개념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야코비는 자신이 실존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성에 부과되는 것, 즉 이해를 위해 환상을 생성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했지만, 그러한 환상이 단지 그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야코비, 1812–25: 제2, 제81, 100–01, 115)고 했다.
(3) 제3차 반대는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경험에서의 이해의 기능에 대한 칸트의 분석에 대한 비판에 있다. 심지어 칸트의 초월심리학의 모든 요소들, 특히 감각은 무정형의 정신적 인상들, 공간과 시간은 한 번에 직관과 직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범주가 이해의 선험적인 개념이라는 것, 즉 이것들을 가정하는 것, 사실 야코비가 거부하는 것,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것까지도 모두 인정하였다.에세이의 본문에서 성실하게 논증한다 - 심지어 이것들을 인정하더라도, 칸트의 시스템에는 여전히 내적인 결함이 있다. 문제는 경험의 선행적 판단, 즉 사상과 감각으로 추정할 때 합성해야 할 두 용어는 그 자체로 너무 불확실한 상태여서 합성으로 인해 발생해야 할 물체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감성에 관한 한, 그러한 불변은 칸트가 정의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물질적 내용 또는 선험적 형태의 직관에 따라 그것을 취하든 간에 적용된다(Jacobi, 1812–25: vol. 77–79, 122ff, 134–35, 136–39). 그것은 실제 경험에서 그 결정은 상상의 개입에 의해 제공되어야 하며, 우리가 후자를 심리적 또는 초월적 의미로 받아들이든 간에, 그 기여는 반드시 재정적인 요소를 수반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어떤 종합성을 제공함으로써 회의적인 의심에 취약하게 될 것이다. 즉 칸트는 실제로 경험에 한정된 지식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한계 내에서 필요한 것이다(야코비, 1812–25: vol. 2, 95, 97, 115ff, 118ff, 135, 150, 154ff).
이 마지막 기간 동안 야코비의 다른 주요 작품인 "신성한 것과 그들의 계시"는 1811년에 출판되었다. 야코비는 사실 10년 일찍부터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피에티스트 작가가 최근 출간한 책에 대한 평론이었다가 나중에 다시 그것을 주워 셸링의 '정체성 체계'와 그것과 연결된 새로운 자연철학에 대한 평론으로서 전혀 다른 배역으로 완성했다. 도덕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하듯이, 즉 도덕이 덕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행복에 바탕을 두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의 조합에 바탕을 두는 것인지, 그것의 초기 목적의 증거는 마지막 본문에서 여전히 보인다. 그러나 그 후 본문은 갑자기 칸트의 비판 철학에 대한 긴 토론으로 옮겨 가는데, 그 부담은 그러나 셸링의 최근 이상주의적 연출이 정확히 그 철학의 논리적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에 대한 대우는 이상할 정도로 적격이다. 한편, 야코비는 독일 철학적 문화의 아이콘이 된 사람 때문에 그에게 모든 존경을 보여주며 그를 높이 칭찬한다. 그는 그를 칭찬한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한 신(도덕적 요구와 같은)은 반드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신, 자유, 불멸에 대한 즉각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야코비에 대한 '믿음'은 물론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야코비 자신처럼 존중하고 또 존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신에게 향하는 이성과 감각에 향하게 되는 이해의 이해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킨다(야코비, 1812–25: vol. 3,341–44; 351–52) 그러나 그러한 칭찬은 공허한 것으로 드러나며 심지어 가면을 쓴 비난의 형태도 된다. 달리 횡설수설하는 작업 전반에 걸쳐 야코비의 주요 논문은 개인주의적인 가치를 옹호하면서, 사실 칸트가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전복시켰다는 것인데, 순상품은 피히테의 이상적인 물질주의 체계와 현재 셸링의 공공연히 자연주의적인 시스템이다.
야코비의 주장의 알맹이는 사실 그의 앞선 칸트 에세이(1802년)에서 제시된 것과 여전히 같았다. 칸트의 이성은 비록 이해를 초월하기는 하지만 지식에서 후자의 한계에 못지 않게 제한되어 있고 심지어 그 힘의 행사에서도 그에 복종하고 있다는 점이 있었다. 그 결과 이성은 우리가 초월적인 현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자연적으로 발생시키는 동시에 그러한 지식은 환상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다. 야코비는 이제 칸트의 비판적 시스템이 과학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처음부터 분명히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점을 더욱 발전시킨다. 여기서 칸트는 '과학'에 의해 무엇보다도 먼저 감각의 대상을 향한 이해의 인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이해는 지상에 얽매인 성질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이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초월적인 단일 원리로 만물을 보고자 하는 이성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야코비에 따르면, 이성은 초월적인 것들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해는 이러한 지식을 허용할 수 없지만, 여전히 보다 높은 규제 원리로서 이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성의 지식은 이성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해에서 도출된 추상화의 이상적인 구조를 대체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추상화는 이해와 이성 그 자체로부터 후자가 사실적으로 즐기는 초월적 지식을 숨긴다. 이성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지식에 대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해를 위해 해석된 추상화에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단순한 환상(Jacobi, 1812–25: vol. 3,372–94)으로 취급하게 된다.
피히테의 다음 분명한 단계는 이성이 원하는 초월적 지식의 대상, 즉 사실상 사물의 논리적 질서와 신을 동일시하는 이상적 구조를 선언함으로써 환상의 근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코비에 따르면 피히테는 또한 그 논리의 원리로부터 자연 전체를 선험적으로 재구성하여 이상적으로 신의 창조적 행위를 재현할 수 있는 자아의 일부에 대한 능력을 참된 인격의 시험으로서 꽤 일관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논리는 처음부터 이해의 추상화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자연의 물질적인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자아 이상화 활동은 사실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이상화가 되어도 자연은 여전히 '자연'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실제로 피히테의 이상주의는 물질주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야코비에 따라 뒤따른다. 셸링의 자연주의는 이 사실을 분명히 했을 뿐이다. 요컨대, 야코비 이상주의에 따르면 -- 칸트부터 시작해서 셸링으로 결론지은 -- 믿게끔 하는 것이었는데, 사실 인간의 영혼이 '신성한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이 자연의 비인칭적인 매개체에서 구원되고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목할 점은 야코비가 이 마지막 작품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칸트에 관한 이전의 에세이에서 이미 사용하기 시작했던 새로운 용어들이다. 그는 이제 '이유'와 '이해'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가정 하에 수술을 하고 있었다. 즉, '이유'는 초월적, 통일적, 원칙의 능력을 의미했고, '이유'는 보다 특정한 것들로부터 일반적 표현을 추상화하는 능력(Jacobi, 1812–25: vol. 3,395ff, 400, 434–35)을 의미했다. 그 구별은 물론 기원은 칸트였다. 더욱이 칸트가 '이해'의 추상적 요구조건에 따라 '이해'를 볼모로 잡고 있었다는 주장은 그의 이상주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널리 논의된 것이었다. 그러나 야코비는 이제 초월적인 사물에 대한 직관적인 지식의 능력을 의미하는 '이유'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에 긍정적인 귀동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의해 사용되었듯이 '이유'와 '이해'의 구별은 그가 자신과 칸트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릴 수 있게 했다(야코비, 1812–25: 제3, 369–72) 칸트는 두 가지 능력을 부정적으로 조화시키려 노력했지만, 단순히 각각을 정해진 한계 내에 두는 것만으로, 야코비는 이성이 실제로 경험에 기여한다는 지식을 밝혀내서 이해력이 작용하는 긍정적인 매트릭스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조화를 긍정적으로 드러내었다.
다른 방법으로도 그 구별이 야코비에게 도움이 되었다 —아니면 그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야코비는 철학적 성찰과 그것이 기차에 가져온 허무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공격하고 그 대신 '신앙'을 소환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그에 따라 그는 '비합리주의'와 '맹목 없는 자유주의'라는 비난에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가 항상 완강히 거부했던 비난이었다. 야코비에 관한 한, 진정한 비이성주의자들은 철학자였다. 새롭게 채택된 구별과 함께, 야코비는 이제 특별히 '이해'로, 또는 더 정확하게 '이해'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는데, 일찍이 비판의 종류는 상당히 일반적으로 '이해'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전에 '신앙'이 수행했던 일을 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이유'를 소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비합리주의'나 '우애주의'라는 비난을 더 쉽게 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이성' 즉, '진정한 이성'을 위해서였으므로 그는 이제 철학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는 야코비가 결코 '이성'의 이 새로운 의미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분명히 이전에 '신앙'을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즉 느낌과 유사하지만 동시에 개념의 명확성을 과시하는 직관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이라고 불릴 때와 마찬가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명확한 음의 조합이었다. 새로운 차별성, 그리고 그것이 가능케 한 새로운 언어가 사실 야코비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은, 그러므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질문이다.
3. 문학작품
야코비의 초창기 출판물 중 일부는 그의 형 게오르그와 협력하여 출판된 것으로 순수하게 문학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야코비는 철학적 논쟁에 몰두할 때 이 맥락에서 이따금씩 그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러나 문학적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은 그의 두 소설인 에드워드 올윌의 편지 모음집과 월드마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오랜 개발 과정을 거쳤으며,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로 출판되었다(David, 1913; Jacobi, 1957).
문학적 글로서 이 두 작품은 인기 있는 계몽주의 장르인 '교육-노벨'에 속한다. 두 경우 모두, 장르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문제의 교육은 헤르젠스멘슈의 교육이다. 우리가 알윌에 대해 알게 된 바로는, 어릴 때부터, 순전히 타고난 성급함에서, 그는 어떤 특별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올윌(영어처럼 독일어로 이름이 쓰여진 것은 '모두 그럴 것이다'라는 뜻)은 순전히 충동적으로 한 일, 즉 그의 유일한 행동 규범인 행동 그 자체로 그가 한 모든 것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성인이 된 그는 나이가 들면서 투기 논쟁의 장에서도 이런 성격적 특징을 발휘한다. 성급한 청년은 사교 모임의 과정에서 지식의 본질에 대한 오랜 추론을 전하는 장면에서 배우듯이, 역시 숙련된 변증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야코비, 1792: 143ff).
진정한 합리성은 사회적 합리성이다. 이것은 올윌에 대한 야코비의 교훈이며, 볼드마르에서는 반복되고 있다 - 비록 그곳의 중심 인물인 볼드마르는 올윌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느낌과 추상적인 사고의 성향을 보이면서도, 많은 따뜻함으로 야코비에게 대한다. 그 캐릭터는 자화상으로서 그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 자체는, 그 마지막 형태로, 원래 독립적으로 출판된 두 작품에서 합쳐서 (야코비, 1779년 (3) (4))로 되어 있었다. 그 합성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월드마르는 비현실적인 감정의 남성으로, 자신이 자주 만나는 친구들의 모임에서 여자들 중 한 명과 함께 발전해 온 우정을 중심으로 그의 전 세계를 이해해왔다. 그는 그 우정에 그의 전 생애를 투자했다.
두 주인공의 우정의 발달에서 알 수 있듯, 야코비는 사실 스피노자 레터스의 초판에도 자신이 숭배했던 이성의 개념을 되뇌고 있었다. 합리성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구성되는데, 두 조건의 조건을 모두 존중하는 관계다. 볼드마르의 맥락 안에서, 이러한 결론은 또한 내레이션의 제1부에 소개된 대화에서 논의된 질문, 즉 미덕이 자연이나 예술에 의존하는 정도(Waldgespréch)에 대한 해결을 가져오기도 한다. 답은 각각 실제 인간관계의 한계에 의해 시험된다는 전제하에 둘 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론에서, 앞의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속에 들어가는 개개인에게서 그러한 관계가 요구하는 상호존중도 그 어떤 인간보다 큰 '나' 즉, 초월적인 끌어당김이 인간의 '나'를 다른 순전히 자연스러운 밖으로 밀어내는 '나'를 가정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제한 [7]사항 야코비의 마지막 말은, 그의 철학적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에서, 항상 신의 것이다.
4. 극지 작품
야코비의 모든 출판물은 자연에서 극적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가끔 쓴 작품들이었다. 스피노자 분쟁과 셸링과의 논쟁(Jacobi, 1916, 1967)을 둘러싼 비뚤어진 장황한 트릭으로 만들어진 추상화는 모두 역사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흥미롭다. 그 중에서 몇 개를 골라낼 수 있다.
1777년, 야코비의 친구 겸 문학 협력자 C.M. 비엘란드(1733–1813)는 권력이 정치적 권위에 대한 합법성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에, 유일한 적절한 형태의 정부는 엄격히 독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에세이를 출판했다.[8] 권리는 복종을 강요하는 육체적 능력에 따른다. 야코비는 불과 4년 뒤에 발표된 점별 반박(Jacobi, 1781년)으로 대답했다. 우선, 비엘란드는 사회의 실제 기원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역사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도덕적 법칙'과 '자연적 필요성'이 아주 넓은 의미에서만 '자연적 권리'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윌랜드가 개념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도덕적 권리는 자연법에 대한 어떠한 고려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에서 그들의 힘을 얻는다.
야코비는 1782년, 이번에는 역사학자 요한 폰 뮐러가 <팝의 여행>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출판한 것을 계기로 정치적 강약을 새롭게 하였는데,[9] 이 팸플릿에서는 현재의 '조명된' 견해와는 달리, 미들즈 시대 교황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가 제시되었다. 야코비는 뮐러의 입장을 옹호하는 팜플렛(Jacobi, 1782년)[10]으로 응수했는데, 뮐러의 입장을 옹호한 것은 가톨릭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세속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의 정신적 전제주의가 세속주의, 계몽된 것으로 알려진 왕자들의 전제주의보다 훨씬 더 선호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788년, 야코비는 독일 박물관에 대화 형식의 작품을 출판했다(Jacobi, 1788) 그는 악명높은 스타크 사건 속에서, 그리고 당시 라바터 같은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에 대항하여 베를린 아우프클레이러에 의해 진행되었던 캠페인에 대한 반응으로, 라바터와 같은 종교는 암호-카톨릭주의의 한 형태로서, 그리고 그들이 추진한 이성의 보편적인 종교에 대한 공격으로서 받아들였다(Blum, 1912). 그 대화는 경건한 신자와 계몽된 철학자 사이의 것이다. 신자의 요점은 철학자가 진정으로 신앙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철학자의 신앙 묘사를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 게다가 철학자는 그의 철학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잊고, 그것의 과거는 여전히 추상적인 개념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는 신앙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을 공격함으로써 철학자는 자신의 의미 세계를 훼손하는 위험을 무릅쓴다.[11]
1802년, 야코비)그런 예언이 G.C.Lichtenberg양, 그 영향에 day,[12]어느 날의 잘 알려 진 과학 대중 화인으로에 의해 만들어진 응답으로 단편(야코비, 1802년(2)을 발표했다.과학이 진행되는 동안 법 그것을 관리하는에 물질을 줄이기 위한 노력에서, 이 세상이 이렇게 우리의 눈에로 웃기는 것일 것이다 세련된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이 신을 믿는 것은 유령을 믿는 것이다. 야코비는 마지막 날들에 대한 복음서들의 이야기를 흉내내며 자신의 예언으로 대답했다. 야코비는 1811년 '신성한 것들'과 '계시'의 개막식에서 셸링의 자연철학을 명백히 패러디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재현했다.
5. 회상
야코비의 수집된 작품 제1권은 1812년에, 제2권은 1815년에 출판되었다. 이 마지막은 특히 중요한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야코비가 의도한 긴 새 서문인 데이비드 흄의 본문에 그의 일생에 걸친 철학적 제작에 대한 소개('저자의 철학 수집 작품 서문과 소개' 1812–25, 제2권)로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야코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기를 부여한 관심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의 지적 오디션을 요약하려 했고, 그 외에 흩어진 철학적 연출이 나타났을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체계적인 단결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야코비는 분명 수년간 자신에게 불리하게 제기되어 온 비이성주의라는 비난에 민감했고, 그것을 무장해제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는 1800년경부터 자신이 채택한 '이유'와 '이해'의 구별에 호소하여, 이미 '신성한 일'에서 한 것처럼, 일찍이 '신'이라는 루브릭 아래 제시한 지식의 종류를 '이유'의 산물로서, 물론 제대로 이해된 '이유'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나는 굿, 트루, 뷰티풀(Jacobi, 1812–1825, vol. 2, 1815: 59–63, passim)과 같은 영원한 진리를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에 따라 그는 1787년판 데이비드 흄의 원문을 편집하여, 대화의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것을 초판 당시의 그의 명확하지 않은 개념인 '이유'에 귀속시켰다. 그는 거기에 긴 각주를 덧붙였고, 심지어 본문 자체의 일부 중요한 부분, 즉 대부분의 경우 이후의 해설자들이 무시한 상황까지도 수정하여 본문에 분명히 내포되어 있는 자연주의를 불식시켰다.[13] 이와 같이 자연주의의 가능한 증거로부터 거리를 두면서도, 야코비는 또한 때때로 심지어 친구들에 의해서도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되는,[14] 그가 과학에 반대한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과학은 '신성한 것들'에서 이미 했듯이, 추상적 표현이라는 매체에서 합성할 수 있는 이해의 힘이 없다면 감각과 마찬가지로 이성도 하리라는 것을 지금 다시 다짐함으로써 추상적 개념의 게임(Jacobi, 1799: 22–27)에 불과하다는 자신의 과거를 보상하려고 노력했다.형태도 없고 따라서 자신에 대한 인식도 없다(Jacobi, 1812–25: 제2, 58, 110). 야코비는 또한 이해의 기능들이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후자는 자연주의와 그에 따른 무신론에도 못지 않게 자연주의 경향이 있다고 강조했다.
야코비가 자신의 생전에, 그리고 나머지 19세기에도 계속 지녔던 큰 영향력을 가늠해 보면, '니힐리즘'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유통시키고, 그와 관련된 담론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반사적 개념화보다 즉각적인 존재의 프라이머시, 그리고 '예외'의 권리에 대한 야코비의 주장 때문에, 그의 입장을 원시적 존재주의의 사례로 해석하고,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사상가로서 취급할 가능성이 있다(Beiser, 1987). 실제로 야코비가 사용하는 언어의 일부와 그가 탐구하는 주제는 키에르케고르에서 다시 발견될 것이다. (후자 자신이 실존주의자였는지는 물론 그 자체가 공개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신앙의 도약'의 언어는 야코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가 레싱에게 제안했던 살토 모탈레는 미지의 세계로 도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골적인 증언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방식으로 그의 머리를 밟고 있던 레싱이 다시 일어서게 했을 점프였다(야코비, 1787: 62; 1789: 353).
요컨대, 계몽주의 내에서 그 자리를 포함한 야코비의 모습은 평상시 추정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아직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다. 우리 시대에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야코비 박사학위를 땄어 아마도 이것은 여전히 야코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여전히 스피노자의 중심무대를 가져오는 또 다른 방법일 것이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바로 그 곳에 말이다. 이 복잡성의 비밀은 야코비가 그의 뒤를 이은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문화에 의해 위협받는 매우 보수적인 신념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이겠지만, 다시 키에르케고르처럼, 그것들을 다시 강조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과는 달리, 나중에 사용될 언어를 발전시킨 것은 당연하다.d, 대신 그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참고 문헌 목록
중요한 발전은 야코비의 서신(브리파우스가베)과 작품(베르케)의 비판판이 거의 완성되는 것이다. Gesamtausgabe)는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모두 합쳐서 43권, 작품 13권(텍스트와 부록), 서신 30권(텍스트와 해설서)이 있을 것이며, 모두 마이너(함부르크)와 프로만-홀즈부그(Stuttgart-Bad Cannzug)가 출판한다. 이 시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세치시체 아카데미에 데르 위센샤프트(라이프치히)가 후원하는 서신(서신)과 프로젝트인 야코비-웨테르부흐 온라인 모두 당시의 지적, 정치적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또한 준비 중에 있는 것은 야코비의 노트: F.H. 야코비, Die Denkbücher, ed.의 소피아 V. Krebs의 비판판이며, 총 4권에 대해 2020년까지 결론을 내리기로 되어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현재 상태는 다음을 참조하십시오.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베르케 게삼타우스가베
아카데미에프로젝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브리프위첼. 텍스트 – 코멘타 – Wörterbuch 온라인
Jacobi의 출판물 전체 목록을 포함하는 Jacobi(1994년 (2))의 'Preface to the Paperback Edition'(2009년)을 참조하십시오.
1차서적 2019. 데이비드 흄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에인 게스프래흐(1787), 야코비 안 피히테(O. Koch)는 W. 제슈케와 I.의 판을 기초로 한다.–M. Piske, 새로운 소개로 함부르크: 마이너.
2018. 간략한 über den Nihilismus, I. Radrizani (edd.)와 함께 프랑스어 번역본 P. 괴케르기, 슈투트가르트-배드 칸슈타트: 프로만-홀즈부그 독일판 레트레 수르 르 니힐리스메(Letre sur le nhilisme et auttes textes, I. Radrizani(ed.), 파리: Flammarion, 2009.
2009. Sur'entreprise du critis de la reison at l'endence et de donner ab la 철학 unnovel orientation; suivi de Letre á Fichte, P. Cerutti (ed), 파리: J. Vrin.
2008. 데스 초이스 et de Leur révélation, P. Cerutti (ed.), 파리: J. Vrin.
2005. "Ich trueume liber Fritz den Augenblick...", Der Briefwechel zwischen 괴테 und F.H. Jacobi, M. Jacobi(에드), A의 새로운 기술. 렘멜과 P. 렘멜, 힐데스하임: 바이트만.
2000 (2).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B의 2판nd 부록인 '초월적 이상주의에 대하여' 사센(트랜스). 칸트의 초기 비평가, 경험론자 이론철학 비평, 페이지 169–175. 케임브리지: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2000 (1). 데이비드 흄 외 라 크로얀스, idéalisme et réalisme, L. 기예르밋(ed.), 파리: J. 브린. 1981년 Marseille에 처음 출판됨: 프로방스 대학교.
1994 (2). 주요 철학 저술과 소설 올윌, 지 디 조반니(ed. and trans.), 몬트레알 앤 킹스턴: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Paperback 에디션, 2009년 새 서문. 오리지널 에디션의 주요 본문 전체를 포함하며, 오리지널 페이지 지정, 역사 및 비판 노트, 야코비 출판물의 전체 목록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참고 문헌을 포함한다.
1994 (1). 종교 철학에 집착하지 않는 신학자들 Der Streit um die Göttlichen Dinge (1799–1812), Quellenband, Philosophisch-literarische Streitsachen 3.1, W. Jaeschke (ed.), Hamburg: Meiner, includes Jacobi’s Von den göttlichen Dingen und ihrer Offenbarung and several texts by different authors that took part to the dispute with different degrees of involvement.
1993년. 트랜스젠덴탈필로소피와 스펠링. 데르 슈트레이트 앤 다이하 게스탈트 에르스텐 철학자(1799–1807), 쉬멘밴드, 철학-문학-문맹 슈트레이사첸 2.1, W. 제슈케(ed.), 함부르크: 마이너. 이 책은 야코비 안 피히테와 드레 브리페 안 쾨펜의 텍스트와 함께 라인홀드, 피히테, 셸링, 부터벡, 장 바울의 여러 편지들을 제시하여 사실주의와 초월적 이상주의의 개념에 대한 논쟁을 전개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88년. 레싱과 야코비의 스피노자 대화: 이어지는 논쟁의 발췌문이 있는 텍스트. Gérard Vallée, G.Vallée, J.B. Lawson, C.G가 소개함. Chaple (trans.), Lanham, New York: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7. '피히테에게 보내는 공개서신, 1799년' 독일 이상주의 철학, 다이애나 1세. 벨러(트랜스), 에른스트 벨러(에드), 뉴욕: 컨티넘, 119–141.
1983 (2). 데이비드 흄 über den Gloe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1787), 1815년 판의 Vorrede, H. Beck (ed.), 뉴욕: Garland 출판.
1983 (1). 라 독트린 드 스피노자 클레어 단스 레 레 레 레 레레 아 헴스터후이스 데 쥬일렛 1784, 파리: A Braik.
1982. 대화 서 리데알리즘 외 르레알리즘, L. 기예르밋(에드), 마르세유: 프로방스 대학교.
1981년 ff. 베르케: 브리프웨첼, 나클라호, 도큐멘테, 수트가르트-배드 콘스타트: 프로만-홀즈부그 야코비 작품의 이 비평판은 두 권의 시리즈로 나뉜다. 편지와 텍스트, 논평.
1981년 ff. 베르케: 게삼타우스가베 데르 바이에리스첸 아카데미에 데르 위센샤프텐, 발터 제슈케(ed.), 부르크: 마이너. 이 비평판은 바로 앞의 항목에서 인용한 것을 보충한다.
1970. 니힐리스무스: 안펜게 폰 야코비 비스 니체, D. 아른(에드), 쾰른: 헤그너.
1967년 스트리트 엄은 괴틀리헨 딘게 죽는다 Die Auseinandersetzung zwischen Jacobi und Sheling, W. W. Weischedel(에드)에는 야코비와 셸링 다르슈타트 사이의 논쟁에서 나온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6년 F.H. 야코비, J.Th. de Booy와 R. 모티어 (eds.), 제네브: 볼테르와 8세기에 관한 연구.
1965. 플라이겐드 블래터(Fliegende Blettter und Sentenzen aus seinen Werken und Brimen), R에 의한 선택과 사후 세계. 검퍼트, 하이델베르크: 사우어-베를라크.
1957.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스의 "Allwill"은 J. U. Terpstra, Groningen의 소개와 주석을 곁들인 비평판이다. Djacarta.
1946. Ouebres 철학 de F. H. Jacobi, J. J. Anstett (trans.), Paris: Aubier.
1943. Freundschaftsbrief aus emfindsamer Zeit, J에 의한 편지 선택. 헤이더호프, 뒤셀도르프: Völkischer Verlag.
1926. 베를린 L. 마티아스의 소개로 뽑힌 다이 슈리프텐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디 슈미데
1916. Die Hauptschriften zum Pantheismusstreit zwischen Jacobi und Mendelszon, H. Sholz (ed.), 베를린: 르우더 & 라이차드. 야코비와 멘델스존의 분쟁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포함한다.
1912. Jacobis Spinoza Büchlein: nebst Replik und Duplik, F. 마우트너(ed.), 뮌헨: 뮐러. 야코비와 L의 관계에 관해서. 비트겐슈타인, 이 판은 마우트너의 네오피러니즘의 역사적 배경에 기초하여, 비록 매개되었지만, 진정한 자연의 증거를 제공한다. 이 컬렉션에서 철학자, 역사학자, 소설가 F. 마우트너는 J.G.헤더의 고트를 포함한다. 에이니게 게스프라체 뷔베르 스피노자의 제도.
1869 (2). 아우스 F.H. 야코비의 나클라. ungedruckte Briefe von und a Jacobi und Andere. Nebst ungedruckten von Gedichten von Gete und Lenz, 2권, R. Zeppritz (ed.), 라이프치히: Engelmann.
1869 (1). 아우스 뎀 르벤 뷔르 다스 르벤—Weisheits spruche von Fr.H. Jacobi, J. Hamberger (ed.), 고타: Persets.
1854. F. H. Jacobi의 Ausgewahlte Werke, 제1권-III, 라이프치히: G. 플라이셔, 1854년
1844. 안톨로지 아우스 데른 베르케 폰 J.G. 야코비 und F.H. 야코비. 파라벨 폰 FC 크룸마허 암스테르담: 힐드버그하우젠에 있는 학술원.
1825–27.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userlesener Briefwechel, 2권 F. 로스(에드), 라이프치히: 플라이셔.
1812–1825.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의 베르케, 에드스 쾨펜, J.F.와 로스, C.J.F. vol. I-VI 라이프치히: 게르하르트 플라이셔. 다시 인쇄된, 다름슈타트: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68. 이것은 야코비 자신이 죽기 전에 감독한 판본이며 여전히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판본이다. 그러나 사설 논평과 에미레이트 항공은 이전의 본문에 대한 야코비의 후기 견해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다루어야 한다. 이 시리즈는 야코비의 평생 사업 개요를 보여주는 3개의 원문을 포함하고 있다. 데스 베르파서스의 아인레이퉁은 슈리프텐(1815), 보레드주 악단 3세 데르 베르케(1816), 보르베리히트 수르 즈베이텐 아우스가베(1816), 에르바이테룽 데어 드 드 드 드 드 드 드 드 드 드르 아우플라주(1819).
1817. '플라이겐데 블래터'미네르바, 라이프치히: Taschenbuch für das Jahr 1817, 259—300.
1811. 본덴 괴틀리헨 딩겐 딩겐 딘 딘 딘 딘 딘 딘 딘 딘 딘드러 오펜바룽, 라이프치히: G플라이셔.
1807. 뷔르 겔레르테 게셀샤프텐, 이렌 가이스트와 즈벡. Eine Abhandlung, vorgelesen bey der fayerlichen Erneuung der Königlichen Akademie der Akniglichen der Wissenschaften Zu München von Prassidenten der Akademe, München: E. 플라이슈만
1803. [세 글자 삽입] 쾨펜, 프리드리히. 셸링 레어 오더 다스 간즈 데어 철학자 데 압솔루텐 니츠, 네브스트 드레 브리튼 베르완텐 베르완텐 흡입스 폰 프리드르 하인러, 야코비 함부르크: 207–278.
1802 (2). '위버 다스 운테르네멘 데 크리티즘투스, 다이 버논프트 주 베르스탕트 주 브링겐, 언데르 철학 뷔베르하우프트 에인 에인 압시히트 주 게벤' Beytrége jur leichtern Ueebersicht des Zustandes der Velichiebym Anfange des 19. Jahrunderts, C.L. Rinhold (ed.), 함부르크 (ed.), 3: 1–110.
1802 (1). '위베르 아인 바이사궁 리히텐베르크스', 타셴부흐 푸르 다스 자흐르 1802, J. 게오르크 야코비(ed.), 함부르크: 퍼스: 3–46.
1799. 야코비안 피히테, 함부르크: 퍼스 보충판 II는 1815년(야코비, 1812년–1825년) 베르케 2세(Werber die Unzertrennickeit der Freiheit und Vhorsung von dem dem der Berunft)라는 제목으로 재간행되었다.
1796. 볼드마르(2 테일레, 느에 베르베르세테 아우스가베), 쾨니히스베르크: 니콜로비우스.
1795. J.C.F. J.C.F. '주팔리지 에르기에웅겐은 브리튼에 있는 에인사멘 덴커스에 있다. 실러(ed.), 디 호렌(die Horen), 3: 1–34.
1794. 월드마르, 2 테일레 쾨니히스베르크: 니콜로비우스.
1792. 에두아르 올윌스 브리프삼믈룽, 헤라우스게벤 폰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미트 아이너비 주가베 폰 아이게넨 브리펜, 쾨니히스베르크: 니콜로비우스; 1957, 비판판, J.U. Terpstra (에이드), 그로닝언: 1957년 다카르타
1789. 뷔르는 허른 모세 멘델스존의 소굴에서 르흐레 데스 스피노자를 죽인다. 누에 베르메르테 아우스가베, 브레슬라우: 고틀립 뢰베
1788. 'Einige Betrachtungen über den from men betrug und über eine Bernunft, Welche nicht die Vernunft ist, von Heinrich Jacobi an einem Brief an Den hern Gehimen Hoffrfr. 'Hor' 독일 박물관, 1(2): 153–184.
1787 (2). David Hume über den Glauben, oder Idealismus und Realismus. 아인 게스프레흐, 브레슬라우: 고틀립 뢰위. 1983년 팩시밀리 복제품. 1815년의 보레데, 뉴욕과 런던: 갈랜드.
1787 (1). Fr의 번역. 헴스터후이스, 알렉시스: 오더, 폰 뎀 골든 웰탈터, 트르 F.H. 야코비. 리가:하트크노치.
1786.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가 멘델스존스 베스철디궁겐 베트레펜드 다이 브라이페 뷔르 드 슈피노자 라이프치히: 게오르크 요아힘 고첸
1785. 브레슬라우: 고틀리브 뢰베의 소굴인 브리스텐에서 뤼베르가 레흐레 데스 스피노자를 죽인다.
1782. Et was das Leßing gesagt 모자. 아인 코멘타르 주 덴 라이젠 더 페프스테 네브스트 베트라흐퉁엔 폰 아인엠 드리텐: 조지 제이콥 데커
1781 (2). 베르미슈테 슈리프텐 Erster Teil은 'Ein Stuk Philocophie des Lebens und Der Menschheit'의 개정판인 Der Kunstarten을 포함한다. 브레슬라우: J.F.코른.
1781 (1). '위베르 레흐트 und 게왈트, 오더 철학 에르웨궁 에르웨궁 이네스 폰 헤르른 호프라스 비엘란드, 위베르 다스 괴틀리체 데르 오브리케이트, 임 도이첸 메르쿠르, 1777년 11월' 도이체스 박물관 1장: 522–554.
1779년 (4) '이인 스튀크 철학자 데 르벤스 앤 데르 멘슈히트: 아우스 뎀 즈베이텐 반데 폰 볼드마르.' 독일 박물관, 1: 307–348; 393–427.
1779 (3). 월드마르. 아이네 셀텐히트 아우스 데르 나투르게슈치히테, 제1권. 플렌스부르크와 라이프치히.
1779 (2). 'Noch eine politische Rhapsodie, worinn sich verschedene Plagia befinden; betitelt: Es is nicht recht, und es is nicht klug.' Baierische Beytrége schen schen schen schen schen schen schnen her, 1: 418–458.
1779 (1). '아인 정치학 랩소디' Aus einem Aktenstock entwendet. Ein Eingesandtes Stück.' Baierische Beytrége jur shön und Nützlichen Letteratur, 1: 407–418.
1777. '프롬프트와 리베. 아이네 와레 게시히테, 폰 데어 헤라우게베르 폰 에두아르 알윌스 파피에르.' Der Teutsche Merkur, XIII: 97—107; XIX (1777): 32—49, 229—259; XX (1777): 246—267. 이 텍스트는 야코비가 나중에 볼드마르를 개발하게 될 기초를 나타낸다.
1776. '에듀어드 올윌스 파피에르' Der Teutscher Merkur, XIV.2: 14-75; XV.3 (1776): 57-71; XV.4 (1776):229-262.
1775. '에듀어드 올윌스 파피에르' Iris, IV.3: 193 - 236.
야코비/백가센스, 라인홀드, 1831년 옌스 백가센스 브리프웨첼 미트 카를 레온하르트 라인홀드 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2권, K. & A. 백가센 (에드스),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야코비/보터벡, 1868년 튀김. 하인르. 야코비는 브리프 아 프리드르야 Bouterwek aus dem Jahren 1800 bis 1819, W. Meyer (ed.) 괴팅겐: Deuer.
야코비/하만, 1955-1979. 요한 게오르크 하만, 브리프벡셀, 6–7, A. 헨켈(에드), 비즈바덴 & 프랑크푸르트 암 메인: 인셀-베를라크.
야코비/고메테, 2005년. "Ich trueume liber Fritz den Augenblick …": Der Briefwechel zwischen 괴테 und F. H. 야코비, A. 렘멜과 P. 렘멜(에드), 힐데스하임(Hildesheim: 바이트만. 이것은 1892년의 신판, Brifwechel zwischen 괴테 und Fr. H. 야코비, 에드. 야코비, 맥스
야코비/흠볼트, 1892년 Briefe von Wilhelm von Humboldt a R. H. Jacobi, A. 라이츠만(에드), 할레: 니메이어.
야코비/멘델스존, 1929년. 멘델스존-브리프웨첼, A. 알트만(ed.), 모세 멘델스존의: 게사멜테 슈리프텐, 쥬빌레움사우스가베. 베를린: 아카데미-베를라그 Reprint, 1971: Stuttgart-Bad Cannstatt: 프로만홀즈부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다이하시오. 에인 카탈로그, 1.1권과 1.2권, K. 위드만, M. 브뤼겐, H. 고켈, P.P. 슈나이더(eds). 슈투트가르트-나쁜 칸스타트: 프로만-홀즈부그, 1989년
2차 서적
아렌트, 디터 (ed.), 1970. 니힐리스무스. 디 안펜게 폰 야코비 니체, 쾰른: Hegner.
바움, 귄터, 2002년 '프라이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앤 다이스피노자스' 스피노자 임 도이칠란트 데 아치첸텐 자힌덜츠: 한스-크리스티안 루카스, E. 슈르만, N. 와섹, F. 웨인리히(에드), 슈투트가르트-배드 칸스타트: Frommann-Holzboog: 251–263.
–––, 1971. F. H. Jacobis 해석, F. H. Jacobis 해석, F. Hinrich Jacobi의 '뷔베르 다스 Verheltis von Erkenntntnisgewiwiheit und Anschauungsgewißheit,'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 철학 언 리터트 데어 괴테제이트 뒤셀도르프 (16.19.19. 10. 1969)의 베이트레헤 에이너 타궁은 150을 낳는다. 베리히테를 파괴한다, K. 함마허(ed.),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비토리오 클로스터만, 7-26.
–––, 1969. 버논프트와 에르켄트니스. 다이 철학 F. H. 야코비스, 본: 부비에
바우스, 로타, 1989년 '볼드마르'와 '올윌'은 요한 볼프강 괴테라는 가명을 가지고 있다. 오텐티스체 실더룽겐 폰 F.H. 야코비 뷔르 괴테, 헨리에트 폰 루실론 und deren 엠파이어덤스메 Freunde Nebst Orifefen Goethes, 홈버그/Saar: 아스클레피오스
비저, 프레드릭 C, 1992년 계몽주의, 혁명 및 낭만주의: 1790–1800, 케임브리지, 미사: 하버드 대학 출판부.
–––, 1987. 이성의 운명, 케임브리지, 미사: 하버드 대학 출판부.
블럼, 장, 1912. J.A. 스타크 외 라 케렐레 뒤 크립토-카톨리즘 엥 알레마뉴, 1785-1789, 파리: Alcan.
볼나우, 오토 프리드리히, 1933년. Die Lebensfilosophie F. H. Jacobis, Stuttgart: 콜럼머.
Booy, J.1966년 롤랜드의 드, & 모티어. Les Années de Formation de F.H. 야코비, 다프레스 세세 상추 이네디테 아 M.M.레이(1763–1771), "르 노블" 드 샤리에르 마담 드 샤리에르: Institut et Musée Volt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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