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샌프란시스코 도심 한복판 오페라하우스를 찾았을 때는 마침 세계 최대 동성애자 축제인 '게이 프라이드'(Gay Pride)가 열린 참이었다. 그 전날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판결을 내놓으면서 '동성애자 천국'으로 불릴 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의 이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우아한 석조 건물인 오페라하우스 정면에는 밤마다 무지갯빛 조명이 화려하게 비쳤다. 시즌 마지막 작품인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알리는 플래카드도 나부꼈다. '전쟁 기념 오페라하우스'(War Memorial Opera House)가 정식 명칭인 3146석짜리 이 극장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終戰)을 기념하기 위해 1932년 개관했다.지금부터 꼭 70년 전인 1945년 4월 25일 이 오페라하우스에 세계 50개국 대표들이 모여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않은 때였지만, 전쟁 이후 지구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유엔 창설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린 것이다. 1차 대전 종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에 들어선 각국 대표들은 두 번째 맞은 세계대전의 참화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비장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왜 샌프란시스코였을까. 고든 창(Chang) 스탠퍼드대 동아시아연구소장은 "태평양전쟁을 마무리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인 이 지역에서 국제회의 개최가 가능한 곳으로 샌프란시스코보다 나은 곳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길은 단순하지 않았다.이에 앞선 1944년 8월 21일 미국과 영국·소련 등 연합국 대표가 수도 워싱턴 교외의 덤바턴 오크스 (Dumbarton Oaks)에 모였다. 덤바턴 오크스는 신(新)고전주의 양식의 대표 작품으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정원과 방대한 비잔틴 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던 대저택이었다. 이곳에 모인 대표들은 각국 정상이나 외무장관이 아니라 외교·군사 분야 전문가들이었다. 스테티니우스(E.Stettinius) 미국 국무부 차관, 카도건(A.Cadogan) 영국 외무차관, 그로미코(A.Gromyko) 미국 주재 소련 대사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세계 평화와 안전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국제기구 유엔(United Nations)을 창설하기 위한 실무 차원의 문제들을 조용하게 그리고 심도 있게 논의했다. 유엔에 총회와 안전보장이사회를 설치하고 국제사법재판소를 운영한다는 기본 골격을 마련하고, 9월 28일 제1라운드 회의는 막을 내렸다. 그 다음 날부터 소련 대신 중국 대표가 참가하는 제2라운드 회의가 10월 7일까지 이어졌다. 이 둘을 묶어 덤바턴 오크스 회의라고 한다. 여기에서 유엔의 집단 안전보장(Collective Security) 에 관한 권한을 분명하게 했다. 6·25 때 유엔군 참전은 이 회의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보면 된다. 덤바턴 오크스에서 회의가 열리기 얼마 전인 7월 1일 미국 동부의 가장 북쪽에 있는 뉴햄프셔주의 시골 마을 브레턴우즈(Bretton Woods)에는 세계 44개국의 통화·재무 관련 대표자들이 모여들었다. 세계 대공황을 타개하는 데 기여한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케인스도 영국 대표로 참석했다. 케인스는 미국이 전쟁을 주도하는 지위를 이용, 영국의 식민지에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국에 전후(戰後)의 지구는 모든 식민지가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에 따른 전 지구적 시장으로 편입된 '평평한' 세계여야 했다. 자연 자원과 공산품이 자유로이 교환될 수 있는 경제적인 기초를 만들어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각국 대표들이 이 호텔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창설에 합의함으로써 역사적인 '브레턴우즈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정치적 차원에서 유엔의 기초를 다졌던 것이 바로 덤바턴 오크스 회의였다면, 통화와 재정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준비를 담당한 게 브레턴우즈 회의였던 것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유엔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제3차 세계대전'을 영원히 방지하는 것, 다시 말하면 새롭고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국제정치적 흐름에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적자(嫡子)였던 루스벨트는 국제연맹을 만들었으나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윌슨의 오류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유엔이 잘 작동할 수 있는 경제적 기초를 다지고(브레턴우즈체제),지구상의 모든 주권 국가가 참가하되 4대 강국이 주도권을 발휘하는(덤바턴 오크스 회의)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유엔 창설을 위한 국제회의는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두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와 '재향군인빌딩'(Veteran's Building)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각기 언어와 문화가 다른 50개 국가대표들이, 그것도 2차대전이 진행 중이던 때에 한꺼번에 모여 국제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안보리를 약화시키고 총회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하는 중소 국가들의 불만과 민족자결과 인권 보호 조항을 삽입하려는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압력을 조정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식민지 인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민족자결을 위한 노력을 관리하는 '신탁통치이사회'를 유엔 산하에 설치하기로 한 것은 이런 노력의 결실이었다. 케인스가 브레턴우즈의 호텔에서 불안하게 지켜보던 영국의 식민지에 내려진 사망 선고가 바로 '신탁 통치' 조항이 보장하려 했던 식민지 민족자결권의 경제적 판본이었다. 루스벨트는 비록 유명을 달리했으나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설 회의는 순조로이 진행돼 6월 25일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50개국이 서명을 마쳤다. 이어 10월 24일 헌장이 발효됨으로써 유엔은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역사적인 출발을 알렸다. 전후(戰後) 세계를 이끌어갈 UN을 낳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대한민국은 정식 대표를 파견할 수 없었지만, 독립운동가 이승만과 한길수가 활약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이승만의 노력은 아쉽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자결권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롭고 영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는 유엔 창설의 이상이 한국의 광복과 독립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1948년 8월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은 것도 그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를 통해서였다. 그런 점에서 UN 창설 전야 회담인 브레턴우즈와 덤바턴 오크스 회의,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회의는 대한민국 탄생과 진로를 조망할 때 빠뜨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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