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독특성은 그 근원과 주제에 있다.
성경은 유일한 신-인(神人)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신적 계시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자기 자신을 드러내셨다고 확신있게 증거했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그분의 계시 속에서 성경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일반 계시. 역사, 인간의 행동, 양심, 천연계 등이 제시해 주는 하나님의 품성에 관한 통찰은 흔히 “일반 계시”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관찰할 수 있고 이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시 19:1)고 있다. 햇빛과 비, 산과 시냇물은 모두가 사랑의 창조주를 증거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어떤 이들은 친구, 가족,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사이의 행복스런 관계와 놀라운 사랑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증거를 본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사 66: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특별 계시. 구약과 신약 모두를 통하여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그분의 사랑의 품성에 관해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하셨다. 처음에는 선지자들을 통해 그분의 계시를 주셨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궁극적인 계시를 주셨다(히 1:1, 2).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초점이시다.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의 구속주 메시야로 제시한다. 신약은 그분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계시한다. 각 장마다 상징이나 혹은 실제 상황을 통해서 그분의 사역과 품성의 어떤 면을 계시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궁극적 계시이다.
십자가는 두 개의 극단, 즉 인간의 측량할 수없는 사악함과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대비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궁국적인 계시를 가능케한다. 십자가는 자기의 독생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계시한다. 이 얼마나 놀라운 희생인가! 이보다 더 큰 사랑의 계시를 보여주실 수 있으셨을까? 진실로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은 우주적 드라마의 중심 무대에 계신다. 멀지않아 갈바리에서 거두신 그분의 승리는 악을 완전히 제거하심으로 절정에 달할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은 다시 연합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특히 갈바리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으심에서 볼 수 있는바 우주의 가장 위대한 진리인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의 초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주요 진리들은 이 관점에서 연구되어야만 한다.
성경의 저자
성경은 그 기원 때문에 신앙과 행위에 대해 권위를 갖는다. 그 기자들은 성경을 다른 문서들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이것을 “성경”(롬 1:2), “신성한 저서”(딤후 3:15, RSV), “하나님의 말씀”(롬 3:2; 히 5:12)으로 언급했다.
성경의 독특성은 그 기원과 근원에 있다. 성경기자들은 자기들 스스로 기별을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신적 근원으로부터 기별들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신적 계시를 통해서 그들은 그들이 전해주는 진리를 볼 수 있었다(사 1:1; 암 1:1; 미 1:1; 합 1:1; 렘 38:21 참조).
성경 기자들은 성령을 선지자를 통해 백성과 교통하시는 분으로 가리켰다(느 9:30; 슥 7:12 참조). 다윗은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라고 말했다. 에스겔은 “그 신이 내게 임하사”, “신이 나를 들어”(겔 2:2, 11:5, 24)라고 기록했다. 미가는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으로 채움을 얻”(미 3:8)었다고 증거 했다.
신약은 구약을 저술하는 일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할을 인정했다.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막 12:36). 바울은 성령이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셨다고 믿었다(행 28:25). 베드로는 성령이 불과 몇 사람만이 아닌 모든 선지자들을 인도하셨음을 드러내었다(벧전 1:10, 11; 벧후 1:21). 때때로 기자는 뒷전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참 저자이신 성령만이 인정되고 있다. “성령이 이르신 바와같이…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히 3:7, 9:8).
신약 기자들은 성령이 그들 자신의 기별의 근원임을 인정했다. 바울은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 4:1)라고 설명했다. 요한은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계 1:10)였다고 말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의 매체를 통하여 사도들을 임명하셨다(행 1:2; 엡 3:3-5 참조).
이처럼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셨다. 당신의 손으로서가 아니라 약 40명의 손을 통해 1,500여 년에 걸쳐 기록하셨다. 성령 하나님께서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셨으므로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시다.
성경의 영감성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딤후 3:16)이라고 말한다.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데오프뉴스토스(theopneustos)의 문자적 의미는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으신”(God-breathed)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를 “불어넣으셨다. ”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보는바 그런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감동 혹은 영감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시는 과정이다.
영감의 과정. 신적 계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주어졌다(벧후 1:21). 이 계시들은 제한성과 불완전성을 지닌 인간 언어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증언이다. 하나님은 낱말에 영감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감을 주셨다.
신자들은 녹음된 그대로 재생해 내는 녹음기처럼 수동적이었는가? 어떤 경우에 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표현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들이 보거나 들은 것을 자신의 재능을 다해 표현하도록 지시하셨다. 이 후자의 경우에, 기자들은 자신의 언어 양식과 표현 방식을 사용했다.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고전 14:32)는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영같은 선지자의 인격과 개성, 이성, 성실성 등을 배제하지 않는다.
모세와 아론의 관계를 통해서 성령과 기자 사이의 관계를 어느 정도 예시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 7:1, 4:15, 16 참조)라고 하셨다. 모세는 아론에게 하나님의 기별들을 알려주었고, 그 대신 아론은 그것들을 자신의 어휘와 표현 양식을 사용하여 바로에게 전했다. 마찬가지로, 성경기사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 양식에 따라 신적 명령과, 사상, 생각들을 전달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전달하셨기 때문에 성경의 서로 다른 책들은 그 어휘가 다르며 기자의 교육과 교양을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양식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어떤 표현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어와 논리와 수사(修辭) 가운데 당신 자신을 두어 성경상 비판의 대상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필자들이었으며 하나님의 필촉이 아니었다.”* 영감은 인간의 언어나 표현 방법에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자신에게 작용하는 것이며, 그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상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개인의 정신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거룩한 정신으로 물들여진다. 거룩한 정신과 의지가 인간의 정신과 의지에 혼합되어 인간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오직 한 경우에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정확한 말을 직접 기록하셨는데 곧 십계명이다. 이것은 인간의 작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다(출 20:1-17, 31:18; 신 10:4, 5). 그러나 이것들까지도 인간 언어의 제한성내에서 표현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신적 진리이다. 양자(量子) 물리학을 아기에게 가르친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죄악되고 제한된 인간에게 신적 진리를 전달해 주려고 하실 때 직면하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실 수 있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의 제한성이다.
성육신이신 예수님과 성경 사이에는 유사점이 존재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된 분으로, 신성과 인성이 한 개체 속에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것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신다고 한 말씀은 성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은 성경을 다른 문학서들과 구별되게 한다.
영감과 기자. 성령은 신적 진리를 전달하도록 특정 인물들을 준비시키셨다. 성경은 그분께서 이러한 인물들을 어떻게 준비시키셨는지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몇 가지 방법으로 그분은 신적, 인적 대리자 사이에 연합을 이루셨다.
성경을 기록하는 데 참여했던 이들은 선천적인 재능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신적 계시가 필연적으로 인물을 변화시켰거나 그에게 영생을 보증하지도 않았다. 발람은 하나님의 조언과는 반대되게 행동하면서도 영감아래에서 하나님의 기별을 선포했다(민 22-24). 성령이 사용하셨던 인물 다윗도 엄청난 죄를 저짙렀다(시 51 참조). 성경의 모든 기자들은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필요로 했다(롬 3:12 참조).
성경 기자들이 체험했던 영감은 조명(照明)이나 신적 지도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이에게 이르러오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경 기자들은 때때로 그들이 전달하는 신적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기록했던 것이다(벧전 1:10-12).
자신이 증거하는 기별에 대한 기자들의 반응들은 일치된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과 요한은 그들의 글에 대하여 크게 당황해 했다고 말했다(단 8:27; 계 5:4). 또한 베드로전서 1장 10절은 다른 기자들은 자신의 기별 혹은 타인의 기별이 가진 의미를 탐구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때때로 이들은 영감된 기별을 증거하는 일을 두려워했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논쟁을 했다(합 1; 욘 1:1-3, 4:1-11).
계시의 방법과 내용. 성령은 자주 이상과 꿈을 통해 신적 지식을 전달하셨다(민 12:6). 때때로 성령은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거나 내적 감각에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사무엘의 “귀에”(“in his ear”, 삼상 9:15) 말씀하셨다. 스가랴는 상징적인 것을 제시받은 후 설명까지 들었다(슥 4). 바울과 요한이 받은 하늘의 이상들은 구두 지시를 동반했다(고후 12:1-4; 계 4, 5). 에스겔은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보았다(겔 8). 어떤 기자들은 자신의 이상에 참여하여 그 이상의 한 부분으로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계 10).
내용에 대하여 말하면, 몇몇 사람에게는 성령이 장래의 사건들을 계시하셨으며(단 2, 7, 8, 12), 다른 기자들은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하여, 혹은 기존의 역사적 기록들로부터 자료를 선별하여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하기도 했다(사사기, 사무엘상, 역대하, 사복음서, 사도행전).
영감과 역사.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것 혹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서 도덕적·영적 생활에 유익하고 권위를 갖고 있다는 성경의 주장은(딤후 3:15, 16, NIV) 선별하는 과정에 있어서 신적 지도가 있었음에 대해 전혀 의문을 남기지 않는다. 개인적 관찰, 구두 자료나 기록 자료, 혹은 직접적 계시 중 어느 것에 의하여 정보를 얻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기자에게 이르러온 것이었다. 이것이 성경의 신뢰성을 보장한다.
성경은 추상적 교리들의 집합 속에서가 아닌 하나님과 인류와의 역동적 상호 작용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한다. 그분의 자기 계시는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건들 속에 뿌리박고 있다. 역사적 설명의 신빙성은 지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품성과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골격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해는 영생에 이르게 하나 부정확한 견해는 혼란과 사망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은 특정 인물들에게 당신께서 이스라엘을 취급하신 역사를 기록하도록 명령하셨다. 세속 역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민 33:1, 2; 수 24:25, 26; 겔 24:2 참조). 신적 관점에서 본 이러한 역사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역사를 알려준다. 성령은 기자들에게 특별한 통찰력을 부여하여, 선악간의 쟁투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고, 구원을 찾는 백성들을 인도한다.
역사적 사건들은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한 “표상” 혹은 “실례”이다(고전 10:11),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고 말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본(本)” 혹은 경고의 역할을 한다(벧후 2:6; 유 7). 아브라함의 칭의 체험은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된다(롬 4:1-25, 약 2:14-22). 깊은 영적 의미가 가득 찬 구약의 민법까지라도 오늘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기록되었다(고전 9:8, 9).
누가는 자기가 복음서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눅 1:4)고자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설명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이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 중 자기의 복음서에 포함시킨 것들을 선택한 기준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요 20:31)이었다. 하나님은 성경 기자들을 인도하여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역사를 제시하도록 하셨다.
성경 인물들의 전기는 신적 영감성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이러한 설명들은 그들의 품성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세심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들의 성공뿐 아니라 그들의 죄까지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노아의 자제심 부족과 아브라함의 기만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모세, 바울, 야고보, 요한이 보였던 감정의 폭발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역사는 이스라엘의 가장 현명한 왕의 실패, 열두 족장과 열두 사도들의 연약성을 폭로한다. 성경은 추호도 그들의 실수들을 변명해 주거나 그들의 범죄를 극소화시키지 않는다. 성경은 그들이 어떤 인물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떤 인물이 되었는지, 또는 어떤 인물이 되기에 실패했는지를 남김없이 보여준다. 신적 영감이 없었더라면 그 어느 전기 저술가도 그토록 지각력 있게 분석한 글을 기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 기자들은 성경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역사 이야기들을 신화나 상징이 아닌 참된 역사적 기록들로 보았다. 수많은 현대 회의론자들은 아담과 하와, 요나, 대홍수 등의 이야기를 배척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이며, 영적으로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셨다(마 12:39-41, 19:4-6, 24:37-39).
성경은 부분적 영감설이나 영감의 등급설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론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박탈해 가는 억측에 불과하다.
성경의 정확성.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신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다. 성경의 영감성은 성경의 신뢰성을 보장한다.
성경의 기별이 유효하고 진실함을 충분히 확신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원본이 전수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보호하셨는가? 고대 사본들은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나, 필수적인 진리들은 보존되어 왔다.* 필사자들과 성경의 번역가들이 작은 실수들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러나 오류라고 주장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학자들편의 오해였음이 성서 고고학을 통하여 얻어낸 증거로부터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 중 상당수가 서구적 안목에서 성경의 역사와 풍습을 읽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우리는 인간이란 부분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는 것, 곧 신적 행위에 대한 인간의 통찰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때문에 성경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실제로 잘못인 경우보다도 우리의 부정확한 이해에서 기인된 경우가 자주 있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과 본문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심판할 것인가? 우리는 결코 성경의 모든 구절을 설명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성취된 예언들은 성경의 신빙성을 확증한다.
성경을 파괴하려는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놀랍고도 신기스러울 정도의 정확성을 지닌 채로 보존되었다. 사해 두루마리와 후기의 구약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조심성 있게 전수되었는지를 밝히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무오류의 계시로서, 성경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음을 확증해 준다.
성경의 권위
성경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생애와 우리의 지식 탐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성경의 주장들. 성경 기자들은 그들의 기별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이라고 증거한다.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등의 인물들에게 임한 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의 말씀”이었다(렘 1:1, 2, 9; 겔 1:3; 욜 1:1; 욘 1:1). 주님의 기별자로서(학 1:13; 대하 36:16)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그분의 이름으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겔 2:4: 사 7:7 참조)라고 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신적 신임장이요 권위가 된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인간 대리자들은 뒷전으로 물러난다. 마태는 “이 모든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 1:22)라는 말과 함께 구약을 인용하면서 구약 선지자의 배후에 있는 권위를 시사하고 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매개자요 권위자로 보고 있다. 선지자는 간접 매개자인 것이다.
베드로는 바울의 저작들을 성경으로 분류한다(벧후 3:15, 16).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것에 대해,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2)고 증거한다. 신약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경으로 받아들였으며, 그것들이 구약의 글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하였다(딤전 5:18; 눅 10:7).
예수님과 성경의 권위. 예수님은 공생애 전반에 걸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셨다.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나 반대자들과 논쟁하실 때에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방어하시고 공격하셨다(마 4:4, 7, 10; 눅 20:17).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야 영생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관한 질문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 10:26)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성경을 인간의 전통과 의견들보다 위에 놓으셨다. 그분은 성경의 권위를 제쳐놓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을 책망하셨으며(막 7:7-9),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 함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고 말씀하심으로 성경을 좀더 자세히 연구하기를 권하셨다(마 21:42; 막 12:10, 26 참조).
그분은 예언적 말씀의 권위를 강하게 믿으셨으며, 그것이 당신을 가리킨다고 밝히셨다. 그는 성경이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39, 46). 당신이 신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지극히 확신에 찬 단언은 구약의 예언을 당신이 성취시킨 데서 나온 것이다(눅 24:25-27).
그와같이 그리스도는 성경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권위 있는 계시임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셨다. 그분은 성경을 진리의 본체요 객관적 계시라고 생각하셨으며, 인류를 거짓된 유전과 신화로부터 구원의 지식의 참 빛 속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보셨다.
성령과 성경의 권위. 예수님의 생애 동안 지도자들과 부주의한 대중들은 그분의 진정한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어떤 이들은 주님이 침례 요한,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곧 단순한 인간일 뿐이라고 느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고백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신적 조명에 의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마 16:13-17). 바울은 이 진리를 강조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主)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이것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조명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심지어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뜻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전 2:11)기 때문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18)이다.
오직 “하나님의 깊은 것”(고전 2:10)을 통찰하시는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서만 인간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대한 계시로 성경의 권위를 확신하기에 이를 수 있다. 그 때에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 되고, 그는 바울처럼 다음과 같이 증거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성령과 성경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성령은 성경 진리의 저자시요 계시자이시다.
영감에 관한 우리의 개념에 따라 우리 생애속에서 성경의 권위는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인간적 증언들을 수집해놓은 것에 불과한 것으로 믿는다든지, 혹은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에 따라 성경의 권위가 좌우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서 그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들이 아무리 연약한 인간이었다 해도 우리가 그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인식한다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일에 절대적 권위가 된다(딤후 3:16).
성경적 권위의 범위. 성경과 과학 사이의 마찰은 추상적 사변의 결과인 경우가 자주 있다. 우리가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지 못할 경우에 그것은 “과학 혹은 계시에 관한 불충분한 이해 때문”이며 “올바르게 이해하면 이 둘은 완전히 조화된다.”*
모든 인간의 지혜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만 한다. 성경 진리는 규범으로서, 이에 의하여 모든 사상은 시험을 받아야만 한다. 유한한 인간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것은 막대자로 별들을 재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성경은 인간의 규범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의 지혜와 문예보다도 우월하다. 우리가 성경을 판단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성경에 의해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품성의 표준이요, 모든 체험과 생각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것이나 예언의 은사를 통해 인도받는 것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전 12, 14:1; 엡 4:7-16). 성령의 은사는 성경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들은 성경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하며, 만일 성경과 조화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참된 것이 아니므로 배제되어야만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사 8:20)(본서 17장을 보라).
성경의 통일성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읽으면, 성경은 이야기, 설교, 역사로 뒤범벅이 된 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의 조명하심을 받는 이들, 인내와 수많은 기도로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하는 이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원리들 속에 깔려 있는 통일성의 증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단조롭게 획일적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다양하고 풍부한 색조를 띤 증언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기드물게 뛰어난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다양한 면모 때문에 성경은 모든 시대를 통해 인간의 필요를 더욱 잘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인류에게 계시하지 않으시고 계속되는 시대들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계시하셨다. 모세가 미디안의 광야에서 기록을 했든지, 혹은 바울이 로마의 감옥 속에서 기록을 했든지 그 책들은 동일한 성령으로 영감받은 교통을 나타낸다. 이러한 “점진적 계시”에 대한 이해는 성경과 그 통일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러 세대의 시간차를 두고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의 진리들은 불가 분리의 관계이다.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신구약은 하나이다. 구약은 예언과 상징을 통해 오실 구주의 복음을 계시한다. 신약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오신 구주 곧 실체화된 복음을 계시한다. 둘 다 동일한 하나님을 계시한다. 구약은 신약의 기초역할을 한다. 그것은 신약을 여는 열쇠를 제공하는 한편 신약은 구약의 신비들을 설명한다.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될 수 있다(딤후 3:1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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