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내 가슴은 쑤시고, 나른히 파고 드는 마비에
감각이 저린다. 마치 방금 독당근 즙을 마신 듯,
또는 어지러운 아편일랑
찌꺼기까지 들이키고 망각의 강쪽으로 가라앉은 듯이,
이는 너의 행복한 신세가 샘나서가 아니오,
오직 너의 행복에 도취되는 나의 벅찬 행복에서 솟는 아픔이란다.
날개 가벼운 나무의 정령인 네가
그 어느 노래서린 너도밤나무 속의 무수한
그림자 점 박힌 나무 잎새 속에서
이처럼 목청 떨쳐 가벼이 여름 노래 부르고 있거든.
오, 한 모금 포도주가 그립고나! 오랜 세월동안
깊이 판 땅속에 차게 간직되어
'프로라'와 푸른 전원과,
춤과 '프로방스'의 노래와 햇빛에 탄 환락의
향취 감도는 포도주가 못내 그립다!
오, 따스한 남국의 정취 서리고
진정한 진홍빛 히포크린 영천이 넘치는 한 잔 술.
잔가에 방울방울 구슬진 거품 반짝이고
주둥이엔 자주빛 물든 큰 잔에
철철 넘치는 한 잔 포도주가 그립다.
그 술 한잔 여기 있으면 내 그를 마시고 이 세상 남 몰래 떠나
너와 함께 저기 어두운 숲속으로 사라지련만.
멀리 사라져, 녹아서 잊으련다.
잎새 속의 너는 정녕 알리 없는 세상사를,
그 권태와 번열과 초조를 잊으련다.
여기 이렇게 인간들 마주 앉아 서로의 신음을 듣고,
중풍든 폐인의 몇 오라기 남은 슬픔 머리카락이 떨리고,
젊은이는 창백해져 유령처럼 야위어 죽어 가는 이 세상,
생각만 해도 슬픔에 가득 차고
거슴츠레한 절망이 눈에 서리며,
아름다운 여인은 그 빛나는 눈을 간직하지 못하고,
새 사랑 또한 내일이면 그 애인의 눈동자에 기쁨을 못 느끼는 이 세상,
가거라! 술은 이제 가거라! 내 이제는 네게로 날아 가련다.
바카스 주신과 그의 표범이 끄는 전차일랑 버리고
비록 내 우둔한 머리 혼미롭고 더디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시의 날개를 펼쳐 그를 타고 가련다.
아 이미 너와 함께 있구나! 밤은 그윽하고 ,
때마침 달님 여왕은 옥좌에 올라 있고,
뭇별 선녀들은 그를 둘러 섰도다.
그러나 여기엔 빛이 없다, 있다면 오직
푸르른 녹음과 구불구불한 이끼낀 길을 통해
하늘로부터 산들바람에 나부껴오는 어스름이 있을 뿐이라.
하여, 나는 볼 수도 없다, 무슨 꽃이 내발 길에 피었고,
그 어떤 부드러운 향기가 저 가지에 걸렸는지를,
그러나 향긋한 어둠 속에서 짐작해 본다.
이 계절, 이 달이 주는 하나하나의 향기로운 것들을,
풀잎과, 덤불과, 야생 과일나무,
하얀 아가위와 목가 속에 자주 읊어지는 찔레꽃,
잎 속에 가려져 빨리 시드는 오랑캐꽃,
그리고 5월 중순의 맏아들인
술 이슬 가득 품고 피어나는 들장미를,
여름날 저녁이면 날벌레들 웅웅 모여드는 그 꽃송이 소굴을,
어둠 속으로 나는 귀 기울인다. 한두번이 아니게
안락한 [죽음]과 어설픈 사랑에 빠졌던 나,
그리고는 수많은 명상의 선율을 띄워
[죽음]을 다정한 이름처럼 불러
내 고요한 숨결을 허공으로 날려 달라고 호소하던 나,
이제사 나는 나의 숨결 거두기에 , 고통없이 한밤중에
이 숨을 끊이기에 그 어느때보다 화려한 순간을 찾아낸 듯 하다.
네가 이토록 황홀하게 너의 영혼을 쏟아내고 있는 이 순간에,
여전히 너는 노래할지나 나는 듣지 못하고-
너의 드높은 진혼가에 나는 한 줌 흙이 되리라.
너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은 불멸의 새여!
그 어떤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지 못한다.
지나가는 이 한밤에 내가 듣는 이 목소리를
옛날 황제도 농부도 들었으리라,
어쩌면 저 노래는 이역땅 보리밭에서
눈물지며 고향을 그릴 제
루스의 슬픈 가슴 속에도 사무치고,
또한 저 노래는 쓸쓸한 선녀나라 위험한 바다
그 휘날리는 파도를 향해 열려진 신비로운 창문 자주 매혹했으리라.
쓸쓸하다! 바로 이 한 마디의 낱말은 조종(弔鐘)처럼
나를 네게서 불어내어 나 자신으로 돌아오게 하는구나.
그럼 안녕! 공상이란 사람 속이는 요정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 말이 헛됨을 이제 알았노라,
잘가거라! 잘가거라! 너의 구슬픈 노래는 사라진다.
가까운 풀밭을 지나, 고요한 시내 건너고,
저기 저 언덕 위로, 그리고 이제는 그 다음 골짜기 숲 속에 깊이 묻혀 버렸다.
이것이 환상이냐, 아니면 백일몽이냐?
그 음악은 사라졌다- 나 지금 깨어 있는가 잠들었는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자 : 키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키츠의 다른 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키츠(John Keats)
1795. 10. 31 런던~1821. 2. 23 로마.
영국의 낭만주의 서정시인으로짧은 생애 동안 생생한 이미저리, 뛰어난 감각적 매력, 고전적 전설을 통한 철학적 표현을 담은 시를 썼다. 가장 잘 알려진 시는 〈엔디미온 Endymion〉·〈잔인한 미녀 La Belle Dame sans Merci〉·〈우울에 대한 송가 Ode on Melan choly〉·〈나이팅게일에게 Ode to a Nightingale〉·〈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 Ode on a Grecian Urn〉· 〈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 The Eve of St. Agnes〉·〈히페리온 Hyperion〉 등이다. 2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폐결핵으로 요양중 죽었다.
청년기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인 그는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편이었다. 1804년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곧바로 재혼했다. 짧은 생애 동안 내내 키츠는 여동생 패니, 두 남동생인 조지·톰과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재혼이 파경으로 끝난 후 키츠 가족은 미들섹스의 에드먼턴에 있는 홀로 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존 클라크가 운영하는 2마일 떨어진 엔필드 학교에 다녔는데, 존 클라크의 아들인 코든 클라크가 키츠의 문학적 열의를 상당히 격려해주었다. 학교에서 키츠는 싸우기 좋아하는 아이로 알려져 있어서 절대로 '문학적'이지 못했으나, 1809년부터 그는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1810년 어머니가 죽자 할머니는 아이들 문제를 리처드 애비라는 후견인에게 맡겼다. 애비의 권유로 키츠는 1811년 에드먼턴에 있는 외과의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1814년 그곳을 나와 런던에서 가이 병원과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수술담당조수나 보조의사로 일했다. 이즈음 문학적 관심이 뚜렷해져 1817년 이후 전적으로 문학에만 몰두했다. 그때부터 요절하기까지 그의 인생 이야기는 주로 그가 쓴 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
코든 클라크는 어린 키츠에게 에드먼드 스펜서와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의 시를 소개해주었고, 이 작품들이 그의 초기 시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최초의 원숙한 시는 소네트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서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1815)인데, 이 시는 17세기 조지 채프먼의 〈일리아스 Iliad〉·〈오디세이아 Odyssey〉 번역판을 읽고 감격해 쓴 것이다. 클라크는 또한 키츠를 언론가이자 동시대 시인 리 헌트에게 소개해주었다. 키츠는 이를 계기로 젊은 시인 존 해밀턴 레이놀즈, 화가 벤저민 하이든 등 헌트의 사교집단 사람들과 교제를 갖게 되었다. 그의 첫 〈시집 Poems〉은 1817년 3월 출판되었는데 주로 '헌트적' 영향 아래 씌어진 작품들이었다. 편안하고 산만한 정서상태가 드러난다든가 영웅시적 2행연구(二行聯句)와 가벼운 운율을 사용한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집 중 가장 흥미로운 시는〈잠과 시 Sleep and Poetry〉인데, 이 시의 중간 부분은 키츠 자신의 시적 발전과정에 대한 예언적 관점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현재 관능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명상하는 일에 빠져 있으나 '인간의 심리적 고통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한편 이 시집은 미묘한 자연 관찰과 분명한 스펜서적 영향을 보여준다.
1817년 키츠는 런던을 떠나 잠깐 와이트 섬과 캔터베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의 첫 장시 〈엔디미온〉을 쓰기 시작했다.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남동생들과 함께 햄스테드에 있는 숙소로 옮겼다. 〈엔디미온〉은 1818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각 1,000행씩 4부로 나누어졌고 느슨한 운율의 2행연구로 씌어졌다.
개인적 위기
1818년 여름 키츠는 친구 찰스 브라운과 함께 레이크 지방과 스코틀랜드로 도보여행에 나섰는데, 지나친 여행으로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된 결핵의 초기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런던에 돌아오자 그의 시에 대한 가혹한 비평이 〈블랙우즈 매거진 Blackwood's Magazine〉에 실렸고, 뒤이어 〈쿼털리 리뷰 Quarterly Review〉에 〈엔디미온〉에 대한 비슷한 공격이 게재되었다. 키츠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조용한 확신으로 이러한 서평에 대처했으며 계속 시를 썼다. 그러나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 동생 톰이 한동안 결핵을 앓고 있었고, 1818년 가을 키츠는 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살펴주었다. 그즈음 햄스테드의 이웃인 패니 론을 만나 속절없고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다. 패니와의 관계는 키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별로 남다른 점이 없는, 단호하면서도 관대한 성품을 지닌 젊은 여성으로 키츠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많은 편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던 듯하다. 그의 불확실한 경제 사정이나 점차 나빠지는 건강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조지는 이미 미국으로 가버렸고, 톰이 죽은 후 키츠는 브라운과 함께 웬트워스로 이사했다. 1819년 4월 패니 브론과 그녀의 어머니가 키츠의 이웃이 되었다. 1819년 10월경 키츠는 패니와 약혼했다.
1819년
키츠는 〈엔디미온〉을 끝낸 직후 1817~ 18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Decameron〉 중 〈Pot of Basil〉 이야기를 번안한 〈이사벨라 Isabella〉를 썼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819년에는 〈라미아 Lamia〉·〈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와 〈나태에 대하여 On Indolence〉·〈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우울에 대한 송가〉·〈가을에게 Ode to Autumn〉 등의 뛰어난 송가, 〈히페리온〉의 2가지 판본 등 최고작이라고 평가되는 시들을 썼다. 병으로 고통받고 패니 브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가는 가운데 씌어진 이 명시들은 기술적·감정적·지적으로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키츠 자신이 '약점있는 시'라고 불렀던 〈이사벨라〉는 〈엔디미온〉의 감정적인 취약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는 키츠 초기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패니 브론과의 만남이 가져다준 최초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때 쓴 이 시는 젊은 연인들의 사랑의 도피를 묘사하는 데 있어 정열적이며 흥분된 분위기를 전달한다. 스펜서식 시연으로 씌어진 이 시는 절묘한 울림 속에서 그 주제를 드러내지만 키츠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뚜렷한 지적 발전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라미아〉 는 또다른 이야기체 시로, 훨씬 더 긴밀하고 좀더 규제된 2행연구와 좀더 견고한 분위기, 더 자제된 상황묘사를 잘 이용하고 있다.
송가는 키츠의 가장 뛰어난 시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의 내적 존재의 상충하는 충동들과 대면하고 자신의 갈망과 그 주위의 더 넓은 세계와의 관계를 숙고하도록 만드는 어떤 대상이나 성질에 대한 명상으로, 본질적으로 서정적인 작품들이다. 모든 송가는 9월에 쓴 〈가을에게〉를 제외하면 1819년 3~6월에 씌어졌다. 송가들의 내부적인 갈등은 영원한 이원성, 즉 초절적인 이상과 물질세계의 일시성·변화 등에 중심을 두고 있다. 동생의 고통스런 죽음과 자신의 악화되는 건강으로 키츠는 이 주제를 다루게 되었고, 송가들은 상상력이 지닌 자유로운 능력을 통해 자기확신과 확실성을 구축하려는 그 자신의 노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이팅게일에게〉에서 나이팅게일과 그 노래에 합일하는 데서 오는 환상적인 행복감은 인간의 슬픔과 질병의 무거운 무게, 그무렵 동생의 죽음으로 키츠에게 강하게 남아 있던 청춘과 아름다움의 일시성과 대조되어 있다.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유한한 인생을 능가하는 무한한 예술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이 주제는 〈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에서 좀더 뚜렷해진다.〈우울에 대한 송가〉는 슬픔이 인간의 정열과 행복에는 어쩔 수 없이 개입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또 환희와 욕망의 일시성은 자연과정의 필연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과 다른 송가들속에서 들려오는 풍부하고도 완벽한 운율적 움직임은 환희와 욕망의 향수(享受)를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경험으로 변환시켜 향수의 순간이 영원한 것이 되게 하고 있다. 〈가을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경험의 기록이다. 가을은 쇠망의 시간이 아니라 완벽한 성숙과 성취의 계절로 여겨지며 모든 것이 완벽에 도달하는 기간으로 이 계절이 덧없이 스러져버리고 말리라는 문제는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이 시들은 풍부하고 절묘하게 감각적인 세부묘사, 명상적인 깊이로 낭만주의 시의 가장 위대한 업적에 속한다. 이들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잔인한 미녀〉도 언급할 만한 것으로 이 작품은 〈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에서 보여지는 전원적인 사랑의 왜곡되고 파괴적인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키츠의 미완성 서사시 〈히페리온〉은 2가지 판본이 있는데, 2번째 것은 새로운 형식으로 씌어진 긴 서문을 첨부한 개정본이어서 내용이 다른 시라고 할 수 있다. 〈히페리온〉은 1818년 가을에 시작되어 첫판에 있는 것은 모두 1819년 4월에 끝났다. 9월에 키츠는 레이놀즈에게 〈히페리온〉을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1819년 가을 내내 〈히페리온의 타락 The Fall of Hyperion〉이라는 개정판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페리온〉의 2가지 판본의 제작시기는 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키츠의 가장 강렬한 체험시기에 해당한다. 그 시는 악화되는 질병과 좌절된 사랑에 직면해서, 초기 시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절대적 가치와 인간 운명의 일회성간의 갈등을 타협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서사시의 주제는 앞선 그리스의 신들인 타이탄족들이 나중의 올림피아의 신들에 의해 축출되는 것이다. 분명히 키츠는 〈엔디미온〉의 과잉되게 산만한 것과는 다른 글을 쓰고자 했으며, 의식적으로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경쟁하려고 했다. 〈엔디미온〉이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비유한 것이라면, 〈히페리온〉은 창조자로서의 시인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이 주제가 제2판의 새 서문에서 뚜렷하게 다시 나타난다.
〈히페리온〉의 제2판은 키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이다. 무운시 형태의 이 작품은 새로운 활력과 활기를 가지고 있으며, 시적 비전이 점차 확대되어 여신 모네타의 현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신은 시인이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며 마땅히 인류의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가장 초기 시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훨씬 더 강렬하게 실현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키츠는 이 시의 제작을 더이상 마음먹은 대로 밀고나가지 못했고 그결과 이 시는 미완성으로 끝났다.
말년
〈이사벨라〉·〈라미아〉·〈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히페리온〉 등의 시와 송가들은 모두 유명한 1820년 판에 실렸고, 이 시집이 그의 능력에 대한 진지한 척도를 제공해주고 있다. 시집은 7월에 나왔으며 이때쯤 키츠는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1819년 내내 병이 점차 깊어져 1820년초 결핵의 증후가 뚜렷이 나타났다. 자신의 병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는 어떠한 지속적 작품도 쓸 수 없었다. 그의 친구들인 브라운, 헌트 가족, 패니 브론과 그녀의 어머니가 그해 내내 열심히 그를 간호했다. 퍼시 비시 셸리는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피사에 와서 묵으라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키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겨울 동안 따뜻한 남쪽지방에 가 있으라는 권고를 듣고 조지프 세번과 함께 로마로 갔다. 그들은 1820년 9월에 배를 타고 떠나 나폴리를 경유해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12월초 키츠의 병은 다시 악화되었다. 마지막까지 세 번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2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죽었다.
편지들
키츠의 사생활과 시적 발달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전기는 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동생, 여동생 패니, 절친한 친구들, 패니 브론과의 서신들을 통해 키츠의 개인 성품의 뛰어난 고결성을 가장 친밀하게 그려볼 수 있으며, 독자는 시에 대한 그의 생각,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발전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그의 편지는 활기차고 예민하며 잘난 척하지 않는 비평적 안목과 진지한 심사숙고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비형식적이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낀 이 편지들은 영국 서간문 가운데 최고에 속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논평으로서 관심을 끈다는 것 외에도, 이 서간문들은 마땅히 그 나름의 독립된 문학적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이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시는 깊은 밤을 울며 지새우는 나이팅게일 소리를 들으며 고뇌에 찬 이 세상의 슬픈 현실을 환상의 세계로 끌어 올리려는 시인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키이츠의 시 가르치기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와 바다의 이미져리
저자 : 윤여웅
◎ 권/호: 제2호
키이츠의 시 가르치기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와 바다의 이미져리
윤 여 웅
1. 서 론
문학에서의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까지 전 유럽을 풍미한 문학운동으로, 데카르트(Descartes)의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다는 사상과 함께 문학의 제재보다는 형식이 강조되던 합리주의, 와는 달리 문학에서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이 강조되는 하나의 신사조였다.
따라서 낭만주의는 지성의 산물이기보다는 상상력과 인간 감정의 대상을 다루게 되며, 주로 도시생활의 제재를 다루었던 합리주의 시와는 달리 멀리 있는 사물 및 사상(phenomenon)을 동경하여 경이감(sense of wonder)을 표시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현실세계를 초월하는 상상의 세계에 몰입하면서 현실과 시인자신의 욕망이 합일하면 환희에 빠져드는 극단적인 감수성을 보여주며 그 상상을 외부로부터 내적인 것의 본질을 찾는데 기반을 둔다. 또 낭만주의는 반지성주의 또는 원시주의와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경향으로 반상징주의를 사용하며, 언어의 암시성 및 의미의 배음(over-tone)을 이용하는 한편 몽한적인 연상을 갖는다.
따라서 낭만주의 시인들은 자연에 대하여 심각한 흥미를 갖고, 자연을 인생에 정신적 영향을 미치는 자연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시인 자신들이 경험한 영적 가치를 주장하는 한편, 인생을 새로운 경이감과 감수성을 갖고 본다. 또 독자들에게 참신한 비젼을 제시하면서 독자를 시간경험의 긴 영역으로 인도하는 것이 낭만주의시의 특징이다.
그리하여 웰렉(Rene Wellek)은 낭만주의를 문학에서 하나의 결집체(coherent body)로 보고 그 공통요소로서 상상력, 자연, 문체 등을 들고 있다(161). 즉 낭만주의 시의 중심은 상상력 이론에, 세계관의 중심은 자연에, 그리고 문체의 중심은 상징과 신화에 있다고 하였다.
또 자연관은 자연에 대한 시인의 감정과 상상으로 표현되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 즉 자연과 인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표현이 시인의 자연관이 된다. 그리하여 낭만주의 시인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자신의 시를 '힘찬 감정에서 우러나온 자발적 유출'(a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이라고 정의하였는데, 여기서 감정(feeling)은 시인과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얻어지는 정서반응이라는 점에서 자연과 인간의 이미지(image)라는 진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이 정서반응은 자연물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지각대상인 자연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상징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동안 영미문학교육에서 낭만주의 시는 학생들에게 단지 문학의 한 사조로서만 단편적으로 교육되어 왔으며, 특히 최근에는 문학교육에도 실용주의가 만연되어 실제 생활과 연관있는 교과목만이 강조되는 가운데, 낭만주의 시에 내재되어 있는 그 심오한 본질이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문학이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혜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반면 실용적인 교과목이 강조되는 현장교육일수록, 인간세계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며 인생의 무한한 가능지대로 인간을 인도하는 상상력 특히 자연에 대한 상상력을 다룬 교육은 절실하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인간 감정과 자연과의 친화력은 물론, 이 상상력을 소화하고 변모시키는 특성을 갖는 낭만주의 시중에서 키이츠(John Keats)의 대표적인 작품을 분석, 이를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키이츠의 시에서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물인 바다가 어떠한 양상으로 이미지화 되고 구상화되며 이는 시인의 정신세계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을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Ode to a Nightingale)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키이츠와 이미져리
시에서는 언어에 의해 시인의 심상 속에 생산되는 이미지를 이미져리(imagery)라고 하는바 이미져리에는 정신적(mental) 이미져리, 비유적(figurative) 이미져리, 상징적(symbolic) 이미져리 등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되는데 키이츠의 시는 독자의 정신에 호소하는 감각적 경험을 강조한 정신적 이미져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적 이미져리들은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촉각적 이미지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키이츠의 대부분 시에서 시각, 청각, 미각, 촉각적인 이미지를 볼 수 있으며, 이 이미지를 통하여 우리는 시인의 감각적 능력을 체험하거나, 시인의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이미져리는 시 속에서 화자가 진술하고 있는 제재(subject)를 제시하며, 화자의 진술을 통하여 주어진 제재가 다른 제재와 대조됨으로써 상징이 되기도 하고, 아울러 시속에서 하나의 유추(analogy)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미져리는 크게 제재의 환기, 화자의 정조, 사상의 외면화 및 독자의 태도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상적 체험은 시인이 기억으로부터 심상을 찾아내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심상들은 거의 자동적으로 흘러(overflow) 나오지만, 그것은 시인에게 연상적 원리에 의하여 연결되는 점에서 시인의 지적인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키이츠는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를 시인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는 일을 가장 큰 행복으로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체험을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고 시 창작을 위한 세 개의 원칙을 세웠는데 이는 아래와 같다.
제일 먼저, 시는 특이성(singularity)이 아니라, '섬세한 과다성'(fine excess)을 가지고 독자를 대해야 한다. 시는 독자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였다는 인상을 주고 마치 독자 자신의 회상처럼 보이게 해야 한다. 둘째로, 시의 아름다움이 어중간해서는 안 된다. 어중간해서도 독자의 주의를 빼앗을 수 있을지 모르나 독자에게 깊은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이미지들이 연상되고, 발전되고, 마지막에 정착되는 과정은 마치 태양이 솟아 사람을 비추어 주다가 장엄하고도 엄숙한 황혼 속에 사라지는 과정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 나무에 잎이 돋듯이 시가 자연스럽게 맺혀지지 않을 바엔 차라리 시가 없느니만 못하다. (Forman 107)
위 원칙에서 키이츠가 황혼에 비유한 시적 효과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말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연상시키고 그러한 효과를 만들어 내려면 시인의 심상은 자연자체 만큼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여 시인의 개성이 자아의 껍질 속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기에 키이츠는 "천재적 작가들은 중성적 지성 위에 작용하는 에텔(ether)성 물질과도 같이 위대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개성이나 기존의 성격을 전혀 갖지 않는다. . . .따라서 시에 대한 감동은 신성함과 상상의 진실성에 있다."(Forman 109)라고 했다.
그리고 시에서 신성함과 상상의 진실성외에는 불확실성으로 보고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 안주할 수 없는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키이츠의 신념이었다. 따라서 키이츠는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자신을 성격화하거나, 또는 어떤 철학을 가지고 정신 생활을 체계화하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항상 작은 자아를 버리고 넓고 높은 대 자아에 도달하고자 열망하였다.
키이츠는 계속하여 "나의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사상들이 서로 이를 맞물고 꽉 채워져 있다. 그래서 큰 업적을 이루어 놓은 사람, 특히 문학에서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떠한 소질이 필요했던가를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없다. 쉐익스피어는 그러한 능력이 많았는데 나는 그것을 부정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이 사상과 이성을 초조하게 추구하지 않으면서 불확실성과 신비와 의혹 속에 안주할 수 있는 능력이다."(Forman 111)라고 불확실성을 설명하고 있다.
키이츠의 이 설명은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떤 하나의 체제나 형식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을 상상적으로 개발하고 감수성을 높이는 한편, 불가해한 현실이나마 마땅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자아를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키이츠는 이와 같이 상상을 개발하고 감수성을 높여 현실을 직시할 때, 현실의 본질만이 나타나며 그것이 진리(truth)이고 미(beauty)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키이츠의 시에서는 미와 진리가 동일시된다.
"미는 진리이고, 진리는 미"라고, - 이것이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아는 전부이고, 알 필요가 있는 전부다.
"Beauty is truth, truth beauty," - that is all
Ye know on earth, and all ye need to know.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Ode on a Grecian Urn)
키이츠는 시의 제재에 대해서도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갖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반(反) 시적인 존재다. 시인은 항상 다른 물체 - 태양과 달, 바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 에게 정신을 집중하며 자신의 심성을 충만하게 한다. 이것들은 충동의 산물이기에 시적이며, 그들 속에는 일정한 불변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전혀 그런 성질이 없다."(Forman 214)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키이츠는 "부정적 능력의 시인으로 꿈의 모습과 현실의 각성" (Bornstein 21)을 다룬 시인으로서 미를 최고의 경지로 생각하는 한편, 미는 모든 장엄하고 근원적인 아름다움 속에 있는 사랑이라고 간주하였다. 키이츠는 항상 인생을 앨리거리(allegory) 속에, 특히 성경(Bible)의 앨리거리에 비유하고 시인으로서의 매력은 인생에 대한 감응(responsiveness)과 개방(openness)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3.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
키이츠는 [나이팅게일에…]의 제 1연(stanza)에서 시인의 감각기관이 갑자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부조화를 아래와 같이 진술하고 있다.
내 가슴은 쓰리고, 졸리운 마비가 내 감각에
고통 주는구나, 마치 잠시 전 독 당근을 마시거나
어떤 감각을 둔하게 하는 아편을 찌꺼기까지 들이켜
My heart aches, and a drowsy numbness pains
My sense, as though of hemlock I had drunk,
Or emptied some dull opiate to the drains
즉, 시인은 목이 말라 -나이팅게일의 소리의 아편을 마셨으므로 - 땅속에 오래 묻어 두었던 시원한 포도주를 한잔 들이키고 싶어한다. 여기에서 나이팅게일은 자유의 상징으로 제시되며, 시인은 인간의 고통과 나이팅게일의 행복을 대비하면서 인간이 죽음을 향해 시간의 속도를 가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삶의 비애와 환희 속에서, 시인의 비참한 의식과 나이팅게일 소리의 지각을 대비시켜, 다시 말해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 존재하는 삶의 부조화를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제 2연에서 포도주를 통한 남국의 열정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춤, 프로방스의 노래와 햇볕에 탄 환희!"(Dance, and Provencal song, and sunburnt mirth!)라고 연상하면서 삶을 일종의 공상으로 진전시키는데, 이 공상은 또 쾌락에 이끌리어 자의적으로 심상들을 연합시키는 한편, 인생을 찬미하고 있다.
시인은 제3 연에서 이 공상을 따라 현실의 삶에서 사라지고 싶어하고 있다.
멀리 사라져, 녹아져, 아주 잊어버렸으면,
네가 잎새 사이에서 한번도 알지 못했던 것을,
Fade far away, dissolve, and quite forget
What thou among the leaves hast never known,
위와 같이 현실을 망각하고 시인 자신이 욕망의 대상과 동화해 버리는 상황은 몽상(reverie)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인생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나이팅게일 소리와 더불어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지만, 그 소망이 몽상이 되기에는 현실감이 너무나도 강렬하므로 아래와 같이 진술한다.
이 세상의 피로, 열병과 초조를,
여기선 사람들은 앉아 서로가 신음하는 것을 듣고;
중풍환자가 몇 개 남은 슬픈 마지막 백발을 떨고,
젊은이는 파리하고 유령처럼 여위어 죽는다;
The weariness, the fever, and the fret
Here, where men sit and hear each other groan;
Where palsy shakes a few, sad, last gray hairs,
Where youth grows pale, and specter-thin, and dies;
물론, 여기에서 fever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맥베드}(Macbeth)에서 "인생의 끊임없는 열병을 다 치른 후에, 편안한 잠을 이루고 있소" (After life's fitful fever he sleeps well)([맥베드]III, ii, 25), fret라는 말은 워즈워스의 [틴턴 사원 몇 마일 위에서 지은 시](Lines Composed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에서; "안타까운 몸부림이 소용없고, 이 세상의 열병이, 내 심장의 고동에 매달렸을 적에"-(when the fretful stir Unprofitable, and the fever of the word, Have hung upon the beatings of my heart-)(II, 52-53)라고 몽상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있지만, 키이츠가 "파리하고 유령처럼 여위어 죽고"라고 자신을 표현한 것만큼 시인의 상상은 지성에 의해 견제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제 4연에서 별의 요정들(Starry Fays)을 거느리고 옥좌에 앉아 있는 달의 여왕(the Queen-Moon)을 공상하면서도, 인생이 고해라는 쇼펜하우어(Schopenhauer)의 주장만큼, 어두운 지상에 피어있는 꽃들의 모양과 빛, 냄새, 그리고 그 꽃들에 모여드는 벌떼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촉각적 이미지로 상상해 보고 있다. 이와 같이 키이츠의 시적 체험에서는 상상과 공상이 상호 교차되고 상호 침투 및 견제되며, 또 상호 융화되면서 다양하고도 심오한 시적 체험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제 4연에서 시인은 자신의 상상력을 추구하고자 나이팅게일의 이름을 마치 시인의 연인처럼 부르며, 그 노랫소리에 영원히 잠드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면서 감상적인 몽상을 계속하고 있다.
제 5연에서는 감각적인 묘사, 제 6연에서는 영혼묘사 등으로 시인은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황홀경에 빠져 술에 취한 환상의 세계로 진입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전적으로 술의 힘만이 아니고 상상의 날개를 타고 어둠 속으로 간다. 그리고 시인은 아름다운 달빛 아래의 어둠 속에서 향기에 의해 어떤 꽃이 피었는가를 분별하고, 그 어둠 속에서 안락한 죽음만이 시간과 공간을 확대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에 따라 죽음이 정다운 목소리로 자기를 부르고 있음을 몽상하는 한편, 시인은 이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불멸의 노래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몽상은 제 7연에서 불식되고 만다.
너는 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영원 불멸의 새여!
어떤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지 못한다;
이 밤에 내가 듣는 이 목소리
고대에 황제와 농부가 들었고;
아마도 루쓰가 고향이 그리워, 눈물에 젖어
낯선 나라의 밀밭사이에 서 있을 때 그녀의 슬픈
가슴에 흘러들어 갔었던 노래;
Thou wast not born for death, immortal Bird!
No hungry generations tread thee down;
The voice I hear this passing night was heard
In ancient days by emperor and clown:
Perhaps the selfsame song that found a path
Through the sad heart of Ruth, when sick for home,
She stood in tears amid the alien corn;
위 연의 끝 3행은 이역에 와서 홀 시어머니를 위해 남의 밭에서 이삭 주이를 하는 루쓰(Ruth)의 기록 ([The Bible], The Book of Ruth)으로 시어머니에 대한 효성에 불타는 영원한 인간심성을 루쓰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는 바,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거기에서 정서를 도출하는 키이츠의 탁월하고도 마술적인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4. 바다의 이미져리
이와 같이 전형적으로 낭만적인 분원기를 묘사하고 있는 [나이팅게일에…]의 여러 연중에서도 많은 비평가들의 관심은 주로 이 시의 제 7연 마지막 2행에 집중되어 있다. 즉, 고요하고 쓸쓸한 선경(仙境)에 마법의 창문, 그리고 바다를 향한 쪽에는 아름다운 루쓰가 혼자 앉아 고향을 그리워하는 광경의 묘사로 아래와 같이 계속되고 있다.
쓸쓸한 요정나라의
위험한 바다의 물거품을 향해 열려있는
마법의 창문을 자주 요술 걸었던 바로 그 노래이리라.
The same that ofttimes hath
Charmed magic casements, opening on the foam
Of perilous seas, in faery lands forlorn.
전장에서 밝힌 것처럼 낭만주의 시의 특성이 시의 소재 및 제재로 멀리 있는 사상을 동경하여 경이감을 갖고, 환상적인 것에 시인이 관심을 표시하는 경향이라면 그 제재로서 바다는 인생에 정신적 영향을 미치는 자연으로, 인간의 심성에 상통하는 정신적 성질과 내면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자연물에 뒤지지 않으며, 또 바다가 변화무쌍한 다양성 및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추정한다면 전술의 [나이팅게일에…]에 나오는 바다가 어떤 양상을 띠고 있는가 하는 것은 키이츠의 시를 감상하고 분석하는데 주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the foam of perilous seas'는 '위험한 바다의 물거품'이라고 쓸쓸한 묘사로 해석하는 것이 그 동안의 방법이었으나 도시(영국의 London)에서 성장한 키이츠에게는 그 동안 바다에 접할 기회가 없었으며, 1820년 이태리를 여행하면서 바다를 처음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으로 보아 위 해석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호튼(Lord Houghton)에 의하면 키이츠는 전술의 이태리 여행중 폭풍우를 만나서 폭풍우가 잠잠해 지자마자 바이런(Lord Byron)의 [돈 쥬앙](Done Juan) 속에 있는 폭풍우 묘사를 읽고 이 시를 갑판에 던지면서 아래와 같이 조소하였다.
인생의 불유쾌한 사건에 대해서 혼자서 히죽이 웃거나 야유만을 보내는 사람에겐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그것은 장엄한 것을 건초로, 명랑한 것을 엄숙한 것으로 만드는 하찮은 독착성 이지만 바로 동정이라는 잔인한 난폭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다. 바이런의 충만된 교육은 그에게 그렇게 느끼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많은 면에서 교육의 욕구가 자극하는 감각을 약화시킨다(Houghton 213).
위 조소는 키이츠가 바이런의 거칠다는 바다의 묘사를 터무니없이 왜곡된 표현으로 보는 한편, 폭풍우의 바다를 노래한 바이런의 시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바이런이 항해 중 난파에 의하여 거의 죽음 직전에 '거친 바다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한 바이런의 시에 아이러니가 없다고 하는 키이츠의 주장은 독선적이지만, 키이츠가 반박하고 있는 바이런의 [돈 쥬앙]의 다른 부분에도 과장된 곳이 많다. 예를 들면 제 2편에서 전반(XIX-CX)의 난파를 묘사한 부분에서 승객이 차츰 뱃멀미에 걸리고 있는 모습, 드디어 배가 어쩔 수 없게 난파되는 광경, 표류하는 보트 위에서 전개되는 승객들의 굶주림, 광기와 많은 야유 등 상당히 과장의 요소는 많지만 이를 작가의 사실감 있는 통찰력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바이런의 작품 [해럴드 공자의 순유](Childe Harold's Pilgrimage)의 제 4편의 마지막 부분(CLXXIX-CLXXXIV)에서도 바이런이 묘사한 바다는 깊고, 검푸르고, 몸부림치는 바다로 성나고 힘에 가득 차 있으며, 격렬함과 파괴력을 가진 바다로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바이런의 전술한 바다의 인식 및 표현방법에 대하여 키이츠가 반발하여 자신의 시에서 바다를 '위험한 바다의 물거품'이라고 표현한 것은 독자의 상상을 초월하는 또 다른 인식이 키이츠의 정신세계에 작용한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키이츠의 시속에 등장하는 시적 대상물로서의 바다는 낭만적인 요소가 다분하고, 바다를 인간의 이상이 도달할 수 있는 귀착점으로 인식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이런이 묘사한 바다와는 또 하나의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키이츠의 작품 중 바다에 대한 묘사가 있는 초기의 작품[캘리도](Calidore)를 보면 호수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그만 보트의 날카로운 용골은
잔물결과 함께 다가와, 경쾌하게
수련화단 쪽으로 미끌어져 간다.
And now the Sharp Keel of his little boat
Comes up with ripple, and with easy float,
And glides into a bed of water lilies. (II, 19-21)
여기에서 호수는 수련이 피는 조용한 호수이기도 하고, 꿈에 본듯이 백조가 떠오르고, 배가 가볍게 수면을 미끄러진다는 평온한 풍경의 호수이다. 그리고 초기의 작품 [발끝으로 서다](I stood Tip-toe)로부터 후기의 시 [엔디미온](Endymion)의 소재가 바다로 도출되고 있는데, 여신 신디아(Cynthia)와 목동 엔디미온(Endymion)의 결혼날 밤의 광경을 진술하면서 시인은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멀리 있는 배들이 그들의 용골을 보이면
태양은 잠시 그의 힘찬 운동을 늦춘다.
Where distant ships do seem to show their Keels,
Phoebus awhile delay'd his mighty wheels. (II, 211-212)
이 로맨스(romance) 영역에서의 아폴로(Apollo)는 연인들을 위해 시간의 진행을 멈추고 있지만, 밤의 광경으로 상상의 수평선에 떠 있는 배의 모습은 거리감을 자아내고 매혹(enchantment)의 상징이기도 하며 정지와 정적으로 가득찬 바다의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엔디미온] 제4권 '비애의 노래'(song of sorrow)에서는 아래와 같이 진술하고 있다.
오 슬픔이여,
송골매의 눈에서 광택있는 그 열정을
왜 빌어 왔는가?
개똥벌레의 불빛을 주려고?
아니면, 달 없는 밤에,
바닷가에 기운찬 염분을 주려고?
O sorrow,
Why dost borrow
The lustrous passion from a falcon-eye?
To give the glow-worm light?
Or, on a moonless night,
To tinge, on syren shores, the salt sea-spry? (II, 152-157)
위 진술은 달이 없는 밤의 바닷가를 묘사한 자연의 경치로, [나이팅게일에…]에 나오는 '마법의 창문'(magic casements) 혹은 '쓸쓸한 요정의 나라'(faery lands forlorn) 등 표현이 자아내는 분위기와 흡사하여 이국적 연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베이트(Walter J. Bate)는 이 이국적 연상을 "이와 같은 불가능의 땅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쓸쓸하다. 그와 같은 땅은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Ode on a Grecian Urn)에 나오는 상상의 조그만 마을처럼 아무도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황폐하다." (Bate 509)고 평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부정적 측면을 노래한 이 'faery land forlon'의 표현을 엘리어트(T. S Eliot)도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묘사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시인의 진술은 [바다에 대한 소네트](Sonnet on the Sea)에서 "주위에는 영원한 속삭임이 있고/ 바닷가에는 황량함이" (eternal whisperings around/Desolate shore)(II, 1-2)라고 표현하였으며, 다시 [엔디미온]의 제 2권 앞부분에서는 아래와 같이 진술하면서 바다의 소란함에 귀 기울이고 있다.
추억의 조약돌 바닷가를 따라 끊임없는
속삭임을 불러일으키는, 광대한 바다!
Wide sea, that one continuous murmur breeds
Along the pebbled shores of memory! (II, 16-17)
그리고 [처음으로 채프만의 호머를 읽고](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에서 선장 코르테츠(Cortez)는 다리엔(Darien) 산의 정상에서 처음으로 본 광대한 태평양의 모습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는바, 이러한 상황에서 키이츠의 바다는 멀고 아득하여 해도(海圖)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바다가 되기도 하며, 이에 따른 항해는 고독하고 정적인 항해로 묘사되기도 한다. 즉, 수평선을 넘어서는 거리감의 마술 때문에 정적(靜的)으로 보인다는 것이 키이츠의 바다에 대한 선입관이다. 또 이것은 추억의 바닷가이고 로맨스와 상상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키이츠가 인간은 이 꿈의 나라, 바다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고 하면서 상상을 강조하는 부분이 전술한 [엔디미온] 제2 권 서두에 나오고 있다.
실행의 우주 안에 거무스레한 유성
이제는, 장관의 역사! 이제는, 치장된 속임수
Hence, pageant history! hence, gilded cheat!
Swart planet in the universe of deeds. (II, 14-15)
위와 같이 로맨스와 유사한 잘못된 역사, 다시 말해서 시인은 냉혹한 현실, 또는 몰인정한 인간행동은 추방되어야 할 상상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장은 [라미아](Lamia)에서도 볼 수 있는데, 서로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은 파멸시키고 있는 현실세계는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폴로니우스(Apollonius)의 냉담 철학(Cold philosophy)을 연상할 수 있다. 즉, 키이츠는 희랍의 비극작가 유리피데스(Euripides) 만큼이나 냉혹한 현실과 무정한 인간행동에서 이러한 위선적 요소인 무정함(ruthlessness)을 가장 혐오하고 있다.
한편, 비평가인 보올튼(Marjorie Boulton)은 낭만주의 시인들의 이미져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시인들은 그들의 시에 선호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셸리(Shelley)의 작품은 우호적인 뱀, 바다, 하늘로 꽉차 있고; 단(Donne)의 시는 좀더 현세적이고, 좀더 국가적이며, 과학과 신학에서 도출된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워즈워스(Wordsworth)는 [서곡](The Prelude)에서 인상적으로 자연적인 주위사람들의 외로운 모습을 선호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키이츠는 느낌, 색채 그리고 감각의 이미지로 충만하다. (132)
여기에서 느낌(texture)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시인의 정신적인 느낌을 의미하며, 또 키이츠는 이 정신적인 느낌을 위해 독특한 운치를 나타내는 색채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바 잠시 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키이츠는 시의 제재로 사랑(love) 및 여자(lady)를 진술할 때, 가련, 순결 및 단순한 느낌을 나타내는 백색(white)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순백의 진실성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I lov'd her to the very white of truth.
([엔디미온], Book III, 412)
그들은 모두 축제에 갔다, 흰옷 차림으로
They all mov'd to the feast, In white robes.
([라미아](Lamia), Part II, 195)
그러나 백색과 유사한 색채의 회백색(hoar)은 노인 머리카락의 색으로 사용되고 있다.
토성의 회백색 수문은 용골주위에서 부글거리는 포말처럼 반짝인다.
Saturn's, whose hoar locks shone like the bubbling foam about a keel.
([하이페리온](Hyperion), Book II, 353)
그리고 태양의 빛, 아폴로신, 위대한 권위, 풍성함 등을 나타낼 때에는 금색(golden)을 사용하고 있다.
지평선의 천장부분에서 금빛 광채가 멀리 그리고 크게 빛났다.
from the horizon's vaulted side, There shot a golden splendour far and wide. ([엔디미온], Book I, 349)
그의 바로 머리털, 그의 금빛 머리 다발이 유명해진다.
His very hair, his golden tresses famed.
([하이페리온], Book III, 131)
가을철 낫으로 만든 금빛 창고
golden store In Autumn's sickle.
([엔디미온], Book IV, 424)
한편 행복의 절정인 순간에도 golden이라는 색채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녀는 귀중한 시간을 애타게 생각했다.
She fretted for the golden hour.
([이사벨라](Isabella), XXXI, 3)
그러나 키이츠가 자연의 대상인 바다를 묘사하는데 사용한 색채어는 다양하여 시인 자신이 채색주의자(colourist) 임을 나타내고 있다. 축복의 상징인 은색(silver)을 사용하여 바다의 신 해왕성(Neptune)에 대하여 은색의 빛을 대조시키고 있는 경우;
상공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지극히 사랑스러운 달,
껍질은 해왕성의 술잔이 되고:
The lovelist moon, that ever silver'd o'er,
A shell for Neptune's goblet:
([엔디미온], Book I, 592)
생명의 상징인 푸른색(blue)을 사용하여 영겁의 가슴을 파랗게 노출시킨 경우;
파랗게 노출된 영겁의 가슴
The blue Bared its eternal bosom.
([수면과 시](Sleep and Poetry), 189)
즉 키이츠는 바다를 묘사함에 있어 silver 및 blue 등을 사용하여 힘찬 삶의 숨결과 환상적인 분위기를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드(Newell Ford)는 "[나이팅게일…]의 '위험한(perilous)'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키이츠가 처음에는 '용골(龍骨)이 없는' (keelless)이라고 기술하였던 것을 읽는 사람들의 오해에 의해 '잔인한(ruthless)'이라는 단어로 잘못 기술된 것"(12)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잔인한'이라는 표현은 키이츠의 바다에 대한 분위기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또 피니(Claude Finney)도 "키이츠가 사용한 'keeless'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perilous'로 바꿀 필요는 없다."(630)라고 말하면서 포드의 주장대로 'perilous'와 'keeless'라는 단어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포드의 주장에 찬성하고 있다.
피니는 그 이유로 환상의 세계, 즉 상상을 추구하는 키이츠에게는 시인의 환상을 냉혹한 현실세계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중세기 성곽을 둘러싸고 있던 일종의 방어용 외곽호와 같고, 배의 형체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묘사하기 위해 'keeless seas' 혹은 'perilous seas'와 같은 진술이 요구되었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피니는 "그(키이츠)는 스펜서(Spenser)의 매리넬(Marinell)의 이야기에 나오는 '쓸쓸한 요정의 나라에서 위험한 바다의 물거품'과 클러드(Claude)의 마법에 걸린 성곽쪽으로 열려진 마법의 창문에 관한 이미지를 묘사하였다."(632)라고 언급하고, 거듭 전술의 키이츠가 쓴 '죤 해밀턴 레이롤즈에게 보내는 서한'(Epistle to John Hamilton Reynolds)으로부터 인용(II, 26-50)을 한 후 "그러나 이 묘사에 나오는 바다는 깨끗하고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것은 물거품도 일지 않고 용골이 없는 것도 아니고 위험하지도 않다."(631)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험한 바다'라는 표현은 바이런의 묘사와 같은 '오가는 배를 난파시키는 위험한 바다'가 아니라 시인인 키이츠가 설정한 마법의 나라에서 마법이 쉽게 풀리는 한편, 그 바다 속에 아름다움, 연약함, 슬픔이 공존함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환상은 자칫하면 부서지기 쉬운 것이고 '불안정'(Wilson 53)한 것이며, 또 시인은 끊임없이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게 됨을 진술하고자 위와 같이 표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이팅게일에…]에서 시인은 불멸의 새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듣고 황홀경에 빠져 환상의 세계로 가고자 하고 있음을 비평가 부룩스(Cleanth Brooks)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동물은 죽어가는 과정동안 정말로 자신에게 무슨일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이것이 키이츠가 그의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에서 나이팅게일에게 "너는 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영원불멸의 새여"라고 진술하도록 하는 요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반대로, 인간은 그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이팅게일과 달리 인간은 죽게끔 태어난다. (62)
즉, 시인은 현실과 꿈 사이를 방황한다. 그러기에 현실세계의 '불안정'이야말로 [나이팅게일에…]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포글(Richard H. Fogle)은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에 대해서 "인간이 찬양하는 환희는 죽어야만 한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환희로, 이는 울적함의 바로 정점(頂点)이다."(310)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시인 키이츠에게 우수와 희열, 쾌락과 고통 그리고 예술과 인생이 동일성을 갖지 못하는 한편, 위 요소들이 분리되어 시인에게는 어렵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쓸쓸한'(forlorn)이라는 말은 불길한 말이다. 그리고 '위험한 바다의 물거품'-환상-은 깨어지고, 다시 현실로, 즉 환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각성되는 과정이 정확하게 묘사된 제 6연은, 다시 한번 현실의 인식으로 나이팅게일의 소리가 멀어짐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목장을 지나, 고요한 시내를 건너, 산을 넘고, 다음 골짜기 속에 깊이 파묻히고 말았다"라고 나이팅게일의 목소리를 아쉬워하면서 "내가 꿈을 꾸는 것일까? , 생시일까?" 하는 시인의 표현은 제7연에 나오는데, 이는 키이츠가 직접적이고 이지적인 해답을 요구하기보다는 중세기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 추구하던 일종의 순환론(vicious circle)에 경도(傾倒)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이팅게일에…]의 마지막 연은 아래와 같다.
쓸쓸한! 바로 이 말은 나를 너로부터
나 자신에게로 불러내는 조종(弔鐘) 같구나!
잘 가거라! 공상은, 잘 속이는 요정이여,
소문처럼 잘 속이진 못하는구나,
잘 가라! 잘 가라! 네 구슬픈 노래 사라진다
가까운 목장을 지나, 고요한 시냇물 위로,
언덕위로; 그리고 지금은 깊이 묻히었다
다음 골짜기의 숲 속에;
이게 환상인가, 아니면 백일몽인가?
사라졌네 그 음악: 나는 깨었는가? 자는가?
Forlorn! the very word is like a bell
To tell me back from thee to my sole self!
Adieu! the fancy cannot cheat so well
As she is famed to do, deceiving elf.
Adieu! adieu! thy plaintive anthem fades
Past the near meadows, over the still stream,
Up the hill side; and now'tis buried deep
In the next valley-glades:
Was it a vision, or a waking dream?
Fled is that music: Do I wake or sleep?
위의 연에 대해서 비평가 포글은 "키이츠는 변덕스러운 슬픔처럼 그가 쓰고자 하였던 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려 하지도 않고, 고통의 요란한 서정적 외침으로 하지도 않았다. 그는 완전하고 풍부한 경험으로 썼으며, 그를 정지시켰던 경험을 묘사하였다."(Fogle 439)라고 말하면서 시인의 경험을 환상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키이츠의 [엔디미온] 제4 권에서도 환상의 바다에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 있다.
동굴은 외롭고, 안녕!
환상의 바람, 그리고 환상적인
바다의 엄청나게 큰 파도.
Caverns lone, farwell!
And air of visions, and the monstrous swell
Of visionary seas. (II, 651-3)
그러나 이와 같은 키이츠의 바다는 공상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의 바다인 동시에, 시인에게는 그 환상의 허무함을 인식하면서 진리, 철학, 인생의 현실적 어두운 면에 압박을 느끼게 하는 바다이다. 그리고 시인은 여러 차례 그 환상에서 벗어나려 애쓰는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으며 시인의 생애가 끊임없이 그 허무한 환상 및 꿈을 추구하면서, 아름다움과 시의 세계로 방황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드라프(Clarence Thrope)도 [나이팅게일에…]에 대하여 "키이츠가 노래로서 쾌락을 열망하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과 함께 자연과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에 대한 정체성에, 근접하면서 화해에 도달할 무렵에 쓴 작품"(39)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리고 드라프는 [나이팅게일에…]의 본질은 시인이 지금 어떠한 세계로부터 어떤 세계로 움직이려 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말)의 합리성보다는 시인의 자세가 보다 포괄적이고 고차원적인 관찰로 표출되어야 한다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
맑은 정신을 갖고있는 사람을 동경하는 표현으로, 좀더 의식적 비상이며 더불어 도망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세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시는 죽어야할 운명의 숨결을 내뿜는 것이고 인생의 지평과 그 뒤에 있는 더 넓은 세계의 직관을 제시한다. (Thrope 40)
5. 결 론
키이츠의 시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키이츠를 관능적 유미주의 시인, 또는 '강철과 부싯돌'(Flint and Iron) 즉 철석같은 심성의 인본주의자(humanist)로 평하였다. 그러나 키이츠 자신은 위대한 쉐익스피어의 경지에 접근하기 위하여 철학자로서의 워즈워스, 예술가로서의 밀톤(Milton) 사이를 방황하였으며 이에 연관해서 두 권의 {하이페리온}을 한 권으로 중단한 내면적 이유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그리고 키이츠가 시인으로서 오랫동안 일관해 왔고, 또 만년에 다시 애수에 젖었던 송시(Odes) 시대의 경지는 초기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남부 기후(Southern climate)의 동경이며 남부 유럽 즉 지중해쪽 바다에 안주하려는 시인의 의지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키이츠의 시에 비극 같은 한랭(cold)의 이미져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쉘리(Shelley)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예민함과 견고함과는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하여 포글은 키이츠가 한랭의 이미져리를 혐오하기보다는 유쾌하게 보고, "금빛으로 빛나는 용골(the keel)이 파도를 가르고 전진하는 그 바다는 환상이고 이 환상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을 아는 시인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다."(Fogle 79)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키이츠를 그리스인이라고 평한 쉘리의 종달새(lark)가 넓은 하늘을 향하여 갑자기 날아오름에 비하여 키이츠의 나이팅게일(nightingale)은 숲속에 살면서 지상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키이츠의 나이팅게일은 인생의 부정적 측면을 초월한 새로, 인생의 부정적 측면은 상상력을 통하여 초월할 수 있다는 이론을 갖고, 이 나이팅게일을 통해 구속된 현실의 인간을 상기시키려는 이미져리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키이츠가 이와 같이 회의주의적으로 운명을 감수하는 것은 자신이 "폐결핵으로 건강을 해치고 육체적으로 생사의 기로에 있음을 알고 1818년 요양지에서 런던으로 돌아와 애인 보로운(Fanny Brawne)를 만나려는 자신의 심정이 될 수도 있으며 시인이 생전의 여러 가지 경험을 흡수, 동화하여 인생전체를 관조하면서 서로 연관이 안 되는 부분을 '과잉, 강렬 그리고 자발성(excess, intensity and spontanceity)"(Finney 245)이 되도록 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시인의 수용태도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용의 태도는 2장에서 필자가 기술한 것처럼 키이츠가 테일러(John Taylor)에 보내는 편지에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아래 인용한 바다의 상태도 더할 나위 없이 키이츠의 바다답다.
…새롭게 들어 올리면서
오래된 바다는 해변으로 긴 파도를 실어 나른다,
푸른빛 등뼈는 짧은 수명의 물거품을 백발 만들고,
서서히 파멸하면서 나태해 지는데
…as when heav'd anew
Old ocean rolls a lengthened wave to the shore,
Down whose green back the short-liv'd foam all hoar,
Bursts gradual, with a wayward indolence
([엔디미온], Book III, 11.247-50)
위 표현은 존재, 혹은 불 존재의 희미한 상황에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방향을 설정한 바다가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를 위험하게 혼자 걸어가는 키이츠의 '위험한'(perilous) 바다라는 이미지가 어울리며 그 묘사의 심원하고 탁월함에 우리는 놀라게 되며 이 불가사의한 공감에 독자는 더욱 매료된다.
다시 말해서 키이츠 시의 특징은 화려하고 치밀한 문체와 강렬한 서정성 및 감각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여 사유(reflection)가 많다. 그리고 키이츠의 시는 감각이라는 탐미기관을 통해 포착되며 상상력이라는 탐미기능을 작용시켜 고차원의 정신세계에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키이츠의 시는 외면적으로는 화려한 감각의 도취를 진술하고 있으나 시인의 내면에는 보다 더 심오한 인간의 고통이 있으며 시인은 독자들에게 '공통된 인간은 외로운 자아'라는 인식으로 전술의 현상세계와 정신세계사이에 있는 중용(中庸)의 도(the golden mean)를 제시하고 있다.
이상 살려 본 것처럼 바다라는 상상력의 재료에 키이츠는 이미져리를 마련해 주고 또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나이팅게일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시간대를 발견하고 이를 미래의 세계로 개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중용의 도'라는 심오한 본질에 눈뜨게 하므로 학생들에게 이에 대한 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가톨릭대)
인용 문헌
Abrams, M. H. English Romantic Poets. London: Oxford Univ. Press, 1975.
Bate, Walter Jackson. John Keats. Mass: Harvard Univ. Press, 1988.
Bornstein, George. ed., Romantic and Modern Revolution of Literary Tradition.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Ltd., 1954.
Boulton, Marjorie. The Anatomy of Poetry.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Ltd., 1953.
Brooks, Cleanth. The Hidden God. New Haven: Yale Univ. Press, 1978.
Finney, Claude. The Evolution of Keats's Poetry. London: Cambridge Univ. Press, 1996.
Fogle, Richard. Mythology and the Romantic Tradition in English Poetry. Mass: Cambridge Univ. Press, 1937.
______. The Imagery of Keats and Shelley. New York: Chapel Hill, 1949.
Ford, Newell. Keats's Romantic Seas: "Ruthless" or "Keeless"?, Keats-Shelley Journal, Vol. I. (Jan. 1952)
Forman, M. B. ed. The Letters of John Keats, 4th ed. London: Oxford Univ. Press, 1952.
Houghton, Lord. The Life and Letters of John Keats. London: George Routledge & Sons, Ltd., 1954.
______. The Poetical Works of John Keats. London: Oxford Univ. Press, 1946.
Stillinger, Jack. John Keats. Mass: Harvard Univ. Press, 1990.
Thrope, Clarence. The Mind of John Keats. New York: Harcourt Brace and Co., 1962.
Wellek, Rene. Concepts of Criticism. New Haven &
London: Yale Univ. Press, 1983.
Wilson, Edmund. Axel's Castle.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9.
Teaching Keats; "Ode to a Nightingale" and Imagery of the Sea
Abstract Yoh-WoongYoon
John Keats delineates nightingale in "Ode to a Nightingale" as a bird which transcended the negative aspect of life. And, Keats with the theory the negative aspect of life may be transcended through imagination presents imagery to remind the man of reality bound through this nightingale.
The sea ascends in poems of Keats is a sea of fantasy enclosed the imaginary world and the fantasy is fragile and dangerous and imstabilized and Keats tries to accommodate the practical world by getting rid of the fantasy through power of dream.
Keats was projected by portrait striving for getting rid of the fantasy in many times and he is wandering between the reality and dream as delineating the sea as 'perilous' and 'faery land forlon'
Since therefore, the characteristics of Keats's poems have many reflections by use of splendid and minute style and intensive lyricism and sensitive expressions. And, his poems are captured through the aesthetic organ of sense and reaches to the spiritual world of high level by reacting the aesthetic function of imaginary power.
And, his poems mention fascination of splendid sense in outer bearing however, there is deeper pain of men in the internal aspect of his poems and, the man who is common to the readers suggests so as to follow the golden mean between the practical world of nature and men's spiritual world having recognition of lonely ego.
(출처 : 한국 영미문학교육학회 게시판에서)
http://www.kstel.or.kr/menu/home.html
http://www.kstel.or.kr/cgi-bin/technote/read.cgi?board=journal&y_number=15)
'문화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망스 문학의 현대성 (0) | 2021.09.09 |
---|---|
영미문학 검색 (0) | 2021.09.09 |
분석: "나이팅게일 송가" (0) | 2021.09.09 |
존 키츠 (0) | 2021.09.08 |
John Keats 1795–1821 (0) | 2021.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