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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

르네 로댕

by 이덕휴-dhleepaul 2021. 9. 22.

프랑소와 오귀스트 르네 로댕 

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11.12. - 1917.11.17.

 

 

신의 손 1898-1902 대리석 94x82.5x54.9cm

 

특히 <신의 손> <생각하는 사람>은 그동안 단 한번도 파리 로댕미술관을 떠나 해외로 반출된 적이 없다고..

<신의 손>은 로댕의 대리석 작품 가운데 진수로 손꼽히는 명작이란다.

 

 

신의 손 (측면)

  

평생을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자의식에 빠져 차갑게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종교에 귀의해서 절대자를 닮으려고 고행하는 삶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종교적 삶에 지쳐 일상으로 돌아왔으면서도 그 종교적 삶을 버리지 못한 채 그 고행의 세계를 형상화하고자 또 다른 고행의 길을 가는, 그런 삶의 모습도 있다. 바로 조각가 로댕(August Rodin, 1840-1917년)의 삶이 그러하다.

 

깊은 신앙심에서 방황하다가 종교적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신의 손을 가진 인간’ 이라 불리는 로댕의 말년 작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이 창조주의 손을 표현한 ‘신의 손(La Main de Dieu)’ 이다. 이는 “이 모든 것을 내 손이 만들었고 이 모든 것이 내 것이다.”(이사야 66:2) 라고 하신 주님의 손을 표현한 것이리라.

 

조각가 로댕은 바로 이 손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련한 그리움과 강한 믿음의 여정으로 우리를 초대하며, 생명 창조의 메시지를 통해 우리의 존재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손에 쥐어진 돌 안쪽에는 엇갈린 자세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두 남녀의 나체상이 있다.

 

남자는 얼굴을 여인의 젖가슴에 한껏 파묻은 채 여인의 머리를 당기고 있는데,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 여인에게 맡기는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틀어쥐려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러한 이들의 행위가 어찌된 것인지 순수한 사랑의 이미지로 느껴진다.

 

이들의 관능적 사랑이 신의 손 안에서 순진무구한 사랑으로 거듭나며, 하나님의 품에서 더없이 큰 행복으로 전이되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랑이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의 목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에 말이다.

 

 

생각하는 사람 1881-1882 석고 184.5x107x150cm

 

위 작품은 로댕 생존시 로댕의 손으로 직접 빚어낸 초대형 채색석고 작품으로 대중에게 익숙한 청동작품으로의<생각하는 사람>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인체와 근육 묘사가 참으로 경이롭다.

 

이 <생각하는 사람>은 시인 단테를 표현한 것으로 <지옥문>앞에서 소용돌이치며 죄값을 치루고 있는 인간군상들을 고뇌하는 모습으로 내려다 보고 있다.

 

1880년 <지옥문> 팀파늄 부분을 장식하기 위해 약 70cm의 크기로 제작되어 당초 <지옥문>의 영감을 준 <신곡>의 저자 단테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생각에 잠겨 지옥세계를 관찰한다는 의미에서 <시인>이라는 제목이 붙었었다.

 

당초 이 작품은 지옥에서 떨어져 고문당하는 육체를 지닌 존재이면서도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어 시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초월하고자 한 사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훗날 <생각하는사람>은 <지옥문>전체 구성에서 제 위치를 지키면서 1888년부터는 단독으로 전시되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게 된다.

 

1904년에는 그 인기에 걸맞게 기념비로서 작품의 크기가 커지게 된다. 이로서 사색에 잠겨 있으면서도 육체의 강렬함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작품 중 하나가 된다.

 

지옥문 La Porte de l'Enfer 1880~1917 조각(청동) 6.35x4x0.85m

 

<지옥의 문>은 로댕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얕은 돋을새김으로 장식됐다. '지옥문'은 인간이 운명적으로 맞게 되는 소외, 절망, 죽음에 대한 고뇌의 표정을 다양한 인물 형태로 묘사하고 있다.

 

그 중 특히 '생각하는 사람'은 단지 초상의 기능만을 했던 종전의 조각과는 달리 인물에 대한 조각적 해석을 통해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조각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영원한 우상 1893 석고 대리석주헝 73.2x59.2x41.1cm

 

로댕의 채색 석고조각 '영원한 우상’(1893년). 까미유 끌로델을 만나 사랑에 빠진 로댕이 남성들의 영원한 지향점인 여성에 대한 갈망을 한 쌍의 연인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까미유의 <사쿤달라>와 매우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까미유가 로댕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을 즈음으로 까미유에게 사랑을 다짐한 작품이었을 것이라 한다.

 

차가운 조각 작품 속에 열정적이고 감성적으로 담아 낸 인간의 고뇌와 열정, 애증이 담긴 로댕의 예술품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삶의 모습을 반영하는 열정의 산물인 듯.. 사랑이란 저러하노니, 얼어 붙은 땅을 찢고 새싹을 밀어 올리는 그 '잔인한 4월' 보다도 사랑은 더욱 더 잔인한가 싶으다.

 

 

입맞춤 1886 석고 188.8x112.9x113.2cm

 

<입맞춤>은 본래 <지옥의 문> 일부로 제작될 계획이었지만 에로틱한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제외시켰다고 한다. 까미유를 향한 로댕의 사랑은 정열적인 육감의 세계라는 새로운 표현 양식과 소재를 탄생시켰다. 단테의<신곡>에서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 형벌을 받은 젊고 잘 생긴 시동생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표현했다.

 

 

회복 1892 or 1906 대리석 49x74.1x55.4cm

 

  

아담 1881 청동 197x76x77cm_이브 1881 청동 172.2x52x64.5cm

 

아담과 이브. 지옥문의 양쪽에 배치하고자 계획된 작품이다. 아담은 신에게 신성한 불꽃을 선사 받는 것이 아닌 지상에 속함을 의미하는 듯, 기이한 포즈와 땅을 가리키는 손은 이전 시대의 아담과 사뭇 다르다.

 

 

청동시대 1877 청동 181x66.5x63cm

 

벨기에 브뤼셀에서 선보인 데뷔 작품 <청동시대>는 남성의 몸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하여 '모델의 몸에서 직접 주물을 뜬 작품'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작품이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란 오해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찬사로 바뀌었다.

 

까미유 끌로델 (Camille Claudel) '왈츠(La Valse)' 청동 1889-1905  43x23x34cm

 

까미유의 걸작 '왈츠'이다. 이들은 춤에 완전히 빠져 있다. 한껏 몸을 젖힌 포즈와 늘어뜨린 드레스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서로에 대한 사랑에 취해 있지만 표정엔 불확실한 마음이 서려 있는 듯 하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들 관계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던 듯 하다. 비스듬히, 쓰러지기 직전의 순간이다.

 

 

안드로메다 (Andromede) 1887 대리석 26x30x21cm

  

 

절망 Danaid 1885 대리석 35×72.4×22.5cm

 

 

다나이드.. 아버지의 명령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물통에 물을 채워야 하는 다나이드.. 이 절망에 빠진, 하지만 아름다운 뒷모습은 자신의 연인이자 또 한명의 천재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이다.

 

아무리 염원해도 채워지지도 끝나지도 않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사랑이라.. 그러나 로댕은 20년간 함께 한 아내를 버리지 못했다. 까미유 끌로델만이 홀로 지옥에 남았다.

  

까미유 끌로델 중년 L'Âge Mûr de Camille Claudelle 청동 1,024×768cm

 

로댕미술관에는 로댕의 작품뿐 아니라 끌로델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의 작품도 여럿 전시되고 있다. 끌로델의 <중년>이라는 청동조각이다. 한 중년의 남자가 늙수그레한 여인네에 이끌려 어디론가 떠나고 있고, 그 뒤로 젊은 여인이 그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가지 말 것을 애원하고 있다.

 

여인의 한과 증오가 서린 작품이다. 로댕이 젊고 아리따운 자신을 버리고 '늙고 사악한' 동거녀 로즈 뵈레를 따라 떠나버렸다고 그리고 있다. 로즈를 남자를 이끄는 늙은 여인으로 표현하고 있다. 늙은 여인은 이빨이 없고 눈이 움푹 들어간 것이 해골 같다.

 

로즈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을 통해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있다. 로댕의 눈은 비어 있다. 로댕과 결별한 후, 끌로델의 입장에서 떠나가는 로댕과 그를 데려가는 로즈를 묘사했다.

 

사람들의 까미유에 대한 첫 주문작인 이 작품은 당시 꽤나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로댕의 심기가 불편해 질까봐 정부가 막게 되는데, 이에 까미유는 비밀리에 두번씩이나 청동작품을 만듬으로써 이를 반박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버린 까미유는 모든 창작활동을 중단하고 칩거생활에 생을 내맡긴다.

 

   

  로댕 석고 1880 로즈 뵈레

 

로댕은 침모 출신의 로즈 뵈레와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1916년, 병세가 악화된 로댕은 세차례에 걸쳐 프랑스 정부에 작품을 기증하고 기증을 받아들인 상하원이 비롱호텔에 로댕미술관 건립을 결의한다.

 

1917년 77세의 로댕은 평생을 함께 한 로즈 뵈레와 뫼동에서 정식결혼을 한다. 로즈뵈레는 보름후인 2월 14일에 사망하며, 이어 11월 17일 로댕이 숨을 거둔다. 로댕은 7일후인 11월 24일 뫼동의 로즈 곁에 묻혔으며 무덤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놓였다. 1919년 8월 4일 로댕미술관이 일반에 공개 되었다.

  

외젠 드뤼에 발자크 풍의 긴 망또를 입은 로댕 1914년 2월

 

"명성을 얻기 전 로댕은 고독했다. 명성을 얻은 후 그는 더욱 더 고독해졌다." 파리로 찾아가 로댕의 비서로 일한 후 <로댕론>을 썼던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평생 고독한 창조자의 길을 걸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는 1905년 9월 15일에서 1906년 5월 12일까지 로댕의 비서로 일했다.

 

 

발자크,옷을 두른 습작 1896-1897 석고 114x41x45.5cm

 

본격적인 근대조각의 시조로 꼽히는 <발자크>상은 이러한 인물의 내면을 묘사한 로댕 조각의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주요한 작품 중 하나이다. 비대한 몸매와 볼록한 배와 같은 특징을 살린 이 작품은 기품있는 문인의 모습이 아닌 대충 만들다 만 것처럼 인물의 표현이 과감히 생략되어 유령과도 같은 모습으로 보여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기묘하고 비상식적인 형태라고 폄하하였으나 전통적 양식을 파괴하여 전혀 새로운 유형에 도전한 작품으로 보인다. 이처럼 로댕은 인체의 특징을 잡아 생명력 넘치게 표현하는 한편, 그 외의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단순화 시켰는데 이것은 나중에 '추상조각'의 시점을 로댕에서 찾을 수 있는 종요한 조형적 특징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오귀스트 로댕의 예술 세계는 '조각에서의 인상주의'로 평가된다. 인상주의가 회화를 사실적인 재현으로부터 해방시켜 현대 회화의 자유로운 세계로 향하게 했듯이, 로댕은 조각을 전통적인 조각의 원리인 기계적인 사실성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를 위해서 로댕은 조각에서 지켜온 몇 가지 원리들을 배제한다. 첫째, 완전한 인체나 흉상을 완성된 형태로 제시하려 한 전통적 조각과 달리 로댕은 신체의 일부분을, 그것도 거친 돌덩어리로 둘러싸인 채로 제시하고 있다.

 

'신의 손'이나 '로댕의 손'처럼 손만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 있고, '신들의 전령, 아이리스'에서처럼 목이 잘려 나간 형태의 인물상들이 완성된 작품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것은 조각 작품이란 인물이나 신체의 모습을 수동적으로 모방하는 것이라기보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는 로댕의 생각을 보여준 것이며, 이는 현대 조각의 자유로운 창조세계를 열어줬다.

 

1840년 11월 12일 태어나 1917년 11월 17일-77세를 일기로 사망.

 

19세기 후반기 미술사의 격변기를 살면서 르네상스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공공기념물의 장식품으로 전락한 조각을 순수 창작 미술의 독립적 분야로 이끌어 낸 로댕의 업적은 그를 근대 조각의 아버지라 블릴만큼 위대한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발자크>에서 보여준, 구상과 추상을  절묘하게 융화시킨 천재적 재능과 예술적 독창성은 근대 조각의 출발점을 이룰만치 위대한 것이었다. 인체를 통해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역동적 작품으로 조각을 순수창작의 영역으로 이끈 그는 조각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위대한 작가로 칭송 받고 있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아무 의미없던 흙이 풍부한 표정을 띄게 되고, 투박한 돌덩어리도 생명력으로 넘쳐 난다. 로댕의 작품은 마치 조물주가 흙으로 인간을 빚어 생명을 불어 넣은 것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기운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로댕, 석고, 세자르 까미유 끌로델의 초상

 

조각가 였던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조각가이기 이전에 로댕의 연인으로서, 로댕의 예술세계에 절대적인 영감을 준 여인이다. 그녀는 1883년 19세의 나이로 43세의 로댕을 만났다.어려서부터 부모로 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로댕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로댕에게는 ‘로즈 뵈레’라는 사실상의 처가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 발전해 갔다. 그녀는 로댕에게는 영감의 원천이자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다. 로댕은 제자들에게 점토작업만 맡긴다는 원칙을 고수했으나 그녀에겐 작품의 일부를 만들도록 했다. 덕분에 여성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조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로댕은 화려한 여성 편력의 소유자였지만, 끌로델의 존재만큼은 절대적이었다. 15년간 지속된 두 예술가의 불같은 사랑은 로댕 예술에서 Eros란 테마를 가능하게 해 주었고 로댕에게 여자를 보는 눈과 여성이 그의 작품에 차지하는 비중을 절대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작품-<영원한 우상> <입맞춤> <웅크린 여인> <나는 아름답다> 등을 통해 사랑에 빠진 로댕이 만들어 낸 격정적이고 섬세한 사랑의 모습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던 것은 끌로델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댕은 끌로델을 사랑하면서도 오랜 반려자인 로즈 뵈레를 떠나지는 못했다.

가족, 사회와 단절된 채 오직 로댕과 조각에 헌신했던 끌로델은 로댕의 곁에서는 결코 혼자 설 수 없음을 깨닫고 1893년 34세의 나이로 당시 58세였던 로댕의 작업실을 떠난다. 그는 조각가로서 독자성을 인정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로댕은 결별 후에도 끌로델의 활동을 돕기 위해 뒤에서 작품 매매를 주선하거나 지인들에게 추천서를 보내는 등 은밀히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끌로델의 분노가 가라앉을 수는 없었다. 급기야 끌로델은 로댕이 자신의 성공을 방해하려 한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결국 끌로델은 사랑에 대한 배신과 점점 망가져 가는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고 우울증과 피해 의식, 편집광적 증상을 보이며 거리를 방황하고 밤마다 로댕의 집을 향해 돌팔매질을 해댄다. 결국 자신의 작품을 부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인 끝에 1913년 정신병원에 수감된 후, 생의 마지막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는 비운의 삶을 살았고 1943년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  문헌참조 : 이주헌의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1> 중 일부 발췌

 

끌로델과 로댕 작품의 상통점은 긴장된 동적 포즈, 견고한 형태 속에 담긴 격렬한 에너지, 육감적인 근육 등이다. 심지어 로댕의 <영원한 우상>이나 <키스>가 끌로델의 <사쿤달라>와 구도가 비슷하고 로댕의 <가라테아>가 끌로델의 <밀단을 진 소녀>와 유사해 로댕이 끌로델로부터 주제를 훔쳐온 게 아니냐는 얘기조차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유사성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을 표절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같은 수원지에서 물을 퍼올렸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오히려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문제는 스캔들을 의식한 로댕이 자신과 끌로델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끌로델의 일부 작품을 공공 전시에 출품하지 못하도록 외압을 가하는 등 대가답지 못한 행동을 함으로써 로델과의 관계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킨 것이다.

 

끌로델과 로댕이 갈라서기 시작한 때는 만난지 7년만인 1890년 무렵이다. 로즈와 자기 사이에서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로댕이 미웠던 로델은 드뷔시와도 교제를 했고 이것은 역으로 로댕의 질투를 자아냈다. 하지만 결국 로댕은 그의 말마따나 "동물적인 충성심을 가진" 로즈를 버릴 수가 없었다.

 

재능과 사랑에 불타올랐던 로델은 이로써 해석증이라는 중증 편집증의 그물 속으로 빠져들어 갔고 마침내 죽음만을 그의 유일한 구원으로 삼게 되었다. 고난과 자기상실의 와중에서 그나마 제정신이 남아있을 때 로델은 그 모든 파멸에도 불구하고 로댕을 잊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절절한 사연에 담아 편지로 띄웠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또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여기 계시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누워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면 모든 것이 변해 버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 저를 속이지 말아 주세요." 

 

인상파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정원을 창밖에 두고 클로델의 작품은 오늘도 그 비원을 품은 채 여전히 로댕의 작품 곁에 서 있다.

  

 

 


 

 

신의 손 - 로댕 특별展 

 

전시장소 : 서울시립 미술관 서소문본관 2~3층

전시일정 : 2010-04-30 ~ 2010-08-22

http://www.rodin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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