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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칼럼

역사신학에 있어서의 의미

by 이덕휴-dhleepaul 2021. 9. 30.

오늘날 우리가 의미”(meaning, sinn)란 단어를 목적이나 목표와 환치시킬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의미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목적이다. 존재하는 만물의 의미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이나 人間에 의해 의욕 되고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 목적에 의존한다.

 

* 의미의 철학에 대한 더 깊은 내용을 위해서

빅터 플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참조하라

https://ko.wikipedia.org/wiki/%EC%A3%BD%EC%9D%8C%EC%9D%98_%EC%88%98%EC%9A%A9%EC%86%8C%EC%97%90%EC%84%9C#:~:text=%E3%80%8A%20%EC%A3%BD%EC%9D%8C%EC%9D%98%20%EC%88%98%EC%9A%A9%EC%86%8C%EC%97%90%EC%84%9C%20%E3%80%8B%20%28%EB%8F%85%EC%9D%BC%EC%96%B4%3A%20%E2%80%A6trotzdem%20Ja%20zum,%EC%B1%85%EC%9D%80%2024%EA%B0%9C%20%EC%96%B8%EC%96%B4%EB%A1%9C%201%EC%96%B5%20%EA%B6%8C%EC%9D%B4%20%ED%8C%94%EB%A6%B0%20%EA%B2%83%EC%9C%BC%EB%A1%9C%20%EC%B6%94%EC%82%B0%EB%90%98%EC%97%88%EB%8B%A4.

 

예를 들어 하나의 의자(椅子)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의자의 단순한 물질적 존재를 넘어서 앉기 위한 것이라는 목적을 지시함으로써 이다. 이러한 목적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만이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의자는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은 사물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초월하여 인간에게 귀속된다. 그런데 역사는 시간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적이 곧 목표가 된다. 일회적 사건뿐만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사건도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하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목적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전체 사건(일정한 출발부터 종말론까지)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 역사의 端初想像하고 終末豫期하면서 역사의 전체과정을 省察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의미를 최종 목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역사가 궁극적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은 역사의 목적, 다시 말하여 역사의 의미가 역사 자체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궁극목표 즉 우리의 기독교 역사신학의 최종 목표인 종말적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의해서만이 존재한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종교적 교리들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 내지는 역사적 해석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기독교 메시지는 인간 역사에 뿌리박고 있었다. 수세기를 두고 기독교인들이 외쳤던 새로운 복음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뿐만 아니라 성경 메시지 전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역사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회의 복음 자체였으며 기독교회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역사는 기독교회의 신앙과 역사의 자체였고 본질이시다.

 

사도 바울을 정점으로 기독교회의 신앙과 역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바울의 신앙과 역사는, 고대 기독교회의 종결점에 있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전승되었는데 그는 기독교회의 바울 신앙과 신학을 수립하여 중세 기독교회에 실현하였고, 또한 개혁 기독교회에도 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바울의 신앙과 역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과 합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의 역사적 전기를 맞이한 후, 오늘의 기독교 신앙과 역사를 定礎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궁극적으로 더 카톨릭적인 신학자인지,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종교개혁의 아버지인지는 신조(Konfession)들간의 옛 싸움일 뿐이다.

 

歷史神學歷史學이 아니다. 神學形式客體로서, 基督敎會信仰歷史事件(Geschichte)적으로 취급한 敎會史基督敎會敎理(Doctrine)의 흐름을 담은 敎理史 그리고 독특한 神學思想(Thought)을 포함하는 神學에 대한 歷史批評學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이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라고 짧게 정의되어 진다면, 구체적으로는 聖書神學, 歷史神學, 組織神學, 實踐神學이 상호관계성 속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대체로 말해서 성서학과 성서신학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함에 있어서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하여 성서분야는 성경본문이 그 당시 상황에서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성경본문의 문헌비평과 그 본문의 역사적 맥락비평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본문이 무엇을 예시하려 하는가를 밝혀야 한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은, 성서학과 성서신학이라고 하는 기초 위에 건축되는 건물에 해당된다. 조직신학 또는 교의신학은 여러 신학적인 주제들을 성서신학에 기초하여 전개하고 체계화시키려고 할 때, 교리사는 이 주제들이 발전해 온 역사를 제시해 주어야 하고, 교회사는 교리사적 맥락을 밝혀 주어야 한다.

 

예컨데 죄론이나 종말론에 대하여 정립코자 할 때, 이에 대한 교리사적 발전을 생각해야 하고 각 시대에 따른 논의에 대하여 교회사적 맥락을 따져야 할 것이다. 실천신학은, 이상과 같은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세워진 건물의 사용 목적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할 것인가에 관한 학문분과이다.

 

모든 학문의 세세한 범위를 한정지어서 규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의 총괄적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그 한계를 露呈 시킬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역사신학에 있어서 그 서술의 방법과 목적, 한계는 저작자의 진술의 의도에 따라 무한한 범주를 가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회의 신앙과 역사를 사건(history)적으로 취급한 敎會史基督敎會敎理(doctrine)의 흐름을 담은 敎理史, 그리고 基督敎 信仰告白歷史(history of confessions)를 기술하는 기독교 사상사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소위 역사신학의 범위라고 할 수 있다.

 

더 넓은 사유를 위해서 본인의 글

https://blog.daum.net/dhleepaul/582?category=417261 을 참조하라

 

기독교 歷史神學 序說

기독교 歷史神學 序說                                                                                         ..

blo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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