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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포스트 모던 철학

by 이덕휴-dhleepaul 2021. 10. 4.

 

 

Ⅰ.근대와 탈근대 - 오성의 협소성과 이성의 다름

Ⅱ. 니체 이후의 철학

Ⅲ. 데리다 (J. Derrida 1930~)

Ⅳ. 가다머의 텍스트와 해석

1) 해석학의 주제와 데리다

2) 형이상학과 사고의 언어성

3) 언어와 대화의 원리

4) 가다머의 텍스트 이해

5)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전환

Ⅴ. 파괴의 방법과 해체의 방법 - 대화냐 해체냐

 

- 김형효 : 데리다의 해체 철학

Exkurs : 현대 철학에서의 분석적 방법과 비분석적 방법

이성의 위기와 이성의 타자 (Die Andere der Vernunft)

Sein und Souveränität

- 하버마스 : 데리다의 철학

 

최근 해석에 관한 문제를 두고 대결하는 현상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전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실증주의자들의 사회연구방법은 후기 경험주의와 대륙철학의 논의에 밀려나는 듯하다.

그래서 요즘은 상호 주관적인 이해. 텍스트 분석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접근방식에 실증주의를 자리를 내주는 것

같다. 이들의 접근방식에서 보여지는 공통분모는 의미(Meaning)라는 개념에 있다.

 

의미에 관한 문제는 오랫동안 해석학이라는 철학의 분야가 그의 전매특허와 같은 연구대상으로 삼아왔다.

주어진 텍스트를 해석할 때 해석은 원래의 산출자가 의도했던 의미에 어느 정도로 가깝게 접근하느냐 하는 문제를

해석학은 중요한 주제로 여겨왔다. 그러나 우리의 해석이 텍스트의 본래적 의미를 복원시키기 보다는 텍스트를

재구성하여 그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닌가는 의심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은 해석학에서의 발상이 철학 전반에 흐르는 계기임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우리의 철학함이 허구

와 편견에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닌가를 스스로 질문하면서 서양철학의 근본적인 기초를 물어보게 된다.

해석학의 전통이 딜타이에게서 시작한다면 해체주의의 전통은 니체의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해석학의 전통과 해체주의의 전통을 공유하고 있는 철학자가 하이데거이다. 오늘의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논쟁은

하이데거가 전통철학과 니체의 기획 사이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현대 해석학의 대가 가다머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기획을 충실하게 수행한 철학자이며 해석학과 해체정신을 잘

담고 있다고 보는데 반하여 해체주의의 대변자인 데리다는 니체의 기획을 하이데거는 잘 수행하지 못하고 니체가

비판하고 있는 전통철학에 하이데거도 빠져있다는 입장이다.

 

1981년 4월 파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두 경향의 주도적인 인물 사이의 서로 상이한 관점의 상호

교환이 있었다. 즉 가다머와 데리다간의 논쟁이었다.

이들의 의견교환은 진지한 대화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고정된 논변을 주고받는 정도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펼쳐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몇 가지 문제에 국한된 교환이었다.

여기서 두드러지게 드러난 입장은 의미에 대한 분해는 대화의 방법인가 아니면 해체의 방법인가를 두고 입장이

갈라지게 되었다. 이 논의의 과정을 여기서 간단히 밝혀보려고 한다.

그전에 먼저 해체주의가 나오게 된 상황을 살펴봄이 바람직할 것이다.

 

Ⅰ. 근대와 탈근대 - 오성의 협소성과 이성의 다름

 

철학에서는 주기적으로 자기 회의나 근원적 위기가 자주 도래하였다. 이제 현대의 문제는 철학 자신의 대상과 그의

수단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근대적인 이성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 문제는 철학의 내적인 영역을 넘어서 폭넓게 번져가고 있다. 즉 인간의 이성, 즉 "계몽주의"에 의해 부각되고

"근대"라는 이름을 획득하게된 특별한 시기의 사고를 문제삼는다.

 

많은 출판물들이 이 근대의 종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근대라는 말의 대립개념으로 부각되고 있는 마술의 언어

가 바로 postmodern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postmodern에 대한 정의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개념과 근대

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대의 특징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대한

진단과 비판(물론 처방까지도)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Habermas는 근대를 "미완의 기획"(unvollendetes Projekt)라고 하는 반면에 Lyotard는 근대의 종말, 또는

근대의 정복(liquidiert), 또는 이미 지나갔다(vorbei)라고 본다.

그래서 postmodern에 대해서 어떤 통일적인 개념형성을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들의 초점은 바로 근대의 이성(Ratio)의 협소성 또는 일방성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이 사변적인 이성 전체에서 오성을 분리시켜내는 것을 문제삼았다면, 호르크하이머는 실체적인 이성을 도구적

이성이라고 명명했는데 오늘의 논의는 이성 문화 자체를 아주 극단적으로 문제삼고 있다.

비판받아야 할 것으로는 이성 문화의 통일화(Vereinheit-lichung)와 절대화 (Verabsolutierung)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원리로부터 결별하자는 것이다 . 결국 이성 전체가 아니라 이성의 다름(Andere)을 말하려는 것

이다.

 

다르다는 것은 인식의 다른 차원과 다른 심판기준이다. 즉 신체, 감성, 삶, 권력, 비합리적인 것이다. 즉 현재화의

다른 수단과 형식이다. 신화, 종교, 예술, 수사학이며, 다른 형식의 대칭들, 즉 통일성 대신에 다수성, 보편성 대신

에 개별성, 타당성 대신에 혼돈, 실재원리 대신에 허구성, 주체의 탈 집중화, 절대적인 것의 역사화, 선험적인 것

의 분할 등이다.

 

근대적인 이성이 배제했거나 자신의 계기로 삼으로고 하지 않았던 다름들이 각기의 입장에 따라서 다양한 빛 아래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감성과 상상이 대립적인 힘으로 요구되고, 승인되지 않는 자신의 규정이라고 폭로되었고

(즉 계몽이 신화임으로 폭로되거나, 과학속에 비합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으로 폭로) 허구적인 요구에 대한 진리가

주장(말하자면 이성이 권력으로)된다.

아무튼 입장에 따라 각기 니체와 하이데거 이후에, 니힐리즘의 완성, 가치절상, 극복이 문제된다.

 

Postmodern 이라는 표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단면의 의식이나 추가적인 의식을 집합시키고 있다.

Post-histoire, Post-empiristische Wissenschaftstheorie, post-industrielle Gesellschaft, post-Formation 등으로 근대

의 전형적인 특징과 근본성질에 대한 추가성의 의식을 표출해 주고 있다.

거기에다 최근 니체르네상스에 힘입고 있는 후기 구조주의를 들 수 있다.

이로써 리꾀르가 제시한바 있는 세 사람의 ?? 대가-맑스, 프로이트, 니체의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여기서 심미적인 것이 새롭게 평가절상되었다. 강력하게 철학적 미학을 개선하거나 현대화시키는 일은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영역에 미학적인 것을 확장시키는 경향으로 진행되었다. 거기서 실천적 삶의 형식과 지식체계, 예술적인

지각방식이나 표현방식들에 대한 한계가 불분명해지게 되었다.

 

요청되고 시대비판적으로 진단되고 있는 심미적인 것의 우세는 그 자체 탈근대의 포괄적인 징후로, 근대 이성에

대한 요구와 진지성과 특성의 유보에 대한 징후로 드러나고 있다.

심미화에의 경향은 한쳔 정착된 Ratio의 다름에 열광하게 하고 - 최근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인종학과 점진적으로

연구가 더해 가는 신화학에 기초되어 있는 것처럼 - 다른 방향에서는 특별히 심미적인 경향이 실재연관을 유보시

키고 놀이와 미적 가상과 허구적인 것의 가격상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향은 거기서 하나의 새로운 사실경험에 일치되고 있는데 이 사실경험은 실재와 하구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실재적인 것의 고통(Agonie)를 확인하게 되고 바로 허구적인 것을 진정한 실재(ens

realissmum)라고 선언한다.

거기서 철저히 세계관계와 자기관계의 긍정적인 형식을 구성하고 그 과정은 자신의 부정적인 해석속에서 동시에

그의 무화과정(Entleerungsprozess)의 최종적인 소멸점을 표식해 준다.

이 과정은 계몽 속에서 그 자체 형이상학비판으로 진입하고, 이 과정이, 신의 죽음 이후에, 사실적인 것 자체를 촉발

시키는 것이다.

이 사실적인 거의 '상실'은 근대 이성이 스스로 규정한 기준과 목표규정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 근대이성의 '종말'이

포스트모던을 다양한 변형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론적인 구상의 입장일 뿐 아니라 시대의식 자체라고 일컬어진다.

 

Ⅱ.니체 이후의 철학

 

 

의심할 여지 없이 현대의 합리성 논쟁은 결국 니체 철학의 르네상스를 경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근본적인 통찰"은 진리의 심미화(Ästhetisierung)와 관련된 가상의 보편화라고 하는데 있다.

니체의 근본 질문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진리에의 본능이 나오게 되는가? 의식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

다. 인간의 등 뒤에서 인간의 사고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본능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이 확실한 인식을 찾으려고 시도한 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식과 인식에

관련된 진리본능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양식일 뿐이다. (nur eine Form des Überlebens in

dieser Welt)라고 말한다.

(Nietzsche. Über Wahrheit und Lüge im auβermoralischen Sinn, <1873> Werke in Bände München 1953 Bd. 3. 309-322).

 

그래서 인간이 사실이라고 보는 것은 가상이고 이것이 기능적으로 진화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사적인

기원에서 해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만약 사고와 그 대상의 관계가 미적인 것이라면 니체가 가상이라고 부르는 바의 우리가 말하는 성찰이라는 것이

전혀 토대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진리란 메타포를 스스로 설정하는 것 이외에 어디서도 진리의 근거(뿌리)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데카르트의 방법적인 회의는 더욱 일반화된 회의로 확장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가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어떤 모형이나 모사가 있는가? 이런 토대없는 심연 - 거기로 사고 자체를 끌어가고 있는데-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늘 은폐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데리다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니체의 테제를 아주 좁게 끌어가서

모든 것이 가상이고 모든 것이 문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주장은 문제가 된다고 하겠다.

데리다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힘입고 있는 발상의 설명적 힘(Erklärungsgewalt)과 결별하고

있다. 문제는 구조주의적인 관찰방식이 구조나 형식에 유사한 것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비-통시적인 이해를 시도

하고 있다.

그러나 푸코는 데리다의 실수를 피하고 있다. 확실히 푸코는 구조주의로부터 멀어져 있다.

다만 그가 전혀 구조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나 개념이나 중요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말에서의 의미이다. (Foucalt, die Ordnung und Dinge, 독일어판 서문 Frankfurt 1971 9-16)

 

푸코의 후기 구조주의에의 길은 그가 전체의 모델 - 개인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진행

하도록 강하게 결정해주는-을 찾기 위해서 정확한 Panorama, 시간의 tableau를 설정하려고 시도한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epistéme"이다.

한 개인(그로서는 전체도식의 설명되어지는 대상이기 때문에)의 합리적 또는 합리적으로 재구성 할 수 있는 행위

의도는 결코 사건의 설명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로써 역사에서의 합리성에 참여하는 부분은 뚜렷하게 제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가 그의 시도가 결국 낡은 역사적 합리성에 대한 대안이나 보완을 문제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튼 후기 구조주의적인 사고는 전통적인 역사가의 사고에 의존하고 있는 한 오히려 寄生的이라고 할 것이다.

발아래 토대의 깊은 곳으로 파뒤집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발이 어디 서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후기 구조주의적인 합리성 발상은 아직도 해석학적이다.

 

Ⅲ.데리다 (J. Derrida 1930-)

 

데리다의 관심영역은 폭넓게 확장되어 있다. 1962년 이후의 그의 저작은 이미 20권을 넘어서고 있다.

문학과 철학, 인류학, 언어학, 정신분석학, 회화 그리고 그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교수방법론 등에 걸쳐

있다. 이들 분야들이 데리다의 저작에서 하나의 끊임없는 대화를 산출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대단한 유혹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이나 문학중 어느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들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문화적인 분위기는 프랑스가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이 유행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이들 속에 작용하고 있는 형이상학을 풀이하려고 했으며 이런 형이상학들은 논리적이거나 논증적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때로는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데리다의 철학적 관심은 모든 체제를 파괴(Dekonstruktion)하는 것에 있었다.

 

이런 작업의 출발점은 문자와 글쓰기, 즉 écriture와의 대결이다. <<그라마토로기>>(De la Grammatologie)에서 그는

서양 사고에 있어서는 écriture가 빠롤(parole)에 예속되어 있었다고 비판한다.

그리스언어는 말해진 것의 모방이라고 이해되었다. 그것이 고정됨으로써 표현을 얻게된 것이다.

데리다의 저작에서 말해지고 있는 로고스중심주의는 그에게서 비판되고 있는 의미(말해진 언어, 빠롤 속에서)의

현재성(Präsenz)이다.

그는 마치 음성이 영혼에 대한 관계, 즉 주체의 깊은 존재와 대화하듯이 말한다.

소쉬르의 Signfiant과 Signifié의 구별에 해당하듯이 데리다는 말과 글쓰기를 구별하는 것이다.

마치 안과 밖을 구별하는 것과 같다.

J. Lacan에서와 같이 말과 글쓰기가 결코 동일한 기제(메카니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의 본질적인 것은, 즉 사고의 본질적인 것은 "차연"의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데리다에게서는 핵심 개념이 되는 것이다.

기록된 언어의 철학자들에겐 어떤 현재도 없다, 역사는 기원이 없다, " 기원의 신화"는, 말하자면 과학적이거나 철학

적인 저작의 산출에 있어서 추적될 만한 것으로서, 바로 데리다에 의해서 파괴의 작업이 이루어질 본질적 표적이

다. 기원이란 하나의 환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차연의 운동"(Bewegungen der Differenz) 안에서 진행된다.

차연은 그 자체로 전혀 변화하지 않는 어떤 기준이라거나 審判定아니기에 그것이 주체와 객체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데리다는 서양철학에 있어서 주체의 자율성이나 이성을 신뢰하는 것은 사태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서양철학의 핵심적인 개념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런 양식적이고 내용적인 철학적인 개념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일에 착수한다. 이런 양식적이고 내용적인 철학적

인 작업방식은 언제나 그랬듯이 우세한 아케데믹한 전통과 갈등을 빚어내게 되었다.

데리다는 거기에 대해서 이미 어떤 인터뷰에서

 

"만약 누구든 대학교식의 글쓰기 방식의 규범과 예절을 범하게 되면 그는 그들의 최종적인 결말을 밝혀낼 수 있고

그들이 보호하고 그들이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사태가 아주

막중한 것임은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미움과 편견에서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미움과 편견에 대해서는 어떤 대학교적인 지배도 그 통제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필연적인 것은 잘못된 방식에서 '형식'이나 암호라고 부르는 바의 것을 고치고 그것을 지금과는 달리 써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는 얼핏보기에 서로 대립되어 보이지만 분석의 추종자들도 인문학의 실증주의자도 누구도 실행

하지 않는, 철학적인 읽기 - 능력과 철학적인 능력의 길에 접근할 수 없게 된다.

다만 우리는 이들이 아카데믹한 영역을 잘 분업해서 아주 합일하는 듯 하지만 이들도 결국은 다 같은 언어로 말하

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데리다는 그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 자신의 문체가 문제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도대체

누가 거기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질문한다.

데리다는 철학적인 탐구를 부각시키는 아주 중요한 구상을 기획하였다.

데리다보다 앞서서 Mallar?e, Joyce, Artaud, Brecht가 전통적인 문학이해에 대한 핵심적인 개념을 거부하였다.

데리다는 이런 노선 위에서 서양 문학의 로고스중심주의와 대결하고 있다. 그는 다만 앞에서 언급한 비평가들보다

더욱 더 멀리 나가고 있다. 즉 데리다에게서는 독자로서의 주체를 글쓰는 사람(저자)과 같은 위상에서 다루고 있다.

그의 전략은 하이데거에서 지원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헤겔에 강화되고 있다. 그의 전략은 발전된 언어학이론과

정신분석학(이것은 주체의 자율성을 완전히 파괴시켜버렸다)을 연결시키고 있다.

 

Ⅳ. 가다머의 텍스트와 해석

 

1) 해석학의 주제와 데리다

 

가다머는 해석 출발점을 신학, 법률학, 역사과학에서 발전된 문제라고 보았다.

일단 그는 딜타이의 전통에 따라서 문자로 고정된 삶의 표현이란 개념에서 출발한다.

이런 삶의 표현에 대한 이해는 언어와 담화라는 기초적인 초대를 가정해야만 할 것이라고 전제한다.

언어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한계라는 특성을 갖는다.

그래서 Sprache erreicht nie das letzte, unaufhebare geheimnis der individuellen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방법의식에 뿌리박혀 있는 철학적인 상황에서 하이데거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종래의 철학이 가지고 있었

던 주객분열의 문제, 해석학적인 근본경험의 토대로서의 이해의 개념을 확보한다.

특히 언어에 기초한 이해는 사유자의 사유자간의대화의 방법을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역사를 새로운 현재에 의해서 부단히 새롭게 쓰려져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실제로 프랑스의

현대철학의 관점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을 플라톤이 수행하였고 헤겔이 변증법을 통해서 수행하였다.

즉 이들은 의미경험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의 언어를 더욱 철저하게 파고들어서 해체하려 하지만 이런 발상은 니체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하이데거가 이를 수행한 바 있다. 데리다는 후기 하이데거도 형이상학의 로고스중심주의를 진정으로 단절

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진리의 본질에 대해서 묻거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묻고 있는 한 그는 아직도 형이상학의

언어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형이상학의 언어는 계속 의미를 현전하고 찾아질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

이다. 그래서 니체가 더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그의 해석 개념이 주어진 의미를 발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의지"에 봉사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단적이다. 말하자면 니체에게서 로고스중심주의가 진정으로 붕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가 전개하려고 하는 하이데거 시도의 계속은 더욱 극단적이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보면 그는 하이

데거 자신의 니체-해석과 니체-비판을 비난한다.

 

거기에 따르면 니체는 존재말각의 극단에 이르지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가치의 개념과 작용의 개념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하이데거가 붙들려 있는 형이상학(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의 의미나 어떤 발견될 수 있는 로고스에 대해서 묻고 있다)의 진정한 극복자로 여긴다.

 

2) 형이상학과 사고의 언어성

 

후기 하이데거 자신도 형이상학의 언어에서 벗어나게 위해서 절반 시적인 특수언어를 발전시켰다.

이 특수 언어를 시도하고 시도함에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것을 보이며 이것을 과제로 삼았는데 가다머 자신은 이

언어의 번역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과제를 위해서 언어를 찾는 것이 어느 정도로 성공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과제를 설정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이해의 과제이다.

 

그러나 가다머는 프랑스 철학자들과의 대결에 있어서 의식하는 것은 하이데거를 번역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자신의

한계에 부딪쳐 있다는 것을 인정한 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정신과학 낭만주의적인 전통과 휴머니즘 유산에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가 니체에서 시작되고 자신이 딜타이에게서 시작했다는 것을 밝힌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에 의존해서 존재망각의 역사라고 부르는 극단적 최종적인 것을 인식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시도는 아주 비판적인 결론이었다. 이것은 니체에 못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넘어서는 것이다.

가다머가 보기에는 하이데거가 형이상학 배후에서 발견했던 존재의 경험은 니체의 극단주의보다 철저성에서 아주

우월한 것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의 니체관은 실제로 다의적이다. 하이데거가 최종적인 극단성에까지 니체를 추구해보니 바로 거기에 형이

상학의 본질(Un-wesen)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가치와 모든 가치의 전도속에서 존재가 스스로 가치개념이 되어버리고 가치는 권력에의 의지에 봉사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존재를 생각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가치사고 속의 형이상학의 해소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더 분명히 말해서

그는 거기서 니체처럼 형이상학의 자기해소의 극단성 속에서 충분함을 찾지 못하면서 형이상학자체의 배후로

돌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되물어 봄(Rückfragen)을 통해서 로고스 개념을 자신의 형이상학의 함의로 지양하지 못

하고 자신의 일방성을 인식하게 되고 결국 "피상성"만 알게 된 것이다

거기에 대한 결정적인 의미는 존재는 자기 자신의 스스로 보여줌(sich-Zeigen)에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드러나고 있는 근원성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셀링이 헤겔의 논리적인 관념론에 대립해서 제시했던 통찰이었다.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다시 제기한 것이다. 거기서 그는 셀링이 결여해 있었던 것에 대해서 자신의 개념적인 능력

으로 진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기에는 이 모든 시도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의미에 대한 모든 해석학적인

경험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말하자면 "Sein, das verstanden werden kann, ist Sprache"라는 사실이다.

해석학의 최종적인 관심은 의미경험(Sinnerfahrung)이다. 이것은 언어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이다.

 

3) 언어와 대화의 원리

 

가다머는 특히 언어의 대화적인 구조를 문제삼고 있다. 언어는 단순히 우리들의 선입관은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회의에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만나게 되는 타자의 단순한 현전이 자신의 붙들려 있음(Befangenheit)과 협소함(Enge)을 노출하고 해소하

도록 도운다.

단순히 자신의 근거와 대립근거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의미의 교환과 합일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계속

된다.

언어(끊임없이 대화를 내포하고 있는)속에서 타자의 가능성이 고려된다는 것이다.

헤겔에게서도 로고스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심리학적인 심층측면을 보인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의식에 몰입하고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것을 지양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바로 그리스적인 존재론에서 로고스중심주의를 찾아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인 대화의 본질은 바로 사고의 근본형식을 드러내어준 것이다. 대화적인 원리는 독일 낭만주의시대에

다시 등장하였다., 타자의 타자성이 가진 불투명성을 담화속에서 서로 매개시키고 있는데 그것이 언어성 속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언어성은 다리이거나 아니면 울타리이다(Brücke oder Schranke), 다리라는 것은 타자성의 흐르는 물위에 놓인 동일

성(Selbigkeit)의 다리이며, 우리들의 자기과제에 제한된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울타리이다.

 

여기에 데리다와 가다머 사이에 논점이 되는 "Text"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가다머와 데리다를 연결시키기도 하고 떼어놓기도 한다. 아무튼 이것이 가다머로 하여금 텍스트와 해석이라

는 글을 쓰게 하는 동기가 된다.

가다머는 현세기의 문제가 문헌학적인 과학의 방법론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바로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텍스트란 문헌 연구의 대상영역을 위한 표제는 아니다. 해석이란 단순히 텍스트에 대한 과학적인 기술

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이 두 개념이 20세기의 논의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언어의 의미가 현대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갈릴레이 이후의 자연에 대한 수학적인 기획 이후에

현대과학이 추구하고 있는 과학적 인식의 이상은 언어적인 세계해석, 즉 삶의 세계를 언어적으로 분절시키는

세계경험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질문 설정과 지식욕구의 출발점이 되지 않는다. 언어경험은 한계경험이다.

언어에 대한 고려는 단순히 논리적인 능력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언어를 언어로서 그리고 세계통로에의 도식화로서

의식하는 것이다.

 

초기 낭만주의자들(홈볼트, 슐레겔, 등)의 언어개념 이후에 두 번째 세대의 언어에 대한 개념(중간세계)이 캇시러

와 하이데거에서 전개된다. 이와 비슷한 경향이 영미권에서는 럿셀과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수행된다.

그 이후에 발전된 기호론과 언어학은 언어가 우리의 세계 통로의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언어는 중간세계이다. 이를 통해서 세계경험의 통로가 열린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기의식의 신화-자신의 필중적인 자기확실성이 근원에 대해 그리고 모든 타당성의 정당화의

근거를 위해서 제기되었던-와 최종적으로 근거지움 일반의 이상은 언어체계의 우위성과 되돌아가 볼 수 없음

(Unhindergehbarkeit)에 직면하여 모든 신뢰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이미 니체를 통해서 자기의식의 자기확실성 속에서 진리를 근거지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우리는 프로이트를 통해서 놀랄만한 과학적인 발견을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이 발견이 니체의 회의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의식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있어서

그가 개념적인 선입관을 통찰하였고 이것이 그리스 로고스철학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현대의 주체개념의 전환을

핵심으로 삼게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계경험의 "언어성"을 우위에 두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의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언어의 중간세계적인 성격이 결국 해석을 핵심개념

으로 두게 만든다. 진정으로 무매개적으로 소여된 것이 있는가? 결국 주어진 모든 것(Gegebene)이 해석의 결과가

아닌가?

해석이란 인간과 세계사이에 완전한 매개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무매개성과

주어진 것(Gegebene)은 결국 무엇을 무엇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비엔나 학파의 관찰명제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자연과학의 영역에서도 인식을 근거지울 때 해석학

적인 귀결을 비껴나가지 못할 것이며 주어진 것에 대한 해석을 대체할 것이 있는가?

 

4) 가다머의 텍스트 이해

 

하이데거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현상학의 의식개념을 비판하였고 -막스 쉘러처럼 - 순수한 지각을 독단적이라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심지어 지각 자체도 해석학적인 Etwas-als-Verstehen라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해석학적인 최종 귀결은 해석이라는 것이 인식의 부가적인 과정이 아니라, In-der-Welt-Sein의 근원적인 구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이 의미의 삽입이고 의미의 발견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은 이미 니체에 의해서 설정된 질문이다. 그 질문은 해석학의 위상과 효력범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적대자들이

반론을 결정하는 질문이라고 할수 있다. 이무튼 중요한 것은 해석의 개념은 핵심개념으로서의 텍스트 개념을 언어

성의 구조에서 구성한다는 것이며, 텍스트의 개념은 해석의 연관 속에서만 그리고 해석에서 그의 고유한 소여성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화적인 이해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논쟁적인 진술을 반복하게 하고 이로서 적절한 구성에 대한

의도를 추적한다면 대화의 과정과 같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프로토콜적인 확정이 점진적으로 축척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거기서는 언제나 선입관 적인 산판단적인 대답을 찾게된다. 그러나 거기서 자신의 가정에 대한 직접적인

확증을 요구할 것을 찾는다.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언제나 질문가능성으로서, 임의성으로서 적어도 해석

가능성의 다양성으로서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휘사(Wotgeschichte)에서 확증할 수 있다.

"Text"란 말은 현대의 언어속으로 두 가지의 연관으로 진입하였다. 하나는 텍스트란 문자의 텍스트이다.

이것은 설교와 교회 교의학에서 해석으로 수행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텍스트는 모든 주석의 기초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모든 주석은 신앙의 진리를 전제로 삼고 있다.

다른 자연어의 사용에 있어서 텍스트란 음악과 관련을 가진다.

 

단어에 대한 음악적인 해석으로서 가곡을 위한 텍스트가 있다. 이 두 개의 텍스트 개념은 고대 후기에서 로마로

넘어가는 시기의 법률가들에게로 소급할 수 있다. 이들의 법조문에 대한 해석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 개념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확산된 것이다.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텍스트 개념은 "자연의 책"(Buch der Natur)이란 말이 있는데 이 책은 신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책이고 탐구자는 이것을 해독하거나 자신의 해석으로 읽혀질 수 있도록 만들고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여기저기에 늘려 있는 소여성(Gegebenheit-이 소여성은 저항없이 우리의 의미기대에 영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에 대한 원초적인 의미추측으로 접근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에 해석학적인

관련이 작용하고 있다??. 텍스트와 해석이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전승된 텍스트는 언제나 항상 해석을 위해서 미리 주어진 것(Vorgegebene)만은 아니란 점이다.

자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해석이 텍스트의 비판적인 산출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해석과 텍스트의 내적인 관계를 밝힌다면 어떤 방법적인 이익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방법적인 이익이란 바로 "텍스트"가 해석학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전환

 

하이데거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에 관련된 이해를 주제를 실존범주로 삼았다. 그리고 이해를 현존재의 존재론의 기초

로 고양시켰는데 그는 해석학적인 차원을 (신체적 지각에 토대를 둔)현상학적인 지향성 연구라는 고차의 차원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적인 토대와 현상학의 탐구방향에 충격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작업이 바로 영미문화권에서의 "linguistic turn"과 거의 같은 시간에 수행된 것이다.

훗설-셀러적인 원초적 현상학 연구의 방향이 생활 세계에로 전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에서는 언어가 전적

으로 은폐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현상학은 깊은 언어 망각성을 반복하였다.

이 언어 망각성이 선험적 관념론이란 는 특징으로 드러난 것이다.

칸트의 선험철학을 비판하였던 헤르더도 바로 언어에 관련된 지적이었지만 그 비판은 성취되지 못했다.

 

헤겔의 변증법과 논리학에서도 언어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헤겔은 언어의

논리적인 본능에 대해서 가끔 시사한 바가 있다.

이 논리적인 본능을 토대로 하여 절대자에 대한 사변적인 先敗는 헤겔 논리학의 천재적인 작업에서 그 과제로 삼

았다. 실제로 칸트 이후 처음으로 로코코적이고 볼품없는 형이상학의 강단언어를 독일어 식으로 전환시킨 것은

헤겔이 수행했던 철학의 언어에 대한 공헌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와 개념 형성적인 활력을 상기하게 만들었고 이 위대한 모범에 가장 가까이 서서 그는

개념의 언어에서 자신의 모국어의 정신을 구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상황은 물론 그에게 있어서 번역 불가능한 한계를 만들어 내었고 이것이 1세기가 지나서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그 장애는 계속 남아 있다.

 

헤겔은 자신의 방식으로 변증법적인 개개가 근대의 주관주의를 극복했다고 보았다.

헤겔의 객관적인 정신의 개념이 바로 이러한 시도를 수행했다는 증거이다. 키엘케골은 헤겔 비판에서 자신의 변증

법의 총체적인 매개를 설정했지만 그 역시 변증법의 매개 속에 귀속하고 말았다.

 

하이데거가 의식철학을 극단적으로 존재론적인 파괴를 시도했지만 훗설의 범위를 벗어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니체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적인 원경험으로 돌아가서 존재경험을 시도하였

다. 한편 그는 동양적인 사고에서 그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양사고가 주어와 술어의 문법적인 구성이 되어있지 않는 점에 착안하였지만 거기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가다머가 시도하고 있는 담화로의 해석학적인 전환은 독일관념론의 변증법, 즉 플라톤적인 변증법으로 돌아가기

보다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대화적인 전환이 전제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거기서는 Logoi와 Anamneisis이다. 이것은 신화에서 창출된 것이지만 최고의 발리적인 것으로 의미된 再認이다.

이것은 오직 개별적인 영혼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정신이 우리를 매개시키는 것, 즉 담화에서 실현된다.

담화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존재의 개념은 현존자의 현존이 아니라 동사로서의 존재 즉 시간에서 이해된다.

그래서 Wesen은 An-Wesen이다. 그래서 그는 나머지의 존재에 대한 대답으로서 "Verwesen"이란 말을 쓴다.

이것은 Anaximandros의 논문에서 나오는 근원적인 그리스적인 시간경험으로서의 "잠시의 시간"(Weile)이다.

그런 의미에서 야스퍼스의 명제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이다"란 말이 오도되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의미를 물을 때 그것은 결코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질문의 방향(Wegrichtung des Fragens)을 지시하는 것이다.

 

Ⅴ. 파괴의 방법과 해체의 방법 - 대화냐 해체냐

 

의미란 방향으로의 의미(Sinn ist Richtunggssinn)라고 했던 것은 시간을 표시하는 단어를 말소하기 위해서 그는

가끔 Sein을 Seyn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실체-존재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썼던 것이다. 파괴의 원리는 이와 같은 것이다.

데리다 역시 하이데거처럼 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영역(여기서는 말과 말의 의미가 나열되어있는 것인데)을 진행

과정 중에 지양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글, 글쓰기(ecriture)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을 성취함으로서 본질

적인 존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선 (Linie), 즉 지시하는 흔적(die zeigende Spur)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로고스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대항하고 있으며 이를 로고스중심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서의 존재 문제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도 하이데거가 최종적인 철저성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가 아직도 로고스중심주의의 노선에 서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존재질문을 새롭게 하고 이를 개선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첨으로 비-형이상적인 의미

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고 가다머는 평가하고 있다.

가다머는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입장을 같은 것으로 본다.

즉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데리다도 말들과 말들의 의미차이들의 다양성에 근거해 있는 신비스런 복합성에 깊히

몰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명제와 진술에서 존재의 열려져 있음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이것은 말

에서 형성된 명제들, 대립들, 모순들의 차원에 앞서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데리다도 그 흔적을 추적하고 있다.

이 흔적은 흔적의 읽기에 있다.

 

하이데거가 그의 사유의 방식을 휠더린의 언어의 시적 힘에게로 맡긴 것은 모험적인 시도였다.

"존재의 목소리"와 같은 은유들은 정서적인 무용성이나 공허함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 같은 방식으로 가다머는

대화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형이상학의 중심주의로 회귀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끊임없이 변증적이고 대화적인 노력들이 세계경험의 놀랍고 비밀스런 무엇을 밝혀준다고 생각

하고 있다. 이것의 지속이 우리를 변형시킬 뿐만 아니라 항상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리고 우리들 서로를 연결

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 굳어진 단어들의 파괴에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대화의 상황에서 자신이 항상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이의 말의 약점을 파헤치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다른 이의 관점을 강화시켜 다른 이가 말했어야 할 것이 드러나게 해야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상호 신뢰와 선의지가 요구된다. 해체는 이와 다른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화를 꾸준한 과정을 통해서 해체가 의도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0여년간 인류는 전체/개체의 갈등구조의 이념적 양극화를 체험하였다. 그런 양극화가 모더니티(근대성)의

가치관이었다.

이런 모더니티의 가치관은 몇 가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확실한 진리와 역사의 최종적 의미를 믿었고,

둘째로 진리의 존재는 모두 인간을 위한다는 휴머니즘으로 정당화되었고,

셋째로 그 휴머니즘은 인산의 주체와 의식을 성역화하여 이것들을 불가양도적인 천부의 권리로 여겼고,

넷째로 그것은 자가류의 생각을 중심으로 여겨 이타성을 박해하였고,

다섯째로 역사와 자연을 지배하는 주인 자리를 그것이 고무하였다.

 

데리다는 이런 모더니티의 가치관을 해체시키려 한다. 그의 철학은 동일성의 대륙과 개인주의의 고도를 해체시키면

서 차이가 대립이 아니고 상호의존으로 엮어지는 그러한 직물짜리를 대안으로 내놓는다.

모더니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그의 철학은 희한하고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모더니티가 추구해 온 구원

은 구원이 아니고 진리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인산들에게 의미추구의 사색을 포기하도록 종용한다. 그래서 그는 老莊과 惠施의 怪說과 만난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怪說도 詭說도 아니다. 단지 발신하는 주파수가 다를 뿐이다

 

 

 

- 김형효 데리다의 해체철학 -

 

Exkurs : 현대철학에서의 분석적 방법과 비분석적 방법

 

인간에 대한 과학은 어떤 방식에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에 대한 과학의 대명사처럼 등장하고 있었던 현대

의 과학분야 중 행동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 행동주의란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에서의 경험적 분석적인 과학 이해에서 나온 말이다.

Behavirorismus란 말은 행동(behavious-behavior)이란 말의 의미에서 나왔다.

다시 말하면 행동에 관한 과학적인 고찰방식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행동주의자들은 모든 인간(동물도 마찬가지로)에게서 오직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관찰하자는 것이다, 개개인이

그 자신 내적으로 무엇을 경험하였건 그것은 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속에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는지 우리는 검증할 수고 없다.

행동주의에 의하면 심리학적 사회심리학적인 연구의 대상은 오직 인간의 외적인 표현으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관찰

할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행동주의자들의 이러한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에로 구성할 따름이다.

행동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오직 거기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서의 증거만을 문제삼

는다. 물론 이런 것들은 심리학적인 증거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속에 들어갈 수는 없지만 먼저 자기 스스로에겐 들어가 있다. 자신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하는 학자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서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주의 과학자들은 자신의 경험과 과학의 대상을 구분시킨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1) 과학적인 인식은 인식의 근원에 들어가는 통로가 있다면 어떤 것이든 모두 동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체험도 그 연구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던지 반성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주관적인 경험,

체험, 감정, 의지, 행위 모두가 문제되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모든 일이 여기에 들어간다.

(Habermas, Theorie und Praxis,s 242-244)

 

오늘날 과학에서는 두 개의 대립된 개념이 서 있다. 이 두 개념은 전혀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1) 실증주의적인 (postivistisch)경향 - 이는 우리들 세계에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 만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비과학적이고 전과학적인 것으로 밀쳐내 버리는 것이다.

 

(2) 넓은 의미에서의 삶의 과학적인(Iebenswissenschaftlich)경향 - 이는 인간의 주관성의 표현들을 과학적인 작업

의 기초로 삼고 있으면서 삶 자체를 과학의 전제로서 또 대상으로서과학적 이성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삶의 철학적인(넓은 의미에서의)분야가 들어가는데 먼저 역사적 해석학적인 역사철학과 정신분석학과

현상학 등이다.

 

이성의 위기와 이성의 타자(Die Andere der Vernunft)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끊임없이 이성의 능력중에 고려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근대이성의 일면성에 대한 논의가 탈근대의 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문제와 함께 주관중심주의의 인식론에 대한 반발이 동시에 제기된다.

이성의 다름 즉 다른 이성이란 발상은 일단 근대이성 밖에서 배회하고 있던 디오니소스의 도래를 예고한 니체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가 그동안 얻는 소득이 무엇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니체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서양의 철학의 시원에로 되돌아 오는 사상가 또는 니힐리즘을 극복할 수

있는 예술가-철학자를 구원자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예술의 구원적 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

그런 사상가는 외관상으로는 심미적이고 내적인 의지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런 인물이 되지 못했다. 물론 후기 하이데거는 時作과 사고를 합일하는 작용으로 보았지만 결국 그는

時作도 시원적인 사고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존재에의 몰입이라는 길을 걷고 말았다.

결국 하이데거가 성취한 것은 니체의 기반 위에서 형이상학비판으로 끝난 것이다.

 

이와 다른 점을 니체에서 찾아낸 사람이 Bataille 이다. 그는 주체가 자기 관련에서부터 벗어나는 길을 심미적 몰입

(Verschmelzung)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창조적이고 기여적인 권력의지의 활동을 Spiel, Tanz Überschwang

und Taumel과 소위 profane Erleuchtung, Souveränität에서 찾는다.

이것을 우리는 심미적인 근본경험이라고 부른다. 초현실주의(Surrealismus)가 그 대답이다.

그렇다고 Bataille는 과학적 진술의 엄밀성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이데거와 바타이의 관점을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Sein und Souveränität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니체가 제기했던 근대의 문제를 극단적인 이성비판에서 수행해보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 대상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가 근대과학의 객관화 해가는 사고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바타이는 자본주의 운영방식의 목적합리

적인 행위와 관료주의적 국가기구의 목적 합리적인 행위에서 출발점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데카르트에서 니체에까지 지배적이었던 의식철학의 존재론적인 근본개념을 연구했다면,

바타이는 현대사회의 산업생산에 지배적인 에토스인 경제성과 효능성에 대한 지상명령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먼저 니체가 제시한 바 있는 시원성으로서 서양철학가 시작전의 태고적인 시간으로 돌아가서 디오니

소스의 발자국을 찾기 위해서 Vorsokratiker나 성스런 희생제의 Erregungszustand를 다시 인식해 볼려고 했다.

존재는 대상적으로 생각되어져온 존재자로부터 은퇴(zurückgezogen)함으로써, 지고성(Souveränität)은 계산함과

유용성의 세계를 배제(ausgeschlossen)함으로써 그 과제를 성취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성적임과 이성적이지 않음(Die Vernunft und Andere)이라는 두 계기는 전적인 타자라는 점에 있다.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에 결코 변증법적인 상호 관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의 다른 측면은 자기 성찰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이성을 자기 의식으로서의 주관철학의 실마리를 따라서 니힐리즘을 기술적 세계의 표현으로

낙인 찍고 이것을 형이상학적인 사고의 운명에 내맡기고 만다.

바타이는 이성을 노동으로서의 실천철학의 실마리를 따라서 니힐리즘을 총체적으로 자립화된 축적강요의 결과

라고 말하고 이것을 과잉생산의 운명으로 내맡기고 만다. 물론 이러한 결론들은 하버마스가 자신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귀결시키기 위한 단초로 삼기 위한 폭력적인 귀결이다. 그의 논의는 다음이 도식에 따른다.

 

 

이렇게 해서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논의는 그 출발점을 잡은 셈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의미가 어디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된다.

 

1) 이성과 다름의 부각으로 일면성의 이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이 있을 수 있다는 것(비판적 계기로서의 합리성

개념의 변혁)

 

2) 이성의 능력을 의식철학 또는 주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며

(의식주관에서의 극복)

 

3) 근대의 이성이 주객으로 분열된 상황을 주객분열의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근원성, 원시성에로의 소금을 가능케 해주었다는 점이다.(주객 이원론의 극복)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과 다름은 칸트이후 언제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진리의 영역인 (Das Land Wahrheit ist

eine Insel) 현상계가 순수 오성의 개념에 의해서 확중될 수 있는 반면에 Noumena의 세계인 이성의 이념은 부단히

오성의 인식을 규제하는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성의 다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칸트의 체계

위에 비합리적인 것, 신비로운 것을 일면적인 이성이 다가가지 못하는 영역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인식할 수 있음

과 사고할 수 있음의 구별) -

다시 말하면 아직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이미 경험한 것을 규제하도록 허용하고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전체

가 부단히 우리의 개별자(우리가 경험한 바의)의 구체적 보편성을 넓혀가도록 용인하는 헤겔적인 사고와 닮았

는가? 이것은 또 다른 형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가?

 

5) 아니면 일면적 이성으로 왜곡되기 전의 상태(Jensetitge)를 재현(?)시켜 이성의 역사와 그 토대를 새롭고 의미

있게 구성하기 위한 발상을 찾기 위해서 인가? 철학 고유의 영역을 다시 미적 경험에 비유하여 예술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인가? 그러한 발상은 우리의 철학함에 적어도 어떤 출발점을 마련해 주는가?

 

이제 우리는 현대의 합리성에 대한 서평을 쓴 안게른 (E. Angehrn)의 서술에서 많은 질문의 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

있다.

 

1)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을 나치와의 관계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수 있는가?

2) 데리다는 어느 정도로 하이데거의 문제제기에 충실하게 그의 이론을 구성하고 있는가?

3) 데리다와 하이데거의 차이?

4) 논리학이 수사학보다 우위를 차지했던 전통철학에 대한 데리다의 입장?

5) 수사학의 위상 (Generalzuständigkeit der Rhetorik)

6) 데리다에 대한 허버마스의 대안 Universalprogmatik?

7) 하버마스는 니체의 재구성으로서의 푸코의 권력이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8) 하버마스가 계몽의 변증법이 가진 계획을 구제하려는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9)의사소통이론적인 발상을 통한 주관주의철학의 해체(Die Ablösung der Sübjektsphilosophie durch den

kommunikationstheoretischen Ansatz)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하버마스의 전략 (Starategie)은 무엇인가? (bis S.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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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철학 (하버마스)

 

데리다는 하이데거처럼 서양철학 전체를 문제삼고 있다. 경제적,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형이상학적으로는 인간

중심적 사고의 종말이라는 극단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러한 종말이 하이데거에 의해서 출발한 존재사고에서 폭로되어야 했다.

그의 주제는 파괴이며 이 파괴는 Deconstruction이다. 결국 그는 존재사의 개념을 변화시키고 여기에 전혀 새로운

채색을 시도하고 있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개념을 붙들고 있으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규범적 내용에서 출발한다.

결국 그것은 존재-신학적인 잔재일 뿐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기도를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구조주의가 그와 다른 길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 역사의 매개(Medium)라고 보았다.

하이데거는 언어적 세계상의 문법이 前존재론적인 존재이해를 주도하는 것으로 보고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특정지우는 것으로 만족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에서 처럼 언어가 특혜받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데 착안하고 이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간다.

소쉬르의 구조주의로 특징 지워진 과학 분위기가 바로 언어학이 형이상학비판의 목적으로 사용될수 있다는 입장을

갖도록 만들어 갔다.

방법적으로는 의식철학과 언어철학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Grammatologie를 분석의 영역으로 잡은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 문법이나 논리학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라마토로기란 말은 이미 겔프(Gelb)의 저서에 나와있는 내용규정에 따르고 있다.

즉 "글자, 알파벧, 모음화, 읽기와 쓰기에 관한 이론"(Lehre von den buchstaben, vom Alphabet, der Syllabierung,

dem Lesen und dem Schreiben. - I.J. Gleb, Von der keilschrift zum Alphabet. grundlagen einer Schrifwissenschaft.

Stuttgart 1958) 이다.

 

결국 이 그라마토로기가 형이상학의 비판을 위한 학적 실마리가 된 것이다.

그라마토로기는 음성적인 것, 즉 소리를 모방한 문자의 뿌리에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형이상학적

사고와 공존적일 뿐만 아니라, 동근원적이다.

그가 보기에는 서양이 위대한 형이상학적, 과학적, 기술적-경제적인 모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음성적인

문자야 말로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그 경계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음성문자의 시원에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그는 모든 문자의 배후를 파고든다. 그리고 그라마토로기는 왜 언어에 본질적인 것이 문자의 모델에 따라 파악되

어야 하고 이야기(Rede)의 모델에 따라서 파악되지 않는지를 설명해야 했다.(Logos에 대한 합리성의 문제 P.194)

 

로고스는 늘 말해진 말(Wort)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에 데리다는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를 음성 중심주의의 형태

속에서 만나 볼려고 한다. 자연이라는 책의 메타포나 세계라는 책은 아주 읽기 힘들다. 그것은 하나님의 암호적인

수기이다. 이것은 야스퍼스의 말처럼 "Die welt ist die Handschrift einer anderen, niemals völlig lesbaren Welt;

allein die Existenz entziffert sie." 근원적인 Text는 상실하고 맡았기 때문에 책(Bücher) 은 복수로 쓰여진다.

원래의 책은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한 자취만 있다. 그것 역시 사라질 것이다.

 

근대성은 Auf der suche nach der Sporen einer Schrift, die nicht mehr, 쟏 das Buch der Natur oder die Heilige Schrift,

die Tatalität eines Sinnzusammenhangs in Aussicht stellt. 상실의 위험을 딛고 일어서서 남아있는 것이 문자기호의

Substrat이다.

쓰여진 텍스트가 부드러운 소리의 수단을 담고 있는 단어(Wort)이다. 암호 해독이 해석에 앞서는 것이다.

때때로 텍스트는 손상되고 단편화되어서 후대의 해석자에겐 내용으로의 통로를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해될 수 없는 텍스트는 메모(Aufzeichnung)로 남거나 기호로 남는다.

자료는 소외된 정신의 자취로만 살아 남아있다.

 

데리다는 Levinas 와 연결하여 기독교적으로 책의 이념에서 멀어져 있어서 서기관처럼 문서에 정통한 것을 우선

하는 유태교 족인 전통이해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

문서학의 계획은 형이상학 비판적인 요청과 함께 종교적인 원천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종교-신학적 사고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이데거주의자로서 그는 최고의 존재자에 대한 일체의 사고를 금지시키고 있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비슷하게 근대성의 상황을 탈취의 현상(Entzungser- scheinung)으로 구성하지만 결코 이성사

의 지평에서나 신적인 계시이 지평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려 한다.

Differenz 에 대한 기획적인 논문에서 밝히듯이 어떤 신학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떤 부정 신학도 추구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는 문자 매개를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문자를 solide Permanenz des Geschriebenne 로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형식은 각기의

텍스트를 그의 발생적 문맥에서 해소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문자는 말해진 저자의 정신과 듣는 이의 호흡과 무관하다. 마치 그것이 말해진 대상의 Präsenz와 무관한 것과

같다. 문자의 매개는 텍스트에 모든 생동적인 문맥에 대립해서 굳어진 자율성을 부여할 뿐이다. 문자는 개별주체와

특정한 상황에의 구체적 연관들을 해소시켜버리고 이와 동시에 Textdp 可讀性(Lesbarkit)을 부여한다.

문자는 한 텍스트가 임의적으로 순환하는 문맥 속에서 늘 다시금 읽혀 질 수 있음을 보장해 준다.

데리다가 놀라는 것은 바로 절대적인 가독성에 대한 표상이다.

모든 가능한 청자의 부재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지적 존재의 사후에도, 문자는 영웅적인 추상성 속에서 반복 가능

한 Lektür의 모든 세계내적, 선험적 가능성을 열어준다.

문자가 말해진 말의 생동적인 연관을 가사적(mortifiziert)으로 만들기 때문에 문자는 그의 의미론적인 내용에 듣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Holocuast에 빠질 수 있는 곳에서 구원해준다.

 

하이데거에겐 스스로 안정화시키는 언어적 매개에 대한 구상이 결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의 구성과 보존을 우선 세계를 향해 기획하고 스스로 근거 지우는 현존재의 생산성에다, 즉 선험적 주체의

산출 능력에 대한 등귀적인 것에다 환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데리다는 이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서서 보여준 우회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구조주의를 등에

업고, 훗설 초기 의식 철학에서 하이데거의 후기 언어 철학으로 향하는 직선로를 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이데거가 니체에 대해서 제기했던 그러나 그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던 이의를 그라마토로

기적으로 낯설게 된 존재사의 이해를 검토하려한다.

간단히 나의 결론을 말하면 데리다는 주관 철학적 패러다임의 강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를 넘어서려는 그의 시도는 모든 진리 타당성을 밝혀내는 진리사건의 선천적 구조를 피해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전환된 근원주의를 극복하지만 그의 괘도에 머물고 있다.

 

유태적 신비주의의 메시아니즘에 대한 회상과 언젠가 구약의 신이 자리잡고 있었던 -떠나버린, 그러나 wohlumschiebene Ort에 대한 회상은 데리다로 하여금 정치적-도덕적 무감각이나, 휄더린과 함께 풍성해진 새로운 이교도문화의

심미적 무취미를 보존하고 있다.

주관철학의 파괴작업을 점진적으로 검토하게 만드는 텍스트는 1967년의 그라마토로기란 제목 아래 훗설의 의미론에

대한 비판이다.

데리다는 그 자신의 기획에 적절한 텍스트를 훗설의 논리연구 II권 중에서 하나의 장 「표현과 의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어적 의사소통의 중간영역에 대립하여 순수의식의 영역을 열정적으로 변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설은 의미를 관념적 본질과 예지성의 측면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Zeichen과 Anzeichen의 구별이다.

Zeichen - 화석→홍수전의 동물 존재, 국기→ 국적, 손수건의 매듭- 수행되지 않은 의도

Anzeichen - 제스추어 →의사소통적인 순수 규약 적인 연관과 결합 의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표현은 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 이것은 소쉬르의 기호론과 관련된다.

결국 데리다는 기호론적인 측면에만 제한되어 있다.

훗설은 기호와 의미를 구별함으로서 의사소통에 사용된 표현을 단순한 감성적 언어적 표현과 구별시키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그 역시 실용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마저도 모노로그로 끝나고 만다. 훗설은 모나드적인 선험적 자아를 지향적 대상을 향한 의식 위에 재

구성하여 했다. 그리고 이것은 심리학적인 체험을 지시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훗설은 한 표현의 의미는 의미지향과 이 지향의 직관적인 성취 속에 근거해 있다.

이것은 심리학적이지 않고 선험적 기초지움의 의미에서이다.

결국 그는 의미플라톤주의(Bedeutungsplatonismus)에 사로잡혀 있다.

의미 그 자체와 단순한 표현된 의미 사이의 구별은 포퍼의 제 3세계와 제 2세계와의 구별을 기억나게 한다.

데리다는 이러한 意味플라톤주의를 비판한다. 데리다는 특히 훗설이 명증성개념을 문제 삼고 있다.

 

- 주 -

 

1) 데리다에게서는 텍스트의 개념이 이와 다르다. 데리다는 책(le livre)와 텍스트(le texte)를 구분한다.

책은 특정한 저자가 자신의 사고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펼쳐 놓은 典範의 龜鑑이다.

그래서 "책의 귀가, 즉 귀감은 유한한 인식에 의하여 반성되기 전에 신적 창조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과 같은

개념인바, 현전과 표상의 완전한 일치, 사물과 사물에 대한 생각과의 일치로서의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

(Derrida, L'Ecrriture et la difference, 51) 데리다는 책에 대한 의미규정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고 있다.

1)책은 영혼의 대화이거나 영혼의 변증법이어야 한다.

2)책은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있어야한다.

3)책에는 저자가 있다. 따라서 책의 진위를 결정하는 가치는 책 안에 있다기 보다는 저자의 자기영혼과의 대화,

자기 진술의 가치에 의하여 결정될 뿐이다.

책은 저자의 영혼 깊은 곳에서 스스로 말하는 진술의 외형적 표지일 뿐이다(Derrida, L'Ecrriture et la difference,

209-214) 그러나 텍스트는 책이나 책속에 담긴 진리처럼 어떤 불변의 恒在體를 가정하지 않는다.

만약 이 우주가 책이라면, 거기에는 권위있는 저자나 스승과 같은 것이 없다. 책에는 의미가 현존하는 고향이지만

텍스트에는 그런 일정한 고향이 없다. "이처럼 텍스트 이전에 아무것도 없고, 또 텍스트 바깥이 없다면 텍스트 안의

작동에서 또 이 텍스트와 저 텍스트와의 상호연계에서 생기는 관계의 다양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 재래의 철학적 진리나 그 진리를 모셔온 책이 자랑하는 이상적 절대 의미는 하나의 환상이나 거짓에 불과

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신성불가침의 고상한 의미도 있을 수 없기에... 텍스트는 내면성이나 자기 동일성으로 꽉

찬 안이 이미 아니다" (김형효 P.23 Derrida, La Dissemi-nation 散種 42)

 

 

 

 

(박순영)

철학박사,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포스트모너니즘과 다원주의 - 노양진

 

 

 

 

【주제분류】언어철학, 철학 방법론
【주 요 어】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의 제약, 로티, 리오타르
【요 약 문】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표방하는 다원주의가 제기하는 허무주의적 우려라는 문제의 본성을 드러내고, 그 제약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안하려는 것이다. 로티의 ‘우연성’ 개념과 리오타르의 ‘디퍼런드’ 개념은 공통적으로 극단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수반하는 다원적 변이를 옹호하고 있으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허무주의에의 우려를 불러온다. 이 제약의 문제는 이들의 급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다원주의에 가려져 있지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제약되지 않은 다원적 분기는 결국 상호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이 그러한 허무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하지만 그러한 주장만으로 그 분기가 어디에서 제약되는지에 관한 입증 책임을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로티와 리오타르는 공통적으로 신체적 층위의 경험에서 드러내는 안정된 수준의 공공성을 간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의 핵심적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

1. 머리말

 

로티(R. Rorty)와 리오타르(J.-F. Lyotard)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인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선도적 철학자들이다. 상이한 지적 전통에 속하는 이들은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대’(modernity)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들이지만, 인식 또는 지식 문제에서 드러내는 이들의 시각은 다분히 실용주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티와 리오타르는 구조주의적 전통을 사유의 출발점이자 표적으로 삼고 있는 데리다(J. Derrida)나 푸코(M. Foucault)와 구별될 수 있다. 특히 이들은 데리다나 푸코와 같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여전히 모종의 일반적 언명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떠한 이론화나 체계화도 근원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포스트구조주의와의 차별성을 드러낸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이러한 급진적 견해는 ‘현대’라는 보편주의적 문화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통해 다원주의적 세계로의 길을 열어 준다. 그러나 이들이 드러내는 급진성은 다수의 기준들이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반마저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소통과 현실적인 경험의 공공성마저도 전적인 우연의 산물로 규정하려고 한다. 이러한 급진적 태도는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를 불러온다. 그것은 과거의 불균형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불균형으로 나아가는 불안정한 철학적 행보다.
리오타르는 ‘디퍼런드’(differend)라는 개념을 통해, 로티는 ‘우연성’(contingency) 논제를 통해 ‘다원주의’의 길로 나아간다.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의 우호적 이름이다. 철학사를 통해 상대주의는 정합적으로 정형화하기 어려운 모호한 입장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입장으로 배척되어 왔지만, 그 내밀한 유혹에는 뿌리깊은 이유가 있다. 우리의 경험에서 관찰되는 상대주의적 현상들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상대주의가 갖는 이러한 이론적 모호성 때문에 스스로를 ‘상대주의자’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철학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 상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는 철학자들은 ‘상대주의적 전환’(Relativistic Turn)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한 지적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상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내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이러한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대안적 이름이 바로 다원주의다. 로티와 리오타르가 모두 이러한 지적 흐름의 선봉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주의가 아닌, 제약된 다원주의를 지지한다”라는 주장만으로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원성을 옹호하려는 철학자들은 그 다원적 분기가 제약되는 지점을 밝혀야 하며, 이 문제에 관한 한 그 입증 책임을 져야 한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다원주의가 자신들의 낙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철학적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불투명한 태도 때문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시각을 빌어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이 다원성의 의미를 제공하는 토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원적 분기를 제약하는 지점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할 것이다. 이 지점은 모두에게 매우 친숙한 지점이지만 로티와 리오타르의 낙관적이고도 급진적인 전략에 의해 가려져 있다.

2. 다원성과 디퍼런드

 

리오타르는 오늘날의 지적 상황을 ‘포스트모던’으로 특징짓는데, 그것은 19세기 말부터 과학, 문학, 예술의 영역에서 지속되는 기준들의 변화가 불러오는 문화적 상황을 가리킨다. 리오타르에게 있어서 포스트모던은 ‘모던’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규정된다. 적어도 17세기 이래로 유럽 사회에서 과학은 모든 서사들과 배타적인 대립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과학은 이러한 서사들을 판정하는 우선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과학은 스스로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담론을 필요로 하게 된다. 리오타르는 “메타 담론에 근거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모종의 거대 서사에 공공연히 호소하는 모든 과학”을 가리켜 ‘현대’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 서사에 대한 불신’(incredulity toward metanarratives)으로 특징짓는다.
메타 담론으로서의 거대 서사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특정한 지식 체계나 이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체계화와 이론화 자체에 대한 급진적 거부다. 이론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기본적으로 이론이 부당하게 개개인의 행위나 선택을 억압하게 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보편적인 것도 인정하지 않고 개별자만을 인정하려는 급진성을 반영한다. 보편적인 것에 대한 리오타르의 거부는 ‘변증법’에 대한 거부로 특징지어진다. 리오타르는 이론화가 다양성의 통합을 겨냥한 하나의 이성적 행위라고 규정하며, 이 이론화의 핵심을 이루는 지식의 보편성이 개인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특징적 징표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개별자들의 차이와 공약 불가능성(incommensura- bility)에 대한 강조가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성이라고 보고 있으며, 서로 다른 언어게임들 사이에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리오타르는 합의가 대화의 특정한 상태일 뿐 결코 그 목표가 아니며, 오히려 그 목표는 ‘배리’(paralogy)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리오타르의 주장은 물론 이성적 합의를 의사소통의 궁극적․이상적 목적으로 설정하는 하버마스(J. Habermas)의 시각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합의(consensus)는 낡고 의심스러운 가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로서의 정의(justice)는 낡은 것도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합의라는 이념이나 실천과 연관되지 않은 정의의 이념이나 실천에 이르러야 한다.
리오타르는 하버마스가 이상적 담화 상황 안에서 가정하는 합의가 “결코 도달될 수 없는 지평”이라고 주장한다. 리오타르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의사소통적 합의란 모두 일과적이며, 어떤 특정한 조건 또는 제약 안에서의 합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제 지식은 보편적 진리의 추구라는 단일한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상이한 언어게임처럼 각각의 기준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따라서 지식은 지속적인 창조와 대화의 연속이 된다.
의사소통에서 합의의 문제는 복잡한 국면을 안고 있다. 아마도 리오타르가 암시하고 있는 의사소통의 모형은 다양한 이해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당사자들의 통합될 수 없는 분기 상태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리오타르의 시각에서 하버마스가 제시하는 의사소통의 모형은 우리의 이상을 말하고 있을 뿐, 결코 실제적인 의사소통 현상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합의를 특정한 상태라고 보는 리오타르의 지적은 충분히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리오타르가 ‘합의’를 배척하는 핵심적 이유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억압과 폭력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경험 세계의 본성을 다원성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합의와 같은 시도가 특정한 목적을 가진 특정한 행위 방식이라고 본다.
리오타르는 다양한 담론의 장르들 사이에 본성적으로 존재하는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디퍼런드’(differend)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디퍼런드’란 논쟁의 당사자들 사이에 상호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판단의 규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갈등 상황이 해결될 수 없는 분쟁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적으로 다른 언어게임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한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다른 편의 정당성의 결여를 뜻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3의 판단이란 사실상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한 판단을 시도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상대방의 희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는 다양한 담론의 장르들 사이에 보편적인 규칙이나 판단이 적용되지 않는 디퍼런드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담론들의 다원적 해방을 선언한다.
레딩스(B. Readings)는 디퍼런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해 ?초록 개미들이 꿈꾸는 곳?(Where Green Ants Dream)이라는 영화를 소개한다. 광산을 개발하려는 백인들과 이에 저항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법정에서 마주서게 된다. 광산을 개발하려는 백인들은 ‘개발권’이나 ‘재산’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원주민들은 ‘땅에 묻힌 신성한 대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재판관은 원주민들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이들이 법적 효력이 있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정한다. 백인들과 원주민들은 동일한 법정에 서 있지만 이들은 사실상 전혀 다른 언어게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법적 분쟁(litigation)이 아니라 디퍼런드다. 이 때 원주민들은 사실상 법적 분쟁의 당사자가 아니라 희생자다. 이 경우 어떤 최종적 판단도 한쪽의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디퍼런드의 본성을 ‘언어게임’의 차이로 설명하려고 한다. 물론 언어게임은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후기 철학에서 온 것이며, 리오타르는 언어게임을 극단화시킴으로써 이를 자신의 중심적 전략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1) 언어게임은 규칙들을 전제하며, 2) 언어게임은 계약의 산물이며, 3) 우리의 모든 언어 행위는 특정한 언어게임 안의 한 수(move)여야 한다고 본다. 그는 언어게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은 유희라는 의미에서 싸우는 것이며, 화행은 논쟁학(agonistics) 일반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언어게임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그 자체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리오타르가 어느 지점에서인가 언어게임들 사이에 극단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리오타르는 상이한 언어게임 사이에 원천적으로 분쟁의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하는 언어게임이라는 생각에는 분명히 리오타르가 강조하려는 특징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극단적으로 상이하게 드러나는 언어게임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차이를 의미화해 주는 공통 지반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게는 다양한 대립적 분쟁을 묶을 수 있는 지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디퍼런드라는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쿤(T. Kuhn)의 ‘패러다임’(paradigm) 이론이 제시하는 ‘공약 불가능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리오타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을 잘못 해석․수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 경험의 구조에 대한 적절한 해명에 이르지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리오타르처럼 언어게임을 디퍼런드에 의해 특징짓게 되면 언어게임은 철저하게 단절되고 고립된 의사소통의 체계들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약 불가능성은 개념적으로 비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 적용 가능성에도 문제가 있다. 데이빗슨(D. Davidson)의 지적처럼 전적인 공약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언어게임―데이빗슨이 ‘개념체계’(conceptual scheme)라고 부르는―은 그 자체로 비정합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적용 가능성이 없는 공허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리오타르의 급진적인 언어게임 개념은 쿤의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데이빗슨의 이러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결정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상이한’ 언어게임들이 반드시 공통 지반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차이들은 그 차이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 지반을 전제한다. 이러한 지반은 차이들의 의미를 산출하는 기본적 조건이다. 공통 지반은 데이빗슨이 지적하는 것처럼 상이한 언어게임들 사이에 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절연된, 그래서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된 언어게임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인지될 수 없다. 즉 그러한 언어게임은 인간의 언어게임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가상의 게임일 뿐이다.
우리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게임은 인간인 우리 자신의 게임의 일종이며, 그러한 생각은 모든 게임들이 공유하는 모종의 공공성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경험의 공공성일 것이며,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forms of life)은 이러한 요소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공공성은 리오타르가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사회적 계약, 또는 로티가 말하는 ‘우연’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우리의 자연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조건은 우리의 문화적 선택의 산물이 아니다. 리오타르는 이러한 공공 지반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다원주의적 차이들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으로 믿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모든 새로운 차이들은 항상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 지반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우리는 언어적 존재이며, 우리가 생성하는 이야기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따라서 그 모든 언어를 벗어난 제3의 관점은 주어지지 않는다. 리오타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항상 의견 안에 있으며, 따라서 상황에 대한 진리 담론은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벗어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메타 언어적 지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조차도 항상 생성중인 이야기들 안에 내재적이다.

리오타르의 이러한 주장은 다양한 담론들을 수렴한다고 자임하는 진리 중심의 과학 담론의 우선성을 거부하고 다양한 담론들의 해방된 공간을 향한 강력한 제안이다. 그래서 리오타르가 ‘이교주의’(paganism)라는 이름으로 묘사하는 우리의 상황은 다양한 담론들의 차이들로 가득 찬 다원적 상황이다.
이러한 이교주의는 예증되지 않으며, 추론되지 않으며, 서술되거나 연역될 수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사회의 이념, 즉 궁극적으로 다양한 화용론들의 집합(실제로 전체화되거나 수량화될 수 없는 집합)의 이념이다. 이러한 집합의 명확한 특징은 이 이교적 세계 안에서 드러나는 상이한 언어게임들이 상호 소통 불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통합적 메타 담론으로 종합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에 적절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며, 내가 ‘이교적’이라고 말할 때는 바로 그것이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

리오타르의 이교적 사회 안에서 다양한 담론들은 끊임없는 교차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차이들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도 우연히 도달하게 된 ‘합의’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특정한 규칙이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우연일 뿐이다.
문화와 경험에 대한 이러한 리오타르의 진단과 처방은 개별자의 독립성과 지위를 복권시키는 데 기여하는 반면, 그만큼 문화와 경험의 공공 지반에 대한 믿음을 와해시킨다. 리오타르가 옹호하려는 다원성은 합의를 유일한 가치로 인정하려는 편향된 철학적 태도를 교정하는 데 매우 강력한 제안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다원성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 지반을 철저히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다원성의 의미 근거를 부정하게 된다. 리오타르가 옹호하는 다원성은 어디에서도 제약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리오타르의 다원성 옹호는 자연스럽게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이라는 우려를 불러온다. 이것은 리오타르가 다른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함께 과거 이론들의 편향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편향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말해 준다.

3. 로티의 자문화중심주의와 우연성의 철학

 

로티는 단일한 진리 개념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진리 대응설의 뿌리를 근세의 인식론적 구도에서 찾고 있으며, 그 구도를 원천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단일한 진리에 대한 담론 자체를 와해시키려고 한다. 인식론적 구도에 대한 이러한 급진적 접근은 다분히 듀이적이며, 로티 또한 스스로 자신의 철학적 기조가 듀이적 ‘실용주의’(pragmatism)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티는 이러한 해체 이후에 어떠한 대안적 이론화나 체계화도 불필요하며, 대신에 철학은 과거의 이론들이 불러온 문제들을 해소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고전적인 실용주의자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즉 철학은 체계 건설의 노력을 포기하고 과거의 이론들이 불러온 문제들을 해소하는 ‘치유적 활동’을 그 소임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급진적 철학관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이 때문에 로티는 다른 모든 포스트모던 철학자들과 함께 대안 부재의 ‘철학적 무책임’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로티가 절대적 진리 개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비판의 핵심적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근세의 인식론이다. 로티는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절대적 진리 개념이 로크­데카르트­칸트 전통이라고 불리는 인식론적 구도에 근거한 진리 대응설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로티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론적 구도를 특징짓는 것은 ‘표상’(representation) 개념이다.

[객관주의 입장에 따르면] 안다는 것은 정신 바깥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표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의 가능성과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신이 그러한 표상작용을 구성하는 방법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철학의 핵심적 관심은 실재를 잘 표상하는 분야와 별로 잘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 그리고 (잘 표상하는 척하고 있지만) 전혀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로 문화를 구분하는 보편적인 표상 이론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로티는 먼저 우리가 세계의 내재적 본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거부한다. 로티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언어 안에서일 뿐이며, 결코 언어를 벗어나 언어를 언어 이외의 어떤 것과 비교할 방식이 없다. 이러한 로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우연성’ 논제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세계 또한 우연적이며, 따라서 우리는 원천적으로 그 둘 사이에 안정적인 합치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티는 이러한 철학 비판을 토대로 새로운 진리 이론의 필요성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에 대한 미련 자체를 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는 하나의 진리 대신에 수많은 진리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그것은 다원주의의 전형적 패턴이다. 단일한 진리 개념의 포기와 진리 담론을 통해 최종적 판정자로서의 위상을 누렸던 철학은 이제 아무런 특권도 없는 ‘다양한 인간의 목소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로티는 전통철학의 꿈을 넘어서 ‘문예문화’(literary culture)로 이행해 가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그것은 모든 특권 없는 담론들의 다원적 공존을 향한 제안이다.
로티는 물론 자신의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자신의 견해가 “모든 믿음은 다른 모든 믿음과 동등하게 정당하다”라는 유형의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로티 자신 또한 허무주의적 상대주의가 “반박되어 마땅할 귀찮은 어떤 견해”일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를 견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따금씩 부화뇌동하는 대학 신입생을 제외하곤, 중요한 논제에 관해 서로 양립 불가능한 두 의견이 대등하게 좋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상대주의자’라고 ‘불리게’ 된 철학자들은, 그와 같은 의견들 가운데에서 선택을 하는 근거들이 예전에 생각되어 왔던 것처럼 [알고리즘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용어의 친숙성이야말로 물리학에서 이론 선택을 위한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거나, 현재의 의회민주주의의 제도와 정합된 것이야말로 사회철학에서의 규준이라는 견해를 견지한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서 상대주의자로 공격받을 수도 있다.
대신에 로티는 자신의 실용주의가 다만 “어떤 사회―즉 우리 사회―가 이런저런 탐구의 영역에서 사용하는 정당화의 낯익은 절차들로부터 독립된 진리나 합리성에 관한 논의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일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로티는 자신의 입장이 상대주의가 아니라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상대주의’라는 말이 실용주의자가 지지하는 자문화중심주의적인 제3의 견해에 해당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왜냐하면 실용주의자는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는 다만 우리가 지식과 의견의 전통적 구분―실재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진리와 유효하게 정당화된 신념들에 대한 옹호적(commendatory) 용어로서의 진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을 포기해야 한다는 순수하게 부정적인 주장만을 하기 때문이다.

로티의 주장의 초점은 자신이 자기 반박적인 상대주의를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요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로티의 논의는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로티가 대처해야 할 핵심적 숙제는 자신이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를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가 어떤 방식으로 허무주의에 빠져들지 않는지를 보이는 일이다. 즉 자신의 견해가 드러내는 상대주의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에 관해 적절한 제약 지점을 제시해야 한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로티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불투명한 태도로 논의의 핵심을 피해 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로티는 리오타르의 급진성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다. 로티는 모든 제도와 규칙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지식인의 순수한 임무라는 리오타르의 주장이 합의나 의사소통의 가능성마저도 손상시키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유감스럽게도 리오타르는 매우 순진한 좌파의 이념―이러한 제도들로부터의 탈주는 이 제도들을 선택했던 사악한 힘들에 의해 ‘이용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는―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좌익주의는 필연적으로 합의와 의사소통을 평가절하한다. 왜냐하면 지식인이 아방가르드 밖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한 그는 ‘타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티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여전히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지만 로티에게 있어서 이러한 의사소통 자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공유된 지반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그는 모든 것을 우연성으로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리오타르의 철학에 대한 로티의 이러한 지적은 자신이 리오타르만큼 급진적이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암시해 주지만 그것이 로티 자신의 견해에 대해 제기되는 상대주의적 우려를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로티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거듭되는 비판은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이성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철학자들에게 비판의 궁극적 지반을 제시하지 않는 로티의 비판적 태도는 비합리주의를 향한 위험한 행보로 간주된다. 특히 하버마스는 로티의 견해가 19세기의 딜타이적 역사주의의 세련된 표현일 뿐이며,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로티의 현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자기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모종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로티는 하버마스의 비판에 대해 이렇게 응답한다.

하버마스와 나의 주된 차이는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그 관념 없이도 잘 살 수 있으며, 충분히 풍부한 합리성의 관념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편적 타당성이라는 관념을 포기한 후에도 플라톤주의에서 좋은 점을 모두 유지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상에서 실재에 이르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 없는 의사소통의 추구로서 하버마스의 합리성에 대한 관념과 내가 취한 에머슨적이고 세속적인 낭만주의가 지닌 유사성들에 비하면 이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로티는 자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또 그렇게 낙인찍히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로티는 이성주의자가 생각하는 ‘이성’ 개념에 근거하지 않은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지만,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또 그 근거가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답을 피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로티와 하버마스의 차이는 도달하려는 지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는 그 방법이 이성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로티는 자신의 방법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다원성을 옹호하려는 철학자들은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출 수 있는지를 제시해야만 한다. 제약되지 않은 다원성은 극도의 분기를 불러올 수 있으며, 그것은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로티의 낙관적 시각에 의해 가려져 있다. 로티뿐만 아니라 하나의 진리를 거부하고 다원적 기준을 인정하려는 철학자들은 모두 이 제약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다원성의 옹호자들은 모두 자신이 서려고 하는 지점이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 지점이 어떻게 제시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의 ‘상대주의적 전환’(Relativistic Turn)이 불러온,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가장 큰 철학적 숙제의 하나다.

4. 다원성의 제약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 주장이 아니라 하더라도 경험의 다원성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며,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이제 철학적 상식의 일부가 되었다. 다원성은 특정한 이론적 가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적인 경험 영역에서 기본적 구조의 일부로 주어진다. 사람들은 동일하게 사고하고 행위하지 않으며, 지향하는 이상들도 다르다. 객관주의는 이러한 차이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차이들을 넘어서거나 제거함으로써 그 배후에 있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철학적 탐구의 주된 소임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제기된 객관주의적 전통에 대한 지속적 비판은 이러한 객관주의적 열망이 이론적 환상이며, 따라서 철학사가 객관주의적 이론들에 의해 억압된 다원성의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이러한 비판적 흐름 안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를 거부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아무런 진리도 없거나 다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런 진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주의적 회의주의일 뿐이며, 그것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다수의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론으로서의 다원주의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원주의는 그 자체로 정합성을 확보하는 데 큰 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어떤 특정한 담론의 특권을 거부함으로써 모든 담론들의 다원적 해방을 지향하지만 아무런 제약도 주어지지 않는 이러한 해방은 ‘무엇이든 된다’라는 허무주의로 귀착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래서 다원주의의 옹호자들의 핵심적 과제는 다원성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이러한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제약될 수 있는지를 해명하는 일이다. 로티도 리오타르도 물론 자신의 다원주의가 허무주의를 향하고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의도하는 다원주의는 허무주의적 다원주의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오늘날 실제적 현상으로서의 다원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철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객관주의적 성향을 가진 철학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실제적 다원성을 어떤 특정한 지반으로 수렴시키려고 시도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사실상 표피적이거나 사소한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반면에 다원주의의 옹호자들은 이러한 다원성이 환원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고려되어야 할 실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논쟁은 화해될 수 없는 평행선을 긋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사실상 오늘날 상대주의자와 반상대주의자는 모두 유사한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즉 이들은 공통적으로 전통적 객관주의와 허무주의적 상대주의 사이의 중간지대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완화된 보편주의자나 완화된 상대주의자나 모두 현실적 다원성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적 분기를 피하려는 의도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성’은 다원주의의 허무주의적 우려에 대응하는 매력 있는 후보로 남아 있다. 하버마스, 퍼트남(H. Putnam), 데이빗슨, 그리고 썰(J. Searle) 등이 모두 이러한 이성주의적 노선에 서 있다. 그러나 이들이 옹호하는 이성은 더 이상 과거의 이성이 아니다. 그것은 ‘후퇴한 이성’이며, 이러한 이성은 다만 허무주의에로의 전락을 막기 위한 이론적 요청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중립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지 않는 체계들간의 불가 공약성은 의미화될 수 없다는 데이빗슨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 아무런 척도도 없는 우연은 ‘정신적 자살’(mental suicide)에 이르게 된다는 퍼트남의 주장도 옳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처럼 그것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 이성으로의 회귀라는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성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들에 의해서 이성이 비로소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성은 순수하게 이론적 구성물이다. 우리는 이성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초월론적 논증’이라고 부른다. 이성주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칸트로부터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성주의자가 되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라면 이성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도 허무주의적 분기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일한 평가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로티는 비교적 최근 매우 암시적인 방식으로 하나의 척도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잔인성’(cruelty)이다. 로티는 자유주의자란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제안함으로써 완전한 무정부주의적 귀결을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로티가 제안하는 잔인성은 과거의 철학자들이 제시했던 것 같은 적극적인 기준도 객관적인 기준도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잔인성이라는 준거점이 특정한 문화, 특정한 시대에 국한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극단적 우연성 논제로부터의 후퇴를 의미한다. 필자는 이것이 로티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적 진전을 의미한다고 본다. 섬세하게 정형화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원주의의 제약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R. Bernstein)의 표현을 빌면 우리가 로티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생각할 때마다 “교묘하게 다른 곳으로 옮겨가며 새로운 구분들을 제시”하던 로티는 이제 숨겨 왔던 자신의 근거지를 소극적인 방식으로나마 드러낸 셈이다.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 견해는 다원주의적 분기의 제약 가능성을 적절히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허무주의라는 우려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성주의에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성의 제약을 제시하는 일은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유형의 다원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우선적 과제다. 체험주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적극적인 출구를 열어 준다. 그것은 다원주의가 불러오는 이론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제기되는 문제의 구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통해 문제의 구도를 바꾸는 일이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철학적 열망에 앞서서 우리의 경험 구조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체화된 경험의 구조에 대한 체험주의적 해명의 핵심은 우리의 경험이 신체적․물리적 층위와 정신적․추상적 층위라는 두 층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경험은 신체적 경험을 근거로 확장되는 동시에 신체적 경험에 의해 강하게 제약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신체화되어(embodied) 있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우리는 신체적 층위로 갈수록 증가하는 공공성을 경험할 수 있으며, 추상적 층위로 갈수록 증가하는 변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경험의 이러한 중층적 구조를 적절히 해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객관주의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도 아닌, 제3의 시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제약된 다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체험주의적 해명은 우리 경험 안에서 다원적 분기의 제약 지점을 비교적 선명하게 제시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체적․물리적 층위의 경험에서 드러나는 현저한 공공성이다. 그러한 공공성은 단지 로티가 말하는 시간과 기회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인간이 공유하는 기본적 조건에 근거한 것이다. 로티의 시각을 고집한다면 이러한 안정적 공공성마저도 ‘필연’이나 ‘절대’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우연’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로티가 배격하려는 필연은 고전적인 필연/우연의 이분법적 구분에 근거한 것이며, 아마도 그러한 이분법적 구분의 유용성은 ‘전략적인 것’ 이상일 수 없다는 점을 로티 자신도 인정할 것이다. 결국 로티의 포괄적인 우연성 논제는 필연이나 절대에 대한 거부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경험 영역 안에서의 의미 있는 차이들을 해명하는 데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경험의 신체적․물리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공공성은 상위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다원적 변이들의 의미 근거인 동시에 제약의 역할을 한다. 이러한 경험적 지반은 로티와 리오타르가 주장하는 정도의 급진적 우연성을 거부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공공성을 드러낼 것이다. 한편 그 지반은 하버마스와 퍼트남이 원하는 정도의 보편성을 보장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반은 대립적 구도에 서 있는 두 진영의 철학자들이 접속될 수 있는 실제적 지점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지점에서 두 진영의 철학자들은 ‘제약된 다원주의’ 아니면 ‘완화된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20세기 후반의 서구 철학자들을 양분해 놓았던 경계선이 ‘객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대립이 구성했던 가상의 경계선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5. 맺는 말

 

로티와 리오타르는 정초주의적 지식 개념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통해 단일한 진리 개념을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단일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다수의 진리를 인정하는 다원주의를 불러온다. 왜냐하면 아무런 진리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퍼트남의 지적처럼 그 자체로 ‘정신적 자살’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로티도 리오타르도 자신들의 다원주의가 이러한 허무주의적 귀결을 향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지만, 여기에는 자신들의 낙관적 선언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난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옹호하는 다원적 분기가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물음의 난해성은 로티와 리오타르의 급진적이면서도 낙관적인 전략에 의해 가려져 있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당면한 문제의 구도를 근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철학적 작업을 완수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의지해야 할 지반이 없이는 공중에 떠 있다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처럼 지반이 없는 비판은 그 자체로 불가능하다. 바꾸어 말하면 이들의 해체는 그 해체의 표적들과 공동의 지반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은 다만 그것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적 지반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버마스가 가정하는 것처럼 ‘이성’이어야 할 이유도 없으며, 또 그것이 이상적인 합의를 보장해 주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는 그 공적 지반을 공유하면서도 여전히 리오타르가 말하는 배리와 다원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들이 우리에게 극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려는 것은 이러한 두 대비적 경험들이 결코 어느 한쪽으로 흡수되어 설명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이라는 점이다.
체험주의는 바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이 공적 지반의 구조에 관해 새로운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 ‘몸의 중심성’이라는 논제를 중심으로 제시되는 체험주의의 해명은 환원 불가능해 보이는 모든 다원적 분기가 바로 신체적 층위의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층위에 의해 강하게 제약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의 급진적 논의 또한 사실상 이러한 지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시에 이 지반에 의해 제약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 지점을 간과함으로써 로티와 리오타르는 자신들이 제안하는 다원주의가 불러오는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위협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핵심적 실마리를 놓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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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ostmodernism and Pluralism: Rorty and Lyotard
Yangjin Noh
This paper aims to show that the postmodern form of pluralism raises a nihilistic threat, and to offer the necessity and possibility of the constraint of it. Rorty's "contingency", as well as Lyotard's "differend" speak for the irreducibility of pluralistic variations along with a radical incommensurability, and thus bring forth a fear of a nihilistic down slide. Veiled by their radical and playful rhetoric, this threat is nothing but a trivial problem. An unconstrained difference may allow a nihilism that denies communication itself. Although Rorty and Lyotard repeatedly claim that they do not seek for such a form of pluralism, that does not get them away from the burden of proof. Purposedly or not, Rorty and Lyotard ignore the stable degree of commonality observed at the physical level of human experience, and, as a result, miss a critical clue to explaining the problem away.

【Key words】Postmodernism, Constraint of Pluralism, Rorty, Lyotard범한철학회논문집
?범한철학?제34집 2004년 가을

 

 

(노 양 진)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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