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의 생애와 저작
1.1 생애 요약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에 아버지 아리스톤과 어머니 페릭티오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테네의 부유한 상류층 집안의 막내아들로서 위로 형 둘(글라우콘, 아데이만토스)과 누이 하나(포토네)가 있었다. 어머니 쪽 집안사람들 중 남자 형제 카르미데스와 사촌 형제 크리티아스는 30인 과두 정권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가 소크라테스를 따르기 시작했던 것은 대략 이십대부터였다.
, 이 사건은당시 28세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플라톤에게 철 학에 전념하는 결정적계기가 된다. 40세 되던 해에 그는 2년간 남부 이탈리아와 시켈리아(시칠리아)를 여행한다. 여행 중 타라스(타렌툼)에서 몇몇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을 만나 교분을 나누고 시라쿠사이를 방문, 거기서 참주 디오니시오스 1
세의 처남인 21살의 디온을 만난다. 디온은 플라톤 철학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플라톤 역시 철인 통치 이념의 구현자로 기대했던 젊은이였다. 아테네로 돌아온 42세 무렵 아테네 근처에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우고 학문 활동과 강의에 주력한다. 60세이던 기원전 367년 플라톤은 디온의 요청으로 두 번째 시라쿠사이를 방문한다.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고, 뒤를 이은 나이 어린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가르쳐 철인 정치를 구현할 좋은 기회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방문은 실패로 끝난다. 디온은 모반 혐의로 추방당하고 플라톤은 우여곡절 끝에 아테네로 돌아오지만 2년을 허비한다. 이후 13년을 아카데미아에서 저술과 학문 활동을 계속하다가 347년 80세로 생을 마감한다.
1.2 생애 해설
플라톤은 기원전 428/7년에 태어나서 348/7년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태어난 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난 지 5년째 되는 해였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해이며 소크라테스의 나이가 42세 되던 해이다. 그는 아테네의 부유한 상류층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형제자매는 위로 형 둘(글라우콘, 아데이만토스)과 누이 하나(포토네)가 있었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일찍 죽었기 때문인지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어머니페릭티오네는 아테네 명문 귀족 출신으로 솔론의 친척이었고, 남편과 사별 후 페리클레스와 친분이 두터웠던 퓌리람페스와 재혼하여 안티폰을
낳게 된다.(안티폰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파르메니데스와 소크라테스 사이에 있었던 대화 내용을 전달해 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녀의 집안 사람들 중 남자 형제 카르미데스와 사촌 형제 크리티아스는 30인 과두 정권의 일원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다. 전쟁 직전 아
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통치 아래 황금기를 구가하던 터였다. 플라톤이 소
크라테스를 따르기 시작했던 것은 대략 이십대부터였던 것 같다. 소크라
테스와의 교분이 플라톤의 삶과 그의 지적 발전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
다. 그의 여러 저작들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70세가
되던 해에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는데, 이 죽음이 플라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 준다. 당시 28세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플라톤에게 이 사
플라톤 ?고르기아스? 3
건은 철학에 전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의 정치 상황은 이미 청년 플라톤으로 하여금 현실 정치로부터 멀
어지게 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직후(기원전 404년) 30인
과두 정권이 보여준 잔인하고 전제적인 공포 정치에 플라톤은 크게 실망
한다. 그래도 과두 정권의 90일 천하를 뒤집고 들어선 민주파 정권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지켜본다. 그러나 더 이상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 결국 존경하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현실에 염증
을 느낀 나머지 청년 플라톤은 정계 진출의 기대를 접는다.
소크라테스 사후 40세까지 플라톤의 행적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이 없
다. 40세 되던 해에 그는 2년간 남부 이탈리아와 시켈리아(시칠리아)를
여행한다. 남부 이탈리아의 타라스(타렌툼)에서 몇몇 피타고라스학파 사
람들을 만나 교분을 나눈다. 정치가이자 장군이며 천문학자인 아르키테스
는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리고 시켈리아의 시라쿠사이를 방문, 거기서 참
주 디오니시오스 1세의 처남인 21살의 디온을 만난다. 자신의 철학에 열
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플라톤 역시 철인 통치의 이념을 구현해 줄
재목으로 기대했던 이 젊은이로 인해 이후 두 번이나 이곳을 다시 찾게
된다. 아테네로 돌아온 42세 무렵 아테네 근처에 아카데미아 학원을 세우
고 학문 활동과 강의에 주력한다.
아카데미아 창건 이후부터 2차와 3차 시켈리아 여행에 나서기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플라톤의 행적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60세이던
기원전 367년 플라톤은 시켈리아로 와 달라는 디온의 요청을 받는다. 디
오니시오스 1세가 죽고, 뒤를 이은 나이 어린 참주 디오니시오스 2세를
가르쳐 철인 정치를 구현할 좋은 기회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방
문은 실패로 끝난다. 디온은 모반 혐의로 추방당하고 플라톤은 귀국길이
막힌다. 우여곡절 끝에 아테네로 돌아오지만 2년을 허비한다. 4년 뒤, 디
오니시오스 2세의 초청에 응하여 내키지 않는 방문을 하지만 역시 성과
없이 끝난다. 이후 13년을 아카데미아에서 저술과 학문 활동을 계속하다
가 347년 80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은 후 아카데미아의 운영은 누
이 포토네의 아들 스페우시포스가 이어받는다.
4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1.3 생애 연보
기원전 427년: 아테네에서 출생.
기원전 407년경: 소크라테스와 만남.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처형.(플라톤의 나이 28세)
기원전 388년: 첫 번째 이탈리아와 시켈리아 여행.
기원전 385년: 아카데미아 설립.
기원전 367년: 두 번째 시켈리아 방문.
기원전 361년: 세 번째 시켈리아 방문.
기원전 347년: 80세의 일기로 사망.
1.4 저작
플라톤의 저작은 위서로 분류되거나 진위 여부가 논란이 되는 것들을 제
외하면 모두 26에서 27편으로 추정된다. 이 저작들은 보통 집필 시기에
따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 초기는 플라톤이 40세, 그러니까 그가 처
음 시켈리아를 방문하기 이전까지 쓴 저작들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에우티프론?, ?카르미데스?, ?라케스?, ?소히피아스?, ?이온?,
?프로타고라스?, ?리시스?, ?대 히피아스?, ?에우티데모스?, ?메넥세노스?,
?고르기아스?, ?국가? 1권이 초기 저작으로 분류된다.
중기는 아카데미아를 세울 무렵부터 60세에 이를 때까지 저술한 것으
로 추정되는 저작들이다. ?메논?, ?크라틸로스?, ?향연? ?파이돈?, ?국가?
2권-10권, ?파이드로스?, ?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이 여기에 속한
다. 후기는 플라톤이 67세의 나이로 세 번째 시켈리아 방문에서 귀환한
이후(360년) 8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347년) 쓴 저술들로서 ?티
마이오스?, ?크리티아스?, ?소피스트?, ?정치가? ?필레보스?, ?법률?이 여
기에 속한다.
플라톤 ?고르기아스? 5
2. ?고르기아스? 해제
2.1 ?고르기아스? 요약
소크라테스는 대중들 앞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는 고르기아스의 기술에
관해서 알고 싶어서 동료인 카이레폰과 함께 그의 강연을 들으러 왔다가,
밖에서 칼리클레스를 먼저 만나고 안으로 들어와 고르기아스와 대화를 나
누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게 수사술이 무엇인지 규정해 줄 것
을 요구하고 고르기아스와의 문답을 통해 여러 번 수정을 거듭하면서 최
종적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 한 것에 관해서 믿음을
갖게 하는 설득의 기술’이라는 규정을 얻어 낸다. 그리고 고르기아스는 수
사술의 힘은 모든 분야에 발휘되며 다른 기술들을 능가하는 한편, 잘못 사
용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의 주장을 두 가지 점
에서 비판을 한다. 수사가가 대중들 앞에서 다른 전문가들보다 더 설득력
이 있다는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지식이 없는 자가 지식이 없는 사람들 앞
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뜻이 된다는 것과, 고르
기아스는 수사가가 정의와 부정의에 관해서 지식을 가진 자라고 했고, 지
식을 가진 자는 정의로운 자이므로 불의를 행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고르기
아스가 수사술을 배운 자는 그것으로 불의를 행할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고르기아스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보고 폴로스가
질문자의 입장에서 대화를 하게 되며, 소크라테스는 수사술을 기술이 아니
라 쾌락만을 공급하는 숙달로 규정하고, 이것을 요리술과 함께 아첨술에
포함시키면서 정치술의 일부를 닮은 모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수사술의
가치를 폄하한다고 생각한 폴로스는 수사가는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참주적 힘을 가진 자라고 주장하고, 소크라테스는 마
음먹은 대로 다 한다고 해서 반드시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
점에서 수사가는 제일 힘이 없는 자라고 반박하며, 불의를 행하는 것은 가
장 나쁜 것이기 때문에 그런 힘은 부러워할 만한 것이 전혀 못된다고 주
장을 편다. 폴로스는 물러서지 않고 실제로 그런 힘을 행사 했던 참주의
6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사례를 들면서 불의를 행하더라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불의를 행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대항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행하는 자가 불의
를 당하는 자보다 더 불쌍한 자라는 것, 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는 자보다 더 불쌍한 자임을 논한 후에, 수사술은 불의
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의를 드러나게 해서 처벌받도록 하는데
사용해야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에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주장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만든 철학을 비
판하는데, 그에 앞서 폴로스가 수치심에 사로잡혀서 불의를 행하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다’는 데 동의해 준 탓에 궁지에 몰리
게 됐음을 지적하고, 자연 본성상 더 수치스럽고 나쁜 것은 불의를 당하는
쪽이라고 하면서 강자가 약자보다 더 많은 몫을 갖는 것이 자연의 정의라
는 주장을 편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어떤 삶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라는 문
제의식 아래 칼리클레스와 논의해 나가는데, 먼저 칼리클레스가 말하는 강
한 자란 분별력과 용기를 수단으로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킬 수 있는 자라
는 것과, 그런 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욕망을
무한정 충족시키는 무절제와 방종의 삶을 미덕으로 여기는 입장에서 있음
을 확인한 후에, 현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절제 있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설득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문답식 논변을 통해서 단순한
욕구의 충족이 곧 행복한 삶일 수는 없다는 것, 쾌락과 좋은 것은 다르다
는 것을 논하고, 쾌락만을 좇는 아첨적 활동에 수사술이 속하는지 여부와
관련해서 칼리클레스가 훌륭한 수사가로 거명하는 이전의 정치가들을 검
토하고, 훌륭한 수사가의 해야 할 일을 언급하며, 그렇게 해서 칼리클레스
가 찬양하는 무절제한 삶을 부정한다. 칼리클레스의 고집스런 거부에 맞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논지를 정리한 후에 칼리클레스로부터 받았던 경고
에 대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상의 도움은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
는 최종적인 대답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 불의를 당하거나 행하지 않기
위한 방책을 살펴보고, 정치에 입문한 칼리클레스에게 참된 정치가가 해야
할 일을 깨우쳐 주며, 칼리클레스가 뛰어난 정치가로 거명한 사람들이 소
크라테스가 제시한 원칙에서 볼 때 사실상 실패한 정치가였음을 규명해
플라톤 ?고르기아스? 7
준다. 그러나 끝내 쾌락을 위해 봉사는 정치 방식을 따르겠노라고 고집하
는 칼리클레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자신이야말로 유일하게 참된 정치가이기
에 칼리클레스가 경고한 불의를 겪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그래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자신은 불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나쁠 것이 없으
며,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돕는 최고의 방책이 되는 것은 혼이
불의로 가득차서 하데스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사후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 후에 칼리
클레스에게 자신이 권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라는 권고로 말을 맺는다.
2.2 ?고르기아스? 해설
2.2.1 내용의 개관
대화편의 내용은 소크라테스와 차례로 대화를 나누는 세 명의 등장인
물에 맞추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의
대화가 있기 전에 대화의 배경을 알려 주는 간단한 도입부가 선행한다.
소크라테스는 동료인 카이레폰과 함께 고르기아스의 강연을 들으려 달려
왔지만 강연이 방금 끝난 뒤였다. 소크라테스가 고르기아스를 찾아온 것
은 대중들 앞에서 설득력 있게 말하는 그의 능력과 그 기술의 정체를 정
확히 알고 싶어서다. 소크라테스가 도착하기 직전에, 그리고 대화가 시작
하기 직전까지 고르기아스는 자신의 그런 능력과 기술을 청중들 앞에서
분명하게 펼쳐 보였었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카이레폰을 대리로 내세워
고르기아스가 누군지를 질문하게 하자 폴로스가 나서며 고르기아스를 대
신해 대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가 가장 훌륭한 기술에
관여하고 있다는 폴로스의 대답이 핵심을 벗어난 다분히 수사술에 경도
된 대답이라고 지적하며 고르기아스가 직접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
에 고르기아스가 응하면서 양자 간의 대화가 시작된다.
8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2.2.1.1 소크라테스와 고르기아스의 대화
소크라테스는 먼저 고르기아스의 기술이 수사술이며 그가 사람들을 훌
륭한 수사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수사술의 선생으로 공언해 왔음을 확인
한 다음, 수사술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고르기아스는 첫 번째로 ①말에 관한 기술
이라고 대답한다. 이 규정이 너무 넓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받고 고르
기아스는 처음의 규정을 전체 활동이나 활동의 결과(효과)가 손이나 몸을
놀려서 하는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②‘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기술’로 한
정한다. 이 규정 역시 수사술을 다른 기술들로부터 구별하기에는 넓다는
비판을 받고, 다시 수사술을 ③‘인간의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좋은
것을 취급하는 기술’로 규정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문가들마다 자
신의 일이 사람들에게 ‘제일 좋은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므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달라고 요구한다. 고르기아스는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며 그것이 가장 좋은 이유는 대중들을 설득함으로써 다
른 전문가들(의사, 체육교사, 사업가 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기 때문이
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해서 ④‘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이라는 어느
정도 분명한 규정이 내려진다. 그러나 이것은 고르기아스가 생각하는 선
에서 분명한 것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소크라테스로서는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수사술이 행하는 설득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내용을 설득하는 것인지를 묻고, 이에 대해 고르기아스는
법정이나 대중 집회에서 군중을 상대로 하는 설득이며, 설득의 내용은 정
의와 부정의에 관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더 나아가서 수사술의 설득이 앎
(지식)을 갖게 하는 설득이 아니라 그저 믿음만을 갖게 하는 설득이라는
데까지 이르러 비로소 소크라테스가 목표했던 수사술에 대한 정의(定義)
는 완성된다. 요컨대 수사술은 ⑤‘대중들을 상대로 정의로운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해서 믿음을 갖게 하는 설득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수사술의 정의를 놓고 소크라테스는 이번에는 수사술의 효용성
에 의문을 제기한다. 수사술의 정의대로라면 수사술은 전문 지식이 필요
플라톤 ?고르기아스? 9
한 각각의 전문 분야에는 쓸모가 없을 터이고, 그렇다면 정의와 부정의에
관련된 영역에만 쓸모가 있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고르기아스는,
수사술의 정의를 내리는 과정에서 내비쳤듯이, 수사술의 힘(설득력)은 공·
사를 막론하고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발휘되기 때문에 다른 기술들을 좌지
우지하며 특히 나라의 큰일들은 모두 수사가의 설득력에 의해 결정되어
왔음을 실례를 들어 보여준다. 그러면서 그처럼 만능의 힘을 가진 수사술
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데 주의를 환기시키고 만약 수사술을 배운 자
가 그것으로 부정한 짓을 한다면 가르쳐 준 선생을 증오하거나 내쫓아서
는 안 되고 배운 자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의 주장이 시종 일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
기 전에,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논박하고 논박당하는 것을 기꺼이 감
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다짐을 받아 둔다. 논의를 재개한 뒤, 소크라테스
는 수사가가 대중들 앞에서 다른 전문가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고르
기아스의 주장은 ‘지식이 없는 자가 지식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지식을
가진 자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라고 논한다. 따라서 수
사술은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필요가 없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
눈에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
한 설득의 방책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고르기아스는 그렇기 때문에 수사가가 다른 전문가들을 능가하기 쉬운
거라고 응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보류하고, 앞선 비판에 이어
서 수사가는 자기가 취급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정의와 부정의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묻는다. 고르기아스는 수사가는 그런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이며,
그런 것들에 대한 지식을 미리 갖지 않고 오는 학생은 자신에게서 그것
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대답은 고르기아스로 하여금
자가당착에 빠지게 만든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정의로운 것에 대한 지
식을 가진 자는 정의로운 자이며 그래서 결코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 그
런데 고르기아스는 조금 전에 수사술을 배운 학생이 그것을 부정하게 사
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으므로 앞뒤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10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2.2.1.2 소크라테스와 폴로스의 대화
고르기아스가 곤경에 빠지자 폴로스가 화를 내며 나선다. 공격적인 태
도를 취하는 폴로스를 소크라테스는 부드러운 말로 회유하며 논의에 끌
어들인다. 폴로스는 묻는 쪽의 역할을 선택하고 소크라테스에게 수사술이
무엇인지를 직접 대답해 보라고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수사술은 기술이
아니라 일종의 숙달(熟達)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기쁨이나 쾌락을
만들어내는 숙달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규정이 요리 활동에도 적용
된다는 점에서 수사술과 요리술을 모두 아첨술의 일부로 간주하며, 좀 더
정확하게는 수사술을 정치술의 일부를 닮은 모상으로 규정한다. 성급한
폴로스는 이 규정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수사술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의 문제로 옮아가려고 하지만, 고르기아스가 끼어들어 소크
라테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육체와 혼을 구별하고 이들 각각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돌보는 네 개
의 기술과 이 기술들 각각에 대응하는 아첨술의 네 부분을 언급한 다음,
수사술은 요리술이 육체와 관련해서 행하는 것과 같은 것을 혼의 영역에
서 행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아첨술은 사람들에게 쾌락만을 공급하여
지식이 아닌 어리석음을 따르게 만들기 때문에 추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수사술을 아첨으로 규정하는 것에 화가 난 폴로스는 수
사가야말로 나라에서 존중받으며 가장 큰 힘을 가진 자가 아니냐고 반문
한다. 수사가의 힘은 참주의 그것처럼 원하는 자는 누구든 죽일 수도 있
고 돈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나라 밖으로 내쫓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자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도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 점을 지적하고, 따라
서 수사가는 오히려 제일 힘이 없는 자라고 대답한다. 폴로스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 쪽의 역할로 돌아와 그 의미를 설명
해 준다. 사람은 항상 좋은 것을 바라고 행위하지만, 좋다고 생각했던 것
이 사실은 좋지 않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가 좋다
고 생각하는 것을 하더라도 반드시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
플라톤 ?고르기아스? 11
므로 수사가가 사형, 추방, 재산 탈취 등 뭐든지 자신의 생각대로 할 수
가 있다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은 나쁜 것이라면 수사가는 결코 큰
힘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의 문답식 논변 결과, 자신의 주장이 무너졌음에도 폴로스
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크라테스가 말로는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힘을 행사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느냐는 식의 반문을 한다. 소크라테스
는 그런 힘을 설사 정의롭게 행사한다 하더라도 부러워할 것은 못 되며
더구나 정의롭지 않게 행사한다면 부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겨
야 한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불의를 행하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며 거기
에 비하면 불의를 당하는 편이 그래도 낫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소크라테
스는 자신의 주장을 행위는 그것이 정의로운 것일 때 유익이 되고, 부정의
한 것이면 해가 된다는 주장으로 일반화하고 참주적 행위가 나쁘다는 것
을 보여주려고 하나 폴로스는 반발하며 이번에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르켈
라오스를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예로 내 놓는다. 행·
불행의 기준을 정의(正義)에 두는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아르켈라오스
가 가장 불쌍한 사람이겠지만 실은 그 자야 말로 행복한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누가 행복한 자이고 누가 불행한 자인가 하는 이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소크라테스는 사례를 제시하는 폴로스의 논박 방식은 많
은 사례들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진실에 이르지는 못한다면서,
자신의 문답식 대화 방법과 대비시킨 다음, 불의를 행하는 자가 행복할 수
있다는 폴로스의 주장에 대해 두 가지로 답한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불의
를 당하는 자보다 불쌍한 자라는 것과, 나아가서 불의를 저지르고도 처벌
을 받지 않는다면 처벌을 받는 자보다 더 불쌍한 자라는 것이다. 폴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사례를 들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호소도 하면서 반박
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논변에 굴복한다. 소크라테스
는 마지막으로 이 논변의 결과를 고르기아스와의 대화에서 제기했던 수사
술의 효용성 문제에 적용해서, 수사술은 불의를 변호하는데 사용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자신이나 자신의 식구 친척 친구들의 불의를 고발하고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해서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하는 데 사용해야 하며,
12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적에게 사용할 경우에는 반대로 대가를 치르지 못하도록 하는 데 사용해
야 한다는 짓궂은 결론을 내리면서 폴로스와의 대화를 끝낸다.
2.2.1.3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의 대화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장을 하는 데
기막혀 한다. 소크라테스는 애인의 심리를 빌려 자신이 한 말은 애인인
철학이 해 준 것이고, 애인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멈추게 하려면 철학을 반박하라고 대답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칼리클
레스는 자신과 평생 부조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칼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긴 연설을 하게 된다.
폴로스가 논의에서 패한 것은 고르기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혀 불의를 행하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도 ‘수치스
럽다’는데 동의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자연)상 수치스러운 것과
관습(법)상 수치스러운 것은 분명히 구별해야만 한다. 본성상 더 수치스
럽고 나쁜 것은 불의를 당하는 쪽이지만,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약자
들이 더 많은 몫을 차지할 능력이 있는 강자로부터 자기들의 이익을 지
키기 위해서 법률이나 습관을 정해 불의를 행하는 쪽이 더 수치스럽고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실로 자연의 법은 강한 자가 약자보다 더 많
은 몫을 갖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정의(正義)이다. 이 자연의 정의는 동
물계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에도 통용되고 있다.
칼리클레스는 자신의 이런 주장이 옳다는 것을 철학을 떠나면 알게 된
다면서 철학의 무익함을 비판한다. 철학은 청년기의 교양으로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어른이 되어서까지 계속하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는 것
이다. 그러면서 만약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계속한다면 언젠가 억울한 죄
로 재판받을 때가 와도 자기 자신을 도울 수가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이런 솔직한 발언을 듣고 자신이 올바른 삶
을 사는 혼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해 볼 시금석을 찾아냈다고 기
뻐하면서 칼리클레스를 상대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문
플라톤 ?고르기아스? 13
제를 논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정의’라는 칼리클레스의 논제를 재확인하고 논박
을 통해서 그것의 의미를 명료화해 나간다. 칼리클레스는 처음에 ‘강자’
내지 ‘훌륭한 자’를 육체적으로 ‘보다 힘이 센 자’로 말했다가 논박당하고,
다음으로 ‘보다 분별 있는 자’로 말하지만 다시 ‘어떤 방면에’ 분별 있는
자인지를 밝히도록 압박당한다. 칼리클레스는 ‘나라의 일에’ 분별 있는 자
라고 대답하고, 나아가 분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완수해 낼 수 있는 ‘용감한 자’임을 첨가한다. 이렇게 해서 ‘강한 자’는
‘나라 일에 분별 있고 용감한 자’를 뜻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소크라테스는 논점을 옮겨 바로 이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에 대해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다스
릴 뿐만 아니라 자신도 다스리는 자인지, 즉 절제와 자제력이 있는 자인
지를 묻는다. 그러나 칼리클레스는 절제 있는 자를 분별 있는 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은 자로 본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소위 정의나 절제
와 같은 덕들은 욕망을 충분히 만족시킬 능력이 없는 대중들이 자신의
무능함을 부끄러워하여 이것을 숨기기 위해 내세우는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자연)에 따른 올바른 삶은 어떤 욕망이든 억제
하지 않고 최대한 충족시키는 데 있고, 용기와 사려는 이를 위한 수단으
로 사용해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덕은 욕망을 무한정 충족시키는 자유와
무절제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솔직하면서도 품위 있는 발언을 칭찬한 다
음에 현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구멍 난
항아리에 비유한 예화를 이용하여 칼리클레스에게 무절제한 삶보다도 절
제 있는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설득하지만 응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다시 문답식 논변을 통한 설득을 시도하며, 먼저 단순한 욕구의 충족이 곧
행복한 삶일 수는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칼리클레스는 인정하지 않고
자기 주장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쾌락과 좋은 것은 같다고 주장한다. 소
크라테스는 다시 쾌락과 좋은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논증하게 된다.
논리의 필연성에 저항할 수 없게 된 칼리클레스는 태도를 바꾸어 쾌락
14 ?철학사상? 별책 제7권 제8호
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는 것이 자명한 것인 양 말한다. 소
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일관성 없는 말 바꾸기에 놀라지만, 쾌락과 좋
은 것의 구별에 칼리클레스가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서, 좋은 쾌락내
지 유용한 쾌락이란 좋은 목적의 성취를 가져오는 쾌락으로서 좋은 것이
목적이고 쾌락이 수단이 되는 쾌락인 반면에, 나쁜 쾌락이란 쾌락이 목적
이고 좋은 것이 수단이 되는 것임을 논한다. 그런 다음 앞에서 언급한 기
술과 숙달(아첨)의 구별을 상기시키면서, 좋고 나쁨에 대한 지식이 따르
는 기술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아첨적인 활동을 구별하고, 아첨적인 활동
의 종류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수사술도 아첨의 일종이 아니냐고 묻는다.
칼리클레스는 수사가들 중에는 아첨적인 수사가들도 있지만, 시민 대중에
게 영합하지 않고 시민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있
다고 대답한다. 그러한 수사가의 예로서 기원전 5세기의 위대한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 키몬, 밀티아데스, 페리클레스를 거명한다. 소크라테스
는 이들이 과연 훌륭한 수사가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기술에 따른
활동의 본질을 언급하고, 이에 준해서 훌륭한 수사가의 활동이란 어떤
것인가를 언급한다. 그것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규율과 질서를 심어주고
정의나 절제의 덕을 갖추게 하며 무절제와 악덕들을 제거하여 혼을 개선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무절제한 삶이 부정되지만 칼리클레스는 동의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혼자 자문자답하기로 하고 지금까지의 논의
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했던 바를 개괄한 후에 칼리클레스로부터 경고
받았던 것, 즉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는 것은 다른 사
람들로부터 당하는 불의에 대해 자신의 몸을 지킬 수가 없는 것이 아닌
가라는 점에 대해 논의한다. 소크라테스는 나쁘고 수치스러운 것은 불의
를 당하는 자가 아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라는, 이미 여러 차례 되풀이 한
자신의 주장에 입각해서 불의를 당하지 않기 위한 방책과 불의를 행하지
않기 위한 방책을 살펴본다. 불의를 당하지 않는 칼리클레스식의 방책은
무소불위의 힘(권력)을 갖는 것인데, 그것은 거꾸로 불의를 행하기 위한
방책이 될 뿐 아니라 불의를 행하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는 방책이기 때
플라톤 ?고르기아스? 15
문에 가장 나쁜 것을 가져다주는 방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며 오래 살기 위한 방책도 별 가치가 없다.
또 정치 초년생인 칼리클레스의 처지에서는 민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갖는 방법도 민중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 민중과 최대한 동화될 것을 요
구하므로 성품을 버리게 만든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정치가의 길을 걸으려는 칼리클레스에게 참된 정
치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시민들을 최대한 훌륭한 자로 만드는 일)
를 깨우쳐주고, 또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는 문제를 살펴
보는 가운데, 칼리클레스가 뛰어난 정치가로 거명한 사람들이 소크라테스
가 제시한 원칙에서 볼 때 사실상 실패한 정치가였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훌륭한 정치 활동으로 평가되는 선박이나 조선소, 성벽 같은 것들을 많이
공급하고 지어주는 따위의 일들은 결국 시민들의 욕구를 많이 충족시켜
주는 일에 불과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치
를 모르는 시민대중들의 근시안적인 행태와 그에 반응하는 정치가와 소
피스트들의 모순된 점을 비판하지만, 칼리클레스는 끝내 좋은 것을 위해
노력하는 정치 방식 아니라 쾌락을 위해 봉사는 정치 방식을 따르겠노라
고 고집하며 소크라테스에게 했던 경고를 다시 환기시킨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닥칠 불의를 이미 예감하고 있으며 자신이야말
로 동시대의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참된 정치가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쾌락을 위해 말하지 않고 최
선의 것을 위해 말했으며, 칼리클레스가 권하는 법정의 기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므로 억울한 죄로 법정에 끌려 나와 위험에 처한다 해도 달
리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곤경에 처하여 자신을 도울
능력이 없다고 해도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나쁜 상태에 있는 것이 아
니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러면서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돕는 가장 강력한 방법인데, 그 까닭은 혼이 불의로 가득차서 하
데스로 가는 것이 가장 큰 악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정의로
운 사람은 사후에 ‘행복한 자들의 섬’으로 옮겨져 깨끗하고 복된 삶을 보
내지만, 부정한 사람은 ‘타르타로스’(나락)에 떨어져 모진 고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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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하는 저 사후의 심판에 대한 신화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의
미하는 바를 보충 설명한 다음 자신이 권하는 삶의 방식이 이 세상에서
건 저 세상에서건 유리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칼리클레스에게도 그 삶의
방식을 따르도록 권고하는 것으로 말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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